•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 프로필 이미지
놀이판들뫼(국악협회하동지부)
카페 가입하기
 
 
 
카페 게시글
검색이 허용된 게시물입니다.
우리 춤사위 스크랩 무형문화재 12호 진주검무
추임새 추천 0 조회 19 07.07.22 15:3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유래
진주 검무는 무형문화재 12호로, 경상남도 진주지방에 전승되는 검무이다. 여성 검무로서 검기무 또는 칼춤이라고도 하며 대궐 안 잔치 때 행하던 춤의 하나이다. 유래는 고대의 갈춤에 대한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신라 사람들이 나라를 위해 죽은 소년을 애도하는 의미에서 춤을 추었다는 설과 논개의 얼을 달래기 위해 진주기생들이 칼춤을 춘데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다.
즉 전자는 『동경잡기 東京雜記 >, 『문헌비고 文獻備考]와 같은 문헌에는 가면을 쓴 채 칼을 들고 춤을 추는 황창랑<黃倡郞>의 검무가 나온다. 그 유래를 보면 신라인 황창랑(黃倡郞)이 백제에 들어가 칼춤을 추다가 백제왕을 죽이고 피살되었는데 신라인들이 이를 슬피 여겨 그 모습을 탈로 본떠 쓰고 그의 춤을 모방하여 춤을 추어 그의 영혼을 위로해 준 데에서 검무가 시작되었다고 한다.되어 있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의하면 황창랑은 관창(官昌)의 와전일 것이라고 하였고 신라 정일장군의 아들 관창이 소년용사로 백제 공격에 참전하여 싸우다가 백제의 계백장군에게 피살된 사실과 관련하여 유래된 것임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삼국사기 三國史記]에는 신라 품일장군의 아들 관창의 고사를 춤으로 엮은 것이라고 추측한다.
삼국사기와 문헌비고ㆍ동경잡기를 종합해보면 이 검무는 처용무와 같은 자리에서 추어졌으며 고려 말까지만 해도 가면무의 일종이었음이 확실하다. 그러나 처용무에 관해서는 <악학궤범(樂學軌範)>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나 검무에 관해서는 일체 언급이 없다. 다만 조선조 말엽 순종 황제의 진연(進宴) 때에 사용하던 정재홀기(呈才笏記-춤의 형태와 종류를 열거한 것)에 검무의 연출하는 순서가 기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궁중정재무로 전승되어 온 것만은 분명하다.

진주검무는 8명의 춤꾼들이 전복을 입고 전립을 쓴 채 서로 맞서서 양손에 갈라 쥔 칼을 휘저으며 추는 춤으로 문헌에는 검기무로 나오고 속칭 칼춤이라 이르기도 한다. 검무는 진연의궤(進宴儀軌)와 같은 궁중연향(宮中宴享)에 관한 여러 문헌에 보이는 것과 같이 궁중과 관아의 연향에서 연행(演行)되었다. 그런데 궁중 검무는 전승이 끊어졌고, 관아에서 연행되던 것 가운데 진주와 통영지방의 검무가 전승되고 있고, 이 가운데 진주검무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한편 검무는 창우(倡優)들에 의하여 민간연향의 판놀음에서 연행되었고, 이런 검무가 아직도 민간검무로 전승되고 있다. 또 무의식(巫儀式)에서 무당이 순박한 칼춤을 추고 있는데, 진주 관아에는 예로부터 연향에 무원(舞員)들이 검무를 추었겠으나 알 수가 없고, 현재 이춤은 칼춤의 고형(古型)의 한 형태인지도 모른다. 현재 전승되는 것은 탈을 쓰지 않으며, 적을 무찌르려는 활달한 동작이 없는 매우 우미하고 유연한 움직임으로 추어지고 있다.
이런 검무는 진주감영 교방청(敎坊廳) 무원으로 있던 최순이(崔順伊 1892년생)가 1906년에 서울 진연도감청(進宴都監廳)에 소집되어 궁중검무를 학습하고 고종황제 앞에서 연행한 뒤 하향하여 전습시킨 것이라 한다. 최순이의 검무를 이은 이윤례, 김자진(金子鎭), 이음전, 강귀례(姜貴禮), 김순녀, 최례분, 성계옥 등이 보유자로 인정되었는데 김자진, 강귀례는 이미 작고하였다.

진주 검무는 장단에 맞추어 조선시대 무사복을 갖춘 8명의 춤꾼이 2줄로 마주보고 서서 양손에 색동천을 끼고 칼을 휘저으며 춘다. 즉 춤꾼들은 전복을 입고 남띠를 띠고 전립을 쓰고 손에 색동 한삼을 끼고 도드리장단에 늘어서서 느릿하고 장중하게 한삼을 뿌리며 시작된다. 그러다가 한삼을 빼어 맨손을 뿌리며 입춤사위로 추다가, 이윽고 한삼을 끼고 무릎을 굽혀서 엎드려 도는 숙인 사위로 어른다. 그런 다음에 앉아서 추는 앉은 사위로 춤을 추다가 땅에 놓았던 칼을 양손에 갈라 쥐고 씩씩한 타령 장단에 칼을 좌우 사위로 휘두르며 허리를 앞으로 엎쳤다가 뒤로 제치며 방석돌이가 돌아가듯 빙빙 도는 연풍대가락 등 장쾌하게 칼춤을 춘다. 장단의 흐름은 도드리⇒느린타령⇒빠른타령⇒느린타령⇒아주 빠른타령 순으로 구성 되어있다. 반주악기로는 피리, 저, 해금, 장구, 북 등이 쓰인다.
진주 검무는 진주감영에 속해 있던 교방청(敎坊廳:일종의 기생학교) 기녀들의 의해 전승되던 춤으로, 다른 고장의 검무에서는 보이지 않는 여러 화사한 춤사위가 보인다. 이는 궁중 기녀들이 낙향하여 관청 기녀들에게 가르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진주검무의 연출형식, 춤가락, 칼 쓰는 법 등 모든 기법이 과거 궁중에서 열던 검무의 원형을 그대로 보유하고 있어 예술적으로 가치가 높다. 그리고 근래까지는 더러 굽은 칼을 썼으나 최근 보유자들이 고제대로 곧은 칼을 쓰고 있다.



진주검무를 전승시킨 이윤례

진주(晋州)는 예로부터 경관이 빼어나고 군사적인 요새로도 이름난 곳이다. 신라 대에는 이곳에 총관을 두었고 고려 때에는 목(牧)을 두었으며 조선조에 와서는 대도호부와 관찰부를 두는 등 조선시대 말까지 감영의 소재지였으며 1925년까지만 해도 경상남도 도청소재지였다. 따라서 이곳은 삼국시대 이래 서부경남의 중심지였다. 게다가 이 지방은 예로부터 풍류를 중히 여겨 수준 높은 가무가 발달하였으며 오늘날 전통가무의 모태가 되고 있다.
진주의 검무와 농악은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로, 한량무는 도지정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그 밖에도 살풀이, 교방굿거리, 포구락, 승무 등이 이 지방의 대표적인 춤으로 전해지고 있다.

김천흥옹은 1952년 진주예술제에 갔다가 검무를 보고 궁중계통의 검무가 진주에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그 내력을 조사하였다. 검무단의 최순이 본명 완자(完子, 1892년생)는 전주의 교방에서 9세 때부터 검무를 배웠고 14세(1906년) 때 서울에 설치된 진연도감청(進宴都監廳)에 소집되어 장악원에서 궁중검무를 학습한 후 고종(高宗)황제 앞에 나가 춤을 추었다는 확증을 얻고 더욱이 장악원에 재직한 선생들의 이름까지 기억하고 있는 것을 듣고 이 진주검무야말로 오랜 역사와 원형을 지녀온 궁중에서 추던 검무라는 심증을 굳혔다.

진주목에는 1867년 교방청(敎坊廳)이 설치되었다. 당시의 진주 목사 정현석은 자신이 교방가요(敎坊歌謠)라는 책을 펴낼 정도로 여악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로 인하여 진주교방에서는 궁중정재 등 관기들이 추던 춤이 많이 전승되고 있었다.
궁중무희로 있던 최순이는 낙향하여 다시 진주교방으로 돌아와 후배를 양성하였으며 한일합방으로 진주감영이 폐지되고 교방마저 해산되자 예기조합(藝妓組合)ㆍ권번(券番)에서 다시 후배들을 가르쳤다. 그로부터 진주검무와 한량무ㆍ가야금ㆍ장고를 전수 받은 사람은 이윤례ㆍ김자진ㆍ강귀례 등이다. 이중 김자진과 강귀례는 타계하였고 이윤례여사만이 생존해 있다.

이윤례여사는 1903년 5월 7일 진주의 촉석루 아랫마을에서 진주관아 관노의 딸로 태어났다. 어려운 형편에서도 어머니의 지극한 보살핌으로 9세에 진주 보통학교(3년제)에 들어가 12세에 졸업했다. 당시 대다수의 사람이 그러했듯이 집안이 가난했던 터라 학교를 졸업하자 가계를 돕기 위하여 진주보통학교에서 누에치는 일을 1년 남짓 도왔으며 무명 짜는 직조공장에서도 1년 남짓 일을 하였다.
그러다가 그가 15세 되던 해에 권번의 전신인 예기조합에 들어갔다. 당시 조합의 학습 내용은 창ㆍ가야금ㆍ검무ㆍ굿걸이ㆍ살풀이ㆍ승무ㆍ배따라기ㆍ포구락 등 폭넓게 이루어졌다고 한다.
하루의 교육과정은 오전에는 판소리와 시조ㆍ단가 등 창을 하고 오후에는 가야금ㆍ거문고ㆍ장고와 춤을 배우도록 되어 있는데 춤 중에서는 검무가 필수과목으로 가장 많이 행해졌다고 한다. 오전의 창은 송만갑이 지도하고 오후의 춤과 가야금 등은 최순이가 맡아서 가르쳤다.

진주검무의 화사한 춤사위는 소녀 이윤례에게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었다. 2년간의 학습을 마친 그는 옥희라는 예명과 남전이라는 호로 지방유지의 환갑잔치나 관청의 행사에 불려 다녔다. 당시의 그는 춤추는 모습이나 용모, 행실이 얌전하고 곱기로 이름이 나 있어 진주예기조합의 기녀 중 가장 많이 불려 다닐 만큼 인기가 대단했다고 한다. 미수(米壽)를 맞은 지금에도 곱살한 것으로 보아 그 때의 인기는 짐작이 감직도 하다.

3년 후에 일본 요정이 많이 생기면서 조합의 명칭이 권번으로 바뀌자 이씨도 계속 이곳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이 때 그는 진주에서 활동하던 변호사 현근석을 만나 머리를 얹게 되었다. 딸 하나 아들 하나를 키우기 위해서 권번을 그만 두었다. 그러나 아들이 네 살에 경기를 일으켜 죽고 남편마저 별세하자 다시 권번에 들어갔다.
생계를 위해 권번에 다시 들어가기는 했으나 궁중정재인 검무의 맥을 이어가겠다는 신념만은 어느 누구 못지않게 대단했다고 힘주어 말한다. 그러나 나이가 들자 권번에서의 일을 그만두지 않을 수 없었다. 권번에서 나온 그는 외동딸을 키우기 위해 부잣집 생일이나 환갑 등 잔치모임에 불려 다니며 가무를 팔아 생계를 꾸려 나갔다.
“기생이란 가무를 팔아먹고 사는 직업인데, 옛날에는 왜 그리 나쁘게만 보았는지…”
이씨는 기생을 천시했던 당시의 의식 때문에 슬프고 외롭게만 살아왔다. 일가친척은 물론 이웃에서까지도 소외당하고 살아왔으며 사위마저도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고 씁쓸해 한다. 그는 외롭고 슬픈 삶을 달래기 위해 더욱 검무에 열중했었다고 한다.
6ㆍ25 사변 때 하동으로 피난을 갔다 돌아오니 집이 불타버려 오두막집 한 채를 사서 겨우 기거하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이씨에게 검무를 계속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사변 후에 진주에 국악원이 설립되었는데 이곳에서 이씨를 검무의 사범으로 초빙했던 것이다.
이 때 그는 사라져가는 진주검무를 재건하기 위하여 춤꾼을 모집하고 춤을 가르치는데 크게 공헌하였으며 그 공으로 매년 음력 6월 29일에 개최되는 논개의 추모제에 헌무(獻舞)되고 각종 문화행사에 출연하게 되었으며 김천흥 옹의 고증으로 1967년 진주검무가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되기에 이르렀으며 그 자신이 검무와 장고의 예능보유자(인간문화재)로 인정되었다.
“인간문화재가 나를 살렸지. 기생 딸이라고 손가락질 받던 딸에게도 빚을 갚은 셈이고…”
예능보유자로 지정된 다음해인 68년부터는 진주성 내에 있는 진주문화원에서 매년 30명씩의 전수생을 길러 내는 등 후진양성에 심혈을 기울여 왔다. 진주검무의 인간문화재인 이음전ㆍ김순녀ㆍ성계옥씨 그리고 인간문화재 후보인 정필순씨 등은 모두 이여사의 전수를 받은 사람들이다.
그에게 검무를 배워 인간문화재가 된 성계옥 주검무보전회대표는, 그의 공로를 높이 평가했다.
“이선생님이 아니었더라면 오늘날의 진주검무가 없었을 겁니다.”
정필순 씨도 다음과 같이 안타까워했다.
“선생님이 워낙 연로하셔서 그 춤사위는 볼 수 없지만, 작년까지만 해도 우리가 춤출 때 장고 장단을 쳐주셨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어렵게 되었다.”고
인간문화재로 지정되기 전에 3년간 논개사당의 사당지기를 자청했던 이(李)여사는 지금 여생을 편안히 보낼 수 있는 것은 오직 의암(義岩-논개의 호칭)의 덕이라고 감사해 하고 있다.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