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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현의 현대시 읽기
시와 역설‧2
-고차원적 세계의 역설과 시적 주체의 확장
박대현(문학평론가)
1. 시와 과학의 역설
역설은 para(넘어서는)과 doxa(의견)의 합성어다. 모순적인 진술을 통해 상식적인 차원을 넘어서는 진리를 드러내는 수사修辭방식에 해당한다. 프린스턴 시학 사전에 따르면, 역설은 고대 수사학자들에 의해 표준적인 수사 중 하나로 인정되었고 그리스 로마(Graeco-Roman)시대 쇠퇴기에 찬사, 논쟁, 설득 등을 위해 대중적으로 사용되었던 수사였다. 그러나 역설은 시적 진실을 드러내는 수사 방식이 아니라 주로 웅변술과 설득술의 기술로서 다루어졌고 중세 유럽에서도 유머와 아이러니를 가르치기 위한 논증(argument)방식의 하나로 인식되었다. 역설이 시적 수사에서 중심을 차지하게 된 것은 17세기의 바로크 시대 이후부터다. 존 던(John Donne)에서 존 드라이든(J.Dryden), 알렉산더 포프(A.Pope), 윌리엄 헤즐릿(W.Hazlitt)에 이르기까지 역설의 중요성이 지속적으로 강조되어왔다. 특히 19세기 프리드리히 슐레겔(F.Schlegel)과 토마스 드 퀸시(T.De Quincey)는 역설을 세계의 심오한 본질을 반영하는 시의 필수 요소로 보기까지 했다. 역설은 무엇보다 클리언스 브룩스(C.Brooks)에 의해 와서 그 의미가 가장 면밀히 검토된다.
클리언스 브룩스의 잘 빚어진 항아리의 제1장 제목이 ‘역설의 언어’다. 그는 시의 본질을 역설에서 찾고 있으며, 시인의 진리는 역설을 통해서만 접근 가능하다고 단언한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이 주장을 하는 과정에서 시인과 과학자의 언어를 구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의 주장을 다시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과학자의 진리는 역설의 흔적이 모조리 제거된 언어를 요구하지만, 시인이 말하는 진리는 분명히 역설을 통해서만 접근될 수 있다.”그러나 이 책이 출간된 1947년 당시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브룩스의 말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린 것이다. 20세기에 접어들면 괴델의 역설이 보여주듯 이론물리학의 근간인 수학의 언어조차 모순성을 본질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 과학에서 첨단의 진리는 역설의 얼굴을 하고 있다. 물론 이는 진리 자체가 역설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드러낼 수 있는 언어의 부재로 인해 진리가 역설의 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음을 뜻한다. 역설은 진리에의 불가능한 접근 과정에서 인간의 기호 및 논리 체계의 파열상태를 순간적으로 드러낸다. 다시 말해, 역설은 “논리 자체에 따라 모순적 결론이 이끌어짐으로써 초래되는 이성의 붕괴 현상”인 것이다. 그렇다면 역설은 시인뿐만 아니라 과학자에게도 세계의 진리를 드러내는 통로로서의 ‘근본적인 균열’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 시론이 제시하고 있는 역설의 분류 체계는 필립 휠라이트(P.Wheelwright)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표층적 역설(surface paradox)과 심층적 역설(depth paradox)이 그것이다. 표층적 역설은 시 전체가 아닌 일부 시행의 정서나 의미에 관여하는 역설이다. 심층적 역설은 시 전체에 걸쳐 의미론적 작용이 일어나는 역설로서 존재론적 역설(ontological paradox)과 시적 역설(poetic paradox)로 나뉜다. 휠라이트는 역설을 “외견상 모순된 것”(seeming contradiction)으로 역설을 정의하지만 그 이면에 진리를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한다.이러한 역설의 정의는 표층적 역설에 보다 잘 적용된다. “찬란한 슬픔의 봄”(김영랑,「모란이 피기까지는」), “소리 없는 아우성”(유치환, 「깃발」), “외롭고 황홀한 심사”(정지용,「유리창」) 등에서 알 수 있듯이 모순적 진술을 통해 정서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거나 기존의 언어 코드로 표현될 수 없는 정동(affect)을 구현해 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문제는 존재론적 역설과 시적 역설을 포괄하는 심층적 역설이다. 심층적 역설은 표층적 역설과 달리 모순성이 간접적이고 잘 드러나지 않으며, 세계의 비의秘義를 드러내는 “예언자의 목소리 혹은 시인의 목소리”를 지닌다. 존재론적 역설은 “신비롭고 다면적”인 삶의 “초월적 진리”를 표현하는 데 사용되어 주로 종교적인 색채를 지닌 역설이고, 시적 역설은 “시에서 가장 특징적인 역설 유형”으로 이미지에 내재된 암시가 시의 직접적인 진술, 즉 시의 의도된 의미의 일부를 조롱하거나 장난스럽게 뭉갤 때 발생하는 역설이다.박현수의 설명을 추가하자면, 시적 역설은 시의 구조 전체에 걸쳐 나타나는 것으로 진술 자체의 앞뒤 모순이 아니라 진술의 내적 의미와 표면적 의미 사이에 발생하는 구조적 모순에 의한 것이다.
이상의 설명은 현대 시론에서 널리 채택되고 있는데, 역설에 대한 한국 시론의 분류 체계 또한 일반적으로 필립 휠라이트의 이론을 따르고 있다. 역설은 설득과 논쟁을 위한 고대 수사학의 방법으로 출발하여 오늘날에 이르러 논리적 언어로 설명될 수 없는 삶의 진리를 드러내는 수사의 하나로 간주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역설에 대한 현대시론의 견해에서 아쉬운 점은 20세기 이후 역설의 지위가 달라진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20세기 이전의 역설이 논리적 사고에 균열을 일으키는 골칫덩이로 인식되었다면, 이후의 역설은 세계 실체에의 접근 과정에서 자주 직면하게 되는 중요한 현상으로 간주되고 있기 때문이다. 20세기 현대 과학은 역설을 배제하고 해소해야 할 비논리와 모순성의 부정적 요소가 아니라 세계의 실체에 접근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가피한 논리적 균열로 간주한다. 따라서 지금까지 정리된 역설의 개념으로 최근의 시적 양상을 설명하는 데 일정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필립 휠라이트가 언급하고 있는 역설의 근본적인 속성은 배중률(the postulate of excluded middle)과 비모순성(the postulate of non-contradiction)으로부터의 자유(freedom)다. 다시 말해, 역설은 배중률과 비모순성에 대한 도전(challenge)이다.휠라이트는 브룩스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역설을 시적 진리의 근본적인 속성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역설이 단지 시적 차원의 진리에만 관여하는 것은 아니다. 시의 진리가 배중률과 비모순성을 넘어선 역설의 차원에 존재하듯이 20세기의 과학의 진리 역시도 마찬가지다. 역설은 시적 진리뿐만 아니라 과학의 진리에 깊이 관여한다. 그렇다면 시의 역설과 과학의 역설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역설의 새로운 국면이 전개될 수밖에 없다.
2. 영원주의(eternalism)의 시간과 역설
심층적 역설 중의 하나인 존재론적 역설은 삶의 초월적 진리를 내포하거나 종교적의 의미를 띠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인간 존재의 이성과 논리로써는 이해할 수 없는 삶의 깊은 의미와 가치가 모순어법(oxymoron)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다. 존재론적 역설에서 발생하는 의미는 곧 시의 주제가 된다. 표층적 역설은 주로 시의 부분적 정서나 의미와 관계할 뿐 그 자체로 시의 주제가 되지는 않는다. 그 자체로 시의 주제가 되는 역설이 있다면, 그것은 시의 중핵적 의미를 형성하는 역설로서 마땅히 존재론적 역설에 해당할 것이다. 하지만 현대시에는 존재론적 역설의 개념으로 설명하기 힘들고 시적 역설에도 해당되지 않는 역설이 발견된다.
현대물리학의 시간관은 상식적인 차원에서는 이해되지 않는 역설의 성격을 지닌다. 현대물리학의 시간은 흐르지 않지만 일상의 현실에서는 시간이 흘러가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물리학의 세계관과 일상의 세계관이 충돌하는 데서 역설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발생하는 역설을 현대시가 수용하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지금까지의 현대 시론은 시적 시간과 물리적 시간을 다른 것으로 간주해왔다. 시적 시간이 질적 가치를 지닌다면, 물리적 시간은 양적 가치를 지닌다는 식이다. 김준오에 따르면 서정시의 전통 속에서 시는 현재의 장르이자 순간의 문학이다.즉 서정시는 순간적 장르로서 현재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때의 현재는 과거, 현재, 미래를 분리시키지 않고 순간 속에 동화되고 통합된 ‘假현재’(한스 마이어호프)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이때의 통합은 이성과 논리를 최대한 마비시킴으로써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을 이루는 예술적 감성에 의한다.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라는 선조성(linearity)을 지니지만, 시의 시간성은 이와 다른 질적 가치를 가진다는 것이 기존 시론의 입장이다.
그러나 현대 물리학은 현대 시론이 이해하고 있는 물리학적 시간 개념을 이미 넘어서 있다. 상대성 이론에 기반한 현대 물리학은 시간의 흐름을 이미 부정하고 있고, 시간의 선조성(linearity)에 대한 새로운 해석에 돌입해 있는 상태다. 카를로 로벨리(Carlo Rovelli)는 “오직 사건들과 관계들만이 존재”하고 “기초물리학의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하였고 많은 학자들 또한 이에 동의한다.이들에 따르면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 순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동서남북의 공간처럼 이 우주 내에서 이미 존재한다. 인간이 시간의 흐름을 현실감 있게 느끼는 이유는 인간은 시간의 축을 따라 자유롭게 이동하지 못하는 3차원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건들의 관계를 드러내고 이해하기 위해 ‘시간’ 개념을 유용하게 쓰고 있을 뿐이다. 시간의 축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4차원의 세계에서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동서남북의 공간처럼 이미 존재한다. 3차원의 ‘현재’와 4차원의 ‘현재’는 전혀 다르다. 카를로 로벨리는 이것을 ‘확장된 현재’라 부른다. 이를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아래 그림을 보자.
현재주의(presentism)는 시간의 본질에 대한 3차원적 관점의 이론이고 영원주의(eternalism)은 4차원적 관점의 이론이다. 현재주의는 오직 ‘현재’만을 실재하는 것으로 본다. 과거는 한때 존재했던 세계의 형상이고, 미래는 아직 결정되지 않은 세계의 형상이다. 영원주의는 현재주의와는 전혀 다르게 과거와 미래를 현재와 똑같이 실재하는 것으로 본다. 과거와 미래는 현재처럼 실재하는 것이다. 위의 그림에서 알 수 있듯이, 현재주의의 ‘현재’는 매우 짧다. 현재의 길이는 매우 주관적인 것이지만, 윌리엄 제임스는 현재의 길이를 대략 2초 정도로 본다. 이는 의식을 구성하는 시간의 최소 단위와도 관련된다. 영원주의의 ‘현재’는 영원이다. 영원주의를 수용한 철학자와 심리학자들은 모든 시간이 블록 우주(block universe)속에 이미 설계되어 있다고 본다.카를로 로벨리의 ‘확장된 현재’는 현재주의가 아니라 영원주의의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현재주의와 영원주의에서 주체는 전혀 다른 양상을 지닌다는 사실이다. 현재주의의 주체는 그 폭이 매우 제한적인 것이지만, 영원주의의 주체는 그 크기가 무한에 가깝다. 물론 우리 인간은 3차원적 존재이므로 영원주의의 주체를 온전히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나 영원주의의 주체를 향한 상상력의 시적 점화는 충분히 가능한 것이다. 바로 여기서 기존의 시와는 달리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논리적 교착交錯을 오히려 전경화함으로써 새로운 차원의 세계를 열어놓는 시의 놀라운 출현을 목도하게 된다.
그곳에는 다른 차림의 시간들이 공존하고 있었다. 나는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있었고 대학 친구와 만나기로 한 역에 서 있었다. 대합실의 화면에서는 몇 주 뒤의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사람들이 모두 그 앞에 몰려들었지만 보고 싶지 않았다. 지나가던 한 여자가 나를 알아보고는 앞으로 다가왔다. 자연스럽게 아는 체하지만 그녀가 누군지 모른다. 그녀는 나를 데리고 학교로 갔다. 교실에서는 전에 보았던 영화를 상영중이었다. 난 소리쳤다.―바로 저 장면이야.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면이지.―그 장면은 점토와 선들로 이루어진 애니메이션 영상이었다. 그 교실에서 군대에 있을 때의 상관을 만났다. 그는 자신의 한쪽 다리가 더러운 사진에 묻혀 있다고 했다. 그리고 찢어진 군복과 더러워진 군화에 대해 크게 떠들었다. 수업을 마치는 종이 울렸다. 귀가 아픈 침묵이 계속 되었다. 거미줄이 허공에 뜬 채 땅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거미는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다시 수업이 시작되었다. 그때서야 내가 교실을 잘못 들어왔음을 알았다. 알고 보니 바지를 입지 않고 있었다. 나는 부끄러워 교실 문을 열고 나왔다. 아무도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 문은 다시 역으로 통하고 있었다. 대학 친구는 이미 와 있었다. 나는 약속 시간이 늦어 미안하다고 했다. 그는 가방에서 바지를 꺼내주었다. 오다가 어떤 여자가 건네주었다고 했다. 발을 디딜 때마다 먼지에 얽힌 거미줄이 날렸다.
-정재학, 「반조(返照)」 전문,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민음사. 2004)
이 시는 “그곳에는 다른 차림의 시간들이 공존하고 있었다”와 같은 신비로운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미 대학생인 ‘나’는 고등학생이 되어 대학 친구를 어느 역에서 기다리고 있으며 대합실의 TV화면 속에서는 “몇 주 뒤의 뉴스”가 흘러나온다.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이 겹쳐 있는 것이다. 시간만 뒤섞여 있는 것이 아니라 사건 또한 비논리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공간 역시 역 대합실과 고등학교 교실이 혼재되어 있다. 이처럼 이 시는 시간과 사건의 인과율을 파괴하는 모순성으로 가득하다. 시간과 사건의 계기적 질서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흡사 꿈의 무의식을 드러내는 장면처럼 읽히기도 한다. 프로이트가 일찍이 언급했듯이 꿈은 무시간성과 비논리성을 특징으로 한다. 꿈속에서는 지극히 자연스러웠던 장면들이 각몽 후에는 매우 부자연스러운데, 그 부자연스러움은 논리적 언어로 기록할 수 없을 정도다. 이 시가 꿈의 장면들에 대한 기록인 듯한 느낌을 주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시는 시의 첫 문장이 이미 언급하고 있듯이, 시적 화자의 무의식에 대한 분석보다는 ‘시간’의 실재에 대한 통찰을 시도하는 것으로써 시론적 의의를 부여할 수 있을 듯하다.
무엇보다 3차원의 존재가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예측을 아무리 동원할지라도 4차원의 세계를 온전히 이해하거나 진술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왜 그런가. 3차원적 세계의 언어는 선조성(linearity)을 지닌 반면에 고차원적 세계는 선조성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언어의 선조성은 선조성을 벗어난 진리를 드러낼 수 없다. 3차원의 선조적 언어가 고차원 세계의 비선조적 진리를 드러내고자 할 때 역설은 필연적이다. 그렇다면 3차원의 주체가 4차원의 실재를 드러내고자 할 때 방법의 최대치는 언어의 형식적 선조성은 어쩔 수 없더라도 내용적 선조성에 해당하는 인과율을 벗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무의식의 형태를 닮아있다. 프로이트가 말했듯 꿈의 무의식이 무시간성과 비논리성을 지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정재학의 「반조返照」는 영원주의의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시간과 사건이 뒤죽박죽으로 얽혀 있는 모순성으로 가득한 이 시는 시간의 물리학이 주장해왔던 시간과 관련한 세계의 진리를 드러낸다. 즉, 시 전체에 걸쳐 있는 시간과 사건의 모순적 진술을 통해 과거, 현재, 미래라는 선조성에서 벗어난 세계의 실재를 드러내는 역설의 시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시의 화자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선조성을 벗어나 ‘블록’(덩어리)으로 뭉쳐진 주체의 편린을 보여준다. 이 시는 현재주의의 제한된 주체(현재)의 폭을 넘어 영원주의의 ‘확장된 주체’를 향한 욕망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이 욕망은 표면적으로는 시간과 공간의 질서를 파괴하는 모순을 드러내고 있지만, 이를 통해 3차원 너머에 존재하는 세계의 실재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역설의 새로운 차원을 열어놓고 있다.
3차원에서의 시간 개념은 매우 협소하고 제한적인 것이다. 언어의 분절성은 시간 단위를 책정하고 세계를 시간적으로 구획하고 있지만, 그것은 적어도 영원주의의 관점에서는 세계의 실재가 아니다. 최근의 시는 3차원의 협애한 공간적 한계를 직관적으로 통찰하고 그것에 본능적으로 거부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사실 어제는 월요일이 아니었다 그건 비둘기의 실수였다 사실 오늘도 월요일은 아니었다 그건 핼러윈의 실수였다 사실 내일도 월요일이 아니었다 그건 목 긴 둥근 나무 의자의 실수였다 사실 일요일도 월요일도 아니었다 그건 목 뭉퉁한 빨간 주전자의 실수였다 사실 그저께도 월요일이 아니었다 장난감 욕조에 빠져죽은 장난감 가게의 알바의 실수였다 사실 그그저께도 월요일이 아니었다 컨테이너 밸브에 목 졸려 죽은 벌거벗은 마네킹의 실수였다 사실 개여뀌에게 도착하기 전까지 월요일이 아니었다 수국이 얼마나 썩었는지 늦가을이 오기 전까지 알 수 없다 월요일의 뿌리는 언제나 구멍 숭숭 뚫린 연뿌리였다
-송진, 「월요일」 전문, 복숭아빛 복숭아(작가마을, 2020)
이 시에 따르면 월요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월화수목금토일’이라는 주기週期체계가 확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에서 월요일에 대한 확정적 언사는 반복적으로 실패한다. 즉, 이 시는 ‘월요일’에 대한 ‘비확정적 언사(assertorial lightness)’로 가득하다. 월요일이라는 시간 개념은 일상의 공간을 벗어난 세계의 실재와는 맞지 않는 개념이다. 예컨대, 우리의 ‘현재’는 우주 전체에 적용되지 않으며, 우주 곳곳에 잘 정의된 ‘지금’이 존재한다는 생각은 환상이다. 우주에는 같은 순간이라고 규정된 시간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모두가 각자의 시간 속에서 살아갈 뿐이다.어떤 존재에게 월요일인 것이 다른 존재에겐 아닐 수 있게 된다. 월요일을 확정하고자 하는 시도는 어떤 존재(혹은 사물)의 협애성에서 비롯된 ‘실수’이며, 이 실수는 무한히 반복되고 지속된다. 이 세계(universe)에는 무한히 많은 사물들의 통일되지 않은 시간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월요일이 아닌 시간들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에서 이 시의 진정한 주제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확장된 현재’로서 “과거도 미래도 아닌 사건들 전체”라고 할 수 있다. “월요일의 뿌리”가 “언제나 구멍 숭숭 뚫린 연뿌리”에 비유되는 이유다. 시간의 흐름은 환상에 불과한 것이므로 월요일이라는 개념 역시 “구멍 숭숭 뚫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때에야 비로소 이 시는 시간 개념의 협애성에서 벗어나 “확장된 현재”에 걸맞은 ‘확장된 주체’를 향한 결핍을 노정하게 되는 것이다. 이 주체는 현재주의에서 벗어나 영원주의로 확장된 주체다.
3. 다세계(Many-world)의 접속과 역설
모순(contradiction)은 일반적으로 양립 불가능한 명제의 충돌에서 비롯된다. ‘모순’의 한자 ‘矛盾’이 의미하듯 어떤 방패도 뚫는 창과 어떤 창도 막아내는 방패는 양립 불가능하다. 그러나 물리학에서는 상식의 차원을 넘어서는 일들이 벌어진다. 양자 중첩 현상(한 입자가 동시에 여러 곳에 있는 현상)이 그것인데, 이와 관련하여 ‘슈뢰딩거의 고양이’ 역설이 유명하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양자 중첩에 대한 의구심을 드러내기 위해 고안된 사고실험이지만 다세계 이론을 대중적으로 각인시키는 데 효과적인 실험 모형이 되었다. 이 세계는 파동함수가 붕괴하지 않으므로 죽은 고양이의 세계와 산 고양이의 세계로 분기한다는 것이다.
닐스 보어를 중심으로 한 1920년대의 코펜하겐 해석은 양자 중첩 현상을 다음과 같은 논리로 정리한다. 입자의 위치는 파동함수(확률)로 존재하므로 중첩된다. 입자의 위치는 관찰자의 관측을 통해서만 알 수 있고 관측을 하는 순간 파동함수는 붕괴하고 양자 중첩 역시 해소된다는 것이다. 파동함수 붕괴를 통한 양자 중첩의 해소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인데, 미시적 세계의 양자 중첩 현상이 해소되지 않는다면, 거시 세계에도 중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즉 ‘슈뢰딩거의 고양이’에서 산 고양이와 죽은 고양이가 동시에 존재하는 모순이 벌어지는 것이다.
슈뢰딩거는 양자 중첩 현상에 대한 의구심을 드러내기 위해 ‘슈뢰딩거의 고양이’로 알려진 사고실험을 고안했다. 이 사고실험은 미시적인 양자 중첩이 거시적인 현실세계에서 일어날 때의 기묘함을 보여주는데, 상자 개봉 전 죽은 고양이와 산 고양이의 중첩 현상을 사실로 인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슈뢰딩거뿐만 아니라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당시 물리학자들의 양자 중첩에 대한 당혹감을 보여준다.(여기서 아인슈타인의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유명한 말이 나오게 된다.) 그러나 양자 중첩과 파동함수 붕괴는 1924년에 슈테른-게를라흐의 실험으로 이미 입증된 바였고 코펜하겐 해석이 물리학계의 지배적인 학설이 된다.
그러나 30여년 뒤인 1957년에 파동함수 붕괴를 부정하는 물리학자가 출현한다. 바로 휴 에버렛(Hugh Everett III, 1930-1982)이다. 그의 박사논문 ‘양자역학의 상대적 상태 이론(Relative State Formulation of Quantum Mechanics)’은 코펜하겐 해석에 반反하여 파동함수는 붕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론적으로 증명한다. 이는 매우 놀랍고도 급진적인 주장인데, 예컨대 슈뢰딩거의 사고실험에서 산 고양이와 죽은 고양이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중첩)이 가능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즉, 파동함수가 붕괴하지 않으므로 양자 중첩 현상이 해소되지 않게 되고, 이는 미시적인 세계뿐만 아니라 거시적인 세계에도 적용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마침내 다세계 이론(Many-World Theory)으로 이어진다. 박사논문을 바탕으로 브라이스 셀리그먼 드윗(Bryce S. DeWitt)과 닐 그레이엄(Neill Graham)에 의해 재출간된 그의 책이 바로 양자역학의 다세계 해석(The Many-Worlds Interpretation of Quantum Mechanics)(Princeton University Press, 1973)이다. 그러나 다세계 이론은 이단시되었고 휴 에버렛은 물리학계에서 소외된다. 휴 에버렛의 가장 열렬한 지지자는 맥스 테그마크다. 그조차도 휴 에버렛에 대한 공개적인 지지를 안정적인 교수 지위를 확보한 이후에야 공표했을 정도다. 그러나 휴 에버렛의 다세계 이론은 현재 물리학계에서 진지한 논의 대상이다.
다세계 이론은 휴 에버렛으로부터 비롯되었지만, 다세계를 향한 상상력의 연원은 오래된 것이다. 다세계는 고대 철학자 데모크리토스와 루크레티우스로부터 프랑스 혁명가 블랑키, 그리고 니체와 윌리엄 제임스에 이르기까지 반복적으로 다루어진 주제이며, 최근에 이르러 대중문화적으로 이미 보편화된 것이다. 휴 에버렛의 다세계 이론은 이러한 상상력에 물리학적 근거를 제공한다. 다세계는 더 이상 몽상가의 허무맹랑한 상상으로 치부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다세계 이론은 현대시의 해석에도 중요한 영감을 제공할 수 있다.
다시 정재학의 시 「반조返照」로 돌아가 보자. 이 시에서 드러나는 역설은 다세계 이론의 관점에서도 해석이 가능하다.이 시는 여러 갈래로 분기된 세계의 비논리적인 접속을 보여준다. 고등학생인 ‘나’는 대학 진학 후에 알게 된 대학 친구를 역의 대합실에서 기다리고 있다. 고등학생인 ‘나’의 세계와 대학생인 ‘나’의 세계가 접속된 상태다. 역의 대합실 텔레비전 화면에는 몇 주 뒤의 뉴스가 흘러나오는데, 역시 몇 주 뒤의 세계가 현재의 세계와 접속된 상태다. 지나가는 여자가 ‘나’를 알아보고 앞으로 다가오지만, ‘나’는 그녀가 누군지 모른다. 그녀를 아는 ‘나’의 세계와 그녀를 모르는 ‘나’의 세계가 접속된 상태다. 서로 다른 세계의 ‘나’와 ‘그녀’는 역에서 만나 뜬금없이 학교로 간다. 학교 교실에서 군대 있을 때의 옛 상관을 만나고 자신이 바지를 안 입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부끄러움을 느낀다. 교실 문을 열었더니 바로 역으로 통하고 거기서 대학 친구를 만난다. 대학 친구는 가방에서 바지를 꺼내주는데, 어떤 여자가 준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여자’를 아는 ‘나’의 세계와 ‘여자’를 모르는 ‘나’의 세계가 접속되는 장면이다. 양자의 중첩 상태에서 분기해나간 다세계의 접속을 선명히 드러내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양자적 중첩 상태를 계기로 ‘여자’를 알게 되는 세계와 ‘여자’를 모르는 세계로 분기해 나간다. 그리고 시인의 상상력에 의해 서로 다른 세계에 있는 ‘나’(‘여자’를 모르는)와 ‘여자’(‘나’를 아는)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기묘한 쓸쓸함에 빠져들게 되는데, 이는 다세계를 결여할 수밖에 없는 3차원의 존재로서 경험하는 결핍에서 비롯된다.
이 시에서 접속은 여러 번 반복된다. 이 접속을 통해서 시간과 장면의 모순적인 결합을 조금도 감추지 않고 오히려 선명하게 드러낸다. 인간 개별 존재는 단 하나의 세계만을 살아가지만, 여러 가능성의 세계를 살고자 하는 욕망이 있고 그것을 상상과 공상으로 풀어내기도 한다. 이 시는 여러 가능성의 세계(다세계)에 존재하는 ‘나’를 접속시켜 놓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제각각의 논리를 가진 사건들이 비논리적으로 접속되면서 하나의 인과율로 이해될 수 없는 비논리적 다중주(重奏)의 세계를 그려내고 있는 시다. 단 하나의 개별 세계를 살아갈 뿐인 시인은 여러 가능성의 세계를 살아가고 있을(혹은 살아가야 했을) 복수의 ‘나’들을 매혹적인 기묘함으로 드러낸다. 따라서 이 시는 주체의 분열이 아니라 다세계적 주체의 접속을 통한 주체의 확장이라는 무의식적 욕망을 드러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김언의 시에서도 이와 유사한 욕망을 읽어낼 수 있다. 김언은 “문장 하나에 세계가 다 녹아들 수 있다는 과욕, 혹은 환상”, “불가능에 도전하는 것이 시라는 과욕, 혹은 환상”, “남자에서 여자로, 여자에서 남자로 끊임없이 넘어가는 문장 혹은 세계”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그리하여 “문장에서 인생이 보인다면, 세계가 보인다면 나는 소설을 쓰는 것처럼 시를 쓰고 있는 것”이라고 진술한다.그는 다른 세계와 주체의 가능성을 시의 문장을 통해 실현하려 하고 있는데, 여기서 강렬한 역설의 문장이 만들어진다.
나는 두 사람이 되려 한다.
너를 가진 사람과
너를 가지지 못한 사람.
너를 가졌으면 너를 포기하는 사람.
너를 가지지 못했으면 너를 가지고 싶은 사람.
나는 두 사람이 되려 한다.
포기하는 걸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과
가지고 싶은 걸 가지지 않으려 하는 사람.
포기하지 못해서 더 포기하고 싶은 사람과
가지고 싶어서 더 가지지 않는 사람이
되려 한다. 나는 너희 두 사람이 되려 한다.
-김언, 「두 사람」 부분, 백지에게(민음사, 2021)
이 시의 주체는 ‘두 사람’으로 분열되어 있다. “너를 가진 사람”과 “너를 가지지 못한 사람”. 이 대칭은 여러 차례 반복된다. 이 시를 사랑의 욕망에 대한 분열적 사유로 읽을 수 있으나, 중요한 것은 이 시의 주체가 ‘두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이다. 이 시 속에는 두 갈래로 분기하는 세계가 스며 있다. “너를 가진” 세계와 “너를 가지지” 못한 세계. 분기하는 세계 속에서 인간 개별자는 하나의 세계만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시인은 두 세계 모두를 욕망한다. ‘두 사람’이 되려 하는 것이다.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세계의 ‘나’들이다. 즉, 너를 가진 세계의 ‘나’와 너를 가지지 못한 세계의 ‘나’다. “너를 가졌으면 너를 포기하는 사람”. 역설의 문장이다. 너를 가진 세계 속에서는 너를 가지지 못한 세계(다른 세계)를 가지지 못한다. 그 다른 세계를 가지기 위해 “너를 포기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다. “너를 가지지 못했으면 너를 가지고 싶은 사람.” 이 진술은 사랑의 보편적 욕망으로 본다면 역설이 될 수 없는 당연한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욕망이 ‘다른 세계’ 그 자체를 향한 욕망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나는 너희 두 사람이 되려 한다.”는 진술은 다른 세계와 다른 주체의 가능성 모두를 현실화하고자 하는 욕망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욕망은 ‘두 사람’에 한정되지 않고 ‘수많은 사람’을 향해 보다 거대해지기도 한다.
자동차는 어젯밤에도 지나갔다. 오늘 밤에도 내 배꼽 밑으로 지나갔다. 성당의 종소리가 명랑하게 울리는 내 하반신에도 공장이 돌아가는 기계 소리가 들린다. 나는 신전이다. 누구보다 딱한 사정을 들어주는 한 노인의 지루한 설교 소리가 벽에 가서 그친 뒤에야 나는 몸서리를 친다. 가려워서 피부 밑을 긁었다. 깊숙한 메시지는 더 깊숙이 들어가서 2세를 생산한다. 소요를 준비하는 조용한 군중들이 난폭하게 더 난폭하게 출구를 열고 쏟아지는 용액과 뒤섞인다. 오늘 밤에도 고통스러워하는 아이가 잠에서 깨는 연습을 내가 하고 있다. 자동차가 지나가면서 내는 소리. 배꼽 주위를 맴도는 아이의 질퍽거리는 소음이 젖은 몸을 일으켜 다시 걸어간다. 연기 속으로 수천 명의 출근길이 열리고 나는 다리를 뻗는다. 낮에는 공장으로 주말이면 교회로 새벽에는 저 혼자서 질주하는 자동차를 타고 그가 왔다. 나는 도착하는 밤의 꿈이다. 수천 명이 그 잠꼬대에 깨어났다. 각자의 집에서 마치 관객들처럼 일어나는 내 몸을 껴입고 나갔다.
-김언 「한 사람들」 전문, 소설을 쓰자(민음사, 2009)
이 시에서 시적 주체의 좌표는 후반부로 가면서 갑자기 불분명해진다. “고통스러워하는 아이가 잠에서 깨는 연습을 내가 하고 있다”는 문장부터 수상하다. ‘아이’와 ‘나’의 경계가 흐릿해지고 있다. 급기야는 수천 명의 사람이 잠꼬대에서 깨어나 “각자의 집에서 마치 관객들처럼 일어나는 내 몸을 껴입고 나”가는 것이다. ‘나’라는 개별적 주체는 수천 명의 사람들로 확장되고 있다. 보다 급진적으로 말해, 이 시에서는 개별자라는 구분이 무의미해 보인다. 개별자로서의 인간 주체는 각 신체 속에 감금되어 있다. 자신의 신체를 벗어날 수 없다. ‘나’는 ‘나’일 뿐이며 다른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 시인은 수천 명에 해당하는 모든 사람들을 ‘나’라는 거대한 신전으로 간주한다.(“나는 신전이다.”) 이 시에서 ‘나’는 개별자로 묶여 있지 않으며 수천 명의 주체들을 포괄하는 “신전”으로서의 ‘나’다. 이는 개별적 주체를 벗어나 수많은 주체를 포괄함으로써 주체의 확장을 도모하고자 하는 욕망의 발현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4. 기이한 역설: 역설이 역설이 아니게 되는 역설
애드가 앨런 포(Edgar Allan Poe)는 1848년 2월 3일 뉴욕 사회 도서관에서 ‘우주의 개벽설’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였는데, 우주가 하나의 점으로 비롯되었고 그 점으로 다시 붕괴했다가 곧 다시 창조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양자 중첩에 의한 급진적인 다세계 이론은 아니지만, 우주의 빅뱅과 수축의 반복에 따른 다중우주론적 상상이다. 시인의 직관적 상상은 때때로 물리학자들의 가설을 훨씬 앞서나간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시공간에 대한 기이한 상상이 이론적 가설 수립 능력과 무관하게 인간의 사유를 지배해왔고, 마침내 그것이 상상이 아니라 세계의 실재에 근접하는 직관적 통찰이었음이 밝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선구적 통찰이 아니더라도 시인들의 감성은 현대 물리학이 밝혀내고 있는 현실에 조금씩 앞서거나 뒤따르기도 한다. 사실은 이것조차 전위(아방가르드)로 불릴 만큼 기존의 관습에 도전하는 일이다. 시의 전위는 혁신적인 상상을 구현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미 밝혀진 세계의 실재를 미적으로 형상화하는 형식의 새로움을 창조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세계의 실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시적 행위로서의 전위다. 이런 관점에서 수학자 야우싱퉁(Shing-Tung Yau)과 과학 저술가 스티브 나디스(Steve Nadis)의 아래 진술에는 현대시의 상상력에 영감을 주는 중요한 통찰이 들어있다.
3차원 이상의 차원에서는 가능한 형상의 수가 극적으로 늘어난다. 보다 고차원의 공간을 고려할 때, 우리는 쉽게 상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의 움직임을 허용해야 한다. 북서쪽이나 심하게는 북북서와 같은 북쪽과 서쪽의 어딘가로 나아가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아직 그려지지 않은 좌표계의 화살표를 따라 우리가 이해온 기존의 그리드(grid)를 완전히 벗어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시는 예술의 주관적 세계만을 상상해왔다. 시의 주관적 세계는 과학의 객관적 세계와 전혀 다른 것으로 간주되었으므로 시의 주관성이 과학의 객관성을 배제하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과학의 논리와 무관하게 성채를 쌓은 시의 정신은 스스로 존중받고자 했고 존중받아 왔다. 그러나 상대성 이론과 양자 역학에 기반한 이론물리학이 오히려 시의 상상력을 압도하는 시공간의 세계를 펼쳐내고 있다. 시의 주관적 상상력보다 훨씬 광활한 차원의 세계가 이론물리학의 세계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비로소 시는 과학의 객관적 세계를 시의 상상 내부로 가져올 수 있고 이론물리학의 세계가 열어놓은 고차원의 공간에 시적 상상력으로써 인간의 숨결을 불어넣을 수 있다.
정재학과 김언의 일부 시들은 역설의 세계를 드러낸다. 그들의 역설은 단순히 언어 진술의 모순에서 드러나는 역설이 아니고 삶의 초월적 가치를 드러내거나 종교적 가치를 드러내는 역설도 아니다. 시의 구조 전체에 걸쳐 발생하는 시적 역설은 더더욱 아니다. 이들의 시는 현대물리학의 열어놓은 시공간, 즉 3차원의 일상적 공간을 살아가는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차원을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세계로 끌어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역설이 더 이상 역설이 되지 않는 역설적 상황이 벌어지고 만다. 3차원의 존재가 바라보는 고차원의 세계는 논리적 언어로는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 역설의 세계다. 고차원적 세계가 3차원적 세계의 언어로 진술될 때 모순이 발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역설의 세계는 고차원적 세계의 실재다. 역설이 실재라면 그것은 더 이상 역설의 세계가 아니지 않은가. 역시 기이한 역설이다.
박대현
2005년 부산일보에 문학평론이 당선됐다. 평론집으로는 『우울한 것의 추락』, 『혁명과 죽음』, 『황홀한 아파니시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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