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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적, 지리적 핸디캡 때문에 아예 포기했나
늘 늦게 드는 잠이지만 새벽에 깰 수 밖에 없다.
새벽부터 설쳐대는(?) 농기계의 굉음 때문이다.
전방에는 농기계만큼 부지런한 팀이 또 있다.
백두산신병교육대대 군인들이 이미 새벽 프로그램을 마치고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듯.
늙은 길손도 460번 평화로를 따라 동진을 시작했다.
출발해서 곧 눈에 띈 건물은 송현1리 방산회관.
아마, 장교클럽일 것이다.
최전방민통선에도 사병들의 청춘은 의무라는 멍에로 꽁꽁 묶어놓고 장교들의 스트레스
해소공간(?)은 필요한가 보다.
양구군(楊口)은 국토의 정중앙이라지만(?) 강원도 18시군중 인구가 가장 적은 군이다.
방산면(方山)은 5개읍면중 가장 넓으면서도 주민수가 끝에서 2번째다.
7개에 불과한 마을들의 면적이 넓다는 뜻이다.
정부의 지원 없이 주민들의 협동으로 건설해서 협동교라는 수입천 다리를 건넜다.
아무련들 이북땅으로 있는 것보다야 낫겠지.
수입천을 되건너고 또 건너는 송현2교, 고방산교를 지나기 까지 2시간여를 걸었는데도
여전히 송현리(松峴)다.
간밤의 식사를 빵으로 시늉만 했기 때문인지 아침부터 시장기가 들었다.
고방산상회(고방산리)에서 빵과 우유로 달래며 이야기를 나눠보려 했으나 여인이 하도
쌀쌀맞아 포기했기에 길가 송현2리 마을회관, 경로당 문을 두들겼으나 잠겨있다.
궁금해도 최전방의 궁벽한 산속에서 말을 걸 사람이 없다.
'양구종합지진관측소(한국지질자원연구원)가 반가워서 내려가 보았으나 8시 반이 넘었
는데 출근 전인가 무인관측소인가?
오르막 길가 뱅이골공원(송현2리)에 얼마쯤 앉아 있었으나 사람은 커녕 지나가는 차량
1대도 없고 근역에는 군 부대도 보이지 않았다.
조석으로는 전국 농어산촌 어데서나 보게 되는 노랑버스마저도 보이지 않으니 이 지역
에는 초등학생도 없나.
방산면은 도고터널에서 끝난다.
도사리(양구읍)와 고방산(방산면)을 잇는다 하여 도고터널이라고 했다 하나 이 고개가
학령(鶴嶺)이므로 학령터널로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단다.
맹수에게 희생된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온 산을 누비고 다니는 가녀린 딸을 1마리
학이 등에 업어 날아다 준 산고갯마루라 해서 학령이라 했다는 고개다.
여인을 도운 청년과 백년가약을 한 날을 강선일(降仙日)이라 정하고 온 마을이 합심해
경로잔치를 벌여왔다는데(해방 직전까지) 휴전선 지역에서 옛 전통을 이어갈 형편인가.
방산면을 떠나면서 가장 아쉬운 한 가지는 백자박물관에 들르지 않은 것.
09시 ~ 18시의 개관시관에 맞출 수 없는 나그네의 한계 때문이었지만.
양구군과 방산면 당국에도 열의가 없는 것 같다.
환경적, 지리적 핸디캡 때문에 아예 포기했나.
중부인 여주 이천, 남쪽 끝 강진의 도요지와 비교할 때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
인 것을 망각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관광명소와 축제, 먹거리 등 시각적 자극보다 중후하고도 여운있는 테마의 홍보에 보다
적극적이어야 할 것이련만.
이곳, 방산지역은 백자를 제작하는 원료인 양질의 백토가 매장되어 있어 조선시대 왕실
관요인 분원에 태토를 공급하는 중요 공급지였단다.
원료뿐 아니라 금강산이 발원지인 수입천과 풍부한 연료는 고려시대부터 20c에 이르기
까지 자체적인 요업 발달을 가능하게 한 배경과 원동력이 되었으며 장평리 가마는 고려
말부터 조선 전후기를 거쳐 20c 중반까지도 자기 생산을 계속했던 것으로 추정된단다.
1913년, 일제가 장평리에 ‘도자기개량조합’을 설립하고 전통적 생산방식 대신 근대적인
사기그릇을 만들기 시작했지만 그것으로도 입증되는 것 아닐까.
펀치볼 전적비가 왜 동면에 있는가
터널 이후 좌 동면 우 양구읍의 460번 지방도로(평화로)도 내리막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양구읍, 광치터널과 동면, 금강산으로 이어지는 31번 국도(금강산로)에 흡수된다.
남방한계선을 따라 동진하려면 동면(東), 해안면(亥安)을 거쳐 인제로 넘어가야 하는데
동면길 입구부터 요소마다 2013년 곰취축제 안내판이 서있다.
'건강 장수마을, 덕이 깊은 마을' 덕곡리(德谷)를 지나 임당리((林塘) 면소재지가 다가
오면서 도로 환경미화가 한창이다.
곰취축제를 대비해서 그러는 듯 한데 17일(내일)부터니까 늙은 길손은 해당무.
시장하기도 했으나 나그네를 끌어들인 힘은 화분들의 활짝 핀 백목련꽃이었을 것이다.
시기적으로 서울에서는 이미 볼 수 없고, 무심히 걷고 있는 나그네를 저 순백의 꽃들이
사로잡았을 것.
내 집 앞마당의 백목련과 자목련을 베어버린 후로 늘 그들에게 미안한 마음이다.
전지를 하고 또 해도 거목으로 군림하려 해서 부득이 극단의 방법을 써야 했지만.
몰려드는 손님에 비해서 평범한 음식이지만 14km해안면을 지나 인제땅 어느 지점까지
가려면 식욕과 관계없이 먹는 것이 의무다.
해안, 인제로 가려면 월운저수지(月雲里) 직전에서 저수지를 지나 금강산을 향해 북상
하는 31번 국도를 버리고 동진하는 453번 지방도로를 따라야 한다.
월운저수지는 도솔산에서 발원한 서천(西川)이 파로호로 행진하기 위해 잠시 머무르는
휴식소다.
동면교(서천)를 건너면 '펀치볼지구전투전적비' 앞이다.
전투가 치열했던 펀치볼은 해안면에 있는데 왜 동면에 세웠는가?
돌산령터널이 뚫리기 전이니까 30km 이상 떨어진곳에.
더구나 펀치볼(Punch Bowl/화채그릇)은 해안면의 별칭에 다름 아니다.
"자유와 평화를 위하여 용감하게 싸우다 산화한...천추만대에 길이 남기고 그 넋을 위로
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고 했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현장에 세우지 못하면 현장과 최단 거리에 있는 것이 옳지 않은가.
팔랑2리(八郞) 마을 이후 돌산령으로 가는 도로변에는 민가가 없는데도 규모가 제법 큰
상회(매점)들이 있다.
이채로운데, 시야에는 잘 들어오지 않으나 소비자가 많음을 뜻한다.
새 스타일의 화려한 군 막사들에 익숙해진 시각이라 보이니 않는 것일까.
처절했던 전투의 현장 도솔산과 북쪽 대우산, 멀리 가칠봉을 헤아려보며 걷는 길이었다.
백두대간의 가칠봉(加漆/홍천 내면, 인제 기린면)이 아니고 금강산 가칠봉(加七)이다.
금강산은 1만 2천봉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데, 북한 땅에는 19.993개의 봉이 있고 7개는 남한땅에 있단다.
아름다운 금강산이 완성되려면 7개의 봉우리가 포함되어야 한다 해서 '加七峰'(가칠봉)
이라 했으며 대표 가칠봉이 펀치볼전투로 유명한 1.242m봉이란다.
그러니까 금강산은 남한땅까지 뻗어있다.
돌산령터널 앞까지 순조로웠다.
2.995m 터널도 다소 지루했을 뿐 차량이 뜸하며 화천지역의 터널들처럼 소란하지 않고
서늘하여 걸을만 했다.
해발 958m를 넘어가는 16km가 단지 3km로 단축되었으니 거저먹기다.
탁 트인 시야를 원한다면 터널길을 포기하면 되지만 워낙 차가 커서 쉬운 일이 아니다.
혹시나는 역시나로 끝났다.
한자(漢字) 지명이 亥安으로 바뀐 내력도 있다.
이 분지에는 주민들의 생활을 위협할 만큼 뱀이 많았는데 한 고승의 권유로 지명의 '海'
를 '亥'로 바꿨다는 것.
뱀과 상극 관계인 돼지를 뜻하는 '亥'자로 바꾼 후 이 땅에서 뱀이 사라졌다는 해안면은
강원도에서 가장 작은 군의 강원도에서 가장 작은 면이 아닌지.
582세대 1.485명이 총 인구다.
한 때, 인제군에 편입되었다가 복귀된 해안.
행정권이 양구지만 생활권은 인제일 수 밖에 없었던 해안면에 볓이 들었다.
본가가 양구인데도 인제에 빌붙어 사는 꼴이었는데.
원통에서는 돌산령터널이 얄밉겠다.
장사에 영향이 미칠 것이니까.
미국 국경지대인 캐나다 뱅쿠버와 멕시코 레이노사에서 들은 이야기가 생각났다.
출입국 심사를 까다롭게 했다가는 선출직들이 다음 선거에서 줄줄이 낙방이라는 것.
미국의 싸고 좋은 물건들을 사러 오지 못하게 하면 상권이 죽는데 표를 주겠는가.
면소재지 양구통일관으로 갔다.
혹시나는 역시나로 끝났다.
을지전망대나 제4땅굴이 내 안보의식에 영향줄 만큼 막연하지 않으므로 보나마나 하나
보행자를 국민으로 인정하는 곳은 강화도 평화전망대와 파주 오두산통일전망대 뿐?
안보교육장이라는 전망대, 땅굴인데 교육받으러 가기가 왜 이렇게 까다로운가.
보고 깨달고 다짐두게 하려면 정한 시간안에서는 누구나 임의로 출입할 수 있도록 개방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아니면 오두산통일전망대처럼 셔틀버스를 운영하던가.
차 없는 것도 서러운데 안보의 시각교육마저 차별당해야 하는가.
통 크게 활짝 열어놓지 못하고 무엇이 두려워서 까다로운가.
테러나 위해가 걱정돼서 그런다면 더욱 가소로운 일이다.
해칠 사람이 손쉬운 차를 이용하겠는가 힘들게 걸어가겠는가.
통일관 광장에도 펀치볼 도솔산지구 전투전적비가 있다.
도솔산과 대우산, 18일간의 전투에서 적에 입힌 손실이 아무리 치명적이라 해도 아군도
210명이 전사하고 852명이 부상당했다면(전적비) 어찌 적은 손실이라 하겠는가.
치열한 전투 현장(해안면)의 형국이 화채그릇 같다 하여 미국 종군기자가 Punch Bowl
(펀치볼)이라 타전했다느니, 하와이 오아후(Oahu) 섬의 미국 국립태평양전쟁기념묘지
펀치볼과 흡사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느니 하는 펀치볼지구 전투.
이 전투는 더욱 처절했다.
14일간의 전투에서 428명의 전사자와 1.062명의 부상자를 냈다면(전적비) 승리를 위해
지불한 값이 너무 비싸지 않은가.
하지만, 양구군민의 입장에서는 오직 감사할 뿐일 것이다.
수입천이 피로 물들었다 할 만큼(당시) 도솔산,펀치볼을 비롯해 9곳의 격전이 없었다면
지금도 이북땅이었을 수도 있으니까.
(피의 능선, 단장의 능선, 대우산, 백석산, 가칠봉, 크리스마스고지, 유엔고지 등)
"대한민국의 정중앙"(남면도촌리산48번지), "양구에 오면 10년이 젊어진다"는 청춘양구
슬로건이 나올 수도 물론 없고.
지금 31번도로, 수입천, 두타연을 따라 금강산으로 직행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양구땅을 벗어나면서 갖어본 생각이다.
그런 국가적 환경이라면 국토의 정 중앙이라는 천혜의 조건과 육지의 고도, 오지 속의
오지라는 자괴가 되레 청정 자연이라는 이점이 되어 각광받는 축복의 땅이 될 것이다.
그렇다 해도 양구의 문제는 간단할 것 같지 않다.
군민 보다 많은 수의 군인의 주둔지역이 안고 있는 공통된 문제지만.
453번도로를 따라 인제로 가는 길가 야산에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생태체험, 안보관광, 건강증진을 한번에....DMZ펀치볼둘레길 방문을 환영합니다"
오전 9시(1차), 오후13시(2차) 사전 예약제로 운영된다면서 환영한다고?
차라리, 플래카드를 걸어놓지 말 것이지.
도대체, 왜 그래야 하는가.
둘러보며 생태체험하고 안보의식도 높이고 건강을 챙기라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일정 시간 내에서는 자유롭게 탐방하도록 풀어주어야지 왜 구속하는가.
한데, 오후 13시는 어느 나라 시간인가.
12시간법으로 하면 오후 1시가 되고 13시라면 24시간법인데 왜 오후가 들어가는가.
더구나 사전예약은 어느 나라 말인가.
우리 말에서 '약속'(約束)은 미리 정하여 두거나 정한 내용을 말한다.
'예약'(豫約)이란 미리 약속하거나 정한 약속을 뜻한다.
그러므로 약속에는 예약의 뜻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예약은 약속의 겹말이 된다.
하물며 예약을 미리 한다는 사전예약은 중복 겹말로 당치 않은 표현이건만 버젓이 자리
지키며 사람을 속박하고 있다.
DMZ의 고착화, 영구화를 바라는 집단도 적지 않겠다
양구땅에서는 무난하던 453번도로사정이 인제땅(서화면)에 들자마자 돌연 열악해졌다.
도로 지근에 주둔 군부대가 많아 질주하는 차량도 급증하고 여건이 급전직하한 것.
사람은 차를 피할 길이 없고 차가 사람을 피해야 하는데 그래 줄 리 있는가.
얼마나 버텨낼지 한숨지며 걷고 있는 늙은이 옆으로 조심스럽게 다가온 하얀 승용차.
도저히 걸을 수 없는 길이라며 타라는 젊은 운전자는 걸을만한 지점에서 내려주겠단다.
고맙기 그지없는 스마일형 젊은이는 이 지역(麟蹄郡 瑞和面)에 거주한다는 이흥균.
그가 내려준 지점은 생태평화마을 서화2리 앞.
이 마을도 6. 25 동란 덕에 자유대한의 땅이 되었으며 군용지로 사용되다가 1958년 3월
이후 민간인이 입주하게 된 인제군의 민통선 마지막 마을이란다.
완벽하게 새로 들어선 마을(新村)이다.
지나치다고 느껴질 정도로 규격마을이다.
'평화생명마을'표어와 규격화 된 주택들로 인해 엄격한 종교적 계율을 따르는 공동체로
착각하기 쉽겠다.
민간인 취락이 형성되었으며 영농이 이루어지고 있으나 매점도, 교회도 군인 중심으로
된 광범한 군영(軍營)에 다름 아니다.
고갯마루의 '한국DMZ평화생명동산 교육마을'도 군영을 방불케 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이곳의 새벽은 00사단 병사들의 애국가와 기상나팔소리로 시작됩니다"
DMZ을 위한 단체라면 DMZ이 사라질 때 함께 소멸될 한시적 조직인가.
이 땅에 평화가 온다면 동서로 뻗어있는 긴 휴전선 벨트에는 지진과 다름 없는 거대한
지각변동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두려워 DMZ의 고착화, 영구화를 바라는 집단도 적지 않겠다.
민통선 걷기 9일째가 끝나갈 무렵에 최초로 교행하는 팀을 만났다.
여기, 동산에서 지금 막 발대식을 마치고 출발하려 한다는 한 나이 든 자전거팀이다.
비디오카메라 차량까지 대동한 것으로 보아 내세울 만한 팀?
하지만 e-메일로 보내주기로 약속하고 함께 찍도록 몸을 허락했건만 아직도 무소식인
것으로 미루어 빈 수레로 치부하고 말 것이다.
453번도로를 잠시 벗어나서 서화면소재지(天桃里)를 통과했다.
인북천(논장교)을 건너서면 승천하는 용이 쉬었다 간다는 대암산 용늪 가는 길이 있다.
다음 마을 사천((沙川)은 북면(北面) 땅 월학리(月鶴里)다.
사천교를 통해 인북천을 다시 건너면 우측에 백마촌(白馬村)이 있다.
본래는 잔디가 많아 띠두루였다는데 육군 9사단이 주둔했을 때 사단장 백인엽(白仁燁)
장군이 주택을 지어 주민을 입주시키고 부대마크 백마를 따서 백마촌이라 했단다.
작업은 공병대가 했겠지만 지휘관의 사려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본보기다.
해 안에 원통리에 들어섰다.
오늘 마감하게 될 지점이 서화면 어디 또는 북면 월학리의 어느 정자가 될 것으로 예상
했는데 고마운 청년 덕이다.
휴전선 부근인 서화면 가전리 가득봉에서 발원한 한강의 제3지류, 청정 인북천과 함께
걷는 시간이 많아서 차량만 없으면 행복로일 것이다.
이조시대에 있었던 원통역(圓通驛) 지명을 이어받았다는 마을.
설악산과 함께 38선 이북이었다가 휴전선 이남이 된 원통은 내게도 익숙한 곳이다.
반세기에 걸쳐 오르내린 설악산의 들날머리(關門)에 다름 아니었으니까.
수도권의 설악산 마니아들이 한계령과 오색, 백담사, 미시령과 진부령을 수월하게 드나
들려면 오늘날과 달리 원통의 교통정리를 따라야 했다.
도로사정이 열악했던 때 원통땅을 밟을 때마다 "인제가면 언제오나 원통해서 몰살겠네"
를 정확한 뜻도 모르면서 뇌까렸다.
열악한 교통환경과 안전이 보장되지 않은 전방, 그 지역의 지명 인제와 원통을 적당히
조합해서 구성한 사무치는 한(恨)을 표현하는 유행어 정도로 생각했었다.
인제, 원통보다 더 나쁜 도로사정과 최전방이 수두룩했지만 마땅한 지명이 받쳐주지 못
해서 기발한 유행어가 나오지 못했을 것이니까.
여러 유래가, 심지어 삼국시대를 들먹이는 그럴싸한 전설까지 회자되고 있으나 이치도
시기도 맞지 않고 황당할 뿐이다.
이즈음에는 "인제가면 원통하지 않고 인제와서 원통하다"는 말로 바뀌었단다.
부지하세월(不知何歲月)이 만시지탄(晩時之嘆)으로 변했을 정도로 업그레이드된 원통
에서 정자를 찾아나섰다.
찜질방이 있다는 정보에 무리하게 과속했는데 오보였기 때문이다.
월학리의 깨끗한 정자로 회귀할 수 없고 진행 방향을 택하는 것이 순리다.
내일의 길을 미리 좀 더 걷는 것이니까.
산에서 주1회는 고기로 포만감을 느껴야 했으며 길에서도 마찬가지인데 벌써 9일째다.
식당 입구의 허름한 정자를 겨냥하고 고기도 먹으려고 식당'흥부가'에 들어갔다가 모두
실패했으나 모두 성취했다.
1인분 고기 메뉴는 없다던 젊으나 마음씀이 어진 주인녀는 늙은 길손의 갈망이 절절한
것을 확인하고는 새 고기메뉴를 만들어 포식하게 했다.
건물 주인의 괴벽 때문에 불가하다는 정자 대신 주인남이 마을 정자로 안내함으로서 두
당면문제가 다 해결된 것.
인근의 교회에서 얻어온 박스로 마루바닥의 냉기를 없앰으로서 긴 민통선의 또 하루를
평안으로 마감하게 되었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