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자료를 제공해 주신 서영석 대종회 회장님께 감사드립니다.
지난 2월 대구서씨대종회에서 보내준 팩스를 근간으로 지명, 날짜, 계보 등
6곳의 오류를 수정하였습니다. 오류를 지적해 주신 분께 감사 드립니다. (2005-3-4)
오늘 도위공파종회의 형석이사(서울 경동약령시장에서 보창당을 운영)로부터 1987-7-10 선친 휘 정대(廷大)께서 친히 발간하신 대구서씨보사록 사본을 받게 되어 오랫동안 궁금했던 사항을 확인하게 되어 감개무량하였습니다. 받은 보사록 사본에는 형석이사의 선친께서 작성하신 서문도 있고 또 언제 어디에서 누가 발행했는지 하는 내용도 있어 여기 보사록에 추가시킵니다.
다시한번 형석이사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2007년 5월)
머리말
족보(族譜)
한 씨족(氏族)의 족보는 한 국가의 역사와 같은 것입니다.
한 국가에 역사책이 있음으로 해서 옛날에 있었던 중요한 모든 일들을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한 씨족에도 족보가 있음으로 해서 시조(始祖)를 비롯한 모든 선조(先祖)들을 알 수 있으며 또한 선조들의 위업(偉業)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옛날부터 전해오는 족보가 없었다면 어떻게 우리의 선조들을 알 수 있으며 또한 일가간에 분파(分派)의 내력(來歷)과 일가간에 촌수(寸數)를 알 수가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족보는 우리 선조들의 생, 졸, 년, 월, 일(生, 卒, 年, 月, 日)과 휘, 자, 호, 시호, 관직, 묘소(諱, 字, 號, 諡號, 官職, 墓所) 및 배위의 성씨(姓氏)와 자녀들의 출산과 혼인관계(婚姻關係) 등 모든 것들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서 우리들이 조상을 알게 되고 또한 일가간에 촌수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편자(編者)가 어느 날 서울행 고속버스 차 중에서 옆자리에 20세 전후로 보이는 한 젊은이와 같이 앉아서 서울까지 동승(同乘)을 한 일이 있었는데 그 젊은이에게 성(姓)을 물어 보았더니 달성서씨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파(派)냐고 물었더니 약봉 자손이라고 하기에 약봉 자손 어느 파냐고 또 물어 보았으나 그 이상은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또 집에 족보가 있느냐고 하였더니 “지금 서구화되어가는 이 시대에 족보는 무엇 하는 것입니까, 우주선이 달나라를 왕래하고 있지 않습니까?”라고 하며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보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말을 듣고서 편자는 할 말을 잊고 있다가 족보의 이야기는 그만두고 자기의 성(姓)을 타인에게 말을 할 때에는 씨(氏) 자를 붙이지 않는 것이라고 얘기를 해주고 만 일이 있습니다. 그래 아무리 현대사회가 물질문명이 발달하여 그의 말대로 서구화되고 우주선이 달나라를 왕래한다고 해도 과학이 자연의 법칙과 질서를 뒤바꾸어 놓을 수는 없는 것이지 않은가?
옛날부터 우리나라는 동방예의(東方禮義)의 나라라고 과시를 하여 왔었으며 우리나라 이외의 모든 나라 사람들을 다 오랑캐라고 멸시를 하여 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사회 풍조는 어떠한가? 전통적인 우리나라의 자랑으로 삼아온 윤리도덕(倫理道德)은 까맣게 잊혀져 가고 자기 자신의 존재 가치 조차도 망각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물론 인류사회의 발전 과정에서 오는 면치 못할 부작용과 또는 현대산업사회의 발전 과정에서 선진국의 물질문명이 급속도로 도입된 데에 대한 후유증으로 돌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옛날 우리들의 선조들께서 오랑캐라고 무시하던 사람들의 발전 상황인데 이제 와서 우리는 그들을 쳐다보고 따라 배워야 하는 꼴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 서구화되어가는 이 시대에 족보 얘기를 하느냐고 하는데 족보가 우리나라에서만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는 것은 하나의 무식(無識)인 것입니다. 서구라고 하는 영국, 불란서, 서독 등 많은 국가들이 족보를 가지고 있으며 이미 벌써 오래 전인 1969년도에 미국 유타주에서는 미국 족보학회 창립 75주년을 맞아 기록보존에 관한 주제 아래 내외학계(內外學界)의 많은 인사들을 초청하여 국제학회를 개최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에 우리나라의 대표로 우리의 종친(宗親)인 지원(之源, 奉事公派 宗孫)씨께서도 초청을 받으시고 그 회의에 참석을 하고 돌아오신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특히 미국의 하버드대학에서는 오래 전부터 한국의 족보학을 연구하여 왔으며 이 대학의 옌칭연구소(燕京硏究所)에는 우리나라 각 성씨의 족보 책이 광범하게 소장(所藏)되어 있는데 이것을 토대로 하여 조선사(朝鮮史) 연구와 각 씨족의 정치 참여 등도 연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구미 각국에서 족보학을 활발하게 연구하고 있으며 국내에서도 뿌리 찾기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데 자기 집에 족보가 없다고 해서 서구화를 외치고 있으니 딱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성명 삼자 중에는 세 가지 개념이 들어 있는데 첫째 자는 자기의 가문을 표시하는 성(姓)이며 둘째 자나 셋째 자 중 어느 한 자는 그 가문의 계대(系代)를 표시하는 항렬(行列) 자이고 나머지 한 자는 자기를 표시하는 것인데 간혹 외자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지만 이런 경우에는 무슨 자 변으로 계대를 표시하고 나머지가 자기의 이름이 되는 두 가지의 뜻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명 자체가 좋은 체계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성명 석자만 보아도 그 사람의 족보상의 위치를 대략은 짐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로 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족보에 대한 개념은 알고 있으나 더러는 족보의 이야기를 하게 되면 봉건주의적이라고 하며 노인들이나 족보 얘기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것이 현실인 것입니다.
우리 모든 사람들이 조상(祖上) 없이 이 세상에 태어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자기의 조상이 있고 자기의 성(姓)과 자기의 이름(名)이 각각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조상은 자기의 뿌리이며 자기의 성씨는 자기 조상의 상징(象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라면 누구나 조상과 성이 있어 한 뿌리의 가지로써 대대손손(代代孫孫) 전해오면서 한 씨족(氏族)의 시조(始祖)로부터 계보(系譜)나 존속 상황 또는 자신과 가족 그리고 친족들의 변천 상황 등을 후손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어느 가정이나 조상에 대한 족보나 계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러는 불행하게도 조상은 있을 것인데도 그 조상과 족보나 계보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우리들의 혈통(血統)과 뿌리에 대한 정확한 인식부터 가져야 하겠기에 여러 사적(史籍)에 기록된 사실들을 근거로 하여 미비하지만 우리 대구서씨의 아이들에게 우리의 선조들에 대하여 다소나마 바르게 알 수 있도록 하였으면 하는 듯에서 이 책 족보를 편집하였습니다.
이 책 족보는 우리 대구서문(大丘徐門)의 전통과 조상들의 업적 및 경력 등이 다소 일부(분파조 이상 상계 원파)이지만 비교적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기 때문에 가정 교육에도 중요한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먼 후일까지도 각 가정에 귀중한 보물이 될 것으로 여겨집니다.
1987年 7月 日
대구서씨(大丘徐氏) 본관
우리 대구서씨들은 옛날부터 본관을 대구와 달성으로 혼용하여 다 같이 쓰고 있었으니 대구서씨라고 해도 달성서씨라고 하여도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호적에도 대구서씨로 한 집도 있고 달성서씨로 한 댁도 있는데 그 까닭은 조선조 말 우리나라의 호적법이 처음으로 제정되면서 호적을 계출할 당시에 본관을 대구로 한 집은 대구가 본관으로 되고 달성이라고 한 집은 본관이 달성으로 된 것입니다. 애당초 처음에 어떻게 해서 관향을 대구와 달성으로 쓰게 되었나 하는 그 원인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아주 옛날에 만들어진 동국여지승람이라고 하는 책이 있는데 이 책에 이르기를 대구는 별칭이 달성이며 신라 때에는 달구, 화현이라고 하였고 그 뒤에는 수창군이라고 고쳤으며 조선시대에는 도호부를 두었는데 달성은 대구부의 서쪽으로 4리가 된다고 하였고 석축으로 성이 쌓여 있으며 그 석축의 주위가 944척이나 되는데 그 안에 우물이 셋이 있고 연못이 셋이 있으며 천연적으로 군수창이 되고 성이 되어 있으나 폭과 주위가 협소하여 성이 되기에는 부족하다고 하였으며 지금은 인가는 없고 다만 옛 관청이 건물이 섰던 주춧돌만 남아 있을 뿐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곳이 지금의 대구직할시에 있는 달성공원인데 그 안에 들어가 보면 양측 옆과 뒤가 성과 같이 쌓여 있고 앞으로만 내다 보이는 것이 삼테기 모양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달성은 대구의 고호이며 별칭이기에 옛날부터 우리들의 선조들께서도 대구와 달성을 다 같이 관향으로 써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들의 이 관향에 대해서 아주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 문제가 뭔고 하니 대구서씨라고 하면 문제될 것이 없겠지만 만약에 달성서씨라고 한다면 문제가 되는 것이 있는데 왜냐하면 달성서씨라고 하는 서씨가 우리들 말고 따로 또 한 씨족이 있기 때문입니다.
달성서씨 판도공파 (達城徐氏 版圖公派)
우리 달성서씨 중에는 우리들과 시조를 따로 하는 판도공 후손들이 있는데 우리는 이들을 판도공파라고 하며 이들의 시조는 판도공입니다.
판도공의 휘자는 나라진(晉)자이시고 고려 때에 판도 판서를 지내신 분으로 이 판도공의 후손들도 우리 소윤공의 후손들과 함께 대구지역에 같이 살면서 관향도 대구와 달성으로 다 같이 하였었으며 이들 판도공파의 족보도 처음에는 우리 대구서씨의 창간보인 임오보부터 우리 족보의 별보 즉 부록으로 수록하여 오다가 영조대왕 13년 서기 1755년에 그들대로 제자(題字)를 달성서씨세보(達城徐氏世譜)라고 하는 을해보(乙亥譜)를 창간하여 펴냈으며 종회를 구성하여 달성서씨 대종회라 하고 있습니다.
이리하여 소윤공의 후손인 우리 대구서씨와는 완전히 분류가 되어 수 백년을 지내온 지금 우리가 그냥 달성서씨라고만 한다면 소윤공의 후손인지 판도공의 후손인지 알 수가 없게 되어 있으니 족보를 처음 창간보부터 제자를 대구서씨 세보로 하여온 우리 소윤공의 후손들은 가급적이면 관향을 대구로 일관하는 것이 옳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관향을 달성이라고 한다 해도 망발되는 것은 아닌 것이니 관향을 대구라고 하든 달성이라고 하든 간에 달성서씨 중에 판도공 후손이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되겠습니다. 휘 (諱)
그리고 여기에는 잠깐 참고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무슨 말씀이냐 하면 좀 전에 드린 말씀 중에서 판도공의 휘(諱)자는 나라진(晉)자라고 한 말이 있었는데 이 휘자라고 하는 그 휘자의 뜻을 잘 모르는 분들이 간혹 많이 있습니다.
이 휘자라고 하는 휘자는 죽은 이 이름휘(諱)자로써 돌아가신 분들의 이름을 말할 때에는 휘자가 무슨 자와 무슨 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즉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판도공의 휘자는 나라진자로 외자 이십니다. 이와 같이 말을 하는 것인데 더러는 우리 시조의 함자가 이문한(閈)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꽤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말입니다. 살아계신 분들의 명함을 말할 때에는 명함함(啣)자인 「함자」라고 말하며 돌아가신 분들의 명함을 말할 때에는 「휘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참고로 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으로 관향에 대한 말씀을 대략으로 줄이고 족보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임오보 (壬午譜)
우리 대구서씨의 족보는 휘자를 문(文)자 중(重)자로 하시고 영의정을 지내신 몽어상공께서 숙종대왕 28년 서기 1702년에 처음으로 만드셨는데 이 족보를 간지(干支)로 임오년에 만들었다고 해서 임오보(壬午譜)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이 대구서씨의 세보(世譜)를 편찬하는데 있어서 열편(十編)으로 즉 간지(干支)로
갑, 을, 병, 정, 무, 기, 경, 신, 임, 계 이와 같이 열편을 나누어서 갑편(甲編)은 소윤공 이하의 원파(源波)를 수록하였고,
을편은 만사공파를, 병편은 전첨공파를, 정편은 첨추공파를, 무편은 도위공파를, 기편은 봉사공파를, 경편은 서흥파를, 신편은 사가공파를, 임편은 판도공파를, 그리고 끝으로 계편은 표(表), 비(碑), 지(誌), 보유기(補遺記), 명자항제도(名字行第圖) 등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에서는 갑편 즉 원파에 대해서 먼저 말씀을 드린 다음 분파조까지만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그런데 원파라고 하면 우리들의 시조이신 소윤공 할아버님으로부터 약봉 할아버님까지를 말하는 것이며 분파조라고 함은 약봉 할아버님의 아드님 사 형제 분들을 말하는 것인데 봉사공과 사가공 등도 분파조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우리들의 시조이신 소윤공 할아버님부터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대구서씨 원조 소윤공 한
우리들의 시조이신 소윤공을 족보에서는 시조라고 하지 아니하고 원조(元祖)라고 하는데 그 원인은 소윤공 이상의 세계 즉 뿌리를 알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소윤공의 휘자는 이문한(閈)자로 외자이시고 자는 어질인(仁)자와 마을리(里)자로 인리이시며 벼슬은 고려 때에 조봉대부와 군기소윤을 지내셨는데 출생하신 연대와 별세하신 년도를 알 수가 없으며 소윤공의 7대손까지도 생, 졸, 년도를 족보는 전하지 못하고 다만 소윤공의 8대손이신 안주공(安州公 諱 彌性)께서 비로서 고려 우왕 9년 서기 1383년인 홍무 계해생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1세를 30년으로 해서 8대를 추산하여 이백 수 십년을 소급하여 거슬러 올려가면 고려 명조 때가 되는데 이때가 소윤공께서 계시던 때로 추정할 수가 있으며
이 시기 이후인 고려 고종 18년에 원나라로 불리던 몽고의 1차 침략을 받고 그 이듬해에 서울을 개성에서 강화도로 옮기고 30년 간을 그 곳에서 머무르는 동안 28년에 걸쳐서 일곱 차례나 몽고의 침략을 받고 지내다가 고려 고종 46년 서기 1259년에 몽고와 화해가 이루어지고 그 후 고려 원종 11년 서기 1270년에 와서야 서울을 다시 개성으로 환도하였다고 하니 그 어려웠던 시기에 소윤공 이상의 세계가 전하지 못하였을 것으로 짐작이 되며 또한 소윤공 이하의 5대 실전도 역시 그러한 까닭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이 됩니다.
소윤공의 묘소( ) 는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 하탄방리 산 15의 2번지에 계좌원으로 모셔있고 배위이신 부인 김씨께서도 합폄으로 모셔 있으며 묘표는 후손 자헌대부 의정부 좌참찬 겸 동지 경연사 홍문관 제학 종급(宗伋) 삼가 짓고 후손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동지 경연사 세자 우빈객 종옥(宗玉)이 삼가 씀으로 되어 있으며
제향은 음력 10월 초하룻날에 시제를 올리는데 이곳의 재실은 묘소 아래에 있으며 영모재라고 이름하여 부르고 수호는 전첨공 후손이 재실에서 생활을 하면서 돌보고 있으며 관리는 공주에 있는 모란종중에서 하는데 모란종중 종친들은 만사공의 후손들입니다. 이곳의 노정은 천안에서 예산읍까지 약 100리가 되며 예산읍에서 예당저수지를 경유하여 묘소까지 약 20리 정도가 됩니다.
이상으로 시조이신 소윤공에 대한 말씀을 대략으로 드렸습니다.
소윤공 이하의 2세조와 3세조, 4세조와 5세조 그리고 6세조까지는 족보를 전하지 못하는데 이 분들을 5대 실전이라고 합니다.
7세조 전객공 (典客公)
다음은 7세조 전객공, 전객공의 휘자는 더할익(益)자와 나아갈진(進)자로 익자 진자이신데 벼슬은 고려 때에 판전객사사를 지내셨고 조선조 때에 가정대부 호조참판에 증직이 되셨으며 묘소는 경상북도 경산군 압양면 유곡동 신제내 아방곡 산 2번지에 계시고 배위이신 증 정부인께서도 묘소가 전객공 묘소와 동원으로 같은 곳에 계십니다.
이상으로 전객공에 대한 말씀을 줄입니다.
8세조 전서공 (典書公)
다음 8세조 전서공, 전서공은 전객공의 아드님이시며 휘자는 옳을의(義)자로 외자이시고 벼슬은 고려 때에 호조전서를 지내셨으며 조선조 때에 정헌대부 병조판서 겸지의금부사에 증직이 되셨는데 묘소는 7세조이신 전객공의 묘소와 같은 곳에 모셔져 있으나 불행하게도 이 양대 묘소는 위차 즉 아래 위를 알 수가 없어서 묘소 앞에 설단 즉 제단을 설치하고 제향을 올리고 있습니다.
묘단비는 후손 보국숭록대부 행판중추부사 겸이조판서 판의금부사 지경연 춘추관사 홍문관 대제학 지성균관사 규장각제학 치사 봉조하 명응(命膺) 삼가짓고 후손 가선대부 삼도통제사 겸경상우도 수군절도사 유대(有大) 삼가 지었으며 후손 가의대부 전라도 관찰사 겸병마 수군절도사 전주부윤 유인(有隣) 삼가 씀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향은 음력 한식날에 7세조이신 전객공과 차례로 올리고 있는데 이곳의 제실은 자운재라고 이름하여 부르고 묘소 아래에 위치하여 있으며 주소는 경산군 압양면 유곡동 148번지이고 노정은 대구에서 경산읍이 약 35리 정도이며 경산읍에서 신천동이 15리이고 신천동에서 재사까지 약 5리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곳 경산군이 옛날에는 자인현이라고 하였었기 때문에 이곳 묘역을 자인묘역이라고 하며 자인묘역의 수호와 관리는 영천종중에서 하고 있는데 영천종중 종친들은 봉사공(奉事公) 후손들입니다. 그리고 8세조이신 전서공의 배위 증 정부인 언양김씨께서는 묘소가 경기도 파주군 벽제읍 대자리에 모셔 있는데 제향은 음력 초하루날에 올립니다. 그러면 여기서 잠깐 8세조이신 전서공에 대한 옛날 얘기를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무슨 얘기인고 하니 야설에 의하면 전서공께서 고려 말 공양왕조에 재조하여 계실 때에 이태조가 건국을 하면서 고려의 왕족인 많은 왕씨들을 가혹하게 처형을 하였다고 하는데 이때 전서공께서 왕씨들의 호구장적을 개조하시어 그들의 성자인 임금왕자에 혹을 더한 자로써 즉 예를 들면 임금왕자의 오른쪽 옆에 혹은 더한 구슬옥자인 옥(玉)씨와 또는 임금왕자 위에 들입자를 더한 온전전(全)자의 전씨 그리고 임금왕자의 양쪽 옆을 내려막은 밭전(田)자의 전씨 등으로 변조 개성하여 즉 임금왕자의 성씨가 아닌 다른 자로 성자를 고쳐 주어서 많은 왕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참형의 화를 모면하였었다고 하는 말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이상과 같이 전서공에 대한 말씀을 줄입니다.
9세조 안주공 (安州公)
다음 9세조 안주공, 안주공은 전서공의 아드님이시고 휘자는 많을미자와 성품성자로 미자 성자(彌性)이시며 자는 아들자자와 항상상으로 자상(子常)이시고 고려 우황 9년 서기 1383년인 홍무 계해생이신데
이 어른께서 처음으로 조선조에 들어오셔서 정종대왕 원년인 서기 1399년에 생원과 사헌부 집의를 거쳐서 통정대부와 안주목사 그리고 안주진 병마첨절제사를 역임하시고 증직으로 순충보조공신과 보국숭록대부를 받으셨으며 달천부원군에 봉해지셨는데
세종대왕 11년 서기 1429년인 기유년에 돌아가시었고 묘소는 경기도 장단군 서남면 도라산 승지동에 간좌로 모셔있고 배위이신 증 정경부인께서는 안동권씨의 휘자를 가까울근(近)자로 하시는 권양촌(權陽村)선생님의 따님이신데 묘소는 합폄으로 모셨습니다.
묘표는 9대손 가선대부 개성부유수 종태(宗泰) 삼가 기록하였음으로 되어 있으며 제향은 음력 8월 추석절에 드리는데 이곳은 임진강 건너 휴전선에 접해있는 완충지대로써 임의로 개인이 사사롭게 출입을 할 수가 없고 다만 1년에 한번씩 추석절을 기하여 군부대에 허가를 얻어서 들어갈 수가 있는 곳인데 묘소가 철조망 북방 안으로 약 50미터 정도 안에 계심으로 해서 묘전에 가까이 들어가지 못하고 철조망 밖에 겨우 망제를 올리는데 종회에서 주관하여 행사합니다.
이곳에는 도위공 묘소 등 많은 묘소가 계시는 곳이며 이곳 묘역을 장단선영 안주공 묘역이라고 하는데 노정은 서울에서 통일로로 문산을 지나서 임진각을 경유하여 임진강 건너 약 20리 정도가 됩니다.
이상으로 안주공의 말씀을 줄입니다.
10세조 언양공 (彦陽公)
다음 10세조 언양공은 안주공의 아드님이시며 휘자는 거처할거(居)자와 넓을광(廣)자로 거자 광자이신데 언양현감을 지내시고 통례원 좌통례에 증직되셨으며
세종대왕 5년 서기 1459년인 기묘년에 장례를 모셨는데 묘소는 경기도 파주군 광탄면 신산리 산17번지에 인좌원으로 모셨으며 배위이신 죽산안씨께서는 의인이시며 세종대왕 14년 서기 1483년인 계묘년에 장례를 모셨으며 묘소는 언양공 묘소 약 10보 정도 뒤 옆에 모셨고 상석은 언양공 묘전에 배설한 것으로 같이 사용합니다.
묘표는 7대손 영의정 문중(文重)이 그를 기록하고 7대손 경기감사 문유(文裕)가 그 일을 돕고 8대손 예조판서 종태(種泰)가 그 뒤에 글을 썼다고 하였으며 제향은 음력 10월 초이튿날에 시제를 올리고 이곳의 재실은 파주재라고 하며 주소는 경기도 파주군 광탄면 신산리 194번지인데
수호인의 성명은 도위공파 파주공 문중 서광식씨이고 재실에서 살고 있으며 이곳의 노정은 서울에서 통일로로 금촌을 약간 경유한 봉일천까지 약 80리 정도가 되고 봉일천에서 신산리까지 약 15리 정도가 되는 곳으로써 이곳에도 장령공 묘소 등 많은 묘소가 계시는 곳이며 파주선영 언양공 묘역이라고 하는데 관리행사는 종회에서 하고 있습니다.
11세조 장령공 (掌令公)
다음 11세조 장령공은 언양공의 아드님이시며 휘자는 성팽자와 부를소자로 팽자 소자(彭召)이시고 자는 맏맹자와 아가위당자로 맹당(孟棠)이시며 벼슬은 한림이랑과 사헌부장렴 겸 승문원 참교를 역임하시고 이조참판을 증직으로 받으셨으며
4월21일에 돌아가셨는데 묘소는 언양공 묘소 뒤에 인좌원으로 모셨으며 배위이신 증 정부인 안악양씨께서는 10월7일에 돌아가셨으며 묘소는 합폄으로 모셔있고 묘표는 오래된 것을 7대손 경기도 관찰사 종헌(宗憲)이 새로 세우고 좌의정 종태(宗泰)가 이를 같이 기록하였음이라고 되어있으며 제향은 음력 10월 초이튿날에 언양공의 제향을 올린 후에 드리며 재실과 노정은 언양공과 같습니다.
12세조 참의공 (參議公)
다음 12세조 참의공은 장령공의 아드님이시고 휘자는 진실노고(固)자로 외자이시며 자는 맏백자와 굳을공자로 백공(伯鞏)이신데 벼슬은 이조좌랑과 통정대부 그리고 예조참의를 지내셨으며 증직으로 이조판서를 받으시고 명종대왕 5년 서기 1550년인 경술년 겨울에 연경으로 부임하시던 도중 11월13일에 별세하셨으며
묘소는 경기도 포천군 포천읍 설운리에 계좌원으로 모셔있고 배위이신 증정부인 순흥안씨께서는 성종대왕 25년 서기 1494년인 갑인생이시고 인종대왕 원년 서기 1545년인 을사년 6월24일에 돌아가셨으며 묘소는 합폄으로 모셔있고 제향은 음력 10월 초삼일날에 세향을 올리는데 이곳의 재실은 설운재라고 하며
노정은 서울에서 의정부가 약 40여리가 되고 의정부에서 송우리를 경유하여 묘소까지 약 50여리가 되며 이곳에도 약봉조의 묘소와 더불어 많은 묘소가 계시는 곳인데 이곳 묘역을 포천선영참의공 묘역이라고 하며 수호와 관리는 대종가 댁에서 직접하고 있습니다
13세조 함재공 (涵齋公)
다음 13세조 함재공은 참의공의 아드님이시며 휘자는 골이름해(嶰)자로 외자이시고 자는 뺄정자와 갈지자로 정지(挺之)이시고 아호는 젖을함자와 집재자로 함재(涵齋)이신데 중종대왕 32년 서기 1537년인 정유년 8월23일에 출생하시어서 조선시대에 율곡 이이 선생님과 더불어 대학자로 유명하셨던 퇴계 이황선생님의 수제자로서 많은 학문을 닦으시고서도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으시고 오직 제자들만을 위하여 학문을 훈학하시던 중
천만 뜻밖에도 천수를 다 하지 못하시고 명종대왕 14년 서기 1559년인 기미년 9월22일에 어이없게도 이 세상을 영영 하직하고 마셨으니 그 해에 연세가 겨우 23세 되셨던 것입니다. 아! 이 어찌 우리들 대구 서문의 불행이 아니겠습니까. 일찌기 퇴계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의 후계자는 서 아무개가 될 것이라고 몇 번이고 말씀을 하시며 대단히 기뻐하셨다고 합니다. 만약에 이 어른께서 천수를 다 하시었을 것 같으면 퇴계와 율곡 선생님의 버금가는 대학자가 되셨을 것인데... 오! 애통하고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어른게서 돌아가신 후에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에 증직이 되셨으며 묘소는 참의공 묘소 뒤에 해좌원으로 모셨고 배위이신 증 정경부인 고성이씨께서는 중종대왕 34년 서기 1539년인 기해년 7월13일에 출생하셨으며 광해주 7년 서기 1615년인 을묘년 2월29일에 돌아가시니 묘소를 합폄으로 모셨으며 묘표는 불초 아들 성(渻) 삼가 지었음으로 되어있고
제향은 음력 10월 초삼일에 참의공과 같이 올리는데 재실과 노정은 참의공과 같으며 위패를 대구직할시에 있는 구암서원에 배향하여 모시고 음력 3월 초하룻날과 9월 하룻날에 향사를 올리는데 제향의 주관은 유림에서 행사하고 구암서원의 관리는 판도공 후손이 하고 있는데 이곳 구암서원에는 판도공의 현손이 되시는 귀계공께서 배향이 되어 계십니다.
이 구암서원에는 네 분의 위패가 배향되어 계시는데 우리 소윤공의 후손으로는 휘자를 거(居)자 정(正)자로 하시는 사가정공과 함재공 그리고 약봉조께서 배향되셨고 판도공 후손으로는 귀계공이 배향되셔서 소윤공의 후손이 세분 판도공의 후손이 한분 이렇게 모두 네분의 위패가 배향되어 계신 곳이며 주소는 대구직할시 중구 동산동 229번지입니다.
고성이씨 할머님
그리고 여기서 함재공의 배위이신 고성이씨 할머님에 대한 일화를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고성이씨 할머님의 생애에 대하여는 말씀을 드리려면 한이 없겠습니다마는 간단하게 요점만 추려서 몇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고성이씨 할머님께서는 눈을 보지 못하는 안맹하신 분으로서 우리나라의 역사상 극히 드문 율곡선생님의 모친이신 신사임당과 더불어 3대 현모로 숭앙과 존경을 받는 분이시며 아들의 교육을 위하여 삼천지교 즉 이사를 세 번씩이나 다니셨다고 하는 맹자의 어머님을 능가하신 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할머님께서는 처음부터 선천적으로 안폐하신 것이 아니시고 다섯 살 되시던 해에 부자탕으로 얼굴을 씻고 머리를 감으시다가 노비 즉 종들의 잘못으로 약물이 눈에 들어간 것이 원인이 되어서 백방으로 치료를 하였으나 효험을 얻지 못하시고 결국은 끝내 실명을 하게 되셨던 것이라고 합니다.
고성이씨 할머님의 친정아버님께서는 휘자가 다리고(股)자로 외자이신데 당대에 대부호로서 청풍군수 자리에 계시면서 퇴계선생님과 교분이 두터운 관계에 있었으며 이 어른께서 따님의 연령이 혼기에 이르게 되자 퇴계 선생님의 제자 중에 인재가 많이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시고서 퇴계 선생님에게 제자 중에서 사위감을 하나 중매하여 달라고 청탁을 하셨으며 이에 퇴계 선생님께서는 가장 두뇌가 명석하고 도량이 넓으신 함재공을 천거하시어서 혼사를 이루게 하였던 것이며
혼사날이 당도하여 함재공의 형님이신 춘헌공을 후행으로 모시고 혼행길을 떠나서 규수댁에 거의 이르게 되어 잠시 주막에 들러서 하인들을 쉬게 하고 있을 때에 주모가 신랑을 보고 애석하다는 듯이 '신랑 도련님은 참 잘 생기셨는데...' 라고 하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것을 들은 신랑측 하인들이 후행으로 가시는 춘헌공에게 고하니 춘헌공께서 주모를 불러 놓고 지금 주모가 한 말이 무슨 뜻이냐고 호통을 하시면서 물으시니 주모는 어쩔 수 없이 대답을 하는데 규수가 앞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 아닌가. 주모에게 이 말을 들은 신랑과 그 일행에게는 청천의 벽력과 같은 말이 아닐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리하여 형님이시며 후행이신 춘헌공께서는 이윽고 신랑인 동생에게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그러한 줄을 모르고 속아서 정혼을 하였던 것이니 파혼을 하고 되돌아가자고 제의를 하였으나 신랑이신 함재공께서는 잠시 생각을 하신 끝에 '형님 아니되옵니다. 규수가 비록 장님이라고는 하겠지만 그 규수에게 저의 사주를 보내어서 서로 정혼을 하였으니 이미 저와는 백년가약을 맺은 것이옵니다' 라고 하시면서 신부댁에 이르러서 혼례식을 거행하시니 신부댁은 물론이려니와 인근 주위의 사람들이 함재공의 덕망을 높이 치하하였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신부의 아버님이신 청풍군수께서 사위인 함재공의 덕행에 감탄하셨다고 하는데 이 어찌 소인들로써 할 수 있는 일이며 대인의 덕행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러나 함재공께서는 그와 같은 덕행을 쌓으셨는데도 불구하고 하늘은 그 어른을 시기 하였음인지 혼례식을 올리고 막 첫 아드님이신 약봉공을 낳으신 후 겨우 첫 돌을 지나면서 앞을 보지 못하시는 불구의 부인과 첫 돌의 옥동자를 남겨 두신 채 영영 다시는 돌아오실 수 없는 길로 떠나가시고 마셨습니다.
이에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으신 고성이씨 할머님께서는 그토록 다정하게 보살펴 주시고 아껴 주시던 남편이신 함재공과의 사별의 슬픔을 이기지 못하시고 끝내에는 함재공의 뒤를 따르려고 몇 번이고 생각을 하셨지만 하늘과 같으셨던 남편이신 함재공을 위하시는 길은 그 분의 뒤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 남겨 주시고 가신 어린 아들을 훌륭하게 키워서 가문을 빛내는 것 뿐이라고 굳게 굳게 다짐을 하신 끝에 이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훌륭하게 키우려면 서울로 가셔야 되겠다고 생각을 하시고서
가산을 정리하신 후 노복들을 자유로이 내 보내시고 심복 노비 몇 사람만 데리시고 경상도 안동 땅에서 서울로 올라오시어 남대문 밖 약현이라고 하는 지금의 중림동에 있는 약현 천주교회의 자리에 집을 장만하시고 생활을 하시면서 독특한 음식을 창안하시어 하인들을 시켜서 제조케 하시니 이 특수한 음식은 삽시간에 서울 장안에 명물화 되었으며 이 특수한 음식 솜씨는 후에 며느님에게로 이어지고 왕실에까지도 알려져서 임금님에게 진상을 하게되니 이때에 임금이신 선조대왕께서 이 음식맛에 감탄을 하시고서 약현땅에 살고 있는 약봉가의 특별한 음식이라고 하시면서 약자를 붙여서 약밥, 약과, 약주라고 하라 하시며 이름을 지어주셨다고 하는데 이밖에도 다식과 산자 그리고 강정 등도 모두 다 고성이씨 할머님의 창작음식이라고 합니다.
이리하여 상당한 재산을 모으신 이씨 할머님께서는 대지를 새로 마련하시어서 저택을 크게 신축하시는데 식구에 비하여 너무 집이 크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지금 당장에는 그렇게들 생각이 될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죽으면 복을 입을 사람들만 하여도 이 정도는 되야 할 것이라고 말씀을 하셨다고 하며 또 도목수의 실수로 상기둥이 거꾸로 세워진 것을 손으로 더듬어 만져 보시고는 지적을 하시어 바로 잡게 하시고 앞으로 우리 집에 일산대가 들어오게 될 터인즉 큰 대문의 턱을 높이 하라고 하셨다는데 이 일산대라고 하는 것은 높으신 대감님들께서 행차를 하실 때에 햇볕을 가리기 위하여 시종자들이 들고 다니는 큰 우산과 같은 것입니다.
대구서씨 문중의 벼슬 현황
이와 같이 안맹하신 우리 고성이씨 할머님께서는 조선조의 선조대왕과 인조대왕 때에 저 유명하셨던 우리들의 명조이신 충숙공 약봉 할아버님을 위대하게 길러내신 분이시며 비록 앞은 보지 못하셨지만 그분으로 말미암아 우리 대구서씨 문중에 약봉조 이하로 상신 즉 정승이 아홉 분이시고 증직 영의정이 열한 분이시며 시호를 받으신 분이 30여명에 부마와 국구 그리고 왕비가 한 분씩 계시고 대과를 지내신 중신 지금의 장관급이 55명이시며 증직 중신이 28명 그리고 뉘집에 정승이 몇 분이냐고 하기보다 대제학이 몇 분이냐고 할 만큼 정승 되기보다 쉽지않은 옥당벼슬의 대제학이 무려 26명이나 되며 불천지위가 네분 서원 배향이 세분 무과 및 소과 급제가 각각 수 백 명씩에 이릅니다.
그 중에서도 특기할 수 있는 것은 삼대(三代) 정승(領相 諱 宗泰, 左相 諱 命均, 領相 諱 志修)에 이어서 삼대 대제학(諱 有臣, 榮輔, 箕淳)을 지내시었는데 이렇게 6대를 계속한 관록과 그 영예는 다른 성씨에서는 찾아 볼 수가 없는 것이며 또한 함재공의 배위로부터 청문공의 배위에 이르기까지 11대(涵齊公諱嶰贈領議政, 忠肅公諱渻贈領議政, 都尉公諱景霌儀賓崇德大夫達城尉, 南原公諱貞履贈領議政, 參議公諱文尙贈領議政, 晩靜當諱宗泰領議靜, 文翼公諱命均左議政, 文淸公諱志修領議政, 文貞公諱有臣贈議政府左贊成弘文館藝文館大提學, 文憲公諱榮輔官止輔國崇祿大夫弘文館藝文館大提學, 淸文公諱箕淳官止崇祿大夫弘文館藝文館大提學) 동안을 계속하여 정경부인이신데 이러한 관록은 전 세계적으로도 그 실례가 드문 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정경부인이 되시려면 바깥어른께서 종일품관 이상이라야 되는 것인데 종일품관이라고 하면 지금의 국무총리와 더불어 3부 수뇌와 같은 지위를 말하는 것이며 장관급도 이에 해당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듯이 우리 고성이씨 할머님께서는 비록 21세의 어리신 연세에 혼자되시어서 부부의 해로는 누리지 못하시었으나 77세까지 장수를 하시면서 아드님은 한 분 밖에 기르지 못하셨지만 손자가 네 분에 증손이 열 다섯 분이시며 현손이 쉰 세 분으로 부귀와 영화를 마음껏 누리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고성이씨 할머님께서 낳으셔서 자라시던 친정댁은 명문대가로 당대에 대부호(재벌)이었으며 그 저택이 아주 웅장한 대궐 같은 집인데 건축양상이 옛날 우리나라 가옥의 전형적인 ㄱ자형이 아니고 보기 어려운 ㅍ자형으로 그 규모가 아주 대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집을 임청각이라고 이름하는데 정부에서 보물 제182호로 지정을 하여 보존되고 있으며 서울에서 대학교수들이 옛날의 건축양상을 조사하고 또 연구하러 자주 들리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으며 주소는 경상북도 안동시 법흥동에 있습니다.
그런데 옛날에 이 집의 주인이시었던 고성이씨 할머님의 친정아버님께서는 후사 즉 아드님이 없으시어서 결손되시었는데 우리의 약봉할아버님의 유명으로 안동지방에 살고 계시는 첨추공의 후손들이 외손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안동시에서 조금 떨어진 안동군 일직면 소호리 망호동 562번지에 우리들의 문화재인 보물 제475호로 지정된 소호헌 이 있는데 이 소호현은 함재공께서 빙부이신 장인 어른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며 이 소호현의 내당에서 약봉공을 낳으셨는데 이곳에 약봉태실 이라고 하는 현판이 걸려 있으며 외채인 별당은 함재공께서 서재로 쓰시면서 공부도 하시며 또한 제자들을 훈학하시던 곳이라고 합니다. 이상으로 함재공에 대한 말씀을 줄입니다.
14세조 약봉 충숙공 (藥峯 忠肅公)
다음 14세조 약봉, 약봉조는 함재공의 아드님이시며 휘자는 물줄성(渻)자로 외자이시고 자는 검을현자와 기록할기자로 현기(玄記)이시며 아호는 약약자와 산봉우리봉자로 약봉(藥峰)이시고 시호는 충성충자와 엄숙할숙자로 충숙(忠肅)이시며 명종대왕 13년 서기 1558년인 무오년 5월19일 생이신데 이 어른께서 출생하신 후 막 첫 돌을 지내자마자 아버님을 여의시고 편모슬하에서 자라면서 이율곡과 송귀봉의 두 분 선생님들의 가르침을 받으시고 공부를 하신 후 관직에 나아가셔서 사헌부 감찰과 예조좌랑 그리고 삼남지방의 암행어사와 경상도, 강원도, 황해도, 함경도, 평안도, 경기도 등 6도 관찰사를 역임하시고 형조와 병조, 호조와 공조 등 4조 판서를 지내셨으며 관지숭록대부 판중추부사 겸 판의금부사 지경연 춘추관사 동지 성균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등을 두루 역임하신 후 서기 1629년에 보국숭록대부 병조판서 이귀(李貴)와 보국숭록대부 연능부원군 이호민(李好閔)과 가선대부 파평군 윤동로(尹東老) 등 12인이 뜻을 같이 하시어서 연지기로회(蓮池耆老會)를 조직하시고 그곳에서 학문을 연구하고 계시다가 인조대왕 9년 서기 1631년인 신미년 4월18일에 별세하시니 향년이 74세 되셨습니다. 돌아가신 후 증직으로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를 받으셨으며 충숙으로 시호를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위에서 말한 기로회라고 하는 곳은 일명 기로소 또는 기영회라고도 하는데 노령의 왕이나 노령의 고관을 우대하기 위하여 설치된 관아로써 고령의 왕이나 현직에 있는 정2품관 이상의 문신(文臣)들 중에서 70세 이상이 된 노인들만 들어갈 수 있는데 이 기로소에 들어가면 영수각에 영정이 걸리고 연회가 열리며 전답과 노비를 하사 받았다고 합니다.
약봉조의 묘소 는 포천 설운리에 참의공의 묘소 왼쪽 아래에 계좌원으로 모셨으며 배위이신 증 정경부인 여산송씨께서는 명종대왕 9년 서기 1554년인 갑인 7월10일생이시고 광해주 14년 서기 1622년인 임술년 12월6일에 돌아가시니 묘소를 합폄으로 모셨습니다. 그런데 이 여산송씨 할머님의 친정 부친이신 광주공께서는 후사가 없으시어 외손이신 도위공께서 제사를 모시다가 지금까지도 도위공의 후손이 외손 봉사를 하고 있는데 산소는 경기도 양주군 은현면 하패리에 계시며 제향은 음력 10월 초이랫날에 도위공의 둘째 아드님이신 파주공 종중에서 시제를 지내드리고 있으며 광주공의 휘자는 편안영(寧)자로 외자이시고 광주공의 조부님이신 숙정공께서는 휘자가 지나칠질(跌)자로 외자이시며 여원 부원군에 봉해지셨는데 영의정을 지내셨습니다.
그리고 또 이 여원 부원군의 손녀 따님께서는 약봉조의 증백부이신 춘헌공의 배위가 되십니다. 충숙공 약봉조의 신도비 는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지경연 춘추관사 성균관사 홍문관대제학 세자우빈객 김상헌(金尙憲)이 지었으며 자헌대부 형조판서 겸오위도총부 도총관 오준(吳竣)이 쓰고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세자좌빈객 김광현(金光鉉)이 전자를 썼으며 묘비는 가선대부 예조참판 겸동지춘추관사 조희일(趙希逸)이 지었음으로 되어있습니다. 제향은 불천위를 받으셔서 대종가 댁에 묘우(廟宇)를 세워서 사당을 모셔놓고 대종손과 더불어 많은 후손들이 참사하여 기제사를 지내고 있는데 재실 과 노정은 포천 설운리에 참의공과 같습니다. 또 약봉조께서는 대구에 있는 구암서원에 배향이 되시어서 그곳 구암서원에서도 유림에서 주관하여 음력 3월 초하루날과 9월 초하루날에 춘추로 제향을 올리고 있습니다.
불천위 (不遷位)
그런데 좀 전에 드린 말씀 중에서 약봉 할아버님께서는 불천위를 받으셔서 기제사를 지낸다고 하였었는데 이 불천위에 대하여 잘 모르고 계시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불천위가 무엇인고 하니 옛날 조선시대에 국가에 대하여 공훈이 크신 분들에게 왕의 어명 즉 임금님의 특명으로 이 분들이 사망하신 뒤에 기제사를 4대만 지내고 그치지 않고 사당을 모시고 계속하여 대대로 내려가면서 기제사를 지내는 것을 불천위 혹은 불천지위라고도 하며 또는 부조위 그리고 부조지전이라고도 하는데 보통 불천지위라고들 합니다.
그런데 우리 대구서씨 중에는 불천지위를 받으신 분들이 네 분 계시는데 휘자를 거자 정자로 하시는 사가정공과 충숙공 약봉조 그리고 약봉조의 네째아드님이신 달성위 도위공 또 한 분은 전첨공의 증손이 되시며 영조대왕의 국구가 되시는 달성부원군이신 효희공 이렇게 네 분 어른들께서 불천위를 받으셨습니다. 그럼 여기에서 또 우리나라의 제례법에 대하여 한 말슴 드리겠습니다.
제례법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우리나라의 제례법에는 4대 즉 아버지와 할아버지 그리고 증조부와 고조부 이렇게 4대까지만 기제사를 지내고 5대가 되면 묘제 즉 한식 구일 시제 등으로 산소에 가서 제사를 지내는 것인데 이 묘제는 위토가 마련이 되신 분들은 제향을 올리지만 그렇지 못하고 위토가 없으면 위토를 마련할 때까지는 묘제를 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고조부의 현손인 4대 종손이 사망을 하였다고 해서 바로 묘제를 지내는 것이 아니고 4대 종손은 항렬과 연령별로 차례로 돌아가면서 기제사를 지내다가 4대의 현손이 지손들까지도 모두 사망을 한 후에라야 비로소 묘사를 지내는 것인데 이렇게 옮겨 돌아가면서 지내는 제사를 체천제라고 하며 옮겨 돌아가지 않고 종가인 종손 댁에서 사당집인 사우에 사당을 모셔놓고 계속하여 대대로 내려가면서 지내는 기제사를 부조제라고 하는데 이 부조제 즉 부조지전은 개인들의 뜻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임금님의 윤허가 있어야 되었던 것 입니다. 이제 그만 제례에 대한 말씀을 줄이고 약봉조의 행적에 대하여 몇 말씀 드리겠습니다.
약봉조의 행적
약봉조의 신도비 비문에 의하면 약봉조께서 도승지가 되시어 경연에서 임금을 모시고 계실 때에 한음(漢陰)과 백사(白沙) 이 두 분의 현상을 구원하시고 이어 정인홍(鄭仁弘)의 무리가 성우계(成牛溪)와 정송강(鄭松江)을 헐뜯고 무고하는 것을 배척하셨다고 하며 선조대왕 25년 서기 1592년인 임진년에 왜적들이 쳐들어와서 서울을 핍박하니 임금님게서 잠시 서울을 피하실 때에 약봉조께서도 임금님을 호종(扈從)하여 가시던 도중에서 호소사인 황정욱(黃廷彧)이 약봉조를 종사관으로 정하여서 황정욱과 같이 두 분 왕자와 함께 함경도 회령에 이르렀을 때에
국경인(鞠敬仁)이라고 하는 그 곳 토민이 난을 일으켜서 호소사인 황정욱이 두 왕자와 더불어 약봉조와 함께 여러 제신들이 적의 포로가 되었었는데 약봉조께서 스스로 홀로 계책을 써서 탈출을 하시어 격서로 육진의 의병을 일으켜 그 곳 북평사 정문부(鄭文孚)에게 주고 방략을 가르쳐 주시어 즉 작전지시를 하시어서 국경인과 그들 일당을 물리치시고 두 분 왕자와 많은 재신들을 무사하게 구해 내셨으며 또 길주와 명천에서 800여 적을 참수하시고 이어 그 괴수를 잡아 참수하시어 북로길의 적을 완전히 쳐서 소탕을 하시었으나 그러한 공은 북평사 정문부에게 미루어 양보하시고 스스로 당신께서는 공이 있는 체 하지 않으셨다고 하는데, 이리하여 북로의 훈공으로 북평사 정문부는 사후에 바로 불천위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 후 약봉조께서는 선조대왕으로부터 어리신 영창대군을 잘 보호하라는 어필친서로 된 봉함칙서를 유명으로 받으셨는데 약봉조와 함께 동양위의 부친이신 신상촌 흠(欽)과 영의정 유영경(柳永慶) 우의정 한응인(韓應寅) 판서 허성(許筬) 금계군판서 박동량(朴東亮) 그리고 판서 한준겸(韓浚謙) 등과 더불어 모두 일곱 분들이 이 봉서 유명을 받으셨다고 해서 유명 7신이라고 합니다.
그 후 선조대왕께서 승하하시고 광해주가 즉위를 하였는데 이 광해주는 대북파의 영수로 후에 영의정을 지낸 바 있는 정인홍과 이이첨 등의 도움으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으니 광해주 때의 세도는 물론 대북파의 손에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리하여 그렇게 정국이 바뀌게 되니 그들 대북파의 장차 화근이 될 수 있는 영창대군을 제거하는데 혈안이 되었던 것은 물론이며 영창대군을 옹위하려고 하는 세력인 영창대군의 어머님이신 인목대비 세력의 뿌리를 뽑기 위하여 인목대비의 친정 부친이신 연흥부원군 김제남(金悌男) 일가(一家)를 몰살시키려고 하였었으며 이어서 선왕이신 선조대왕께서 가장 가깝게 믿고 부리시던 일곱 분 중신들에게 친히 각각 내리셨던 그 봉함 칙서가 가짜라고 생트집을 하여 선왕의 옛 중신들을 옥사에 연루시켰으며 많은 옛날 중신들이 화를 당하게 되었으나 이것이 이른바 광해주 5년인 서기1613년에 있었던 저 유명한 계축사화였던 것입니다.
이리하여 약봉조께서도 영창대군으로 인한 계축옥사에 연루되시어 의금부에 체포되셔서 단양으로 귀양을 가셨다가 영해 지금의 경상북도 양양군 입안면으로 옮기셨으며 후에 원주로 옮기셔서 11년 동안이나 기나긴 세월을 적소에서 귀양살이를 하시다가 광해주 15년 서기 1623년인 계해년에 인조대왕이 반정을 하신 뒤에 풀어 불러 들여오셔서 형조판서를 배수 받으셨다고 합니다.
물태위선 (勿怠爲善)
그런데 약봉조께서 계축옥사에 연루되시어 귀양 길을 떠나가시면서 자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물이화환"으로 "태어위선" (勿以禍患 怠於爲善)하라고 하시며 유훈(遺訓)으로 이르신 말씀이 있는데 무슨 말씀인고 하니 환란이 왔다고 해서 착한 일을 하는데 게을리 하지 말아라 라고 하신 말씀이신데 좀 더 구체적으로 말을 하자면 내가 비록 귀양을 가더라도 너희들은 나를 귀양 보내는 그 사람들을 미워하지 말아라 라고 하는 뜻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이 물이화환으로 태어위선 하라고 하신 말씀의 본문을 지금은 좀 줄여서 그냥 물태위선 (勿怠爲善)이라고 하는데 이 물태위선의 뜻은 착한 일을 하는데 게을리 하지 말아라 입니다. 하여간 이 약봉조의 유훈을 한문으로 물태위선이라고 써서 액자에 넣어서 벽 위에 걸어놓고 자손들에게 계훈으로 가르치고 있는 일가 댁이 많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잠깐 계축옥사 때에 가장 큰 참화를 당하였던 한 가족의 일화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계축옥사
그 대상의 가족은 연안김씨 댁으로 선조왕의 왕후이신 인목대비의 친가이신데 선조대왕께서 승하하시고 광해주가 즉위하자 정권을 손에 잡은 이른바 대북파의 거두인 이이첨과 정인홍 등이 인목대비의 세력을 없애기 위한 방안으로 인목대비의 친정 부친이신 연흥부원군을 역적으로 몰아 그의 가족을 완전히 멸족을 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얘기를 좀 거슬러 올라가서 말씀을 드리겠는데 인목대비의 친정 아버님이신 연흥부원군과 우리 약봉조의 네째 아드님이신 달성위 도위공과는 사돈간으로 도위공의 따님께서 연흥부원군의 아드님이신 김규(金珪)공과 결혼을 하셔서 휘자를 홍자 석자(弘錫)로 하시는 아드님을 낳으시어 두 살이 되던 해에 계축옥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에 계축옥사에 연흥부원군 댁 전 가족이 참화를 당하려 할 때에 도위공의 따님이 되시는, 아기 김홍석공의 어머님께서 이제 겨우 첫 돌을 지난 아기의 생명이라도 구하여 대를 이어보려는 생각으로 유모를 급히 불러서 아기를 등에 업혀주시고 바로 이웃에 계시는 아기의 외가댁으로 황급히 데려다 드리라고 지시를 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유모는 아기를 업고 한 걸음에 외가댁으로 달려가서 아기를 내당에 들여보내고 "부원군댁 도련님이 옵니다. 잘 피신을 시켜 주십시요" 라고 당부의 말씀을 전하였을 때에 곧 바로 의금부 포교가 아기 김홍석공의 뒤를 따라 왔었는데 아기의 외조모님이시며 선조대왕의 맏 따님이 되시는 정신옹주님께서 지체 없이 아기를 받아 치마 속에 은신을 시켜서 가까스로 그 포악한 참화를 면하였다고 합니다.
그 후 이 아기 김홍석공은 외가댁인 달성위 궁(宮)에서 양육을 하였으며 계축옥사가 있은 지 10년 뒤인 계해년에 인조대왕의 반정으로 다시 청천백일을 보게 되었으니 이 분 홍석공으로 말미암아 연안김씨 연흥부원군의 후손이 뒤를 잇게 되었으며 그 분의 후손으로 정승이 3분 이시고 당상 당하관이 50여 분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계축옥사 당시에 연흥부원군께서는 광해주에게 사약을 받아 드시고서 별세를 하였는데 장례를 예장으로 모시는 것은 고사하고 역적의 시신이라고 하여 감히 누가 아무도 손을 대려고 하는 사람이 없었을 때에 위험을 불구하신 약봉조의 협조와 달성위의 주선으로 양주 땅 서산에 안장을 하여 드렸다고 합니다. 위의 말씀은 연안김씨들은 물론 상식이 있는 분들이라면 누구나 다 잘 알고있는 사실인 것입니다.
이러한 연관으로 해서 우리 대구서씨의 약봉 후손들과 연안김씨의 연흥부원군 후손들은 각별한 세의를 가져 왔었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계속하여 세의를 더욱더 돈독히 하여야 될 것입니다.
어린 약봉조의 지혜
끝으로 약봉조의 지혜로우셨던 재담을 한 말씀 드립니다.
약봉조에 대한 말씀을 드리려면 한이 없겠습니다마는 약봉조께서 어리실 때에 수학을 하시던 중에 있었던 일화를 한 말씀만 드립니다.
약봉조께서 여러 동접들과 더불어 공부하고 계시던 어느날 스승이신 송귀봉(宋龜峯 諱 翼弼) 선생님께서 제자들의 재질을 시험해 보려는 뜻으로 여러 제자들을 둘러 보시고서 하시는 말씀이 "너희들 중에서 누가 방안에 있는 나를 문 밖으로 유인하여 내보낼 사람이 있겠느냐?" 하고 하문하시니 아무도 대답을 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약봉조께서 "선생님! 방안에 앉아 계시는 선생님을 문 밖으로 나가시게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선생님께서 지금 바로 문 밖에 나가셔서 계신다면 제가 지체없이 방 안으로 들어 오시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말씀을 하시니 선생님께서는 잠시 생각을 하시더니 "방 안에 있는 나를 문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나 문 밖에 있는 나를 방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이나 어렵기는 한가지 일터인데..." 하시면서 의아하게 생각을 하시고 "약봉에게 네가 무슨 재주로 문 밖에 있는 나를 방 안으로 들어오게 할 수 있다는 말이냐?" 하시면서 문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이 때에 약봉조께서는 "선생님! 이제 들어 오십시요" 하시면서 "제가 방 안에 앉아 계시는 선생님을 문 밖으로 모셔냈습니다" 라고 말씀을 하시니 선생님께서는 깜짝 놀라시면서 그제서야 약봉의 술책에 속았다고 생각을 사시고 껄껄 웃으시면서 방 안으로 들어오시니 약봉께서는 또 "선생님! 선생님께서 문 밖에 나가셨다가 바로 방으로 들어오셨으니 제가 선생님을 문 밖으로도 모셔냈으며 또 문 밖에 계시는 선생님을 방 안으로도 들어오시게 하였습니다" 라고 하시니 선생님과 더불어 모든 제자들이 약봉의 재능과 지모에 감탄을 하셨다고 합니다.
이상으로 갑편(원파)의 대략을 마치고 다음은 각 파의 분파조를 족보의 편목 순서대로 을편부터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을편 만사공 (乙編 晩沙公)
만사공은 15세조로 약봉조의 맏아드님이시며 휘자는 볕경(景)자와 비우(雨)자이시고 자는 베풀시(施)자와 말백(伯)자이시며 아호는 늦을만자와 모래사자로 만사(晩沙)이신데 선조대왕 6년 서기 1573년인 계유년 4월29일에 출생하시어서 정주목사를 거쳐 통정대부에 이르렀으나 광해주의 어지러운 정사로 관직을 떠나와 가정에서 머무르시다가 서기 1623년인 계해년에 인조대왕이 반정을 하신 뒤 1년 후 1624년인 갑자년에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다시 입궐하시어 왕을 호종(扈從)하셨고 그로부터 3년 뒤에 정묘호란을 당하여 임금님의 어가가 강화도로 행하실 때에 간관으로 시종을 하셨으며 그 후 이조참판을 배수 받으신 뒤 경기감사로 계실 때에 또 다시 병자호란을 당하시어 어가가 남한산성으로 행하실 때에 상감을 호종하셨고 그 후 가의대부와 대사헌 그리고 형조판서로 발탁되셨으며 곧 이어 우리 서문에서는 처음으로 정1품관인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우의정을 배수받으셨습니다.
이와 같이 공께서는 급진으로 진급을 뛰어 올라서 재상이 되신지라 조야 대신들이 사모하여 우러러 보았다고 하는데 얼마 후에 뜻하지 않은 질병으로 정사를 볼 수가 없게 되신지라 영상의 자리에는 이르지 못하신 채 관직을 중추부로 옮기시고 기영회에 들어가서 계시다가 향년이 73세 되시던 인조대왕 23년 서기 1645년인 을유년 2월30일에 별세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어른께서는 돌아가시기 전에 자손들에게 유명으로 시호를 하사받지 말 것과 신도비도 세우지 말라는 말씀을 남기셔서 간략하게 역관과 세대만을 기록하여 묘표만 세웠다고 합니다. 묘소는 처음 양주땅에 예장으로 모셨다가 7년 뒤인 신묘년 겨울에 지금의 경기도 포천군 영중면 거사리 금화봉 언덕 유좌원에 예장으로 옮겨 모셨습니다.
묘표는 손 정헌대부 병조판서 겸 세자좌빈객 문중(文重) 삼가 지었음으로 되어 있으며 배위이신 창령성씨는 선조대왕 27년 서기 1594년인 갑오년 12월6일에 별세하셨는데 묘소는 포천읍 설운리 충숙공 묘소 왼쪽의 자좌로 모셨으며 묘표는 손 자헌대부 형조판서 문중(文重) 삼가 기록하였음이라 하였으며 계배이신 정경부인 창령성씨께서는 선조대왕 8년 서기 1575년인 을해생이시고 인조대왕 11년 서기 1633년인 계유년 7월27일에 별세하시니 묘소를 합폄으로 모셨습니다.
세향은 음력 10월 초오일날에 시제를 드리고 있으며 수호와 관리는 대종가 댁에서 하는데 묘소의 노정은 서울에서 의정부와 포천읍을 조금 지나 만세교를 경유하여 양문리 앞 다리에서 금화봉으로 약 500미터 정도가 됩니다. 이상과 같이 을편의 분파조이신 만사공의 대략을 줄이고 우리 대구서씨의 족보를 처음 창간하신 만사공의 장손이 되시는 몽어상공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만사공파 계속)
16세조 화곡공 (華谷公)
여기서 몽어상공을 말씀드리기 전에 먼저 몽어상공의 부친이 되시는 화곡공부터 말씀을 드립니다.
화곡공은 16세조로 만사공의 맏아드님이시며 휘자는 으뜸원(元)자와 신리(履)자이시고 자는 큰덕(德)자와 터기(基)자이시며 아호는 빛날화자와 골곡자로 화곡(華谷)이신데
선조대왕 29년 서기 1596년인 병신년 12월8일 생이시며 관직은 공조참의와 관지가선대부 호조참판 경상감사 함경도관찰사를 역임하시고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에 증직되셨는데 현종 4년 서기 1663년인 계묘년 4월23일에 별세하셨으며 묘소는 만사공 묘소 오른쪽 유좌에 모셨습니다.
화곡공에 대하여는 이만 생략하고 몽이상공을 말씀드립니다. (만사공파 계속)
18세조 몽어상공 (夢漁相公)
몽어상공은 시호로 공숙공이라고도 하는데 17세조로 화곡공의 양아드님이시며 휘자는 글문(文)자와 무거울중(重)자이시고 자는 길도(道)자와 부를윤(潤)자이시며 아호는 꿈몽자와 고기잡을어자로 몽어(夢漁)이신데 이 어른께서 영상(領相)이시기에 아호인 몽어에다가 상자를 더해서 몽어상공이라고 하며 시호는 공순공자와 엄숙할숙자로 공숙(恭肅)이신데 도위공의 맏아드님이신 휘자를 곧을정(貞)자와 신리(履)자로 하시는 남원공의 둘째 아드님으로 인조대왕 12년 서기 1634년인 갑술년 2월20일에 출생하셔서 대종가 댁의 당숙이신 화곡공의 아드님으로 입양하셔서 대종손이 되셨습니다.
공께서는 효종 8년 서기 1675년에 진사에 합격하시고 숙종 6년인 서기 1680년에 상주목사가 되시고 다음 해에 광주부윤에 발탁된 후 경상도관찰사를 거쳐서 어영대장이 되었으며 이어 예조참판과 공조참판이 되시고 1687년에 형조판서에 오르시고 다음 해에 관지중추부사와 우참찬이 되신 후에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오시어 숙종 20년인 서기 1694년에 병조판서 겸지의금부사에 등용되시고 1696년에 훈련대장이 되셨으니 극히 드문 양국대장을 역임하셨으며 또 다시 형조판서와 병조판서를 역임하시고 이어서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우의정을 배수 받으셨으며
1698년에 사은사로 또 다시 청나라에 다녀 오신 후 1699년에 의정부 좌의정에 오르시고 다음 해인 1700년에 우리 서문에서는 최초로 일인지하에 만인지상인 영의정이 되어 계시다가 노년에 판중추부사로 옮겨 계시면서 기로소에 들어가서 계시다가 숙종대왕 35년 서기 1709년인 기축년 정월 초육일날에 별세하시니 향년이 76세 되셨습니다.
묘소는 장단선영 안주공 묘역인 장단군 장단면 백학산 아래 자좌원으로 모셨는데 제항은 음력 8월 추석절에 드립니다. 그런데 이 어른께서 처음으로 숙종대왕 28년 서기 1702년인 임오년에 우리 대구서씨의 세보를 창간하셨는데 그 후로 지금까지 모두 아홉번의 족보가 간행되었습니다.
위와 같이 몽어상공의 대략을 줄이고 만사공의 종가인 대종가 댁의 주소를 말씀드립니다.
우리 대구서씨의 대종손은 시조이신 소윤공의 28대손인 동(東)자 항렬의 동성(東晟)씨 이며 대종가 댁의 주소는 경기도 포천군 포천읍 설운리 119번지인데 이 곳에는 동성씨의 조모님과 더불어 어른들만 계시고 동성씨는 직장 관계로 서울 도봉구 쌍문동 120-46번지에 거주하고 있으며 제사 때에는 들어가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서울 대종가 댁의 전화번호는 992-3480 이고 포천은 32-7156 입니다.
이상으로 만사공파를 대략으로 줄입니다.
병편 전첨공 (丙編 典籤公)
전첨공은 15세조로 약봉조의 둘째 아드님이신데 휘자는 볕경(景)자와 음식수(需)자이시며 자는 베풀시(施)자와 가운데중(中)자이시고 선조대왕 8년 서기 1575년인 을해년 2월16일에 출생하셨으며
18세가 되시던 해인 서기 1592년에 임진왜란을 당하셨었는데 아버님이신 약봉께서는 임금님의 어가를 호종하여 가시고 어머님께서만 집에 남아 계시니 공께서 어머님을 모시고서 왜적을 피하여 함경북도 부평까지 가서 계실 때에 왜구가 이미 그 곳까지 침입하였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시고 황급히 어머님을 등에 업고 무성한 가시나무를 헤치시며 낭떠러지로 건너 가셔서 가까스로 화를 면하셨는데 충숙공께서 그 소식을 들으시고 그 지극한 효성을 칭찬하셨다고 합니다.
그 후 서기 1605년인 을사년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시어 내시교관을 배수하시고 통례원 인의로 계셨으나 광해주가 충숙공을 계축옥사에 연루시켜서 유배하였으므로 관직을 사임하시고 집에 돌아와 계시다가 인조반정 후에 다시 관직에 나아 가셔서 양천현감을 역임하시고 호조좌랑과 형조정랑을 거쳐 종친부 전첨이 되셨다가 단양군수로 부임하셨는데 이 곳은 아버님이신 충숙공께서 적거 생활 즉 귀양살이를 하시던 곳이라 온갖 정성과 노력으로 백성들을 사랑하셨다고 합니다.
그 후 그 곳 단양에서 관직을 물러나와 제천에서 잠시 머물러 계신 후 포천으로 이거하여 계시다가 인조대왕 24년 서기 1646년인 병술년 11월 21일에 별세하시니 향년이 72세 되셨으니 돌아가신 후 이조판서에 증직되셨습니다. 묘소는 경기도 포천군 소흘면 송우리 산28번지인 태봉에 자좌원으로 모셨고 배위이신 증 정부인 광주김씨는 선조대왕 7년인 갑인년 정월 24일에 별세하셨는데 묘소를 합폄으로 모셨습니다.
묘표는 6대손 숭록대부행 이조판서 겸 판의금부사 지경연 춘추관사 홍문관 제학 유린(有隣)이 삼가짓고 7대손 통정대부 이조참의 겸 규장각 경 교직각 지세교 용보(龍輔) 삼가 씀으로 되어 있으며 제향은 음력 10월 초5일에 시제를 올리며 로정은 서울에서 의정부를 경유하여 송우리까지 약 80리 정도가 됩니다.
수호와 관리는 전첨공 종손이 묘하의 송우제에서 생활을 하면서 하고 있는데 종손은 전첨공의 14대손이며 동(東)자 항렬로 동규(東奎)씨이고 주소는 경기도 포천군 소흘면 송우리 219번지이며 전화는 32-1068번입니다. 이상과 같이 병편의 분파조이신 전첨공의 대략을 줄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 드릴 말씀이 있는데 무슨 말씀인고 하니 전첨공 후손으로 인해서 우리 대구서씨의 25세의 광(光)자 항렬과 26세의 재(載)자 항렬의 항렬자가 개정이 된 일이 있었는데 어떻게 된 것인고 하면 먼저 효희공부터 말씀을 드립니다.
(전첨공파 계속)
효희공 (孝僖公)
효희공(孝僖公)은 전첨공의 증손이 되시고 영조대왕의 국구로서 정성왕후의 친정 아버님이 되시며 달성부원군에 봉해지시고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에 증직이 되셨으며 휘자는 종(宗)자 제(悌)자이신데 이 어른의 현손으로 휘자가 용(龍)자 보(輔)자이시며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에 오르신 분이 계시고
또 이 어른의 증손이 광(光)자 범(範)자로 광범씨인데 이 분은 호가 위산(褘山)이며 시호는 익헌(翼獻)이시고 조선조 말 철종 10년 서기 1859년인 기미년 11월8일생으로 숭록대부 병조참의를 지내시고 고종 21년 서기 1884년에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홍영식 등과 뜻을 같이하여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청나라 군대의 개입으로 3일만에 실패를 하고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서 머무르다가 10년 뒤인 서기 1894년에 있었던 갑오경장으로 인한 김홍집 내각의 개화정부가 수립되자 귀국하여 법무대신과 고등재판소소장 그리고 학부대신을 역임하신 분인데 이 분께서 갑신정변에 참여한 관계로 역모로 몰려서 광(光)자 항렬을 병(丙)자로 개정을 하였으니
(전첨공파 계속)
서재필 (徐載弼)
또 광범씨의 13촌 조카이시며 여러분들께서도 다 잘 알고 계시는 서재필 박사, 이 분께서는 병조참판을 역임하신 분으로 휘자가 재(載)자 필(弼)자신데 갑신정변 후에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을 가셔서 1888년에 미국 국적으로 귀화를 하시고 의학공부를 하신 후 의학박사가 되셨는데 이 분께서도 갑신정변에 참여하신 관계로 재(載)자 항렬을 정(廷)자로 개정하였던 것이며
재필 박사께서도 갑오경장이 있었던 이듬 해인 1895년에 귀국을 하셨었는데 이 때에 김홍집 내각의 의무대신으로 취임하여 주실 것을 교섭 받으셨으나 완강하게 거절하시고 우몽한 국민들을 계몽하려면 민주주의를 알려줘야 되고 민주주의를 가르쳐 주려면 신문이 있어야 되겠다고 생각을 하시고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신문을 창간하셨는데 이 신문이 바로 독립신문이었으며 또 이 분께서는 1898년에 또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셨습니다.
그런데 이 갑신정변이 조선왕조를 민주주의로 개화를 하려고 하는 역적들의 모의라고 하여 나라에서는 이 사건을 엄중하게 처벌을 하려고 하였으니 사건 당사자 중 홍영식 등 몇 사람은 청나라 군대에 의하여 사살되고 남은 사람들은 외국으로 피신을 하였고 그들의 일부 가족들은 자결이 아니면 독살을 당한 사람들이 많았으며 이 때에 대종회에서는 이들의 항렬자를 개정하였던 것인데 그런데 그 후에도 그대로 光자와 載 자로 사용한 일가 댁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상으로 전첨공파를 대략으로 생략해 줄입니다.
정편 첨추공 (丁編 僉樞公)
첨추공은 15세조로 약봉조의 셋째 아드님이시고 휘자는 볕경(景)자와 옥광채빈(霦)자이시며 자는 아들자(子)와 따슬온(溫)자이신데 선조대왕 9년 서기 1576년인 병자년 12월27일생이시며 인조대왕 5년 서기 1627년인 정묘년에 생원에 합격하시여 내시교관을 받으셨고 이어 장예원 사평을 거쳐 과천현감으로 계시다가 인조대왕 14년 서기 1663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나니 관직을 내 놓으신 후 가족을 데리시고 피난길을 떠나셔서 경상북도 안동군 일직면 소호리에 있는 소호현에 당도하여 계시니 이 곳은 공의 아버님이신 충숙공께서 낳으신 곳 태실이며 할아버님이신 함재공께서 서재로 쓰시던 옛 터인 것입니다.
이 때에 조정에서는 여러 차례에 걸쳐서 첨추공에게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배수치 않으시고 계시다가 노년에 이르러서 통정대부와 첨지중추부사를 제수받아 계셨으나 얼마되지 않아서 또 다시 벼슬을 내 놓으시고 옛 터인 소호헌으로 내려가서 계셨었는데 이 때에 장조카이신 휘자를 원(元)자 리(履)자로 하시는 화곡공(華谷公)께서 경상감사로 부임해 오셨으니 숙부님이신 첨추공께서는 화곡공이 바로 찾아 오실 것으로 생각을 하고 계셨으나 속히 찾아와서 뵙지를 아니하고 숙부님께서 기다리다가 화가 나신 후에 찾아오신지라 이에 화가 나신 숙부님께서는 늦게 찾아 오셨다고 뵙기를 거절하시니 이에 당황하신 화곡공께서는 어쩔 수 없이 마을 문 밖에 거적을 깔고 죄를 대기하기를 며칠이 지난 후에 비로서 들어오기를 허락하시고 꾸짖어 걱정을 하시니 이에 화곡공께서 깨달아 각성을 하시고 사죄하여 주실 것을 간절하게 빌었다고 하는데 이러한 소식을 전해들은 인근 사람들이 크게 감탄을 하고 오래도록 그 얘기들을 하였다고 합니다.
이 어른 첨추공께서는 효성이 지극하신 분으로 충숙공께서 적소로 귀양가서 계실 때에 그 환란 중에서도 궁색치 않도록 어머님을 극진하게 공경하셨으며 모든 가족들에게도 불편함이 없도록 잘 보살펴서 생활을 하시니 충숙공께서 마음을 편안하시게 적소생활을 하셨다고 합니다. 이렇듯이 효성스러우신 첨추공께서는 아버님의 옛 터를 지키시면서 생활을 하고 계시다가 노후에 자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반드시 나를 영외인 이 곳 영남 땅에다가 장사를 지내지 않을 것 같다고 하시면서 충주로 이거하여 오신 후 근 30년 동안을 은거생활을 하시면서 늙으신 두 형님(만사공과 전첨공)을 뵈러 서울에 때때로 한번씩 다녀오시다가 두 형님께서 모두 작고하신 뒤에는 서울에 발자취를 들여 놓지를 않으셨다고 합니다.
이 어른께서 마침내 현종대왕 5년 서기 1664년인 갑진년 3월15일에 별세하시니 향년이 89세로 장수를 하셨는데 묘소를 충주에 모셨다가 후에 경기도 가평군 외서면 상천리 자가동 산101번지에 건좌원으로 이장하여 모셨으며 배위이신 증 숙부인 함열남궁씨께서는 선조대왕 7년 서기 1574년인 갑술생이시며 6월25일에 별세하시니 묘소를 포천 설운리에 충숙공 묘소 오른쪽에 임좌원을 모셨다가 서기 1972년 5월24일에 옮겨서 첨추공 묘소에 합폄으로 모셨으며 계배이신 증 숙부인 전주이씨께서는 선조대왕 16년 서기 1583년인 계미생이시며 효종대왕 4년 서기 1653년인 계사년 11월15일에 별세하시니 묘소를 합폄으로 모셨습니다. 묘표는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영 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 남공철(南公轍) 지음으로 되어있고 제향은 음력 초5일에 시제를 올리며 노정은 서울에서 망우리로 나가서 청평유원지를 조금 옆으로 경유하여 상천리까지가 약 150리 정도 됩니다. 수호와 관리는 첨추공의 종손이 묘하에 거주하면서 하고 있는데 종손은 첨추공의 14세손이며 동(東)자 항렬의 동철(東哲)씨인데 주소는 경기도 가평군 외서면 상천리이고 전화는 4-0824입니다. 이상과 같이 정편의 분파조이신 첨추공의 대략을 줄입니다.
그런데 첨추공께서는 일찍이 이 곳 충주에 오셔서 사시던 곳이기에 첨추공 후손들이 이곳 우리 충주지역에 많이들 살고 계시는데 이곳 동량면 용교리 용대마을을 중심으로 거주하시는 첨추공의 맏아드님이시며 휘자를 준(準)자 리(履)자로 하시는 현감공의 후손들과 이류면 완오동 주정마을을 중심으로 거주하시는 첨추공의 둘째 아드님이시고 현감공의 동생이시며 휘자를 탄(坦)자 리(履)자로 하시는 참의공의 후손들이 다 같이 첨추공의 자손들인데 용대와 주정골과의 그리 멀지않은 한 지역에서 같이 살면서 옛날에는 용대파니 주정골파니 하며 파를 달리한다고 해서 서로가 불목하던 한 때도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옛날 어른들의 잘못되었던 과오를 말끔히 다 씻어 버리고 충주지역의 우리 대구서씨 화수회로 하나같이 뭉쳐져서 그야말로 돈친목족의 화합된 한우리에 한 일가가 되고 있습니다.
다행한 일이며 지금 위에서 드린 말씀이 비단 첨추공의 후손들만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 대구서씨들 거의가 다 그러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래서 서씨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떼아리가 세다는 말을 들어왔던 것입니다.
종친 여러분 이제 우리들도 각성해서 진실한 한 일가(一家)가 됩시다. 일가라는 말은 한 집이라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한 집에서 함께 살고있는 한 식구와 같이 서로서로 사랑하고 우애 좋게 상부상조하는 한 일가가 되어야 합니다.
이상으로 첨추공파를 생략하여 줄입니다.
무편 도위공 (戊編 都尉公)
도위공은 15세조로 휘자는 볕경(景)자와 장마주(霌)자이시며 자는 아들자(子)자와 순할순(順)자이시고 아호는 소나무송자와 산등성이강자로 송강(松岡)이신데 약봉조의 넷째 아드님으로 선조대왕 12년 서기 1579년인 기묘년 7월14일에 출생하셔서 13세 때 부마도위로 뽑히시고 달성위에 봉해지셨으며 통의대부가 되셨고 14세가 되시던 해의 임진왜란 때에는 어가를 호종하셨으며 종2품인 자헌대부가 되셨다가 총관과 상방제조를 겸하셨으며 정2품관인 통훈대부와 봉헌대부 그리고 또 상방관상감제조를 겸하시고 오위도총부 도총관도 겸하셨으니 종1품인 숭덕대부에 승진하셨습니다.
도위공께서는 선조대왕의 부마가 되신 후 선조대왕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으신 분으로 선조대왕께서 행차를 하실 때에는 언제나 꼭 달성위에게 어가를 수행할 것을 하명하셨다고 하는데 서기 1592년에 있었던 임진왜란과 그 후 5년 뒤인 1597년에 왜구들의 재침 시 그리고 1624년에 있었던 이괄(李适)의 난을 당하였을 때 등 언제나 상감의 곁을 떠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달성위께서는 서기 1613년에 있었던 계축옥사 때에 참혹하게도 광해주에게 사약을 받아 드시고서 역적의 오명을 쓰신 채로 처절하게 운명을 마치신 연흥부원군의 시신을 수습하셔서 안장을 하여 주셨는데 이 때에 달성위의 사위이시며 연흥부원군의 아드님이신 김규(金珪)공도 부원군과 같이 참화를 당하셨던 것입니다.
그 무지막지 하였던 계축옥사에 우리 약봉조께서도 연루되셔서 경상도 영해로 귀양을 가셨었는데 그 뒤 서기 1621년인 신유년에 광해주가 죄를 입은 사람들은 금전을 바치고 형을 사면 받으라는 칙령을 내렸었는데 이 때에 공께서는 아버님을 위하시어 자산을 기울여서 나라에 바치시니 그로 인하여 충숙공께서 영남 땅인 영해 적소에서 원주로 옮기셨었다고 합니다.
또 달성위께서는 외조부님이신 광주공께서 후사가 없으시고 절손이 되시었는데 외조부님의 사우를 세워 사당을 모시고서 정성을 다하여 제사를 받드신 어머님이신 정경부인 여산송씨께서는 친정댁이 무후하여 크게 걱정을 하시고 항상 슬퍼하시던 중에 제사를 드리게 되니 무한이 기뻐하셨다고 하는데 이광주공의 제향은 지금까지도 계속하여 경기도 양주군 은현명 하폐리에 거주하시는 도위공의 둘째 아드님이신 파주공 종중에서 시제를 지내고 있습니다.
이렇듯이 도위공께서는 효성이 지극하시고 또 형제간에 우애는 물론 멀리 살고있는 친족들에게도 혼상간에 큰 일이 있는 줄 아시게 되면 빼 놓지 않으시고 도와주셨다고 합니다. 공께서는 이와 같이 자애로우셨었으며 오위도총부 도총관으로 계시다가 인조대왕 21년 서기 1643년인 계미년 9월29일에 별세하시니 향년이 65세 되셨습니다. 묘소는 온양군 남면 궁평리에 예장으로 모셨다가 25년 후 현종 9년 서기1668년인 무신년 2월에 지금의 장소인 경기도 장단군 장단면 승지동 도라산의 안주공 묘소 뒤에 축좌원으로 이장하여 모셨습니다. 공께서도 역시 신도비는 세우지 말라시는 유명이 계셨기에 세우지 못하고 다만 조그마한 묘표를 마련하여 손 중훈대부 행병조좌랑 문상(文尙)이 뒤에 글을 지어 새겼다고 되어 있습니다.
배위이신 정신옹주님께서는 선조대왕의 제1녀로 장옹주가 되시며 인빈김씨의 따님으로 선조대왕 15년 서기 1582년인 임오년 7월11일에 탄생하셨는데 덕성이 훈연하시어 효성스럽고 우애가 좋으셨으며 또한 검소하고 공손하시어 시부모를 섬기는데 정성을 다 하셨으며 먼 친족들도 다 어진 사랑으로 맞아 주시어서 가문과 친족들을 감화시켰다고 합니다.
도위공께서 돌아가신 지 11년 뒤 효종대왕 4년인 계사년 2월14일에 별세하시니 향년이 72세 되셨습니다. 묘소는 합폄으로 모셨습니다. 제향은 부조지전(不조之典) 이시기에 종손이 재실에서 사당을 모시고 기제사를 올리며 대대로 이어 내려오던 중에 불행하게도 6.25 사변으로 인하여 종손이 사당도 모시지 못하고 가까스로 몸만 빠져 피난길을 떠나와서 겨우 식생활을 하고 있는 형편으로 기제사를 드리지 못하고 다만 1년에 한번씩 추석절에 종회에서 주관하여 다례만 올리고 있는 실정인데 후손된 자손들은 무한정 머뭇거리지 말고 하루 속히 뜻을 모아서 다시 위답을 마련하여 사당을 모시고 제사를 올려야 될 것입니다.
도위공의 종손은 13대손으로 원(源)자 항렬의 재원(宰源)씨인데 주소는 인천시 남구 주안7동 1440-24, 전화 863-4971입니다.
이상과 같이 무편의 분파조이신 달성위 도위공의 대략을 줄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옛날 조선조 숙종대왕 시대에 우리 선조들의 화려하셨던 관직에 대하여 한 말씀 드립니다.
만정당 (晩靜堂)
우리 대구서씨 중에는 대체로 약봉조의 후손 중에서 대과를 지내신 분들이 상당히 많으신데 그 중에서도 특기할 수 있는 것은 도위공의 후손으로 이어진 11대를 계속한 정경부인과 3대 정승에 이어서 정승이 되기보다도 더 어렵다고 하는 대제학을 3대 이렇게 6대를 계속한 대과의 관록은 우리 대구서문에 영광이며 또한 우리 대구서문에서만 볼 수 있는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3대 정승에 첫번째 정승이 되시는 만정당 한 분만 약력을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만정당께서는 18세조이신데 도위공의 증손이 되시며 관지통정대부와 병조참의를 지내시고 영의정에 증직이 되셨으며 휘자가 문(文)자 상(尙)자이신 참의공의 아드님으로 효종대왕 3년 서기 1652년인 임진년 8월28일생이신데 휘자는 종(宗)자 태(泰)이시며 자는 노(魯)자 망(望)자이시고 아호는 만정당(晩靜堂)이시며
숙종대왕 원년 서기 1675년 봄에 생원시에 장원하시어 진사가 되신 후 숙종 12년에 승정원 승지로 발탁되셨고 다음 해에 사간원의 대사간으로 옮기셨다가 그 후 이조참판과 예조참판 그리고 공조참판을 거쳐서 숙종 24년 서기 1698년 8월에 조선시대의 학자로서 최대의 영광인 홍문관 예문관 양관 대제학을 배수받으셨고 곧 이어 그 해 11월에 의정부 우참찬이 되시고 1699년 3월에 예조판서가 되신 후 호조와 공조, 형조와 이조판서 등을 두루 역임하시고 좌참찬과 대사헌에도 계시다가 동지사로 청나라에도 다녀 오셨으며 한성판윤과 의금부사도 역임하시고 숙종 29년 서기 1703년에 정1품인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우의정에 오르시고 그 3년 뒤인 1706년에 좌의정을 그리고 숙종대왕 37년 서기 1711년 4월에 일인지하에 만인지상인 영상대감이 되셨습니다.
이 어른께서는 우리나라 벼슬의 최고 정상인 3정승 6판서를 두루 다 역임하셨는데 대과의 약력을 열거해 보면 대체로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에 오르시고 사헌부 대사헌을 세 차례 역임하시고 이조판서를 두 번 호조판서 한번 공조판서를 세 번 예조판서 두 번 형조판서도 두 차례하시고 한성판윤을 네 차례 우참찬이 두 번 좌참찬도 두 번 그리고 우의정을 두 번 좌의정은 네 번 영의정도 네 차례나 하셨습니다.
위와 같이 6조판서 중 병조판서를 제외한 5조판서를 한두세번씩 두루 역임하셨으며 영상대감을 무려 네 차례나 하셨는데 그 역임하신 년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처음 영상이 되시던 해는 숙종 37년인 1711년이신데 다음 해에 사퇴하시고 중추부로 가서 계시니 상감께서 바로 어필친서로 영상을 하명하시어서 다시 두 번째의 영상이 되시고 또 그 이듬해인 1713년에 중추부로 가시었으나 그 다음해에 또 다시 하명하시어서 세 번째의 영상을 복배하시고 1716년에는 내의원제조로 옮기시었으나 상감께서는 그 해 6월에 또 다시 부르시니 네 번째로 영상이 되시었으나 그 다음해부터 건강이 좋지 못하시어서 중추부로 옮기시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상감께서 만정당공을 놓지 않으시려고 하신 것은 영재적인 인물이 아니고서야 될 수 없는 것으로써 만정당공의 인격과 재질을 능히 상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조선조 때에 성군(聖君)은 세종대왕을 그리고 선군(善君)은 숙종대왕을 들며 또 가장 태평성대(太平聖大)이던 시절 역시 숙종대왕 때를 드는데 이 숙종대왕을 보필하시던 분이 바로 만정당이셨던 것입니다.
이상으로 도위공파를 생략하여 줄이며 다음 봉사공파와 서흥파 그리고 사가공파 등 이외의 분파조에 대한 말씀을 생략하고 우리 대구서씨의 세보를 간행한 년도와 발행하신 분들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대구서씨 세보(족보) 간행
이미 위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창간보인 임오보(壬午譜)는 영의정을 지내신 몽어상공(휘 문중 文重)께서 1702년에 발행하시고 2간보인 병진보(丙辰譜)는 이조판서를 지내시고 영의정을 증직받으신 문민공(휘 종옥 宗玉)께서 1736년에 발행하시었으며 3간보인 을미보(乙未譜)는 숭정대부 봉조하이신 보만재공(휘 명응 命膺)께서 1775년에 발행하시었고 4간보인 무인보(戊寅譜)는 영의정을 지내신 익헌공(휘 매수 邁修)께서1818년에 발행하시었으며 5간보인 임자보(壬子譜)는 자헌대부 공조판서이신 휘 유훈(有薰)공께서 1852년에 발행하시고
6간보인 무진보(戊辰譜)는 공조판서이신 휘 긍순(肯淳)공께서 1928년에 발행하셨으며 7간보인 정유보(丁酉譜)는 고등검사장이신 휘 정국(廷國)공께서 1957년에 발행하셨고 8간보인 정사보(丁巳譜)는 병식(丙軾)씨께서 1977년에 발행하셨으니 9간보인 기미보(己未譜)는 전임 경기고등학교 교장이시고 대종회장을 역임하신 병성(丙성)씨께서 1979년에 발행을 하시어서 모두 9간의 세보가 발행되었는데 이렇게 아홉번에 걸쳐서 발간된 족보가 유감스럽게도 파계(派系)가 일치하지를 못합니다.
그 파계를 살펴보면 창간보인 임오보부터 5간보인 임자보까지는 구보(舊譜)라고 일컬어 왔는데 이 구보에는 처음 서두에서 말씀을 드린 것과 같이 만사공파는 을편 전첨공파는 병편 첨추공파는 정편 도위공파는 무편 봉사공파는 기편 서흥파는 경편 사가공파는 신편 판도공파는 임편 등으로 모두 8파를 위와 같이 간지로 편목을 정하고 그 편목 순서를 변경하지도 않았으며 절손으로 후사가 없으면 무후라고 기록을 하고 딸만 있고 아들이 없으면 무남이라고 하였으며 더하고 덜함이 없이 있는 그대로 사실을 밝혀서 발행을 하였었으나
6간인 무진보 수보시에는 5간인 임자보까지 기록이 없던 춘헌공(春軒公)의 후손들이 입보를 하여 춘헌공파가 생겼는데 역대 구보에는 춘헌공의 증손인 승철(承哲) 응철(應哲) 형제분까지만 기록되어 있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승철 응철 형제의 철(哲)자를 항렬자인 리(履)자로 하여 승리(承履) 응리(應履)로 바꾸고 후손을 기록하였습니다.
또 역대 구보에는 승사랑공의 손자 홍(泓)과 영(泳) 두 형제분과 증손 경휼(景휼)까지만 기록되어 있었을 뿐이며 1818년에 익헌공께서 무인보를 간행하시던 때에도 그들대로 승사랑공 파보만 발행하였을 뿐이고 그 뒤 1852년에 발행한 임자보에도 역시 입보되지 않았다가 그 다음 6간인 무진보 수보 시에 비로서 승사랑공파가 대종보에 등재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장원공(掌苑公 휘 금)은 역대 구보에 증손인 원양(元亮)공까지만 기록이 되었으나 무후라고 기록되었었는데 7간인 정유보에서 그 장원공파가 처음으로 대종보에 등재되었으며 8간인 정사보에서는 훈련봉사공(訓鍊奉事公 휘 팽주 彭周)파가 생겨났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새로 들어온 파들을 살펴보면 먼저 장원공파의 장원공은 11세조이신 장령공(휘 팽소 彭召)의 장손이 되시고 승사랑공은 장령공의 둘째 아드님이시며 춘헌공은 장령공의 넷째 아드님이신 참의공(휘 고 固)의 둘째 아드님이시고 훈련봉사공은 장령공의 동생으로 들어온 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여러분들이 꼭 알아 두셔야 될 것이 있는데 무엇인고 하니 지금 말씀을 드린 바 있는 새로 입보된 파들 중에서 장원공파는 정유보나 정사보를 보게 되면 대종파가 되는데 이것이 앞으로 우리 대구서문에 문제가 될 소재를 지니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왜 그런고 하니 우리 대구서씨의 대종가는 약봉종가로 이어지고 있는데 약봉조의 무후가 되신 큰댁 종숙(당숙)의 후손들이 생겨났으니 말입니다.
약봉조의 큰댁 종숙(從叔)이신 장원공께서는 우리 대구서씨의 족보를 처음 창간하여 여섯번째로 간행한 무진보까지는 휘를 연(演)자로 하시는 아드님 한 분이 계셨으나 증손(元亮)대에 가서 절손으로 무후가 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임오보를 처음 창간한 이후 226년간에 걸쳐서 여섯번의 족보를 수보 간행(修譜 刊行)하는 동안 계속하여 무후이시던 장원공이 6간인 무진보를 간행한 지 29년 뒤 1957년에 간행한 정유보에서 후손들이 비로서 처음으로 등재 입보가 되었는데 이들로 인하여 수 백년 계승하여 내려오던 우리 대구서씨의 종통(宗統)을 불신하는 인사들이 등장하여 말하기를 포천 동성(東晟)이는 약봉 종손일 뿐이지 대종손은 될 수가 없다는 것이며
더욱이 걱정되는 것은 서울 숭인동에 소재하는 대종회에서도 대종손을 밝힐 수가 없다고 보전출판사에서 발행한 「종가 제1집」165면에 아리송한 「난(爛)」끝에 기록하고 있으니 과연 우리 대구서씨의 종통은 정말로 아리송하기만 한 것인가? 사실이 그러하다면 이른바 명문거족의 문중으로서 심히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종친 여러분 우리 대구서씨의 종통은 그들이 말하는 것과 같이 결코 그렇게 아리송하지 않다는 것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 증거로는 문제의 장원공파가 서기 1957년에 일곱번째(七刊)로 간행한 정유보(丁酉譜)에서 처음으로 입보 등재(登載)되었는데 이 정유보를 발행하면서 족보 첫머리에 일러두기(중전범례 重鐫凡例) 제 1항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丁酉譜 重鐫凡例
吾徐世譜는 自0廟朝 壬午로 爲始하야 凡爲七修也라 承仕郞公派와 掌苑公派는 旣爲漏譜而라 하고 及此修譜에 屢次同譜0라 然而나 所傳證憑이 區區不明故로 0依願同譜나 不無00之歎이라 少尹公宗統則 藥峯子孫이 旣爲繼承故로 0千百代를 傳之無窮也라
정유보 중전범례 해설
우리 서씨의 족보는 숙종대왕 때인 임오년으로부터 시작하여 무릇 일곱 차례를 발행하였다. 그런데 승사랑공파와 장원공파는 이미 족보에서 누락되었다 하고 이번에 발행하는 족보에 함께 같이하여 줄 것을 여러 번 청원이 있었다. 그러나 전해온 바의 증빙자료가 구구하여 밝지 못하므로 비록 원에 의하여 족보를 함께 하지만 아래 위의 이가 어긋난 것(내용이 맞지 않음)이 한탄스러운 일이다. 그러므로 소윤공 종통은 약봉공의 자손이 이미 계승하여 왔으니 비록 수천 백대까지도 무궁하게 전하여 갈 것이다. 이와 같이 장원공파를 처음 입보시킨 보소에서 “그들의 원에 의하여 족보는 함께하지만 소윤공의 종통만은 약봉종손이 비록 천백 대까지라도 무궁하게 전하여 갈 것이다”라고 장원공파를 처음 등재한 정유보중전범례(丁酉譜重鐫凡例) 제1항에 명시되어 있는데도 대종가를 밝힐 수가 없다고 하니 말도 되지 않는 얘기인 것입니다. 만약의 경우에 그렇게 대종가를 밝힐 도리가 없다고 한다면 정유보중전범례를 불신하는 것이 되는데 이 정유보의 중전범례를 무시하게 되면 정유보 자체도 족보로서의 인정을 받을 수가 없는 것이며 그렇다고 한다면 장원공파의 존재는 과연 어떻게 되는 것인가? 종친 여러분들 다 같이 생각하여 볼 문제인 것입니다. 이상으로 대구서씨 상계원파(大丘徐氏上系源派)의 말씀을 간략하여 줄이고 끝으로 우리 대구서씨와 이천서씨 그리고 판도공 후손(달성서씨)과의 관계에 대하여 몇 말씀 드리렵니다.
먼저 이천서씨와의 관계
우리 대구서씨는 이천서씨에서 갈려 나온 것(분계, 分系)으로 뭇사람(대중)들이 알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이천서씨의 대다수가 그렇다고 말을 하고 있으며 우리 대구서씨들 중에도 그렇게 알고 계신 분들이 많이 있고 또 그렇다고 단정하는 책자도 더러 있는 것이며 몽어상공께서도 우리 대구서씨의 족보를 처음 창간하신 임오보 부록(壬午譜 附錄) 첫머리에 기록하시기를,
“세상에서 말하기를 서씨는 처음에 두 본관이 있었는데 뒤에 내려오면서 파가 나뉘어(分派) 달성(대구), 이천, 장성, 부여, 연산, 남평으로 본관을 하였으나 다 신라 말기에 계시던 아간대부 서신일을 선조로 하였다” 라고 하시었으며, (다음 중간은 생략하고) 장성(長城)서씨의 족보는 시조를 서능(徐稜)으로 하고, 연산(連山)서씨의 족보는 시조를 서보(徐寶)로 하고, 남평(南平)서씨의 족보는 시조를 서린(徐鱗)으로 하였으며, 부여(扶餘)서씨의 족보는 시조를 서수손(徐秀孫)으로 하고, 평당(平當)서씨의 족보는 시조를 서준방(徐俊邦)으로 하였으나 곧 이천서씨의 별파라, 세월이 오래되지 아니하고 근원이 내려오면서 나누어 갈리었으니 자세하게 알 길이 없다. 의성김씨(義城金氏) 족보 가운데 이르기를 서씨는 멀리 기자(箕子) 때부터 먼저 나서(先出) 상고하기가 어려우며 신라 말에 서신일이 있었고 고려 초에 서목(徐穆)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이천서씨는 다 그의 후손이라, 대구와 봉성(奉城)이 이천으로부터 분파되었으나 같은 서신일의 후손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다음은 생략(省略)하고,
대구서씨족보부록 (임오보 부록)
世稱徐氏는 初無二貫이나 後來分派하여 爲達城 利川 長城 扶餘 連山 南平이 0祖於羅末에 阿干大夫 徐神逸云(中略) 長城之譜는 始於徐稜하고 連山之譜는 始於徐寶하고 南平之譜는 始於徐鱗하고 扶餘之譜는 始於徐秀孫하고 平當之譜는 始於徐俊邦하니 卽利川지別派也라 世代不遠이 源流分派하여 無以詳知也라. 義城金姓人에 譜中云 徐之先出은 自箕子하여 遠不可考라 新羅末에 有徐神逸하고 高麗初에 有徐穆하니 利川之徐는 0箕後也라, 大丘와 奉城이 分自利川이나 同是徐神逸之後라 (以下 省略)
그리고 임오보발문(壬午譜跋文, 임오보편집후기)에도 첫머리에서 서씨의 족보는 세상에 전해오는 것이 없는 까닭에 그 본관의 시작을 알 수가 없으나 혹 말하기를 달성(대구)과 이천서씨는 다 같이 한 근원에서 나왔다고 하니 대저 권씨(權氏)와 김씨(金氏)가 신라 때에 시조를 같이 하고 선우씨(鮮于氏)와 한씨(韓氏)가 기자에서 계통을 함께 하였다고 하는데 서씨도 본관이 같다는 것은 이치에 혹시 그러할 듯 하나 예부터 전해오는 문서가 부족하여 가히 참고하여 믿을 수가 없다 (이 아래는 생략입니다)
壬午譜跋文 (편집후기)
徐氏之譜는 不傳於世라 故로 不知所始而 惑云達城(大丘) 利川之徐가 同出於一源이라 하니 夫權金이 同祖新羅하고 鮮于韓이 竝系箕子則 一徐之同貫이 理惑然0라 文獻不足에 無可考信이라 (以下略)
이상과 같이 언제 어디서 누가 누구에게서 갈리어 나왔다는 분명한 근거가 문서로 전해오는 것이 없고 다만 고려 명종 때에 출생하신 소윤공(대구서씨시조)께서 신라 말기에 출생하신 아간공(阿干公, 諱 神逸 利川徐氏始祖)의 후손이 되는 듯 할 정도일 뿐입니다.
다음 판도공 후손(달성서씨)과의 관계
달성서씨의 시조 판도공(達城徐氏始祖 版圖公 諱 晉)은 고려 중기 말기에 출생하신 분으로 한국성씨대관(韓國姓氏大觀)과 기타 서적에 보면 소윤공의 증손이라고 단정하였으며 서씨문헌고(徐氏文獻考, 利川郡徐氏宗親會編纂)라는 책에도 소윤공의 증손으로 되어 있으나 이 모두 확실한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몽어상공께서 우리 대구서씨 족보를 처음 창간하실 때에 판도공파를 우리 족보의 별보(別報, 부록)로 하면서 그 별보 첫머리에 판도공파가 역시 달성으로 계통하니 반드시 관향이 같을 것이나 세월이 오래되고 족보나 책자의 증거가 없어서 밝게 알 수가 없다. 그래서 감히 족보에 같이 하지 못하고 우선 별보(부록)로 하여 족보 끝에 붙인다.
版圖公派 - 亦系達城하니 必是同貫而이나 世代旣遠하고 譜牒이 無微이라 未能明知故로 不敢0錄於本譜하고 姑爲別譜하여 以附編末하다
위와 같이 몽어상공께서도 판도공파가 우리와 관향이 같은 것으로 보아 한 일가(一家)인 듯 하지만 확실한 근거가 없어서 족보를 함께 하지 못하고 우선 부록으로 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족보를 상고(詳考)하여 보면 소윤공께서는 생졸(生卒)년대가 명확하지 않으시며 그 8세손이신 안주공(휘 미성)께서 비로소 생졸년대가 명시되시어 있으며 안주공께서 판도공의 현손이신 귀계공(龜溪公 諱 ?)과 함께 세종대왕 때에 조정(정부)에서 같이 계셨던 (재조, 在朝)기록으로 미루어보면 소윤공께서 판도공보다 3, 4대(代) 먼저일 것이라는 비교 정도 이외에 명확한 판단은 어려운 것입니다. 만약에 경우 판도공이 소윤공의 증손이 된다고 한다면 소윤공 이후 5대 실전(失傳) 가운데 세 번째(4世祖)의 대(代)가 되는데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기인 것입니다. 종친 여러분께서는 참고하시기 바라오며 이상으로 우리 대구서씨 상계원파의 말씀을 대략하여 모두 줄입니다. .
발행 및 편집
發行日 1987年(丁卯) 7月10日
發行處 大丘徐氏忠州市 中原郡 花樹會
忠州市城內洞 104, 電話 2-2892
發行人 藥峯忠肅公 13代孫(忠州花樹會 會長) 在錫
忠州市城西洞 203-8, 電話 43-3792
發行日 1987年(丁卯) 7月10日
編輯人 藥峯忠肅公 12代孫(忠州花樹會 副會長) 廷大
中原郡老隱面 新孝里 226, 電話 42-7682
印刷處 大昌印刷所 忠州市 忠義洞 94
電話 2-8707
自宅 43-803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