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로 보는 인천>
이 글은 인천시사 편찬위원회가 2002년 8월에 편찬한 <인천시사(제1권) 자연환경과지리> 중 이 성임 선생이 쓴 <제2장 인천지역의 지지와 옛지도>에서 발췌 보완한 것입니다. 새로 첨부한 부분은 인용 자료를 명시하였고 낯선 한글 용어는 한자로 바꾸었습니다. 그래도 이해하기 어렵겠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보충 설명을 헀습니다.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헀습니다. 이같은 요구에 맞추어 옛 인천지도를 가려서 해설해 주신 인천광역시사 편찬위원회 전문위원 강옥엽, 강덕우 두 분 박사님께 감사를 드립니다.(자료팀)
--------------------------------------------------------------------
인천지역의 지도를 보기에 앞서
1. 지도에 표현되는 항목은 지도가 地誌의 부도(附圖)냐 아니면 단행본 군현지도이냐에 따라 달라진다. 지지의 부도로서 그려진 지도에는 圖示化하기 어려운 租稅·田結·戶口·建築沿革·郡名·土産·古蹟 등의 항목은 완전히 제외된다. 하지만 단행본으로 제작된 군현지도는 한 장의 종이에 地誌와 地圖를 결합하여 만들기도 한다. 地誌의 附圖가 지지의 부록으로 그려지듯이 단행본 군현지도의 지지는 지도의 부록으로 기록되는 것이다. 또한 단행본 군현지도의 주기에는 지도로 표현하기 힘든 내용을 기록함으로써 한 지역의 전체상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2. 우리나라 군현지도의 목적은 문자로 기록된 地誌의 내용을 도형으로 재현하는데 있었다. 한 지도가 군사적 목적으로 제작되었는지, 경제적 목적으로 제작되었는지에 따라 달라지지만 지도의 전체적인 내용은 지지의 내용을 벗어나지 않는다.
3. 군현지도에 표현되는 요소를 통하여 군현지도의 작성 목적이 행정과 통치의 기본적인 자료를 얻기 위한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산천은 단순히 자연이 아니라 '문화'가 투영된 것으로, 행정적·군사적·상징적 중요성이 있는 곳을 기록한다.
또한 군현의 중심지인 邑城과 기타 지역의 二元的 축척을 적용하여 邑城을 강조 한다. 군사적 대상(山城·鎭堡·牧場), 경제적 대상(堤堰, 창고, 場市), 교통 및 통신에 관한 대상(烽燧·도로·驛院·橋梁)을 圖示하고 지역민에 대한 유교적 통치이념과 윤리적 교육의 장(書院·鄕校·樓亭)과 토착신앙의 수렴을 통한 통치이념의 구현 등을 위한 다양한 장치를 표기하였다.
4. 특성화된 요소는 지역에 따라 표현되는 내용이 달라진다. 산천과 鎭堡와 營에 대한 내용만을 지도에 圖示한 것도 있고, 경제적 요소를 강조한 것도 있다. 대체적으로 군현지도의 표현 내용에 관한 강조는 시대에 따라 제작 배경에 따라 달라 지지만, 산천·행정·군사·경제·교통 및 통신, 교육 및 의례에 관한 내용을 모두 담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국가에서 한 지방을 이해하는 기본 항목이기도 하여 군현지도 전반에서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지도 제작의 제1차적인 목적이 행정과 지방통치를 위한 자료를 수집하는데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지도의 내용이 地誌의 항목을 벗어나지 않는 이유도 지지의 자료를 토대로 지도를 작성했기 때문일 것이다.
참조 :『韓國의 옛地圖』, 영남대학교 박물관, 1998.
--------------------------------------------------------------------
우리 나라에는 삼국시대부터 지도가 만들어져 국역(國域)을 정할 때나 전쟁을 할 때 또는 외교적 교섭에 이용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전국도인 『오도양계도(五道兩界圖)』가 여러번 만들어 졌으며, 조선시대에는 『오도양계도』의 전통을 이어 여러 차례 전국도가 만들어 졌는데, 특히 세종대에는 정척(鄭陟)을 시켜 이북삼도를 측량하여 『팔도도(八道圖)』를 만들었고, 성종 때에는 이러한 바탕 위에 양성지(梁誠之)가 하삼도를 측량하여 정척과 함께 『동국지도(東國地圖)』를 만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지도들은 임진왜란과 같은 전란으로 인하여 소실되어 현존하지 않으며, 다만 국보 248호였던 『동국방역도(朝鮮方域圖)』가 남아 있어 그 모습을 짐작하게 해준다.
이러한 지도가 『동국지도』형식의 고지도에서 탈피하게 되는 것은 18세기 정상기(鄭相驥)에 의해 『동국대지도(東國大地圖)』가 제작되면서부터이다. 정상기는 처음으로 백리척(百里尺)의 축척법을 이용하여 100리를 1척으로 하는 과학적인 고지도를 제작하였다. 이후 김정호(金正浩)의 『청구도(靑邱圖)』가 제작될 때까지 정상기의 『팔도분도(八道分圖)』류가 지속적으로 만들어졌다. 이러한 고지도의 발달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大同輿地圖)』에서 완성되었다(1861년, 철종 12). 그는 조선초기부터 19세기까지 제작된 한국의 고지도 중에서 좋은 점만을 간추리고 19세기에 담을 수 있는 최대한의 정보를 수록하여 『대동여지도』를 제작하였다. 이 지도는 서양의 과학기술까지 가미한 우리나라 고지도의 완결편이라고 할 수 있다.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의 인천지역 (1861년)
인천지역에 대한 지도는 조선시대 이후의 자료만 현전하고 있다. 이들 지도를 유형에 따라 나누어 보면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전국 지도책 속에 다른 군현지도들과 함께 일련의 지도로 포함되어 있는 경우이다. 둘째는 읍지(邑誌) 등 지지류(地志類)에 포함되어 있는 지도이다. 셋째는 개별 군현지도나 특수지도로 독립되어 있는 지도이다.
1. 전국지도에 포함된 인천지역의 지도
여러 군현의 지도가 함께 수록된 지도책 또는 지도첩 중에는 인천지역의 지도가 다수 포함되어 있다. 조선시대에 제작된 도별 군현지도집 또는 전국 군현지도집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여지도(輿地圖)』(규장각, 고 4709-68, 26.5×19㎝)
② 『지승(地乘)』(규장각도서, 奎 15423, 27×19㎝)
③ 『여지도(輿地圖)』(국립중앙도서관 소장, 한 6103, 귀230, 37.4 x 30.0㎝)
④ 『광여도(廣輿圖)』(규장각도서, 고 4790-58, 37×28.3㎝)
⑤ 『접역지도( 域地圖)』(규장각도서, 고 4709-43, 41×22.5㎝)
⑥ 『해동지도(海東地圖)』(규장각도서, 고대 4709-41, 47.5×30㎝)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이지만 인천지역의 군현을 그린 옛 지도는 조선후기에 제작된 것만 전한다. 전국 각 군현의 지도를 모두 수록한 전국 군현지도집인 ①·②·③·④는 모두 18세기 중반에 제작된 군현지도집이다. 이는 지도책의 형태로 묶여져 있으며, 내용은 거의 동일하다. 지도의 뒷면에는 각 지역에 대한 인구, 토지면적 등이 설명되어 있는데, 주기(註記)의 내용도 거의 같다. 다만 책의 크기가 다르고, 지형이나 건물의 표현 양식 등이 약간 다르다.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3종의 지도에는 도로가 표시되어 있지 않아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여지도』에는 도로가 적색선으로 표시되어 있다.
①은 조선후기에 이루어진 전국 각도 군현에 대한 지도와 그 지방의 형세를 수록한 지리서이다. 모두 6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책은 경기도, 2책은 충청도, 3책은 경상도, 4책은 전라도, 5책은 황해·평안도, 6책은 강원도의 지도로 되어 있다. 따라서 인천지역과 관련된 지도는 1책에 실려있다. 1책은 경기도 각읍(各邑)이라 하여 전국의 지리·역사를 개괄한 총론과 경기도의 유래, 한양·개경의 특성과 경기도 지도가 있다.
또한 경성지도, 송도지도, 강화부지도 등 경기 관하 각군현의 지도가 그려져 있다. 모든 지도의 뒷면에는 성곽명(城郭名), 민호수(民戶數), 각군영진(各軍營鎭))의 장졸수
(將卒), 각 관아 소관의 유고미(留庫米)·원군량미(元軍糧米)·전답 각결수(各結數), 타 군현과의 거리, 읍창(邑倉), 각 면의 초경·종경(初境·終境)까지의 거리, 서울까지의 거리 등이 기록되어 있다. 각 군현도(모두 41도)에는 각 경계 군현과 군현의 관아, 객사(客舍), 창고, 향교, 서원, 우역(郵驛), 사원(寺院), 각면(各面), 산천이 표시되어 있다.
【지도】『여지도』의 경기도지도 속의 인천
④는 『여지도』와 거의 유사하지만 책의 판형이 크고, 수정된 내용들이 반영되어 있어 『여지도』류의 지도를 바탕으로 하여 18세기 후반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된다.
⑤는 19세기 전반 서울 및 주변지역을 상세하게 표현한 지도첩으로 첫 면에는 우리나라 전도가 포함되어 있다. 도성도 등 지도의 전체적인 윤곽은 『동국여도(東國輿圖)』의 전반부에 수록된 지도와 유사하다. 그러나 이 지도는 표현기법이 조잡한 반면 서울을 집중적으로 다룬 지도라는 점에 특징이 있다. 우리나라 전도에 이어, 『도성도』, 『도성연무북한합도』, 『연무대도』, 『북한산성도』, 『남한산성도』, 『강화지도』, 『임진·한강도』가 그려져 있어 서울 안에서 주변지역으로 확장되어 가는 시각으로 지도를 그렸다.
※ 접엽( 域)의 '접'은 우리나라 근해에서 가자미( )가 많이 난다는 중국 漢書의 고
사에 의해 붙여진 우리나라의 별호이다.
【지도】『접역지도』의 경기도도와 인천
⑥은 전국 각 군현의 지도를 모아 지도책이나 지도첩으로 만든 군현 지도집은 방대한 분량, 내용의 상세함, 전국의 모든 지역을 한 종의 지도책에서 모두 살펴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 『해동지도』는 제작 시기나 제작 과정, 제작자 등이 명시되어 있지 않다. 여러 자료를 통해 추정해 볼 때 대략 1730년부터 1740년 초반의 것으로 이해된다.
이 지도는 기본적으로 지도와 주기(註記)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지도에는 산천, 면, 관아, 역원(驛院;역), 진도(津渡;나루), 제언(堤堰;관개시설), 교량, 서원, 향교, 루정(樓亭;누각과 정자), 능묘(陵墓) 등 고적, 단묘(壇廟), 강계(疆界), 창고 등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연혁, 산천, 고적, 영애(嶺 ;산이 험하고 좁은 땅), 강계(疆界;경계), 루정, 불우(佛宇), 사묘(祠廟), 서원, 토산(土産), 제언, 역원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해동지도』는 지지적인 내용과 지도를 동시에 파악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지도】『해동도』의 경기지도와 인천
이는 370종의 지도를 8첩에 수록한 군현 지도집으로 인천지역과 관련된 내용은 제1첩에 있다. 여기에 강도·부평부·인천부·교동부·영종진·덕적진 등 4종의 군현도와 2종의 진도가 포함되어 있다.
강화지역은 지도 외에 주기내용이 상당히 많다. 여기에는 강화부를 중심으로 방리(坊里), 산천, 불우(佛宇) 등을 자세히 파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강화의 외성(外城)과 내성, 통진의 문수산성, 12진보(鎭堡)와 53개의 돈대(墩臺) 등이 자세히 그려져 있어 기본적으로 관방도(關防圖)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부평지도에는 계양산 아래 관아가 위치하며 좌측으로 향교가 있다. 관아 아래 조산이 보이고, 그 아래 김포굴포가 있다. 인천지도에는 문학산을 중심으로 관아와 향교가 있고, 객사 바로 뒤에 학산서원이 위치한다. 남양지도에는 남양부를 중심으로 인근의 도서들이 그려져 있다. 교동지도에는 교동부를 중심으로 성곽이 표시되어 있으며 뒤쪽으로 향교가 위치한다. 영종진도에는 자연도와 태평암이 모두 그려져 있으나 관아는 태평암에 위치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덕적진도는 강화와 교동 그리고 인근의 도서를 중심으로 그린 지도이다.
교동부·영종진·덕적진도에서 주목되는 사항은 해로(海路)가 비교적 자세히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덕적진도에서는 수로(水路)를 소로·중로·대로로 구분하기도 하였다.
이는 기본적으로 이들 지도가 관방도의 성격을 지니며, 거기에 조선후기에 들어 항해술의 발달로 조운로(漕運路)가 바뀌었고 나이가 상품유통의 발달로 운송량이 증대되었기 때문이다.
2. 지지에 포함된 인천지역의 지도
1)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동람도(東覽圖)』
『동국여지승람』은 조선초기부터 지속된 관찬(官撰) 지리지 편찬의 결실로서, 조선전기 지리지의 집대성으로 불린다. 성종 12년(1481)에 완성된 이후 여러 차례 수정을 거쳐 중종 25년(1530)에 전 55권으로 증보·완성된 것이 『신증동국여지승람』이다. 이 지리지에는 조선전도인 『팔도총도』와 8도의 도별지도 등 총 9장의 지도가 수록되어 있다. 지도의 판심에 ‘동람도’라고 쓰여 있어 이 유형의 지도를 모두 『동람도』라 일컫는다.
『동람도』는 지지를 보완하는 부도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표현하고 있는 내용은 매우 소략하다. 지지에 이미 많은 내용들이 지역별로 수록되어 있어 지도에서는 단지 지역의 개략적인 모습만 보여주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더구나 규격이 작은 목판본으로 제작되어 지도에 남은 정보를 담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인천지역은 경기지도에 포함되어 있다. 지도 좌측으로 인천, 부평, 강화, 교동지역이 표시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이들 지역의 진산(鎭山)만을 표시하고 있다. 또한 섬으로는 강화와 교동만이 보인다.
『동람도』는 지도의 정확성이나 정밀성에 있어 상당히 뒤떨어지는 것이다. 정척과 양성지가 만든 『동국지도』도 상당한 수준의 것이었는데, 『동람도』가 이와 같이 엉성하게 제작된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이는 김종직(金宗直)의 『동국여지승람』의 발문(跋文;책의 본문 끝에 그 내용의 대강이나 또는 그에 관련된 일을 간략하게 적은 글. 卷末記)에서 밝혔듯이 『동람도』는 국가에서 제사지내는 악독(嶽瀆;크고 높은 산과 강)과 명산대천, 그리고 각 주현(州縣)의 진산(鎭山:마을을 鎭護하는 주된 산) 만을 표기할 목적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동람도』는 바다를 파도무늬로 판각하고 있는데 이는 조선전기의 고지도의 독특한 표현양식이기도 하다.
2) 『여지도서』의 군현지도
읍지에 지도를 첨부하기 시작한 것은 『여지도서』부터인데, 이는 이후에도 관행으로 지속되었다. 이는 이전의 읍지들이 각 지방별로 편찬됨으로써 일관성과 공시성이 결여되는 단점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여지도서』의 군현지도가 당시 군현의 실정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하기는 어렵다. 중앙으로부터 읍지에 지도를 첨부하여 올리라는 명을 받기는 하였으나 형편이 여의치 못한 군현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각 군현별로 지방화원들이 모두 배속된 것도 아니었고, 있다 해도 이미 도망했거나 늙어서 지도를 그릴 수 없는 상태에 이른 곳도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방관들은 기존의 군현지도가 있을 경우 이를 베껴서 올려보낸 경우도 많았다.
『여지도서』에는 인천·부평·강화·교동·영종의 군현지도가 들어있다.
이들 지도 중에 가장 주목되는 것이 「강도부도(江都府圖)」이다. 이 강화지도는『여지도서』의 앞에 첨부된 3장의 지도 중의 하나로 강화를 중심으로 하여 인근의 섬들을 그려넣고 있다. 여기에는 관아·방리·성곽·진보·돈대·산천·사단 등을 모두 표기하였다. 특히 숙종대에 설치되었던 53개의 돈대를 비롯한 각종의 관방시설과 선두포제언을 비롯한 여러 방축시설들을 표시하고 있는데, 이는 조선후기 변화된 강화의 모습인 것이다. 이 지도는 최초의 강화지도이지만 표현기법에 있어서는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는 것이다.
교동·영종·남양·부평·인천의 지도들도 강화지도와 마찬가지로 관아를 중심으로 하여 여기에 속한 섬들을 비교적 그려넣고 있다. 여기에는 관아, 방리, 산천, 불우, 제언, 봉수, 목장, 고적 등 읍지의 내용을 지도에 표시하고자 하였다. 특히 교동지도에는 남양부 화량에서 교동으로 옮겨온 수영과 성곽이 표시되어 있고, 인천지도는 각 면의 경계를 산으로 표시하였으며, 문학산에는 서원도 표시하였다. 또한 그동안 부곡이었던 이포(利浦)가 하나의 면으로 편입되어 있다.
3) 『경기지』의 군현지도
『여지도서』에서 군현지도를 첨부하기 시작한 이후 읍지에 지도를 첨부하는 것은 이제 일반적인 현상이 되었다. 그리하여 19세기 이후에 편찬된 인천지역의 읍지에는 대부분 군현지도가 첨부되게 되는 것이다. 『경기지(1842∼1843)』에도 인천, 부평, 교동, 김포, 남양, 영종의 지도가 각 읍지 앞에 첨부되어 있다. 강화지도가 빠진 것은 당시 강화가 경관(京官)이 파견되던 유수부로 경기관찰사 관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강화지역은 경기도에서 수합한 『경기지』에는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이는 모두 채색지도로 크기는 30.3×20.3㎝이다. 『경기지』의 지도도 『여지도서』와 마찬가지로 회화식 기법에 의한 것이다. 이는 『여지도서』가 편찬된 지 60여 년 뒤에 작성된 것이면서도 『여지도서』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지도의 표식이 조잡하고 거칠어 화원이 작성했다고 보기 어렵다.
인천지도는 인천을 중심으로 여기에 속한 섬들이 모두 그려져 있다. 여기에는 관아, 방리, 향교, 산천, 진보(鎭堡) 등이 표시되어 있다. 향교 옆에는 서원이 있고, 청량산 옆에 능허대가 보인다. 『여지도서』에는 서원으로만 되어 있던 것이 여기서는 학산서원으로 그 명칭이 정확히 표시되어 있다.
부평지도는「부평부읍지」의 맨 처음에 나온다. 마찬가지로 부평관아를 중심으로 속도들이 모두 그려져 있다. 여기에는 관아, 방리, 산천, 역원, 누정, 봉수, 교량 등이 표시되어 있으며, 지도 한가운데로 굴포천과 그 지류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부평부 읍치 앞에는 조산(造山)이 4개 보이는데, 이는 『여지도서』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이는 계양산 아래가 탁 트여 기가 모이지 않아 읍치로 적당하지 않게 되자 이를 예방하는 차원에서 인공적으로 산을 만든 것이라고 한다. 읍치를 정함에 있어 풍수지리적인 현상을 적용한 것이다. 교동지도는「교동부읍지」맨 처음에 나오는데, 관아를 중심으로 산천, 성곽, 봉수, 교량 등이 표시되어 있다. 주목되는 사실은 다른 지역과 달리 면의 하부구조인 리를 지도에 모두 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영종도의 지도도 「영종진도지」 앞에 그려져 있다. 이 지도도 『여지도서』의 영종지도와 별차이가 없다. 영종관아가 위치한 태평암과 자연도를 이어주는 다리가 있는데, 이 다리의 형태가 배다리(舟橋)라고 한다. 『경기지』에서는 『여지도서』와 달리 이 다리의 넓이와 길이를 표시하고 있다.
4) 『경기읍지』의 군현지도
헌종 8년(1871)에 편찬된 『경기읍지』에도 각 군현읍지 앞에 지도가 첨부되어 있다.
여기에는 모두 6장의 지도가 전해오는데(읍지도:인천·부평·교동, 진지도:영종·주문·장봉진), 이는 모두 채색지도로 크기는 30×20.1 cm이다. 이 지도도 『여지도서』와 『경기지』의 지도와 마찬가지로 회화식 지도이다. 이 지도들도 『여지도서』의 지도에는 미치지 못한다.
인천 지도는 인천관아를 중심으로 인근의 섬들까지 그려져 있다는 점에 있어서는 『경기지』와 별차이가 없다. 그러나 작법은 조금 다르다. 육지와 바닷길, 그리고 거기에 형성된 포구 등을 표시하고, 도로를 그려 넣었다. 또한 각 면에는 관아와의 거리를 표시하였다. 이 지도에서는 『경기지』에 있었던 학산서원이 보이지 않는다. 이 때는 이미 대원군의 철폐령에 의해 학산서원이 철폐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부평지도에는 부평관아를 중심으로 인근의 섬들을 그려져 있는데, 『경기지』보다는 자세하다. 여기에는 굴포천과 그 위에 위치한 다리, 그리고 이를 중심으로 형성된 도로망이 비교적 잘 표현되어 있다.
교동지도는 『경기지』의 지도와 유사하다. 관아 주변을 보다 세밀하게 그리고 있으나 성곽은 표시하지 않았다. 교동지도 다음에는 주문진과 장봉진의 지도가 나온다.
『장봉진지』뒤에 교동부사의 수결(手決)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 진지는 교동부가 주관하여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 지도도 동일인이 그린 것이다. 따라서 이들 지도는 거의 같은 형태를 지니고 있다.
장봉도와 주문도는 교동에 속한 섬으로 원래 말을 기르던 곳인데, 숙종대에 연안방비책의 일환으로 진이 설치되었다. 주문도와 장봉도가 작은 섬이므로 지도는 매우 간단하다. 우선 주문도 지도에는 진사와 객사가 중앙에 있고 왼편에 봉수가 보이고, 장봉도지도에는 진사와 아사(衙舍) 옆에 평촌이라는 마을이 그려져 있다. 비록 간단한 지도이지만 진이 설치된 주문도와 장봉도의 유일한 지도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영종지도는 『경기지』의 지도와 별 차이가 없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태평암과 자연도는 배다리(만세교)로 연결되어 있다. 이 지도에서는 그동안 표시되었던 면의 표시가 생략되어 있다. 진의 관아 밖으로 성곽이 표시되어 있으며, 월미행궁은 『경기지』에서와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다.
5) 『기전읍지』의 군현지도
『기전읍지』는 고종 31∼32년(1894∼1895)에 편찬되는데 여기에도 마찬가지로 군현 지도가 첨부되어 있다. 여기에는 현재 부평·교동·영종의 지도가 남아 있다. 이들 지도도 마찬가지로 채색지도이며, 크기는 28.6×17.8㎝이다.
우선 부평의 지도를 보면 이는 『경기읍지』와 별다른 차이점을 찾기 어렵다. 지도를 작성할 적에 『경기읍지』의 지도를 저본으로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교동지도는 이와 다르다. 『기전읍지』의 교동지도는 매우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동서남북으로 사경(四境)과 거리를 표시하고 관아건물의 배치도를 사실적으로 그렸으며, 이를 둘러싼 성곽도 세밀하게 표현하였다. 이 지도를 통해 각 건물의 위치를 비정하는 것이 가능할 정도이다. 화개산성과 그 아래에 위치한 화개암도 기록하고, 산천과 도서 들도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영종지도도 비교적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이 지도에서는 진의 중심이 태평암에서 자연도로 옮긴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는 고종 12년(1875) 운양호사건으로 영종진은 전폐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영을 태평암에서 자연도 백운산 아래로 옮기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지도의 작법도 바뀌고 있다. 기왕의 지도에서는 진이 위치하던 태평암과 자연도를 엇비슷하게 그렸으나 이제는 자연도를 중심으로 그리게 된 것이다.
6) 각 읍지의 군현지도
(1) 인천
개별적으로 전해오는 인천의 군현읍지 4종 중에 3종에 지도가 첨부되어 있다. 지도가 첨부되지 않은 군현읍지의 경우도 원래부터 지도가 빠진 것이 아니라 전해오는 과정에서 떨어져 나간 것으로 보인다. 지도가 첨부된 인천읍지는 다음과 같다.
① 『인천부읍지』(규장각도서, 古 915.12-In2b, 32.4×21.8㎝)
② 『인천부읍지』(규장각도서, 奎 10713, 32.3×21.8㎝)
③ 『인천부읍지』(장서각소장 k2-4290, 채색지도)
①은 읍지의 앞에 인천지도가 있는데 크기는 32.4×21.8㎝이다. 이 지도는 『여지도서』의 인천지도와 유사하다. 인천부를 중심으로 인근의 섬들을 그려 넣었고, 도로를 선으로 표시하였다. ②와 ③의 읍지에 첨부된 지도도 거의 같은 형태이다. 이는 읍지와 지도를 같이 전사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2) 부평
부평읍지 3종에는 지도가 모두 첨부되어 있다.
① 『부평부읍지』(규장각도서, 고 915.12-B889b, 29.7×20.7㎝)
② 『부평부읍지』(규장각도서, 규 17361, 30×21.2㎝)
③ 『부평군읍지』(규장각도서, 규 10715, 32.7×21.7㎝)
①의 읍지 앞에 채색지도를 수록하고 있는데 크기는 29.7×20.7㎝이다. 지도에 표시한 항목은 이전의 지도와 별 차이가 없다. 다만 도로를 대로와 소로로 명기하고 있는데, 이제 도로는 지도를 작성함에 있어 중요한 항목이 되었던 것이다. 이는 당시의 상업발달의 정도를 반영하는 것이다. 이 지도에서는 그동안 문자만을 사용하던 지도작법에서 탈피하여 기호를 사용하기 시작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기호가 무엇을 표시하는 지 설명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제 지도를 좀 더 과학적으로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③에서는 본격적으로 기호를 사용하고 있다. 지도 위에 산, 천계, 도로, 교량, 방면, 산성, 지, 봉수, 아사가 어떠한 기호로 표시되는 지를 적어놓고, 지도위에는 기호만을 도시하였다.
(3) 강화
지도가 있는 강화의 읍지는 사찬읍지이다.
① 『강도지』(이형상, 개인소장, 29×30㎝)
② 『강화부지』(규장각도서, 奎 10703, 32.3×21.4㎝)
③ 『강화부지』(규장각도서, 奎 12194, 32.2×21㎝)
④ 『강화부지』(규장각도서, 奎 10699, 26×18.3㎝)
⑤ 『강화부지』(규장각도서, 고 4790-44, 심부전도 심부내성도, 22.8×15.2㎝)
⑥ 『강화부지』(규장각도서, 일쇠고 915.12 G429g, 21.9×15.1㎝)
⑦ 『강화부지」(장서각소장, K2-4204, 심부전도 심부내성도, 22.3×15.3㎝)
⑧ 『강화부지』(장서각소장, B15BB31)
⑨ 『속수증보 강도지 상·하』(국립중앙도서관, 고 2728-2, 강화부전도 강화읍내도)
①은 숙종 22년(1696)년 이형상에 의하여 편찬된 『강도지』 앞부분에 있는 지도이다. 이 지도의 크기는 29×40㎝로 세가지 색으로 그린 채색지도이다. 이 지도는 숙종조 당시 강화도 인근의 바다, 산천, 경계, 진보, 성, 도서, 진곶, 봉수, 영청, 사찰, 정자, 병창, 사단, 치첨 등등을 상세하게 그려놓은 일종의 군사지도이다.
②에서 ⑧까지는 모두 김노진의 『강화부지』이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김노진의 『강화부지』는 판본이 여러 가지이다. 2권 1책의 필사본과 4권1책의 필사본, 그리고 2권1책의 목판본이 전해져 온다. 「심부전도」와 「심부내성도」가 모두 들어간 경우도 있고 「심부전도」만 들어간 읍지도 있으나 지도의 형태는 모두 같다. 「심부전도」는 강화전도로 부내(府內)를 중심으로 산천, 도서, 방리, 진보, 산성 등을 표시하고 있다. 주목되는 것은 지도에 □, △, ○의 표식이 있는데, □은 진(津)과 진(鎭), 그리고 문수산성을, △은 진보(鎭堡)를, ○은 면리를 표시한 것으로 보인다. 내륙과의 입구에 한강구, 임진구, 통진, 풍덕 등의 지명을 명기함으로서 방향을 알 수 있게 하였다. 「심부내성도」는 강화부 내성의 지도이다. 성곽으로 둘러 쌓인 성안에 만령전, 진전, 외규장각, 행궁 등의 관사가 있으며, 동서남북의 성문과 그 곳으로 통하는 도로를 그려 넣었다.
⑨의 맨 앞에도 「강화군전도」와 「강화읍내도」가 들어있다. 이는 1932년에 편찬된 읍지인만큼 「강화군전도」에는 강화와 1914년에 편입된 교동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 지도는 고지도가 아니라 현대식 지도이다.
(4) 교동
지도가 있는 교동읍지는 다음과 같다.
① 『교동부읍지』(장서각소장, 귀 K2-4218, 채색지도)
② 『교동군읍지』(규장각도서, 奎 10731, 31.3×21.2㎝)
③ 『교동부읍지』(규장각도서, 장고915.12-G999g, 31.9×21.2㎝)
위의 읍지들은 모두 광무 3년(1899)에 편찬된 교동군 읍지로 책머리에 교동군의 채색지도가 있다. 이 지도는 『기전읍지』의 교동지도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비교적 상세한 편이다. 관아건물의 배치를 사실적으로 그렸으며, 이를 둘러싼 성곽도 세밀하게 표현하고 있다. 다만 향교를 문묘로 표시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화개산성과 그 아래에 위치한 화개암도 표시하고, 산천과 도서를 그려 넣었다.
3. 군현지도와 특수지도
1) 각 군현별 지도
군현지도라 하면 각 군현별로 작성되어 전하는 지도를 말하는데 경기지역의 것으로는
고종 9년(1872)에 제작된 경기도 각 군현의 지도가 남아 있어 조선후기의 모습을 자세히 전해준다. 최근에 서울대학교 규장각에서는 경기지역에 관련된 군현지도를 모아 지도집으로 간행하여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조선후기 지방지도,1997).
17세기 말 이래 조정에서는 전국지리지를 편찬하고 지도집을 제작하여 정책을 논의하고 결정하는데 중요한 수단의 하나로 삼았다.『해동지도』가 18세기에 편찬된 대표적인 군현지도책이라면, 이 지도는 조선왕조에서 시행한 관찬지도 편찬작업의 마지막 성과물에 해당된다. 경기도 지역 군현지도의 매수는 총 40매인데 여기에는 영종지도와 대부지도 등 2곳의 진영지도(鎭營地圖)가 포함되어 있다.
(1) 인천군
이 지도는 이전의 인천읍지 지도들과 다소 형태를 달리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전의 지도에서는 문학산을 중심으로 읍치를 표시하고 좌측에 향교, 앞쪽에 문학산성과 봉수를 표시하는 것이 기본 형태였다. 그러나 여기서는 읍치보다는 각 면과 그곳에 위치한 사창에 더 중점을 두고 있다. 또한 읍치로부터 안산방면, 부평방면 등 육로로 연결되는 도로와 옛 제물진 포구와 연결되는 도로가 적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덕적도에는 덕적진(德積鎭)이 설치된 것으로 나타나며, 멀리 이포면이 보인다. 문학산에는 임진왜란 당시 김민선(金敏善)이 왜구를 격퇴한 곳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육지와 바다 사이에 형성된 포구를 표시하고 각지에 장시(場市)를 표시하고 읍치와의 거리를 표시하고 있다.
【지도】군현도 속의 인천부(1872년)
(2) 부평군
북쪽이 지도의 윗쪽으로 되어 있고, 도로는 적색 실선으로 되어 있다. 시흥·인천·서울·김포 등 방위별로 나아갈 수 있는 곳이 기록되어 있고, 읍치에는 인천·서울에서 읍치까지의 거리가 기재되어 있다. 특별한 기호가 사용되고 있지 않으며, 중요한 산천명 이외에 역·봉수·제언·장시·교량·고적 등이 파악되어 있다.
【지도】부평부지도(해동지도)
부평지역의 군현지도는 『여지도서』·『경기지』·『경기읍지』의 부도를 거치면서 계속 수정되었다. 이 지도는 최종적으로 수정된 『경기읍지』의 부도와 모사관계에 있지만 몇가지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우선 이 지도는 해도(海島)의 구성에 있어서 『경기읍지』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으며 응도(膺島)에 거주민의 유무를 표시한 것도 다르다.
해도 사이의 푸른색 띠는 해로를 표시하며, 동쪽의 푸른색 띠는 경강(京江)의 수로를 나타낸다. 호도(虎島)를 사이에 두고 두 갈래길로 나뉘는 부평부 관할 해로는 20리 거리의 초경(初境)과 종경(終境) 지역이 표시되어 있다. 각 면에 딸린 사창(社倉)이 자세히 파악된 것도 『경기읍지』부도와의 중요한 차이이다.
(3) 강화부전도
고려시대 이래로 강화도는 우리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던 지역이다. 17세기 이후만 하더라도 이곳은 유사시 종묘사직을 봉안할 가장 유력한 장소로 여겨지고 있었다. 간척·개간에 따라 사회경제적 비중도 증대되었지만 강화도는 어디까지나 서해안 해방의 최대 요충지였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거치면서 강화도 해방체제를 정비하는 일은 무엇보다도 시급한 과제로 여겨지고 있었다. 대원군정권은 강화도에 포군과 포대를 설치하고 이를 유지할 군량을 확보해 새롭게 방어체제를 정비해 나갔다.
이 지도는 이러한 사정을 반영하듯 강화부 인근의 육로와 해로가 세밀하게 파악되었다. 적색 실선으로 표시된 해로는 크게 덕적도 방면과 교동 방면으로부터 강화부의 서북쪽 연안을 따라 경강(京江)으로 들어가는 길과 영종도 방면으로부터 손돌목 등 강화부와 통진부 사이를 지나 경강으로 합류되는 길로 구분된다. 강화도 연안의 수군 진보들과 인접 지역 사이의 수로가 표시되어 있다. 강화부 연안에는 제언들과 함께 수많은 군사시설들을 확인할 수 있으며, 초지돈(草芝墩)으로부터 학암돈(鶴巖墩)에 이르는 외성(外城)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내성(內城)과 정족산성의 내부구조도 비교적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면(面)과 진보(鎭堡), 산천의 표시형식은 같은 시기에 제작된 「통진부지도」와 일치한다. 이밖에 사우·영당·능원·사찰·암자·교량·봉수 등이 파악되어 있다. 그러나 1872년에 제작된 대부분의 군현지도에서 확인되는 장시와 사창이 파악되어 있지 않다.
이 지도는 『여지도서』·『경기지』·『경기읍지』의 부도와 전혀 무관하다. 앞선 지리지들이 매우 소략하고 거칠게 묘사된 데 비해 이 지도는 회화적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있다고 할 만큼 정제되어 있다.
(4) 교동부지도
교동부는 오랫동안 경기수영이자 삼도통어영으로서 서해안 해방의 중심축으로 기능했던 지역이다. 해방체제의 변화에 따라 이 시기에는 수군방어영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지도에는 교동도의 외곽에 강화·풍덕·개성·연안 등의 경계가 함께 그려져 있다. 특히 읍치로부터 건너다 보이는 송가도(松家島) 등 강화도 소속 여러 속도들이 묘사되어 있다. 교동도 내의 산들은 섬의 중심부를 향해 머리를 두고 있는 반면, 남쪽으로 바라다 보이는 강화부의 산들은 반대방향을 취하고 있다. 면대신 중요한 리의 명칭만이 기재되어 있으며, 봉수의 연결관계에 대한 표시가 없다.
『여지도서』·『경기지』·『경기읍지』의 부도들과 서로 직접적인 모사관계에 있지 않다. 1872년 「교동부지도」의 기본적인 윤곽은 『경기읍지』의 부도와 동일하지만, 내용상 몇가지 점에서 차이가 있다. 교동도 내의 각 지점에 읍치로부터의 거리가 기재되어 있고, 사창(社倉)이 파악되어 있으며, 적색실선의 도로표시가 매우 자세해졌다는 것 등이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이다. 읍치의 내부구조에 대한 묘사가 자세해진 것도 이 지도의 특징이다.
(5) 영종지도
1872년에 제작된 군현지도들 가운데 「대부지도(大阜地圖)」와 함께 영진지도(營鎭地圖)로서 포함되었다. 18세기까지만 해도 영종도는 보창처로서의 강화도와 깊은 연관속에서 이해되었다. 그러나 이양선의 출몰사태가 급박한 상황으로 변화하면서 영종도는 해방(海防)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다.
서북쪽의 위로가 있는 이 지도는 자연현의 옛 터와 영종 방어영을 중심으로 주변의 도서가 그려져 있다. 경오년에 쌓은 토성 세 군데가 옛 터에서 확인되며 봉수도 두 곳에 그려져 있다. 방어영-만세교-자연현의 옛 터를 지나 목장이 설치된 삼목도와 용유도에 이르는 길이 황색 실선으로 표시되어 있다. 각 면과 읍치로부터 거리가 파악되어 있으며, 방어영의 내부구조는 자세하지 않다.
바다에는 흑색 점선으로 해로가 표시되어 있다. 지도상의 해로에 따르면 남양방면으로부터 이어지는 해로는 팔미도 부근에서 영종방어영의 관할하에 들어오는데, 월미도를 지나면서 부평관할로 들어간다. 월미도 부근에는 조수의 진퇴에 따라 드러나는 암초가 있어서 험로임이 표시되어 있다.
2) 관방지도(關防地圖)
관방(국경의 방비)지도란 군현지도 외에 특정 지역을 특수한 목적아래 그린 지도로 주로 조선후기에 많이 작성되었다. 인천지역의 지도로는 강화지도와 「화도진도」를 들 수 있다.
(1) 강화지도
강화도는 서울의 관문이며, 국가의 보장처로 조선초기 이래 중요하게 여겨지던 곳이다. 따라서 여러 차례에 걸쳐 지도가 제작되었다.
병자호란 때 이 지역이 허무하게 함락되었기 때문에 강화도 수비문제는 심각하게 대두되었던 것이다. 인조 16년(1638)에 조정은 판중추부사 김개국(金蓋國)을 파견하여 강화도 치소(治所)를 옮기려고 하였다. 그는 위량동(位良洞)·선원사(仙原寺)·상림사(尙林寺) 등 세 곳을 후보지로 제시하면서 읍치(邑治)를 옮길 것과 수비강화를 지도로 작성하여 보고하였다.
숙종 원년(1675)에는 오시수(吳始壽)가 강화도 지도를 작성하고 수비보강문제를 논의 하였으며 같은 해 유혁연(柳赫然)은 개성·파주·평산 등지의 지도와 함께 강화도지도를 작성하고 관방을 논의하였다. 숙종 4년(1678)에는 병조판서 김석주가 강화도를 순행하고 강화도의 외성을 유지(遺址)에 따라 토축하면 좋겠다는 계문과 함께 『강화도도(江華島圖)』를 그려바쳤다. 이것이 현재 고려대학교에 소장되어 있는 지도이다. 그는 49개의 돈대를 설치하여야 한다고 건의하기도 하였다. 김석주는 이 공사가 끝난 후에 48개의 돈대처를 표시한 『강화도도(江華島圖)』를 그려 올렸는데, 그 지도가 현재 규장각에 남아 있다.
숙종 10년(1684)에는 대사헌 이민서(李愍敍)가 『강화도형편도(江華島形便圖)』를 진상했으며, 숙종 27년(1701)에는 강화유수 김석연이 『강화도도(江華島圖)』를 바쳤다.
영조 8년(1732)에는 이찬이 안흥진(安興鎭) 축성을 건의한 공로로 별군직(別軍職)에 임명되었다. 그도 『안흥진도(安興鎭圖)』를 진상하였다. 정조 3년(1779)에는 우참찬인 김종수(金鍾秀)도 강화도 지도를 제작하여 진상하였다.
이상과 같이 강화지역은 국방상의 필요로 인해 다양한 지도를 제작하게 되고, 또 이러한 지도를 모사하기도 하여 다른 지역에 비하여 많은 지도가 남아 있는 편이다.
【지도】강도전도(18세기 후반)
(2) 화도진도(花島鎭圖)(국립중앙도서관소장, 채색지도 111×124㎝)
화도진도는 화도진을 비롯한 인천 연안의 관방시설과 도로와 수로 등을 묘사한 관방지도이다. 화도진의 설치는 개항이후 일본이 강화 수로의 험난함을 알고 인천을 통하여 서울에 진입하려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다. 인천 연안에 방어시설의 구축을 위한 논의가 1877년 10월경부터 구체화되더니, 이듬해 1878년 8월 27일 신정희(申正熙)를 진사와 포대의 공역감동당상(工役監董堂上)에 임명함으로써 공사에 들어갔다. 진사(鎭舍)는 강화로 통하는 수로를 내려다 보면서도 바다에서는 응봉산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화수동 언덕에 두었다.
포대공사는 10월 15일 제물포 주변부터 축조하여 이듬해인 1879년 7월 1일 일단락 되었다. 진사가 위치한 다소면 화도리의 지명을 따서 화도진이라 이름하고 무위소에서 추천한 별장의 관할아래 두었다.
1879년 11월 15일 인천도호부 다소면을 화도진 관할로 하였다. 곧 화도진과 인천도호부의 관할을 달리하여 독진으로 만든 것이다. 지도상의 화도진은 인천도호부 다소면의 일부로 묘사되어 있다. 따라서 『화도진도』는 화도진이란 이름을 부여 받은 1879년 7월에서 독진으로 편재된 11월 15일 사이에 제작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화도진은 1880년 말 인천개항을 허용함으로써 사실상 무용지물이 되었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에는 관할이 여러 차례 바뀌고 1894년 갑오개혁 때 혁파되었다.
【지도】화도진도(1878년)
이 지도는 인천도호부 관아를 중심으로 주변 지형을 채색한 지도로 마치 한 폭의 산수화와 같다. 여기에는 인천도호부의 3개면(황등천면·전반면·신현면)을 간략하게 처리되고 이포면은 생략하였다. 화도진도는 진영과 각 포대시설은 물론 인천도호부 관아의 건물배치 및 산천이름, 그리고 지금은 매립되어 사라진 연안의 섬 이름까지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이러한 것들의 고증에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다.
지도의 우측상단에는 화도진에서 관할하는 6개 포대, 인천도호부 방어영 관할 2대 포대의 읍진(邑鎭)까지 거리를 명시하였다. 그리고 포대마다 그 명칭과 포좌(砲座)의 방향 및 포혈(砲穴) 수가 묘사되어있다. 묘도포대와 장도포대는 섬에 설치되어 있고, 석축 혹은 흙으로 뚝을 쌓아(築堰) 육지와 연결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적의 상륙이 예상되는 해안에는 토둔이라 쓰인 토루(土壘)가 구축되어 있으며, 응봉산 정상에는 요망대가, 그 앞에는 해망대가 설치되어 있다.
※ 지도의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는 花島鎭營은 현재의 花水洞에 위치하며 옛 모습의 일부가 복원되어 있다. 해안의 매립에 의하여 전혀 달라진 옛 해안선과 자연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는 지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