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 범주: 가정/멜로/로맨스/우정/이별/사랑]
솔희는 약간의 흥분과 깊은 평온을 만끽하면서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시내에 들어선 가로수와 간판들, 오가는 사람들 모든 것이 그녀를 축복해 주고 있는 것 같았다.
(제이는 정말 나의 새로운 인연일까? 결혼후 만날 진정한 인연 맞는걸까?)
솔희는 신호 대기 중에 살짝 왼쪽 머리를 차창가에 기대며 회상에 빠진다.
지금으로부터 4년 6개월전,
엘에이 코리아 타운의 대형 한인교회에서 늦봄의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신부 솔희는 하프컵으로 상반신이 노출된 순백의 웨딩드레스 차림에 꽃다발을 품고 교회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쇼팽의 결혼행진곡과 하객들의 기립 박수에 맞추어 아빠의 팔짱을 끼고 입장했다.
주례 목사님이 서 있는 강대상 아래에는 짙은 곤색 턱시도를 입고 품이 넓은 넥타이를 맨 든든한 신랑이며 오늘 탄생하는 새 가정의 세대주이자 家長으로 임명될 채정균이 똑바른 자세로 그러나 흥분과 기쁨에 설레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하객들은 시댁과 친정의 인맥들이 많았고 일부 음악인들도 있었다.
더하여 뉴욕의 콘서바토리 석사과정 졸업식이 끝난 직후라 일부로 서부까지 날아와서 축하해준 콘서바토리 멤버들이 축가를 화려하게 연주해 주었다.
고급스러운 교회의 홀에서 수많은 참석객들 앞에서의 주인공이었던 신부 솔희,
아빠에 의해 정균에게 인도되던 순간,
그녀는 이보다 더 큰 홀의 독주자 내지는 오케스트라 협연자로서의 주인공이 될 초석을 다지는 날이라는 생각에 그녀의 흥분이 더해졌다.
나름 네임드 목사가 주례를 하면서 특별히 능력과 비젼을 갖춘데다가 클래식 매니아이자 후원자인 신랑 정균과, 미래 성공을 위해 수련하는 음악가 신부 솔희는 하나님이 맺어주신 최고의 조화롭고 이상적인 조합임을 강조하면서 이 혼인은 이제 사람의 힘으로 깨거나 가를수 없는 불가역적인 것임을 천명했다.
새로이 탄생하는 이들 새내기 부부에게 소통과 신적 화합을 당부했고, 남녀가 불평등한 것이 아니라 본성과 특성이 다른 것임을 설명하였다.
목사님은 정균에게 지금 이 순간부터 한 집안의 가장이 되었다는 신원의식을 잃지 말고 부드러운 리더쉽과 강한 책임감을 부탁했으며 솔희에게는 온유함과 순종을 여러차례 강조하였다.
그리고 언젠가 신이 선물로 보내줄 자녀를 신의 자녀로서 위탁하고 사랑으로 키워내길 당부했다.
신랑 신부에게 별도의 서약을 할때 신부 솔희는 家長인 남편에게 겸손한 자세로 절대 순종하겠다는 서약도 똑똑하고 낭창한 소리로 응했다.
솔희는 목사님의 당부와 덕담을 새기거나 자기에게 강요된 서약을 지킨다기보다는, 뻔한 형식적인 교장쌤 훈화에 곁들인 통과의례라고만 생각했다.
새신랑 정균과 새신부 솔희는 식의 끝마무리로 대중들 앞에서 기나긴 웨딩키스를 나누고 멘델스죤의 ‘한 여름밤의 꿈’ 4악장 행진곡이 연주되는 가운데 천장에서 터진 꽃종이들을 맞아가며 행진했다.
정균의 팔짱을 끼고 걷던 솔희는 이제야 새롭고 진정한 인연을 만나기 위한 첫 번째 관문을 통과하는 순간이라고 느끼며 또 한차례의 흥분과 만족감에 결혼행진을 했다.
그녀 옆의 신랑 정균은 그녀가 치열하게 사랑한 남자도 아니었기에 그런 남자와 해로할 굳은 각오는 없었다.
화려한 예술가적 성공이란 계층의 상승을 의미했고 거기에는 금전 뿐 아니라 품위가 따르는 법이라 그때에는 거기에 걸맞는 남편감이 필요한건 당연하다 생각했다.
그녀의 음악적 성공 후나 아니면 성공가도를 달리는 동안에 만나게 될 새로운 인연은 돈과 나이만 많은 갑부라기보다는 그녀가 그때 진정하게 사랑할수 있을만큼의 잘생기고 느낌도 있는 키크고 슬림한 근육에 배에는 6팩이 새겨지고 얼굴색이 하얀 전문직 연하남이었으면 좋겠다고 아주 짧막한 순간에 그녀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솔희는 결혼후 3년차에 뜻하지 않았던 임신을 경험했고, 결혼 4년이 지나 우연과 우연이 겹쳐서 만난 제이.
물론 연하남은 아니고 1살 위의 남자고 같은 음악가였다.
하지만 새로운 인연이 자기와 동등 이상의 음악가라는 것은 또 다른 의미의 매리트가 생겼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생각해보니 그녀의 마음 속 깊은 곳의 냉정한 이성은 제이는 매력적인 남자지만 한 여자의 남편감은 아니라는 사인을 보내고 있다.
앞으로의 일은 누구도 모르며 계획대로 되지만은 않는 법.
성공후엔 새 인연을 만나 재혼을 염두에 두겠지만, 이제 성공을 위한 길로 들어서는 길목에서 만난 제이라는 파트너는 잠시간의 길벗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지금까지 해오고 있던 정균과의 첫 결혼생활을 웬만하면 원만히 유지하되 중간중간에 따로 연인을 두고 낭만어린 사랑을 추구하는 것도 괜챦으리라 생각했다.
반면 그녀가 전국적으로 인지도가 있는 화려한 음악적 성공을 거두고 자주 해외출장도 다니면서 연 백만불 이상을 거머쥐게 될때 그 옆의 남자로서 정균은 아무래도 폼이 나지 않을 것이기에 과연 이 결혼생활을 언제까지 유지해야할지를 고민하기도 한다.
다행히도 제이 역시 솔희에게 그런 것에 대한 부담을 주지 않고 있다.
그래서 솔희는 자신의 결혼생활에 무관심하지만 그녀에게 사랑을 매개체로 미래 솔희의 거취에 짐을 지우지 않으며 존중해주는 진정한 자유인 제이에게 매료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때 자동차의 스피커에서 전화벨 소리가 울리기 시작한다.
프리우스 XLE의 대시보드의 넓직한 화면에는 ‘세대주’라는 송신자 아이디가 떴다.
그건 솔희가 휴대폰에 입력한 정균의 전화번호였는데, 솔희는 정균과 만나면서 그의 이름 그대로 ‘채정균씨’라는 아이디를 넣었다가 결혼 직후에는 그 아이디를 바꾸는데 왜 하필 ‘세대주’라는 글자를 넣었을까.
이름을 그대로 놓아두어도 좋았지만 사실 솔희는 별로 깊은 생각을 하지 않고 잠재의식의 명령대로 남편 전화번호의 아이디를 그렇게 바꾸었다.
‘세대주’라는 의미는 한국에서 법률적, 행정적 서류상 용어로 쓰이는 말이라 아무런 임팩트도 감동도 느낌도 없는 단어였기 때문이 아닐까?
어쩌면 솔희가 남편 정균에게 대한 태도 그런 형식적인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핸들 가상이에 붙은 수화기 모양의 버튼을 눌렀다.
“아이고, 여보 이제야 통화가 되네. 나 지금 출근하는 중에 생각나서 전화해봤어”
“어머, 시간이 그렇게나? 하긴 지금 여긴 11시니깐요, 여, 여보! 저 외곽 시골쪽으로 나가는 중이에요. 가난한 외곽 지역 초등아이들 중에서 유망주 발굴하는 프로그램이 있어서 심사위원을 구한다는데 저한테 위촉이 떨어졌어요. 생각도 안한 일인데, 이런 일까지 해야 하네요”
“휴우......당신도 그렇고 당신을 고용한 회사도 좋은일 하는구나, 근데 아침은 뭐 먹었어?”
“걍 미국식으로 바이스트 부르스트 소시지에 샐러드랑 커피랑요”
“뭐라고? 이거 우리 부부가 이심전심이네? 나도 그거 먹었는데! 그나저나 당신 소세지 안좋아하던데 입맛이 변한건가?”
여기서 솔희는 당황해 버렸다.
그녀가 소시지를 안좋아 했던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사랑은 모든걸 변화시킨다더니 제이를 사랑하게 되면서 일어난 변화일지도 모른다.
“양파랑 볶으면서 레몬즙 짜서 넣어봤지, 유튜브 보니깐 생강있어야 한다는데 냉장고 보니깐 없더라구, 역시 집에 여자가 있는거랑 없는거랑 달라, 그치?”
아까 솔희가 아침 제이의 아침식사를 준비해주면서 생강을 빼먹고 조리한것과 정균의 오늘 아침 상황이 너무나도 똑같았기 때문에 뭔가 뜨끔했다.
그러면서도 집에 여자가 있는거랑 없는거랑 다르다는 말에 솔희는 마음 속으로 반발하기 시작했다.
그의 말은 가사를 여자가 당연히 전담해야 한다는 뉘앙스가 있었고, 실제로 솔희가 지속적으로 가사를 전담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은근히 정균이 솔희에게 죄책감을 심어주려는 시도로 읽혔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당신 오려면 2주나 남았네? 지난번에 내가 가려다가 거기 스케쥴 때문에 못간거 너무 억울하더라”
“이번엔 에이젼시에 이야기를 제대로 해 놓았으니깐 휴가받을거에요. 틀림없이 4박 5일 정도 엘에이 머물면서 당신이랑 시간 보낼테니깐 너무 초조해 하지 마세요.”
“휴우.....첫 3개월 동안 매번 서로 오가고 했는데 언젠가부터 길과 시간이 자꾸 엇갈리니까 나도 내 정신이 아니야. 그렇쟎아도 어제 회사 여직원이 나더러 얼굴색이 변색되었다고 말하더구만”
“네에?! 누가요?”
솔희의 질문에는 갑자기 날이 서기 시작했고 정균은 앗차 싶었다.
그녀는 사실 정균과 화상통화를 드문드문 나누면서도 그의 안색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정균에게 관심이 없어진 상태에서 의무적인 영통 시간만 때우려다 남편의 중요한 변화를 놓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의 그러한 아킬레스건을 어느 모르는 여자가 제대로 건드려 버린 것이다.
솔희는 정균의 안색이 변했다는 건강 상의 문제보다 하필 여자가 지적했다는 사실에 분노가 폭발해 버렸다.
그녀는 이성의 제어장치가 고장나 버렸고 날선 소리를 정균에게 쏟아낸다.
“누가 남의 남자의 건강을 허락없이 살피나요? 간호사에요, 간병사에요? 여직원 누구죠? 결혼했나요?”
“그냥 어린 직원이고 원래 남의 가십에 관심이 많은 여성이야, 별뜻은 없어”
“여봇! 당신이 언제부터 다른 여자를 그리 감싸셨나요? 당신이 숨긴다면 내가 그 여자가 누군지 못 알아낼 것 같나요?”
당황했던 정균은 대화도중 실소가 나올 뻔했다.
회사의 커플동반 파티때 솔희는 결혼 직후에 딱 한번 인사겸해서 나왔었고, 그 후에 벌어진 7~8회 정도의 커플파티에 솔희는 연습강행군을 이유로 전혀 참석을 안해왔다.
또한 솔희가 병적으로 싫어하는 것이 “누군가의 아내로서의 솔희”라는 개념이었기에 남편 직장의 파티에 그의 아내로 참가하는건 그녀의 철학과 맞지 않는 일이었다.
“...............여보, 차 세워요, 지금.....차세우고 당장 영통해요”
솔희는 금속성의 날카로운 음성을 버리고 낮은 포복하듯이 목소리를 착 아래로 깔았고 정균에겐 그것이 더 공포로 다가왔다.
정균은 출근 운전중이라고 애원했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먼저 인근 쇼핑몰 주차장에 주차했다.
그도 할수 없이 하이웨이에서 내려 시내의 갓길주차를 했다.
이번에는 솔희가 먼저 카톡 페이스톡을 걸었다.
솔희가 자세히 바라본 스크린 속의 정균의 얼굴은 약간 거무튀튀하게 변색되어 있는게 맞았다.
그전의 몇 번 영통에서도 솔희가 면밀히 그의 안색의 변화를 잡아내지 못한 허물은 있지만 솔희는 그것보다 다른 여자의 지적을 받았다는데서 질투가 끓어 올랐다.
“지금부터 말해봐요, 뭘 드셨고 어떤 생활을 한거에요?”
“밤에 혼술을 많이 했지, 그리고 요즘은 나 힘들어, 술이라도 없으면 잠을 잘수 없어서. 당신이 걱정하고 당신 일에 지장있을까봐 말을 안했던 것 뿐이야”
“.........휴우, 여보, 아기에요? 데모하는거에요? 제 눈엔 당신이 저한테 시위하는걸로 보여요. 남자가 그러고 다니면 아내인 제가 욕을 다 먹게 되어 있어요. 남들은 부부가 떨어져 사는 이유를 알려고도 하지 않을거구요. 건전하게 골프를 즐기던가 교회에서 더 열심히 활동하던가 그렇게 해보세요. 당신 아내는 이곳에 와서 치열하게 살면서 발전하고 있어요. 발전과 성장도 부부가 함께 해야 의미가 있죠, 계속 당신 저보다 퇴보하게 되면 어쩌겠어요?”
“그래 이제부터 끊으려고. 건강진단도 받고 이제부터라도 운동을 좀 하려고, 당신한테 이런 일로 걱정끼쳐서 정말 미안해”
“저보다 당신을 위해서에요. 제가 당신말고는 누가 있죠? 친정 엄마아빠 앞에서 전 출가외인이고요, 당신이 잘못되면 저 혼자 세상에 홀로 남겨지는 처지가 될 수밖에 없어요. 제발, 당신 홀몸 아니에요, 능력있고 못생기지도 않은 남자가 아내와 떨어져 지내면서 꾀재재하게 다니면 못된 의도를 가진 여자들이 약한 고리를 건들며 당신을 노릴수가 있어요. 저는 그런 상황은 용납못해요”
솔희는 오히려 방금 전의 흥분이 가시기 시작했고 점점 목소리가 차분해져 갔다.
그렇다고 정균과 그 회사 여직원을 징계하겠다는 의도가 철회된건 아니었고 솔희는 정균의 약한 고리를 쳐서 굴복시키기 시작했다.
“분명 폐활량도 줄었을거고 근도 소실되었을거에요. 제가 집에 다니러 갔을 때 저를 품고 욕구를 풀려 하시려는건 알겠지만 저는 당신 잠자리 시중에 부담만 늘어날거에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알았어, 당신 뜻 충분히 알아, 당신을 위해서라도 내 건강 내가 챙길께”
“아직 안 끝났어요. 그년 전화번호좀 내놔 봐요”
“아, 여보 그건...!”
솔희는 정균이 어린 여직원을 감싸고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여 또 다시 폭발해 버렸다.
“당신 저없는 사이에 그년이랑 어디까지 간거길래 이렇게 감싸고 도는거에요? 아내가 느끼는 배반의 아픔과 분노보다 그 여자의 안위가 더 중요한가요? 당장 오늘 비행기타고 엘에이로 갈께요! 택시타고 바로 당신 회사로 가서 그년 머리채 잡고 주차장으로 끌어낼거에요!”
“오, 그럼 나야 대환영이지. 오늘 저녁때까지는 올수 있는건가? 비행장 나갈께”
“아오오오옷.....!”
솔희는 남편의 우문현답에 금속성 비명을 질렀지만 그 틈에 오히려 마음이 풀려 버렸다.
그리고 화면 속의 솔희는 너털웃음을 웃었다가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는다.
분위기를 파악한 정균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여보, 당신이 오해하는 그런 관계 절대 아냐. 그녀는 커뮤니티 컬리지만 졸업하고 사회에 나온 어린아이야. 당신 가오만 상하지, 당신이 어디 그런 아이랑 남편두고 다툴 군번인가?”
“휴우..........알았어요. 제가 요즘 예민한 일이 많아서요. 제발 술끊고 운동이나 하세요. 당신 태권도 유단자니깐 태권도장 다시 등록해서 이어가던지 헬스클럽 트레이닝을 신청하던지 무얼하던지요”
“그래, 2주 뒤 비행기 시간이나 알려줘. 나 지금 회사 다 늦었다. 또 영통하자, 세상 끝날까지 사랑해, 여보, 나의 영원한 사랑, 인생 유일한 내 색시 솔희!”
“어유, 느끼한 맨트........! 그런다고 뭐 내가 감동하나요? 여자가 감동할만한 문장좀 잘 공부하고 개발해 보세요.............그럼!”
15분 정도의 영통 속에서 천둥과 번개와 파도가 수차례 지나간 솔희는 기운이 빠져 있었다.
하체 속에 제이의 정액을 머금은 상태에서 남편과 통화하면서 그의 불륜을 의심하고 세차게 몰아붙였다가 별 소득없이 통화를 끝맺은 솔희는 방금전까지의 평화롭고 행복한 기분이 날라간 것이 무척 억울했다.
솔희가 정균의 주변에 질투심을 내비친건 처음이었고 그녀도 왜 그런지는 알수 없었다.
토랜스 한인 쇼핑몰에 위치한 고급 불고기집에서 정균은 두명의 사내와 한명의 아낙과 고기를 굽고 있었다.
이것은 정균이 준비한 그와 솔희가 나가던 교회와 성가대에서의 퇴거절차였다.
젊은 남자 한명은 성가대 지휘자, 조금 나이들어 보이는 탈모가 진행되는 중년 남자는 구역담당 목사, 중년여인 하나는 성가대장이었다.
“고기드실 때 약주 한잔씩 안하시나요? 일종의 소화제인데?”
“아, 괜챦습니다. 저희는......채선생님 약주 하시고 싶으시면 하세요”
정균은 교회사람들의 이런 면에서 짜증이 났다.
그깟 술한잔이 뭐라고 이토록 엄근진한 척들을 하는걸까?
그 교회 반주자였던 솔희가 떠나고 나니 홀로 남아 있던 반주자 남편을 찬밥취급하며 은근히 탈퇴를 유도하던 속물들 아니었던가?
정균에게 성도는 술을 마시면 안된다고 이야기해도 불쾌할 것이었고, 정균에게만 특별히 자율권을 존중하여 술을 마시는 것을 허용한다해도 둘다 기분이 나쁠 터이다.
후자의 경우 자기들의 도덕적 우월감에 사회적 스킬을 과시하는 것일테니깐.
소맥을 시키고 싶었지만 그 자리에는 없는 솔희의 체면이 있어서 사비뇽 와인을 시키고 나머지 참석자들에게 아주 약간씩만 따라준뒤 그도 와인을 따랐다.
솔희는 교회에서 피아노 반주 실력을 비롯해 외모의 아름다움 못지 않게 정중하면서도 유머러스한 매너와, 우아한 행적, 믿음깊어 보이는 언행 등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작심한 듯 정균과 비슷한 나이 또래의 젊은 남성인 재미성악가겸 지휘자가 정균에게 정말 궁금한 것을 물어 보았다.
항간에 도는 여러 가지 억측들을 확인해 보고 싶은 호기심인 듯 싶었다.
“채솔희 집사님 보스톤 활동 성공적으로 하고 있지요?”
“당연하지요.”
“그럼 채솔희 집사는 뭐 한 1년 반 후면 돌아오시나요?”
“그게..........계약이 그렇게 되어 있으니깐요”
거짓말을 못하는 정균은 아주 당연한 이야기를 서류상 계약 이야기로 얼버무렸다.
"채솔희 집사는 그 스펙만으로도 성공한거에요. 이만 만족하시고 살림에 합류하는게 ...... 부부가 오래 떨어져 있으면 안 좋아요. 특히 기러기가정들 애들 다 큰 다음에 부부끼리 살면 신혼분위기 재연은 커녕 모르는 사람과 동거하는 어색한 기분이라고 하더군요. 채선생님도 부인과 잘 의논해 보세요. 단원들부터가 채선생님 너무 외로운 티가 난다고들 이야기하는게 제 귀에 들려와요. 그럴때마다 근거없는 말은 하지말라고 제가 입단속을 시킨답니다."
뽀글머리에 붕뜬 화장에 빨간 립스틱을 바른 전형적인 아줌마, 성가대장은 그녀도 성악을 전공한 소프라노로서 뭔가를 알고 있는 듯한 말을 은근히 내비쳤다.
정균은 그 53세의 성가대장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던 것이 주책인 주제에 깐깐할뿐 아니라 남가주 최고의 명문대학 성악과를 그 예전 한인학생도 드물던 시절에 졸업했다는 자부심을 코에 걸고 있던 여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여인이 방금 해준 말은 오지랖을 넘어서 정균과 솔희 부부를 위한 뼈아픈 충고였다.
단순한 억측이 아니라 알만한 사람들은 바깥에서도 안보고도 아는것 같았다.
솔희는 정균을 이끌고 옮겨서 반주하던 교회에서도 떠났지만 그는 한동안 성가대에 남았다.
그것은 자기의 체면을 지켜달라던 솔희의 잔인한 부탁이기도 했다.
그는 성가대 사람들에게 솔희와 매일 하루에 한번씩 영통하고 있으며 카톡은 시간 단위로 오간다고 거짓말을 했고 매달 견우직녀처럼 만나서 아쉬움과 즐거움이 교차하는 시간을 함께 보낸다는 거짓말까지 보탰다.
하지만 분위기는 속일수 없었던지 정균의 외로워 보이는 모습, 연습이나 예배가 끝나면 힘없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교회를 나서는 그의 모습을 남의 가쉽에 민감한 교회 사람들이 모를 리가 없었다.
(채정균 성도님 모습이 너무 외로와 보이지 않아? 아무래도 별거같아 보이는데?)
(그러게 말야, 채솔희 집사님이 엄청 남편 챙기는 것 같아보였고 남편 팔짱끼고, 사람들 앞에서 우리 주인, 우리 주인, 그러지만 어찌 좀 가식적으로 보이더라고, 뭔가 문제가 생겼음에 틀림없어)
(결혼한 여자가 자아실현이니 성공이니 하면서 애도 없는 상태에서 혼자 남편 등지고 기약없이 멀리 떠난 것 자체가 의혹이구만. 채솔희 반주자 얼굴함 바바. 생긴 값하겠고만.)
(그 반주자 남편도 그래, 보니깐 믿음도 별로 없어 보이고 결혼하려고 개종했다던데. 하여간 안됐어. 채솔희 반주자 미모보니깐 여러 남자 잡겠더만 분명 그 동부에 남자생겨서 간거야)
(나도 전공자라서 아는데 25살 이전에 뮤지션의 성공여부가 판가름 나거든? 시집간 30살 유부녀가 성공은 무슨 성공! 권태기에 새로운 청춘사업 성공시키러 간거겠지)
아무리 귀를 막으려 해도 정균의 귀에 저런 식의 뒷담화가 서서히 들려오기 시작했다.
게다가 솔희가 보스톤으로 떠난지 얼마후 슬슬 성가대장이나 지휘자, 음악목사 등이 그를 대하던 태도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테너 파트의 정균은 유능한 단원이었지만 이 교회의 성가대원은 절반 이상이 성악전공자였고, 다른 악기나 작곡전공자들도 이곳의 합창단원 숫자를 채웠기에 비전공자가 명분없이 남아 있을수가 없었다.
그 성가대는 100명 단위의 대규모 합창단을 꾸리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지만 오래전부터 성가대원을 40명 이내를 유지하는 것이 전통이었고, 그 교회 성가대원이 되기 위해 음악목사나 예전담당 전도사, 지휘자나 대장에게 줄을 선 사람들이 많았고 이들은 계속 빈틈이나 공석을 노리고 있었다.
정균은 솔희와 그 교회 성가대를 함께 다니던 시기 많이 행복했었다고 느껴왔다.
아내가 일요일 아침마다 파우더룸에서 화장을 하고 나오는 모습의 시각적 쾌감을 느꼈고, 과장된 제스츄어일망정 솔희는 교회에서 그의 팔짱을 꼭 끼고 다녔으며 마주치는 교회 인사들에겐 정균을 “주인”이라고 소개하고 표현해준 것에 그녀에게 고마워했다.
그리고 별도의 테너파트 연습을 할 때 업라이트 피아노 앞의 솔희는 테너 멜로디 라인을 한손으로 쳐가며 초조한 모습으로 정균을 수시로 바라보고 엄마의 눈으로 싸인을 줄 때, 솔희에게 진심으로 서포트를 받는다고 느끼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그가 교회를 떠날 결심을 하게 된 것은 세대주인 정균 앞으로 배당된 십일조에 그는 지속적으로 $800씩만 보낸 것이 지적을 당한 사건이었다.
최근 그에게 찾아온 전도사는 세대주 정균의 대략적 수입을 가늠해보고 정균과 솔희의 두 사람분으로 월 천오백불은 십일조로 내는 것이 적당하다고 은근한 압력을 행사했다.
솔희가 보스톤으로 떠나면서 반주를 그만두었기 때문에 더 이상 솔희 앞으로 월 천오백불의 반주자 사례비는 당연히 지급되지 않는다.
솔희도 없는 마당에 정균에게 십일조를 인상하길 바랬다는 것에 대해 이 교회를 떠나달라는 싸인으로 그는 읽었다.
첫 고기를 집기에 앞서 대표기도를 마친 구역담당 목사는 헛기침을 하며, 떠나는 마당에 적지않은 헌금을 내놓은 정균을 치하하기 시작했다.
"채선생님께서 봉헌하신 3천불은 정말 하나님 사업에 귀하게 쓰일 것입니다. 가장의 모범인 아브라함이 살렘 임금에게 처음으로 십일조를 바친것과도 같이 채형제님의 이런 봉헌은 우리 교회에 기념비적으로 남을 것입니다."
"아, 안사람 두달치의 반주자 사례비를 돌려드리는 것인데 헌금으로 아신다니 저도 영광입니다."
결국 정균은 솔희가 보스톤으로 떠난지 6개월만에 이렇게 막대한 헌금을 하며 이 식사를 마지막으로 정중히 인사를 한뒤 그 교회를 쓸쓸히 나섰다.
그가 교회퇴거 절차를 정중하고 신중히 밟은 이유는 그의 행동으로 인해서 떠나간 솔희가 그 교회에 나쁜 소문에 휘둘리지 않았으면 하는 아내에 대한 보이지 않는 배려였다.
아름다운 팔로스 버디스 해안가 깊은 산속의 주택의 한 밤중, 1층의 주방 하나가 겨우 점등되어 있다.
2천스퀘어피트, 차 두 대를 수용할수 있는 실내 주차장 면적을 빼면 48평 정도의 매우 큰 집이지만 언젠가부터 휑하는 실내 바람소리가 들릴 정도로 고독한 집이다.
차고에는 재활용을 위해 내놓은 물패트병들도 있었지만 빨간색 라벨의 참이슬이나 처음처럼 소줏병이 열 개 이상 나뒹굴고 있었다.
그건 몇 달치가 아닌 불과 1주일치였다.
오늘도 정균은 밥대신 토랜스의 한국 쇼핑몰에서 닭똥집과 오뎅국물을 픽업해 왔다.
기억은 아름다워지기 마련, 솔희가 주방을 왔다갔다 하면서 저녁을 준비하는 모습이 현실처럼 느껴진다.
사실 솔희가 부부를 위한 저녁준비를 해 본적이 그리 많지는 않다.
하지만 한달에 몇 번만이라도 솔희가 저녁에 일찍 들어와 살림을 하거나, 최근 보스톤에서 엘에이를 방문해서 주방에 들어가 있는 모습만 보더라도 그는 행복했다.
그는 최대한대로 솔희가 이곳에서 움직이던 시기의 기억을 되살려 가며 술 한잔 속에 다시 그 기억을 녹이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허망감과 분노가 피어 오른다.
“솔희야,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니? 네가 해달라는대로 다 해줬어. 네가 부탁하지 않은 일도 내가 찾아가면서 다 너의 뒤를 받쳐주었어. 너의 잘난 말주변이라면 수십 종류의 내 잘못을 만들어 내서 내 입을 닫게할수도 있겠지. 그러지 말고 정말 내가 납득할만한 그럴싸한 이유를 대봐”
노란색 라벨의 진로 24 오리지널을 물컵에 담아 원큐에 마신뒤 그는 홀로 넋두리를 뱉는다.
솔희가 보스톤으로 떠나가기 전에도 솔희는 피곤하다는 핑계, 집안에서 홀로 연습해야 한다는 핑계로 대화를 그리 많이 해보지도 못했지만 그래도 대화의 가능성이 열려 있었던 상황과, 완전히 그녀가 떠나버린 상태에서의 대화 불가능성은 천양지차일 수밖에 없었다.
드레싱룸의 솔희가 쓰던 캐비넷에는 두어벌의 외출복과 세네벌 평상복만이 남아 있고 설합에는 그녀가 엘에이에 와서 입을 속옷 몇 개 정도 남아 있다.
화장실 세면대에는 솔희의 기초화장품과 바디제품이 가득했었고 수납장에는 솔희의 생리대가 차곡차곡 쌓였었고, 맨 아래의 설합에는 그녀의 질세척 도구도 있었건만 이제는 화장실에 여자의 냄새를 풍기는 흔적은 온데간데없이 텅 비어 있다.
성적인 욕구 불만은 그녀가 보스톤으로 간 것이 차라리 잘되었다 생각하고 있다.
솔희가 같이 있을 때 10일에 한번, 그것도 그녀의 강행군이 시작되면 연장되기 시작, 조금 여유가 생겼다 하면 하필 그녀의 멘스가 시작되고 그러다가 겨우겨우 솔희를 설득해서 20일에 한번 그녀를 온전히 품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솔희와 별거생활에 들어간 후에, 솔희가 방문하는 3~4일밤 동안은 섹스에 대해서만은 무사통과였고 원없이 솔희의 적극적인 허락을 구하지 않고서도 스트레이트로 연속 즐길수 있었으니 차라리 잘된건가 아니면 이 상태가 비참한 것인가?
“그래, 납득할만한 내 잘못을 말해줬어 방금, 나를 사랑하지 않는 여자한테 매달려 결혼한 것 그게 내 잘못이야. 내 조건만 사랑하는 여자인줄 알면서 결혼한건 네 잘못이 아니야, 나는 누구도 원망할수 없겠지? 당신에겐 아무런 책임이 없으니깐 당신말대로 남자답지 않고 성인답지 않은 짓이겠지? 역시 넌 총명해, 솔희야. 결혼생활의 안정도 추구하면서 느낌있는 남자와 바깥에서 연애도 하고 그거 아무나 못하는 짓이지.”
누가 물어보지도 않았건만 스스로 정균은 술에 취해 결론을 내리며 현장에도 없는 솔하에게 방백을 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힘든 것은 솔희의 정조에 대한 의혹이었다.
2년도 다 되어 가는 일이지만 아내가 샌디에고 연주회에 내려갔다가 의문의 외박을 하고서는 그 다음날 낮에 돌아온 뒤의 수상쩍은 행적은 지금도 그의 뇌리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보스톤으로 떠난 이유도 사실은 샌디에고에서 만났음직한 그 의문의 남성과 함께 하기 위해서인지, 혹은 전혀 새로운 남자를 만나기 위해서 떠난 것인지, 아니면 현지에 가서 누군가를 만났을수도 있다 생각했다.
그녀와 언젠가부터 불규칙해지기 시작하는 한달에 한번씩의 만남의 약속, 영통, 전화, 심지어 카톡마저도 숫자가 줄어들거나 아주 늦게 피드백이 온다.
하지만 당장 가서 확인해 볼 노릇도 아니고, 설사 그렇게 한다해서 솔희가 무릎꿇고 외도를 인정할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 아침 출근길의 솔희의 이해할수 없는 노기어린 질투심 표출도 그랬다.
원래같으면 바보같은 정균은 솔희가 자기와 모종의 여자 사이를 질투한다고 하면 오히려 더 기뻐했을 것이다.
질투도 사랑에서 비롯된 독점욕이요, 자기의 짝을 지키기 위한 정당한 감정이기 때문이다.
솔희는 결혼생활 내내 정균이 밖에서 뭘하던 몇시에 들어오던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고 그 이유에 대해 궁금해 하지 않았다.
그녀에겐 정균이 연주회때 라이드해주고 옆에 있어주는것만 확실하다면 그의 거취에 관심이 없었으며, 오히려 정 섹스를 자주 하고 싶으면 외부에서 섹파를 만들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질투할만한 근거도 전혀 없는 상태에서 불같이 화를 내고 아예 정균의 외도를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던 것도 의혹스럽기는 했다.
정균은 얼마후 담배를 다시 피우기 시작했다.
그녀와의 결혼조건으로 담배를 끊었던 것인데 솔희가 알면 이혼하자고 길길이 뛸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서서히 솔희와의 관계성에 대한 두려움이 옅어져 가고 있었다.
여러 가지 정황상 솔희의 과거와 현재의 불륜이 확실시되고 있는 것을 인정해야 했기 때문이고, 역설적으로 그것이 솔희에 대한 지나친 의식이나 잘보이려는 마음이 사라져 버린 것일게다.
언젠가는 솔희가 그의 정성과 마음을 알아주고 그 사랑의 일부만이라도 다른 방식으로 돌려받길 원해 왔지만 그건 어리석은 산수에 불과했다는 것을 그는 서서히 자각해 가고 있었다.
|
첫댓글 감사히 읽었습니다
저도 신중히 잘 쓸께요
@바다로간이리 섬세한 감정표현이 너무 좋습니다
@자작나무 용기를 주십니다!
감사 합니다
네, 잘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