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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애공 (諱 說) 家 역대 주요 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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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世 임열(任說) 백파 - 문간공파- 찬성공파- 죽애공파 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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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 군우(君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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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 죽애(竹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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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호 : 문정(文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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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졸년 : 1510 (중종 5) - 1591 (선조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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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대 : 조선 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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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분야 : 무신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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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사항 : 부 : 부 : 열(說) 조부 : 명필(明弼) 증조부 제(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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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 중종(中宗) 28년(1533) 계사(癸巳) 별시(別試) 병과(丙科) 1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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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 중종(中宗) 31년(1536) 병신(丙申) 중시(重試) 2등(二等) 1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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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 중종(中宗) 33년(1538) 무술(戊戌) 탁영시(擢英試) 을과(乙科) 1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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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원진사시] 중종(中宗) 26년(1531) 신묘(辛卯)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70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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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원진사시] 중종(中宗) 26년(1531) 신묘(辛卯)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1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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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열(任說)에 대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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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0년(중종 5)∼1591년(선조 2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군우(君遇), 호는 죽애(竹崖). 참봉 명필(明弼)의 아들이다.1531년(중종 26) 생원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533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가 되어 사관(史官)을 겸하였다.1536년 수찬으로서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하여 그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그뒤 부교리·집의·전한을 거쳐, 1543년 직제학이 되었고, 이듬해 병조참의가 되었다가 승지로 전보되었다. 명종 때 대사간·이조참의·대사헌·병조참의를 역임하였고, 그뒤 경상도관찰사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서 예조참의가 되었다. 이어 평안도관찰사로 나갔다가 다시 한성부좌윤·우윤을 거쳐, 공조판서로 임명되었으나 탄핵을 받아 부임하지 않았다.1560년(명종 15) 예문관제학을 지내고, 이듬해 동지춘추관사·도총부도총관이 되었다.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가 1567년 한성부판윤에 이어 지중추부사가 되었다.세번 과거에 급제하여 문명을 떨쳤고, 60년을 조정에 있으면서도 시종 권간(權奸)이나 사화(士禍)에 굴복하거나 따라붙는 일이 없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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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中宗實錄. 明宗實錄. 宣祖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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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世 임 연(任 兗) 백파-문간공파-죽애공파-풍안군파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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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 자정(子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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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 당호(棠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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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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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졸년 : 1567 (명종 22) - 1619 (광해군 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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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대 : 조선 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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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분야 : 무신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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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사항 : 부 : 영로(榮老) 조부 : 열(說) 증조부 : 명필(明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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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원진사시] 선조(宣祖) 24년(1591) 신묘(辛卯) 식년시(式年試) 진사 2등(二等) 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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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연(任 兗)에 대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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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7년(명종 22)∼1619년(광해군 1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자정(子正)이고 호는 당호(棠湖). 임명필(任明弼)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윤 임열(任說)이고, 아버지는 종부시정 임영로(任榮老)이다. 어머니는 청릉부원군 심강(沈鋼)의 딸이다. 임장(任章)의 형으로, 정인홍(鄭仁弘)이 문하에서 수학하였다.1591년(선조 24)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1603년(선조 36)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 해 승정원주서로 임명되었으며, 이어 정언·병조좌랑·예조좌랑·시강원사서·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선조의 재위 당시에는 동생 임장과 함께 소북(小北) 중 남당(南党)의 일원으로 인식되었다.1608년(선조 41) 광해군 즉위 이후 헌납이 되었으며, 헌납 재직중 선조의 인사 행정의 잘못을 비판한 소를 올린 정경세(鄭經世)를 공격하면서 피혐(避嫌)하여 정경세와 같은 입장을 지낸 홍가신(洪可臣)과 갈등을 빚었으나, 왕의 명으로 다시 출사(出仕)하였다. 이어 성균관직강을 거친 뒤, 1610년(광해군 2) 함경도 안무어사(按撫御史)로 파견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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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광해군의 형인 임해군(臨海君)이 옥사가 일어났을 때 공이 많았다는 것으로 녹훈(錄勳)되었다. 전주사고(全州史庫)의 실록을 재편찬했을 때, 기주관(記注官)으로 참여하였다. 형제간에 소속 당파가 달라 한때 파직되었으나, 다시 출사하여 장령을 거쳐 동부승지로 승진하였다.그러나 1613년(광해군 5)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한 혐의로 발생한 박응서(朴應犀) 옥사에 관련된 박치의(朴致毅)의 처남이라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폐모살제(廢母殺弟)를 주장한 정조(鄭造)·윤인(尹訒) 등을 귀양보내라는 정온(鄭蘊)이 상소에 관련되어 의금부의 신문을 받았다.1617년(광해군 9)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출 논의 때 폐출을 찬성하는 입장을 보였으며, 이듬해 명나라의 원병 요청에 대한 논의 때는, 후금(後金)과의 화의를 주장하는 등 광해군의 입장을 옹호하는 처세를 보였다. 이러한 연유로 언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광주목사(廣州牧使)에 제수(除授)되었으나, 1619년(광해군 11) 병사하였다.이후 후금과 영합하여 화친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관작을 추탈당하였다. 그 뒤 1664년(현종 5) 아들 경상감사 임의백(任義伯)의 상소로 직첩(職牒: 관직 임명장)을 환급받았다. 풍안군(豊安君)으로 봉군(封君)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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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燃藜室記述. 大東野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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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世 임장(任章) 백파-문간공파-죽애공파-정랑공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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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 자룡(子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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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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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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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졸년 : 1568 (선조 1) - 1619 (광해군 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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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대 : 조선 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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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분야 : 문신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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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사항 : 부 : 영로(榮老) 조부 : 열(說) 증조부 : 명필1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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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 선조(宣祖) 38년(1605) 을사(乙巳) 증광시(增廣試) 을과(乙科) 4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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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원진사시] 선조(宣祖) 24년(1591) 신묘(辛卯) 식년시(式年試) 진사 2등(二等) 13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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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장(任章)에 대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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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8년(선조 1)∼1619년(광해군 1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자룡(子龍). 명필(明弼)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윤 임열(任說)이고, 아버지는 종부시정 임영로(任榮老)이며, 어머니는 청릉부원군 심강(沈鋼)의 딸이다. 임연(任兗)의 동생이다.1591년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1605년(선조 38)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시강원설서가 되었다. 그 뒤 승정원주서·예문관대교를 거쳐 형조좌랑·정언을 지냈다. 선조의 재위 당시에는 형 임연과 함께 소북(小北) 중 남당(南黨)의 일원으로 인식되었다.광해군의 즉위 직후 정언으로 광해군의 형인 임해군(臨海君)과 광해군의 즉위에 비판적인 유영경(柳永慶)을 탄핵하였다. 그 뒤 부수찬·지평·수찬 등을 역임한 뒤, 1610년(광해군 2) 헌납이 되었고, 이어 이조좌랑·이조정랑 등 요직에 임명되었다.《선조실록》의 편찬 때 편수관(編修官)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당색이 다른 형제간의 알력 때문에 파직되었다가 다시 출사하였다. 1613년(광해군 5)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옹립하려 한 혐의로 발생한 박응서(朴應犀) 옥사 사건에 관련되어 파직되었다.이듬해에는 폐모살제(廢母殺弟:계모인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시키고,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죽임)를 주장한 정조(鄭造)·윤인(尹訒) 등을 귀양보내라는 정온(鄭蘊)의 상소에 관련되어 의금부의 추국을 받았다.그 뒤 1618년(광해군 10)에 나주목사로 이명되었으나, 이듬해 임소(任所)에서 졸하였다. 인조반정 직후인 1623년(인조 1) 임해군의 치죄를 주장하였다는 것으로 파직, 불서용의 처벌을 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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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大東野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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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世 임숙영(任叔英) 백파- 문간공파- 죽애공파-소암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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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 무숙(茂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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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 소암(疎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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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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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졸년 : 1576 (선조 9) - 1623 (인조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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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대 : 조선 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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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분야 : 문신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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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사항 : 부 : 기(寄) 조부 : 숭로(崇老) 증조부 : 열(說)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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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 광해군(光海君) 3년(1611) 신해(辛亥) 별시(別試) 병과(丙科) 7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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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숙영(任叔英)에 대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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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6년(선조 9)∼1623년(인조 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풍천(豊川). 초명은 상(湘). 자는 무숙(茂淑), 호는 소암(疎庵). 감역 기(奇)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시를 잘 지었고 기억력이 뛰어났다 한다.1601년(선조 34) 진사가 되고, 성균관에 10년 동안 수학, 논의가 과감하였으며 전후 유소(儒疏)가 그의 손에서 나왔다.1611년(광해군 3) 별시문과의 대책(對策)에서 주어진 이외의 제목으로 척족의 횡포와 이이첨(李爾瞻)이 왕의 환심을 살 목적으로 존호를 올리려는 것을 심하게 비난하였다. 이를 시관 심희수(沈喜壽)가 적극 취하여 병과로 급제시켰는데 광해군이 대책문을 보고 크게 노하여 이름을 삭제하도록 하였다. 몇 달간의 삼사의 간쟁과 이항복(李恒福) 등의 주장으로 무마, 다시 급제되었다.그뒤 승문원정자·박사를 거쳐 주서가 되었다.1613년에 영창대군(永昌大君)의 무옥이 일어나자 다리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정청(庭請)에 참가하지 않았다. 곧 파직되어 집에서 지내다가 외방으로 쫓겨나 광주(廣州)에서 은둔하였다.인조반정초에 복직되어 예문관검열과 홍문관정자·박사·부수찬 등을 거쳐 지평에 이르렀다.고문(古文)에 힘썼으며, 중국 육조(六朝)의 사륙문(四六文)에 뛰어났다. 그가 지은 〈통군정서 統軍亭序〉는 중국학자들로부터 크게 칭찬을 받았다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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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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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世 임선백(任善伯) 백파-문간공파-죽애공파-정랑공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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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 경여(慶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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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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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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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졸년 : 1596 (선조 29) - 1656 (효종 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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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대 : 조선 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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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분야 : 문신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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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사항 : 부 : 장(章) 조부 : 영로(榮老) 증조부 : 열(說)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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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 인조(仁祖) 10년(1632) 임신(壬申) 알성시(謁聖試) 병과(丙科) 3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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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원진사시] 인조(仁祖) 2년(1624) 갑자(甲子)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67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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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선백(任善伯)에 대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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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6년(선조 29)∼1656년(효종 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경여(慶餘). 아버지는 이조정랑 장(章)이며, 어머니는 황정신(黃廷愼)의 딸이다.1623년(인조 1) 진사가 되고, 1632년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호조좌랑으로 강화의 사수를 주장하였다. 승문원판교를 거쳐 1644년 장령이 되었다. 강빈(姜嬪)의 옥사가 일어났을 때에는 강빈을 두둔하다가 체차의 명을 받기도 하였다.그뒤 경상도암행어사를 지냈으며, 효종 때에는 영흥부사가 되었다.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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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仁祖實錄. 孝宗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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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世 임한백(任翰伯) 백파-문간공파-죽애공파-정랑공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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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 경익(景翼, 慶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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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 남곡(南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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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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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졸년 : 1605 (선조 38) - 1664 (현종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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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대 : 조선 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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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분야 : 문신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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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사항 : 부 : 장(章) 조부 : 영로(榮老) 증조부 : 열(說)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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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 인조(仁祖) 20년(1642) 임오(壬午) 식년시(式年試) 갑과(甲科) 1[장원(壯元)]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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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원진사시] 인조(仁祖) 8년(1630) 경오(庚午)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34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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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한백(任翰伯)에 대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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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5년(선조 38)∼1664년(현종 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경익(景翼 또는 慶翼), 호는 남곡(南谷). 영로(榮老)의 손자로, 정랑 장(章)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황정신(黃廷愼)의 딸이다.1642년(인조 20)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이듬해 지평·정언 등을 지내고, 1644년 사서로서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심양에 볼모로 갈 때 최명길(崔鳴吉)·김상헌(金尙憲) 등과 함께 배종하였다.이듬해 돌아와 지제교가 되고 지평에 재임하다가 수찬이 되었다.1659년(현종 즉위) 교리로서 춘추관기사관을 겸임하여 《효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이어 헌납·영남좌도감시관을 역임하였다.1663년 길주목사로 임명되어 부임하였으나 외직에 나갔음에 불만을 품고 병을 핑계삼아 행정에 소홀히 하였을 뿐만 아니라, 음주로 나날을 보내다가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가자(加資)가 환수되었다.시문에 뛰어난 재능을 지녀 팔대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손꼽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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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孝宗實錄. 顯宗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淸選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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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世 임의백(任義伯) 백파-문간공파-죽애공파-풍안군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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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 계방(季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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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 금시당(今是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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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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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졸년 : 1605 (선조 38) - 1667 (현종 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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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대 : 조선 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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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분야 : 문신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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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사항 : 부 : 연(兖) 조부 : 영로(榮老) 증조부 열(說)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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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 인조(仁祖) 27년(1649) 기축(己丑) 별시(別試) 병과(丙科) 2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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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원진사시] 인조(仁祖) 8년(1630) 경오(庚午)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12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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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의백(任義伯)에 대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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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5년(선조 38)∼1667년(현종 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계방(季方), 호는 금시당(今是堂).영로(榮老)의 손자로, 좌승지 연(兗)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정유성(鄭惟誠)의 딸이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과 교유하였다.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모두 강화에 피난하였으나 그는 패전을 예측하고 가족을 충청도에 피난시켜 피해를 입지 않았다. 음보(蔭補)로 제용감참봉(濟用監參奉)과 통천군수를 지내고, 1649년(인조 27)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직강이 되었다. 효종 초기에 정언·장령·헌납·집의 등의 언관을 거치면서 김자점(金自點)과 그의 당여인 수원부사 변사기(邊士紀) 등을 귀양보내자고 주장하였다.1652년(효종 3) 동래부사로 재임하면서 일본의 정치와 해선(海船)의 실태를 파악하여 이의 대비책으로 동래부를 금정산(金井山)으로 옮길 것과 견고한 축성이 필요하다고 건의하였다.1655년 승지·황해도관찰사를 거쳐, 1657년 경상도관찰사, 1659년(현종 즉위) 형조참의·수원부사·평안도관찰사·한성부좌윤·도승지를 지내고, 이듬해 사은 겸 진주부사(謝恩兼陳奏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형조참판이 되었다.1665년 충청도관찰사가 되고, 다음해 공조참판 겸 부총관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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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孝宗實錄. 顯宗實錄. 國朝人物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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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世 임 중(任 重) 백파-문간공파-죽애공파-정랑공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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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 정경(鼎卿), 정숙(鼎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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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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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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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졸년 : 1618 (광해군 10) - 1657 (효종 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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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대 : 조선 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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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분야 : 문신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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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사항 :부 : 선백(善伯) 조부 : 장(章) 증조부 : 영로(榮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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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 인조(仁祖) 17년(1639) 기묘(己卯) 별시(別試) 병과(丙科) 6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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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원진사시] 인조(仁祖) 11년(1633) 계유(癸酉)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34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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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중(任重)에 대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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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8년(광해군 10)∼1657년(효종 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정경(鼎卿) 또는 정숙(鼎叔). 영흥부사 선백(善伯)의 아들이다.16세에 진사가 되고, 1639년(인조 17)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갔으며, 주서·전적·경기도사·평안도사 등을 지냈다.1647년 정언이 되었고, 그뒤 지평·문학 등을 번갈아 지냈다. 효종 즉위 초에 새로이 정계에 진출한 산림(山林)이 영의정 김자점(金自點)을 탄핵할 때 지평으로서 따르지 않는다 하여 배척을 받아 임피현령으로 좌천되었다.1649년(효종 즉위)에 암행어사를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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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仁祖實錄. 孝宗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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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世 임 규(任 奎) 백파 - 문간공파-죽애공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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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 문중(文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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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 석문(石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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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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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졸년 : 1620 (광해군 12) - 1687 (숙종 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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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대 : 조선 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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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분야 : 문신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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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사항 : 부 : 준백(俊伯) 조부 : 연 (兖) 증조부 : 영로(榮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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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 현종(顯宗) 9년(1668) 무신(戊申) 정시(庭試) 을과(乙科) 1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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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 현종(顯宗) 11년(1670) 경술(庚戌) 별시(別試) 병과(丙科) 1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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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원진사시] 인조(仁祖) 26년(1648) 무자(戊子)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6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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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규(任奎){1}에 대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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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0년(광해군 12)∼1687년(숙종 1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문중(文仲), 호는 석문(石門). 준백(俊伯)의 아들이다.1648년(인조 26) 사마시에 합격한 뒤, 1670년(현종 11)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그뒤 정언·장령·집의·수찬·경주부윤 등을 거쳐, 1680년(숙종 6) 전라도관찰사에 이어 동부승지를 역임하고, 1686년 황해도관찰사를 끝으로 관직을 떠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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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顯宗實錄. 顯宗改修實錄. 肅宗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淸選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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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世 임 방(任 埅) 백파 - 문간공파- 죽애공파- 풍안군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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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 대중(大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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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수촌(水村)/우졸옹(愚拙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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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호 :문희(文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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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졸년 :1640 (인조 18) - 1724 (경종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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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대 : 조선 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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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분야 : 문신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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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사항 : 부 : 의백(義伯) 조부 : 연(兖) 증조부 : 영로(榮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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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 숙종(肅宗) 28년(1702) 임오(壬午) 알성시(謁聖試) 병과(丙科) 1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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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원진사시] 현종(顯宗) 4년(1663) 계묘(癸卯) 식년시(式年試) 진사 1등(一等) 3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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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방(任埅)에 대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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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0년(인조 18)∼1724년(경종 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대중(大仲), 호는 수촌(水村)·우졸옹(愚拙翁).아버지는 평안도관찰사 의백(義伯)이며, 어머니는 상산김씨(商山金氏)로 상(商)의 딸이다.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의 문인이다.1663년(현종 4) 사마시에 1등으로 합격하였고, 1671년 재랑(齋郞)·장악원주부·호조정랑 등을 지냈다. 기사환국으로 송시열이 유배될 적에 사직하였다가 다시 단양군수·사옹원첨정 등을 역임하였다.1702년(숙종 28)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장령·승지·공조판서 등을 역임하였으며, 연잉군(延礽君)의 세자 책봉에 앞장섰다.그뒤 신임사화로 함종에 유배되었다가 금천(金川)으로 옮겨져 그곳에서 죽었다. 영조 즉위 후 신원(伸寃)되었다.만년에는 《주역》·《논어》를 직접 손으로 베껴 써가면서 그 뜻을 깊이 연구하였고, 시에 있어서는 특히 당시(唐詩)를 좋아하여 《가행육선 歌行六選》·《당절회최 唐絶薈蕞》·《당률집선 唐律輯選》·《당아 唐雅》 등의 시가집을 엮었으며, 이밖에도 《논어취분 論語聚分》·《사가할영 史家割榮》·《선문 選文》·《철영시 掇英詩》·《수촌집》 등의 저서를 남겼다.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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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肅宗實錄. 國朝榜目. 水村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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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世 임상원(任相元) 백파- 죽애공파- 정랑공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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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 공보(公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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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 염헌(恬軒)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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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호 : 효문(孝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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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졸년 : 1638 (인조 16) - 1697 (숙종 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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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대 : 조선 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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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분야 : 문신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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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사항 : 부 : 중(重) 조부 : 선백(善伯) 증조부 : 장(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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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 현종(顯宗) 6년(1665) 을사(乙巳) 별시(別試) 갑과(甲科) 1[장원(壯元)]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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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 숙종(肅宗) 5년(1679) 기미(己未) 중시(重試) 병과(丙科) 2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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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원진사시] 현종(顯宗) 1년(1660) 경자(庚子)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2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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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원(任相元)에 대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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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8년(인조 16)∼1697년(숙종 2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공보(公輔), 호는 염헌(恬軒).아버지는 이조참판에 증직된 중(重)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로 목사 갱생(更生)의 딸이다.1660년(현종 1)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665년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평안도도사를 지냈으며, 1671년 정언을 거쳐 용강현령이 되었다가 1673년 교리로 승진되었다.1676년(숙종 2) 청풍부사로 있을 때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한 뒤 1680년 동부승지가 되었다.이듬해에 공조참판을 지냈으며, 1684년 대사간에 이어 이듬해 대사성이 되었다.1686년 대사헌을 지내고, 1687년 도승지를 역임하였으며, 사은부사(謝恩副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공조판서와 우참찬·한성부판윤 등을 지냈다.문명이 있었으며 송시열(宋時烈)을 유배시킬 때 전야(田野)에 방면할 것을 주장하였다.저서로 《염헌집》 10책과 《교거쇄편 郊居瑣篇》이 있다. 시호는 효문(孝文)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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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肅宗實錄. 燃藜室記述. 恬軒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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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世 임진원(任鎭元) 백파- 문간공파- 죽애공파- 풍안군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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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 화보(和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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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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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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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졸년 : 1644 (인조 22) - 1709 (숙종 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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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대 : 조선 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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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분야 : 문신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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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사항 : 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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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원(任鎭元)에 대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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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4년(인조 22)∼1709년(숙종 3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화보(和甫). 전라도관찰사 규(奎)의 아들이다.1681년(숙종 7)에 처음 동몽교관이 된 이후 사섬시주부(司贍寺主簿)와 내자시주부(內資寺主簿)를 거쳐 1694년에 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 그리고 개령현감이 되었다.그뒤 여산부사를 거쳐 영월부사가 되었을 때 이곳에서 날뛰는 도둑떼를 소탕하여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워주었다.그뒤 간성군수로 나갔다가 임소(任所)에서 죽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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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陶谷集. 萬姓大同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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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世 임수간(任守幹) 백파- 문간공파-죽애공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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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 용여(用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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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 돈와(遯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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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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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졸년 : 1665 (현종 6) - 1721 (경종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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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대 : 조선 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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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분야 : 문신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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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사항 : 부 : 부 상원(相元) 조부 : 중(重) 증조부 : 선백(善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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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 숙종(肅宗) 20년(1694) 갑술(甲戌) 알성시(謁聖試) 병과(丙科) 1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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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 숙종(肅宗) 33년(1707) 정해(丁亥) 중시(重試) 병과(丙科) 2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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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원진사시] 숙종(肅宗) 16년(1690) 경오(庚午)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24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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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수간(任守幹)에 대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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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5년(현종 6)∼1721년(경종 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용여(用汝), 호는 돈와(遯窩). 우참찬 상원(相元)의 아들이다.1690년(숙종 16)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694년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 곧 설서가 되었고, 정언을 거쳐 1699년 이만성(李晩成) 등 8인과 함께 홍문록(弘文錄)에 올랐다.그뒤 수찬·교리·정언·부수찬 등을 번갈아 역임하다가 1703년 당쟁의 폐단과 시정(時政)의 득실을 논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일시 향리에 은거하였다. 곧 재기용되어 지평이 되었고, 1707년 사직으로 문신중시(文臣重試)에 병과로 급제하였다.그뒤 이조좌랑 겸 문학·교리·수찬 등을 역임하다가 1709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다음해에 통신부사가 되어 일본에 파견되었으나 대마도주의 간계에 속아 투옥, 파직되었다.1720년에 재기용되어 승지에 올랐다.그는 경사(經史)에 밝았으며 음률(音律)·상수(象數)·병법(兵法)·지리 등에도 해박하였다고 한다.저서로 《돈와유집》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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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肅宗實錄. 景宗實錄. 國朝榜目. 淸選考. 典故大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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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世 임수관(任守寬) 백파- 문간공파-죽애공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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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 중률(仲栗)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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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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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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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졸년 : 1696 (숙종 22) - 1762 (영조 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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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대 : 조선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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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분야 : 문신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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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사항 : 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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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수관(任守寬)에 대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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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6년(숙종 22)∼1762년(영조 38). 조선 후기 문신. 자는 중률(仲栗)이다. 본관은 풍천(豊川)이고, 출신지는 서울이다.조부는 임량(任量)이고, 부친은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 임순원(任舜元)이며, 모친은 판관 윤주(尹湊)의 딸 파평윤씨(坡平尹氏)이다. 생부 성균관진사(成均館進士) 임달원(任達元)과 생모 지평(持平) 홍억(洪億)의 딸 남양홍씨(南陽洪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공조좌랑(工曹佐郞) 남수만(南受萬)의 딸 의령남씨(宜寧南氏)이다.1719년(숙종 45) 증광시 진사과 2등 7위로 합격하였다.40살에 처음으로 출사하여 태릉참봉(泰陵參奉)·내자시직장(內資寺直長)·전생서봉사(典牲署奉事)·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형조좌랑(刑曹佐郞) 등을 지냈다.외직으로는 정산현감(定山縣監)에 임명되었으나 병에 걸려 사직하였다. 그리고 3년 뒤 다시 동부도사(東部都事)로 복직되어 상의원주부(尙衣院主簿)를 거쳐 형조정랑(刑曹正郞)과 공릉령(恭陵令)에 올랐다.그 뒤 다시 외직으로 창녕(昌寧)·대흥(大興)·양근(楊根)으로 나가 이서(吏胥)를 단속하고 억울한 옥사(獄事)를 풀어 주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지방관으로 재직 중 병을 핑계로 일을 하지 않았다는 무고(誣告)를 받아 파직되었다. 이후 다시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향년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슬하에 5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임선(任珗)·임진(任瑱)·임탁(任琸)·임빈(任璸)·임현(任玹)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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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在澗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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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世 임수적(任守迪) 백파- 문간공파-죽애공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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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 길보(吉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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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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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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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졸년 : 1671 (현종 12) - 1744 (영조 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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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대 : 조선 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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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분야 : 문신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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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사항 : 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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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 영조(英祖) 1년(1725) 을사(乙巳)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11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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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원진사시] 숙종(肅宗) 22년(1696) 병자(丙子)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9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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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수적(任守迪)에 대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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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1년(현종 12)∼1744년(영조 20).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길보(吉甫).아버지는 참판 윤원(胤元)이며, 어머니는 권완(權俒)의 딸이다.1696년(숙종 22)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어서 문음(門蔭)으로 건원릉참봉(健元陵參奉)이 되었다.1725년(영조 1) 삼가현감으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곧 문한관(文翰官)이 되었고, 1727년 조현명(趙顯命) 등 20인과 함께 홍문록(弘文錄)에 올랐다.그뒤 부수찬·수찬·헌납·부교리·사간·응교 등의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하고, 1734년 대사간이 되어 훈련도감 및 전라도 지방의 비정(非政)을 바로잡을 것을 상소하기도 하였다. 같은해 승지에 임명되어 그뒤 8년간이나 계속 이 직에 머물렀는데, 그 사이에 대사간·형조참판을 잠시 역임하기도 하였다.시문에 뛰어났으며, 고금의 필법의 장점을 취하여 독특한 서체를 구사하여 당대에 명필로 이름났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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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英祖實錄. 國朝榜目. 在澗集. 淸選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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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世 임적(任適) 백파- 문간공파-죽애공파-풍안군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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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 도언(道彦)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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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 노은(老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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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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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졸년 : 1685 (숙종 11) - 1728 (영조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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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대 : 조선 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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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분야 : 문신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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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사항 : 부 : 사원(士元) 조부 : 승(陞) 증조부 : 의백(義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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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원진사시] 숙종(肅宗) 36년(1710) 경인(庚寅) 증광시(增廣試) 생원 3등(三等) 31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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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적(任適)에 대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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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5년(숙종 11)∼1728년(영조 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도언(道彦), 호는 노은(老隱). 참판 의백(義伯)의 증손으로, 권상하(權尙夏)의 문인이다.1710년(숙종 36) 사마시에 뽑혀 진사가 되었고, 장녕전참봉(長寧殿參奉)·장원서별제(掌苑署別提)·양성현감 등을 거쳐, 1725년(영조 1) 함흥판관이 되어 2년간 재직하다가 실정을 탄핵받아 관직을 떠났다.그뒤 벼슬에 뜻을 버리고 오직 유가경전(儒家經傳)은 물론, 음양상률(陰陽象律)·의방복서(醫方卜筮)·전곡갑병(錢穀甲兵)·산천도리(山川道里) 등 다방면으로 서적을 섭렵, 이치를 궁구하여 이에 박통하였으며, 함흥판관으로 있을 때는 특히 치리(治理)와 교도(敎導)에 힘써 송사가 없었다 한다. 조행(操行)이 고결하고 재리(財利)를 멀리하여, 그가 죽었을 때는 염장(殮葬)의 비용이 없어 남에게 빌려 쓸 정도였다.시와 문장이 다 볼만하였으며, 저서로 《노은집》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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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肅宗實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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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世 임 정(任 珽) 백파-문간공파-죽애공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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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 성방(聖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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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 호재(扈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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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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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졸년 : 1694 (숙종 20) - 1750 (영조 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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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대 : 조선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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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분야 : 문신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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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사항 : 부 : 守適) 조부 : 윤원(胤元) 증조부 : 양(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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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 경종(景宗) 3년(1723) 계묘(癸卯)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21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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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 영조(英祖) 13년(1737) 정사(丁巳) 중시(重試) 병과(丙科) 2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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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원진사시] 숙종(肅宗) 45년(1719) 기해(己亥) 증광시(增廣試) 진사 1등(一等) 2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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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任珽)에 대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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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4년(숙종 20)∼1750년(영조 2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성방(聖方), 호는 호재(扈齋). 형조참판 수적(守迪)의 아들이다.숙종 때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722년(경종 2) 황감시(黃柑試)에서 일등하여 전시에 직부(直赴)되고, 이듬해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문한관을 역임하다가 1728년(영조 4) 지평에 올랐다.다음해 도당록(都堂錄)에 올랐고, 그뒤 수찬·부수찬·정언·교리·부교리 등을 번갈아 역임하였다.1731년 수찬으로 탕평책에 따른 시정의 폐단을 건의하여 왕의 칭찬을 받았다.1735년 사간이 되었고, 다음해에 응교로서 중시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였다. 곧 승지가 되고, 1740년 대사간에 올랐다.그뒤 대사간·승지·이조참의를 거듭 역임하다가 1748년 곡산도호부사가 되어 외직에 나갔고 2년 후에 대사성이 되었다.고금의 시가에 능했으며 글씨도 뛰어났다고 한다.저서는 《호재집》, 글씨는 해주축성비(海州築城碑), 개성의 계성사비(啓聖祠碑) 등이 남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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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景宗實錄. 英祖實錄. 國朝榜目. 左澗集. 朝鮮金石總覽. 國朝人物考. 朝鮮名臣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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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世 임성주(任聖周) 백파- 문간공파- 죽애공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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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 중사(仲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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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 녹문(鹿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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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호 : 문경(文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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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졸년 : 1711 (숙종 37) - 1788 (정조 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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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대 : 조선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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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분야 : 학자 >유학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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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사항 : 부 : 적(適) 조부 : 사원(士元) 증조부 : 승(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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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원진사시] 영조(英祖) 9년(1733) 계축(癸丑) 식년시(式年試) 생원 1등(一等) 4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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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주(任聖周)에 대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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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1년(숙종 37)∼1788년(정조 12).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중사(仲思), 호는 녹문(鹿門). 청풍(淸風) 출신.이재(李縡)의 문인이다. 청주에 거주하다가 1733년(영조 9) 사마시에 합격, 1750년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가 되고 시직(侍直)에 승진하였으나 곧 사직하고 1758년 공주의 녹문(鹿門)에 은거하였다.1776년 정조가 즉위한 뒤 동궁을 보도(輔導)하고 지방관을 지내다가 다시 녹문에 은거하여 학문연구로 여생을 보냈다.초년에는 스승의 학설을 신봉하여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주장하였으나 중년에 이르러 기존의 학설을 비판하고 호락(湖洛)의 양론을 기일원론적(氣一元論的)입장에서 종합하여 자신의 학설을 수립하였다.저서로 《녹문집》 26권이 있으며, 그 가운데 〈녹려잡지 鹿廬雜識〉·〈산록 散錄〉 등이 중요하다. 당시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의 동이(同異)에 대한 입장의 차이로 호론(湖論)과 낙론(洛論)이 분열되었다.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은 정주(程朱)의 이일분수설(理一分殊說)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 이일분수를 해결하기 위한 시도로서 기정진(奇正鎭)이 분수지리(分殊之理)의 개별성의 논리적 근거를 이일지리(理一之理)에 정초시키려고 한 반면, 그는 보편성의 근거를 기 자체에서 찾고 있다.그는 우주의 본원적 일기(一氣)를 제시하여 그것을 원기(元氣)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장재(張載)가 말한 태허태화(太虛太和) 및 맹자의 호연지기(浩然之氣)에 해당된다. 보편적 일자(一者)가 현상계의 개체로 나타날 때 띠는 특수성을 그는 생의(生意)를 본질로 하는 기의 자기원인적 전개로 보고 자연이연(自然而然)한 내재적 법칙을 도(道) 또는 이(理)라고 하여, 기와 논리적으로 일단 구별된 소이연자(所以然者)를 이로 보려는 주희(朱熹)의 이기론(理氣論)을 비판한다.이와같은 일원적 이기론의 구조로써 이일분수설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기일분수설을 제시한다. 그는 태극으로부터 음양오행, 만상(萬象)으로서의 전개를 원기가 분수지기(分殊之氣)로 개체화되는 과정이라고 보고, 기에 특수성만을 인정하는 이일분수설을 비판하여 이의 보편성은 곧 기의 보편성에 근거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그는 이일분수설은 주리적(主理的)으로 말한 것이므로 분수도 이에 속하여야 하며, 주기적(主氣的)으로 말한다면 기일분수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성론(人性論)에 있어서 성즉기(性卽氣)를 주장하고 있는데,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도 구분하지 않고 인성의 선(善)은 곧 기질의 선이요, 기질 이외에 선한 성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기질의 본체는 담일(湛一)한 것으로 천지의 본원적 기와 상통하는 것인데, 기기(氣機)가 움직일 때 사재(渣滓)가 용사(用事)함으로써 심성이 흐려져 본래의 선성(善性)이 엄폐된다고 하였다. 인성주의 철학은 일원론적 구조 위에서 정초되고 있으며, 이기를 기일원론적 관념으로 통일함으로써 조선조 성리학의 결정(結晶)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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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鹿門集 韓國儒學史(裵宗鎬, 延世大學校出版部, 19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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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世 임정주(任靖周) 백파-문간공파- 죽애공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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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 치공(穉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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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 운호(雲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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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호 : 문경(文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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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졸년 : 1726 (영조 2) - 1796 (정조 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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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대 : 조선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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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분야 : 문신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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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사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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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원진사시] 영조(英祖) 38년(1762) 임오(壬午)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21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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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주(任靖周)에 대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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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7년(영조 2)∼1796년(정조 20).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치공(穉恭), 호는 운호(雲湖).아버지는 함흥판관 적(適)이며, 어머니는 호조정랑 윤부(尹扶)의 딸이다. 성주(聖周)의 아우이다.1762년(영조 38) 사마시에 합격, 1772년 동몽교관에 제수, 익위사시직(翊衛司侍直)을 거쳐, 서연관으로 세손(世孫: 정조)을 보필하며 학문을 강론하였다.1776년 정조가 즉위한 뒤 홍국영(洪國榮)의 세도정치에 밀려나 전생서주부(典牲署主簿)·송화현감·사옹원주부·온릉령(溫陵令)·청산현감 등의 미관말직만 역임하였다. 청산현감 때 선정이 보고되어 왕의 특명으로 가자(加資)되고 중추(中樞)의 직함을 받았다.평생동안 영리에 마음쓰지 않고 오직 위기(爲己)의 학문에 전심하여 거경궁리(居敬窮理)로써 상달(上達)하는 문로(門路)를 삼고, 체험하여 존심양성(存心養性)에 오르도록 힘썼다.그의 학문은 형 성주의 학통을 이어받아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배격하고 이기일원의 주기설(主氣說)을 확립하였다.저서로는 《운호집》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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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正祖實錄. 梅山集(洪直弼). 韓國儒學史(裵宗鎬, 延世大學校出版部, 19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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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世 윤지당임씨 (允摯堂任氏) 伯派- 문간공파- 죽애공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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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 윤지당(允摯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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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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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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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졸년 : 1721 (경종 1) - 1793 (정조 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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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대 : 조선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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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분야 : 학자 >성리학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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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사항 : 부: 적(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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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당임씨(允摯堂任氏)에 대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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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1년(경종 1)∼1793년(정조 17). 조선 후기의 여류성리학자. 본관은 풍천(豊川). 호는 윤지당(允摯堂). 함흥판관 적(適)의 딸이며, 성주(聖周)의 여동생이다. 남편은 신광유(申光裕)이다.총명하고 부지런하여 성주로부터 《효경》·《열녀전》·《소학》·사서 등을 배웠고, 여러 형제들과 함께 경전·사서(史書) 등을 강론하였는데, 식견이 탁월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고 인정이 많았으며, 교양과 부덕을 쌓아 한치도 범절에 어긋나는 일이 없었다. 일생 동안 존심양성(存心養性)의 공을 쌓아 나태하거나 방심한 일이 없었다. 일찍 남편을 여의고 가사를 맡아, 낮에는 부녀자의 일에 진력하고 밤이 깊어서는 소리를 낮추어 책을 읽어 공부하는 티를 내지 않았다. 가족들도 그녀의 학문진취를 알지 못하였으나 몰래 쌓은 경전에 대한 조예와 성리학의 이해는 당시의 대학자들에 견주어 손색이 없었다.죽은 뒤 유고 40여편이 수습되었는데, 그 대부분이 경전연구와 성리설에 관한 논설 및 선유(先儒)에 대한 인물논평들이다.그 중에서 〈이기심성설 理氣心性說〉·〈인심도심사단칠정설 人心道心四端七情說〉·〈예악설 禮樂說〉·〈극기복례위인설 克己復禮爲仁說〉·〈오도일관설 吾道一貫說〉 등의 논문은 조선 후기 관념철학에 대한 높은 이해를 보여주는 것이며, 《대학》 7조와 《중용》 27조에 대한 경의(經義) 2편과 〈논안자소락 論顔子所樂〉·〈안자호학찬 顔子好學贊〉·〈심잠 心箴)·〈인잠 忍箴〉·〈시습잠 時習箴〉등도 경전에 대한 조예를 보여준다.또, 예양(豫讓)·안자(顔子)·자로(子路)·가의(賈誼)·이릉(李陵)·사마 광(司馬光)·왕안석(王安石) 등 역사적 인물에 대한 예리한 논평을 남겼다. 유고는 1796년(정조 20) 동생 정주(靖周)와 시동생 신광우(申光祐)에 의하여 《윤지당유고》 1책으로 편집, 부록과 함께 간행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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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允摯堂遺稿. 鹿門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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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世 임희성(任希聖) 백파-문간공파-죽애공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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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 자시(子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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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 재간(在澗)/간옹(澗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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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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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졸년 : 1712 (숙종 38) - 1783 (정조 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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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대 : 조선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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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분야 : 학자 >유학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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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사항 : 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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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원진사시] 영조(英祖) 17년(1741) 신유(辛酉)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4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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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희성(任希聖)에 대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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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2년(숙종 38)∼1783년(정조 7).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자시(子時), 호는 재간(在澗)·간옹(澗翁). 아버지는 응교 광(珖)이며, 어머니는 남양홍씨(南陽洪氏)로 부호군 인(隣)의 딸이다.1741년(영조 17) 생원시에 합격하고, 음보(蔭補)로 효릉참봉(孝陵參奉)을 거쳐 직장에 이르렀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사직하고 귀향하였다.학문에 있어서는 문사(文詞)보다는 실천에 힘썼다. 잠언(箴言)과 지일십계(至日十誡) 등을 지어 수신의 지표로 삼는 한편 자손교육의 지침으로 삼았고, 경전을 연구하여 의심나는 곳에 주해를 하고, 성리학은 이이(李珥)의 설을 지지하였다.편저로는 《경서차록 經書箚錄》·《국조상신열전 國朝相臣列傳》과 《재간집》 3책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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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在澗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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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世 임성(任珹) 백파- 문간공파- 죽애공파- 정랑공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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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 성진(聖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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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 수암(羞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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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호 : 충희(忠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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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졸년 : 1713 (숙종 39)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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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대 : 조선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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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분야 : 문신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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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사항 : 부 : 수헌(守憲) 조부 : 달원(達元) 증조부 : 당(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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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 영조(英祖) 31년(1755) 을해(乙亥) 정시(庭試) 병과(丙科) 4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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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원진사시] 영조(英祖) 11년(1735) 을묘(乙卯) 증광시(增廣試) 진사 3등(三等) 15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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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任珹)에 대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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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3년(숙종 39)∼미상.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성진(聖眞), 호는 수암(羞庵). 수헌(守憲)의 아들이다.1755년(영조 31) 진사로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세자시강원설서가 되었고, 세자가 대리청정하게 되자 그 측근에서 보필하였으며, 1758년 정언이 된 이후 강직한 성격 탓으로 오랫동안 사간원의 관원을 역임하였다.1762년 사서로 있을 때 나경언(羅景彦)이 세자의 비행을 상주하자 영조가 크게 노하여 세자를 죽이고자 하므로 극력 그 잘못을 빌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자가 죽은 뒤에는 보필을 소홀히 하였다는 이유로 파직당하였다. 뒤에 다시 지평에 기용되고, 교리·승지를 지내다가 1775년 대사간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희(忠僖)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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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英祖實錄. 正祖實錄. 國朝榜目. 恩坡遺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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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희수(任希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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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 비남(芾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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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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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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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졸년 : 1733 (영조 9) - 1750 (영조 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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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대 : 조선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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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분야 : 미술 >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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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사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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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희수(任希壽)에 대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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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3년(영조 9)∼1750년(영조 26). 조선 영조 때의 화가.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비남(芾男). 승지를 지낸 임위(任瑋)의 아들이다.어려서부터 천재 소년화가로 이름이 있었으나 17세에 요절하였다.특히, 초상화에 재능이 뛰어나 《초상화첩 肖像畵帖》 3권이 전해온다 하나 현재 《초상초본첩 肖像草本帖》(국립중앙박물관 소장)한권이 알려져 있다.현존하는 그의 초상화첩은 1749년(영조 25)과 1750년에 걸쳐 유지(油紙)에 그린 17점의 초본형식(草本形式)의 초상과 1점의 유탄(柳炭)으로 그린 사본, 강세황(姜世晃)의 자화상 등 19점으로 꾸며져 있다.수묵(水墨)과 연한 담채(淡彩)로 간략하게 사생(寫生)한 이 초상화들은 미숙하고 작품으로서의 격식이나 세련미는 없어도 정확한 관찰력과 묘사 능력을 지니고 있어 그의 천재성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그리고 초상 초본마다 그의 아버지가 인물에 대한 기록과 그리게 된 경위,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아들에 대한 애절함을 밝혀 놓았다.강세황은 임희수의 집안과 친분이 두터웠으며, 임희수의 삼촌으로 시(詩)·서(書)·문장(文章)에 뛰어났던 임정(任珽)과는 처남 매부 사이였다.이 화첩의 강세황 자화상은 임희수가 가필을 하였더니 그림이 더욱 살아나 강세황도 탄복을 아끼지 않았다고 전해오는 《진휘속고 震彙續考》의 기록과 일치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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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槿域書畵徵韓國의 肖像畵―朝鮮時代肖像畵特別展―(國立中央博物館, 1979)豹菴遺稿解題(崔淳姬,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79)朝鮮時代의 肖像畵(李泰浩, 空間 152,1980,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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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世 임천상(任天常) 백파-문간공파-죽애공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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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 현도(玄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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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 궁오(窮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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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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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졸년 : 1754 (영조 30)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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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대 : 조선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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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분야 : 문신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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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사항 : 부 : 희익(希翼) 조부 : 곤(琨) 증조부 : 수간(守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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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 정조(正祖) 19년(1795) 을묘(乙卯)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2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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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 정조(正祖) 20년(1796) 병진(丙辰) 중시(重試) 을과(乙科) 2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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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원진사시] 정조(正祖) 1년(1777) 정유(丁酉)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48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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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천상(任天常)에 대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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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4년(영조 30)∼미상.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현도(玄道), 호는 궁오(窮悟). 화성 출신. 희익(希翼)의 아들이다.1777년(정조 1)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795년 식년문과에, 1796년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하였다.1806년(순조 6) 홍문관교리에 이르렀다. 문학에도 조예가 깊었다.저서로 《궁오집》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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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世 임로(任 魯) 백파 - 문간공파 - 찬선공파- 죽애공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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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 득여(得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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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 영서거사(潁西居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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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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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졸년 : 1755 (영조 31) - 1828 (순조 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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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대 : 조선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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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분야 : 문신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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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사항 : 부 : 종주(宗周) 조부 : 손(遜) 증조부 : 정원(鼎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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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관] 음관(蔭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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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로(任魯)에 대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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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5년(영조 31)∼1828년(순조 28).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득여(得汝), 호는 영서거사(潁西居士). 대사간 종주(宗周)의 아들이다.1777년(정조 1) 아버지가 세도가인 홍국영(洪國榮)에게 몰려 단천에 유배되어 죽은 뒤로는 벼슬을 단념하고 오로지 학문에만 전력을 쏟았다.그뒤 여러 차례 나라의 부름을 받았으나 세상의 부귀영화에는 전혀 뜻을 두지 않고 진리탐구에 더욱 열을 올리게 되니 자연히 가정형편은 더욱 빈곤하여졌다.그러나 이에 개의치 않고 매일 유학의 경전을 비롯한 여러 서책들을 두루 읽으며 사색에 잠기는 한편 묵묵히 이를 실천하면서 수양에 힘썼으며, 아울러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를 싫어하고 오직 자연을 벗삼아 한가로이 살려고 노력하였다.그러나 계속되는 나라의 부름을 외면할 수 없어 1809년(순조 9) 제용감부봉사(濟用監副奉事)가 되었다가 상서원직장(尙瑞院直長)을 거쳐, 한성부와 사복시의 주부가 되었다.그뒤 계속하여 의금부도사와 경모궁령(景慕宮令)을 거쳐, 외직으로 나가 신령현감·충원현감을 역임하였다. 현감으로 있으면서 백성들을 괴롭히는 간악한 아전들을 다스리는 한편 횡포가 심한 토반(土班)들을 억압하여 지방행정질서와 풍속을 바로잡았으나, 이로 말미암아 피해를 입게 된 세력들이 일치단결하여 그에게 반감을 품고 충청좌도 암행어사 서좌보(徐左輔)에게 고자질함으로써 지방을 잘못 다스린다는 억울한 죄명을 뒤집어쓰고 1822년 충청도 진천으로 귀양가고 말았다.다행히 누명이 벗겨져 그 이듬해 석방되었지만 그뒤로는 일체의 세상사를 등지고 두문불출하면서 오로지 독서로써 여생을 보냈는데 약간의 저서도 남겨놓았다.학문적 계보를 보면 주기론(主氣論)을 주장한 임성주(任聖周)를 스승으로 모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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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純祖實錄 老洲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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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世 임규직(任圭直) 백파 - 문간공- 죽애공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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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 용숙(容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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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 금천(錦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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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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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졸년 : 1811 (순조 11) - 1853 (철종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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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대 : 조선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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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분야 : 학자 >유학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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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사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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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규직(任圭直)에 대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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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1년(순조 11)∼1853년(철종 4).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용숙(容叔), 호는 금천(錦川). 서울 출신.교리 천상(天常)의 손자로, 증이조참판 백응(百應)의 아들이다.김주교(金周敎)·이항로(李恒老)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이준(李埈)·이인구(李寅龜)·이용헌(李用獻) 등과 교우를 맺고 도의를 강론하였다.북인세가(北人世家)로서 노론을 지지하였으며, 주자(朱子)와 송시열(宋時烈)을 적극 숭배하여 회우당(晦尤堂)을 짓기도 하였다. 당시 노론의 선배인 서충보(徐忠輔)·권희(權曦)·이정리(李正履) 등과 친교가 두터웠는데, 소론인 김계영(金啓泳)과의 회니시비론(懷尼是非論)이 발단이 되어 향당의 소론에게 거슬림을 받아 1836년(헌종 2) 옥사가 일어나 옥고를 치르고 이듬해 김제로 정배되었다. 당시 김제군수 조병헌(趙秉憲)과 병덕(秉悳)형제의 대우를 받아 후진교육과 저술에 전념하였다.7년 만에 적소에서 풀려나자 조병헌의 주선으로 은진에서 살았다.그뒤 남포(藍浦)로 옮겼다가 다시 상주로 이사하여 43세에 죽었다.경전과 성리설에 조예가 깊었으며, 역학(易學)·율려(律呂)·산수(算數)·예학에도 밝았다.또한, 문장이 뛰어나고 시에도 능하였다. 그의 학설은 이항로의 심주리설(心主理說)을 계승, 발전시켰다.저술로는 〈대학장구주해 大學章句註解〉·〈중용보해 中庸補解〉·〈율려산법 律呂算法〉·〈구두해법 句讀解法〉·〈초종홀기 初終笏記〉 등을 남겼으며, 저서로는 《금천집》 18책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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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錦川集. 重菴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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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世 임백경(任百經) 백파 - 문간공파- 죽애공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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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 문경(文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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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 하의(荷漪)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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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호 : 문정(文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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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졸년 : 1800 (정조 24) - 1864 (고종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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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대 : 조선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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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분야 : 문신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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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사항 : 부 : 존상(存常) 조부 : 희직(希稷) 증조부 : 정(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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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 순조(純祖) 27년(1827) 정해(丁亥)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8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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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원진사시] 순조(純祖) 22년(1822) 임오(壬午)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37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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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관] 음관(蔭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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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관] 음관(蔭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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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백경(任百經)에 대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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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정조 24)∼1864년(고종 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문경(文卿), 호는 하의(荷漪). 참판 존상(存常)의 아들이다.1827년(순조 27) 진사로서 증광문과에 병과 제8인으로 급제하고, 1832년 홍문관에 뽑혀 들어갔다.1839년(헌종 5) 충청좌도암행어사로 나가 민정을 시찰하고 서계(書啓)를 올려 충주목사 신재익(申在翼)이하 12인의 수령을 처벌하게 하였다.1847년 윤정현(尹定鉉)·홍우순(洪祐順) 등과 함께 재신(宰臣)의 반열에 올랐고, 1856년(철종 7) 8월 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가, 11월 동지사(冬至使)의 부사로 북경에 다녀왔다.1858년 1월 형조판서를 거쳐 그해 12월 수원유수가 되어 이듬해 11월까지 지냈다.그뒤에는 호군·대호군·지중추부사·판중추부사 등의 서반 명예직과 비변사당상을 역임하였다.1864년(고종 1) 뜻하지 않게 우의정에 임명되었으나 그해에 죽었다.그는 일생을 학문연구에 정진하였고 관직생활에 청렴하였다. 문장에 명성이 있어 《자각만고 紫閣漫稿》 1책을 남겼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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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純祖實錄. 憲宗實錄. 哲宗實錄. 高宗實錄. 備邊司謄錄. 日省錄. 紀年便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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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世 임응준(任應準) 백파 - 문간공파- 죽애공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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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 재전(在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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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 담재(澹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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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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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졸년 : 1816 (순조 16) - 1883 (고종 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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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대 : 조선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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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분야 : 문신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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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사항 : 부 : 백수(百秀) 조부 : 연상(淵常) 증조부 : 희존(希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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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 헌종(憲宗) 14년(1848) 무신(戊申)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17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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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관] 음관(蔭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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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관] 함경남도(咸鏡南道) 영흥(永興) 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 1877[정축(丁丑)] 12월(十二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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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응준(任應準)에 대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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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6년(순조 16)∼1883년(고종 20).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재전(在田), 호는 담재(澹齋). 봉조하(奉朝賀) 백수(百秀)의 아들이다.1848년(헌종 14)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경연관(經筵官)이 되었으며, 1852년(철종 3) 북병영(北兵營)의 북평사를 거쳐 1859년 홍문관응교를 역임하였다. 고종이 즉위하고 흥선대원군이 집정하자 승정원승지로 발탁되었고, 1865년(고종 2)∼1870년까지 한때 예조참의·이조참의를 지냈으나 그밖에는 계속하여 좌부승지와 좌우승지를 지냈다.그뒤 1870년에는 사간원의 대사간, 1871∼1874년까지 병조참판·이조참판을 지냈고, 1874년 부총관, 1875년에는 행도승지(行都承旨)가 되었다.1877년 재차 병조참판이 되었고, 1879년에는 한성부우윤을 지냈다.1880년 대호군으로 정부당상(政府堂上), 한성부판윤이 되었고, 그해 7월 공조판서로 사은 겸 동지사(謝恩兼冬至使)로 임명되었고, 1881년 사헌부대사헌·도총관 등을 역임하였다.1882년 6월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대원군에 의해 발탁되어 예문관제학에 임명되었다.그러나 그해 7월 대원군이 청군에 의하여 피랍됨으로써 대원군정권이 붕괴하자, 9월 유학 김병설(金炳卨)이 임오군란 직후 청에 보낸 표자문(表咨文)을 찬하였다는 점을 들어 탄핵하였다. 뒤이어 9월부터 11월에 이르는 동안 양사의 연차(聯箚)가 계속된 결과 마침내 전라도 진도부 금갑도로 유배되었다.다음해인 1883년 2월 향리로 방축되었으나, 4월 흥선대원군의 당여로 군변에 가담하였다고 탄핵되어 조병창(趙秉昌)·조우희(趙宇熙)·이회정(李會正) 등과 함께 원악도(遠惡島)로 위리안치하도록 결정되었고, 뒤이어 사사(賜死)되었다.그뒤 1894년 12월 복관되었다.문집으로 《담재집》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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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哲宗實錄. 承政院日記(高宗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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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선준(任善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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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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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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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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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졸년 : 1860 (철종 11)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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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대 : 조선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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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분야 : 문신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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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사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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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 고종(高宗) 22년(1885) 을유(乙酉) 정시(庭試) 병과(丙科) 7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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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선준(任善準)에 대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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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철종 11)∼미상.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풍천(豊川). 교관 백희(百熙)의 아들이다.1885년(고종 22)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886년 승정원의 주서에 천거되고, 이듬해 홍문관의 본관록(本館錄)·도당록(都堂錄)에 올랐다.1890년 규장각의 직각권(直閣圈)에 올라 시강원사서를 지내고, 이듬해 시강원의 필서·문학 등을 지냈으며, 효모전작헌례(孝慕殿酌獻禮) 때에는 상례(相禮)로 참여하여 가자(加資)되었다.1892년 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가 1907년 성균관장에 임명되었다. 이해 헤이그특사사건으로 통감부가 박제순(朴齊純) 내각의 교체를 단행하고, 이완용(李完用)으로 하여금 새 내각을 조직하도록 하였을 때 송병준(宋秉畯) 등과 함께 입각하여 내부대신이 되었다. 새 내각의 일원으로 순종이 즉위하자 훈1등태극장(勳一等太極章)을 수여받고 일본의 훈1등욱일동화대수장(勳一等旭日桐花大綬章)도 받았다.이듬해 탁지부대신에 임명되어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의 지시에 따라 각 지방의 일본 소유용지로 된 군용지·철도용지 등을 면세하도록 하는 한편, 의병에게 처단당한 자의 유족에게 보상금을 지급하였고, 농공채권(農工債券)발행 때 정부에서 그 원리금에 대한 지급보증을 하도록 하였다.주합루(宙合樓)에서 부통감 등과 순종 접견 때에 “수목이 깊고 깊으니 여름날이 춥구나. 연꽃이 연못 위에 피어 난간이 푸르다. 그림 속 경치는 실로 기묘하게 빼어난데, 선한 천안(天顔)이 웃음띠고 보는구나.”라고 읊었다.국권강탈 이후에는 일본정부에 의하여 자작(子爵)이 주어졌고, 총독부 중추원의 고문을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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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高宗實錄. 純宗實錄. 國朝榜目. 朝鮮貴族列傳(大村友之丞, 19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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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숙(任 潚)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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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 계심(季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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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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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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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졸년 : 1614 (광해군 6) - 1669 (현종 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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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대 : 조선 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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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분야 : 문신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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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사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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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 인조(仁祖) 17년(1639) 기묘(己卯)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3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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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원진사시] 인조(仁祖) 13년(1635) 을해(乙亥) 증광시(增廣試) 생원 3등(三等) 63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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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숙(任潚)에 대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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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4년(광해군 6)∼1669년(현종 10).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계심(季深). 통덕랑 경우(慶祐)의 아들이다.1635년(인조 13)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4년 뒤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곧 성균관학유에 임명되었고, 이어서 전적·감찰·공조좌랑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1647년 진해현감으로 외직으로 나가 혜정(惠政)을 베풀어 백성들의 추앙을 크게 받았고, 이어서 해주제독관을 거쳐 은계찰방(銀溪察訪)이 되었다.이때 궁가(宮家)에서 이 지역의 노비를 많이 점탈하였는데, 그가 조정에 보고하여 원소유주에게 돌려주게 하였다. 이로 인하여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많이 듣게 되었고, 진해현감 시절과 마찬가지로 송덕비가 세워졌다.1660년(현종 1) 다시 전적을 거쳐, 예조좌랑에 승진하였으나 곧 옥구현감으로 다시 나갔다.이때 전라도지역에 크게 가뭄이 들었는데 그는 기민구제에 많은 노력을 하였지만 그 다음해에 관찰사의 뜻에 거슬려 파면되었다.1666년 개성교수(開城敎授)로 재기용되었지만 곧 병으로 사직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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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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