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일시: 2019. 12. 21.~22.(주말)
- 음력(11. 25.~11. 26.), 일몰17:18, 일출 07:38
●산행지: 한남금북 2구간(추정재~금왕 월드사우나)
●산행코스: 추정재-대항산-산정말고개-선두산-안건이고개-말구리재-선도산-현암삼거리(수레너미)-것대산(봉수대)-상봉재-산성고개(출렁다리)-산성암문-상당산-새터고개 임도-이티재-구녀산-분전치-밤고개(천문대)-좌구산-새작골산-질마재-칠보치 임도-칠보산-너덕재-쪽지봉-송치재(솔티재)-모래재-보광산-고리티고개-내동고개-보천고개(토골고개)-가정자-행치고개-보덕산(큰산)-삼실고개-풋내고개-돌고개-구례고개(뱀거리고개)-보현약수터-보현산-승주고개-백야고개-소속리산-금왕휴게소-21번국도 바리고개-82번국도 월드사우나앞
●먹거리: 생수1,500cc, 롯샌샌드2, 치즈크래커1, 크림빵5, 쏘시지2, 떡 2쪽, 초코파이1, 미니자유시간5, 사탕
●준비물: 우모복, 쟈켓, 바람막이조끼, 충전지, 스틱, 헤드랜턴2, 손수건, 버프, 비니, 구급약, 장갑, 귀마개, 수면용안대, 휴지, 물티슈, 부직반창고, 우의, 예비 양말, 옷, 팔토시, 핫팩1, 무릎보호대, 방수주머니, 매트
●거리: 약 88Km
●소요시간: 약 33.43h
●누구랑: 나홀로
●경비: 하행고속8,300, 강남고속터미널 식사8,000, 이티성청국장8,000원, 행치재 편의점 식사와 음료수10,400, 상행버스8,200, 뒤풀이14,000
●날씨: -3~10도
●산행경과:
- 09:13 : 추정재 1,000cc
- 09:40 : 산정말고개
- 10:58 : 선두산 (526.5m)
- 11:12 : 안건이고개
- 11:46 : 선도산 (547.2m)
- 12:24 : 수레너미고개 (현암삼거리)
- 13:11 : 것대산 (433m), 상봉재 옹달샘
- 14:08 : 상당산 (491m)
- 15:55 : 새터고개 임도
- 16:15 : 이티봉
- 16:32~17:34 : 이티재, 식사, 1,500cc
- 17:59 : 구녀산 (499m)
- 18:28 : 분젓치 (분티재) 터널
- 19:20 : 밤고개 (천문대)
- 20:12 : 좌구산 (657.8m)
- 20:51 : 새작골산 (612.7m)
- 21:13 : 질마재 (청안리고개)
- 22:16 : 칠보치
- 23:16 : 칠보산 (551m)
- 23:58 : 쪽지봉 (596.5m)
- 00:38 : 송치재
- 01:09 : 모래재 (보광산관광농원)
- 01:20~03:05 : 낚시터 콘테이너
- 03:50 : 보광사 1,500cc 확인
- 04:08 : 보광산 (533m)
- 04:46 : 고리티고개
- 05:24 : 내동고개 (백마산갈림길)
- 06:20~06:50 노박
- 07:16 : 보천고개 (토골고개)
- 08:15 : 가정자 (마송고개)
- 08:51~09:40 : 행치고개, 콜라
- 10:27 : 보덕산 (큰산, 509.9m)
- 11:29 : 삼실고개 (딸기농장)
- ??:?? : 돌고개
- 12:58 : 구례고개, 약수터
- 13:36 : 보현산 (487m)
- 13:48 : 부용지맥분기점
- 13:58 : 승주고개
- 16:06 : 백야리고개
- 16:53 : 소속리산 (431.8m)
- 17:55 : 금왕휴게소 (평택-제천간)
- 18:12 : 바리고개
- 18:54 : 82번 국도 (월드사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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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남금북정맥: 158.1km
* 3-1구간 추정재~금왕 월드사우나: 약 88km
- 추정재~산성고개 16.88km
- 산성고개~밤고개 17.3km
-. 상당산~이티재 8.5km
-. 이티재~밤고개 5.9km
- 밤고개~모래재 15km (15.15km)
-. 밤고개~칠보산 9.7km
-. 칠보산~모래재 5.3km
- 모래재~돌고개 18.5km (19.2km)
-. 모래재~행치재 11.4km (13.6km)
-. 행치재~돌고개 7.1km
- 돌고개~82번국도 19.3km
-. 돌고개~소속리산 13.3km
-. 소속리산~82번국도 6km
※ 사전정보
- 현암묵집
- 상당산성안 연못마을 상가지구
- 이티재 이티성식당, 약수터
- 분티재 전 457봉 (증평, 청주 경계)
- 좌구산 (한남금북 최고봉)
- 질마재 전 617봉 (삼군봉, 증평, 청주, 괴산 경계)
- 칠보산 30m
- 쪽지봉 30m
- 보광산, 200m, 괴산군 사리면과 소수면의 경계
- 보천고개 (토옥고개, 괴산과 음성의 군계)
- 행치재 편의점, 한금령휴게소 (043-872-8181)
- 삼실고개, 음성읍 (010-5222-5726)
- 승주고개~감우리 큰곰집 식당 800m (043-873-2901, 06:30~)
- 소속리산~음성꽃동네 탈출 2km
- 월드온천수사우나 (043-881-5885)
※ 식수조달 가능지역
- 현암삼거리 대로변 우측 폐가 수도
- 상봉재 옹달샘 100m
- 이티재 식당, 약수터
- 좌구산천문대 주차장 화장실
- 보광사 산신각 석간수
- 토골고개 민가
- 행치마을 편의점(편의점08시~22시, 식당09시~20시, 043-872-8388)
- 삼실고개 지하수
- 보현산약수터
※ 서울에서 추정재 가는길
* 서울 경부-청주 05:40, 1.30h, 8,300
* 동서울-청주 06:20, 1.40h, 9,000
* 센트럴시티-청주 07:05, 1.40h, 11,600
* 청주터미널-도청
- 고속버스터미널(시내버스-도청) 502, 831, 30분
- 시외버스터미널(시내버스-도청) 513
- 도청(철당간 정류소)~추정재 211, 211-2, 35분
※ 서울 오는길
- 행치고개~음성 택시 10,000
- 음성터미널-동서울, 20:30, 21시, 1.40h
- 무극터미널~동서울 20:45, 21:15막차, 1.20h, 8,200원
- 생극터미널~동서울 19:30막차
- 금왕터미널~동서울 21:15막차
- 금왕 월드사우나~(소방서옆) 금왕터미널 도보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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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나 혹한의 날씨를 핑계로 정맥을 미루기는 꽃같은 겨울 날씨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나마 수도권과 가까운 한남금북, 한북 네개만 남겨놓은지라 늦게까지 운행해도 귀경에 부담이 없어서 좋네요.
충북 도청앞 철당간 정류소 편의점에서 포카리에 호두빵을 사먹고 1,500cc를 가지고 출발하였습니다. 상당산성에서 내려 울타리를 막 지나 벤치에서 빵을 먹고 있는데(여기서 물을 처음 마심) 경주에서 오셨다는 맥꾼 두분을 만났습니다. 배낭 하나를 연신 바꿔매며 진행을 하시더군요. 이 분들은 추정재에서 이티재까지랍니다. 반가웠습니다. 사진 한장 찍자는데 괜히 거절한거 같아 미안한 생각이 드네요.
"이티성영토"에서 청국장을 시켜먹고 행치재 가기 전까지 야간행군을 했습니다.
위험도 하거니와 애처로와 보여 야간에 졸면서 걷지 않는 편인데 어젠 비몽사몽 걷는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수암낚시터 콘테이너박스에서 잠을 청하고자 두시간을 머물렀지만 오들오들 시간만 소비하고 차라리 산위에 바람없는 둔덕에 기대 토막잠을 청할걸 하는 후회가 들더군요. 물가라 그런지 산위보다 기온이 훨 추웠습니다.
구려고개로 내려서면서 시원하게 뻗은 37번국도 저 멀리 소야리 감우재고개에 있는 전승탑이 힘을 내게 했습니다. 애초 승주고개에서 감우리로 내려가 식사할 계획이었지만 행치재 편의점에서 때우고 그냥 밀어부쳤죠.
항상 그렇지만 소속리산 이후부턴 끝이 보일거 같으면서도 더 힘이 들게 만들었습니다. 금왕휴게서에서 직진한 선배들의 전설 이야기를 떠올리며, 정맥을 관통해 뚫린 평택-제천간 동서고속도로를 터널로 빙돌아 우회하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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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구간은 보은을 지나 도농복합도시 청주권내로 진입하여, 울릉도를 제외한 내륙에서 제일 작은 증평군 하부를 지나 증평과 괴산의 경계 오른쪽 괴산으로 올라 보광산 넘어 내동고개 직적 백마산갈림길에서 음성군을 만나 괴산군 사리면에서 소수면으로 진입하고 이후 오대산갈림길 삼거리에서 완전하게 음성군으로 진입합니다.
청주시는 충청북도 중서부에 있는 충청북도 도청소재지로, 한국 중부 내륙의 행정·경제·문화·교통의 중심지이다. 2014년 7월 1일 청원군과 재통합하여 도농복합도시 청주시로 출범하여 4개의 일반구를 관할하게 되었고, 시역도 6배 이상 확장되었다. 행정구역은 상당구·서원구·흥덕구·청원구, 오송읍·내수읍·오창읍, 낭성면·미원면·가덕면·남일면·문의면·남도면·현도면·강내면·옥산면·북이면 등 4개구 3개읍 10개면 30개동이 있다(행정동 기준, 법정동 기준 82개동). 시청소재지는 상당구 상당로이다. 면적 940.3㎢, 인구 847,915(2017).
증평군(曾坪郡)은 충청북도 중앙부에 있는 울릉군 다음으로 면적이 작은 군이다. 동쪽으로는 괴산, 서쪽으로는 진천, 남쪽으로는 청주, 북쪽으로는 음성과 접해있다. 본래 청주 생활권에 속했던 지역이나 일제강점기 때 괴산군에 편입된 지역이다. 2003년 괴산군에서 분리되어 증평군으로 개청했다.
475년 고구려 금물노군 도서현에, 통일신라 때인 757년 흑양군 도서현에 속했다. 940년(고려 태조 23) 청주목 도서현으로 이관되었으며, 1018년(현종 9) 도안현과 청당현으로 분리되어 청주목이 관할했다. 조선시대 들어 1405년(태종 5) 도안현과 청당현을 병합하여 청안현이라 칭해졌으며, 1895년(고종 32) 청안군으로 승격했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청안군을 증평면과 도안면으로 나누고 괴산군에 편입했다.
1949년 8월 증평면이 증평읍으로 승격했다. 1973년 청원군 북이면 초중리를 편입했다. 1990년 12월 증평출장소가 설치되면서 증천·장평·도안 등 3개 지소를 관할하였다. 2003년 8월 30일 지금의 군으로 승격하면서 증천지소와 장평지소를 합병해 증평읍으로, 도안지소를 도안면으로 개칭하였다.
괴산군(槐山郡)은 충청북도 중동부에 자리잡고 있다. 동쪽은 경상북도 문경시·상주시, 서쪽은 진천군·청주시, 남쪽은 보은군, 북쪽은 음성군·충주시와 접하고 있다. 험준한 백두대간이 남동쪽을 가로막고 한남금북정맥이 서쪽을 흐르고 있는 영향으로 군 지역 대부분이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교통이 불편하며 유교적인 전통의식과 그 모습을 많이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행정구역은 괴산읍·감물면·장연면·연풍면·칠성면·문광면·청천면·청안면·사리면·소수면·불정면등 1개읍 10개면 279개 동리가 있다(행정리 기준, 법정리 기준 126동리) . 군청소재지는 괴산읍 임꺽정로이다. 면적은 842.11㎢이고 인구는 37,979명(2014년 7월 기준)이다.
조선시대에 괴산군·연풍현·청안현 등 3개의 독립 군현이 있었던 곳으로 역사 자원이 풍부하다. 이 지역에서 인간의 거주 역사가 오래되었음은 신석기시대의 유물·유적이 발견됨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지금의 괴산읍과 소수면·사리면·문광면·칠성면 일대에 있었던 지역은 신라 때에 잉근내현(仍斤內縣)이었다. 신라의 삼국통일 후 757년에 괴양군(槐壤郡)으로 고쳐졌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괴주(槐州)가 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1403년에 지괴주사(知槐州事)로 승격되었고 1456년에 괴산군으로 고쳤다. 읍의 별호는 시안(始安)이었다. 청주의 영역이었던 청천면 화양동계곡에는 조선 후기에 만동묘·화양서원 등이 건립되어 유림의 집결지로 이름을 떨쳤다.
1896년 지방제도 개혁으로 충청북도에 속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괴산군과 연풍군 일원 및 청안군의 일부가 합병되어 현재의 행정구역을 형성했다. 교통의 요지인 증평면이 1949년에 읍으로 승격했고, 괴산면이 1979년 읍으로 승격했다. 1990년 증평읍과 도안면이 증평출장소로 분리되었고, 2003년 증평군으로 승격되었다.
음성군(陰城郡)은 충청북도 북서단 중앙에 위치해 있으며, 예로부터 서울과 경기도지방에서 충청북도로 들어오는 관문이었다. 금북정맥과 한남정맥이 군의 북서부에서 분기하고 있어 군의 동부는 구릉성 지대로 이루어져 있으며, 서부는 비교적 평야지대이다. 하천은 규모가 작고 수계가 복잡하다.
동쪽은 충주시, 서쪽은 진천군, 남쪽은 괴산군, 북쪽은 경기도 이천시, 안성시, 여주시와 접하고 있다1987년 12월 중부고속도로가 개통됨으로써 수도권과 더욱 가까워져 산업단지 개발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행정구역은 음성읍·금왕읍·소이면·원남면·맹동면·대소면·삼성면·생극면·감곡면 등 2개읍 7개면 309개 동리가 있다(행정리 기준, 법정리 기준 114개리). 군청소재지는 음성읍 중앙로이다. 면적은 520.5㎢이고 인구는 93,497명(2014년 3월 기준)이다.
삼한시대에 마한 소국 중 지침국으로 비정되고 있으며,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땅이었다가 뒤에 고구려의 영토가 되어 잉홀현이라 불렸는데, 노음죽현에 속하였다가 금물소군에 이속되었다. 고구려·신라의 세력권에 들었다. 신라의 삼국통일 후757년(경덕왕16) 음성현으로 개칭되어 한극 흑양군의 속현이 되었다. 고려시대인 1018년(현종 9)에 충주의 속현으로 병합되었다가 뒤에 감무를 둠으로써 독립했다. 조선초의 군현제 개편 때 음성현이 되어 조선시대 동안 유지되었다. 별호는 설성이었다.
지방제도 개정에 의해 1895년에 충주부 음성군, 1896년에 충청북도 음성군이 되었다. 1906년 월경지 정리 때 충주의 두입지와 음죽의 두입지를 편입하면서 영역이 크게 확장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맹동면·군내면·원남면·금왕면·삼성면·대소면·생극면·감곡면·소이면으로 통폐합되었다. 1956년에 군내면이 음성읍으로, 1973년에 금왕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도농복합도시 청주를 지나며....
어떤 학자는 상당(上黨)이라는 지명이 '금강 상류' 라는 뜻을 지닌 것으로 이야기 한다. '당'은 우리말에서 한자 훈을 빌려쓴 것으로, '무리 黨'의 '무리' 에서 '물' 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백제 도읍지에서 보면 청주는 금강 상류에 위치하고 있다. 그런데 다른 학자는 한강 상류라고도 한다. 위성지도를 살펴보니, 사실 상당산성의 물은 감천을 거쳐 한강으로 흘러들어간다. 물론 상당산의 북쪽 계곡은 미호천으로 흘러들어가 금강으로 흐르지만, 그건 산성과는 무관하다고 본다. 산성의 물이 흘러들어가는건 한강 상류겠지만, 정서적으로 볼때 이곳은 금강에 가깝다.
- 왕건에게는 반란의 땅 이었던 청주, 홍성, 공주
청주는 백제시대에 상당현, 또는 낭비성, 낭자곡성이라고 하였다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전국을 9주5소경으로 개편하는데 이때 청주는 서원소경이 되었다가 서원경으로 승격되었다. 요즘의 직할시 급이다. 이후 고려 태조 23년에 (940년) 청주(靑州)로 바뀌었다가, 고려 성종 2년(983)에 처음으로 목(牧)이 설치되면서 청주(淸州)라는 오늘날의 지명으로 바뀌었다.
백제의 상당현을 거쳐,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청주에 서원경(西原京)을 설치하였다.
이후 고려 태조 왕건이 청주라는 지명으로 고친 후에도 그리고 조선을 거쳐 지금에 이르면서도 '서원' 이라는 지명은 사라지지 않고 이어져 오고 있다. 청주한씨 한명회는 임금의 장인이 되어 '서원부원군'이 되었고, 조선시대의 관청문서에도 청주부를 서원부로 기록한 예가 많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청주 지역에서 불충하거나 모반 등 큰일이 발생하면 청주목을 서원현으로 강등시켰는데, 그 횟수가 무려 8번이나 된다고 한다. 지금도 청주에는 서원구, 서원대학교, 서원초등학교 등 신라시대에 시작된 서원(西原)의 이름이 남아 있다.
청주는 백제의 영토이었다가 고구려가 남하정책을 펴자 얼마간 고구려의 지배를 받았고 6세기 중반에 신라의 품에 떨어지며 백골산 전투를 시작으로 삼국통일의 기반이 되었다. 신라가 삼년산성에 국력을 총동원해서 난공불락의 요새를 구축했던 것처럼 백제가 상당산성을 철옹성으로 만들어 고구려의 남하를 그 선에서 저지했다면 어땠을까.. 당시의 고구려뿐만 아니라, 신라가 한강유역을 차지한 이후에도 상당히 불편했을 것이다. 허나, 장수왕이 남하를 시작해서 한성에서 개로왕을 죽이고 진천 대모산성과 청원 남성골산성을 거쳐 대전의 월평산성까지 내려갔으니 웅진 턱밑에까지 몰려든 적을 맞은 백제의 입장에선 신라처럼 3년씩 공을 들이고 국력을 총동원하여 요새를 구축할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삼국의 각축장이 되었던 청주 일대를 지켜내기에 백제의 허술한 토성은 힘이 없었다. 조선 숙종때 비로소 지금과 같은 석성이 되었지만, 여전히 상당산성은 까칠해 보이지 않는다. 삼년산성이 난공불락, 불패의 성 이었다면, 이곳은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순하고 여린 모습이다.
왕건은 훈요십조를 남기면서 <車峴以南, 公州江外, 山形地勢, 並趨背逆> 이라고 했다. <차현이남, 공주강외는 산형과 지세가 모두 배역하였으니 인심도 역시 그러하다> 라는 말에 대한 근대의 최초 해석은 일제시대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 편수관이던 이마니시류 라는 사람인데, 이 사람(놈)이 해석을 엉뚱하게 하면서 이 지역이 호남을 의미하게 되었다. 여기서 차현(車峴)은 차령산맥이 아닌 수레티를 의미한다. 차령산맥이라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가공의 산맥은 일제시대 고토분지로 라는 일본 지질학자가 만든 것이다. 수레티는 중부고속도로와 329번 지방도가 만나는, 경기 안성 일죽면과 충북 음성군 사이에 있는 고개로 궁예가 어린시절을 보냈던 칠장사 부근이다. '차현이남 공주강외'란 결국 차현과 공주강 사이 지역을 말하는 것으로 왕건에게 있어 최대의 아킬레스건인 궁예를 지지하고, 반란을 했던 청주지역과 홍성, 공주 지역을 말하는 것이다. 거꾸로 호남인들은 왕건의 친위세력중 하나로, 고려 전체에 걸쳐 공직에서 배제된 경우가 없었다. 왕건은 호남인들을 크게 중용하였고, 왕건의 둘째부인이자 혜종의 모후인 장화황후 역시 나주 사람이며, 팔공신중 왕건 대신 옷과 투구를 입고 죽어 고려시대 충절의 본보기가 되었던 장절공 신숭겸 역시 곡성 사람으로, 호남 이나 후백제 출신들이 고려에서 관직 임용에 불이익을 당하지 않았다고 한다.
게다가 왕건은 '차현이남 공주강외'에 해당하는 지역에 대한 차별도 금방 풀어서 그 지역사람들을 중용하였고 홍성 사람을 왕비로 맞았으며, 왕건의 손자인 현종은 공주 사람을 왕후로 맞아들였다.
조선시대 이중환은 그의 저서 '택지리'에서 훈요십조를 빗대어 전라도를 배역의 땅으로 몰았다.
이중환의 주장에 대해서 전 건국대 신복룡 교수는 "이중환이 8도지를 쓰면서 천하를 모두 돌아보았지만 유독 호남 땅은 한번도 밟아보지도 않았다며, 병조정랑에 있으면서 목호룡 사건에 연루되어 1년에 네 번씩이나 악형을 당한 후 유배되는데 이것이 광산(光山,광주)김씨의 고변에 의한 것이어서 이중환의 가슴에 평생 한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라고 말한다. 이중환은 호남땅을 한번도 밟아보지 않고 택리지를 썼다. 그의 외가가 나주였기 때문에 한번쯤은 호남에 갔을만한데도 그는 끝내 호남에 발을 들여놓지도 않고 그런 글을 썼다고 한다. 그는 그후 광산김씨의 고변에 의한 유배에서 풀려나 20여 년을 유리걸식한 다음 '택리지'를 썼기에, 택리지에 담긴 그의 호남 인식은 결코 호의적일 리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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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남금북 2구간 추정재~82번국도(월드사우나) 86.98km
- 2-1구간 추정재~밤고개 34.18km
- 2-2구간 밤고개~돌고개 33.5km (34.35km)
- 2-3구간 돌고개~82번국도 19.3km
추정재(楸亭峙/머구미고개/32번국도/SK주유소/260m) → (2.1㎞) → 대항산(미원436삼각점/483m) → (1.3㎞) → 산정말고개(上村峙/비포장/370m) → (3.5㎞) → 선두산(先頭山/삼각점/526.5m) → (0.7㎞) → 안건이고개(성황당/345m) → (1.7㎞) → 말구리재 삼거리(530.1m) → (0.48㎞) → 선도산(先到山/무인산불감시탑/삼각점/547.2m) → (2.1㎞) → 수레너미(현암삼거리/512도로/280m) → (2.6㎞) → 것대산(봉수대/483.4m) → (1.3㎞) → 삼봉재(385m) → (1.1㎞) → 산성고개(출렁다리/512지방도/343m) → (0.9㎞) → 산성암문(山城巖門) → (2.0㎞) → 상당산(上黨山/491.5m) → (2.8㎞) → 478봉 → (3.7㎞) → 새터고개 임도(343m)
새터고개 임도(343m) → (2.0㎞) → 이티재(360m) → (3.2㎞) → 분전치(座龜亭/329m) → (2.7㎞) → 밤고개(천문대/367m) → (2.1km) → 좌구산(座龜山/657m) → (2.1km) → 새작골산 → (1.0km) → 질마재(342m) → (3.0km) → 칠보치(임도/339m) → (1.5km) → 칠보산(七寶山/543m)
칠보산(七寶山/543m) → (1.7km) → 쪽지봉(595.5m) → (2.3km) → 송치재(솔티재) → (1.3km) → 모래재(228m) → (1.6km) → 보광산(普光山/539m) → (1.8km) → 고리터고개(330.5m) → (1.8km) → 내동고개(333.5m) → (2.7km) → 보천고개(토골고개/515번지방도로/230.7m) → (1.8km) → 가정자 → (1.7km) → 행치고개(杏峙/36번국도/187.4m)
행치고개(杏峙/36번국도/187.4m) → (1.5km) → 보덕산(普德山/큰산/509.9m) → (3.6km) → 삼실고개(三實고개/516번지방도로/254.4m) → (2.0km) → 돌고개(516지방도/279.9m) → (2.7km) → 구려고개(뱀거리재/242m) → (1.5km) → 보현산(普賢山/산불감시초소/483m) → (1.1km) → 승주고개(358m) → (1.8km) → 401봉(이정표/정자) → (1.9km) → 346봉(삼각점) → (2.1km) → 백야고개(265.8m) → (2.2km) → 소속리산(小俗離山/431.6m) → (3.7km) → 바리고개(21번국도/134m) → (2.3km) → 82번국도(월드사우나/146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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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년산성의 전설
보은읍 어암리 산1번지에 있는 삼년산성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이 산속에는 장사로 이름난 남매가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장사 남매는 모두 몸이 건강하고 억세기로 말하면 태산을 들고 천근 바위를 움직이는 힘을 자랑했다. 그런데 한가지 흥미있는 것은 두 남매 중에 누가 더 힘이 센지 그 우열을 가릴 수 없었다. 오빠가 커다란 바위를 들어올리면 누이는 바위를 손으로 쳐서 산산조각을 내고 말아 과연 누가 힘이 더 세고 누가 덜 센지 알 수가 없었다. 날이면 날마다 두 남매는 서로 힘자랑을 하였지만 승부를 가릴 수가 없었다. 어느날 두 남매의 힘자랑을 보다 못해 어머니는 과연 누가 더 힘이 세고 지혜가 나은지 시험을 해보고 싶어 두 남매를 불러 앉히고, "너희 남매는 천하장사다. 매일같이 힘자랑을 하다간 끝이 없고 한이 없겠다. 그러니 단번에 끝장이 나는 것을 해보아라. 오빠인 너는 굽높은 나막신을 신고 송아지를 몰고 서울을 다녀오너라. 그리고 너는 오빠가 서울을 다녀올 동안 돌을 날라 이 산 능선을 따라 성을 쌓아 보아라. 시합은 아침 해뜰 때 시작해서 서산에 낙양이 지는 사이에 끝나야 한다. 시합에서 이긴 사람이 진 사람의 목을 잘라버리도록 하여라." 시합의 결과가 너무 잔인하지만 이런 시합을 시키면 두 남매가 앞으로는 힘자랑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시킨 것이었다. 그러나 두 남매는 함성을 지르며 손뼉까지 치면서 좋아했다. "오빠 목은 내가 맡았다구려" "웃기지 마. 내일 해뜰 때 겨루어 보자구" 이리하여 다음날 아침 동쪽에 해가 솟자 두 사람은 마지막 결판을 짓는 시합에 들어갔다. 오빠는 나막신을 신고 송아지를 몰면서 길을 떠났고 누이는 돌을 날라다가 성을 쌓기 시작했다. 홀어머니는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설마하니 목숨을 걸고 시합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시합 결과에 따라서 아들이건 딸이건 하나는 죽어야만 한다. 왜 이런 시합을 시켰는가? 하고 후회도 했지만 이젠 별 수 없이 결과를 볼 수밖에 없었다. 뜨겁던 햇볕이 시들고 서산마루에 뉘엿뉘엿 해가 지기 시작했다. 딸은 성을 다 쌓아 올렸다. 이제 나무로 문짝만 달면 그만이다. 그런데 아들은 어디쯤 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초조해졌다. "아들이....,, 아들이 와야 할텐데"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해진 어머니는 무서운 계략을 생각했다. 그것은 어머니들의 공통된 심정이다. 시합이 끝나면 그 결과에 따라서 어느 한 쪽의 목숨은 사라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들을 살려야 한다. 이것이 어머니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아들이 돌아올 때까지 딸이 문짝을 만들지 못하도록 지연시킬 계략을 꾸며냈다. "얘야 성을 다 쌓았구나" "그럼요, 문짝만 달면 내가 오빠를 이기는 거에요." "그럼 네 오래비가 졌구나" "그럼요 내가 오빠를 이기는 것이지요." 어머니는 이 말에 그만 소름이 끼쳤다. "얘야, 시장하겠구나, 내가 팥죽을 맛있게 끓여 놓았으니 먹고 하거라." "아녀요, 문짝을 달고 먹겠습니다." "먹고 해도 네가 이건 거나 다름없다. 내 오라범은 필시 어디서 쉬고 있거나 잠을 자고 있을거야. 그 동안에 팥죽을 먹고 문짝을 달거라." 어머니의 간곡한 청을 그만 거절하지 못하고 딸은 어머니를 따라 집에 들어가 팥죽을 먹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먹이는 음식이 될지도 모르는 팥죽을 정성껏 만들었다. 참으로 맛있는 팥죽이었다. 비록 펄펄 끓는 채 퍼주신 팥죽이었지만 맛있는 팥죽이라 딸은 식혀가면서 맛있게 먹었다. 이제 팥죽은 불과 몇 술만 남았다. 그때 오빠가 온몸이 땀에 젖은 채 녹초가 되어 돌아왔다. 그는 동생이 쌓은 성을 둘러보았다. "야, 내가 이겼다. 봐라 이 성은 문이 없다. 문을 만들지 못했구나." 이 사태에 난처해진 것은 어머니였다. 딸이 능히 아들을 이기고도 남음이 있었는데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 뜨거운 팥죽을 먹였기 때문에 조만간 죽임을 당하지 않으면 안되게 된 것이다. "얘야, 아무리 언약이 중하기로서니 하나밖에 없는 누이동생을 죽일 수야 있단 말이냐? 이 에미를 봐서 참아라 동생을 죽이려면 차라리 애미의 목을 끊어다오" 하고 울며 애원했으나 아들은 냉담했다. 자신이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장사인데 항시 누이 때문에 방해를 받았다. 이 절호의 기회를 이용하여 누이동생을 죽이고 세상에서 제일가는 장사가 되려는 것이다. 헛간에서 커다란 도끼를 들고 나오는 오빠를 보고 누이는 "오빠 동정을 구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자 약속대로 내 목을 자르세요, 그리고 부디 홀로 남은 어머니를 잘 봉양하세요" 하면서 늙은 어머니의 뒤를 보살펴드리지 못하고 죽으니 억울하다고 울며 오빠가 내려치는 도끼날 아래 죽어갔다는 것이다. 축성에 얽힌 이와같은 전설은 군내 회인면 부수리에 있는 아미산성(峨嵋山城)에도 있다. 다만 오빠가 나막신을 신고 송아지를 몰고 갔다 온 것이 아니라 천근이나 되는 바위를 짊어지고 오백리를 갔다왔다는 것이 다르고 어머니가 팥죽 아닌 찰밥을 해 주었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농촌형버스를 타고 머구미 도착 직전 창문너머로 유심하게 들머리를 찾아둡니다.
다시 찾게된 머구미.... 1구간에선 인근 귀래리 마을에 단재 신채호선생 사당과 묘소를 소개해 드렸는데 이번에는 관정리에 보한재 신숙주의 묵정영당과 그의 후손 신중엄 신도비를 소개드립니다.
♤ 추정재(楸亭峙/머그미고개/32번국도/SK주유소, 머구미식당/260m)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관정리와 추정리의 경계로 도로 이정표에 추정재로 적혀 있으나 현지에서는 “머그미고개”로 통한다. 산이나 마을, 고개 이름은 현지에서 불리는게 많은 의미도 있다. 낭성면 관정리의 '머구미, 먹골, 먹고개' 등에 쓰인 '먹'의 어원은 은 '막다'로서 산으로 막힌 지형을 가리키는 '막은 뫼(산)'에서 머그미로, 산으로 막힌 지형을 가리키는 '막골, 막고개'가 '먹골,먹고개'로 변이된 것으로 추정이 된다. 머그미고개 북쪽 너머 상당구 낭성면 귀래리에는 독립투사 단재(丹齋) 신채호선생의 묘소와 사당이 있다. 추정리(楸亭里)라는 지명은 추동(楸洞)과 송정(松亭) 두 곳이 합쳐지면서 추정리가 되었다. 추동(楸洞, 가래울)은 예로부터 노나무(가래나무)가 많아 노나무골이라 하였으며 노나무 추(楸)자를 쓴다.
옆으로 넘어진 소나무를 지나 골드나인CC가 내려다보이는 능선을 따르다 대항산에 오른다.
오른쪽에 전하울마을이 보이는 고개에 있는 이정표를 찍을까말까 했는데 그게 산정말고개였구나! 반바지님 부착물이 없으니 단번에 알아보기 난감하다.
♤ 산정말고개(上村峙/비포장/370m)
上村(산정말)은 살티 북쪽산 위에 있는 마을이다. 스님 한분이 이 산을 넘다가 어찌나 목이 말랐던지 골짜기마다 물을 찾아 헤맸으나 물이 없어 정상에 올라 기도를 한 바, 무릎밑에서 샘이 솟았다하여 산정이라 명했다 한다. 이 마을을 가는 길목이 산정말고개라 한다.
계목재 이르기 전 나이드신 산객을 한분 만났는데 송무봉?인가로 가신다고.... 그 이정표는 확인했는데 바삐가느라 사진은 찍어두질 못했네요.
♤ 선두산(先頭山/526.5m)
선두산은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이목리와 지산리, 상당구 가덕면 한계리에 걸쳐 있는 산으로, 한계저수지를 품고 있다. 한남금북정맥의 산으로 단독산행보다 정맥을 따라 낭성 수레너미 마을에서 시작하여 선도산을 거쳐 미원 머구미고개에 이르는 종주 코스로 많이 알려져 있다. 단독 등산코스로는 한계저수지 옆 대월계곡으로 난 임도를 따라 선두산에 올랐다가 안건이고개에서 한시울마을로 내려서는 코스가 가능하다.
좌측으로 한계리, 한계저수지를 가늠할 수 있었고 안건이고개를 지나....
♤ 안건이고개 / ♤ 한계리 한계저수지 / ♤ 너문대월고개 / 한시울마을(조리터)
한계리는 산으로 둘러 쌓여있고, 계곡 안쪽에 커다란 저수지까지 생겨 통행하는 사람이 없지만, 예전에는 사뭇 달랐다. 한계리는 보은에서 청주를 연결하는 길목으로 왕래하는 사람이 많았고, 곳곳에 주막과 미방집이 있었던 곳이다. 당시에는 보은에서 청주로 드나드는 사람들이 살티재를 넘어 한계리로 들어섰고, 한계리에서 미테재를 이용하여 청주 상당구 월오동으로 넘어갔다. 한계리 안쪽에 자리잡은 한시울은 한자말을 그대로 풀면 "한가한 사람이 개울가에서 노는 형국"이라고 하였는데, 한계저수지가 생기고 유료낚시터로 인기를 끌고 있으니 이름대로 되었다고 할 것이다. 한시울은 지형이 조리를 닮았다고 해서 조리터라고 불리기도 했었다. 한계저수지는 1977년 준공된 저수지로 가덕면과 남일면에 농업용수를 공급한다. 한계저수지 제방으로 지나 한시울 마을에 가기 전에 오른편 산으로 나 있는 임도를 따라 가면 대월이라는 골짜기이다. 대월골짜기 끝에 한남금북정맥을 넘어 낭성으로 이어지는 고개가 있는데, 너문대월고개라는 이름이 붙어있다. 한계저수지에서 걸어서 약 30분거리이다. 대월입구부터 바위가 세개 있어 삼형제 바위라고 불리운다. 첫번째 바위가 점바위로 바위 앞에 큰 판돌이 있어 그 판돌에 임산부가 돌을 돌리며 아들인가 딸인가를 물었다고 한다. 너문대월고개에서 왼편 능선으로 올라타면 정맥 종주꾼들이 매어 놓은 리본이 보인다. 정상까지는 가파른 오르막길이 계속 이어지기 때문에 단순에 오르기는 무리이고, 한 두번 숨을 고르며 20여 분을 올라야 한다. 선두산 정상은 삼각정을 설치하기 위해 나무를 마구 베어 놓았는데, 덕분에 사방을 좀 둘러볼 수가 있다. 남서쪽 산아래 한계저수지가 보이고, 북동쪽 능선에 우뚝 솟은 봉우리가 선도산이다. 동쪽으로 낭성면사무소가 있는 이목리가 보이고, 남쪽으로는 백족산 봉우리가 가깝게 보인다. 선두산 정상에서 북동쪽으로 10여 분을 내려서면 왼편으로 벌채한 비탈이 나타나고 벌채 구간을 지나 조금 더 가면 인적이 뚜렷한 고개가 나온다. 낭성면 지산리 안건이와 한시울을 연결하는 안건이고개이다. 이 고개에서 왼편으로 이어진 소로를 따라 내려서면 바로 벌채구간에 닿게 되고, 길이 넓어진다. 한시울 마을까지는 20여 분이 걸린다. 안건이 고개에서 계속 능성을 타서 봉우리 하나를 넘어서면 다시 능성을 좌우로 건너는 길이 나온다. 이 길은 옛날 낭성사람들이 청주장에 갈 때 넘던 길로 안건이를 지나 말구리재를 넘어 월오동 서운말로 내려섰다. 이 옛길을 따라 5분 정도 가면 벌채작업을 한 사면이 보이고, 사면 아래로 임도가 보인다. 임도를 따라 가면 어느 쪽으로 가도 한시울 마을로 내려서게 되는데 안타깝게도 말구리재까지 이어지던 옛길은 덩굴과 관목에 묻혀져 길을 찾기 힘들다. 안건이 고개에서 한시울로 내려서는 계곡은 빠귀이골이라고 하는데, 하늘만 빠꼼하게 뚫리고 사방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한계리 골짜기는 무심천의 발원지중의 하나이다. 선두산과 선도산 능성을 타고 내리는 물들은 상류에 오염원이 전혀없는 1급수로, 산행후에 갈증을 풀고, 탁족을 하며 피로를 풀기에 더없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