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 왕복 요금이 4,900원 이고,
이용시간은 평일에는 9시 30분 ~ 5시 30분
주말에는 9시 30분 ~ 6시까지 할거에요~
대구광역시
경상북도 남부 중앙에 있는 도시.
면적 : 885.61㎢
인구 : 252만 4253명(2001)
인구밀도 : 2,850명/㎢(2001)
가구수 : 80만 5779(2001)
행정구분 : 1군 7구
시청 소재지 : 중구 동인동 1가 1
시의 꽃 : 목련
시의 나무 : 전나무
시의 새 : 독수리
면적 885.61㎢, 인구 252만 4253명(2001)이다. 북쪽으로 경상북도 칠곡군·군위군, 동쪽으로 경상북도 경산시·청도군, 남쪽으로 경상남도 창녕군, 서쪽으로 경상북도 고령군·성주군과 접한다. 영남지방의 중앙에서 서쪽으로 치우친 대구분지의 중앙부, 낙동강(洛東江)과 금호강(琴湖江)의 합류지점 동쪽 금호강 연안에 있다.
2001년 현재 행정구역은 달성군·중구·동구·서구·남구·북구·수성구·달서구 등 1개군 7개구로 이루어져 있으며, 3읍 6면 129동이 있다. 광역시청 소재지는 중구 동인동1가 1번지에 있다.
1938년 115.65㎢, 1957년 463.19㎢로 확장되었다. 그러다가 1963년 공산면·가창면·성서면·월배면이 경상북도 달성군으로 환원되면서 다시 181.72㎢로 줄어들었다. 1981년 직할시로 승격하면서 445.03㎢로 다시 늘어났고, 1995년 광역시로 명칭을 변경하면서 경상북도 달성군이 편입되어 885.60㎢가 되었다.
1996년 현재 인구밀도는 전국에서 네 번째이며, 급격한 인구증가가 있었던 시기는 8·15광복 이후로 이때 해외에서 귀환한 동포들과 북에서 월남한 피난민들이 대거 정착하였다. 또 1960년대 이후 대구지역의 산업이 급격히 발달하자 농촌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대거 몰려들었다. 이후로도 인구는 꾸준히 증가추세를 보여 2000년에는 전년도에 비해 0.8% 증가하였다.
1. 자연
1) 지형
대구의 북부와 남부가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넓은 들판에 자리를 잡은 분지이다. 지질은 선캄브리아기의 편마암을 기반으로 경상계(慶尙系) 신라통(新羅統)에 속하는 셰일·사암(砂岩)·역암(礫岩) 등의 수성암으로 저평한 지형을 이룬다.
북부 산지는 남동의 초례봉(醮禮峰:636m), 북쪽의 환성산(環城山:811m), 인봉(印峰:891m), 북서의 팔공산(八公山:1,193m)을 연결하는 팔공산괴를 중심으로 한 환상산맥으로 되어 있다. 팔공산괴에는 팔공산의 산줄기들이 여러 곳으로 뻗어있고 도덕산(道德山:660m), 응해산(鷹蟹山:516m), 응봉(鷹峰:448m), 문암산(門巖山:426m), 용암산(龍巖山:379m), 능천산(380m) 등을 연결하는 산맥이 있다.
대구의 북동쪽에 있는 팔공산은 대구시와 경상북도의 5개 시군에 걸쳐있다. 해발 1,192m에 총면적이 122.08㎢ 에 달하는 거대한 산으로 전체 능선 길이는 20km에 이른다. 주봉인 비로봉(1,192m)을 가운데로 동봉(1,155m)과 서봉(1,041m)이 날개를 퍼득이는 독수리 같은 형상이다.
남부 산지는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신천(新川)의 지류를 기준으로 하여 서쪽의 비슬산괴와 동쪽의 용제산괴로 나뉜다. 비슬산괴는 비슬산(琵瑟山:1,084m)을 주봉으로 하여 최정산(最頂山:915m), 청룡산(靑龍山:793m), 산성산(山城山:653m), 앞산(659m), 용두산 등에 이른다. 용제산괴는 용제봉(634m)을 주봉으로 하여 대덕산(大德山:598m), 병풍산(屛風山:576m)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슬산은 정상부의 바위 생김새가 신선이 앉아 비파를 타는 형상이어서 '비슬'이란 지명이 붙었다. 최고봉인 대견봉이 1,084m나 되는 산으로 대구분지를 형성하는 주요한 산이다. 대구로부터 가창, 화원, 옥포, 논공, 현풍, 유가면까지 뻗어 있고 관기봉을 기점으로 경상남도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정상은 서쪽으로 확 트여 북에서 남으로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과 가야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비슬산은 빼어난 경관과 더불어 약 4㎞에 달하는 정상의 초원이 독특한데 봄가을로 진달래와 억새가 장관을 이룬다. 산자락 곳곳에는 유가사, 소재사, 용연사, 용문사, 임휴사, 용천사 등의 고찰과 각종 명승, 유적지가 많다. 조화봉(1058m)이 바라보이는 골짜기에는 비슬산 자연휴양림이 있다. 지난 1997년에는 덕유산 이북에서만 자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솔나리가 인근 비슬산에서도 군락을 이뤄 자생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대덕산은 소위 앞산이라고도 하는데 남구 대명동과 봉덕동, 수성구 파동 지역과 달서구의 송현동 일원에 걸쳐 있는 산이다. 계곡마다 녹음이 장관을 이루고, 정상에서 바라보는 대구 시가지 전망이 광활하다. 1970년부터 개발한 앞산공원은 대구 최대의 자연공원으로 총규모는 500만 평이다. 앞산산성이라고도 불리는 기념물 제7호인 대덕산성이 있다. 정상에 오르는 케이블카와 리프트카, 낙동강 승전기념관, 수영장 등을 비롯한 각종 위락시설이 있다. 고산골에는 청소년 심신수련장이 있다. 대구 시민에게 중요한 휴식처이며 1981년부터 다시 10개년 계획으로 자연공원으로 개발하고 있다. 대덕산 북쪽 정상에서 북쪽의 안지랭이 계곡을 포함하여 포곡식으로 축조된 산성으로 앞산산성이라고도 불린다.
대구의 강은 신천(新川)이 남에서 북으로 흐르다가 금호강(琴湖江)과 합쳐지며 금호강은 동에서 서로 흐르다가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또 낙동강은 대구의 서쪽을 감싸안고 흐르는 등 시가지는 신천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넓게 펼쳐져 있다. 또 신천과 금호강의 양쪽 시가지에는 범람원이 넓게 형성되어 있다.
신천은 대구시를 남북으로 통과하는 하천으로 남쪽의 비슬산과 최정산에서 시작하여 용계동에 이르러 팔조령 부근에서 시작하는 대천과 합류하여 시가지를 가로질러 침산동에서 금호강으로 합류된다. 강의 주류는 12.5㎞이고 전체 길이는 27.0㎞이며 강의 면적은 165.3㎢의 준용하천이다. 상류부 오동(梧洞)에는 대구시의 상수원인 가창저수지가 있고, 상류 산간 계곡은 시민의 휴식공간이 되고 있다. 특히 신천범람원 주변에는 오랜 침식작용으로 형성된 구릉지가 넓게 분포하는데 두리봉(216m)·두류산(130m)·와룡산(299m) 등의 낮은 곳에는 주택지를 비롯하여 신시가지가 들어서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물길이 용두산·수도산·동산·달성공원 앞을 거쳐 금호강으로 흘렀기 때문에 홍수 때마다 피해가 컸다고 한다. 그러다가 정조가 즉위하던 해(1776년)에 대구 판관으로 이서가 부임하여 주민의 피해를 염려해서 1778년 주민의 부담없이 개인 재산을 털어 제방을 쌓아 물길을 돌리게 되어 현재의 모습으로 되었다. 이에 주민들은 제방이름을 이공제라 하고, 새로 만든 내를 새내 또는 신천이라 하게 되었다. 이공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그해 8월에 신천변에 세워진 공덕비가 현재까지 전하고 있다.
경상북도 영일군 죽장면 석계리 매봉산 기슭 문암지에서 발원한 금호강은 달성군 강창 나루터에서 낙동강과 만나는 낙동강의 제1지류이다. 강의 길이는 118,4㎞이고, 강의 면적은 2,088㎢이다. 강 이름을 두고 강변의 갈대 스치는 소리가 비파를 연주하는 소리처럼 들린다 하여 금호강이란 설이 있고, 또 금(琴)은 단군신화의 곰이 살았던 굴의 상징으로 어머니, 생명의 탯줄과 같은 강이라는 뜻에서 금호강이란 설이 있다.
적은 강우량으로 자체 수원 확보가 곤란한 금호강 유역의 경상북도 영천시·경산군·대구시·청도군 등이 생활용수난을 해결하기 위해 건설한 금호강계통 광역상수도가 있다. 금호강 유역의 지질분포는 충적층과 백악기에 속하는 불국사화강암, 중성화산암류, 신라층군, 낙동층군 등이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유역형상은 대체로 수지상이며 상류에서 남서쪽으로 형성되어 있다. 유로연장이 상당히 긴 하천이라 하상물질은 상류에서는 호박돌, 자갈, 굵은 모래로 이루어져 있고 중류부는 잔자갈, 모래로, 하류부는 잔모래, 침니(silt)로 형성되어 있다.
낙동강 유역은 태백산·소백산·속리산·황학산·덕유산·영취산·지리산·백암산·단석산·가지산·취서산·가야산 등에서 흘러든 물이 합쳐 이룬 강이다. ‘낙동’이란 원래 ‘가락의 동쪽’에서 유래된 것이라 하며, 거의 영남지방의 전역을 휘돌아 남해로 들어가는 낙동강은 가야와 신라 천년의 민족의 애환과 정서를 안고 있다. 또 임진왜란과 6·25의 비극을 간직하고 있으며 오늘날에는 한국의 근대화·산업화의 동맥으로 작용하고 있다.
낙동강은 강원도 태백시 함백산(1,573m)에서 발원하여 영남의 중앙을 통과하여 부산 다대포 해수욕장까지 흘러 들어간다. 안동 부근에서 반변천을 비롯한 여러 지류와 합류, 서쪽으로 흐르다가 함창과 점촌 부근에서 급성천과 영강을 합류한 뒤 다시 남류한다. 다시 상주와 선산을 거쳐 위천과 감천에서 합하고 대구시 부근에서 금호강과 합류한다. 경상남도에 접어들면 황강과 남강을 만난 뒤 동류하다가 삼랑진 부근에서 밀양강을 합친 뒤 유로를 전환, 부산시의 서쪽 바다로 흘러간다.
2) 기후
대구는 사방이 산지로 둘러싸여 있어 분지기후(盆地氣候)를 이룬다. 대체로 비가 적고 매우 건조하며, 여름은 무덥고 겨울은 추운 지역으로 기온의 연교차가 심하다. 연평균기온 13.2℃ 내외, 1월 평균기온 -0.7℃ 내외, 8월 평균기온 26.3℃ 내외로, 연평균 기온교차(氣溫較差)는 27.9℃에 달한다.
대구 지역처럼 높은 산으로 사방이 둘러싸인 지형은 분지 내부의 복사열 등의 더운 기온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기 때문에 매우 덥다. 대구는 전국에서 가장 더운 지역으로 유명한데 1942년 8월 1일에는 40.0℃에 달하여 한국 최고기온을 기록한 바 있다. 가장 추웠던 때는 1923년 1월 19일로 영하 20.2℃를 기록했다. 혹서는 그 계속일수도 길어 연중 일최고기온(日最高氣溫) 30℃ 이상인 날이 55.5일로 전국에서 가장 많으며, 서울의 39일보다 13일, 부산의 23일보다 29일이나 길다.
여름과 겨울의 기온차가 매우 큰 것도 대구기후의 중요한 특징이다. 대구의 여름철 일평균기온의 분포는 도심부를 중심으로 동심원상(同心圓狀)에 가까운 도시고온역(都市高溫域)을 잘 나타내고 있어서, 도시기온의 전형적인 분포를 보인다. 이러한 하계기온의 일교차폭(幅)은 도심부에서 교외로 갈수록 커지며, 동서방향이 남북방향보다 더 큰 교차를 나타낸다.
사방을 둘러싼 산으로 인해 바다에서 몰려오는 비구름이 들어올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 비해 비가 적게 내린다. 연평균강수량이 1,030.6mm, 건조지수(乾燥指數)가 43.3으로 나타나 습윤지역에 속하나, 전국적으로 볼 때 비교적 과우지역(寡雨地域)에 속한다. 강수의 계절적 분포는 6∼9월에 연강수량의 67.4%가 내리며, 특히 7월에는 200.2mm로 연강수량의 20.4%가 내린다. 지금까지 비가 가장 많이 내린달은 1934년 7월로 601㎜를 기록했다. 반면, 겨울은 건기(乾期)가 되어 12∼2월 사이의 강수량은 연평균강수량의 7%에 불과한 67.7mm를 보인다.
내륙분지에 위치하기 때문에 계절의 변화가 빠른 편이다. 첫서리는 10월 20일에 내려 부산보다 32일이나 빠르고, 서울보다 2일 늦다. 마지막 서리는 4월 11일로 부산보다 34일 늦고 서울보다 3일 빠르다. 따라서 무상일수(無霜日數)는 263일로 서울의 182일보다 9일이 많고, 부산의 239일보다 48일이 짧다. 연간 일조시간은 2,337시간으로 긴 편이다. 바람은 겨울에는 서풍이, 여름에는 동남동풍이나 동풍이 분다.
2. 연혁
대구지역에서 출토되는 무문토기와 같은 유물로 보아 대략 3,000년 전 청동기시대인 서기 7세기 무렵부터 인간이 거주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대구와 그 인근 지역에서 출토되는 유물 중 신·구석기시대의 것은 없다. 다만 청동기시대의 유물인 간돌검·붉은간토기가 대봉동에서, 민무늬토기·홈자귀·반달형돌칼이 침산·연암산의 구릉지대에서 발견되었다.
또 지금까지 남아 있는 지석묘·석관묘·석곽묘·석실분 등 당시 세력집단들에 의한 여러 무덤유적을 볼 때 세력통합운동이 일어나 성읍국가와 같은 소국(小國)을 형성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그리고 정확한 국가명은 알 수 없으나 삼한시대의 이 소국은 변진 24국 가운데 하나였을 것으로 학계는 보고 있다. 또 《삼국사기》에 의하면 261년에 달벌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고, 이후 3세기 중엽에 신라에 복속되어 큰 읍으로 발전했다.
신라의 군현체제 아래서 대구는 위화군과 달구화현(達丘火縣)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757년(경덕왕 16)에 위화군은 수창군(壽昌郡)으로, 달구화현은 대구현(大丘縣)으로 개명되었다. 달구화현은 달불성(達弗城)이라 부르기도 했다.
후삼국시대의 대구지역은 신라를 차지하기 위한 후백제와 고려의 각축장이 되었고, 927년(태조 10)에는 고려와 후백제군과의 유명한 싸움인 공산전투가 있었다.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후에는 정치의 중심지가 개경으로 옮겨가면서 신라시대보다 비중이 낮아졌다.
고려시대 초기 편제 때에는 수성군(壽城郡)·대구현·해안현(解顔縣)으로 나뉘어져 대구현은 수성군에 영속되었고, 해안현은 장산군(지금의 경산)의 영현으로 되었다. 1018년(현종 9) 대구현은 경산부(京山府)의 속현으로, 수성군과 해안현은 동경의 속군으로 각각 편입되었다. 1143년(인종 21) 대구현은 현령관으로 승격되었고 현령(縣令)을 두어 다스렸다.
12세기 무신의 난 이후 대구 부근의 청도·밀양·경주 등지에서 민란이 자주 일어나자 대구는 이를 진압하기 위한 군사활동의 중심지가 되었고, 1193년(명종 23) 청도 운문의 김사미의 난과 초전의 효심의 난이 있었다. 제5차 몽고 침입 때에는 주민이 단결하여 공산성에서 항몽투쟁을 하였고, 1232년(고종 19)에는 팔공산 부인사(符仁寺) 대장경판이 소실되는 피해를 입기도 했다.
조선시대 들어 비옥한 평야지대를 끼고 있는 대구는 농업의 중심지로서 인구가 점차 증가하였다. 1394년(태조 3)에 수성현·해안현·하빈현이 대구현에 영속되었고, 1419년(세종 1) 5월 대구현은 대구군(大丘郡)으로 승격되었다. 1448년(세종 30) 군수 이보흠의 사창법이 실시되었고, 1466년(세조 12)에 진(鎭)을 설치하여 도호부(都護府)로 하고, 종래 경주에 있던 경상도 관찰사영(觀察使營)을 대구로 옮김으로써 대구는 경상도의 행정중심지 및 군사상의 요지가 되었다.
1592년(선조 25)에 일어난 임진왜란(壬辰倭亂) 이후 경상도를 좌우양도(左右兩道)로 분할·폐합시킨 것을 비롯하여 여러 차례 행정구역을 개폐하였으나 1601년(선조 34) 다시 대구에 경상도감영(慶尙道監營)을 설치하였다. 경상도 관찰사는 대구부사(大丘府使)를 겸임하였고, 감영의 운영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경산현(京山縣)·하양현(何陽縣)의 2현(縣)과 성주 소속의 화원현(花園縣)을 대구부에 편입시켜, 지금의 경산시 안심면·경산면·고산면·남천면·하양면과 진량면의 일부, 그리고 달성군의 월배면·화원면·옥포면이 대구부에 포함되었고 거대 도시가 되었다. 1607년(선조 40)에 하양현과 경산현은 대구에서 다시 분리되었다. 1639년(인조 17) 가산산성이 축조되었고, 1736년(영조 12)에 대구읍성이 축조되었다.
대구의 한자 표기가 ‘大丘’에서 ‘大邱’로 표기가 바뀐 것은 1780년대부터이다. 이보다 이전인 1750년(영조 26) 대구의 유생 이양채(李亮采)가 ‘丘’자는 대성 공자(大聖孔子)의 휘(諱)자이므로 이를 개칭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으나 왕의 승낙을 얻지 못하다가 1780년대부터 점차 ‘大邱’로 쓰이기 시작하였다.
오랫동안 경상도감영의 중심지적 위치를 누려온 대구는 1895년(고종 32)의 지방관제 개혁 때 큰 변화를 맞게 되었다. 이때 경상도는 대구부·안동부·진주부·동래부의 4부로 나뉘어졌는데 대구에 있던 경상감영이 폐지되면서 대구군으로 개편되어 부청 소재지가 되었다. 또 대구부의 관할구역은 23개군으로 줄어들었다.
1896년 다시 지방관제가 개정되어 경상도를 남·북 양도로 분할하고 관찰사와 군수를 두었다. 1910년에는 대구이사청(大邱理事廳)과 대구군을 폐지하여 대구부(府)라 부르고, 1911년 11월에는 시가지의 일부 동명을 변경·개칭하였다. 1914년 3월 부제의 실시로 시가지만 부(府)의 행정구역으로 정하고, 그 외는 달성군에 속하게 되었다.
개화의 물결로 1899년 달성학교가 설립되면서 여러 초등교육기관이 세워졌고, 1906년에는 중등교육기관인 계성학교, 1907년에는 신명학교가 설립되어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1907년에는 서상일(徐相日)·김광제(金光濟)가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엿고, 이후 금연·금주·절미로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되찾으려는 노력은 전국적인 운동으로 번져 나갔다. 1915년 서상일은 영남지역의 독립투사들을 모아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고, 훗날 이 단체는 대구지역 3·1만세운동을 주도하였고, 파리장서사건에도 깊이 관여하였다.
1918년에 달성군의 봉덕동·대명동 일부를 시역(市域)에 편입시키고, 1937년 5월 대구부의 시가지 계획이 공고되자 부역(府域) 확장을 계획하여 1938년 10월에 달성군의 수성면 ·달서면 ·서북면을 편입하여 공장지대를 조성하였다. 8·15광복과 더불어 해외 귀환 동포와 월남 피난민의 정착으로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였고, 대구의 가로(街路)와 동(洞)의 명칭을 바꾸고 대도시로 성장하였다. 1949년 7월 지방자치법의 실시에 따라 대구부를 대구시로 개칭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시에는 낙동강 방어작전의 최후 보루지로 역사에 길이 남을 전투가 있었다.
1958년 달성군의 공산면·등촌면·가창면·성서면·월배면을 편입하여 시역은 463.19 km2로 대폭 확장되었다. 그러나 동변동과 서변동을 제외한 공산면과 파동을 제외한 가창면·성서면·월배면 등은 농촌지대이므로 1962년 달성군에 환원하였다.
1960년 이승만 정권의 독재하에서 대구지역의 학생들이 2·28학생의거를 일으켰고, 이것은 4·19의거로 이어져 우리나라 민주주의 역사에 큰 분수령이 되었다. 1963년 1월 구제(區制)를 실시했고, 1969년에는 인구가 103만 4000명으로 늘어, 인구 백만의 도시로 성장하였다.
1981년 7월 1일 6개구의 대구직할시로 승격하고, 인접지역인 월배읍·성서읍·칠곡읍·안심읍의 4개읍과 공산면·고산면의 2개 면을 편입하였다. 1988년 달서구가 신설되어 7개구가 되었다. 1995년 1월 중앙정부 직할의 직할시를 광역시로 개칭하면서 지방화 시대의 원년을 맞았다. 같은 해 3월 인접지역인 달성군을 편입하여 7개구 1개군이 되었다.
3. 산업
1) 농업
대구지역은 비옥한 낙동강 유역의 평야가 있어 일찍부터 벼농사가 이루어졌으며, 벼농사에는 수리사업이 관건인데 대구와 인근지역에는 오래 전부터 벼농사를 위해 관개사업을 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
관개사업의 흔적 중 무술명오작비(戊戌銘塢作碑)는 518년(신라 법흥왕 5)에 대구에 오(塢)를 축조하고 세운 것으로 추정되며, 영천청제비(永川菁提碑)는 536년(신라 법흥왕 23)에 영천에 청못을 축조하고 세운 비석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신라시대부터 국가적 수리사업이 추진되어 왔고, 농경의 중심지로 성장하였다. 산업화와 공업화의 진행으로 농가인구와 경지면적이 해마다 감소하고 있으나 근교에서는 원예작물이나 특용작물 등 고소득작물 재배가 발달했다.
1995년 광역시로 개칭될 때 인근에서 일반농업이나 근교원예농업·낙농업 등을 해오던 달성군과의 통합으로 농업의 비중이 약간 높아졌으나, 상공업이나 서비스업에 비하면 비중이 극히 낮다. 2000년 12월 현재 사업체 종사자수 총 109만 1000명 가운데 농업(임업 포함)은 2만 9000명으로 전체의 2.7%에 불과하다.
쌀은 낙동강과 금호강을 끼고 있는 달성군에서 많이 생산되었으나, 현재는 근교농업과 낙농업의 비중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또 한때 전통적인 사과 산지로 유명했으나 도시공해, 수령(樹齡)의 노령화, 인건비와 지가상승 등으로 1970년대 이후 점차 감소하고 있다. 그리고 대구사과의 중심지는 의성군·군위군 등의 주변지역으로 옮겨가고 있다.
분지에 위치한 대구는 연교차와 일교차가 크고, 지질이 사질토인데다, 일조량이 풍부하여 색깔과 맛이 좋은 사과를 재배하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사과는 다른 농작물과는 달리 척박한 땅과 냉해에서도 잘 견디므로 황무지로 방치되었던 금호강 강변이나 동촌의 하천변을 개간하여 재배하였다.
한국에서 재배 역사가 가장 오래된 대구사과는 1900년 미국인 선교사 닥터 존슨(한국명 長仁車)이 동산병원을 신축하면서 선교사 사택 뒤뜰에 정원수로 묘목을 심은 것이 그 효시이다. 1904년 이후 경제작물로 각광을 받아 동인동·공평동·삼덕동 일대에 과수원이 조성되기 시작하였고 이후 산격동·동촌·경상북도 경산·왜관·김천으로 재배면적이 급격히 늘어났다. 1912년 대구와 왜관에 과수재배조합이 설립되어 사과유통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
1945년 이후 대구는 사과의 명산지로 유명하였고, 1960년대 초 전국 사과생산량의 85.5%를 경상북도에서 생산하였으며 그 중에서 반이 대구에서 생산되었다. 이에 시는 사과의 소비량을 늘리고 사과를 원료로 하는 술·식초·통조림·넥타·주스 등의 가공식품 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1994년에는 경북능금조합의 우리능금주스가 세계 식음료상을 수상했다.
축산업은 가축사육 금지구역이 확대되고 축산폐수 처리비 및 사육경비 등의 증가로 사육 가구 수와 사육 두수가 감소되고 있다.
2) 공업
대구는 내륙공업지역으로 주종산업인 섬유·금속·기계 공업 부문의 발전이 두드러진다. 특히 섬유산업은 대표적인 대구경제의 기반이다. 최근 들어서는 전자·정밀화학·정밀기계·신소재 등의 첨단산업 부문도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업종별 구성을 보면 섬유 관련업과 기계 관련업의 2개 업종에 집중현상을 보이고 있는데, 특히 직물 편중도가 높은 것이 특징이다. 전체 사업체수 중에서 섬유가 절반 정도를 차지할 정도로 섬유공업에 편중된 구조이다.
대구가 섬유공업의 중심지로 발달하게 된 요인으로는 값싸고 풍부한 노동력과 원료, 편리한 교통, 축적된 지방자본 및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등을 들 수 있다. 1906년에 대구잠업전습소가 설립되고, 1918년 일본자본에 의한 큰 공장이 설립되면서 전국 제일의 섬유공업 도시로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6·25전쟁으로 경인공업지대의 섬유공장이 가동되지 못하자 1950년부터는 전국 섬유공업의 중심지로 급부상했다. 1960년대 이후 고도 경제성장기에는 전국 경제의 규모가 확대되고 수출이 증대됨에 따라 더욱 번창했다.
그러나 1980년대 시설이 낙후되고 수출부진 등으로 인하여 생산성이 큰 폭으로 낮아졌고, 대구 전체의 경제까지 침체되는 연쇄반응을 가져오기도 했다. 이에 시는 섬유산업 위주의 산업구조를 개편하고 지역경제를 되살리기 위해 1984년부터 총면적 1017만 8549㎡의 부지에 대구성서산업단지관리공단을 조성하여 첨단산업기지와 연구단지를 만들었다.
제조업체 분포를 보면 대체로 북구와 서구에 집중되어 있는데, 북구에는 노원동의 대구제3공업단지를 중심으로 대규모의 기계, 섬유제조업체가 분포하고, 서구에는 비산염색공단과 서대구공업단지를 중심으로 염색·섬유·기계·화학제조업체가 집중분포하며, 그외 동부 경산가도의 고산동에서 경산시에 이어지는 일대에 섬유제조업체가 밀집되어 있다. 과거 시가지 중심부에 분포되어 있던 대부분의 중소제조업체는 각 공업단지로 이전되었다.
이밖에 달성군의 현풍공업단지와 논공공업단지에도 섬유공장을 주축으로 한 많은 공장들이 가동중에 있고, 서대구공단·3공단·대구염색공단·검단공단·구지농공단지·옥포농공단지 등이 있다.
최근에는 대구시 특화 품목의 공동브랜드로서 엄격한 기준의 세계적인 품질로 선보이는 고감각 토털브랜드 '쉬메릭(CHIMERIC)'을 제정하였다. 제화·의류·목공예·침구·안경·귀금속 등 현재(2000년 8월 28일)까지 등록한 업체만도 19개에 이른다. 대구섬유산업을 육성·부활하여 대구를 동양의 밀라노로 만들겠다는 취지하에 지난 1998년부터 밀라노프로젝트를 실시하고 있으며 현재(2000년 8월 1일) 37.5%의 진도를 보이고 있다.
3) 상업
대구는 옛날부터 교통의 요충지에 있어 영남지방 상권의 중심지로 발달하였고 평양·강경과 더불어 한국 3대 시장의 하나였다. 6.25전쟁 때 이후까지 상업이 크게 번성했고 옛날부터 전국을 상대로 한약 재료를 파는 약령시(藥令市)가 유명했다. 지금도 남성로 일대의 약전골목에는 한약방·한의원·건재상 등이 집중분포하고 있어 과거의 한약재 집산지로서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사과를 비롯한 대구 근교의 각종 농산물이 집산되어 생산지와 소비지 사이의 중계지로서 발달해 왔다.
1601년(선조 34) 경상감영(慶尙監營)이 설치되면서 경상도 정치·경제의 중심지가 되어 상업의 중심지로 발달하였다. 사통팔달의 교통과 함께 낙동강 유역의 비옥한 평야에서 나오는 각종 농산물의 집산지, 낙동강 수로를 이용한 활발한 물산의 교역이 상권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옛날부터 대구 주변에는 많은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고 18세기 후반기에 이미 13개의 크고 작은 향시(鄕市)가 개설되었다. 그중 매월 2일과 7일에 개장하는 서문시장(西門市場)은 전국 3대시장의 하나이다.
서문시장은 조선시대 중종·명종 때 개시된 읍장인데 일제강점기 이후 대구읍성의 서쪽에 있다 하여 서문시장으로 불리게 되었다. 서문시장은 달서천 주변에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시장인데 한양과 부산을 잇는 도로에 접하고 있었다.
당시 5일장으로 농산물과 소가 거래되다가 대동법의 실시로 더욱 번성하여 1900년 초에 상설시장이 되었다. 역사적으로 대구만세운동의 진원지가 되기도 했고, 1920년 대구부청이 일제의 천왕당지를 매립하여 새로 조성함으로써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고, 유서깊은 옛 시장의 모습은 없어졌다.
서문시장은 한국전쟁 이후 큰 변화를 맞게 되는데 전쟁 피난민의 집중으로 인구가 크게 늘고 섬유공업이 발달되면서 전국 최대의 의류·포목 도매시장으로 성장하였다. 1970년대 이후 경부고속도로의 개통과 도로망의 확충으로 서울과의 교통이 편리해지면서 대구섬유공업도 쇠퇴하게 되고 서문시장을 중심으로 한 상업기능도 약화되었다.
대구 약령시는 한약재를 판매하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특수정기시장의 하나로서 1658년(효종 9)부터 경상감영 안 객사주변에서 봄·가을에 정기적으로 열려 왔던 계절 시장이다. 상권이 커지면서 여관업·창고업·중개업·금융업을 발달시켰다. 객주를 중심으로 한 약재가 주로 봄과 가을에 채취 수확되었으므로 1년에 춘령시(음력 2월 초하루부터 말일까지)와 추령시(음력 11월 초하루부터 말일까지)로 두 번 열렸다. 전국을 상권으로 일본·중국·만주·러시아 등의 나라에도 한약재를 공급함으로써 세계적인 한약 물류유통 거점으로서 명성을 떨쳤다.
일제강점기 때는 조선총독부가 약령시를 민족정기 구현의 집결지로 판단하고 약품 및 영업 취체령·조선시장규칙·조선한약업조합규약·전시총동원법 등의 규칙과 법령으로 탄압하였다. 1941년 조선총독부의 전시총동원법의 발동으로 추령시 개설이 불허되면서 대구 약령시는 폐쇄되기에 이르렀다. 광복 후 한약방 경영자들의 약령시 부활을 위한 노력으로 약령시가 다시 열리기도 하였으나 양약의 보급과 6·25 이후 옛날과 같은 약령시의 모습은 보기 어려워졌다.
2000년 개장 343주년을 맞은 약령시가 열려왔던 약전골목에는 한의원·한약방·약업사 등을 포함한 350여 한약관련업소가 밀집되어 있다. 사단법인 약령시보존위원회는 1978년부터 지금까지 약령시 보존과 발전 그리고 한약문화의 온전한 전승을 위해 해마다 한방축제를 약령시 개장행사의 일환으로 개최해 오고 있다.
도깨비시장이라고도 하는 교동시장은 6·25전쟁의 여파로 미군 군수물자의 밀반출지로 성시를 이루었다. 현재도 다른 시장에 비해 수입상품이 많으며, 수입상품이 교동시장 전체 거래량의 약 20~30%를 차지하고 있다. 주거래 품목은 전자·의류·잡화이고 특히 전자제품을 싸게 살 수 있다.
칠성시장은 대구의 재래시장 중 가장 유명하다. 칠성시장은 동촌 및 하양 등지의 사과와 농산물이 집결하여 유통이 활발해지면서 동천시장이라 명하던 곳으로 1946년 시장공영화 시책에 따라 북문시장이란 이름으로 상설시장이 개설되어 칠성시장의 모체가 되었다. 현재는 칠성시장·대구청과시장·삼성시장·경명시장·북문시장·능금시장·가구시장·대성시장 ·꽃시장 등 여러 개의 시장을 통틀어 칠성종합시장이라 한다. 현재도 농산물 및 축산물이 주로 거래되며 일명 돼지골목·개골목·닭골목·튀밥골목 등도 칠성시장의 명물골목이다.
동문시장과 남문시장도 처음에는 5일장이었으나 1900년대 초에 상설시장이 되었고 지금도 성업중이다. 일반시장은 생활권별로 시가지 전역에 분포되어 있으나 백화점·쇼핑센터는 대부분이 대구의 중심부에 해당되는 중구에 집중되어 있다.
4. 교통관광
대구광역시는 조선시대 경상감영이 설치되면서 경상도 정치·군사·경제의 중심지로 일찍부터 교통이 발달하였다.
경부고속도로, 88올림픽고속도로, 구마고속도로, 중앙고속도로가 교차하여 도로 교통이 원활하다. 경부고속도로는 금호강변을 따라 지나는데 대전, 서울 방면에서 경주, 부산 방면으로 연결된다. 88올림픽고속도로는 고령과 합천 해인사를 거쳐 남원, 광주 방면으로 연결된다. 구마고속도로는 마산, 창원 방면으로, 중앙고속도로는 안동, 춘천 방면으로 연결된다.
국도와 지방도로는 안동·김천·성주·현풍·청도·경산·경주 등지와 방사선상으로 연결되어 있다. 시내에는 도시 외곽을 연결하는 4개의 순환고속도로 있다. 대구의 동·서·남·북부에는 4개의 시외버스 정류장이 행선지에 따라 분류되어 있고, 경상북도 전역으로 시외버스가 운행된다.
진천~안심 간 지하철 1호선은 1991년 공사를 시작하여 1998년 5월에 개통하였다. 현재 지하철 1호선의 역사는 모두 29개이다. 시점부인 진천~대곡 간의 1㎞ 구간은 2001년 말까지, 종점부인 안심~사복 간의 1.5㎞ 구간은 2002년까지 연장할 예정이다.
대구공항은 대구~서울 간 항공편이 1일 19회, 대구~제주 간 항공편이 1일 5회, 대구~오사카·대구~방콕 정기항로가 개설되어 있다.
도심부에는 동성로·서성로·남성로·북성로와 같은 주요 거리가 있다. 공원은 앞산공원, 팔공산도립공원, 달성공원, 비슬산도립공원, 경상감영공원,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망우공원, 수성유원지, 동촌유원지, 화원유원지, 두류공원, 우방타워랜드가 있다.
팔공산에는 동화사·파계사·북지장사·관음사·관암사·부인사 등 신라 때의 불교유적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팔공산 산록에는 관봉지구, 동화사지구, 파계사지구의 집단시설지구가 있고 산기슭을 가로지르는 도로가 있다.
5. 사회문화
대구시에는 20개의 아동시설을 포함하여 사회복지시설이 53개소이며 수용인원은 5,885명이다. 의료기관은 종합병원이 13개, 병·의원이 1,130개, 한방병·의원이 523개, 치과병·의원이 611개, 조산소가 6개, 부속의원이 9개소다.
상수도는 매곡·고산·두류·가창·죽곡·달성·공산 등의 7개 정수장을 통해 1일 181만톤의 수돗물을 공급한다. 금호강과 낙동강 수질을 개선하기 위해 1983년부터 대규모 하수처리장 4개소를 완공하여 전국 최초로 하수처리능력 100%를 달성했다.
언론기관은 매일신문사·영남일보사 등의 5개 신문사, 대구KBS·대구MBC 등의 TV 방송국과 라디오 방송국이 있다. 이밖에 극장 30개, 박물관 5개, 화랑 45개, 출판사 541개이다.
체육시설은 3만 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두류운동장, 3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구시민운동장을 비롯화여 공공 체육시설이 20개소, 사설 체육시설이 523개소에 이른다. 문화공연시설은 시민회관, 문화예술회관이 있어 연극, 오페라, 작품전시회 등 다양한 문화행사가 열리고 있다. 교향악단, 국악단, 성인합창단, 무용단, 오페라단, 소년소녀합창단을 갖춘 시립예술단이 있다.
박물관은 약령시 전시관, 냉천농경민속자료관, 경북대학교 박물관, 영남대학교 박물관, 대구대학교 박물관, 계명대학교 박물관, 효성가톨릭대학교 박물관, 대구교육대학교 박물관, 건들바우박물관 등이 있다.
향토문화축제는 달구벌축제, 팔공제, 동성로축제, 약령시축제, 봉산미술제, 섬유축제, 날뫼축제, 비슬산 참꽃축제 등 특색있는 축제가 많다. 또한 봉산문화거리, 야시골목, 약전골목, 들안길, 동대구로 등 가볼 만한 거리가 많다.
종교시설은 교회가 972개, 사찰이 365개, 성당이 71개이다. 제일교회(대구유형문화재 30)는 대구·경북 최초의 기독교 교회로 약전골목 내에 자리해 있다. 계산동성당(사적 290)은 영남 최초의 고딕양식 성당으로 천주교 전파 과정을 보여주는 건물이다. 특히, 프랑스 루르드 동굴을 본떠서 만들었다는 성모당(대구유형문화재 29)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천주교 성지이다.
최초의 서원인 연경서원과 서산서원이 있었으며, 현존하는 대구향교가 있다. 근대식 교육기관은 1899년(광무 3)에 사립 달성학교가 세워졌으며, 1900년 최초의 사립 초등학교인 대구희도심상학교가 설립되었다. 1905년에는 대구공립희도심상학교가 설립되었다. 1906년에는 최초의 중등학교인 계성중학교, 1907년에는 신명여자중학교가 설립되었다.
1999년 현재 대구시내에는 대학원 42개, 대학(교) 10개, 전문대학 12개, 고등학교 74개, 중학교 105개, 초등학교 178개, 유치원 260개이다. 학생수는 68만 1327명, 학급당 학생수는 초등학교 40.3명, 중학교 43.1명, 고등학교 51.9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