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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천(冷泉)과 풍혈(風穴) 글: 애스넉(전금주)
냉천은 말 그대로 지하에서 차가운 물이 나오는 샘이다. 그 물은 사시사철 온도가 거의 변하지 않고 일정하다. 직접 온도를 측정해본 적은 없으나 사람들 말에 의하면 봄, 여름, 가을, 겨울 구별 없이 사시사철 섭씨 영상 3, 4도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 옆에는 양화리라는 시골 마을이 있고, 그 마을 앞으로는 논과 밭이 펼쳐져 있으며, 마을 앞과 냉천 주위로 섬진강으로 향하는 깨끗한 물이 흐르고 있다. 나 어릴 때 이 섬진강 물이 남한(南韓)에서 가장 깨끗하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새롭다. 이런 아기자기한 깨끗하고 아름다운 경치와 자리를 같이 하고 있는 것이 바로 냉천이다.
냉천에서 낮은 산길을 타고 지척에 풍혈이 자리하고 있다. 굴속으로 조금 들어가면 바위 틈새에서 시원한 바람이 나오는 신기한 구멍들이 많이 있다. 냉장고가 없던 옛날, 이곳 주위 사람들은 여름에도 시원한 김치를 먹었다고 한다. 바로 이곳 시원한 바람이 나오는 곳에 김치를 보관하였다가 먹었다는 것이다. 냉천과 풍혈이 있는 곳 가까운 곳에는 분명히 온천이 존재한다는 학설을 믿고 우리 어릴 적에 그 온천을 찾기 위해 온갖 노력과 자본을 들여 탐사한 분이 있었는데, 결국 수년간의 각고 끝에 최근에 온천을 발견하여 개발에 착수했다고 한다. 지금 사람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으며, 그 주위로 새로운 도로가 개설되는 등 개발 열기가 대단하다.
냉천과 풍혈은 우리 고향 마을에서 10여 킬로 떨어진 곳에 있다. 정확히 말하면 전라북도 진안군 성수면 양화리에 있다. 전주에서 임실군 관촌면(館村面)을 거쳐 가면 되는데 요즈음은 교통이 발달되어 전주에서 30여분이면 도착할 수 있다. 우리 어릴 적 이곳은 이름도 알려지지 않아 아주 한적하였다. 그래서 시골에 살면서 어쩌다 한 번 가게 되면 우리들끼리 그 곳을 독차지할 수 있어 좋았다. 그러나 요즈음 피서 철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냉천이 온천으로 변할 정도라고 하니 고향 근처에 그렇게 좋은 곳이 있어도 갈 수 없는 곳이 된 것이 너무 아쉽다. 고향을 빼앗긴 것이다. 우리나라는 매스컴에서 단 한번 가 볼만한 곳이라고 소개되어도 그곳은 이미 자연의 모습을 변하게 할 만큼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이 요즈음의 세태다. 아무리 환경을 보살피고 지키며 자연을 즐긴다 해도, 한번 사람의 발길이 닿기 시작하면 이미 그곳은 옛날의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아니고 파괴의 현장이 되어버리고 만다. 자연에 대한 우리들의 의식에 문제가 없는지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되도록 자연은 자연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 환경을 지킬 수 있는 지름길일지도 모른다. 인간이 자연에 손을 대기 시작하면서 각 종 질병이 생기게 되고, 조금의 편리성을 추구하기 위해 자연에 흠집을 내어 결국은 그 피해가 우리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이다.
중학교 때로 기억된다. 우리는 여름 방학을 얼마 남겨 두고 더위를 피하기 위해 일요일에 친구 몇 명과 함께 냉천으로 향하였다. 냉천욕의 효과에 대한 좋은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각 종 피부병이나 무좀 등이 냉천에 아픈 부위를 담그면 깨끗이 낫는다는 소문이었다. 그 당시 시골 사람들의 그런 무좀 같은 병은 여름철보다는 오히려 겨울에 많이 생겼다. 여름이야 물이 많아 씻을 환경이 되어 있었지만, 겨울에 시골은 몸을 청결히 하고 생활하기엔 너무나 상황이 좋지 않았다. 공중목욕탕 하나 없었으며, 가정에도 변변한 목욕 시설이 없다시피 하였다.
특히 우리 어린이들은 추운 겨울에 손발 씻기가 정말 싫고 지겨운 일이었다. 찬바람이 쌩쌩 불어오는 뜰에서 손발을 걷어붙이고 오래 씻지 않아 상당히 많이도 불어난 때를 씻어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운이 좋으면 어머니가 커다란 솥에 물을 데워 부엌에서 씻게 하거나, 더 좋은 경우 세수 대야에 뜨거운 물을 담아 방에서 씻게 되는 경우였다. 이렇게 오랜만에 어쩌다가 한번씩 씻게 되니 많은 사람의 발에 무좀이 생기게 되고 또 귀, 발바닥 또는 손가락에 동상이 걸리기 다반사였다. 더군다나 그 당시 겨울에 면양말이 아닌 나일론 양말을 신고 다녀 땀이 차게 되어 더욱더 무좀이 많이 걸릴 환경을 만들고 있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무좀으로 고생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리를 지어 무좀에 특효가 있다는 냉천에 손발을 담그고자 그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지금이야 반듯한 길이 나 있고 차량들이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지만, 옛날에는 거의 자갈길인 신작로이거나 차도 다닐 수 없는 산길이었다. 집에서 20여 리나 되는 길을 우리는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길을 안내하는 풀벌레의 뒤를 따라 더위를 참아가며 걸어가고 있었다. 도중에 산딸기가 눈에 띄면 따서 같이 나누어 먹고, 목이 타면 계곡의 물을 그냥 두 손이나 토란잎 등을 잔 삼아 마시거나, 그 물이 싱거우면 주위의 밭으로 들어가 다른 농부가 가꾸어 놓은 오이를 따먹기도 하고, 단 수수(사탕수수의 시골말)를 꺾어 그 껍질을 벗긴 다음 줄기의 달콤한 물을 빨아먹기도 하고, 또한 덜 익은 속살이 부드러운 목화 열매를 따먹기도 하였다. 그 당시에는 비록 남의 것들에 손을 댄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묵시적으로 도둑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회였던 것이다. 물론 어른들도 각자 자신들의 어린 시절 그러한 체험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아량을 베풀었는지도 모르지만, 내 생각에는 그 당시 사람들은 모든 다른 사람들을 자기 가족의 일원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그 당시가 더욱더 경제적으로 핍박하고 부족한 생활이었는데, 더 부유한 오늘날의 사회보다도 인정과 양보하는 마음이 더 있고 또한 베푸는 그런 여유 있는 삶을 영위했던 것 같다.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냉천은 가로 1.5 m, 세로 5 m쯤 되는 넓이의 시멘트로 만든 직육면체의 우물 모습이었고, 산 쪽 상단부에서 물이 솟아나고 있었다. 우리 소년들은 냉천에 들어가면서 별다르게 옷을 벗을 필요가 없었다. 모두들 러닝셔츠에 팬티 하나와 반바지 하나만 입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뜨거운 여름이었기 때문에 옷 입은 채로 물에 들어가야 더욱 경제적이었다. 자동적으로 세탁이 될 뿐만 아니라, 더운 공기를 쏘이며 먼길을 걸어 집에 갈 때 옷이 마르면서 잠시나마 시원함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여하튼 하나 둘 냉천에 발을 담그기 시작하였다. 처음 발은 넣었던 녀석이 30초를 참지 못하고 괴성을 지르며 발을 꺼냈다. 다음 녀석은 제법 오래 견디더니만 발을 꺼낸 후 거의 얼다시피 된 발을 양손으로 부여잡고 이를 악물고 낑낑거리며 냉기를 참고 있었다.
나는 여유를 부리며 여러 번 잠깐 잠깐씩 발과 손을 번갈아 넣었다 꺼냈다 하였다. 잠깐의 시간이었지만 살결이 약했던 나로서는 너무 차가와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그래서 곁에 흐르고 있는 민물에 들어가 물장구치며 놀기도 하고, 다슬기도 잡고, 손에서 잘 빠져나가는 송사리와 메기들과 서로 잡혔다가 도망가고 잡았다가 놓치고 하면서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손발과 얼굴이 차가와 지면, 햇볕에 의해 뜨겁게 달구어진 큰 돌에 손발과 얼굴을 대기도 하고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따스함을 느끼기도 하였다. 또 그런 과정에서 몸이 더워지면 다시 차가운 공기가 나오는 풍혈에 들어가 시원함을 만끽하였다. 참 신기하기도 하였다. 굴속의 바위 틈새에서 계속 찬바람이 나오는 것이다. 밖은 덥기 때문에 굴속의 바위에는 차가운 물방울이 맺혔다가 떨어지고 있었다. 찬 공기를 쏘이며 물방울을 맞으며 굴속에서 시간을 보낸 다음, 다시 밖으로 나와 햇빛 사냥을 하고 또 냉천에 몸을 맡기고 하면서 유쾌하고 시원한 하루를 보냈다.
냉천을 다녀온 뒤로 우리는 꽤 오랜 동안 발가락이 간지럽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였다. 무좀이 거의 나았던 것이다. 그 뒤로 우리는 무좀이 완전히 나은 것으로 알고 발에 대하여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제대로 씻지도 않았고 또 땀이 난 날에도 땀에 젖은 냄새나는 양말을 제대로 빨아서 신지 않았다. 그 결과 다시 발가락이 가렵고 통증이 오기 시작하였다. 다시 무좀이 생긴 것이다. 매사가 마찬가지다. 사람이 어느 정도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면 겸허한 자세로 그리고 절제하는 생활을 통하여 자기 관리에 힘을 기울여야 하는데, 그러한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은 방심하게 된다. 등산을 할 때도 정상까지 올라갈 때는 사고가 별로 발생하지 않으나, 대개는 이제는 내려가는구나 하고 방심하다가 사고를 당하기 쉽다.
병이 완전히 나았구나 하고 안심하고 마음을 쓰지 않아 다시 병이 난 것은 아주 큰 교훈이었다. 어떤 일을 할 때나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걸어가는 길에서 인내의 정신으로 자기 마음을 살지게 하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병이 나았다고 바로 흐트러진 생활을 한다면 병을 낫기 위하여 노력한 대가가 쉽게 무너질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정상에 오르는 과정은 정말 중요하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정상에서 가졌던 뿌듯한 그 마음으로 정상에서 내려갈 준비를 해야 하며, 내려갈 때는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할 일이다. 그리고 정상에서 가졌던 그런 순수한 인간 본연의 정신 자세로 계속 삶을 유지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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