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얄개]에서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건 원작과 영화의 시대차이입니다. 이 영화의 원작은 1953년에 나온 조흔파의 '명랑소설' [얄개전]이니, 원작과 영화 사이엔 자그만치 23년의 갭이 존재하는 것이죠. 하긴 [얄개전]은 수명이 긴 책이긴 했습니다. 제가 가물가물하게 기억하는 70년대에도 조흔파의 책들은 굉장한 인기였어요. 지금은 거의 완벽하게 잊혀진 책들이 되었지만요.
이건 그렇게까지 정상적인 현상은 아닙니다. 청소년 문화처럼 쉽게 변하는 건 없으니까요. 환갑을 훌쩍 넘겼던 노인네의 작품이 가장 인기있는 청소년 영화의 원작이었다는 건, 그만큼 당시 청소년들이 자기 목소리를 충분히 내지 못했고 자기만의 문화가 약했다는 방증일 수도 있어요.
물론 석래명의 [고교 얄개]가 조흔파의 소설을 그대로 옮긴 건 아닙니다. '고교'라는 딱지를 앞에 단 제목부터 그 증거죠. 원작에서 주인공인 '얄개' 나두수는 두 번 낙제한 중학교 1학년생입니다. 하지만 영화에선 한 번 낙제한 고등학교 2학년생입니다. 아버지가 대학교수인 집안과 미국인 교장을 둔 학교 분위기는 대충 비슷하지만 이야기의 흐름은 다르죠.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차이점은 새로 삽입한 고학생 호철의 이야기가 후반부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입니다. 두수는 모범생인 호철을 괴롭히다가 나중에 호철의 집안 사정을 안 뒤 그를 도와주죠.
전체적으로 영화는 소설보다 못합니다. '책이 더 낫다'라는 말은 원작의 애독자들이 아주 쉽게 하는 말들이지만, 이 경우는 그 차이가 상당히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우선 영화는 원작보다 덜 재미있습니다. 원작의 아기자기한 에피소드들이 대부분 사라졌고 그 빈 자리를 채운 다른 이야기도 그렇게까지 재미있는 편은 아니죠. 원작에서는 익살스럽고 흥미로웠던 캐릭터들이 영화에서는 지루하고 교조적인 설교꾼들로 바뀌었고요. 게다가 영상 매체로 옮겨지는 과정 중 조흔파의 그 익살스러운 입담이 쑥 빠져버리자 같은 이야기라도 매력을 완전히 잃어버립니다.
웃기는 건, 53년에 나온 원작이 76년에 나온 영화보다 사고방식이 훨씬 더 현대적으로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원작의 나두수는 기성 세대에 정면도전하는 혁명가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신선한 아이디어가 넘치는 유쾌한 규율파괴범입니다. 두수의 주변 사람들도 사고 방식이 상당히 세련된 편이어서 그런 두수를 무작정 힘과 권위로 억누르는 대신 자기 스스로 깨닫고 성장할 수 있게 도와주고요. 하지만 영화 속에서 두수는 '북괴의 침략 야욕을 막고 조국 근대화에 이바지하는 모범적인 사회인'으로 교정되어 마땅한 평범한 말썽꾼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나두수의 장난으로 일관하는 원작과는 달리 영화는 절반 정도가 얄개 나두수의 교화과정입니다. 하품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어요.
지금와서 보면 [고교 얄개]의 매력은 대부분 70년대에 대한 회고적 정서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왕년의 청춘 스타였던 이승현과 김정훈의 풋풋한 모습이나, 지금은 오래 전에 사라진 70년대 고등학생들의 풍속을 보며 감상에 젖는 사람들도 많겠지요. 하지만 이 영화가 그 자체의 매력으로 후대 관객들을 끌어들일만큼 재미있는 영화일까요? 아뇨, 그런 생각은 들지 않네요. 50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고풍스러운 매력을 풍기는 원작소설과는 달리, [고교 얄개]는 그냥 낡아보이기만 합니다. 어쩔 수 없는 시대와 매체의 한계겠지요.
이 당시 하이틴물을 보면 영화의 배경으로 빵집이 자주 등장합니다. 요즘 고등학생들이 빵집에 들어가서 노닥거리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 같은데, 저때는 10대들이 데이트를 하거나 친구들끼리 노닥거릴때 빵집이 제일 인기있는 장소였었죠. 이승현과 진유영은 원래 나이는 고3이지만, 일년 낙제를 받아서 2학년에 머물고 있는 불량학생으로 나옵니다. 요즘 시대는 웬만큼 큰 사고를 치거나 결석을 많이 한게 아니라면 대부분의 학생들이 예정대로 때가 되면 학년이 올라가지 않습니까. 저 당시에는 지금에 비하면 학년별로 낙제생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할머니가 손자에게 "너 이번에 낙지국 한그릇 먹었다며?"라고 말장난을 하는군요. 할머니역의 한은진씨는 6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오랜기간 수많은 영화에 출연하셨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어렴풋한 기억으로는 명절기간에 티뷔를 틀면, 가장 흔하게 볼 수 있었던 영화들 중에 하나가 '얄개' 시리즈였습니다. 즉, 이승현씨가 교복을 입고 고등학생으로 나오는 일종의 하이틴 코미디물이었는데, 어느 순간엔가 티뷔에서 이 시리즈를 만나기가 어려워졌더라구요. 요즘 명절기간에는 주로 최근에 개봉이 끝난 작품들만 방송에서 보여줄 뿐, '얄개' 시리즈를 포함한 추억의 한국영화들을 명절 특선영화로 편성하는 경우는 거의 사라진 것 같습니다. 그만큼 사람들이 지나간 한국영화에 관심이 없다는 증거도 될 것 같은데, 저 초등학교때만 해도 안 그랬거든요. '얄개' 시리즈하면 정말 질리도록 티뷔에서 많이 방송이 돼서 이승현씨 얼굴 하나가 장르 전체를 대표하는 상징처럼 느껴지고는 했습니다.
'고교 얄개'는 이승현 얄개 시리즈의 첫 신호탄을 올린 첫번째 작품입니다. '얄개'라는 단어는 '얄미운 개구장이'라는 의미로 보시면 될 겁니다. 이승현씨가 이 영화로 데뷰한 것은 아니고, 그 전에도 몇몇 영화에서 아역으로 출연했었죠. 가장 유명한 작품이 '바보들의 행진'에서의 신문팔이 소년 역할이었구요. 하지만 이 영화 '고교 얄개'가 대박이 난 후에 이승현이 새로운 하이틴 스타로 갑자기 유명해지면서, 속속 이승현을 주연으로 한 비슷비슷한 내용의 속편들이 앞다투어 제작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나중에는 '대학 얄개' '신입사원 얄개'라는 영화까지 나올 정도로 이승현씨는 이 알개 캐릭터 하나로 6-7년간 한국영화 전체를 주름잡는 배우가 됩니다. 잘 보면 생긴게 축구스타 루니 닮았어요.
문제는 너무 어린 나이에 스타로 떠올랐고, 단기간에 수많은 영화에 정신없이 출연하는 바람에 성인이 된 이후에도 이승현씨가 자신의 연기관이나 인생관을 확립할 여유가 없었다는 점입니다. '고교생 스타'의 이미지와 '얄개'라는 캐릭터의 아우라를 떨쳐내기 힘들었던 이승현씨는 20대 중반이 되면서 '나이먹은 얄개를 원하지 않는' 대중들로부터 관심 밖으로 멀어지게 되었고, 80년대 중반 배우를 그만두고 난 이후에도 하는 일마다 계속 꼬이는 바람에 중년 이후에는 거의 파산 직전까지 가게 됩니다. 몇년 전에 티뷔에 출연하셔서 자신이 그동안 고생하며 살았던 이야기를 쭉 들려주셨는데 정말 사람 인생이라는게 아무도 모르는 것이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이승현씨가 바라는대로 다시 연기자로 복귀하셨으면 좋겠어요. 얄개 시리즈에서 친구로 자주 등장하던 진유영씨도 최근에 다시 영화계로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영화의 첫 장면은 기독교 재단 고등학교의 강당에서 실시되는 채플 수업으로 시작합니다. 영화의 주요 캐릭터 3인방이 차례대로 소개가 되는데, 당시에 '꼬마신랑' 역으로 인기가 있었던 김정훈씨, 그리고 이 영화로 데뷰하게 되서 최근에 '해북학교실'에서 이사장역으로 나오셨던 진유영씨. 마지막으로 영화의 주인공인 '얄개' 이승현씨가 차례차례 등장합니다. 이 장면 하나만 봐도 주요 캐릭터의 성격을 알 수가 있죠. 김정훈씨는 남들 눈치를 보는 소심한 캐릭터, 진유영은 건달끼가 엿보이는 터프한 캐릭터, 이승현씨는 채플시간에 코를 골고 자는 괴짜같은 캐릭터, 단 몇개의 커트만으로도 캐릭터들을 효율적으로 소개하는 이런 오프닝 신을 잘 짜는 것이 시나리오 작가에게 필요한 실력입니다.
국어교사로 새로 부임한 선생님이 자기 소개를 하려는데, 갑자기 이승현이 "땡!"하고 소리칩니다. "뭐가 땡이냐?"라고 묻자, "6시 5분 전이라는 신호입니다"라고 말하죠. 선생님은 6시 5분전이라는게 무슨 의미냐고 되묻자 이승현은 고개를 오른쪽으로 기울이면서 "이게 6시 5분 전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반 아이들과 선생님은 웃음을 터트리죠. 그런데 지금 관객들이 이 장면을 보면 도대체 저 썰렁한 농담이 뭐가 웃기다는건지 좀 당혹스러울 것 같습니다. 슬랩스틱 같은 코미디는 시대를 초월하는 보편성이 있지만 저런 짤막한 농담 같은 경우에는 동시대 사람이 아니면 웃기가 힘든 것들이 많은 것 같아요.
이 당시 하이틴물을 보면 영화의 배경으로 빵집이 자주 등장합니다. 요즘 고등학생들이 빵집에 들어가서 노닥거리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 같은데, 저때는 10대들이 데이트를 하거나 친구들끼리 노닥거릴때 빵집이 제일 인기있는 장소였었죠. 이승현과 진유영은 원래 나이는 고3이지만, 일년 낙제를 받아서 2학년에 머물고 있는 불량학생으로 나옵니다. 요즘 시대는 웬만큼 큰 사고를 치거나 결석을 많이 한게 아니라면 대부분의 학생들이 예정대로 때가 되면 학년이 올라가지 않습니까. 저 당시에는 지금에 비하면 학년별로 낙제생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할머니가 손자에게 "너 이번에 낙지국 한그릇 먹었다며?"라고 말장난을 하는군요. 할머니역의 한은진씨는 6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오랜기간 수많은 영화에 출연하셨습니다.
그리고 '불멸의 스타' 정윤희씨가 이승현의 누나로 등장하는데, 20대 초반의 청순한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윗 장면은 동생이 누나를 놀리려고 얼굴에 콧수염을 그렸는데, 그것도 모르고 누나가 당당하게 외출을 하는 장면이에요. 이 영화에서 정윤희씨 비중은 그리 크지 않아서 정윤희 얼굴 보려고 이 영화를 골랐던 저 같은 사람을 당혹스럽게 만듭니다.
평소에 괴롭히던 친구가 학교에 며칠째 나오지 않자 걱정이 된 얄개는 친구의 집에 찾아갑니다. 쓰러져가는 낡은 아파트 옥상에 있는 옥탑방에서 누나와 함께 살아가고 있던 친구는 우유배달을 하다가 몸을 다쳐서 수술을 앞둔 상태였습니다. 자기 때문에 친구가 다쳤다고 생각한 얄개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친구의 수술비를 마련하기로 결심을 하죠.
그런데 이 장면에서 김정훈이 내뱉는 대사가 아주 닭살스럽습니다. 박정희 군사 정부의 새마을 운동의 정신을 무슨 종교 전도하듯이 친구에게 일장연설로 설교하기 시작하는데, 우리모두 열심히 공부하고 부지런히 일을 해서 국가의 경제발전에 도움이 되는 일꾼이 되자는 투의 공익광고스런 대사를 날리거든요.
첫댓글 즐감하고갑니다.즐거운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