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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화 화승총의 세계사(10)
작성자 : 손상익
흑룡강의 화승총
병자호란이 끝나고 청나라 볼모로 잡혀간 인조 임금의 세자는 심양에서 가택연금 8년의 고초를 겪다가 귀국하여 효종 임금으로 즉위(1649)하셨다. 오랑캐나라에서 당한 치욕과 굴욕감에 이를 갈았다. 곧바로 청나라를 응징하는 북벌(北伐)을 준비했다. 청나라 건국초기의 어수선한 분위기를 틈타 조선군이 뒤집어 엎는다는 계획이 비밀리에 진행됐다.
반청기질이 강한 주자 학자를 등용하고 성능 좋은 왜국 화승총 수천 정을 수입해 비축했고 조선의 변방 성곽도 수축했다. 이완(李浣)을 훈련대장삼아 어영청군 2만 명과 훈련도감 병사 1만 명을 모아 은밀하게 전술훈련도 시켰다. 낌새를 알아차린 청 황제가 “왜구를 핑계대고 군사를 늘인다면 짐이 손 봐 주겠다” 으름장 칙서까지 보냈다.
북벌을 준비하던 조선 군부가 믿는 구석이 있었다. 한양 군영에서 급료를 지급해가며 조련시킨 조선 정예군이 아니라 화승총을 거머쥔 함경도 산포수였다. 북관의 회령과 경성(鏡城: 청진), 부령, 무산, 갑산 포수들은 용맹함과 사격실력으로 만주에까지 이름이 났다. 그들은 조정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정예 화승총 부대로 편성할 수 있었다.
조선 군부는 팔도에 하나씩 밖에 없는 병마절도사 자리를 함경도에는 둘이나 두었다. 함흥 본영(남병영)과 함께 두만강을 넘고 만주로 치고 오르기 좋은 청진에 북병영을 설치했다. 애초에는 두만강너머 사나운 여진족에 대응하기 위해 중종 임금 때부터 북병영 설치가 논의됐으며 선조 임금은 북병사와 남병사를 각각 제수했다.
효종 임금은 북벌 계획을 추진해나가면서 북병영 절도사에게는 “언제든지 동원할 수 있는 백두산 산포수 자원을 관리하라”는 언질을 주었던 흔적이 역사기록 행간에 뚜렷하다. 청나라를 치러 두만강을 오르는 선봉부대로 내세울 핵심무력이었던 셈이다.
그때 하필이면 나선(羅禪: 러시아)이 남하정책을 펴면서 청나라와 무력 충돌했다. 효종 임금조차 몰랐던 낯선 나라 러시아로 말미암아 북벌계획은 잠시 뒤로 밀렸다. 근대 이후 러시아는 유럽각국이 해외 영토 확대에 혈안이 된 사이 유라시아 대륙에서 자국 영토를 확장하는 일에 집착했다. 1591년 예마르크(Ermak)의 시베리아 원정대가 우랄산맥 넘어 동진하고 60여 년간 몽골이 지배하던 옛 땅을 수복하고 오오츠크(Okhotsk)해에 이르는 광활한 시베리아를 자국 영토로 편입하던 시기였다.
▲ '예마르크의 시베리아 정복'(The conquest of Siberia by Ermak). 1582년 몽골 제국 땅이던 고토를
수복한 러시아의 예마르크와 휘하 부대원이 전투를 펼치는 모습이다. 이 그림은 당대 러시아의 대 화가
수리꼬프(Surikov) 작품으로 러시아 대표 명화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 러시아와 청국 만주의 국경 분쟁(Russian-Manchu border conflicts). 1652년 - 1689년까지 소소한 전투가
끝없이 벌어진 영토 전쟁이었다. 그림은 청나라 군사가 코사크(Kazak)족의 요새 알바진(lbazin)을 공격하는
모습이다. 러시아 코사크족은 15세기후반에서 16세기 초 러시아 중앙부에서 남방 변경 지역으로 이주하여
자치적 군사공동체를 형성한 농민 집단이다. 흑룡강 일대의 땅을 집어삼키려 러시아의 코사크가 먼저 청국을
집적거렸고 그에 따라 조선 화승총수가 청나라에 원군 파병한 것이 '나선정벌'의 배경이다. 러시아와 청국의
분쟁은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으면서 현재의 국경을 확정짓고 기나긴 분쟁과 적대행위도 끝났다.
북극곰 러시아의 땅 욕심은 중국과의 영토다툼으로 이어졌다. 풍부한 자원을 보유하고 있는 만주 흑룡강(黑龍江) 일대에 진출한 러시아 코사크인은 성을 쌓고 곡물과 광물자원 획득을 경제활동을 전개하자 사사건건 청나라와 충돌했다. 러시아군은 화승총에서 진일보한 수석총(燧石銃: 부싯돌 점화방식)으로 무장해 청나라군은 이미 상대가 되지 았았다.
러시아인은 활동 범위를 넓혀 우수리강 하구를 지나 송화강(松花江) 방면가지 으로 내려왔고, 이에 대항하여 청나라는 군사를 동원하여 격퇴하려 하였다. 그러나 청나라 군이 총포로 무장한 러시아인들에게 계속 연패하였고, 1653년 러시아는 이 지역의 경략을 국가 목표로 삼았다.
러시아는 17세기 유럽에서 시베리아 산 모피가 인기 끌자 모피와 은광, 새 경작지를 찾아 중국의 흑룡강(러시아 측에서는 Amur강)유역을 넘보기 시작했다. 1649년 3월초 흑룡강으로 떠난 러시아 하바로프(Khabarov)원정부대는 다음해 6월 아무르강 하류의 청나라 마을을 습격하고 주민 수백 명을 학살한 뒤 식량과 모피를 약탈하고 러시아 영토에 편입시켰다.
▲ 러시아 연해주의 주도(州都) 하바롭스크 시내의 하바로프
(Yerofey Khabarov, 1603-1671) 동상. 레나 강과 아무르강을
탐험하고 러시아 영토에 편입시킨 코사크 기병대 대장이었다.
말이 좋아 원정이지, 멀쩡한 원주민을 학살하고 땅을 빼앗는
산적 대장이라 해야 옳다. 하바로프의 원정으로 말미암아
러시아가 차지하게된 연해주 하바롭스크(Khabarovsk)면적은
787,600㎢로 한국(남한)의 7.9배 이며 러시아 전체 땅의
4.4%에 해당한다.
하바로프 수로(水路)원정은 1625년 토볼스크(Tobolsk)에서
시작돼 만가제야(Mangazeya)까지 이어졌다. 3년 후에는
원정부대를 이끌고 타이미르(Taimyr) 반도의 동쪽의 헤타강
(Kheta River)에 이르러 1632-1641년 사이 레나강에 도달했다.
하바로프는 1651-1653년에 우르카강(Urka River)이 아무르강
(흑룡강) 강으로 흘러드는 우수리강(Ussuri River) 어귀까지
진격하면서 조선 화승총 부대를 만났고, 식겁하여 달아났다.
청나라 군대가 남하하는 러시아 무장세력에 맞섰지만 기운이 딸렸다. 화승총을 개량한 러시아 원정부대와 전투벌일 때마다 참패했다. 청나라 군부가 대책을 논의하자 병자호란에 참전했던 노장들이 “조선군 화승총부대의 원군을 요청해야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들은 병자호란 당시 비록 조선군을 물리치기는 했으나 김준룡이나 유림 장군이 이끈 조선 화승총부대에 참패당했던 사실을 기억하고 조선군 포수의 뛰어난 방포전술만이 러시아 무장 세력을 막아낼 것으로 여겼다.
청나라 3대 세조(世祖) 황제가 조선 조정에 총수대(銃手隊: 화승총부대) 100명의 파병을 요청했다. 효종 임금은 상전나라의 압력을 거부할 입장도 아니었지만 내심으로 “이 기회에 조선 화승총 부대의 매운 맛을 보여 주어 청나라 간담을 써늘하게 만들어 주겠노라”별렀다.
효종 임금 5년(1654) 정초에 함경도 북병영이 산포수를 모집했다. “무명베 15필주겠다.” 방을 내걸었다. 얼마 안 되는 급료지만 기근이 심했던 때였고 석 달간 단기 파병인데다 승전하면 포상이 따로 있을 것으로 여겨 순식간에 모병 정원을 채웠다.
청진의 함경북병영 우후(虞候: 병마절도사 바로아래 장수)인 변급(邊岌)이 파병부대장을 맡아 지원 병력 52명을 포함한 152명의 화승총부대가 1654년 3월 26일 회령을 거쳐 만주로 진입했다.
변급의 조선군 화승총부대는 무단장(牧丹江) 상류 영고탑(寧古塔/寧安)으로 진군하고 명안달리(明安達哩)가 지휘하는 3,000명 청나라 장졸과 합세하여 자그만 군선을 타고 강을 따라 북상하다가 4월 28일, 혼동강(混同江: 송화강 중류)에서 드디어 러시아 병력과 조우하게 됐다. 조선 범 포수는 청나라 화승총수와 사뭇 달랐다.
변급은 러시아의 신식 수석총과 직접 교전을 피하고 강변에 유붕(柳棚: 버드나무 방책)을 설치하고 그 뒤에 매복하고 기다렸다. 스테파노프(Onufriy Stepanov)가 인솔하는 대소군선 26척에 370명 러시아 무장부대가 강 한가운데에 닻을 내렸다. 그때 범 포수가 일제 사격을 가해 러시아부대를 궤멸 직전까지 몰아붙였다.
대패하여 달아난 러시아군이 “벙거지 전투모(戰笠)를 쓴 머리 큰 조선 병사가 두렵다”고 부들부들 떨었다. 조선군이 쓴 전립은 등나무로 엮고 대나무 테를 두른 소형 삿갓 형태의 등두모(藤兜牟)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변급의 조선 화승총부대는 7일 간의 러시아군 접전으로 패퇴시키고 그해 6월 회령의 두만강을 건너 조선에 개선했다. 한 명의 사상자도 없이 84일간의 흑룡강 장정을 승리로 이끈 조선 화승총부대의 제1차 나선정벌이었다.
러시아는 조선군이 흑룡강을 떠난 다음해에 스테파노프 부대를 다시 흑룡강 유역에 투입해 보복 공격에 나섰다. 청나라 부대는 또 참패했다. 효종 9년(1658)에 청 황제가 다시 한 번 조선군 파병을 요청했다. 이번에는 화승총수 200명을 5개월간 파병해 줄 것을 원했다.
함경 북병영 우후 신유(申瀏)를 파병 부대장 삼고 함경도 산포수 200명과 65명의 지원 병력이 2차 나선정벌 계획을 짰다. 산포수는 3월부터 사격훈련에 돌입하고 5월 2일 회령의 두만강을 넘어 만주로 진격했다.
조선군은 청나라 장수 사이호달(沙爾虎達)휘하에 편입돼 군선에 나눠 타고 목단강을 거슬러 올라 송화강과 흑룡강 합류 지점에서 스테파노프가 이끄는 러시아 원정함대 10척을 조우했다. 청나라 군사가 불화살(火箭)로 선제공격하여 7척의 러시아함선을 불 지르는 동안 조선 화승총수가 러시아군을 조준 사격해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도망친 러시아군이 강변에 숨어들자 조선원정부대장 신유가 청나라 측에 “러시아 함선을 모두 불 질러 궤멸시키자”주장했지만 전리품이 탐난 사이호달은 엉뚱하게도 “서둘러 적 함선의 불을 끄라”명령했다. 그로부터 전력을 재정비한 러시아 함선과 강변으로 피신했던 스테파노프 부대의 반격이 시작돼 조선군과 치열한 사격전을 벌였다. 조선군 8명이 사망하고 부상자 25명이 생겨났다.
그러나 청나라 군사는 110명이 사망하고 200여명이 부상했다. 러시아군은 부대장 스테파노프를 비롯해 270명이 전사하고 10여명이 투항했다. 함선 1척만 겨우 살아남아 러시아군 95명이 승선하여 도망쳤다. 신유의 조선 화승총부대는 4개월에 걸친 흑룡강 장정을 마치고 8월말 회령을 통해 개선했다.
▲ 2차 나선정벌의 주인공 신유장군이 일기형식으로 꼼꼼하게 전과를 기록한 '북정일기'
러시아 원정부대가 조선군 화승총수의 사격망에 걸려 대패했던 사실이 적나라하게 등장한다.
▲ '북정일기' 내용을 그림으로 옮긴 옛 역사자료.
신유 장군의 늠름한 모습과 불화살 공격으로
잿더미가 된 러시아 군선을 묘사하고 있다.
2차례에 걸친 조선군의 나선정벌은 함경도 산포수의 이름을 내외에 떨치는 계기가 됐다. 청나라도 놀랐지만 조선군과 맞붙을 때마다 대패한 러시아도 놀랐다. 효종 임금은 북벌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백두산 범 포수로 구성한 화승총부대라면 청나라를 물리칠 것이라는 확신이 섰다.
그러나 효종 임금은 재위 10년(1659)에 급작스레 승하하셨다. 북벌의 꿈은 선장 잃은 배처럼 추진력을 상실해 채 흐지부지 사그라졌다. 청나라도 건국초기의 어수선함에서 벗어나 융성기에 접어들면서 군사력이 강화돼 조선 조정의 북벌 계획은 이미 실기(失機)하고 말았다.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고중세사사전, 2007.3.30, 가람기획)
한중군사관계사(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조선왕조실록 효종편
기타, 영문판 온라인 Wikipedia
계속 - (11) 강화 화승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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