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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자식들
“똑, 또오로록~~"
셔츠 소매에 붙어있던 단추가 여미려는 순간 떨어져나갔다. 분명 거실 마룻바닥에 떨어져 구르는 소리를 들었건만 허리를 굽혀 떨어진 근처를 아무리 찾아도 감쪽같이 사라져 보이질 않았다.
오기가 발동한 나는 바닥에 엎드려 냉장고 아래에 핸드폰 조명을 비춘다. 뭔가가 분명 있다. 다시 일어나 눈금 없는 플라스틱 긴 자를 가져와 집어넣는다. 전혀 쓰임이 없던 자는 이럴 때 아주 요긴하게 제몫을 다하는 것 같다. 폭탄제거라도 하듯 숨을 죽이고 조심스럽게 반원을 그린다. 머리핀, 바둑알, 고무줄, 쌀알, 검정콩, 빨래집게 등이 등 떠밀려 나온다. 차례로 먼지이불을 등에 지고 나온다. 갖고 있던 본연의 색을 잃고 어둠에서 잠자고 있던 아이들. 얼마 만에 광명을 찾은 건지 그들도, 나도 알지 못한다.
‘안녕, 얘들아! 난 너희들의 주인이었단다.’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간 것은 제각각의 시간들이지만 지금 그들은 내 앞에 생뚱맞게 다 같이 놓여졌다. 나에게서 떨어져 나가기 전에는 분명 제몫을 다하고 있었을 것임은 분명한데 나의 손끝에서 떨어져 나가는 순간 의도치 않게 내 기억에서 사라졌다. 어떻게 그렇게 까마득히 잊어버린 건지 몹쓸 주인인 나는 다시 내게로 온 아이들을 망연자실 내려다보고 앉았다. 말끔하게 쓸어내 보았건만 찾는 아이는 없다. 도무지 찾을 길이 없어 포기를 하고 비슷한 단추가 있는지 반짇고리 통을 가져와 열었다. 색색의 단추 속에서 그 흔하디흔한 흰색 단추는 보이지 않았다. '개똥도 약에 쓸려니 없다'는 말처럼. 몇 년을 모았는지 손바닥만 한 비닐지퍼백의 배가 불룩하다. 마룻바닥에 쏟아 붓고 나서 간신히 비슷한 색에 알맞은 사이즈의 단추가 있었다. 언젠가 쓸모가 있겠지 하고 몇 년을 묵혀놓았더니 오늘에서야 기다림의 끝을 뒤로하고 작은 의미로 내게로 왔다.
흔하디 흔한 그래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것들이 필요의 순간에 없는 경우를 우린 적잖게 경험한 적이 있다. 손지갑 안에 늘 굴러다니던 동전과 노란 밴드고무줄, 실핀…… 등을 애를 써서 찾다가 눈에 띄면 얼마나 반갑고 기뻤던지를 기억하고 있다. 그것도 잠시, 한 순간을 위해 그것들을 고이고이 쟁여두지 않는다. 사물의 쓸모의 여부는 매 순간에 있기에 덩치가 커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 않는 한, 머릿속 지우개는 얄짤없이 지워버리고 만다. 해가 거듭할수록 인간의 기억 주머니는 뭔가를 오래 담아 두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의 상처는 잊고 싶어도 그렇게 오래도록 머문다는 거다. 진짜 잊고 싶은데도 말이다.
아직도 집안 틈새 어디쯤에서 나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나의 것들에게 고한다.
‘부디, 나를 용서해다오! 내가 너희를 선택해 고이 가져왔거늘 매일매일 못 보더라도 행여 내가 잊었다고 해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지어다.’
처음 만난 날을 기억하진 못하더라도 반드시 만날 그날이 있을 것이니. 어둠의 자식들에게 진심으로 고하고 난 그제야 출근을 서두른다. 셔츠 소매에서 반짝이는 하얀 단추가 속삭이듯 바라본다.
‘괜찮아요, 다시 이렇게 왔잖아요.’
가벼운 마음으로 집을 나선다.
발가락, 붉은 꽃 피다
집에서 가까운 온천을 다녀온 후 발가락이 따끔거리며 아려왔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통증이 가라앉지도 않고 더 심해져 돋보기를 끼고 유심히 살펴보니 발가락 열 개 중 대여섯 개가 붉은 물집이 잡혀 있었다. 마치 산수유열매처럼 붉은 빛을 띤 크고 작은 물집들이 계란찜 부풀 듯 부풀어 있었고 손가락으로 살짝 눌렀더니 찌르르 아렸다.
어릴 적에는 겨울이 되면 항상 내게만 찾아드는 불청객 때문에 신발 신는 것도 오래 걷는 것도 불편했다. 근데 몇 해 전에 심하게 동상이 걸린 후 겨울이 되면 혹시나 하는 걱정에 발의 보온과 혈액 순환에 신경을 쓰고 있다. 그나마 다행히도 손은 괜찮다.
요즘 같은 세상, 더위도 추위도 기술 좋은 가전 덕에 별 어려움은 없이 원하는 온도를 유지하며 살고 있다. 실내에서 일하고 바깥 활동도 별로 없는 나 같은 사람이 걸렸으니 놀랍고도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병원에서는 폐경기에 접어든 여성들 중 호르몬의 이상에서도 올 수 있고 혈액순환이나 스트레스에서도 올 수 있다며 바르는 약과 먹는 약을 처방을 해주었다. 병원 데스크의 간호사들한테 조용히 물었다.
“저 같은 사람 있던가요?”
“그럼요, 생각보다 많아요.”
잠시나마 품었던 부끄러움과 속상함이 살짝 덜어지는 느낌이었다.
이번 겨울 극한의 한파가 온다는 일기 예보에 걱정이 앞섰다. 양배추처럼 겹겹이 껴입고 두터운 스포츠 양말을 신고 핫팩 등으로 만반에 준비를 해야겠다.
“마음이 차가운 사람은 손발이 따뜻하다.”
“마음이 따뜻한 사람은 손발이 차다.”
근거를 두고 살펴보자면 일리가 있다고는 하지만 마음이 차다, 따뜻하다는 정도는 객관적인 측정이 불가능하다. 사람마다 혈액순환과 스트레스의 정도가 다르다 보니 신체적인 면을 어떻게 다 설명할 수 있을까. 여하튼 난 따뜻한 손을 가진 사람이 무진장 부럽고 얼어있는 내 발가락이 무진장 안됐을 뿐이다. 뜨거운 샤워기 물로 붉은 꽃 핀 발가락에 하염없이 뿌려본다. 아무런 느낌이 없다.
‘봄기운이 느낄 때 즈음이면 괜찮아질까?’
발가락에 묻는다.
‘내년에도 또 꽃 필지 몰라요. 부디 몸 따뜻하게 잘 살아요!’
발가락에 핀 붉은 꽃들이 나직이 속삭여온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
어릴 적, 여동생과 마주 앉아 노래 부르며 서로의 손바닥을 신나게 마주치는 놀이가 있었다. 점점 빨라지는 리듬을 못 따라오다 제때 손바닥을 못 맞추면 괜스레 눈 흘기곤 하던 때가 있었다. 뭐가 그리 우습고 재미나던지, 수없이 반복하며 깔깔대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손등은 빨갛게 부풀어 올랐고 피멍이 들 때도 있었다.
의미도 모르고 수없이 많이 불렀던 노랫말을 나름의 해석과 함께 살펴본다. 노래 가사의 ‘서쪽나라’는 대체 어디일까?
‘행복의 나라? 희망의 나라? 파라다이스?’
저마다 꿈꾸는 세상은 다르다. 가치관과 욕망의 차이는 미세하고도 다양해서 설명하기는 아주 힘이 든다. 내가 희망하는 삶은 오롯이 품고 있는 마음에서만 존재할까? 돛대도 삿대도 없이 흘러가는 대로 가만히 두면 내가 원하는 그 서쪽나라로 갈까? 갈 수 있다면 좋겠다.
지금 생업으로 하고 있는 일은 남편과 함께 고심하며 선택한 길이고 그 길을 20년 가까이 함께 해오고 있다. 시행착오도 있었고 시련도 있었지만 지금도 하고 있고 앞으로도 10여년 이상 더 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해야만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 앞에서 힘들어 할 때가 있다. 가끔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언제 할 수 있을까하고 푸념을 늘어놓는다. 해답은 내가 갖고 있고 또 작정하고 결정만 하면 될 일인데 쉽사리 내려놓지 못함은 때가 안돼서라는 변명 아닌 변명을 한다. 솔직히 고백하건데 사실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은하수를 건너서 구름 나라로 구름나라 지나서 어디로 가나 멀리서 반짝반짝 비치는 건 샛별이 등대란다. 길을 찾아라.’
나에게 ‘샛별’은 또 무엇일까? 삶을 지탱하는 그 것은 내 속에서 나온 두 딸? 나를 세상에 내 보내준 부모님? 자신을 믿는 나? 삶이 힘겨운 매 순간 내게다 샛별이 되어준 존재는 분명 있었다.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간에 힘든 시간을 견뎠고 또 다른 역경이 와도 잘 견딜 거란 거다.
‘샛별’은 나에게 있어서 무한 신뢰의 나 자신이 아닐까? 그렇게 믿고 싶다. 날이 차가울수록, 공기가 맑을수록 밤하늘의 별은 더 잘 보인다. 오늘도 내일도 밤하늘의 별을 보며 하루를 추스르고 지금의 삶에 감사하며 남은 내 삶을 더욱 더 사랑하며 살아야겠다.
민들레 꽃씨여
봄 햇살 품은 아파트 작은 화단, 땅의 힘찬 기운 빌려 앙증맞은 봄꽃들이 둥지를 틀었다. 고스란히 느껴지는 봄의 진심에 가던 걸음 멈췄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폴폴 날고 있는 민들레 꽃씨 뭉치. 엄지 손톱만한 크기인데 대체 작은 홀씨 몇 개나 모여 눈에 뛸 정도의 크기가 된 걸까? 갑자기 궁금해지고 호기심이 발동했다. 나는 잡아서 제대로 살펴보고 싶은 마음에 잽싸게 그 녀석들을 쫓았다. 잡힐 듯 말 듯 하다 더 멀리 더 높이 달아나 버렸다. 허공에 허우적대던 부끄러운 내 손을 누가 볼세라 냉큼 거둬들였다. 저 아이들은 바람에 한참을 날다 바람이 멈추면 어느 풀숲에 내려 앉아 노란색 꽃을 피울 것이다. 바람이 실어다 주는 그 곳은 가본 적이 없는 낯선 곳일 수도 있고 생각지 못한 곳일 수 있다. 척박한 곳일 수도 있고 다행히도 햇살이 찾아와 주고 이름 모를 들꽃과 들풀 사이일 수도 있다. 나는 민들레 씨앗의 비행을 보고 있자니 대학 졸업 후 제 일을 못 찾고 있는 내 딸애들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큰 애는 금속공예과를 졸업하고 인테리어 회사를 비롯해 몇 군데의 직장을 거쳐 곧 조그만 가게를 연다. 가게 위치선정을 위해 발품을 팔았고 메뉴 개발을 위해 수없이 만들기를 반복하고. 그렇게 5개월이 지났다. 완강히 반대하던 남편을 사업 계획서를 준비해 와 설득했다. 안정되고 미래가 보장된 직업이 요즘은 없다고는 하지만 굳이 힘든 자영업을 택한 딸애를 보고 있자니 만감이 교차했다. 크고 작은 시련을 어떻게 극복해낼까 하는 노파심을 부모인 나를 비롯해 본인도 항상 진행형으로 마주 할 것이다. 우리 부부가 20여 년간 해 오고 있는 귀금속점을 함께 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일찌감치 대학 진학을 그쪽으로 권유했었다. 부모의 바람은 그냥 스쳐가는 바람에 불과 한 걸까? 그 동안 닦아 놓은 이쪽 일을 기초부터 안정적으로 배워 함께 하면 누구보다 앞서갈 수 있을 거라 노래하듯 얘기했건만. 본인이 선택한 그 길에 대해 최선을 다하길 바랄 뿐이다.
작은 애는 취준 2년째다. 바른생활, 규칙적인 생활, 본인관리 등 입댈 것 없이 내 눈엔 완벽에 가까운 딸이다. 큰 애가 자유분방하다면 작은 애는 규율과 질서 그리고 계획에 맞춰 어느 집단에서 정말 필요로 하는 재원임에도 불구하고 인턴만 몇 번 갈아타고 있다. 면접까지 가고도 안타깝게 고배를 마신 적이 몇 번인가? 한 동안 어디다 원서를 냈는지, 언제 시험을 치는지를 함구 하더니만 실패도 반복하니 내성이 생겼는지 이젠 대놓고
“시험 치러 가요.”
“아쉽게도 3점 차로 떨어졌어, 전보다 성적이 좋아요!”
선배가 혹은 친구가 어디 취업했는지, 실패해서 다시 취업 준비한다느니 이젠 묻지 않아도 얘기해준다.
“올해는 뭔가 될 것 같다.”
얼마 전 통화에서 작은 애가 한 말인데 막연히 나를 위로하는 말 같아서 왠지 가슴이 먹먹했다.
남편은 애들 앞에서는 태연한 척하며 파이팅을 외치지만 애들의 처해진 상황을 나 보다 훨씬 안타까워한다. 더욱이 친구들과의 모임을 다녀올 때면 더더욱 힘들어한다.
“쉽게 갈 수 있는 길을 두고 어렵사리 가는 바보들…….”
“내가 그 만큼 뒷바라지 해줬는데…….”
이해를 하면서도 화가 난다. 지금 20대 중반을 지나고 있는 두 딸을 좀 더 넓은 아량과 인내로 지켜 봐주면 좋을 텐데. 남들보다 몇 년 늦게 간다고 인생이 실패했다고 감히 누가 손가락질을 할까. 일찍 샴페인을 터트린다고 그 영광이 오래 지속될까. 아무도 모른다. 인생의 성공은 본인 스스로가 판단하는 것이다. 누가 뭐래도 자신이 하는 일에 만족하고 그 삶에 행복하다 느낄 수 있다면 뭐든 어떠하랴. 그것으로 그만일 텐데 말이다.
민들레 꽃씨 뭉치가 눈앞에서 어른거린다. 너무 오래 바람타고 헤매지 말고 살포시 내려앉은 곳이 양지 바른 곳이길 바라고 부디 안전하게 뿌리 내리고 잘 살길 바란다.
곧 사랑하는 두 딸도 제 갈 길 찾아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날 것이다.
시장 블루스
내 어릴 적 봄 개교기념일쯤으로 기억을 한다. 점심 설거지를 끝내신 엄마는 집에서 좀 멀리 떨어진 시장으로 삼남매와 함께 나들이 삼아 집을 나섰다. 버스로 대여섯 정거장 정도의 거리면 꽤 먼 거리였지만 나와 동생들은 뭐가 그리 좋은지 엄마가 건넨 장바구니를 양쪽으로 잡고 콧노래를 부르며 씩씩하게 앞서 걸었다. 엄마는 남동생 손을 잡고 뒤따라 오셨다. 주말과는 달리 시장은 복잡하지는 않았지만 저녁 찬거리를 사러 일찍 나온 사람들이 제법 보였다. 엄마는 부지런히 우리들을 이끌고 이곳저곳을 다녔다. 골목골목을 꿰고 있는 엄마는 빠른 걸음으로 앞장 서셨고 그 뒤로 오리새끼 줄 서서 가듯 뒤를 따랐다. 옷가게든 채소가게든 어디서든 엄마의 흥정은 주인장과 줄다리기를 했다. 상인들과 실랑이 하는 엄마의 모습이 어찌나 창피하던지 골목 어디로 숨고 싶었다. 흥정을 마친 엄마의 모습은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 모습처럼 용맹스러워 보였다. 에누리가 만족했던 모양이다.
엄마와 삼남매는 시장 중간쯤에 주전부리 파는 곳에 엉덩이가 바닥에 닿을 듯 한 나지막한 의자에 앉아 자리를 잡았다. 시킨 납작 만두와 비빔당면을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살짝 모자란 감은 있었지만 집에 가서 시장에서 산 오징어를 넣고 김치 부침개를 해준다는 엄마의 말에 자리에서 얼어났다. 그날은 아버지가 회사에서 야근하셔서 김치 부침개로 저녁을 대신했다.
모처럼 다니러 온 작은딸과 오랜만에 ‘서문시장’에 다녀왔다. 딸과 서문시장에 다녀 온 지가 어느 덧 20년이 된 것 같다. 그때만 해도 살아있는 토끼, 오리, 거위, 닭, 강아지 등을 볼 수 있었고 미로 같은 시장골목 사이사이에 크고 작은 리어카에 별별 것을 다 팔았는데. 20년이 지난 지금도 달라진 것 없이 그랬다. 구역별 정리가 좀 더 되어 있었고 지나가는 길이 살짝 넓어진 것 말고는 똑같았다. 칼국수, 칼제비, 국수, 호떡, 단팥죽, 만두, 술 빵 등……. 먹을거리들도 그대로였다. 간혹 새로운 먹을거리들도 있긴 했지만 내 눈에 들어오진 않았다. 예전에 먹던 것에 더 눈이 갔고 그 곳에 발걸음을 멈췄다. 딸과 점심으로 칼제비와 국수를 먹고 호떡과 팥빙수에 이것저것 사먹으며 돌아다녔다. 딸과 나는 처음 보는 사람과도 옹기종기 붙어 앉아 지난날의 맛과도 비교하며 끈임 없는 수다를 떨었다. 두어 시간을 그러고 나니 발바닥도 아프고 토요일이라 많은 인파로 지치기 시작했다. 힘에 부쳐 2층은 엄두가 안 나서 1층 실내를 돌아다녔다. 냉방으로 한결 다니기가 나았지만 역시 만만찮은 인파로 편하지 않았다. 어릴 적 아이들 신발이며 옷 파는 가게의 위치는 변함이 없었다. 애기를 안고 물건을 흥정하는 젊은 엄마들을 보니 괜스레 옛날 생각에 미소가 지어졌다.
'나도 저랬지'
하며 안고 있는 아기한테도 절로 눈이 갔다.
사람과 사람은 눈을 보고 손끝과 마음으로 정을 나눌 수 있어야한다. 예전의 시장과 지금의 시장은 규모나 형태 등은 세월 따라 변해도 시장은 그나마 사람 냄새가 가득하고 정이 넘친다. 국숫집 사장님이 정감 있는 목소리로
“더 줄까?”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보통으로 시켜도 곱빼기 양으로 줄 요량이시다. 맛보라며 다른 메뉴인데도 기분 좋게 덜어 건넨다. 코로나로 몇 년을 비대면 으로 살았다. 시장은 오죽 했을까? 잘 견디며 이겨낸 시장의 사장님들이 찾아온 손님은 또 얼마나 반가울까?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사장님의 빠른 손놀림에 넋을 잃고 구경을 한다. 이내 펄펄 끓여 나오는 국수며 수제비를 부지런히 먹는 손님들. 뒷손님에 대한 배려일 수도 있고 시장에서는 왠지 그렇게 빨리 먹어야 제 맛인 냥 했다. 후루룩 후루룩 모처럼 신나게 면치기를 한다. 뜨거운 국수를 입에 넣으니 손님들의 이마에도 국수를 끓여 내는 사장님 이마에서도 송골송골 땀이 맺힌다.
두 모녀의 시간여행지인 시장에서 내 어릴 적 이야기와 딸애 어릴 적 이야기로 추억을 소환해 냈다. 늦봄의 따사로운 햇살을 이고 몇 시간을 골목을 헤매며 보물찾기 하 듯 하나하나 찾아낸 그 순간들이 두 모녀의 가슴에 폭 안겼다. 살아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행복한 이 순간이 얼마나 좋은지 딸과 손을 꼭 잡고 시장을 나섰다. 구석구석 다니지 못한 아쉬움이 컸다. 언젠가 다시 오자며 가져간 큰 가방이 부품해진 것을 보고 흐뭇해했다. 착한 가격에 구매해서도 흡족했지만 그 안에 서너 시간 동안의 또 다른 추억이 새록새록 쌓여서 일 것이다. 나는 백화점 쇼핑도 나쁘지 않지만 시장 나들이 특히 재래시장 나들이가 유독 설레는 이유는 엄마와 함께여서가 아닐까 싶다. 훗날 내 딸이 내 나이가 됐을 때 시장 나들이에 대한 추억이 나처럼 따뜻하게 남아있길 바란다.
우기(憂期)
숨 가쁘게 내리던 비가 그쳤다. 샤워기의 수압 좋은 물줄기처럼 퍼붓다가 금세 가는 빗줄기로 숨고르기를 한다. 날씨는 하루에 몇 번이고 변덕을 부린다. 누구처럼.
나는 요즘 사막의 신기루처럼 갑자기 나타났다 식어버리는 열감 때문에 낭패를 보고 있다. 손님과 미팅 중에 인중에 땀이 맺히고 심할 때는 머리 밑이 젖을 정도로 땀이 난다. 연배가 있는 여자 손님은 진지하면서도 구체적으로 경험담을 얘기해준다. 시작한 지 오래되었지만 아직 진행 중이고 정도는 많이 약해졌지만 끝나지 않았다며 동병상련이라며 나를 다독이신다.
‘갱년기’는 긴 장마 같다는 생각을 한다. 일기예보에서 7월이 되면서 장마가 시작된다고도 예보했고 지역별 강우량은 물론 기온, 풍속, 풍랑 등도 관심만 있으면 누구나 알 수 있다. 하지만 ‘갱년기’는 시작과 끝이 사람마다 다르고, 정도도 차이가 있다 보니 장마보다 훨씬 예민하고 까다롭기 그지없다.
아파트 베란다로 보이는 나지막한 산들이 운무를 걷어내고 기괴한 입김을 토해낸다. 산허리가 이번 비로 한 뼘이나 굵어져 보인다. 얼마전만해도 최악의 가뭄이라며 산천이 타들어 갔었는데 긴 장마 중 집중호우, 극한호우로 인해 물이 휩쓸고 지나간 그 곳에는 시름과 통곡의 소리가 들려온다. 피해가 적거나 아예 없는 지역이 있는가 하면 인명피해는 물론 생활터전인 가옥, 농경지, 도로 등의 유실은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4~5년 전 남편이 먼저 시작한 갱년기는 우울증 약을 복용할 만큼 심리적으로 많이 힘들어 했다. 그 무렵 남편은 어깨수술과 금연을 병행했고 금단현상이 겹치는 바람에 육체적, 정신적으로 말로 표현 못할 정도로 많이 버거워했다. 좋아하는 운동을 쉬어야하고, 쉬는 동안 바쁘게 다니던 모임의 횟수가 줄고 하다 보니 활동적인 사람이 그러지 못할 경우의 부작용은 상상초월이었다. 남편은 베란다에서 뛰어 내리고 싶은 충동까지 들었다고 했다. 아찔하고도 무서운 그 이야기는 솔직히 내가 겪어보지 못해서인지 그 당시 크게 공감을 못했다.
“왜 저러지? 참, 유난스럽네.”
남편의 한숨과 밤새 뒤척임을 이해를 못했다. 단지 남편 때문에 피곤해지는 상황에 짜증이 났다.
이번 장마로 피해를 보고 상처 난 많은 곳에 대해 ‘인재’라며 안타까워하고 있다. 무분별한 자연 훼손과 안일한 대비, 늑장대응을 두고 정부는 책임을 미루고 있다. 천재지변을 두고 일어날 상황을 예측하기는 힘들지만 일기예보에 힘입어 사전에 사람의 안전에 대해서 만이라도 아낌없이 노력해야 되는 게 아닌가 싶다.
막상 내가 남편 뒤를 이어 갱년기라는 터널에 들어서니 뜻밖의 복병인 열감과 피로감, 무기력에 당혹스럽고 남편의 상황을 비로소 이해를 하게 됐다. 다행히 난 정신적면에서는 크게 힘겹지가 않으니 견딜만하다. 작은애가 1년 전부터 보내오는 갱년기에 도움이 되는 건강보조식품도 한몫 했을 것이다. 남편을 보면서 갱년기의 증세를 미리 파악을 좀 했기에 보다 나은 슬기로운 갱년기 생활을 잘 하고 있지 않나 싶다. 갱년기는 여자의 전유물이 아닌 인간의 생로병사의 일부분으로 겸허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심각해하지도 말고 유난떨지 않기로 말이다.
어제 뉴스에서 장마가 끝이 났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퇴근이 가까워질 무렵 호우경보문자가 날아오고 천둥 번개를 동반한 비가 한차례, 아니 여러 차례 지나갔다. 끝나도 끝난 게 아니었다. 완경한줄 알았는데 며칠 전 다시 시작한 생리처럼 당혹스럽다. 멈춰버린 생리는 꼭 해야 하는 숙제 같다. 안 하면 왠지 묵직하고도 뻐근한 몸 상태에 화가 나고, 막상하게 되면 신경써야할 부분 때문에 귀찮고.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요망한 날씨와 나의 생리는 닮은 구석이 있다.
‘갱년기’가 사라지는 어느 날이 분명 올 것이다. 완경의 그 날도 조만간 올 것 같다. 늙어가는 것에 너무 연연해하기 보다는 긍정적으로 세상을 이해하려 애쓰고 나름의 생활에 만족하며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살고 싶다. 장마 뒤엔 폭염의 연속, 열대야의 기습이 예상은 되지만 그래도 가을은 저 멀리서 여름을 잘 견디고 곧 만나자며 손짓하고 있지 않을까. 시간의 흐름이나 자연의 섭리는 인간의 불가항력이지만 순리를 거스르지 말고 자연스럽게 수긍하며 지금의 내 모습을 사랑하자.
어땠을까?
누구나 선택에 있어서 항상 자유롭지 않다. 짧게는 몇 초 동안 길게는 몇 달을 선택 앞에서 고심한다. 아니 더 이상의 시간을 필요할 때도 있다. 선택에 있어 진행 과정은 생략하고 결과에 주목을 한다. 결과를 예측할 때는 스스로의 경험과 긍정의 확신도 있지만 신뢰하고 있는 누군가의 조언이 조미료처럼 첨가될 때가 있다. 신뢰하고 있는 누군가는 나보다 연륜과 경험이 있고 같은 고민을 했을 선배 혹은 같은 선택의 유경험자를 조력자로 삼는다. 물론 그들이 성공 가도로 달리고 있다면 더 의지가 되고 간혹 맹목적으로 따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의 책임은 오직 본인 몫이기에 그들 또한 신중을 다해 조력하겠지만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을 함께 하지 못한다. 그들 역시 신이 아닌 이상 100%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학력고사를 앞둔 어느 주말, 저녁상을 물리고 조용히 나를 안방으로 부른 부모님, 그 당시 힘들어진 가정 형편으로 전문대를 권하셨고 나는 그 순간 솔직히 큰 고민 없이 그러겠다고 했다. 섭섭하기도 하고 가고픈 대학을 포기하기가 내심 내키지 않았지만 부모님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당연한 선택이었다. 대학진학 후 내내 장학금 받으며 누구보다 알차게 보냈다. 졸업을 하고 취업을 준비하고 있을 무렵 신문사에 3차 면접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 교수님 추천의 회사와의 사이에서 갈등을 했다. 결국은 교수님 추천회사를 포기하고 신문사 쪽으로 택했지만 입사로 이어지지 못했고 집 가까운 미술학원 강사로 취업을 했다. 진학운과 취업운은 나의 선택이 크게 빛을 보지 못했다.
남편이 결혼하자며 프러포즈를 한 후 결혼까지는 넉 달이 안 걸리고 초고속으로 이어졌다. 무슨 마음으로 선뜻 그러자고 했는지 지금도 모를 일이지만 얼결에 내린 선택이 30년의 결혼 생활로 채워가고 있다. 그 사이 천당과 지옥을 여러 차례 오가며 다시는 안 볼 것처럼 싸우고, 미워하며 아무 일 없듯 화해하고 살고 있다. 함께 같은 일을 한 지도 20년이나 됐다. 반대 성향을 가진 남남이 서로의 조력자로 같은 곳을 바라보며 함께 하는 '부부'로 산다는 것을 난 감히 이렇게 표현한다.
‘기적’이라고. 짐작컨대 누군가의 일방적인 양보가 아닌 타협점을 찾으려 부단히 애를 썼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서로의 선택에 최선을 다하며 노력했기 때문이라 생각이 든다.
나는 중요한 선택을 해야만 했을 때 확신을 갖고 한 적은 몇 번이나 될까? 손가락으로 꼽으라면 제대로 꼽을 수 없다. 매번 수없는 망설임과 미뤄 짐작할 수 없는 그 답답함에 떨고 있을 때도 겉으로 태연하게 침착함을 잃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라고나 할까? 여하튼 나는 어느새 난 쉰 중반이 되었고 또 어느 틈에 내 두 딸의 조력자로 오늘을 살고 있다.
‘만약 내가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해보면 가 보지 않은 길에 대해 엉뚱한 상상도 해보지만 그래도 내 선택이 옳았다고 위로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탁월한 선택이라며 스스로를 토닥인다. 나중 좀 더 지나 지금을 돌이켜 볼 때
‘그 때도 잘 했고, 지금도 잘 해내고 있고 어느 선택에도 잘 할 거야’
하며 이야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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