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방 저 방을 정신없이 돌아 다니고 있었다. 마침내 어느 길다란 창구가 이어진 곳에 줄 서며 기다리고 있었다. 내 차례가 되어 그 창구에 앉아 있는 교수님의 제시해 주는 자료를 받아 연세대 시험 답안지에 앞 뒤로 적어 가고 있었다. 모든 일은 잘 준비된 상황이었다. 이제 집에 가서 쉬어야 겠다고 다짐하고 그 곳을 빠져 나왔다. 그 교실을 나와 걸어가고 있는 중에 송*준 선배를 만났다. 서울대 법대 출신이자 고시 낙방하고 다시 연대 대학원에 시험 치러 온 에스비에프 출신 송 형을 만나 일상의 대화를 하며 햇살이 따갑게 내리 쬐는 백양로 길을 내려가고 있었다. 집에 가려다가 송 형이 세브란스 식당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따라서 식당 안으로 들어 갔다. 식사나 같이 하자고 했던 탓이다. 식당 계단으로 들어가는 순간 내 뒤를 어느 여학생 두 명이 땀을 흘리며 무엇인가를 들고 오다가 뒤 돌아보는 나와 마주쳤다. 그 중 한 명은 박*란 자매 아닌가. 에스비에프 동료이자 이대에서 열심히 뛰던 후배였다. 그녀를 인식하기가 무섭게 *란 자매가 나를 보더니 큰 소리로 불렀다. 무척 반가워 하면서 던진 외침은 ‘베드로!’ 였다. 나도 응답했다. ‘베드로!’ 라고… ”
1981년도 봄이 지나는 현장에서 사진 한 컷 처럼 저의 기억의 뇌세포에 저장된 꿈의 한 토막입니다. 성향원의 광풍이 지나면서 저에게 밀려오기 시작한 꿈의 대화는 거의 그 해 전체를 관통해 갔습니다. 거의 매일 한 편 아니면 두 편 이상의 옴니버스한 꿈의 이야기들이 그렇게 선명하게 기억되던 때는 없었습니다. 그 귀한 꿈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아 잠에서 깨자마자 눈을 감아야 했고 이성적 뇌리에 다시 담아내는 인화의 과정을 거쳐야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일기장에 기록하는 습관이 오랜 기간 계속되었습니다. 정 선생을 만날 때마다 그 꿈들의 해몽이 필요했기에 저는 꿈을 적은 노트를 언제나 귀하게 간직해 갔습니다.
그 무렵 삼선교의 성향원에 남아 있던 인원은 모두가 손에 꼽을 정도의 인원이었습니다. 김 기희, 안 구현, 서 인*, 김 형만, 박 원휴, 김 경천, 전 종*, 나 *흥… 물론 김 기희 자매의 언니와 어린 두 여동생들도 주일날에는 꼭 예배를 드리러 오곤 했던 시절입니다. 조직을 생각하기 전에 말씀이 귀하게 전달되던 때였고 영적인 체험은 그 말씀의 위력에 대한 강한 힘을 덧 입혀 주었던 때였습니다. 머리로 느껴지던 선생이 아니라 가슴과 영적인 느낌으로 밀려오던 선생이었던 때였습니다.
치열한 논리의 세계에서 이제는 심정의 세계로 들어가던 세상이었던 것입니다. 한 컷 한 컷의 영성의 전달은 말씀이 주던 이성적 판단에 강한 동기부여를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학교의 조교역할을 담당하고 있던 때였지만 하루의 일과가 끝나면 어김없이 삼선교에 갔습니다. 8번 버스를 주로 이용하여 금화터널을 빠져나가면서 내린 나폴레옹제과점과 삼선시장으로 둘려 올라가던 그 길은 퇴근길이자 출근길이며 언제나 신앙의 고백을 골고다의 언덕처럼 다짐하며 가던 길이었습니다.
간단하지만 저는 꿈을 말하면서 하루의 보고생활이 시작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전연 생각 지 못했던 장면을 그대로 이야기하면 선생은 과거의 상황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해몽을 했고 어느 꿈에 대해선 현재의 진행상황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간혹 미래의 일들에 대해서도 평가를 하기도 했지만 워낙 지난 광풍의 힘이 컸던 지라 주로 과거와 현재의 상황에 대한 일들로 해몽이 이루어져 갔습니다. 26년의 시간적 간극에도 변색되지 않고 진하게 긁혀진 검정 색 만년필로 정돈된 위의 꿈 내용은 1981년 4월 24일 금요일에 기록된 것입니다. 꿈의 상황에선 에스비에프가 여전히 등장하고 있고 그 안에 나오는 인물들도 여전히 저의 신앙의 고향인 갈대아 우르를 상징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꿈에선 회권이 이름이 나오지만 여기선 생략된 채 아련한 추억 속의 여학생인 박*란 자매가 언급되는데 저를 베드로라고 부르는 장면이 이 꿈의 압권입니다. 이십세기 전의 예수님의 제자인 베드로의 호칭 건은 누구에게 상담할 건이 아니라 저 스스로 현재의 그 삼선교의 역사가 어떤 역사인지를 자각시키는 가장 확실한 꿈의 메시지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저 중국 대륙 안산의 감옥에 있는지 아니면 유치장에서 여전히 조사를 받고 있는 지는 알 수 없지만 현재의 인간 정명석이 정확하게 26년전의 삼선교 시절에는 다른 사람의 말로 증언되는 메시아가 아니라 저 자신이 확실하게 증언할 수 있었던 심정의 그리스도였습니다. 연세대 로고가 찍힌 그 당시의 대학노트 전체를 물 짜내듯이 꽉 짜낸다면 선생님은 다시 오신 예수님이자 재림 그리스도였다는 말만 걸러질 따름이었지요. 광풍으로 섭리를 떠나갈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었지만 영적 은혜의 순간은 저를 그 곳에 머물게 했던 것입니다.
남은 동료들의 심정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필설이 필요 없지요. 로마병정처럼 아니면 게르만 군단의 장군처럼 앞장 서던 안 구현 형제는 말할 필요도 없었고 하늘의 신기가 놀랄 만큼 강하게 역사하던 김기희 자매와 그녀의 두 자매들의 영성의 은혜는 정 선생을 달리 생각할 여지가 없게 했던 시절입니다. 그 시절의 선생님, 달리 표현하자면 이십세기의 랍비께서 오늘의 추한 성추행범으로 중국에 잡혀 있게 될 줄을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거대한 성의 욕망에 사로잡힌 자를 수면에 떠오르지 아니한 빙산의 한 각처럼 보이지도 않던 그 허점을 어찌 알 수 있었겠는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하늘이 세운 자들이 이런 지경에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역사공부가 이렇게 어려운 지 새삼 느끼는 순간입니다.
싱그러운 봄바람처럼 영의 바람은 불었습니다. 창문이 다 깨져버린 성향원의 이층에는 정선생의 말씀도표를 새롭게 그리겠다고 전도된 최*식 청년이 작업실로 쓰게 되었지만 그 청년의 진실성은 그의 말처럼 그리 일치되어 있지 않은 듯 보였습니다. 정 선생은 자신이 받은 말씀의 도표를 멋진 그림과 어울리게 그리고 싶었고 화가라고 등장한 그 청년은 그 일을 자신이 하겠다고 했지만 그가 남긴 유일한 작품은 환상을 그린 그림뿐이었기 때문입니다. 낙성대로 이사 다닐 때까지 교회 이삿짐에 함께 운반되곤 했던 그의 그림은 지금 어디에 전시되어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초현실주의자 샤갈의 작품이 연상되는 그림이었습니다. 그는 가끔씩 들렀고 그림도구까지 정 선생은 그에게 사주었지만 그는 말씀의 도표와는 상관없는 초현실주의자의 작품만을 그려갔던 것입니다. 나중에 말씀을 전하며 정 선생은 그 최*식 형제의 마약복용을 의심하기도 했습니다. 가끔씩 성향원에 들른 그는 성향원의 뒷 뜰에 심겨진 양귀비에 대해 그토록 애착을 갖고 신경 쓰는 모습이 정 선생의 예민한 감각에 그대로 걸려 든 것입니다. 그래도 정 선생은 예수님의 말씀에 의존하여 어떻게 든 그 형제를 인도해 보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정 선생은 다시금 정신을 차려, 전도를 하겠다며 냉수마찰을 하고 단벌 양복으로 정장을 하고 007 가방을 들고 교보문고로 나가곤 했습니다. 안 구현 형제는 몇 개월 전 정 선생에게 자신이 입고 있던 버버리 레인코트를 헌정했었는데 선생은 그 코트를 걸치고 전도현장에 직접 나가는 본을 보이고 있던 것입니다. 그 모습은 전도에 대한 무언의 메시지였습니다. 한 동안 전도가 이루어 지지 않았고 이미 남은 자들 역시 전도의 어장을 잃고 있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모든 인맥의 커넥션은 끊어졌고 일단은 모두가 나가서 길거리든 버스 안이든 전도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하늘의 지상 명령이었던 셈입니다. 그래도 아침마다 정 선생은 교보문고에 나가 전도의 본을 보인 결과 어느 자매를 인도했습니다. 그녀는 세일즈 여성이었던 것 같습니다. 삼선교에 와서 정 선생의 말씀을 잘 듣고 있었습니다. 긴 머리칼에 늘씬한 여성이었는데 언제나 가죽 서류가방을 꼭 지참하고 말씀을 경청하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어느 날 학교에서 조금 일찍 나와서 삼선교로 갔습니다. 오후의 긴 햇살이 삼선교의 낡은 건물에 한없이 쏟아지던 때였습니다. 금이 죽 내려진 건물의 회벽이 군데 군데 빗살무늬 토기처럼 갈라졌던 그 건물 안에는 무언가 심상찮은 일들이 일어난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이 층의 창문에 비해 아래 층 특히 긴 낭하의 강단이 있던 교실의 창문은 건실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아래 층의 창문이 깨져 있었습니다. 의자들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고 무슨 격투가 일어난 듯이 유리 조각들이 흩어져 있었습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나*흥 형제가 술 취해 들어와서는 소주 병을 깨고 날카로운 칼을 들이대며 정 선생에게 대들었다고 합니다. 정 선생은 대화가 통하지 않자 급하게 피해갔고 마치 희화적인 상황으로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그 예배실 가운데 난로와 긴 탁자를 중심으로-처음엔 나 형제가 정 형제를 쫒아갔는데 늘 자신이 특공대 출신이라는 것을 강조한 터라 상황이 역전되어 제 삼자가 보면 정 형제가 나 형제를 쫒고 있는 형국이었다고도 함- 쫒고 쫒기는 상황이었답니다. 그 현장의 증인들은 김 경천과 박 원휴 두 형제가 있었고 말씀을 듣던 그 자매도 있었답니다. 그 자매를 내 놓으라고 으름장을 놓는 나*흥 형제의 난동에 선생을 비롯한 두 명의 형제들은 기가 질려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불한당 같은 깡패의 모습을 본 적이 아마 난생 처음이었을 것입니다. 전도 초기부터 정 선생과 숙식을 같이 하던 김 경천 형제는 선생의 경호원으로서의 임무-정 선생은 언제나 필요에 의해 임무를 주던 습성이 있었음-를 제대로 못한 것으로 침울해 있었습니다. 더욱이 대학 일학년이던 경천 형제는 워크맨을 난동 부리던 형제에게 빌려주고 받지 못한 건으로 더욱 심정이 상해 있었던 것 같습니다(김 경천의 간증 참고). 유리병을 깨며 자신의 팔에 피까지 흘린 그 형제는 씩씩거리며 분을 참지 못해 고함을 지르며 난동을 부리다가 결국은 자기 풀에 꺽여 성향원에서 사라져 갔습니다. 아마 그 자매가 다독거리며 나갔는지 그 후 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층에는 대전출신 서울대 송*옥 자매의 부모가 올라와 살게 되었습니다. 다 깨진 유리창이 유난히 많이 있던 이층이었지만 그래도 살려는 의지와 하늘아래의 거처할 곳이 있다는 신념은 그 곳을 보금자리처럼 만들 수 있었던 듯 싶습니다. 하얀 보름달처럼 예쁜 그녀의 얼굴이 달빛처럼 빛나 보이진 않았습니다. 화사한 옷차림을 했어도 말씀에 대한 의심이 많아서 였는지는 모르지만 얼굴엔 수심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녀 아버지는 정신적으로 그리 건강하지 못해 정 선생의 기도를 받기 위해 대전에서 올라온 것이었습니다. 그녀의 가족사에 대한 자세한 내막은 잘 알 수 없었지만 이 층에는 그녀와 그녀의 부모가 있었고 그녀는 자연스럽게 애천의 말씀을 쉽게 접할 수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안 구현 형제는 같은 서울대의 송*옥 자매를 잘 대해주며 섭리적 위상에 대해 잘 설명해 주었어도 화사했던 그 해 봄 볕 같던 그녀는 언제나 고개를 갸우뚱하며 검지 손가락을 자신의 머리 옆으로 갖다 대고 이해가 되지 않는 표정을 짓곤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녀의 그 특이한 표정은 안 구현 형제와 김 기희 자매의 타고난 연기력으로 정 선생 앞에서 재현되곤 했습니다.
조금 전 그것이 알고싶다 프로그램을 보며 정 선생의 미친 얼굴을 다시 보니 26년 전의 그녀와 정 선생은 썸씽이 있었던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강하게 들어옵니다. 지금은 틀림없이 그 짓을 정 선생이 했을 것이라고 믿지만 그 당시는 안타깝게도 그런 의혹의 눈길을 주지 못했습니다. 하나님만이 알고 계신 일이고 신촌 일번과 이번이 분명 그 내막을 알고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저는 신입생의 어리버리한 촌티를 벗어버리지 못한 처지였으니 말입니다. 온전히 저에게 오신 하늘의 강한 영감의 힘으로만 전진해 갈 때였으니까요.
“나는 부산에서 훈련을 받게 되었었다. 종* 형제가 등장하여 빠르게 달리고 있던 기차 안에서 어린 듯하지만 깔끔한 복장의 여중생에게 말을 건네며 이것 저것 물었는데 그녀는 내 사무실에 근무하는 함양 같았다. 그녀도 역시 부산으로 내려가야 한다고 해서 내려가는 중이었고 종* 형제가 이미 전에 전단지를 뿌려서 전도된 학생이었던 것이다.”
- 꿈의 대화중…이 꿈에서는 예비역 육군 대장 사령관이 등장하며 부산에서 훈련 받게 되어있는 나에게 굳이 부산까지 갈 필요 없이 서울에서도 훈련 받게 되었으니 그리하라는 내용의 꿈이었습니다.-
그 무렵 성향원의 봄은 초여름의 한 날로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한 자매가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송*희 자매였습니다. 이대 재학중인 자매였습니다. 나중에 알려진 바로는 전*휘 형제가 정 선생이 과거에 만들어 놓은 와 보라! 전단지를 갖고 이대 앞에서 무조건 돌렸는데 그 무렵 그 전단지를 받아 든 여학생이 바로 고 송*희 자매입니다. 정 선생은 귀한 보화를 모시듯이 전화를 받고 성향원의 예배실에서 심혈을 기울여 말씀을 전했습니다. 대학 운동권 서클에 몸담고 있었던 듯 했습니다. 마침 그녀가 처음 성향원에 온 날은 오후에 저도 학교 시험이 일찍 끝나게 되어 성향원에 방문했습니다. 화창한 날이었고 시원한 바람마저 불어왔습니다.
눈 빛이 깊었고 아름다운 눈이 불빛처럼 반짝였던 분입니다. 금방이라도 눈에 고인 물이 넘칠 것만 같았던 그 자매님은 정말 열심히 공부했고 얼굴빛은 날이 갈수록 빛났습니다. 말수가 별로 없었지만 웃음이 흘렀고 영혼이 정말 기뻐하듯 하였던 기억입니다. 그 후에 친구를 바로 연결시키고 같이 공부하게 되었는데 그 자매는 아직도 젬스에 남아있는 배혜* 자매입니다(애천 역사 참고). 그 후 송*희 자매의 연결로 같은 학교 운동권 서클 회장 출신인 김*경 자매도 연결시키고 여하튼 조용하던 삼선교는 들썩거리고 있었습니다. 그 동안 정 선생의 식사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했는데 *희 자매와 *원 자매의 등장으로 최소한 점심거리는 해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는 사이에 장마가 시작되고 전자측에서 연결된 장 재형씨가 정 선생을 통해 그 해 여름에 새로운 기독학생 모임을 만든다고 하며 추천된 사람이 김형만, 박원휴, 김경천이었습니다. 이 셋은 청평의 수련원에 다른 한 명과 함께 장 재형씨와 함께 춘천을 거쳐 배를 타고 청평의 그 유명한 전자측 수련소에 갔습니다. 장재형씨는 참으로 정 선생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서울 동마장 시외 버스 터미날 떠날 때부터 뒷자리에 앉은 우리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비아냥 거리듯 애천의 정선생이 아직도 냉수욕하냐고 하며 보고생활 철저히 지키냐 고도 물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 오직 정 선생의 보호일념으로 불타있던 경천 형제는 정 선생이 어떤 사람인지 아느냐며 그에 대한 신앙고백까지 해버렸습니다. 청평의 수련원에서 장재형의 설교와 강의도 들으며 기독교의 향방에 대한 논의를 하다가 아직 장마가 미처 끝나지 않았지만 수영도 하고 배를 타기도 했습니다. 김경천 형제의 노골적 정 선생 찬양론에 식상했는지 장 재형씨는 그 모임 이후 우리들과는 더 이상 대화가 없었습니다. 청평 모임 이후 신촌의 어느 학사에 아파서 누워있던 그를 마지막으로 문병한 이후 지금까지 장 재형씨와 저는 만나지 못했습니다. 이 분에 대한 상세한 언급은 호산나의 역사를 이어가실 분들이 해 주실 것으로 기대합니다. 장 재형씨는 우리들과의 연결을 끊고 그 해 가을부터 익사-기독교 대학생복음운동-이라는 명칭으로 중앙 일간지를 비롯한 매체에 대대적 광고문을 게재하며 새로운 통일교의 대학생을 위한 선교변신을 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익사보다 그 당시 아무 것도 없었던 삼선교의 애천은 서서히 대학생 복음의 서장을 위한 기지개를 펴고 있었습니다. 송*희, 배*원 자매의 등장은 새로운 바람을 삼선교의 애천에 불어 넣었고 그 이후 복음의 나팔을 위한 영성의 힘을 비축해 가기 시작했습니다.
“파란 수정판을
세 겹의 구름 떼로 덧칠한
하늘
하늘이 벗겨지고 있다.
순간이라는 번뜩임 속에서
자연은 소리 없는 재치를
내가
내가 가장 원했던
체험적인 고백을
이글거리는 태양
뉘 돌보지 않는 녹슨 창
두 문화가 만나는 변곡점
지구의 배꼽 위에다
한없는 푸르름으로 풀어 주고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