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비단길 「어제와 오늘」 대하르포(유라시아 철도기행:1) 경향신문 950104 33면(문화) 기획 1939자
-------------------------------------------------------------------- ◎국내 언론사상 첫 시도… 30여개국 「변화물결」 생생히 소개
아시아의 태평양 연안에서 유럽의 대서양 연안까지. 한때는 세상 전부를 의미했던 이 유라시아 대륙의 허리에 세계 최장의 철로인 유라시아 횡단철도가 놓여져 있다. 중국에서는 아시아와 유럽 대륙을 연결하는 새로운 다리라는 의미로 「신아구 대육교」라 부른다. 경향신문 특별취재반은 새해를 맞아 중국 동부의 항구도시 연운 항에서 네덜란드의 로테르담에 이르는 장장2만7천리의 이 유라시 아 횡단철도를 완주한다. 지난90년9월 중국과 구소련의 카자흐스탄을 잇는 철도가 신강 위구르 자치구의 아라산코우(아납산구)에서 접궤되면서 완성된 이 철도는 이후 카자흐스탄등 관련 국가들이 단일노선으로 업무처리 를 하기로 약정함으로써 지난92년12월1일 정식 개통됐다. 태평양과 대서양을 육로로 연결시킨 이 철도는 카자흐스탄 교통 요충인 아크토가이에서 남북노선으로 갈린다. 북쪽 노선(지도의 녹색선)은 러시아 대륙과 모스크바를 거쳐 폴란드∼독일∼네덜란드로 뻗어있다. 주로 화물 운송에 이용되는 노선이다. 남쪽 노선(주황색선)은 비단을 찾아 나선 아랍과 유 럽의 상인들에 의해 기원전부터 만들어진 동서교류의 대통로,이른 바 실크로드와 거의 일치한다. 그러나 남북 노선은 결국
중부 유럽의 중심도시 베를린에서 합 류해 로테르담의 종착역에 이른다. 본사취재진은 남쪽 노선을 택 했다. 이 노선은 중국과 중앙아시아 구간이 그 핵심이다. 강소성 연운항에서 섬서성 새계까지의 용해 철도와 감숙성 난주 에서 신강자치구 우루무치(오노목제)까지의 난신 철도가 형성하는 중국 구간은 대부분 실크로드의 거점들을 그대로 포함하고 있다 . 낙양(하남성),서안(섬서성),난주 돈황(감숙성),투루판(토 노번) 우루무치(신강자치구)등 역사적으로 유명한 고대의 도시들 이 모두 오늘날 유라시아 횡단철도의 노선상에 위치해있다. 광막한 중앙아시아를 뚫고 지나가는 철도는 카자흐스탄으로부터 우즈베크,투르크멘을 거쳐 다시 이란 영내로 진입한 다음 터키의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 유럽철도와 접궤된다. 유라시아 횡단 철도의 통과 지역및 그 배후 지역은 동아시아, 중앙아시아,서남아시아,중근동,동서유럽및 북아프리카 등에 걸쳐 있으며 관계 국가수는 30여개를 헤아린다. 지금 이 횡단철도는 동서의 물건들을 끊임없이 실어나르고 있고 올해안에는 구간별로 맡아온 여객운송을 전노선으로 확대키로해 동서의 거리를 그만큼 좁힐 것이다. 목포로부터 유라시아철도의 동단 연운항까지 3백55해리에 불과
한 유리한 지정학적 위치는 한국이 앞으로 이 노선의 최대 고객 이 될 가능성을 말해준다. 이 철도의 활용에 가장 적극적인 나라는 말할 것도 없이 중국 이다. 중국은 이 간선 철도의 경제적 기능을 통해 동서간의 경 제 격차를 해소하려하고 있다. 본사 특별취재반이 국내 언론사로는 처음 시도하는 이번 유라시 아 철도기행은 이데올로기의 장벽이 걷히고 개방의 물결이 넘치면 서 변화를 거듭하고 있는 이 지역의 어제와 오늘을 조명해 보는 것이 주목적이다. 무려 4천1백31㎞에 이르는 중국구간에서는 개방과 함께 급격 한 변화를 겪고 있는 중국의 현재를 가늠하게 될 것이다. 중국 구간이 끝나면 카자흐스탄부터는 취재 기자들이 바뀌면서 한인 동포들이 많이 살고 있는 알마아타와 타쉬켄트를 거쳐 우즈 베크의 사마르칸트로 내려가 구소련에서 해방되어 새로운 삶의 방 식을 모색하는 카프카스인들의 모습을 조명한다. 취재반은 다시 이란 영내로 들어가 페르시아 후예들을 탐방한 다음 동서의 접점인 터키로 넘어간다. 열차가 흑해로 진입하는 보스포루스 해협위에 걸린 철교를 통과하면 바로 유럽이다. 이제부터는 중부 유럽을 가로지르면서 오랜 공산독재 치하에서
벗어나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지향하고 있는 구동구 국가들의 몸 부림의 현장을 소개할 예정이다. 이번 유라시아 대장정은 유럽의 서북단 로테르담에서 막을 내리게 된다. 유라시아 철도기행은 생생한 컬러화보를 곁들여 금년내내 연재된 다.<심영수특파원>
[0047]동단기점 「연웅항」(유라시아 철도기행:2) 경향신문 950113 11면 기획 2814자
-------------------------------------------------------------------------------- ◎동방의 화물싣고 서역향해 첫 기적/부두 곳곳에 한국산 컨테이 너/“인천술집”등 우리말 간판 눈길/「오리엔탈 익스프레스」 새벽냉기 뚫고 6시간만에 서주역에 유라시아 횡단 철도(신아구대육교)의 동쪽 기점인 연운항. 시 간은 정확히 새벽 0시5분. 12월 초순의 쌀쌀한 새벽 냉기속 으로 「오리엔탈 익스프레스」 (동방쾌속) 국제열차가 울리는 디 젤엔진의 기적이 밤의 정적을 깨운다. 중국 대륙 중부를 가로질러 신강위구르 자치구의 서단 국경도시 아라산코우(아납산구)까지 장장 4천여㎞의 여정이 시작된 것이 다. ○진시황시절에 개척 기자가 매일 같은 시간 연운항을 출발하는 컨테이너 국제 열차 「동풍호」의 기관차 칸 한 구석에 몸을 의탁한 것은 작년 1 2월10일 자정이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 연운항은 시계 50m 의 짙은 안개에 휩싸여 있었다. 이제부터 약 1백73시간에 걸쳐 현대판 실크로드의 중국 구간 을 누비는 유라시아 횡단 철도 대장정의 막이 오르는 순간이다.
유라시아 횡단 철도는 연운항의 컨테이너 부두까지 뻗어 있다. 여기가 바로 이 철도의 동단인 것이다. 철도가 끝나는 지점에 세워진 검은 대리석 표지석 위에 「신아 구대▦교동단기점」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부두에 야적된 컨테이너 가운데는 「HANJIN」 「HYUND AI」 마크가 그려진 한국산도 많이 눈에 띄었다. 한국 화물을 포함한 80개 컨테이너분의 화물을 실은 총 40 량의 동풍호는 기자의 다음 기착지인 서주를 향해 서진을 계속한 다. 연운항을 떠나가면서 기자는 깊은 감회에 젖는다. 기원전 219년 진시황의 명을 받들어 서복이란 방사가 동쪽으 로 바다를 건너 장생불로약을 구하러 떠나간 지점이 이곳 연운항 이라는 사실을 떠올린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해상 실크로드의 선 구였다. 그로부터 81년 뒤 서한의 장건이 서역을 개척함으로써 진정한 육상실크로드가 탄생한다. 이렇게 개통된 해육실크로드는 고대의 중국과 중앙아시아 및 서 아시아, 유럽, 그리고 북아프리카 등지와의 문화교류및 경제협력 을 촉진하는 대통로였다. 2천여년이 지난 오늘날 고대 실크로드를 그대로 이어받은 새로 운 「비단길」, 즉 유라시아 횡단
철도를 타게 된 감회가 어찌 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연운항은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멀리는 통일신나시대 장보고가 산동과 멀지않은 이 일대까지 세력을 뻗쳤었다는 기록이 있다.
부산과의 사이에 컨테이너 정기선이 운행중인 연운항은 바다를 사이로 불과 3백55해리 떨어진 가장 가까운 목포와 자매결연을 갖고 활발한 상호교류를 추진하고 있다. 지난 93년 11월 13명의 어민을 태운 한국어선 한 척이 연운항 근교의 동해현 연안에서 침몰한 것을 현지인들이 발견하고 생존자 8명을 구조한 훈훈한 미담도 있다. ○목포와 3백55해리 연운항 항만을 취재하던 중 기자는 「KOREA HOUSE」니 「인천 술집」 「부산 술집」이니 하는 어설픈 간판을 단 음식 점들을 발견했다. 한국 배가 자주 기항함에 따라 생긴 한국 선 원 상대의 주막집이었다. 호기심에 한 집을 들러보았다. 흑룡강성에서 왔다는 조선족 동 포 아주머니가 주인이었다. 19, 20세의 동포 처녀들이 손님 접대를 맡고 있었다. 먼 동북지방으로부터 동족이 드문 중부의 연운항까지 돈을 벌어 보겠다고 남하한 여인들의 그 억척이 놀라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어 떤 연민 같은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진학패 연운항시 외사판공실 부주임에 따르면 일찍부터 연운항에 착안해 성공한 한국인은 「나라 유통(주)」의 김자호 사장이다 . 그는 일찍이 연운항 배후지역의 풍부한
농부산품에 착안, 이 곳에서 고구마 전분을 사용해 당면을 생산하는 합작공장을 4개나 가지고 있다. 전북 정주 사람인 김사장은 연운항시의 명예시민 이기도 하다. 그러나 「컨테이너 시대의 실크로드」로 불리는 유라시아철도에 가장 깊은 관심과 이해관계를 가진사람은 부산 소재의 중소기업 해양상선(주)을 경영하는 박정범사장일 것이다. 그는 기차를 타 고 70차례나 고대 실크로드의 구간을 직접 답사했을 정도로 유 라시아 횡단철도에 심취돼 있다. 지난 수년간 연운항에 적지 않은 자금을 들여가며 주로 이 철 도를 이용한 화물운송사업을 추진해온 해양상선은 아직까지 경영이 그리 만족할 만한 단계에 들어서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박정묵 해양상선 이사는 『운송 물량이 비교적 적은데다 중국측 의 화물처리 능력 미숙으로 화물운송의 날짜를 제대로 맞추지 못 해 애로가 많다』고 털어놓았다. ○물동량 일본이 최고 이에 대해 서장상 연운항시 아구대육교 공작판공실 주임도 철도 관리의 문제점을 솔직히 시인했다. 『시간을 지키지 못하는 것은 화물이 적기 때문이다. 화물이 많으면 연운항에서 아라산코우까지 7일 5시간밖에 안걸린다. 그 러나 화물
이 적으면 중도에서 내내 화물을 보충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지연되는게 사실이다』 현재 이 철도를 통해 화물을 가장 많이 운송하는 나라는 일본 으로 매월 8∼10차례씩 화물열차를 이용한다. 그 다음이 홍콩 5∼6차례, 한국 3차례 순이다. 그밖에 대만과 동남아 국가 들도 점차 수에즈운하 경유보다 시간과 운임이 훨씬 적게 드는 대륙교를 이용하게 될 것으로 중국측은 기대하고 있다. 유럽 국가들이 아직까지 대륙교를 이용하지 않고 있는 점이 말 해주듯 역시 이 철도는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 투르크메니스탄 및 타지키스탄 등 중앙아 5개국의 「출해구( 바다로 나가는 출구)」 구실이 가장 큰 것인지도 모른다. 이는 장기적으로 중앙아 5개국의 경제발전과 대륙교의 번영이 연계돼 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기자가 연운항 취재 노트를 들추어 보는 동안 줄곳 야음속을 달려온 동풍호는 어느덧 첫 기착역인 서주에 당도했다. 시계는 정확히 새벽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연운항을 떠난지 5시간5 5분만이었다. 날은 아직 어스레했다.<연운항=신영수특파원>
[0043]첫 기착지 서주(유라시아 철도기행:3) 경향신문 950120 11면 기획 2476자
-------------------------------------------------------------------------------- ◎비극적 영웅 항우의 땅… 곳곳에 체취가/도시 한복판에 석상우 뚝/주민도 몸에밴 억척기질/강보다 넓은 운하… “오통팔달”의 교통 요충지로 착실히 경제성장 연운항을 출발한 유라시아 횡단 열차의 첫번째 기착지 서주는 중국대륙을 동서로 관통하는 유라시아철도가 북경에서 상해까지 남 북을 종단하는 경호철도와 최초로 교차하는 교통 요충이다. 기자는 솔직히 이번 유라시아철도 취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서 주의 존재를 새삼 인식하게 됐다. ○항우 기리는 희마대 초한 쟁패 시절 서초 패왕 항우가 도읍으로 삼은 팽성이 바로 서주다. 지금도 서주는 「역발산기개세」(힘이 산을 뽑을 만하고 의기가 천하를 뒤덮을 만하다)의 항우를 기리는 희마대를 시 한복판의 고지대에 세워놓고 있다. 항우가 그 옛날 군사를 사열하던 장 소다. 희마대 안에는 항우의 석상이 세워져 있다. 또 기념관 중의 한 채는 그가 기원전 202년 한왕 유방에게 패해 오강에서 자 결하기까지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석각 벽화로 채워져 있다.
그런데 항우의 비극적인 말로는 그의 순박한 고향 중시관에서 비롯됐다는 견해가 흥미를 끈다. 동행한 정인갑 청화대 교수(조 선족 중국인)가 바로 이런 견해의 소유자다. 항우의 고향은 서주 남방으로 그리 멀지 않은 강소성 회음시 숙천현(강소성 회음시숙천현)이다. 그는 평소 「부귀불귀향리, 여의금야행」(출세하고서도 고향에 돌아가지 않는 것은 비단 옷을 입고 밤길을 다님과 같다)이라고 말할 정도로 자기 과시욕이 강한 사람이었다. 이런 사고방식은 그로 하여금 천년 왕도 장안(지금의 섬서성 서안)을 버리고 자신의 고향과 가까운 서주를 도읍으로 정하게 만든 주요 동기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 덕택에 유방은 항우가 버리고 떠난 전략요충 장안을 힘 안 들이고 차지할 수 있었다. 결국 유방에게 대패한 항우는 「하이견강동부로?」(무슨 면목으 로 고향 어른들을 뵐 것인가)라는 탄식과 함께 죽음을 결행했다 고 한다. ○5가지선 통과지역 고향 사람들에 대한 면목을 죽음과 바꾼 항우의 극단적인 사고 방식은 스스로 재기의 기회를 포기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서주는 초한 이래 역사적으로 「병가필쟁지지」라고 불릴 만큼
쟁탈전이 극심한 땅이었다. 역사상 2백여 차례나 전쟁에 휩싸였던 기록이 있다. 평균 2 0 년마다 한 번의 꼴이다. 이처럼 끝없는 전쟁의 연속은 서주 사람들을 파산과 곤궁의 구 렁텅이로 몰아넣었다. 사람들은 자연 남자나 여자의 구별없이 억 척스럽고 강인한 기질을 발휘할 수밖에 없었다. 기자와 동행한 카메라맨은 한족 중국인 의가기씨인데 그는 서주 에서 이틀밤이나 곤욕을 치렀다. 그는 서주시 외사판공실의 자동 차 운전사가 그의 호텔 방에서 목욕을 좀하자는 제의를 하자 거 절할 수가 없어 이를 허락했다. 그 운전사는 부인과 자녀 등과 함께 남의 호텔 방에서 실컷 목욕을 즐겼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좋다. 다음날 저녁 식사때 의씨는 예의 운 전수로부터 방 열쇠를 빌려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다른 친구의 가족에게 목욕의 기회를 제공해야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마지 못해 열쇠를 다시 건네주어야 했다. 서주는 48년말부터 49년초에 걸친 유명한 국공내전의 회해전 투를 끝으로 영년의 전란으로부터 해방됐다. 오늘날에는 동서남북 사통팔달의 편리한 수륙 교통의 요충이라는 지정학적 위치를 밑천으로 경제적 번영의 기틀을 착실히 다져가
고 있다. 명문 청화대출신의 유서전서주시 부시장은 서주의 특징을 「오통 」(오통)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철도·도로·운하·항공노선 및 석유 파이프 등 5가지 선이 통 과하는 지점이 바로 서주라는 뜻이다. 우선 철도의 경우 북경∼상해간의 경호선과 연운항∼아라산코우( 아납산구)간의 농해선이 모두 이곳을 통과한다. 중국 정부는 그동안 서주 철도역의 확장과 개선을 위해 10억 원인민폐(1원은 약95원)를 투입했다. ○「역사명성」으로지정 그 결과 서주역의 조차능력은 하남성의 정주에 이어 전국에서 두번째이다. 유라시아철도를 타고 유럽으로 진출하는 화물의 상당량은 경호선 을 통해 남하한 화물이다. 서주의 커다란 우세점은 철도 교통 말고도 내하 운항을 들수 있다. 일찍이 수양제시절에 완성된 경항운하(북경∼항주)가 서주를 통 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서주 경내에는 모두 4개의 내하항이 있는데 이들 항구의 연간 화물처리 능력은 무려 3천만t에 달한다. 웬만한 강보다도 넓은 운하를 끊임없이 오르내리는 무수한 선박 들은 중국 경제의 활황을 무엇보다도 잘 보여준다. 서주는 자원이
풍부하기로도 유명하다. 특히 석탄의 경우 매장량이 37억t이나 되며 연간 생산량은 2천3백만t에 이른다. 서주의 석탄은 북송대의 대문장가 소동파가 서주 자사로 있던 서기 1079년에 채굴이 시작됐다니까 지금으로부터 9백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한편 문화적으로 볼때 명청문화를 북경이, 당문화를 서안이 각 각 대표한다면 서주는 한문화를 대표한다. 중국 국무원에 의해 「역사명성」으로 지정된 서주는 한대문물의 3절을 자랑한다. 20개의 한대 고분, 한대 병마용, 그리고 한화상석이라고 부 르는 석조벽화등이 그것이다.<서주=신영수특파원>
[0042]중원의 요충 정주(유라시아 철도기행:4) 경향신문 950203 11면 기획 2469자
-------------------------------------------------------------------------------- ◎황하초장 공로대교 끝없는 화물 차 행렬/소림사엔 무술배우려는 학생들 각국서 몰려/열차멈추자 무임승차승객들 검표원피해 줄행 랑 서주 서역에서 오후 4시15분에 출발한 난주행열차는 5시간 50분만인 저녁 10시 5분 정확히 정주에 도착했다. 행정구역상으로 강소성을 넘어 하남성의 성도까지 온 것이다. 열차는 내내 광활한 회해 평야를 가로질러 질주했다. 안휘성 북부를 지날 때쯤 갑자기 농촌 사람들이 기자 일행이 탄 열차로 몰려들었다. 부녀자 노인 할 것 없이 남루한 의복을 덕지덕지 끼어 입은데 다 얼굴들이 새까만 것이 한 눈에 빈민의 몰골이었다. ○상업센터로 발돋움 이윽고 기차표를 조사하는 검표원이 들이닥쳤다. 사람들은 우르 르 반대편으로 이동했다. 마침 안휘성 탕산에서 열차가 멈추자 사람들은 다투어 차창을 통해 뛰어내리는 것이었다. 검표원의 표정에는 별로 노여운 기색이 없었다. 『무임 승차자들이 저렇게 많지만 모두 가난한 사람들이라 방법 이 없지요』하고 말한다. 열차에서 탈출한 사람들은 다시 철도를 따라 줄
행랑을 쳤다. 이를 감시하는 사람도 없는 것 같았다. 왁자지껄하던 이들 떼거 리가 사라지자 열차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중국의 지역에 따른 빈부격차 문제는 서주에서 정주에 이르는 열차안에서도 여실히 증명되고 있었다. 지리적으로 중원의 한복판에 위치한 정주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상 나라가 도읍했던 고도로 유명하다. 지금은 동서남북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이라는 이점을 살려 중 국 중부의 상업 센터로 발전해가고 있다. 「동방의 시카고」를 건설하겠다는 것이 정주시의 목표다. 정주 철도역은 아시아 최대의 화물열차 조차 능력을 자랑하며 연간 여객 수송 규모는 약 1천7백만명으로 북경및 심양에 이어 3번째다. 정주는 전국 최대의 화물 중계역으로 지난해의 연간 화물 7백 여만t가운데 3백36만t이 중계 화물이었다. 북경에서 광주에 이르는 경광선과 연운항으로부터 우루무치(오노 목제)까지 연결된 농해철도가 교차하는 정주는 다른 어느 도시도 따르지 못할 교통의 요충지이다. 거기에 경광선을 따라 달리는 자동차 도로가 정주를 통과한다.
○시내엔 한국차 1천대 정주시 북쪽 약20㎞ 지점에 놓인 총연장 5천5백49.88m 의 황하 공노대교는 황하를 남북으로 연결하는 황하 대교중 가장 긴 다리로 꼽힌다. 다리의 길이에도 다소 압도가 되지만 그 위를 달리는 끝없는 화물차의 행렬은 중국 경제의 활황을 그대로 보여준다. 86년 개통된 이 다리는 현재 1일 평균 1만7천∼1만9천대 의 차량이 통과하며, 예상보다 빨리 내년이면 건설비를 모두 회 수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황하 공로대교 관리처의 한 관계자는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마침 한국제 현대 쏘나타를 전용차로 쓰고 있었다 . 『한국 차 어떻습니까』 『지금까지 1년반을 탔는데 고장 한 번 안났지요』 그에 따르면 인구 1백18만의 정주 시내에 한국 차가 1천대 쯤 된다고 한다. 정주시 서남의 등봉현에 있는 소림사는 어디까지나 불교 사원이 면서도 소림 권법 등 무술로 더욱 이름나 있다. 소실산 기슭의 총림속에 세워졌다는 데서 그 이름이 유래한 소 림사는 원래 북위의 효문제가 서기495년 인도승 발타삼장을 위 해 건립한 사원으로 선종의 발상지이다. 인도승 달마
대사가 이곳에서 9년간의 면벽수행을 했다는 이야기 로 더 잘 알려진 소림사가 무술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 것은 당대 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무술에 정통한 한 소림사 승려가 당 태종을 도와 개국의 공을 세운 것을 계기로 소림 권법이 전승돼 내려오게 됐다는 것이다 . 아무튼 소림사 무술은 세계적으로 유명해졌고 무술을 배우려는 학생들이 중국 각처에서는 물론 외국으로부터도 쇄도하고 있다. 소림사의 한 무술학교에서 목격한 어린 학생들의 수련 장면은 이제 소림사 무술이 체육 종목의 하나로 일반화한 느낌이 들게 했다. 가냘픈 소녀들이 창끝이 달린 길다란 막대를 들고 휙휙 소리를 내며 대지르는 모습은 진지하기만 했다. 소림사 경내에 들어서면 석비들이 늘어서 있는데 그중에는 한국 계 승려들의 것도 포함돼 있었다. ○시성 두보의 출생지 소림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탑림이 있는데 이는 소림사 승려 들의 무덤이다. 그중에는 고매한 승려의 대형 탑이 있는가 하면 여러 승려들을 합장한 공동의 탑도 있다. 정주는 역사상 많은 인물을 배출한 고장이지만 그중에서도 시성 으로 추앙되는 두보
의 출생지가 정주 서쪽의 낙양과 가까운 공의 이다. 두보는 당 선천 원년(서기712년) 이곳의 깊이 15m쯤 되 는 동굴식 가옥 안에서 태어나 770년 호남성에서 병사했다. 두보의 탄생지 근처에는 그의 시신을 호남성으로부터 옮겨다 안 장한 능원이 있다. 이 능원의 한 가운데에 평생 우국의 념을 품은 채 가난한 삶 을 살다 간 그의 우수를 자아내는 듯한 표정의 석상이 이곳을 찾는 참배객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다. 정주를 거쳐 낙양으로 떠나던 날 기자는 유라시아 횡단 철도의 도정이 풍부한 역사와 문화의 단층과 함께 현재의 중국에서 생 겨나고 있는 온갖 신생사물을 동시에 표출시키는 「마력의 길」임 을 새삼 확인했다.<정주=신영수특파원>
[0041]고도 낙양의 어제·오늘(유라시아 철도기행:5) 경향신문 950210 11면(문화) 기획 2624자
-------------------------------------------------------------------------------- ◎9개왕조 「천년 잠」 깨는 “공업화굉음”/용문석굴·고묘박물관 등 곳곳에 문화재 ○중국역사의 축도 황하 중류지역은 중국문명의 요람으로 일컬어진다. 황하는 고래 로 여러 번 물길이 바뀌었지만 하남성의 낙양, 정주, 안양에 걸친 일대에서 중국 문명이 최초로 개화했던 곳이다. 연운항을 출발한 유라시아 횡단 열차는 송도 개봉, 하남성 성 도 정주를 지나 구조고도로 이름난 낙양에 이르는 동안 줄곧 황 하와 평행선을 그리며 서진을 계속했다. 정주 취재를 마치고 소림사를 경유, 낙양에 도착한 것은 초저 녁 무렵이었다. 낙양시내는 온통 짙은안개가 드리워져 있었다. 하남성의 서부, 황하 중류의 남안에 위치한 낙양은 동으로 호 뇌관, 서로 함곡관과 접하고 북으로는 망산을 의지한 천험의 요 새다. 낙양의 역사는 중국역사의 축도라고 할 수 있다. 기원전 1050년쯤 주나라는 안양에 도읍을 두었던 은을 멸망 시킨 뒤 그들의 본거지이던 섬서성 서안 근처에 송주, 지금의 낙양에 성주를 두어 2개의 거점에서 천하를 다스렸다. 그 후
세력이 약화된 주 왕실은 기원전 770년 송주를 포기 하고 성주, 즉 낙양만을 유지하게 된다. 이 때부터의 주를 동 주라고 부른다. 그러나 동주의 지배력이 쇠약해진 것을 기화로 제후들이 천하를 놓고 다투는 춘추전국시대가 출현한 뒤 마침내 기원전 221년 진시황에 의해 다시 통일된다. ○측천무후 닮은 불상도 섬서성 함양에 도읍을 정했던 진을 평정한 한은 장안, 지금의 서안을 국도로 삼았다가 뒤에 낙양으로 천도한다. 낙양천도 이 전을 서한, 이후를 동한이라고 구분한다. 그로부터 위, 서진, 북위, 수, 당, 후양, 후당 등이 낙 양을 도읍으로 삼았다. 동주와 동한을 합치면 모두 9개왕조가 1천여년에 걸쳐 낙양에 국도를 정했대서 「구조고도」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이처럼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낙양은 무수한 문화유산을 간직 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중국 3대석굴의 하나인 용문석굴, 중 국 최초의 불교사찰로 이름난 백마사, 그리고 망산 일대의 고분 으로 이뤄진 세계 최대의 고묘박물관 등이 낙양의 3대 문화재로 꼽힌다. 낙양시 남방 12㎞ 지점 이하 변의 석회암 절벽을 아로새긴 용문석굴은 크고
작은 석굴이 모두 1천3백52개, 불감이 7백 50개에다 불상을 포함한 조상이 무려 10만여개에 달하는 중국 최대의 석굴이다. 용문석굴의 건조는 서기 494년 평성(지금의 산서성 대동)으 로부터 낙양으로 도읍을 옮긴 북위대에 시작돼 당오대를 거쳐 북 송조까지 4백여년에 걸쳐 이루어졌다고 한다. 용문석굴의 대표격은 뭐니뭐니 해도 석굴 가운데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봉선사다. 당 고종 상원 2년(서기675년)에 완성된 봉선사는 중앙에 안치된 노사나대불의 단아한 모습이 일품이다. 중국 최초의 여황제 측천무후를 닮았다는 이 불상은 좌상의 높 이가 무려 17m가 넘고 머리 부분만 4m에 달하는 거상인데다 미목수려의 극치까지 보여준다. 낙양에서 동쪽으로 13㎞ 떨어져 있는 백마사는 동한 영평11 년(서기 68년)에 세워진 중국 최초의 불교사원이다. 불교가 인도로부터 서역을 거쳐 중국에 전래된 것은 낙양을 국 도로 정한 동한대로 알려져 있다. 이 사원은 당시 교역을 위해 낙양에 거주하던 많은 서역인들을 위해 세워졌으리라고 추측된다. 그리고 백마사라는 이름은 백마가 불전을 싣고 왔기 때문에 붙 여졌다는 설이 있으나
확인할 길이 없다. 사원 문앞의 양쪽에는 석마가 서 있는데 이는 후대사람들이 만들어 세운 것일 뿐이다 . ○국유기업 4백개 밀집 대불전안에 걸려 있는 무게 1천2백50㎏의 고동종은 그 소리 가 매우 맑고 그윽하대서 낙양 팔대경의 하나인 「마사종성」의 칭을 듣는다. 기자가 백마사를 찾았을 때는 영하의 쌀쌀한 날씨임에도 천으로 만든 허름한 가방에 인조 향을 가득 담아 가지고 불전마다 사 르며 합장하는 갸륵한 중국인 불신도의 경건한 모습을 발견할 수 가 있었다. 낙양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어 흔히 북망산으로 불리는 망산은 일대가 역대 왕후장상들의 묘역이었다. 중국 최대의 고분 집중지인 망산 위에 세워진 고묘박물관은 현 재 서한대부터 북송대에 이르는 각 시대의 고분 22기를 복원한 것으로 벽화 등 귀중한 문화재를 보존하고 있다. 오늘날 낙양시는 도시 인구만 1백24만명을 헤아리는 중부지역 의 중요한 공업기지로 발전하고 있다. 4백여개의 크고 작은 국 유기업들이 밀집한 낙양은 특히 「동방홍」 브랜드로 유명한 중국 제1의 트랙터 공장을 자랑한다. ○소낭저댐 건설 박차 낙양은 현재
시 북쪽 40㎞지점의 소낭저에 대규모 황하치수 프로젝트를 건설중이다. 1백80만㎞의 발전용량을 가진 대형 댐 건설을 주축으로 한 이 프로젝트가 오는 2001년 완공되는 날 낙양은 고도로서의 명성과 함께 현대화의 명물을 보유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낙양은 아직 낙후의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기자는 도착 이튿날 낙양박물관을 찾았는데 마침 정전이라 관람 이 불가능했다. 황하의 수위가 낮아져 발전량이 모자라기 때문이 라는 것이 낙양시 관계자의 설명이었다. 거기다 박물관이 제공하는 소개 책자는 흑백 사진에다 페이지 매김도 없는 81년판의 얇은 팸프릿에 불과했다. 저녁 때 시내의 서점에 들렀을 때도 공교롭게 전기가 나가는 불운을 당했다. 도착 당일 낙양시 부시장의 저녁 초대를 받은 기자일행은 음식 점이 정전인 바람에 촛불을 켜고 「분위기 있는」 만찬을 즐길 수 있었지만.<낙양=신영수특파원>
[0040]서안/역사관광지로 활기넘친 「3천년고도」(유라시아 철도기행:6) 경향신문 950224 11면 기획 3061자
-------------------------------------------------------------------------------- ◎철도 개통후 물동량 급증… 현대판 실크 로드 거점으로 ○돈벌이가 최대 관심 낙양을 출발한 유라시아 횡단열차는 삼문협을 지나 섬서성으로 내닫기 시작했다. 차분했던 열차내 분위기가 갑자기 소란스러워졌 다. 「어디까지 가냐」 「고향은 어디냐」는 원초적인 얘기가 중국인 특유의 고성으로 뒤덮였다. 남루하나 단정한 차림을 한 젊은 여행자들은 고향 얘기에서부터 TV에 자주 나오는 탤런트와 가수들의 삶을 화제에 올렸다. 그러나 그들의 최대 관심사는 「돈」이나 「돈벌이」임을 금세 알 수 있었다. 「좋은 돈벌이 없나」 「외국 물자를 들여다 팔면 돈이 된다는데」…. 대화중에는 「그곳에 가면 진짜 돈을 벌 수 있나」라는 얘기도 자주 나왔다. 열차가 영보를 지나 동관에 접어들자 떠들어대던 젊은이들이 주 섬주섬 가방을 챙겼다. 역에 닿자 그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젊은이들이 왜 모두 여기서 내리느냐』고 묻자 옆자리에 앉은 촌로는 『이 지역에 금광이 많다』는 말로 이유를 설명했다. 동관은 영보 서남에 위치한 함곡관과 함께 북부 중국을 동서로 가르는 천험의 관문이다. 그 지리적 위치때문에 한때 장안(지 금의 서안)의 요새역할을 해온 이 곳에 최근 매장량이 풍부한 금광이 발견됐다. 당연히 중국 전역에서 일확천금을 노린 산금꾼 이 몰려든다. 방금 내린 젊은이들도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얘기나 행동 어디에서도 사회주의나 그 비슷한 냄새도 찾을 수 없었다. 오직 물질만이 그들의 최고가치이다. 젊은이들 이 내려버린 열차는 정적으로 이어졌다. 사방이 온통 짙은 안개 로 휩싸인 이 지방 특유의 겨울 날씨는 더욱 을씨년스러웠다. 이런저런 상념속에 열차는 서안에 닿았다. 현재의 중국 중심부에서 보면 서안은 서쪽에 위치한 변방에 불 과하다. 그러나 이 지역은 한대부터 12개 왕조가 도읍으로 삼 으며 부침을 거듭했던 3천년 역사가 살아숨쉬는 고도다. 또 이 곳은 만주군벌 장작림의 아들 장학량이 장정에 지친 모택동의 목 줄을 죄기 위해 일선 독려에 나선 장개석을 감금·협박해 제2차 국·공합작을 이끌어낸 곳이기도 하다. 「서안사건」으로
공산당 은 회생의 시간을 벌어 중국근대사의 물꼬를 뒤바꿔놓았다. 역 앞에서 바라본 서안은 활력에 차 있었다. 서안역 남쪽으로 곧게 뻗어있는 해방노에는 호텔 「해방반점」을 비롯해 은행·백 화점 등 콘크리트 고층 빌딩이 늘어서 있었고 해방로를 가로지르 는 서문거리 대로에는 자동차가 마음껏 속력을 내며 달리고 있었 다. ○「만만디」체질 사라져 한걸음 물러서 골목으로 들어갔다. 공동주택인 듯한 건물 처마 에는 세탁물이 널려있었고 새조롱이 걸려있었다. 그 밑 골목길을 왁자지껄 돌아다니는 어린이들의 모습에서도 활기를 느낄 수 있 었다. 또 다른 번화가중 한 곳인 동대가의 시장에는 작은 토산품점에 서부터 갖가지 음식점·잡화점·골동품점에 이르기까지 없는 것이 없어 사람들로 붐볐다. 가게 밖으로까지 나와 손님을 불러대는 모습이 서울의 시장과 다를 것이 없었다. 중국의 대명사였던 「 만만디」(천천히)는 어디서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서안은 분명 최근의 여느 중국 도시와 똑같은 개방의 거센 바 람을 맞고있었다. 여기저기서 건축 중장비들이 거친 숨소리를 토 해내고 있었고 사람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인구 6백50만명(도 시인구 2백90만명
)의 중국 서부 최대 도시다운 약동감이었다.
시 당국은 「역사유산의 보고」로서의 서안이 갖고있는 잠재력을 활용하는데 1차적인 정력을 쏟고 있었다. 그들은 「중국에서 한 곳만 보고 가라고 한다면 대답은 서안이 다」는 말을 수차례나 강조했다. 실제로 시중심부는 물론 반경 30㎞내에는 관광자원이 가득했다. 삼장법사 현장이 경전 번역 작업을 하던 대안탑, 70여만명의 죄수들이 동원돼 만들었다는 진시황릉과 병마용항,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성황제 측천무후가 묻혀있는 건릉, 한대에서 수·당· 송대에 이르는 역대 명필의 문장을 새긴 석비가 서있는 비림등. 어느 것 하나 역사의 향기를 품고있지 않은 것이 없다. 얼핏 보기에도 일반 관광객은 물론 중국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 이면 한번쯤은 들러야 할 곳들이었다. 서안시 관계자들의 관심도 관광과 관련한 도시발전과 경제 문제 에 쏠려 있었다. 서안시 관광사업관리국의 후학동 국제시장개발담당 부처장은 지난 79년부터 94년말까지 모두 3백27만명의 외국 관광객이 서 안을 찾아왔다고 설명했다. 성장률은 연평균 25∼30%. 서안시는 최근 외국 관광객의 본격적인 유치를 위해 대외교류를 넓히고 있고 독자적인 관광상품 개발에도 열을 올리고 있다.
역사유적들 곳곳에 지난해 11월 일본 나라시의 중개로 한국의 경주와 자매결연을 맺은 서안시는 먹고 관광하고 숙박하고 교통을 이용하고 쇼핑하 며 오락을 즐기는 「끽·여·주·행·구·오」등 6개 방면에 중점 을 두어 관광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후부처장은 『먹거리에도 신경을 쓰고 있다』며 『중국 고유의 요리 개발에 힘써 전갈요리와 두더지요리 등 이미 3백80가지를 개발해 특허를 신청해 놓은 상태』라고 자랑했다. 서안사건도 관광자원이 되지 않겠느냐고 묻자 『이제 그런 것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고 다소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서방문물이 들어오면서 외국 기업의 서안 투자도 최근 급속히 늘어나고 있다. 서안시 대외경제무역위원회의 정육걸 판공실 주임은 『작년말 현 재 합작 기업수 1천3백여사에, 외국 투자액은 23억달러에 달 했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한국과 서안시와의 무역액이 급증 추세에 있다며 작년 한해만도 1천2백만달러에 달해 한국이 서안 시의 10대 무역국으로 발돋움했다고 강조했다. 서안시가 한국으로부터 수입하는 품목은 주로 철강제품이다. 반 면 옥수수·콩깻묵등 농수산품이 한국으로 수출되고 있다. 쌍방의 무역구조는 한
국측의 일방적인 역조다. 대외 무역량이 늘어나면서 철도도 변화를 맞고있다. 지난 90 년 서안∼신강 위구르 자치구의 우루무치(오노목제)∼아라산코우( 아납산구)∼카자흐스탄을 잇는 철도가 연결되면서 과거 서안으로부 터 동쪽으로만 향했던 일방통행 물동량이 서쪽으로도 연결된 것이 다. 철도 개통전보다 물동량은 2배이상 늘었고 서안은 이제 중 국 동서교역의 중심지가 됐다. 유라시아 횡단철도의 개통이 로마 로 향하던 고대 비단길의 동쪽 출발점 서안을 현대판 실크로드의 거점으로 재생시키고 있는 셈이다.<서안=신영수 특파원>
[0039]서안/진시황릉앞 골동품 시장엔 가짜 일색(유라시아철도기행:7) 경향신문 950303 11면 기획 2579자
-------------------------------------------------------------------------------- ◎문화재 병마용 시재정수입의 주요원천/외국인이 “봉”… 호텔음 식값도 바가지씌워/박물관 입장료 중국인의 4배 더받아 세계 8대 기적의 하나로 꼽히는 진시황 병마용은 문화재의 보 고 서안에서도 가장 중요한 재정 수입의 원천 가운데 하나다. ○도굴·밀매의 천국 병마용 박물관의 한 관계자는 지난해 입장료 2백만원(1원은 약 95원) 인민폐를 포함, 약 3천만원의 수입을 올렸는데 그 중 10%는 외국 관광객들에게서 나온 돈이라고 기자에게 밝혔다 . 사실 중국의 철저한 외국인 차별 대우는 전세계적으로 유명하다 . 병마용 입장료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다. 모두 8천명의 지하 병마 군단이 발굴된 1, 2, 3호 갱과 관련 영화의 관람까지 합치면 외국인 관광객(외빈)이 내야 하 는 입장료는 무려 1백40원에 달한다. 이에 비해 중국인(내빈 )은 30원으로 만사 그만이다. 외국인 「바가지 씌우기」는 민간에서도 마찬가지다. 당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의 장소로 유명한 화청지 근처의 한 음식점이 보여 준 인심도 여간 야속한 것이 아니다.
기자 일행이 주문한 음식은 아무리 늘려 잡아야 1백원을 넘지 않았다. 그런데 계산서에는 버젓이 2백96원으로 나와 있는 것이 아닌가. 따져 물은 결과 외국인들이라는 이유로 봉사료를 턱없이 부풀려 매긴 것임이 드러났다. 4성급을 자랑하는 상그릴라 호텔의 상술도 보통이 아니었다. 호텔식당의 아침 식사 값이 1인당 1백원이나 했다. 이는 북경의 5성급 호텔을 훨씬 웃도는 수준이다. 도처에 문화재가 무진장으로 묻혀 있는 서안은 도굴의 천국이다 . 거기다 서안은 전체 섬서성과 함께 빈곤한 지역으로 꼽힌다. 서반부는 황토 고원으로 궁산악수(척박한 땅)이고 남반부만이 황하의 최대 지류인 위수를 중심으로 관중 평야가 전개되고 있을 뿐이다. 사람은 많고 땅은 적은 것이다. 그래서 서안에는 『부자가 되고싶으면 고분을 도굴하라』는 말이 유행한다. 드러나지는 않게 귀중한 문물을 도굴해서 횡재한 사람들도 많겠 지만 도굴에 따른 비극도 적지 않다. 74년 발굴된 병마용 1호 갱에는 원래 6개의 장군용이 포함 돼 있었다. 나중에 그중 두 개가 없어졌다. 하나는 2백만원에 마카오로 빠져나갔고 다른 하나는 1호
갱의 경비원이 10만원을 받고 밀 매하려다 적발돼 사형에 처해졌다. 『용두와 인두를 바꿨다』는 말이 한때 서안 사람들의 입에 오 르내렸다. 당태종 이세민의 능묘 벽화도 섬서성 역사 박물관에 보관되던중 도난당했는데 나중에 경비원 일당의 소행임이 밝혀졌다. 서북대 역사과의 한 대학원생은 얼마전 농민으로부터 3백여 점 의 문물을 사들였다가 적발된 일도 있다. 섬서성 일대의 문화재 도굴 풍조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지난 86년 진효공의 고분을 발굴했을 때 이미 2백47차례나 도굴이 자행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 고분 안에서는 사람들의 해골도 발견됐는데 이는 도굴꾼들이 서로 보물을 독차지하기 위해 살상극을 벌였다는 증거다. ○문물유통법 곧 제정 이처럼 많은 도굴을 당했음에도 이 고분에서 발굴된 문물은 3 천여점에 달했다. 문물의 도굴과 밀매가 성행하다 보니 섬서성 당국의 단속 또한 엄중해질 수밖에 없다. 서안시 문화로에는 골동품 등을 전문적으로 거래하는 문물시장이 있다. 그러나 경찰 및 문물 담당자들이 수시로 시장을 기습해 1, 2, 3급 문물이 적발되면 당장 몰수해 버린다. 이에 비해 북경의 골동품 시장은 꽤 자유로운 편이다. 1, 2, 3급 문물이 버젓이 거래되고 있기 때문이다. 서안 문물 시장의 한 상인에게 이 점을 지적했을 때 그는 『 중앙에는 정책이 있고 지방에는 대책이 있는 중국 땅에서 그런 일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며 아무렇지도 않은 투였다. 이에 대해 서안시 문물 관리국의 이건민연구원은 『정부가 지금 문물 유통법 제정을 서두르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는 문물 거래
가 공개적·합법적으로 이루어지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중국 방방곡곡에서 팔리는 골동 문물들은 진품보다 모조 품이 판을 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실제로 진시황릉 앞에 가설된 골동품상이 팔고 있는 문물들은 골동품을 가장한 모조품 일색이라고 서안의 한 문물 전문가는 기 자에게 귀띔해 주었다. ○벽화에 한국인 그림 섬서성 역사 박물관은 「일개 성보다 가치 있는」 문물들을 가 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중국 최대의 박물관이다. 이 박물관의 진품 진열률은 99%를 넘는다는 것이 왕빈 선전 부 부부장(여)의 자랑이다. 왕 부부장은 『도난 방지 시설이 현대적으로 완비돼 있는데다 문물의 변질을 방지할 수 있는 무자외선 조명 설비를 갖추고 있 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섬서성 역사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문물 가운데는 당대 장회 태자 이현의 묘에서 발굴된 「객사도」 벽화도 들어 있다. 모두 6명의 인물이 등장하는 이 객사도 속의 외국 사절 3명 중 한사람은 의관과 용모로 비추어 당대의 한국인임이 틀림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고구려·백제·신라 3국 중 어느 나라 사람인지는 분명치 않지
만 당시 한국인이 턱수염을 기르지 않은 것으로 그려진 점이 흥 미롭다. 한 한국 학자는 벽화 속의 한국 사신이 한씨라고까지 단언하더 라고 전하는 왕 부부장은 『지난해 한국의 저명한 정치가 김대중 선생이 우리 박물관을 관람했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서안=신 영수 특파원>
[0038]함양서 보계까지(유라시아 철도기행:8) 경향신문 950331 11면 기획 2847자
-------------------------------------------------------------------------------- ◎중의학 명성… “신의”찾는 건강관광 인기/수술·진맥·기공·침 술 등 「5신」… 강택민도 다녀가/도로변의 초라한 양귀비무덤 눈길… 다시 서행길로 서안으로부터 진대의 옛 수도 함양까지는 불과 25㎞거리다. 유라시아열차는 황하의 최대 지류 위수 양안으로 전개되는 넓은 평원 위를 질주한다. 차창 밖 좌우로 겨울 밀이 이루는 파란 들판이 펼쳐지고 도처 에 상업 작물을 재배하는 비닐 하우스들이 산재해 있다. 구종산과 위수의 남쪽에 위치한 함양은 어제와 오늘이 혼재하는 도시의 면모에서 예외 없이 개혁개방의 거센 바람에 휩싸여 있 음을 직감할 수 있다. ○수술현장 직접 공개 고도로서의 함양은 한무제의 무능, 당태종의 소능, 당고종과 측천무후 합장의 건릉등 27개의 제왕 능묘를 비롯, 무려 5천 여개의 역사 문물이 1만여㎞의 함양시 관할 지역 일대를 메우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그 진면목을 자랑한다. 그래서 함양은 예부터 「풍수보지」로 일컬어져 왔다. 근대화를 지향하는 함양의 면모는 전국 최대의 「농업과학성」이 라
는 명성과 함께 45개의 독립된 과학연구기관 및 8만여명의 과학기술 인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함양시 당국자들의 한결같은 자 랑이 이를 뒷받침한다. 시내 곳곳에 신축 건물들이 들어서고 있는 현장에서도 함양시의 활력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함양시가 가장 과시하는 분야는 중의학이다. 그것은 섬서성 관광국, 함양시 관광국 및 서안 국제관광공사가 공동으로 주관하는 전국 유일의 「의약 건강 관광 프로그램」이 한 마디로 말해 준다. 인접한 서안과 함양시 일대의 문물도 관광하고 함양이 자랑하는 5개 분야의 「신의」와 연결, 직접 신병을 치료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이 이 기상천외한 관광 프로그램의 골자다.
귀신처럼 수술을 한다는 신도, 진맥의 최고봉 신맥, 침구의 명의 신침, 그리고 기공을 응용한 신대등 4신의 진단 처방 치 료를 관광 코스에 포함시킨 것이다. 거기다 성인병 예방에 아주 좋다는 함양산 셀렌 함유 사과, 즉 신과를 합쳐 함양 사람들은 이를 5신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기자는 4명의 신의 가운데 신도로 불리는 함양시 조양 의원의 장조당 원장을 만났다. 금년 49세의 장 원장은 처음 만난 한국 기자를 반갑게 맞아 주었을 뿐 아니라 여간 해선 보여주지 않는다는 수술 현장까지 기자에게 공개했다. 수술기구는 메스, 핀세트, 스테인리스스틸 끌. 그리고 조그만 스테인리스스틸 망치가 고작이었다. 목등뼈 를 치료하기 위해 감숙성으로부터 왔다는 50대 중반여인에 대한 수술장면. 먼저 환부에 주사를 놓고 메스로 절개를 하는데 신기하게도 피 가 거의 나지 않았다. 이때 환자는 통증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 고 했다. 돌출한 두 군데의 「군살」양쪽에 끌을 대고 각각 망치로 가볍 게 두번씩 때린 다음 핀세트로 집어내는 것이 수술의 전부였다.
수술자리에 주사액을 바르고 가제를 붙이는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3분 정도. 신도의 요체는 주사액에 있었다. 장 원장이 20여년에 걸친 연구 끝에 60여종의 약초를 조합해 개발한 「쌍지령」이라는 액 체는 진통과 지혈효과뿐 아니라 염증을 방지하고 피부를 빨리 아 물게하는 4가지 효과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수십만명의 치질·디스크·편도선·유선 종양·피하 종양 등의 환자를 치료했다는 장 원장은 지난해 이곳을 찾은 강택 민 중국 국가주석 겸 중공당 총서기로부터 「국보」라는 칭호를 들었다고 한다. ○보계는 중진공업도시 장원장에게서 양고기로 푸짐한 점심 대접까지 받은 기자는 함양 을 뒤로 하고 유라시아 횡단 철도의 섬서성 마지막 구간에 해당 하는 보계를 향해 서행길을 재촉했다. 함양 서쪽 30여㎞ 지점 의 흥평시 마귀진을 지나자면 도로변에서 초라한 양귀비 무덤을 만나게 된다. 안록산의 난을 당해 당현종이 사천성 성도로 피난할 때 병사들 의 불평을 무마하기 위해 목 매어 자살케 한 그녀의 시신을 묻 은 곳이다. 묘지의 뒤편에는 저명한 조각가가 제작했다는 흰옥석 의 대형 양귀비상이 세워져 있다.
당 황실 전용의 불사였던 법문사로 가는 길은 포장도 안된 좁 은 길인데다 자전거, 손수레, 트럭, 버스, 승용차 등이 뒤얽 혀 농촌에서 때아닌 교통 체증을 겪어야만 했다. 법문사는 지난 87년4월 초파일 진신보탑을 수리하던 중 세계 에서 유일한 석가모니 지사리와 함께 금은재보, 유리 그릇, 자 기 및 견직물 등 다수의 귀중한 황실 진품들이 출토돼 세상을 놀라게 한 바 있다. 법문사 박물관장에 따르면 법문사는 불교의 한 종파인 밀교의 본산으로 특히 한국이 전승 발전시킨 태밀종과 밀접한 관계가 있 는 것으로 전문 학자들의 연구 결과 밝혀졌다고 한다. 서안에서 서쪽으로 2백40㎞쯤 떨어진 보계시는 농해 철도의 거점일 뿐 아니라 사천성의 성도로 연결되는 철도의 거점이기도 한 교통의 요충이다. 삼국 쟁패의 시절에 촉한의 제갈량이 위를 정벌하기 위해 군대 를 이끌고 6번이나 출격했던 진창이 바로 오늘의 보계다. 텔레비전, 냉장고, 세탁기 등의 생산은 물론 석유 강관을 제 작하는 대형 공장을 가지고 있는 보계는 중국 내륙의 중진 공업 도시다. ○제갈량숨거둔 오장원 보계시 각 부문의 간부들은 한결같이 보계시가 보유
한 공업 기 반과 풍부한 지하자원을 내세워 한국 기업들의 합작 진출을 희망 한다는 간절한 뜻을 기자에게 피력했다. 기자는 보계시에서 다시 동쪽으로 58㎞ 떨어진 지점의 기산현 에 있는 오장원을 찾아갔다. 제갈량이 위 나라 정벌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중도에 최후를 마친 곳이다. 주위보다 1백40m나 높은 면적 14㎢의 평원을 이룬 오장원 은 한 눈에 보아도 빼어난 전략 요충이었다. 한말에 처음 세웠다는 꽤 규모가 큰 제갈묘는 바로 오장원의 서남쪽 끝 부분에 있었다. 사당 안에 안치돼 있는 제갈량과 그를 따르던 강유, 위연, 마대 등 장수들의 소상이 한국의 나그네로 하여금 잠시 그 옛날 을 회상케 한다.<보계=신영수 특파원>
-------------------------------------------------------------------------------- ◎매연에 뒤덮인 도시… 하늘도 누런빛/비포장 좁은 도로마다 자 동차 물결… 교통체증 극심/바겐세일하는 옷가게엔 여자손님들 몰 려와 북새통 유라시아 횡단 철도는 보계를 넘어서면 곧바로 감숙성 경내에 들어선다. 다음 행선지는 감숙성 성도 난주. 기자는 보계에서 저녁 8시 50분에 출발하는 난주행 73급행 열차에 올랐다. 열차는 어둠 속으로 황하의 지류인 위하를 줄곧 남쪽으로 낀 채 느릿느릿 미끄러져 간다. ○황하를 끼고 열차 서행 이 지역을 통과하는 열차는 그 속도가 시속 50㎞를 넘지 못 한다. 지세가 험하기 때문이다. 열차가 유라시아 횡단 철도의 감숙성내 첫 거점인 천수시에 도 착한 것은 다음날 새벽 1시15분. 보계로부터 1백55㎞ 떨어 진 천수까지 4시간25분간이나 걸린 것이다. 난주에 이어 감숙성의 제2공업도시인 천수는 관내에 중국 4대 불교 석굴의 하나인 맥적산 석굴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도 유 명하다. 천수는 또 연평균 기온이 섭씨 10도 전후로 기후가 좋고 연 평균 5백
㎞의 비교적 많은 강우량으로 산림과 녹지가 풍부하기 때문에 서북의 「소강남」이라고 불린다. 천수는 예로부터 병가필 쟁지지였다. 삼국연의의 고전장으로 촉의 제갈량이 이곳 출신의 강유를 얻고 서도 끝내 병탄에 실패한 비극의 땅이 바로 천수다. 기자는 천수 동남쪽 67㎞ 지점의 평원 한가운데에 보리가리처 럼 서 있을 맥적산 석굴을 머리 속에 그리면서 삐걱거리는 열차 의 침대 위에서 늦은 잠을 청했다. 그런데 난주 도착을 1시간 가량 앞두고 열차원이 열차 안을 청소한다며 승객들을 깨운다. 중국에서 열차 여행을 할 때마다 느끼는 불만이지만 어째서 승 객들을 깨워 가면서까지 청소를 서둘러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 다. 잠을 설치는 것도 그렇지만 이부자리를 마구 털고 바닥을 쓸어 낼때 이는 먼지며 도대체 고객에 대한 예우가 말이 아니다. 동행한 정교수의 설명을 들으면 그 이유는 간단하다. 열차가 종점에 도착하자 마자 근무에서 해방되자면 승객에게 폐가 되든 말든 청소를 미리 끝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윽고 난주 역에 도착한 것은 아침 7시50분. 보계로부터 5백31㎞의 거 리를 정확히 11시간만에 당도한 셈이다. 평균 시
속 약 45㎞ . ◎대륙의 기하학적 중심 역 구내를 빠져 나왔을 때 기자 일행을 맨 먼저 맞아준 것은 난주 시내 상공을 온통 뒤덮은 누런 대기였다. 한 눈에 공기 오염이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중 나온 감숙성 외사판공실 직원에게 공해가 심한 모양이라고 넌지시 말을 건넸더니 『바람이 없기 때문』이라는 대답이 고작 이었다. 아침 식사를 위해 안내된 곳은 난주시에서 3성급 호텔을 자랑 하는 금성반점의 구내식당이었다. 식당에 들어서자 정면 벽 쪽에 「사로낙무」라는 한자와 함께 그 옆에 다시 「Silk Road Music and Dance 」라는 현수막 같은 것이 걸려 있다. 그 옛날 비단길의 입구에 와 있다는 것을 실감케 하는 장면이 다. 중국 국토를 기하학적으로 볼때 대륙의 중심에 해당된다는 난주 는 황하를 끼고 있는 유일한 도시이기도 하다. 장강(양자강)에 는 사천성의 중경, 호북성의 무한, 강소성의 남경같은 대도시들 이 직접 강을 면해 있지만 황하는 난주가 유일하다. 황하를 북으로 두고 동서로 약 40㎞에 걸쳐 전개되는 좁고 긴 난주 시가는 자동차 천지
다. 인구 1백50만명의 변경도시에 자동차가 4만대도 넘는다고 한다. 원래 거리가 비좁은데다 자동차들이 흙먼지를 날리며 달리는 통 에 이방의 보행자는 눈을 제대로 뜨기조차 힘들다. ○명물 「쇠고기 국수」 거기다 도처에서 진행되고 있는 도로확장공사는 교통 혼잡을 더 욱 가중시키고 있었다. 그래도 난주 여인들은 혼잡한 거리의 복 장점에 몰려들어 바겐 세일하는 옷가지를 사려고 야단들이다. 학교 공부가 끝난 어린이들은 길가에서 스스럼 없이 아이스크림 을 사들고 아무데나 쪼그리고 앉아 새로 산 책을 펴보고 있다.
중국 전역에서 이름난 「난주 쇠고기 국수(난주우육면)」를 사 먹기 위해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는 장면은 난주만의 풍물일게다 . 그날 오후에 안 일이지만 난주의 하늘을 누렇게 물들이는 원 흉은 서부 교외의 서고지구에 밀집한 중화학 공장들 이었다. 중국인들이 대서북이라고 부르는 지역에서 가장 발달한 석유·화 공·기계·야금 등 4대 공업중심지의 대형 국유 공장들이 마구 뿜어대는 오염물질이 난주 상공을 완전히 점령하고 있는 것이다.
대서북 지역이란 감숙성을 중심으로 동쪽의 섬서성, 서남쪽의 청해성, 동북부의 영하·회족 자치구, 그리고 서쪽의 신강 위그 르 자치구 등 5개 성·자치구를 말한다. 과거 실크로드의 중계지로 번영했던 난주가 중화학 공업의 중심 지로 발달한 것은 과거 모택동 통치 시절 공업기지를 내륙에 배 치한 정책의 덕택이다. 그 결과 난주는 주변의 풍부한 지하자원과 동력자원을 바탕으로 전국적인 중화학·에너지·원자재 생산기지로서의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중국의 각 지방 지도자들은 한국 기자를 만나면 저마다 현지의 유리한 조건을 내세워 한국 기업의 투자 진출을 당부하곤 하는 데 곽곤(52) 감숙성 부성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곽 부성장은 감숙성의 우세한 투자 조건으로 풍부한 자원과 편 리한 교통 외에 저렴하고 우수한 인력을 들었다. 그는 난주의 경우 10만명의 과학기술 전문인력을 보유하고 있 는데 이는 그 밀도면에서 북경, 섬서성 서안 및 사천성 성도에 이은 4번째라고 친절히 알려주었다. ○“한국기업 진출 희망” 건장한 체구에 열정적인 면모가 풍기는 곽부성장은 인구 1백만 명 이상의 전국 31개 도시중 난주시가 경
제력에서 11위를 차 지하고 있다는 실적을 들어가면서 『한국의 많은 기업인 친구들이 난주와 감숙성에 활발히 진출해 주기를 희망한다』는 말을 되풀 이 했다. 그는 한국의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금년중 시찰단을 파견할 계 획이라고 밝히고 『다만 한국 입국절차가 까다로워 작년에 실패한 경험이 마음에 걸린다』고 털어놓았다.<난주=신영수 특파원>
[0035]무위∼장액(유라시아 철도기행:10) 경향신문 950414 11면 기획 3082자
-------------------------------------------------------------------------------- ◎퇴색한 비단길… 황량한 “빈곤의 땅”으로/차비없어 70㎞ 걸 어가는 농촌청년 마음아파/주유소 “고객지상” 팻말… 시장경제바 람 실감 감숙성 성도 난주로부터 유라시아 횡단 철도는 총연장이 1천여 ㎞에 이르는 하서회랑으로 접어든다. 황하의 서쪽 지역이라는 뜻 의 하서회랑은 숙연산맥 이북과 북산 이남의 좁고 긴 땅을 말한 다. ○나무 보기힘든 사막 정확히는 난주 서북쪽 1백80여㎞ 지점에 위치한 해발 3,5 00m의 오초령으로부터 불교 석굴로 유명한 돈황까지가 하서회랑 의 판도에 든다. 유라시아 횡단철도의 중국 구간중 최서부에 해 당하는 난신선(난주∼우루무치)은 바로 이 회랑을 그대로 따라 서진한다. 난주역에서 오전 11시 35분 출발한 우루무치(오노목제)행 급행열차는 그 옛날 현장법사가 인도로 구도여행을 떠날 때 건넜 던 황하 나루에 놓인 철교를 지나 하서회랑의 노천 터널을 향한 다. 간밤에 내린 눈이 사위를 온통 은세계로 뒤덮고 있다. 나 란히 달리는 312국도 감신 공로(감숙∼신강)의 도로 양쪽으로 늘어선 백양수의 행렬
말고는 수목을 찾아보기 어려운 준사막의 황량한 땅이 이어진다. 열차는 오초령이 가까워질수록 속도가 더욱 느려졌다. 평균 시 속이 40㎞ 남짓이다. 감신 하이웨이를 달리면 1백㎞의 속력을 낼 수 있다고 한다. 가는 눈이 차창 밖으로 흩뿌리기 시작한 다. 남쪽으로 기련산맥의 연봉들이 희미하게 들어온다. 만년설을 이고 있다. 마침내 오초령의 장애물을 통과했을 때는 난주를 떠난지 5시간반이나 지난 뒤였다. 서북 오지의 도로변 주유소에 내건 「고객지상」의 구호를 얼핏 지나치며 본 기자는 「역시 이곳에도 시장경제의 바람이 스며들 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시계가 확 트이면 서 광활한 평원이 눈앞에 전개된다. 하서회랑의 첫 기착지 무위 에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무위는 한무제시절 이 일대의 흉노족을 경략하고 양주 감주 숙 주 사주등 「하서사군」을 설치할 때 「양주」로 불리던 지역이다 . 무위라는 지명은 한무제 때의 표기장군 곽거병이 흉노를 물리친 「무공을 과시한다(무위)」는 뜻이라고 하니 당시 흉노족의 비 극이 어떠했겠는지를 짐작할 만하다. 오늘날 무위는 3.3㎢의 면적에 인구가 고작 1백72만에 불과, 「땅은
넓고 사람은 적 은」곳으로 변했다. 기원전부터 실크로드의 중계지로 번영했던 무 위는 그후 해상교통의 발달과 함께 몰락의 길을 걸으면서 지금은 빈곤지역으로 전락한 것이다. 무위가 전국적으로 자랑하는 것이라면 지난 69년 후한대 장군 묘에서 출토된 「동분마」가 있다. 현재 난주의 감숙성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동분마는 「천마」가 세 발굽을 든 채 나머지 한 발굽으로 새를 밟고 달리는 그야말로 절묘한 구도를 자랑하는 불후의 명작으로 평가된다. 동분마는 고대에 중국의 비단과 서역 의 양마를 교역하던 비단길의 상징물 바로 그것이다. ○1인당 소득 연7만원 그러나 실크로드가 퇴색한 지금의 무위는 지난해 12.3%의 경제성장을 이룩했다는 왕화행 무위지구 행정공서 부전원의 자랑에 도 불구하고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민의 1인당 연간소득이 7백38원(약7만원)에 불과한 극빈지역이다. 이같은 액수가 전년비 30.9%의 성장이라는 것까지는 그렇다 치고 물가 상승 률이 지난해 22%에 달했다면 농민들의 곤궁한 정도를 알 것만 같다. 다음 행선지인 장액으로 떠나는 날 아침에는 눈이 3㎝ 쯤이나 쌓여 있었다. 눈 쌓인 무위의 시골역을 떠날 때는
다소 낭만적인 여행 기분 이 들었지만 막상 장액에 도착하자 마음 아픈 정경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역시 흉노를 물리치고 한나라의 「위력을 펼친다(장액 )」는 뜻의 장액은 무위 서방 2백44㎞ 지점에 위치한 하서회 랑의 한 구간에 속한다. 열차가 장액으로 달리는 동안 황량한 평원과 모래 언덕이 교차하고 잡초 풀숲이 회색 빛으로 눈 밑에 점점이 깔려 있다. 명대에 쌓았다는 토담의 장성이 꼭 방풍벽처럼 군데군데 남아 있는 모습도 보인다. 어쩌다 녹주(오아시스)의 수풀을 발견하면 나무라는 것이 인간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새삼 절감하게 된다. ○유고족텐트 관광코스 기자는 장액의 대표적 문물로 꼽히는 대불사안의 거대한 목제 와불을 관람하고 나서 사찰 경내에 병설한 「유고족」민속 텐트에 들렀다. 일행을 안내한 감숙성 외사판공실 직원의 권유에 따르 기로 한 것이다. 장액 지구에만 거주한다는 소수민족 유고족의 남자 한 명과 여 자 3명이 몽고 파오 비슷한 섬유 텐트 문앞에서 애절한 민요를 노래하며 손님을 맞는다. 그들이 손에 받쳐든 술을 마셔야만 텐트 안으로 안내될 자격을 얻는다. 텐트 안에서 양의 젖에 온
갖 첨가제를 넣은 음료를 대접받고 다시 송별주를 강요당했다. 나오는 길에 민속 전시의 책임자격인 유고족의 하경농씨에게 다소 의 사례를 건넸다. 그는 『한국 사람은 처음 만났다』면서 매우 좋아했다. 하지만 대불사를 참관하는 관광객들에게 유고족의 풍습을 보여주는 「관 광아이템」의 개발이 그럴 듯하다고 생각되면서도 어딘지 서글픈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장액지구 황무지개간 기자는 자동차로 장액 동쪽 40여㎞ 지점의 산단현에 이르는 감신 하이웨이를 달리다 나귀 마차를 몰고 가는 한 청년을 발견 하고 차를 세웠다. 노요민(24)이라는 이 청년은 장액지구가 황무지를 개간하기 위해 빈곤한 산단현의 농민들을 끌어들이는 「 이민 프로젝트」의 해당자였다. 1년 전 1백25명의 이웃 농민들과 함께 장액지구로 옮겨 왔 다는 노씨는 산단현으로 종자와 비료를 사기 위해 가는 길이라고 했다. 왕복 70여㎞의 거리를 나귀 마차를 몰고 걸어가는 이 유는 간단했다. 버스비 20원(약2천원)을 절약하기 위해서였다 . 그래서 자신이 먹을 것과 나귀에게 줄 먹이를 장만하고 16 시간의 짧지 않은 여행길에 오른 것이다. 기자는 마침 차에 준비한 음료수와 빵을
나누어 주자 유난히 시뻘건 얼굴에 쑥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나귀에게 채찍을 가하면 서 떠나가는 그의 모습을 한참이나 서서 지켜 보았다. 그날 저녁 왕문원 장액지구행정공서 상무부전원에게 듣기로는 장 액지구가 80만무(묘·1묘는 2백평)의 황무지를 개간해 20만 명의 빈농을 이민시키는 계획을 추진중이라고 했다. 또 왕 상무 부전원에 따르면 장액 남쪽의 기련산 일대에서 나는 녹용, 사향 , 우황 등 값진 한약재를 수입하러 한국 업자가 더러 찾아온다 니 한국인들의 억척도 여간아니라는 생각이 든다.<장액=신영수 특파원>
-------------------------------------------------------------------------------- ◎명대 가욕관성 6백년 세월에도 “위용”/눈덮인 대평원 한가운 데 우뚝선 난공불락의 요새/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삭막한 나그네마 음 달래줘 감숙성의 난주에서 돈황까지 동서로 길게 뻗은 하서회랑위에 차 례로 점재한 고대 실크로드의 4개 거점가운데 세번째가 주천(주 천)이다. 전회에 언급한 하서사군의 하나인 숙주가 바로 지금의 주천인 것이다. 감숙성의 감숙은 감주(장액)와 숙주의 합성어 다. 장액으로부터 주천까지의 거리는 2백1㎞, 급행열차로 정확히 3시간 59분이 걸린다. 하서4군의 최서단에 위치한 돈황을 제외하고 나머지 3군은 모 두 유라시아 횡단철도의 일부분을 이루는 난신철도(난주∼신강)의 연선에 위치하고 있다. 주천에서 다시 난신 철도를 따라 서쪽으로 22㎞를 달리면 명 대 장성의 서단에 해당하는 가욕관에 닿는다. 그동안 열차는 눈쌓인 하서회랑의 황량한 평원을 누비며 신강접 경을 향해 줄달음쳐 온 셈이다. 수목이 그런대로 우거지고 토담 가옥들이 모여 있는 오아시스가 이따금씩 발견되는 것을 제외하 고는 대부분 사막 지대를
동서로 횡단하는 단조로운 여행이다. 철도와 병행하는 난신공로 곁에 우뚝하게 서 있는 가욕관의 존 재는 여행의 단조로움을 깨는 조그만 충격이기에 충분하다. ○서부최대의 철강도시 중국인들이 「천하웅관」이라고 부르는 가욕관성은 남쪽의 숙연산 (기련산)기슭과 북쪽의 흑산사이의 15㎞에 걸쳐 성벽을 쌓아 외적을 방어하던 난공불락의 요새다. 명홍무 5년(1372년)에 축조됐다는 가욕관성은 그러나 북경 근처의 팔달령처럼 벽돌로 축성한 것이 아니라 진흙을 다져 쌓은 토담에 불과하다. 그래도 3층으로 된 3겹의 성루만은 후대의 중수를 통해 당당 한 모습으로 나그네의 삭막해진 마음을 달래주는 좋은 위안거리가 되고있다. 일부 성벽은 6백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원래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는데 이는 이 일대가 극도로 비가 적은 건조 지대이기 때문이다. 가욕관이 천하제일 관문으로 유명하다면 지난 58년부터 건설이 시작된 가욕관시는 서부 최대의 「주천 강철공장」으로 이름이 나 있다. 연간 80만t의 철강을 생산하는 주천 강철은 12만 의 가욕관시 인구 가운데 3만8천명이 이 공장에 종사할 정도로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한다. 도시
전체가 공장지대인 가욕관시는 공장 굴뚝에서 끊임없이 뿜 어대는 매연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기준에 맞는 공해 방지시설이 갖춰져 있기 때문에 대기중으로 방출되는 매연은 인체에 해롭지 않다』고 장빈창 주천 강철 상무부총경리는 주장했다. 공장이 먼저 설계되고 주거지역이 뒤따라 건설된 가욕관시는 구 획이 정연하고 비교적 깨끗한 시가의 면모를 보여주고는 있었다. 한편 행정상으로 가욕관시와 돈황시까지를 관할하는 주천 지구는 감숙성 전체 면적의 41%나 되는 약 19만㎢의 광활한 지역 이다. ○사막많은 척박한땅 이처럼 넓은 면적에 비해 인구 84만에 불과한 주천지구는 농 토와 산지와 사막이 각각 3분의 1씩을 차지하는 척박한 땅이다 . 거기다 연간 강우량이 80∼1백30㎜에 지나지 않는데 비해 증발량은 무려 2천7백∼3천㎜나 되는 건조지대다. 실제 기차의 차창 밖으로 전개되는 눈 덮인 평원이 대부분 농경지로 보이지 만 실은 몽골어로 사막을 가리키는 「고비」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 지역의 사막은 물만 대면 당장 농경지로 바꿀 수 있다. 따라서 농업이 주요산업인 주천지구의 발전은 수자원 개발 에 달려 있다.
왕병서 주천지구 행정공서 부전원의 소개에 따르면 현재 주천지 구는 관내를 흐르는 소륵하의 물을 활용하기 위한 대규모 프로젝 트를 세계은행의 지원으로 추진하고 있다. 절반은 증발하고 절반은 지하로 스며드는 강물을 관개용으로 개 발하려는 것이다. 지금도 상당량의 야채를 외지로 출하하고 있는 주천지구가 소륵하 개발을 완성하는 날 전국적인 야채 재배기지 가 될 것이라고 왕부전원은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주천은 또 일찍이 당대시인 왕한의 「양주사」에 나오는 야광배의 산지로 유 명하다. ○한무제 「술의샘」 유래 야광배는 주천 남쪽으로 약 50㎞ 떨어진 기련산맥의 최고봉 기련산(해발 5,547m)에서 나는 옥석을 다듬어 만든 술잔이 다. 옥석은 이름뿐이지 실제로는 값진 보석류에 들지는 않는다. 다만 대체로 짙은 청색을 띤 옥석 술잔은 곳곳에 투명한 부분 이 있어 어둠속에서 빛을 발한다는 데서 야광배라는 이름이 붙었 다고 한다. 왕한의 칠언절구 양주사는 야광배와 함께 당시 서북 방 최전선인 하서회랑에서 군 복무를 하던 병사들의 애절한 심경 을 노래한 명시다. 맛 있는 포도주를 야광배에 가득 부어 마시려는데 비파 소
리 갈 길 재촉하네 술 취해 사막에 눕는대도 웃지 말게나 고래로 전쟁에서 돌아온 자 몇몇이던가 (포도미주야광배 욕음비파마상최 취와사장군막소 고내정전기인회)
주천은 역시 술잔과 아울러 술과도 인연이 깊은 고장인가보다.
주천이라는 지명이 「술의 샘(주천)」이라는 데서 유래됐다는 것부터가 퍽 재미있다. 한무제는 흉노를 물리친 공로를 치하하기 위해 곽거병장군에게 술 10통을 하사했다. 곽장군은 부하 장병들과 나누어 마시기 위해 술을 주천의 한 샘물에 부었다. 샘물은 마시고 또 마셔도 술 맛 그대로였다. 그래서 샘물은 주천으로 불리게 됐고 그것 이 나중에는 이곳의 지명으로 정착했다는 것이다. 지금도 주천시의 주천 공원안에 「주천」자리가 남아있고 그 옆 에 시선 이백의 다음과 같은 시를 새긴 시비가 세워져 있다. 하늘이 술을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주성이 천상에 없었을 터요 땅이 술을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지상에 주천이 없었을 게 아닌가 (천약불애주 주성불재천 지약불애주 지응무주천) 주천의 옆에는 청말의 장군 좌종당이 하서회랑 일대의 회족과 위구르족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수한 인명을 살상 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심은 버드나무가 2백년의 나이를 자랑하 며 「좌공류」라는 이름으로 서 있다. 주천을 포함한 하서회랑은 이 땅을 지키던 병사들과 이민족에게 다같이 비극의 장이었던 것이다.<주천=신영수 특파원>
[0033]돈황/연운항∼로테르담 횡단 27,000리(유라시아 도기행:12) 경향신문 950512 11면 기획 2835자
-------------------------------------------------------------------------------- ◎관광객 90%가 일인… 유적보호 지원도 앞장/막고굴엔 대상들 이 봉헌한 492개 석굴 보존 저 유명한 돈황은 일찍이 한무제가 서역 경영의 거점으로 하서 사군을 설치하면서 역사에 등장한 고장이다. 하서회낭의 4군 가 운데 사주로 불리던 돈황만이 현대판 실크로드, 즉 유라시아 횡 단 철도가 통과하지 않는 편벽된 땅이다. 원래 유라시아 철도기행은 철도 연선을 잇는 취재 여행이지만 여기서 돈황을 제외할 수는 없다. 그것은 돈황이 단순히 중국 땅임에 그치지 않고 전세계 인류의 귀중한 공동 유산을 간직한 일대 보고이기 때문이다. 기차대신 자동차로 ○기차대신 자동차로 기자는 가욕관에서 기차 대신 자동차를 타고 돈황으로 향했다.
가욕관 서쪽으로 3백85㎞ 떨어진 돈황으로 가는 길은 황량한 사막 벌판을 누비는 아스팔트 2차선 도로다. 왼쪽으로는 숙연산맥(기련산맥) 서쪽 끝자락의 눈 덮인 연봉들 이 자동차를 줄곧 따라온다. 유라시아 횡단 철도는 옥문진을 지나 교만과 포륭길의 중간쯤에 서 그동안 나란히 달리던 자동차 도로와 완전히 갈라선다. 돈황까지는 절반의 거리를 남긴 지점이다. 사막 가운데에서 오 아시스(녹주)의 존재를 알리는 사류수 가로수가 차리는 정중한 의장대 사열을 몇번인가 받으며 자동차는 이윽고 하서회랑 지역에 서 바람이 가장 심하다는 안서현 경내로 들어선다. 여기서부터는 상해∼우루무치(오노목제)를 잇는 312번 국도와 작별을 고하고 지방 도로로 접어든다. 마침 주유를 위해 차가 한 작은 마을의 주유소 앞에 정차했다 . 감숙성의 자동차들은 주유할 때 반드시 사람이 내리도록 돼 있 어 도로변의 허름한 회족 음식점에 들러보았다. 차를 한 잔씩 주문했더니 전차를 끓여준다. 차잎을 벽돌모양으로 다졌대서 나온 이름이다. 찻 값을 묻자 음식점 여주인은 한사코 돈 받기를 거절한다. 그녀의 3살짜리 아들에게 지폐 한 장을 쥐어주자 『셰셰(사사)
』하고 깍듯이 인사를 한다. 돈황이 가까워지면서 도로 양편 사막의 새까만 색깔을 띤 부분 이 자주 보인다. 바람에 모래가 날리고 남은 자갈의 색깔이 새 까만 것이다. 반들반들한 자갈은 큰 것이 밤톨만하고 작은 것은 땅콩 크기 정도라 건축자재로는 안성맞춤일 것 같았다. 이 역시 감숙성의 풍부한 자원에 든다. 돈황에 들어서자 맨처음 눈에 들어오는 것이 시내 한복판에 서 있는 비천상이다. 천녀가 비단 옷자락을 날리며 하늘로 솟아오 르는 모습은 우리네 도자기에 새겨진 바로 그것이다. 돈황 사람들의 「내핍」생활은 돈황 빈관의 종업원들에게서 단적 으로 발견된다. 외국의 저명인사들이 묵곤 하는 최고급 호텔의 접수처에서 내미는 필기도구가 골프장의 타수 기록용 간이연필이 아닌가. 그러나 메모지 한장 없이 돈황의 개황을 줄줄이 꿰는 양중걸 부시장의 열정적인 태도에서 개혁개방에 몰두해 있는 중국인들의 저력을 읽기에 충분했다. 대만이나 해남성과 맞먹는 3만1천4백㎢의 광대한 토지를 관할 하는 돈황시는 인구가 고작 15만명에 불과한 오아시스 도시다.
대부분이 사막이고 경작지는 5천2백만평에 농민이 9만명정도. 그래도 농민의 소득수준은 높아 지난해 감숙성의 1인당 평균 연간 소득 7백21원 인민폐(약 7만원)를 크게 웃도는 1천7 백34원을 기록했다고 양부시장은 자랑했다. 돈황은 역시 막고굴을 포함한 46곳의 국가 보호 문물을 보유 한 관광자원의 보고다. 지난 89년 유엔에 의해 중점 보호지구로 지정되기도 한 돈황 을 찾은 외국관광객 수는 79년 이래 줄잡아 30만명을 헤아린 다. 다음날 아침 돈황시 동남쪽 25㎞지점에 위치한 막고굴을 찾았 다. 사막 벌판에 돌무더기를 만들고 그 앞에 묘비석을 세운 묘지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문득 오른쪽으로 명사산 동쪽 끝자락의 절벽 을 아로새긴 벌집모양의 석굴군이 눈에 들어온다. ○끝이없는 모래벌판 전한대의 서기 366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막고굴은 당대에 이미 불교석굴이 1천개에 달했대서 일명 「천불동」이라고도 불린 다. 서역으로 통하는 고대 실크로드의 관문이었던 돈황은 대상의 거 점이었다. 수만리 길을 오가던 대상들이 이곳에서 무사한 여행을 빌기 위해 저마다 크고 작은 석굴을 봉헌하면서 그 수가 점차
늘어나 오늘날까지 4백92개의 석굴이 남아있게 된 것이다. 막고굴은 2m의 폭으로 펼 경우 무려 25㎞에 달하는 방대한 양의 벽화를 자랑한다. 동서의 고대사회를 연구하는데 더 없이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는 이들 벽화는 「돈황학」이라는 독립된 학문 영역을 창출했을 정도로 무한한 가치를 지닌 인류의 유산이 다. 그런데 돈황학의 본산지로 자처하는 것이 일본인들이다. 지난 70년대 한 일본 학자는 돈황을 방문하고 『돈황은 중국에 있지만 돈황학은 일본에 있다』고 큰소리 쳤다고 한다. 이 말에 자존심이 상한 중국인들은 지금 『돈황은 중국에 있고 돈황학은 세계에 있다』는 구호로 맞서고 있지만 돈황은 역시 「일본화」돼 있었다. 이곳을 찾는 외국 관광객의 90%가 일본 인이고 막고굴의 보존을 위해 재정지원을 가장 많이 하는 곳은 일본이라는 점이 이를 말해준다. 거기다 막고굴 정문 앞에 유적보호를 위해 출연금을 낸 외국인 5명의 모습을 페인트로 그린 대형 화상판이 세워져 있는데 그 중 4명이 일본인이다. 돈황시 근교에 있는 영화성 또한 지난 87년 일본 작가 이노 우에 야스시(정상정)의 소설 「돈황」을 영화화할 때 만든 촬영
세트로 지금도 돈황의 명소로 남아있다. 유회림 돈황연구원 부원장에 따르면 한국인들은 더러 찾아오지만 한국으로부터의 출연은 아직 한 푼도 없다고 했다. 역사 무상함 절절히 막고굴 참관을 마친 기자는 돈황 서남쪽 75㎞지점의 고대 세 관 마을 양관 터 앞으로 펼쳐진 허허한 모래벌판 위에 서서 역 사의 무상한 변천을 몸저리게 실감하면서 발길을 되돌렸다. 당대 시인 왕유의 「서출양관무고인(서역으로 양관 떠나가면 다 시는 못보리)」의 시구를 떠올리며.
[0032]하미·투루판(유라시아 철도기행:13) 경향신문 950519 11면 기획 2443자
-------------------------------------------------------------------------------- ◎사막 오지에도 공업화 바람이…/여름엔 섭씨 82도까지 올라가 는 “화주”/특산물 하미참외·포도맛 세계적 명성 돈황과 작별한 기자는 승용차로 유라시아 횡단철도의 감숙성 서 단 기차역 유원까지 1백20㎞ 가까운 황량한 사막길을 달렸다.
○뜻밖의 단비 촉촉히 유원에서 새벽 1시58분에 출발한 북경발 우루무치(오노목제) 행 열차는 야음을 뚫고 감숙과 신강을 가르는 성성협을 북쪽으로 바라보면서 서행을 계속했다. 유라시아 철도기행의 신강위구르 자치구 구간 첫 기착지인 하미(합밀)에 도착한 것은 아침 6시 57분. 유원으로부터 2백72㎞의 거리를 꼬박 5시간이 걸린 셈이다. 하미역에 도착하자 기자는 플랫폼에 흥건히 물이 괼 정도로 비 가 내린 것을 발견하고 매우 놀랐다. 극도의 건조지대에 속하는 하미에 비가 내렸다는 것 자체가 예삿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서역으로 불리는 신강은 그 면적이 1백60만㎢에 달 하는 중국 최대의 성구다. 그러나 한국 면적의 16배가 넘는 신강은 대부분 사막과 산지 가 차지하고 있다. 연중 만년설인 천산산맥이 거의 중앙부를 동서로 관통하는 신강 지역은 고래로 유라시아 대륙의 동과 서를 연결하는 중요한 통 로 구실을 해 왔다. 일찍부터 천산의 남과 북에 각각 통로가 개통돼 이를 천산북로 , 천산남로라 불렀다. 실크로드는 바로 이 통로를 가리킨다. 또 신강의 남쪽, 즉 곤륜산맥과 아얼진(아이금)산맥의
북쪽 기슭을 따라 난 서역남로까지 합치면 실크로드는 북으로부터 북로 , 중로, 남로의 3갈래가 된다. 바로 천산북로의 거점으로 2천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하미는 오늘날 신강의 동대문으로 통한다. 유라시아 횡단철도와 상해에서 우루무치까지 통하는 312번국도 가 시내 한복판을 통과하는 하미는 유리한 교통조건을 활용, 자 연스럽게 신강동부지역 최대의 물자 집산지로 부상하고 있다. 대형유전 잇따라 발견 90년대 들어 하미와 다음 행선지인 투루판(토노번)을 합친 하투(합토)지구에서 잇따라 3개의 대형 유전이 개발되면서 하미 시에 대규모 석유 기지를 건설중인 것도 이곳의 공업 발전전망을 밝게 하는 요소의 하나로 지적될 만하다. 하미는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하미과(합밀과·참외)의 원산지이기 도 하다. 연간 강우량 1백㎞미만의 초건조 기후조건에서 재배되는 하미과 는 당도가 최고 20%에 달해 그 맛과 향기로 정평이 나 있다 . 연산 5만t에 달하는 이곳의 하미과는 국내외에 출하될 뿐 아 니라 하미과 주스로 가공돼 재정 수입의 상당분을 충당하고 있다 . 하미 동부에서 시작되는 천산과 성성협에서 주로
나는 진귀한 화강암은 전세계의 최고급 건축에 사용되며 한국으로부터의 수요도 있다고 한다. 시원하게 넓은 도로 양편으로 백양수가로수가 의장대를 이루는 하미 시내에는 서유기에 나오는 가공의 화과산 자취가 지금도 남 아 있긴 하지만 정작 산은 없어진 채 시가로 변해 버렸다. 13, 14세기 이래 위구르족이 이슬람화되면서 하미시 근교에 지금도 남아 있는 대표적 문물로는 지난 1930년까지 3백여 년간 이 지역을 통치한 하미왕국의 9대왕이 묻힌 회왕묘와 당태 종때 모하메드의 제자로 서역에 선교차 왔다 이곳에서 죽은 가이 쓰(개사)의 분묘가 있다. 일정에 쫓긴 기자는 하미에서 낮 동안의 취재를 마치고 밤 열 차편에 투루판으로 향했다. 열차는 이튿날 새벽 4시20분쯤 투루판에 도착했다. 기차역의 이름은 투루판으로 돼 있지만 실제로는 대하연이었다. 투루판 시내까지는 다시 자동차로 약 60㎞를 달려야만 했다. 투루판은 면적이 7만㎢가 넘는 대형분지속에 위치해 있다. 투루판 분지는 해면보다 평균 1백54m나 낮은 저지대인데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여름이면 지표면의 온도가 섭씨 8 2도까지 오른대서 「화주」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지하수노 엄청난 규모 투루판 시내에 들어서면 맨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도처의 싱그러운 포도 덩굴이다. 어떤 곳은 포도 덩굴 사이로 도로가 나 있을 정도다. 투루판 사람들이 세계 제1을 자부하는 「투루판 포도」는 연간 생산량이 17만t에 이른다. 투루판의 명물로는 포도 말고도 전세계적인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는 카레즈, 즉 지하수 통로를 들 수 있다. 천산의 눈 녹은 물이 지하로 스며든 것을 다시 퍼 올려 농작 물 경작에 쓰려는 발상에서 나온 지하 수로의 역사는 3백년이 넘는다고 한다. 지난 81년 등소평도 시찰한 바 있는 투루판 근교의 한 카레즈를 참관한 기자는 지하로 최고 1백m까지 파고 내려가 물길을 끌어낸 중국 인민의 노역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총연장이 5천㎞에 달하는 투루판 일대의 지하수로망을 두고 만 리장성과 경항대운하와 함께 중국의 「3대 역사」로 부르는 이유 를 충분히 수긍할 만했다. 일찍부터 실크로드의 중심지로 발전했 던 투루판은 사적의 보고이기도 하다. 당대에 서역을 경영하기 위해 설치한 안서도호부의 사령부 자리 였던 교하고성은 투루판
시 서쪽 12㎞지점에 있는데 지금은 토담 으로 된 가옥의 자취만 남은 채 나그네의 회고지정을 자아낼 뿐 이었다.<투루판=신영수 특파원>
[0031]우루무치/연운항∼로테르담 횡단27,000리(유라시아철도기행:14) 경향신문 950526 15면 기획 2424자
-------------------------------------------------------------------------------- ◎하늘가린 빌딩숲… 오아시스가 공업도시로/천산백화점 매장엔 「 메이드 인 코리아」 큰인기 ○사막속에 설산 우뚝 투루판(토노번)에서 우루무치(오노목제)까지는 철도로 1백43 ㎞▦의 거리에 불과하다. 천산산맥의 본류와 지류 사이로 뚫린 협곡을 통과하는 열차는 그 속도가 비교적 빨라 2시간반만에 주파했다. 철로 오른쪽으로 보이는 천산의 눈 덮인 봉우리들은 삭막한 사 막 위를 달리는 열차와 어울려 한 폭의 이색 그림을 이룬다. 투루판에서 우루무치 쪽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사막 속에 사 료소(사료소)라는 것이 있었다. 안내한 투루판 외사판공실의 장심항 과장에 따르면 여름철에 최 고 섭씨 80도까지 올라가는 열사위에서 찜질을 하면 97%의 신경통 치료 효과가 있다고 한다. 이 지역의 모래가 어째서 유독 신경통에 효과가 있는지는 장과 장도 알지 못했다. 하미(합밀)에서 투루판으로 오는 도중에 만났을 「서유기」의 유명한 화염산을 밤길이라 보지못한 것을 아쉬워할 즈음 열차는 어느덧 신강유오이(신강위구르) 자치구 구도 우루무치에
닿았다.
우루무치는 2천여년 전 중국의 비단을 가득 실은 대상이 낙타 방울 소리를 울리며 실크로드를 오가던 시절만 해도 천산북로의 단순한 경유지에 불과했었다. 그것이 오늘날에는 유라시아 횡단 철도의 개통과 더불어 현대판 실크로드의 중심지로 새로이 각광받기 시작했다. 지금의 신강이 서역으로 불릴때 우루무치는 허다한 유목민족의 이동거점이었다. 우루무치라는 말 자체가 몽골어로 「아름다운 목 장」을 뜻한다. 동서남북 어느 쪽으로 재더라도 바다로부터의 거리가 2천3백㎞ 이상 떨어진 우루무치는 아시아 대륙의 한복판에 위치한 오지 중의 오지다. 그 오지가 철마의 개통과 함께 서양의 선진 과학기술 문명을 흡수하기 시작하면서 지금은 개발 잠재력이 가장 큰 중국 변경 지역의 하나로 떠오르고 있다. 이전에는 못 하나 만들지 못하던 인구 1백40만의 우루무치는 지금 풍부한 지하자원을 바탕으로 야금 석유가공 방직 기계 전 자 석탄 건축재료 등을 생산하는 종합 공업도시로 변모했다. 공업 시설이 밀집돼 있는 우루무치 북쪽 교외는 산업 차량들이 온통 도로를 메울 정도로 활기를 띠고 있었다. 작년 5월 우 루무치를 처음 찾았을 때 시공중
이던 고층 건물들은 이미 대부분 완공되고 변두리로 신축 공사장이 옮겨 간 것을 보고 기자는 우루무치의 활력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43개 민족 「인종 백화점」 아직도 우루무치를 서역의 한낱 오아시스 정도로만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고층 빌딩이 즐비한 우루무치가 다른도시와 다른 점 이라면 한족, 위구르족, 회족(회족), 카자흐족, 몽골족 등 총 43개 민족이 어우러져 하나의 「인종 백화점」을 이루고 있 다는 것이다. 우루무치 최대의 위구르족 시장인 이도교에 가면 건포도를 비롯 해서 온갖 건과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이 역시 신강이 아니 면 보기 어려운 장면이다. 유목민의 본거지였던 탓인지 우루무치 사람들은 매우 낙천적인 기질을 자랑한다. 예를 들어 기자는 지난해 왔을 때 시내 도처에서 노천 당구장 을 발견하고 퍽 재미 있다고 여겼는데 이번에는 시내 한복판의 인민광장에 노천기원까지 등장해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둘러서서 구경하는 가운데 바둑판과 장기판을 앞에 놓고 대낮부터 수 읽기에 열중인 장면은 「낙천적」이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최근 들어 우루무치에도 한국인들의 발길이
잦아지고 있다. ○한화그룹 국내 첫 진출 한화 그룹(회장 김승연)이 지난해 6월 신강 자치구 정부와 「장기 경제협력에 관한 의향서」에 서명한 것은 경제 발전 잠재 력이 큰 신강 지역과 한국과의 첫 대형 교류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한화 그룹은 현재 한국 기업으로는 유일하게 우루무치에 합작 사업 추진을 위한 현지 사무소를 개설해 놓고 있다. 우루무치 유수의 천산 백화점은 한국과 각별한 인연을 맺고 있었다. 신축 백화점의 내부 매장 설계를 국제 입찰에 부친 결과 한국 의 전통사(사장 안종도)가 낙찰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 백화점의 한 관계자는 한국 회사가 설계를 맡았기 때문에 매장의 배치도 첨단적일 뿐 아니라 경비도 상당히 절감할 수 있 었다고 말했다. 백화점 매장에서는 마침 한국제 복지와 의류를 팔고 있었는데 한 점원은 한국제 의복이 신강 사람들의 환영을 받고 있다고 귀 띔해 주었다. 기자는 우루무치 체재 마지막 날 신강 위구르 자치구 인민정부 의 아부라이티 아부투러시티(아불내제 아불도열서제) 주석을 만났 다. ○회견기사 1면에 게재 그는 광물자원의 보고인
신강의 잠재력을 강조하면서 한국 기업 의 진출을 열렬히 희망했다. 다음날 발행된 신강일보는 아부라이티 주석과 기자의 회견 기사 를 1면에 게재했다. 『……아부라이티 주석은 한국 기자를 접견하고 신강의 개혁개방 과 경제발전 상황을 소개하는 한편 한국 기업가들이 이곳에 진출 해 여러가지 차원, 여러가지 형태의 투자를 진행함으로써 공동 발전을 추구하는 것을 환영한다고 말했다』<우루무치=신영수 특파 원>
[0030]연운항∼로테르담 횡단 27,000리(유라시아 철도기행:15) 경향신문 950602 15면 기획 2584자
-------------------------------------------------------------------------------- ◎중국의 종착역… 이젠 카자흐스탄 땅으로/국경초소 가까이 변경 무역시장은 아직 한산 ○옥토로 변한 스허즈시 우루무치와 쿠툰(규둔)의 중간쯤에 위치한 스허즈(석하자)시는 인간의 피땀으로 사막을 옥토로 바꾼 대표적인 사례다. 인민해방군이 개간하고 상해 등에서 하방돼 온 지식인들이 새로 운 경지 조성 작업에 참여, 황무지를 옥토로 만든 것이다. 지금 그 스허즈는 농업을 주축으로 경방직 공업을 일으킨 신흥 공업도시로 53만개의 입을 먹여 살리고 있다. 밭이랑의 길이가 1㎞는 됨직한 푸르른 겨울밀밭을 지나치면서 기자는 오늘의 신강을 「옥야천리」로 일군 「우공이산」의 신화에 마음이 숙연해지는 것을 금할 수 없다. 신흥도시이기는 쿠툰도 마찬가지다. 지난 57년 해방군 병단의 둔전으로 개발이 시작된 쿠툰은 75년 현급시로 승격되기까지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이룩한 인공도시다. 그래서 쿠툰시는 신강에서 거의 유일하게 외지인으로만 형성된 고장이다. 그 쿠툰이 지금은 신강의 「골든 트라이앵글(금삼각) 」로 불릴 만큼 편리한 교통의 요
충이라는 이점 때문에 크게 각 광받기 시작했다. 특히 유라시아 횡단철도가 개통되면서 쿠툰은 일망무제의 사막 위에 건설된 유통과 가공업의 중심지로 발돋움하고 있다. 농업을 바탕으로 한 스허즈의 개발과는 달리 농업 부문이 거의 없는 쿠툰은 원자재를 모두 외지에서 들여다가 공업을 일으켰다 . 행정적으로 이청(이리)카자흐 자치주의 직할시인 쿠툰은 59년 첫 공장이 돌아가기 시작한 이래 현재 신강자치구내에서 구도 우루무치와 석유 생산지 커라마이(극납마의)에 이어 재정기여도가 3번째로 큰 신강의 「소상해」로 탈바꿈했다. 상주 인구가 9만명 정도로 이동 인구까지 합쳐야 11만명에 불과한 쿠툰의 이같은 경제 실력을 하이샤르 자이다르 시장(카자 흐족)은 다음과 같이 기자에게 자랑했다. ○쿠툰시 신강의 「소상해」 『우리 쿠툰에는 2개의 「최대」가 있습니다. 하나는 신강에서 가장 큰 담배 공장이고 또 하나는 아시아 최대의 토마토 주스 공장입니다. 특히 하루 생산량이 1백44t이나 되는 토마토 주스는 한국·일본·싱가포르 등에 수출되는데 작년에는 한국으로 가장 많이 나갔습니다』 그는 또 쿠툰에서 나는 백주 「쿠툰 특곡(
터취)」은 대만 사 람들에게 인기가 있다고 했다. 이 술에 용새우를 담가 먹으면 맛이 있는 것으로 정평이 났기 때문이란다. 교통의 이점상 유통업이 발달하게 마련인 쿠툰은 도시 전체가 상가다. 백화점을 비롯한 각종 매장 외에 중심가의 도로변까지 온통 노 점상이 차지하고 있을 정도다. 쿠툰 백화점의 슈퍼마켓을 돌아보았는데 물건의 질은 차치하고 없는 물건이 없을 만큼 풍부했다. 쿠툰으로부터 서쪽으로 2백20㎞쯤 떨어진 북강철도의 종점 아 라산코우에 도착한 것은 밤 10시40분쯤이었다. 북경과 적어도 2시간의 시차가 나는 이곳은 밤 10시가 돼도 아직 날이 완 전히 어두워지지 않았다. 다음날 날이 밝은 후에 돌아본 아라산코우는 그야말로 절묘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아라산코우는 중국의 아라타오산(아납투산)과 카자흐스탄 쪽의 바르루커산맥 사이의 회랑에 위치해 있다. 길이 90㎞, 너비 20㎞의 이 회랑 한가운데를 차지한 15 ㎢의 아라산코우는 유라시아 횡단철도 중국 구간의 종점이면서 동 시에 서쪽으로 12㎞ 떨어진 카자흐스탄의 두르즈바역으로 나아가 는 시발점이기도 하다. 지난 90년
이래 5억원(약 5백억원)을 투입해 변방 무역 중개도시로 개발을 추진해 온 아라산코우는 그동안 현대적인 역사 를 비롯해 화물 환적 장치, 창고, 세관, 상품검역소, 은행, 사무실 건물, 호텔, 음식점 등 7㎢의 면적에 갖춰야 할 만 한 기초 시설은 거의 다 갖춰 놓았다. ○화물운송 시일 크게단축 아직은 상주 인구래야 5천명 정도인 아라산코우는 신강에서 철 도와 공로가 동시에 카자흐스탄과 통하는 유일한 지점이다. 철도의 경우 93년 12월1일 국제열차가 정식 개통된 이래 지금은 하루 평균 40∼50개 화차, 2천5백t 정도의 화물이 들어오고 나가고 있다고 유언민 아라산코우 관리위원회 부주임이 밝혔다. 유 부주임에 따르면 한국 화물을 유라시아 횡단철도로 운송할 경우 소요되는 시일을 실험한 결과 처음에는 연운항을 시발점으로 아라산코우까지 23일이나 걸렸지만 지금은 화물관리의 효율성이 높아져 운송 시간이 『크게 단축됐다』고 한다. 아라산코우역에서 서쪽으로 25㎞ 떨어진 지점에 육로로 카자흐 스탄과 통하는 국경 초소가 있고 그 못미처에 변경 무역시장이 있다. 양국 상인들이 모여들어 물건을 사고파는 대형 퀀셋식 건물은
그러나 카자흐스탄측의 사정으로 사람의 왕래가 중단되는 바람에 텅텅 빈 채로 금년 하반기의 재개통을 기다리고 있다. 유라시아 횡단철도의 원활한 운행은 역시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 같았다. 동서 대칭형의 아라산코우 역사의 양쪽 정면 위에 걸린 2개의 시계가 모두 고장난 그대로인 것처럼 아직 고치고 수리해야 할 부분들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기자는 그동안 4천여㎞의 유라시아 횡단철도 중국 구간을 누비 면서 피곤해진 심신을 그날 밤 11시30분 아라산코우를 출발하 는 우루무치행 국제열차의 싸늘한 침대 위에 맡겼다. 그날 낮 아라산코우역에서 확성기를 통해 흘러나오던 「사랑과 영혼」의 영화음악이 잠시 떠올랐다.<아라산코우=신영수 특파원>
[0029]카자흐 드루지바역(유라시아 철도 기행:16) 경향신문 950609 11면 기획 3177자
-------------------------------------------------------------------------------- ◎“여기서부터 중앙아시아” 끝없는 초원이 손짓/역장 “한국기자 방문은 처음”반갑게 맞아 독자들의 열띤 성원을 받고 있는 본사의 95년도 주간 풍물기 획물 「유라시아 철도기행」이 중국구간을 마치고 이번부터 중앙아 시아 구간에 들어섰습니다.신영수 북경특파원에 의해 중국구간이 15회에 걸쳐 보도된데 이어 중앙아시아 구간은 김종웅 모스크바 특파원이 취재·보도 합니다.<편집자주> 중앙아시아. 유라시아 대륙의 심장부, 실크 로드의 중간지점. 긴 역사, 오랜 문화, 동서문화의 가교이면서 동양적 신비가 간직돼 있는 곳. 그러나 현대사의 흐름에서 밀려난 듯, 변화의 물결을 거부 하는 지역. 그리고 현대사의 곡절속에 우리 한국인들도 흘러 들 어와 살고 있는 땅…. ○한국·중국화물 급증세 중앙아시아라는 곳에 대한 우리의 막연한 선입견은 대체로 이런 것이다. 철도로 광활한 스텝(초원)과 오아시스, 그리고 사막 을 달리고 또 달리면서 그중 맞는 것도, 수정해야 할 것도 있 으며 미처 대답할 수 없는 부분도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유라시아철도 중앙아시아 구간은 카자흐스탄쪽 중국과의 접경 역 인 드루지바로부터 시작됐다. 바로 이 역이 연운항을 출발해 중국구간 4천여㎞을 달려온 유 라시아 횡단철도가 중앙아시아와 만나는 접점인 것이다. 중국구간 의 마지막 역인 아라산코우와 드루지바역간은 단지 12㎞에 불과 했다. 중국을 통과한 철도가 처음 머무르는 드루지바는 인구 3천명 정도의 마을. 러시아어로 「우정」을 뜻하는 드루지바는 과거에는 1백여호의 작은 마을이었으나 철도가 중국과 연결되면서 인구가 이만큼 늘어났다. 주민 대부분이 철도와 관련된 일에 종사하고 있어 역을 위해 존재하는 마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역의 역장 압두알리는 『중국쪽에서 화물열차를 통해 들어오 는 컨테이너가 매년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다』면서 『부산항으로부 터 중국을 경유해 이곳을 통과하는 물건도 많은 것으로 알고 있 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현재 매일 4차례 화물열차가 중국(신강자치구)의 우루무치와 카자흐의 알마아타 사이를 왕복하고 있으며 그 물동 량은 하루 5천t에 이르고 있다는 것이다. 옛날 낙타의 등에 가득 실려 이지역을 통해 운반되던 비단 금 은 소금 종이 도자기등이 오늘
날 그 비단길을 따라 가설된 철 도를 통해 컨테이너로 운송되는 TV 냉장고 따위로 둔갑한 것이 다. 그가 내놓은 명함의 한쪽 면은 중국어로 기재돼 있어 중국측과 매우 빈번한 교류가 이뤄지고 있음을 짐작케 했다. 압두알리 역장은 서방세계의 기자들이 그동안 실크 로드와 유라 시아철도 취재를 위해 간간이 드루지바를 찾았지만 한국기자는 처 음이라고도 말했다. ○고려인후예 뜻밖 만남 드루지바라는 오지에서도 고려인을 만날 수 있었다. 구한말때부 터 일제시대에 걸쳐 만주쪽에 이주했다가 다시 스탈린의 이주정책 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이주한 고려인의 후예들이다. 이곳에서 2 년째 세관근무를 하고 있다는 보리스 차씨(32). 한국어는 몇 마디만 겨우 하는 정도였지만 한국에서 왔다는 말에 진심으로 반 가워하며 이곳 저곳을 안내했다. 그는 이 역의 밀수단속 책임자 도 고려인 호씨라고 전했다. 중국의 우루무치로부터 드루지바를 경유해 알마아타까지 달리는 열차의 이름은 「숄코브이 푸치」호. 이는 「실크 로드」의 러시 아어로서 과연 그 옛날 캐러밴들이 오가던 비단길이 바로 이 곳 에 위치했었다는 사실을 실감케 한다. 숄코브이 푸치 호는 급행
이라고는 하지만 드루지바에서 알마아타까지의 8백여㎞를 달리는데 16시간이나 소요된다. 중간에 있는 모든 역에서 정차하기 때 문이다. 워낙 광대한 땅덩어리의 구소련지역에서 이 정도 걸리는 여행은 비교적 짧은 것으로 간주된다. 4인용 객실(쿠페)에 동승한 사람들 중에는 젊은 카자흐인 부부도 있었는데 낯선 외국인에게 흔쾌히 준비한 닭고기 빵등을 권한다. 열차안에는 식당차도 있으 나 대부분의 승객들은 값이 부담스러운 식당을 이용하기보다는 이 처럼 먹을 것을 미리 준비해 식사문제를 해결한다. 이는 또 여 행의 지루함을 덜어주는 효과도 있다. ○카자흐 젖줄 발하슈호수 남편 블라트씨(30)는 알루미늄등의 원광을 중국에 수출하는 사업을 하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부인 할리야씨(29)는 드루지바역에서 5년째 근무하고 있는 미모의 카자쉬카(카자흐여자 ). 할리야씨는 드루지바역과 중국의 아라산코우역 사이에 철도가 연 결된 90년9월12일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구 간에서 화물열차가 통과한 것은 91년9월이었고 객차는 93년1 2월1일에야 처음 개통됐다). 알마아타로 가는 철로변에는 광활한 스텝이 지평선 너머로 끝없 이
펼쳐져 있었다. 이 스텝, 대초원이야말로 과거 유목생활의 터전이었던 것이다. 유목민들은 「유르트」라 부르는 텐트식 집에 기거하며 양과 말등을 키웠다. 카자흐에는 스텝에 관한 전설이 많다. 그 중에는 이런 것도 있다. 「먼 옛날 바닷가 왕국의 왕이 카자흐의 한 공주가 천하 일색 이라는 소문을 듣고 끈질긴 구애끝에 공주를 아내로 맞는다. 그 러나 날이 갈수록 공주는 생기를 잃어 간다. 걱정이 된 왕은 공주에게 요즘 무슨 꿈을 꾸느냐고 묻는다. 공주는 스텝이 펼쳐 진 고향을 꿈꾼다고 대답한다. 왕은 이나라 최고의 화가를 불러 공주의 방 창문에 정교한 스텝의 그림을 그리도록 한다. 공주 는 이후 생기를 되찾아 두 사람은 행복하게 살 수 있었다」 철로변에는 초원지대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드루지바를 출발한 지 얼마 안돼 오른 편으로 호수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알라콜 사수콜등의 호수는 지도상에서는 미미한 것이었지만 실제로 는 수평선이 아득해 보이는 큰 호수였으며 배를 띄워 고기를 잡 는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중앙아시아에 오아시스가 생길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런 호수 들과 그곳으로 흘러들어 오는 강의 풍부한 수량 덕분이었다. 과
거에 캐러밴들이 지친 몸을 쉬어가던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현재 의 도시들이 형성된 것이다. 알마아타행 열차는 출발한지 6시간만에 유라시아철도가 남북노선 으로 갈라지는 아크토가이 역에 도착했다. 이 역으로부터 북으로 달리면 러시아의 노보시비르스크, 옴스크등을 거쳐 모스크바로 연결이 되며 남으로는 중앙아시아가 펼쳐지는 것이다. 아크토가이에서 2시간쯤 달리면 다시 거대한 호수가 나타난다. 이것이 구소련지역 제4의 호수인 발하슈이다. 면적 1만8천3 백㎢인 발하슈호수로는 텐산산맥에서 발원한 길이 1천㎞의 일리( 중국명 이청)강이 흘러들어와 카자흐스탄 동남부의 젖줄이 되고 있다. 열차는 계속 밤을 달려 이튿날 아침 알마아타에 도착했다.<드 루지바(카자흐스탄)=김철웅 특파원>
-------------------------------------------------------------------------------- ◎흩어져 살던 카자흐인들 소 붕괴후 속속 귀향길/10만여 한인 거주… 우리글 「고려일보」도 발행 알마아타는 카자흐말로 「아버지의 사과」 또는 「사과의 아버지 」란 뜻이라고 한다. 정확한 유래를 확인하지는 못했으나 시장에 먹음직스런 빨간 사과가 많이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풍부한 사과산지란 뜻의 지명인듯 했다. 구소련의 15개 공화국 가운데 면적으로는 러시아에 이어 제2의 국가인 카자흐스탄은 2백71 만㎢의 국토 가운데 대부분이 사막과 스텝(초원)지역이다. ○1백여 다민족 전시장 그러나 이 광활한 국토의 동남부에는 텐산산맥의 한 줄기인 해 발 4,000m의 안라토 산맥이 뻗어 있으며 알마아타는 이 산 맥의 북쪽 기슭에 위치해 있다. 이 덕분에 오아시스가 될 필요조건인 물을 갖춘 알마아타에는 시내 어디를 가봐도 나무가 많았다. 알마아타는 북쪽의 초원지대 가 끝난 후 나타난 미루나무와 떡갈나무 아카시아등이 울창한 도 시였다. 6월에 이곳을 찾은 기자에게 봄철에는 하얀 꽃을 흩뿌리는 사 과나무가 매우 아름답다고 사람들은 전한다.
인구 1백10만으로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인구 2백12만) 에 이어 중앙아시아 제2의 도시라고는 하지만 26층짜리 카자흐 스탄 호텔외에 고층건물은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이는 1887년 과 1911년 두차례 대지진의 여파라고 볼 수 있다. 양고기꼬치인 「샤슐리(일종의 바비큐) 가게가 시내 곳곳에서 연기를 피우고 있었고 낮시간에 삼삼오오 모여 중국산 맥주를 마 시며 담소를 즐기고 있는 시민들의 모습이 아시아적 여유를 느끼 게 했다. ○러시아인은 계속 떠나 구 소련을 1백개가 넘은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국가라 고 볼 때 중앙아시아는 그 다양한 민족의 전시장과 같은 지역이 다. 특히 카자흐스탄은 독재자 스탈린의 소수민족 강제이주 정책 이 가장 먼저 시작된 곳으로 수도 알마아타의 중앙박물관에는 무 려 1백여 민족의 생활풍속이 전시돼 있다. 이 민족들 가운데 상당수는 금세기 불과 수십년전 인위적으로 이곳으로 이주당해 살고 있는 것이다. 「고려사람」(구소련지역에 사는 한인들은 스스로를 향상 이렇게 부른다)도 물론 그중 하 나이다. 연해주에 정착해 살던 한인 18만여명이 37년 카자흐스탄등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당한 것을 비롯해 볼가강변의
독일인과 체첸 인, 타타르인, 칼미크인등도 2차대전 기간중 이곳으로 이주 당 해 살고 있다. 그중 체첸인의 경우는 스탈린 사후 복권돼 대다 수가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현재 러시아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전쟁 을 벌이고 있기도 하다. 스탈린이 카자흐스탄을 강제이주의 적격 지로 꼽은 이유는 개발이 가능한 넓은 땅이 펼쳐져 있음에도 불 구하고 인구밀도가 매우 적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 인들은 이곳에 정착한지 몇 해도 되지 않아 맨손으로 황무지를 개간해 풍작을 거둠으로써 스탈린을 놀라게 했다고 전해진다. 소련이 붕괴한 뒤 민족문제가 전면에 부각된 것은 카자흐스탄도 예외일 수 없다. 알마아타에서는 86년 12월 카자흐인이 맡 고 있던 공화국 당 제1서기직을 러시아인에게 넘겨준데 항의해 대학생을 중심으로 폭동이 발생한 적도 있었다. 이 폭동은 기실 구소련 곳곳에서 내연해 오던 민족적 불만이 고르바초프의 등장 을 계기로 폭발한 것으로 평가된다. 카자흐정부가 다른 구소련공화국들에 비해 민족문제가 심각하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소수민족들이 직업활동 재산소유등 많은 분야에서 불이익을 당하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소련시절에는 1천7백만명의 인구 가운데 러시아인은 40%, 원주민인 카자흐인은 36%로 러시아인이 오히려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러시아의 적극적인 동화정책의 결과였다. 그러나 최근 통계에서 이 비율은 카자흐인 44%, 러시아인 36%로 역전됐다. 중국 터키 이란 몽골 등지에 흩어져 살던 카자흐인들이 조국으로 돌아오고 있는 반면 러시아인들은 계속 이 나라를 떠나고 있기 때문이다. 카자흐스탄은 19세기 중엽 러시아제국에 강제로 병합된 뒤 1 936년 소련 구성공화국이 됐다. 러시아의 병합과 수탈이 카자 흐인의 반러시아 감정을 오랫동안 키워왔다는 점에서 두 민족간의 갈등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인을 포함해 강제로 끌려온 소수민족들까지 이런 분위기에 휩쓸려 피해를 입어야 한 다는 것은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알마아타에서는 한국어 신문인 고려일보가 발행되고 있다. 이 신문은 카자흐스탄 거주 10만여명등 구소련지역에 흩어져 사는 50여만명의 한인들을 대상으로 발행되고 있다. 23년 연해주에서 「선봉」이란 제호로 창간된 이 신문은 강제 이주 직후인 38년 레닌기치, 91년 고려일보로 이름을 바꾸고 있다. 이는 중앙아시아에서 살아
온 한인들의 굴곡 많은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다. 90년 한국과 소련사이에 국교가 수립된 후 친북한 일변도에서 벗어나면서 제호를 고려일보로 바꾼 이 신문은 현재 주간발행으 로 겨우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정부가 발행하는 신문이면서도 정부지원이 거의 끊어졌기 때문이다. 현재 발행부수는 약3천부, 소련붕괴후 경제개혁을 통해 실질적 독립을 추구해나가는 이 나 라가 소수민족에게까지 골고루 재정지원을 해주기를 기대하기는 무 리인지도 모른다. 알마아타의 고고학 박물관에는 기원전 8∼9세기의 놀랄 정도로 화려한 황금갑옷이 전시돼 있다. 사크족 족장이 입었던 이 갑 옷은 69년 다른 금제 장식품및 칼 거울 식기등 4천여점과 함 께 알마아타로부터 동쪽으로 50㎞떨어진 이시크의 한 고분에서 원형 그대로 발굴됐다. 이 갑옷은 「황금인간」이란 이름으로 전세계에 알려지면서 고대 카자흐문화의 대표적 유물로 인정을 받고 있다. 카자흐민족은 동서남북 모두 다른 나라와 접경해 있는 지정학적 조건때문에 13, 14세기 칭기즈칸과 티무르에게 정복당하기도 했으나 고유의 언어와 문화를 지켜왔다. ○한국의 70년대 생활수준 한편 같
은 이유로 중앙아시아의 5개 국가가운데 가장 개방적인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알마아타의 거 리에서는 짧은 치마를 입은 여인들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고 시장의 노천 식당에서는 팝송이 들려오기도 한다. 카자흐스탄 정부는 석유 천연가스등의 개발로부터 관광에 이르기 까지 모든 분야에서 외국자본을 끌어들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같은 개방정책에 따라 미국의 석유회사 세브론과 합작으 로 매장량 2백50억배럴의 넹기스유전이 개발되고 있으며 한국의 삼성은 카라간다에 냉장고 공장을 건설했다. 이 나라의 경제현 실이나 생활수준은 대체로 한국의 70년대와 비슷하다고 느껴진다 . 4월 말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은 자신의 임기를 2001년까지 연장하기 위한 국민투표를 실시해 95%의 찬성으로 통과시켰다. 이는 한 국가의 경제개혁과 정치발전은 과연 양립할 수 없는 것일까라는 의문을 다시금 제기하기도 한다.<알마아타=김철웅 특 파원>
[0027]키르기스 수도 비슈케크(유라시아 철도기행:18) 경향신문 950811 11면 기획 2356자
-------------------------------------------------------------------------------- ◎천산산맥 감도는 2천여호수 장관/국토 90%가 산지… 빼어난 경관 자랑/“손님은 신의선물” 나그네 친절히 대접 한국인으로서 중앙아시아를 여행하면 왠지 모르게 친근감을 느끼 게 된다. 같은 아시아라서일까. 우선 황색 피부와 검은 머리카 락을 많이 만나게 된다. 물론 수많은 인종이 뒤섞여 살고 있지 만 대부분은 동양사람의 얼굴이다. 또 사고방식이나 생활습관이 서양과는 판이하게 다른 반면 우리와 유사한 부분이 많다는 점에 서 동양적이다. 우리 시골처럼 시간관념이 별로 없는 대신 낯선 사람에게도 대체로 친절한 순박성을 간직하고 있다. 중앙아시아는 역사적으로 숱한 국가와 민족이 흥망성쇠, 이합집 산을 거듭했던 곳이다. 인종학적으로는 매우 복잡한 분류가 이뤄지고 있지만 한눈에 이 를 구분하기는 매우 힘들다. 물론 자기들끼리는 얼굴모양과 말씨 등으로 출신민족을 잘도 알아맞힌다. 그러나 한국인도 얼마든지 카자흐나 키르기스인 행세를 할 수 있다. 언어도 다양하지만 이란어계인 타지크어를 제외하고는 서로 비슷한 것이 많고 대충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같은 투르크어계이기 때문
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빵은 우즈베크말로 「논」인데 카자흐에서는 「난」이 라고 한다. 키르기스의 화폐단위는 「솜」이며 우즈베크의 화폐는 「숨」이다. 카자흐스탄 등 구소련을 구성하던 중앙아시아 5개 국가의 공식 이름은 모두 「스탄」으로 끝난다. 이들 나라말고도 아프가니스탄 , 파키스탄등 회교권국가의 이름도 그렇다. 스탄이란 이 지역 언어로 「나라」를 뜻하는 말이다. 여느 회교권 국가들처럼 신자 들은 하루 다섯번씩 메카를 향해 예배를 한다. 이들 나라의 색다른 공통점이 또 한가지 있다. 카자흐 우즈베 크 투르크멘의 세나라는 지난해와 올해에 걸쳐 국민투표를 통해 압도적인 표차로 대통령의 임기를 5∼6년씩 연장했다. 야당은 유명무실한 존재이다. ○알마아타서 16시간 소요 명분은 무엇보다도 「신생국」으로서의 정치안정이다. 구소련으로 부터 독립한지 3∼4년 밖에 안된 이들로서는 효율적인 개혁추진 이 무엇보다 시급하기 때문이란 것이다. 또 이같은 명분을 뒷받 침하기 위해 강력한 경찰제도를 도입하고 있는 것이 이들 나라이 다. 생활수준은 아무리 좋게 봐도 우리의 60, 70년대 정도다. 그리고 주로 경제논리 때문에 정치발전은
뒷걸음질치고 있다. 키르기스스탄은 몇가지 면에서 중앙아시아 국가들 가운데서 독특 한 존재라 할 수 있는 나라였다. 우선 자연조건이 사막과 스텝 지역이 대부분인 인근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과 판이하게 다르다 . 북쪽에는 천산산맥이 뻗어있고 남쪽으로는 파미르고원이 놓여 있는 이 나라는 국토의 90%가 산지이며 3분의 2이상이 해발 3,000m보다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동쪽 중국과의 접경에 있는 해발 7,439m인 포베다(승리) 봉을 비롯해 해발 4,000∼5,000m의 봉우리가 즐비하다. 2,000개 이상의 산중호수가 있는데 특히 동북부의 이시크 쿨 호수는 「천산의 진주」로 불릴만큼 맑고 깊은 물과 주위의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이 호수로는 천산산맥의 만년설에서 발 원한 80여개의 하천이 흘러들어 풍부한 수량을 연중 유지해 준 다. 천혜의 관광자원이 널려 있는 나라다. 회교 모스크와 배화교 사원, 그리고 불교의 탑이 공존하는 나 라가 키르기스스탄이다. 이는 키르기스 사람들의 친절하고 참을성 많은 성품과도 관련이 있는 것같다. 이 나라 속담에는 「손님은 신의 선물」등 손님접대에 관한 내 용이 많다. 그만치 손님을 대접하는 것과 사람을 사귀는 일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알마아타로부터 비슈케크까지는 기차로 16시간이 소요됐다. 두 도시를 가로막고 있는 알타이 산맥을 우회해 한참을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원래 이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건설된 성채로부터 시작된 도 시 비슈케크는 키르기스어로 「다섯 기사」란 뜻이다. 옛날 5명 의 기사들이 이 비옥한 땅을 차지하기 위해 싸웠다는 전설에서 유래되고 있다. 이 도시의 이름은 이 지방출신의 혁명가 미하일 프룬제장군을 기념해 프룬제로 개칭됐으나 91년 옛이름으로 환 원됐다. 비슈케크의 오페라극장 앞에는 말을 타고 달리며 칼을 휘두르는 모습의 「마나스」 기념 동상이 서 있다. 마나스란 키르기스인 사이에 전해 내려온 장대한 민족영웅 서사시이다. 이 서사시는 그리스의 오디세이와 일리아드를 합친 것보다 길다. 키르기스스 탄은 마침 올해를 그것이 완성된지 1,000주년이 되는 해로 기념하고 있다. ○민족영웅 「마나스」 동상 옛날 태평양 연안에서 다뉴브강에 이르는 광활한 대지에서 흩어 져 살던 유목, 기마민족들의 생활상과 철학을 담은 마나스는 지 금도 널리 암송되고 있는 키르기스인들의 정신적 유산이다. 그 옛날
말탄 전사들이 사막과 초원, 산악을 달리던 광경을 상상하며 비슈케크에서 타슈켄트까지 38시간이 걸리는 완행열차에 몸을 실었다.<비슈케크=김철웅 특파원>
[0026]우즈베키스탄 수도 타슈켄트(유라시아 철도기행:19) 경향신문 950818 14면 기획 3070자
-------------------------------------------------------------------------------- ◎고려인 땀으로 일군 중앙아 최대도시/37년 연해주서 강제이주 … 소수민족 차별 다시 “꿈틀” 「돌의 도시」란 뜻을 가진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는 중 앙아시아 최대 도시다운 현대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인구 212만명의 이 도시 중심가에서는 고층건물들도 눈에 많이 띄었 고 중앙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지하철이 달리고 있다. ○실크로드 정취 사라져 19세기 후반 러시아에 점령된 후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진출의 거점으로 성장해 온 이 도시에서는 서북지역의 구시가를 제외하 고는 옛날 실크로드의 정취를 찾기가 힘들 정도였다. 해질 무렵 목을 축이기 위해 찾은 호텔 우즈베키스탄의 바에서 는 미니스커트를 입은 젊은 여종업원들이 서양음악에 맞춰 매우 자연스럽게 몸을 흔들면서 술을 팔았다. 종업원 타냐 김(24) 으로부터 자신은 고려인이며 조부가 연해주에서 이곳으로 강제이주 돼 타슈켄트에서 태어났다는 말을 들을때까지는 이곳이 중앙아시아 란 사실을 잠시 잊을 정도였다. 전통적으로 중앙아시아와 카자흐스탄, 시베리아, 우랄지방, 유 럽, 인도, 중동 등 동남
북을 잇는 교차로 역할을 해온 이 도 시가 오늘날 이같이 현대화한것은 당연한 시대의 흐름처럼 여겨지 기도 한다. 그러나 이튿날 타슈켄트 남쪽에 위치한 쿠일류크의 바자르(시장 )를 찾았을 때는 동양의 냄새가 물씬 풍겨나면서 우리에게도 얼 마든지 낯익은 재래시장의 정취를 느끼게 했다. 「쿠일류크」는 우즈베크어로 「양들이 많이 있는 장소」란 뜻이라고 한다. 아마 도 과거 이곳에는 가축시장이 있었기 때문에 이같은 명칭이 생긴 것으로 추측된다. ○양고기 꼬치구이 “원조” 양을 많이 키우는 중앙아시아에서는 전반적으로 양고기를 즐겨먹 는데 특히 우즈베키스탄은 어디를 가봐도 양고기 꼬치구이인 「샤 슐리크」를 팔고 있었다. 이것은 양고기를 엄지손가락 크기 정도로 잘라 꼬치에 끼운 채 로 구워 생양파와 함께 토마토케첩에 찍어 먹는 것으로 러시아에 까지 전파돼 있으나 그 「원조」는 어디까지나 중앙아시아이다. 원색의 의상을 입고 호객을 하면서 빵과 채소, 과일, 고기 하스입(순대와 비슷한 것)등속을 파는 상인들 가운데는 고려인들 도 많이 섞여 있었다. 현재 중앙아시아에서 고려인이 가장 많이 사는 나라는 우즈베키스탄으로 그 숫자는 20만명에 이른다.
이웃 카자흐스탄의 11만명보다 2배에 가까운 숫자이다. 우즈베키스탄에는 37년 연해주로부터 고려인 7만4천여명이 도 착했다. 이 시장에서 김치를 팔고 있는 김 안나할머니(67) 역시 부모를 따라 어린 나이에 강제이주 당한 고려인이다. 김할 머니는 『원동이 고향이며 엄마의 고향이 강원도라는 것밖에 가족 역사는 모른다』며 겸연쩍게 웃었다. 원동은 러시아어로 「먼 동쪽」을 뜻하는 「달느이 보스토크」를 우리말로 직역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인들은 우리가 말하는 「 극동」을 이렇게 부르고 있다. 묻는 말에 사람좋은 웃음만 짓는 할머니는 나이보다 10년은 더 들어보였다. 아마도 그 주름살 속에는 연해주에 살던 고려인 들이 애써 일군 생활터전을 버려둔 채 강제로 열차에 짐짝처럼 실려 낯선 땅으로 끌려와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의 신산함이 감춰 져 있을 것이다. 시장 노점에는 한국에서 흘러 들어온 화투도 진열돼 있었다. 스탈린이 소수민족 집단 강제이주정책의 첫 케이스로 고려인을 선택한 이유는 아직까지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일 본과의 전쟁에 대비하던 스탈린은 고려인이 일본과 협력할 것을 우려했으며 타고난 근면성으로 기반을 닦은 고려인이 자치를 주장
하는 것을 미리 방지하고, 인구가 적고 황무지나 다름없는 중앙 아시아를 개발하는데 이용하기 위해 이를 강행한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벡체미르는 타슈켄트에서 고려인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다. 이 지역내에 위치한 「노인들을 위한 휴식처」에서는 몇명의 노인들이 모여 차를 마시며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자신을 이(76)라 고만 밝힌 한 노인은 『우리들은 단오나 추석, 설 등 명절도 지키며 조선말을 잊지 않고 있지만 젊은이들의 대부분은 관심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중앙아시아에 사는 젊은 고려인들로서는 기실 한국어 보 다는 현지어를 잘 하는 것이 더 절박한 일이 됐다. 공화국들이 독립한 후 공식언어를 과거의 러시아어에서 자국어로 바꾸고 있 기 때문이다. 많은 젊은이들이 『한국어를 배워서 어디에 쓰느냐 』고 반문했다. ○시내 곳곳에 교통경찰 이 동네에서 만난 어린 소녀들도 전혀 한국말을 할 줄 몰랐다 . 생김새나 수줍어하는 모습은 영락없는 한국인이었지만 『몇살이 냐?』는 물음에는 묵묵부답이어서 러시아어로 『스콜코?』라고 묻 자 『7살』이라고 러시아어로 대답했다. 강제이주 당한 고려인들은 그야말로 영웅적인 노력으로 황무지를
옥토로 일궈 콜호스(집단농장)를 만들었다. 농사를 많이 짓고 있는 우즈베크에는 아직도 많은 콜호스가 있으며 과거에는 그 디렉터(책임자)를 고려인이 맡는 것이 당연시 됐다. 그러나 현 재 그 자리는 대부분 현지인으로 교체되는 등 고려인들에 대한 새로운 형태의 민족차별이 가시화되고 있다고 한다. 이에따라 고려인들 사이에는 연해주로 돌아가려는 움직임도 일고 있다. 부근 식당에서는 「회」란 음식을 팔고 있다. 어디에서 유래한 이름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이는 개고기 요리로 이를 전파한 고려인들 뿐 아니라 우즈베크인, 러시아인들도 즐겨 먹고 있었다. 우즈베키스탄 어디에서든 눈에 띄는 것으로 샤슐리크 구이말고 또 한가지 든다면 그것은 정사복차림의 경찰이다. 타슈켄트시내에 는 몇 백m 간격으로 교통경찰이 단속의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최근 경찰력을 대폭 확대한 결과 범죄가 한결 줄어들었다고도 한다. 한밤중에는 시내에서 행인들 마주치기가 힘들 정도로 정적 이 감돈다. 고도 사마르칸트로 여정을 옮기기 위해 타슈켄트역을 출발하는 과정에서 작은 사건이 벌어졌다. 촉박한 일정에다 열차편으로 국 경을 통과하는데 어떠랴 싶어 카자흐스탄의 알마아타에서 우즈베키 스탄으로 떠나오면서 이 나라 입국비자를 미처 발급받지 못한 것 이 화근이었다. 열차가 출발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경찰의 검문을 받고 하차당해 야 했다. 밀입국자 신세가 된 것이다. 여행목적등에 대해 조사 를 받는 동안 오후 4시발 열차는 떠나버렸다. 말끔한 용모의 젊은 경찰은 경위설명을 다 들은 뒤 2시간 후 떠나는 사마르칸트행 열차표를 구할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다. <타슈켄트=김철웅 특파원>
[0025]우즈베키스탄 제2도시/사마르칸트(유라시아 철도기행:20) 경향신문 950825 18면 기획 3208자
-------------------------------------------------------------------------------- ◎티쿠르제국의 옛 영화서린 “푸른 고도”/곳곳 중세 모스크·왕 족묘… 학문요람 메드레세의 절묘한조화 “탄성” 관광지로서 사마르칸트는 이름이 꽤 알려져 있는 편이지만 정작 이 도시가 로마 만큼이나 유서깊은 곳이란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타슈켄트에 이어 우즈베키스탄 제2의 도시 (인구 40만명)인 사마르칸트는 그러나 타슈켄트와는 전혀 다른 색채를 띠고 있다. 한마디로 고도인 것이다. ○2500년역사 “야심의 땅” 사마르칸트를 「푸른 도시」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는 도시 곳 곳에 산재한 중세 모스크와 왕족들의 묘들이 저마다 푸른색 돔을 머리에 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푸른색은 청록빛깔의 터키석장식이 연출해 내는 신비감의 근원이기도 하다. 14세기 파키스탄, 이란에서부터 카프카스를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던 티무르(1336∼1405)는 사마르칸트에 도읍을 정 하고 이 도시를 「세계의 중심」으로 만들겠다는 야심을 키웠다. 그는 이를 위해 원정을 떠나면 닥치는대로 그 지역의 유명한 예술가와 건축가들을 끌고 와 아름다운 도시로 꾸미도록 지시했다
. 특히 그는 푸른색을 좋아해 사마르칸트를 푸른도시로 만들었다. 현재 남아있는 건축물의 대부분은 티무르와 그 후계자들의 시대 에 건설된 것이다. 비록 지금 사마르칸트는 「세계의 중심」이라 고 불리지는 않지만 여전히 「이슬람세계의 진주」로 남아있다. 그러나 사마르칸트의 역사는 기원전 수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 1970년 이 도시는 이미 설립 2,500주년을 기념했다 . 기원전 5세기경 제라프샨강 유역에 살던 소그드인들은 오아시 스가 있는 아프라시아프 언덕에 마라칸다라는 도시를 건설했다. 오늘날 이 도시의 동북부에 위치해 있는 이 언덕으로부터 사마르 칸트의 유구한 역사는 시작된다. 그 2,500년동안 사마르칸트는 수많은 민족의 침략과 지배를 받아왔다. 그중 굵직한 것만 들어도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기 원전 4세기), 아랍인의 침략에 의해 세워진 사라센제국(8세기 ), 칭기즈칸의 침략(13세기)등이 있다. 티무르제국의 수도가 되면서 사마르칸트는 지금의 도시 한 가운 데 위치한 레기스탄 광장을 중심으로 재건되었다. 실크로드 교역 의 가장 중요한 중개지로 번영을 구가하게 된 것도 이때의 일이 다. 3개의 메드레세로 둘러싸여 있는 레기스탄
광장은 오늘날 가장 뛰어난 동양 건축물의 집결체로 꼽히고 있다. 메드레세는 중세 이슬람의 신학교를 말하며 레기스탄은 「모래의 땅」을 뜻한다.
메드레세는 말이 신학교이지 당시에는 신학 뿐아니라 천문학 철 학 역사 수학 음악등을 연구하는 종합대학의 역할을 수행했다. 가장 오래된 것은 1420년 티무르의 손자인 울루그 베그가 지 은 메드레세이다. 끝이 뾰족한 아치형 현관과 그 옆에 우뚝 선 2개의 미나레트(광탑)등 메드레세건물 전체가 정교한 모자이크 로 장식돼 오묘한 색채를 발산하고 있다. 회교사원이나 신학교와 함께 건설된 미나레트는 사람들에게 하루 5차례 예배시간을 알려주는 기능과 함께 밤에는 사막의 등대역 할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옛날 캄캄한 사막을 여행하던 캐러 밴들은 탑의 꼭대기에 밝혀진 불빛을 목표로 물과 음식 그리고 사람들의 환대가 기다리는 오아시스를 향해 지친 몸을 이끌었을 것이다. 건물안으로 들어가 보면 다시 광장형태의 아름다운 정원이 나타 나고 그 둘레에는 모스크와 강의실, 학생들이 살던 기숙사들이 남아있다. 위정자라기보다는 뛰어난 학자로서 「학문을 연마하는 것은 전 이슬람국민의 의무」라며 학문을 장려했던 울루그 베그의 덕택에 이 메드레세는 15세기 이슬람지역에서 가장 뛰어난 신학교이자 천문학등 이른바 「세속학문」의 요람이 될 수 있었다.
○고려인 청년사업가 만나 레이스 탄 광장의 진가는 무엇보다도 시대를 달리해 건설된 3 개의 메드레세가 빚어내는 조화의 아름다움이라고 한다. 셰르 도 르(용맹한 사자)메드레세와 틸리야 코리(김장)메드레세는 이미 티무르제국이 쇠퇴한 17세기에 지어진 것들이지만 3개의 건축물 이 서로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어 감탄을 자아낸다. 중앙아시아의 어느 지역에 가도 고려인을 마주칠 수 있었던 것 은 사마르칸트의 찬란한 유적들 속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울루 그 베그 메드레세에서 만난 스타니슬라프 노씨(30)는 레기스탄 안에 토산품점을 5개나 갖고 있는 청년사업가였다. 관광가이드를 하다가 4년전 장사를 시작했다는 그는 『친구들의 도움으로 부지런하게 일하다 보니 장사규모가 커졌다』면서 『남 들이 사업을 모를 때 시작한 것이 성공의 비결이었던 것 같다』 고 말했다. 사마르칸트 취재가 목적이란 말을 들은 노씨는 이 도시에 관한 자료들을 아낌없이 내주었고 그중 일부는 벌써 구입 했노라는 기자의 말에 몹시 애석해 하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사마르칸트의 수많은 유적들 가운데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왕 족들의 묘인 샤히 진다(살아있는 왕)와 구르 에미르(지배자의 묘)이다. 샤히 진다
는 티무르 이전인 11세기부터 형성된 묘역 으로 역시 푸른색을 주조로 한 모자이크 건물들과 그 내부의 묘 실들로 구성돼 있다. 티무르의 처와 울루그 베그의 자녀등이 매 장돼 있는데 그 뒤편 언덕에는 공동묘지가 조성돼 있어 산 자들 을 숙연케 한다. 한편에는 그 옛날 티무르제국의 영화를 누렸던 자들이 화려한 장식속에 누워있고 그 옆에 우리와 동시대인들은 무덤위의 돌에 새긴 초상화를 내건 채 묻혀 있다. 죽은 자들은 말이 없고 살 아있는 우리들 또한 할 말을 잊는다. 작열하는 태양속에서 미풍 이 불어와 묘지의 나뭇잎들을 흔든 뒤 언덕아래 모스크의 푸른 돔을 스쳐간다. 멀리 황토색 골목길에서는 어린아이들이 뛰놀고 있다. ◎티무르,구르에미르에 묻혀 직경 15m의 푸른색 대형 돔이 돋보이는 구르 에미르는 티무 르의 손자 무하마드 술탄이 이란에서 전사한 것을 추도해 지은 것으로 명나라 원정중 급사한 티무르 자신도 이곳에 묻혔다. 1 941년 학자들이 이 무덤들을 개봉해 조사한 결과 티무르가 전 투중 입은 부상으로 불구가됐고 울루그 베그는 목이 잘려 암살당 했다는 사실이 유해를 통해 증명됐다. 울루그 베그가 세웠던 천문대는 2
0세기 들어 발굴됐는데 당시 페르시아 등지에서 저명한 천문학자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거 대한 규모의 육분의(별들의 거리를 측정하는 기구)를 통해 놀랄 만큼 정밀한 천문관측이 이뤄졌으며 이 성과는 17세기 유럽으 로 전파됐다. 현군 울루그 베그가 암살당한 이유가 이같은 그의 학문중시정책 때문이었다는 점은 아이러니컬하다. 그는 이슬람교보다 학문이 우선시되는 것을 못참는 승려들의 사주를 받은 그의 아들이 보낸 자객에 의해 암살당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마르칸트=김철웅 특파원>
[0024]우즈베키스탄 부하라(유라시아 철도기행:21) 경향신문 950922 11면 기획 3069자
-------------------------------------------------------------------------------- ◎관광객 끊긴 시가엔 구슬픈 이슬람 송가만…/「실크로드 중계지 」 잔영덕에 한때 호황… “옛날이 좋았다” 시민들 구소동경 사마르칸트로부터 서쪽으로 230㎞ 정도 달리면 나타나는 부하 라는 두 가지 점에서 사마르칸트와 쌍벽을 이루는 도시이다. 중 앙아시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으며 과거 실크로드 무역의 가장 주요한 중계지였다는 점에서 그렇다. 현재 남아 있는 유적들의 대부분은 중세에 지어진 것이지만 고 고학적 발굴 결과 그 역사가 기원전으로 거슬러 올라감이 증명됐 다. 부하라는 처음 도시가 생성됐을 때부터 지금까지 한번도 그 위 치를 옮기지 않은 채 「수직적으로」 성장해 온것이다. 지금도 지하 20m의 깊이에서 주거지와 공공건물, 성채의 잔 해 등 유적 뿐 아니라 도자기, 주화, 보석 등이 발굴되고 있 다. ○2,500년전 유물 지금도 발굴 이를 종합할 때 부하라의 역사는 사마르칸트처럼 2,500년이 넘은 것으로 볼 수 있으며 학자들에 따라서는 3,000년이 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부하라라는 이름
은 산스크리트어로 불교사원을 뜻하는 「뷔하라」 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708년 부하라는 아랍인들의 침입을 받아 언어와 종교가 바뀌 고 이슬람화의 길을 걷게 된다. 구시가에는 13세기 칭기즈칸 침공 전후에 지어진 수많은 메드 레세(신학교)와 모스크, 타키라는 둥근 지붕의 시장 건물, 미 나레트(탑) 등이 세워져 있다. 부하라에 사는 사람들은 이 도시를 다양한 표현으로 부르고 있 다. 「도시 박물관」 「현명한 부하라」 「축복받은 부하라」 「 점잖은 부하라」 등이 그것이다. 그런 설명을 듣고 보니 부하라 남자들의 모습과 걸음걸이, 말 투에서 결코 서두르는 법이 없으며 매사에 신중하고 다분히 금욕 적이며 중재를 좋아하는 「점잖은 부하라」 사람들의 성품을 읽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부하라가 자랑하는 수많은 유적들 가운데서도 손꼽히는 것은 이 스마일 샤마니왕의 묘이다. 이는 이슬람 통치 초기인 900년에 건설된 것으로 부하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중앙아시아 건축물의 기념비적인 존재로까지 평가되는 이 묘는 태양의 위치에 따라 흙벽돌의 무늬가 오묘한 변화를 일으키는 것 처럼 보여 신비감을 더해 준다.
이 건축물에는 그 성가를 뒷받침해 주는 많은 전설과 일화가 얽혀 있다. 이 묘를 지을 당시 사용된 진흙 벽돌은 수천년을 견딜 수 있도록 낙타 젖으로 반죽을 해 만들어진 것으로 전해진 다. 그 때문인지 이 묘는 1,000여년이 지난 현재에도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근세에는 이 묘의 자태에 반 한 미국의 한 부호가 자신의 묘로 쓰기 위해 이를 사들이려 했 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묘의 벽돌들을 뜯어내 캘리포니아 자신 의 땅에 옮겨 다시 세우겠다는 것이었다. ○낙타젖으로 만든 샤마니묘 미국 부호의 구상을 전해 들은 이곳 묘지기는 의연한 태도로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전세계 부자들의 돈을 다 모아도 샤 마니의 묘를 살 수는 없다. 그것은 값을 매길 수 없기 때문이 다』 부하라에는 중앙아시아는 물론 옛소련 지역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이슬람 신학교인 미리 아랍이 있다. 현재 중앙아시아에서 메드레세로 불리는 다른 신학교들은 건물만 남아있을 뿐 학생들을 가르치지 않는다. 15세기에 세워진 이 학교 정문 앞에는 학생들이 나와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학교 옆에 우뚝 서 있는 칼랸 미나레트의 그
늘 밑에서 휴식중에도 코란을 소중히 끼고 있거나 암송하는 어린 학생들의 모습이 진지하기 그지없다. 5년제의 이 대학에는 회 교권의 여러 나라에서 모여든 250명의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다 . 『코란의 어떤 가르침을 좋아하느냐』는 물음에 총명한 눈매의 한 학생은 『코란은 우리에게 산소와 같은 것』이라고 우회적으로 대답한다. 모든 가르침이 소중하다는 뜻이리라. 높이 46m의 칼랸 미나레트는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탑으 로 부하라 시내 어디에서도 보인다. 12세기 무명의 건축가가 지은 것으로 지금도 탑 꼭대기에서는 하루 5차례씩 예배시간을 알리는 송가가 울려퍼진다. 18∼19세기 부하라 한국시대에는 죄인들을 이 탑의 꼭대기에서 내던져 처형했다고 해서 「죽음의 탑」으로 불리기도 한다. 옛날 칭기즈칸은 칼랸 미나레트를 목표 로 부하라를 침공했으며 이 때문에 탑이 파괴되지 않았다고도 전 해진다. 옛소련 시절만 해도 부하라는 각처에서 몰려든 관광객들과 예술 가, 사진작가들로 1년 내내 북적거렸다. 그중 대다수는 옛소련 내의 다른 공화국에서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기자가 찾은 부하라는 이상하리만큼 한산했다. 구시가의 매표소와 매점들은
대부분 문을 닫고 있었다. 그 주된 이유는 옛소련이 무너진 뒤 호텔 등 서비스 시설들이 엉망이 되었고 물가도 크게 올랐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중에 만난 소베츠카야 부하라 신문의 슈라예프 기자(57) 등 많은 사람들도 이에 동의했다. 러시아인인 슈라예프 기자는 옛소련 붕괴 이후 우즈베키스탄의 폐쇄적인 정치체제 때문에 사람 들의 발길이 끊겼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타민족들이 이곳 에서 살기 힘들어 떠나는 판에 구태여 이곳으로 관광을 올 사람 이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호텔 등 서비스시설 엉망 7세기에 지어졌다는 웅장한 아르크(방주) 성채에서 만난 관광 안내인 지나트(32·여)는 『관광객의 발길이 끊겨 일거리가 없 다』고 하소연했다. 그는 자신이 이 성채 안에 있는 역사박물관의 전문 가이드임을 꼭 신문에 소개해 달라고 기자에게 당부하며 연락처까지 적어 주었다. 해가 기울어가는 오후 6시의 구시가. 텅 비다시피한 황토색 거리 위로 구슬픈 가락의 노래가 울려 퍼졌다. 신도들에게 예배 시간을 알리기 위해 칼랸 미나레트에서 확성기 를 통해 나오는 이슬람 송가였다. 옛날 실크로드의 중심교역지로 번영
을 누렸고 또 그 잔영 덕분 에 활기를 띠었던 부하라는 이제 시대의 흐름에서 밀려나 영락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이날 기자는 욕실에 물도 나오지 않는 제라프샨 호텔에서 고려 인 호텔사장 비탈리 천씨, 슈라예프기자 등과 밤늦도록 보드카를 마시며 부하라의 역사와 실크로드 등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누 었다. 이들은 모두 『옛날이 좋았다』고 토로했다. 그들이 말하 는 옛날이란 옛소련시절을 뜻하는 것이었다. 국수를 팔고 있는 호텔 뒤편의 노천식당에서는 귀에 익은 휘트 니 휴스턴의 노래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부하라=김철웅 특파원 >
[0022]투르크메니스탄 수도 아슈하바트(유라시아 철도기행:22) 경향신문 950929 15면 기획 3129자
-------------------------------------------------------------------------------- ◎「영혼」으로 짜낸 “카펫의 성지”/역마다 암표 극성… 페르시 아풍 미녀들 수줍은 몸짓 우즈베키스탄의 부하라에서 투르크메니스탄의 차르조우로 가는 열 차는 점심 무렵 국경 부근의 알라트라는 작은 역에 기착했다. 기자는 이 역 부근 콜호즈에서 농사를 짓는 아슬란(42)의 농가에서 잠시 신세를 지게 됐다. 과거 영화제작에도 관계했다는 그는 대단히 과묵한 사람이었지만 손님을 대접하는 일에는 아낌 이 없었다. 마당의 나무 그늘 밑 평상에서 모처럼 고기와 과일 및 술로 포식하며 즐기다 보니 어느덧 열차시간이 되었다. ○「이슬람 의리」에 감동 뜻밖에도 차르조우행 열차는 초만원으로 지붕에까지 사람들이 올 라타 있는 상태였다. 기자는 이미 출발하기 시작한 열차를 가까 스로 잡아탈 수 있었으나 중요한 자료가 들어있는 가방을 열차에 싣지 못하고 배웅나온 아슬란 일행에게 남겨 두고 말았다. 열차는 투르크메니스탄의 차르조우에 도착했으나 기자는 두고 온 가방 때문에 마음이 편치 못했다. 짐을 찾기 위해서는 다시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다시 국경을 넘는다는 것이 결
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걱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한밤중 아슬란이 가방을 들고 기자가 묵고 있는 호텔로 찾아 온 것이었다. 그는 짐을 돌려 주기 위해 택시를 전세내 국경을 넘어 차르조우에 도착해 시내의 모든 호텔을 뒤졌다고 했다. 그는 이튿날 아침 『우리는 친구이며 따라서 형제』라는 말을 남기고 알라트로 돌아갔다. 이 경험에서 이슬람적 유대의식이랄까 , 의리의 실체를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차르조우는 인구 15만으로 투르크메니스탄 제2의 도시다. 중 앙아시아에서 가장 긴 아무 다랴 강변에 위치해 있는데 그 지명 은 「4개의 길」이란 뜻이다. 즉 이 도시도 과거 실크로드의 주요 교통요지였음을 알 수 있다. 차르조우에서 투르크메니스탄의 수도 아슈하바트까지는 610㎞다 . 차표가 없어 역부근에서 암표를 샀다. 이곳 사람들은 『이 나라에는 표가 없다』고 말한다. 그만치 암표장사가 극성을 부린 다는 말이다. 표를 사려면 뒷돈을 내야 한다는 것을 아주 당연 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실크로드의 교통요지 오후 6시 열차에 오르니 차안은 한마디로 찜통이었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이 비오
는듯 했다. 투르크메니스탄은 중앙아시아 에서 가장 더운 나라로 한여름의 낮 평균기온이 35도에 이른다 . 이 더위를 잊기 위해 승객들은 끊임없이 차를 마신다. 차를 미리 가지고 들어 와 열차 안에 있는 뜨거운 물에 타서 마시 는 것이다. 또 가끔씩 시원한 낙타젖을 파는 여인들이 지나가 이것을 사 마시며 더위를 식혀야 했다. 차창 너머로는 낙타떼가 나타났다가 다시 카라쿰(검은 모래)이 끝없이 펼쳐진다. 카라쿰은 투르크메니스탄에만 있는 사막으로 모래가 유난히 검은 색을 띠어 그런 이름이 붙었다. 열차안 객실에 동승한 사람은 알리크(26)와 알라무라(44) 였다. 짙은 윤곽의 미남청년 알리크는 아슈하바트에서 물건을 떼 다 파는 장사를 하고 있었고 국민학교 교사인 알라무라는 기관지 염을 고치기 위해 아슈하바트로 간다고 했다. 알라무라가 준비해 온 투르크메니스탄식 쇠고기 요리인 고루마를 씹으며 기온이 떨어지는 밤을 기다렸다. 새벽녘 얼핏 잠이 들었는데 갑자기 쿠페(객실)의 문이 활짝 열리며 불이 환하게 켜진다. 눈을 떠 보니 의심어린 눈초리의 정복경찰이 「도쿠멘트」라고 하면서 손을 내민다. 서류(여권)를 보여 달라는 뜻이다.
요즘 중앙아시아를 여행하다 보면 경찰의 검문을 심심찮게 당하 게 되는데 그 방식은 대개 이렇다. 이들은 외국인이라고 하면 일단 잠재적인 범법자나 밀입국자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알리크는 『앞으로는 눈을 감고 자는 척하라. 그러면 대개 그 냥 지나간다』라고 친절하게 충고해 주었다. 열차는 출발한지 14시간만인 아침 8시 기자의 중앙아시아 마 지막 목적지인 아슈하바트에 도착했다. 아슈하바트는 아랍어로 「 사랑의 도시」로 번역된다. 그래선지 도시는 깔끔하고 정감이 어 려있다. 1948년 대지진으로 도시전체가 파괴돼 버려 지금의 건물들은 모두 그 이후 지어진 것이다. 거리에서는 유난히 이목구비가 수려한 여인들을 많이 볼 수 있 었다. 파란 눈과 적당히 그을은 피부의 페르시아풍 미녀들은 수 줍음을 많이 타는 것 같았다. 사진이라도 찍으려 하면 얼른 고 개를 숙이거나 손으로 가리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세계최대 카펫 전시 투르크메니스탄의 국기에는 녹색 바탕에 달과 별, 그리고 카펫 이 그려져 있다. 그만치 이 나라는 카펫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 하다. 일찍이 2500년 전에 만들어진 카펫이 출토되고 있는데 그 질이 지금
것에 못지않다고 한다. 이탈리아 여행가 마르코 폴로는 『이들이 만드는 카펫은 세계에 서 가장 훌륭하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찬사를 보냈다고 전해진다 . 아슈하바트의 카펫박물관에는 세계최대의 카펫인 「투르크멘 칼 비」가 전시돼 있다. 「투르크멘의 영혼」이라는 뜻의 이 카펫은 1941년 7개월에 걸쳐 40명이 짠 것으로 그 넓이가 193▦이다. 매듭은 4 천8백만여개에 이른다. 이 나라의 속담은 『물은 투르크멘의 생명이요 말(마)은 날개 이며 카펫은 영혼』이라고 말하고 있다. 투르크멘이 자랑하는 명 마가 여기에 등장하고 있다. 아할테킨이라는 이름의 이 종(종) 은 고대로부터 혈통이 유지돼온 것으로 알렉산더 대왕이 가장 아 끼던 말이었으며 지금도 각종 승마대회를 석권하고 있다고 한다.
○우유사려 밤샘 줄서기 투르크멘은 러시아, 미국, 캐나다에 이은 세계 4위의 천연가 스 생산국이며 석유도 풍부하게 생산되고 있다. 한반도의 2배가 넘는 국토에 인구는 4백만명에 불과하다. 어떤 중앙아시아 국 가보다 잠재력이 큰 나라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아슈하바트∼모스크바 간의 비행기표가 공식적으로는 25달러(약2만원)에 불과했다. 그러나 공항창구에서는 비행기표 를 구할 수 없어 암표를 사야했으며 그 값은 300달러가 넘었 다. 기자는 중앙아시아 기행의 마지막 밤 아슈하바트 호텔 주변의 거리를 걷다가 우연히 5∼6명의 동네사람들과 긴 시간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이들은 이튿날 아침 7시쯤 문을 여는 우유가게 에서 우유를 사기 위해 밤을 새우고 있었다. 러시아사람인 타냐 (48)는 『우리는 우유가 필요하다. 그런데 내일 아침에 못 사면 언제 살 수 있을지 알 수가 없다』고 설명했다. 한낮 기온이 40도에 육박하던 아슈하바트의 새벽공기는 한기를 느낄 정도로 차가웠다.<아슈하바트=김철웅 특파원>
[0021]이란 제2도시 마슈하드(유라시아 철도기행:23) 경향신문 951006 15면 기획 2972자
-------------------------------------------------------------------------------- ◎연중 성지순례 행렬·무역상들로 “활기”/투르크멘과 잇는 철도 공사 한창… “개통되면 상업도시로” 시민들 부푼 기대 독자들의 열띤 성원을 받고 있는 본사의 주간 풍물기획물 「유라시아 철도기행」이 중앙아시아 구간을 마치고 중동구간에 들어섰습니다. 이란의 마슈하드 테헤란 타브리즈와 터키의 엘라 지 앙카라 이스탄불 등 환상의 도시들로 이어지는 유라시아 철도 를 따라 이번부터 조성환특파원이 취재·보도합니다.<편집자주 > 중국에서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을 거쳐 투르크메니스탄을 통과 한 유라시아철도는 이란으로 연결된다. 그러나 유라시아기차는 투르크메니스탄과 이란 접경구간에서 단절 돼 있다. 양국에서 진행중인 접경부근 철도연결공사가 완전히 끝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라시아철도의 중앙아시아 구간 취재를 담당했던 김철웅기자로부 터 배턴을 이어받아 이란 및 터키의 중동구간을 맡은 기자는 따 라서 투르크메니스탄과의 접경도시이자 유라시아 철도의 핵심도시가 될 이란의 세라크스로 부터 취재를 시작했다. ○중앙아시아 마치고 중동땅으로 투르크메니
스탄과 이란 사이에서 단절된 유라시아 철도는 이란의 동부 도시인 마슈하드에서 다시 시작되지만 조만간 투르크메니스 탄∼이란 구간의 국경도시인 세라크스를 그냥 지나칠 수 없기 때 문이다. 투르크메니스탄과의 국경을 이루는 테젠강의 서안에 있는 세라크 스. 인구 10만의 조그만 농업도시다. 폭 100m 정도인 테 젠강에 유라시아 철도를 위한 교각 건설공사가 한창인 곳이다. 그러나 입구에 도착했건만 검문소에서 제지당하고 말았다. 이란 공보처에서 소개한 안내인 모하마드 호세인(28)과 함께 미소 를 띠며 온갖 설명를 다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나마 세라크스 시의 공보과 직원이 나와 현장의 공사진행상황을 설명해 준 것이 다행이었다. 마르비스 모라디(43)라는 직원은 현재 이란쪽에서는 세라크스 ∼마슈하드간 165㎞ 철도공사가 거의 끝났고 투르크메니스탄쪽에 서도 130㎞의 철도연결공사가 마무리단계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현재 테젠강에 9개의 교각을 놓는 공사가 진행중이라고 했다. 그는 이 공사가 내년 6월에 끝나 유라시아 철도가 양국을 연 결하게 되면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고 강조했다. 즉 남쪽의 반다르 압하스항의 화물이 이곳을 경유해 구 소련제국 및 중앙아
시아국들에 수송되고 반대로 이들 나라의 물품이 이란 남쪽항으로 쉽게 운송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세라크스시가 조그만 농 업도시에서 자유무역도시로 발전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공사현장을 못보는 안타까움을 달래며 허탈한 심정으로 다시 마 슈하드로 발길을 돌렸다. 마슈하드. 이란의 수도 테헤란으로부터는 동쪽으로 약 900㎞ , 투르크메니스탄 국경으로 부터는 서쪽으로 약 170㎞ 떨어진 이란 제2의 도시이자 이란 동부 호라산주의 주도이다. 페르시 아로 「순교자의 고장」이란 뜻이 말해주듯 마슈하드는 817년 당시 회교 시아파 8대 이맘(종교 최고지도자) 레자가 순교한 성지로 유명하다. 마슈하드 시내에 들어서니 첫눈에 들어오는 웅장한 건축물이 있 다. 주위의 우중충한 회색건물과 달리 이 건축물은 청자빛 타일 로 아름답게 꾸며진 대형 돔과 하늘을 찌를듯한 황금빛 첨탑이 장관을 이루었다. 안내인 호세인은 바로 그 건물이 유명한 이맘 레자 성지건축물이라고 한다. ○이맘레자 순교성지로 유명 마슈하드에는 이맘레자 사원외에도 무려 500여개의 크고 작은 회교사원들이 자리잡고 있다. 우리를 태운 택시운전사는 연중 매일 수천∼수만명의 순례자들이 이곳을
다녀가며 특히 여름철 성 수기에는 전세계에서 수백만명이 이곳을 찾아 호텔 여관 얻기가 하늘의 별따기라고 한다. 시내도로의 아스팔트는 낡아 울퉁불퉁했고 차선도 분명치 않았지 만 거리는 질주하는 차들로 넘쳤고 이들 차중엔 한국의 기아나 대우차도 여러대 눈에 띄었다. 섭씨 35도를 넘는 더운 날씨에 도 불구하고 거리의 여성들은 시아파 회교국 답게 대개 검은 차 도르나 망토로 온몸을 가렸고 머리도 사리로 감싸안았다. 시내 중심의 한 대형상가에 들렀다. 비록 일부 공산품의 질은 떨어지는 듯 싶었지만 이곳에는 특산품인 카펫을 비롯해 각종 의류 식료 가전제품 문구류, 종교관련서적및 도구, 터키산 보석 가공및 판매가게 등 수백개의 각종 상점이 줄지어 있었다. 마치 우리의 동대문 상가나 남대문 시장 같았다. 4년전부터 택시기사를 하고 있다는 알리 콜라미(35)는 『 옛소련붕괴 이후 인근의 국가들로부터 무역하려는 외국상인들이 많 이 이곳을 찾고 있다』며 『덕택에 돈벌이가 좋아져 그동안 자가 용도 사고 저축도 좀 했다』고 자랑했다. 유라시아 철도가 출발하는 마슈하드역은 시내중심부에서 택시로 약 15분 거리 교외에 있었다. 거대한 직
사각형의 콘크리판을 살짝 구부려 놓은 듯한 지붕을 갖고 있는 역은 많은 순례자들을 대비해서인지 그 크기가 엄청났 다. 특히 이 역의 광장은 수만명이 집회를 가질 만큼 넓었다. 대합실에 들어서니 이 곳도 한번에 수천명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였다. 서로 다른 복장을 한 여러 나라 사람들이 저마다의 짐꾸러미를 들고 테헤란행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고 한쪽에선 가족 단위의 승객들이 음식물을 벌여놓고 먹기도 했다. ○여름 성수기엔 하루 10회 운행 이 역의 파레이비 여객과장(35)은 『평균 하루에 5회씩 운 행하지만 여름철 순례성수기엔 횟수를 10회로 늘린다』며 『현재 진행중인 철도복선화작업이 완료되면 수송시간이 단축되고 수송인 원도 크게 늘 것』이라고 밝혔다. 승객의 대부분은 성지순례를 위해 방문하는 사람들. 그러나 구소련이 무너진 뒤 러시아나 중앙아시아 각국, 아프가 니스탄, 파키스탄 등지에서 공산품을 들여와 비싸게 팔고 대신 값싼 과일이나 밀 등 농산물 및 이곳 특산물인 설탕을 수입해가 는 상인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파레이비 과장은 특히 『마슈하드와 투르크메니스탄을 잇는 열차 가 운행되고나면 명실공히 이곳은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교통의 요충으로 상업도시로 발전할 것』이라며 큰 기대감을 나타냈다. 파레이비 과장의 환송을 받으며 기자는 마슈하드에서 다시 출발하 는 테헤란행 유라시아 철도에 설레는 마음으로 몸을 실었다.<마 슈하드=조성환 특파원>
[0020]이란의 수도 테헤란(유라시아 철도기행:24) 경향신문 951020 11면 기획 3360자
-------------------------------------------------------------------------------- ◎규율과 본능사이서 갈등하는 “차도르 미녀들”/여성들 화려한 스카프로 치장 「중동의 파리」 실감/호메이니 성지 황금빛 장식 「살아있는 신」 위용 마슈하드를 떠난 유라시아 기차는 밤새 서쪽으로 달렸다. 다음 날 아침에도 마찬가지였다. 마침내 차안의 사람들이 짐을 챙겼다 . 15개의 크고 작은 역을 통과한 끝이었다. 안내방송이 이란 의 수도 테헤란 도착을 알렸다. 장장 15시간만이었다. ○마슈하드서 15시간 걸려 대개 한 나라의 수도가 그렇듯 테헤란 역시 이란 정치·경제의 중심지답게 기차역부터 북적대는 모습이 뚜렷했다. 유라시아 기 차가 계속 이어지는 북서방향의 타브리즈 행 말고도 북쪽 카스피 해, 남쪽의 시라즈·반다르 압바스 등 전국 각지로 이어지는 기 차가 6개의 플랫폼을 통해 바쁘게 오갔다. 역 구내 대합실은 1,000여명을 수용할 수 있을 만큼 넓은 편이었지만 타고 내리는 승객과 열차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혼잡 스러웠다. 신기한 것은 근엄한 회교국이라는 인상과 달리 대합실 한쪽의 컴퓨터게임기 앞에서 어린이들이 줄지어 신나게 게임기를
두드리는 모습이었다. 마슈하드 역과 마찬가지로 총기를 멘 군인과 경찰들의 모습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출구로 나와 보니 역의 외모는 좀 실망 스러웠다. 아무런 모양이나 장식도 없이 그저 네모반듯한 모습의 2층건물이었고 그나마 한쪽은 보수공사중이었다. 세계유일의 시아파 회교강국의 수도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 카자르왕조의 창시자 아가 모하마드 칸이 1788년 도읍을 정한 이래 테헤란은 「중동의 파리」라 불렸던 도시가 아닌가. 미리 연락해 놓은 한국교포 송상무 사장댁을 찾기로 했다. 송 사장은 70년대 중동붐이 한창때 모 건설회사직원으로 나왔다가 현지에 눌러앉아 20여년을 이란에 살고 있는 분이다. 역앞에서 택시를 기다리다 언뜻 고개를 돌리니 멀리 높다란 산 봉우리에 흰눈이 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섭씨35도를 넘는 무 더위의 중동국에서 흰눈을 보게 되다니. 택시를 잡아탔으나 말이 통하지 않았다. 차엔 에어컨도 없었다 . 주소를 불러주자 다행히 운전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내 한국의 총알택시는 저리가라할 정도의 난폭·곡예운전이 시작 됐다. 왕복 6∼8차선 도로엔 차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현대 엑셀승용차가 택시로 많이 이용되고 있어
한국산차의 위력 을 실감케 했다. 보통 사막지역으로 인식해온 중동에서 서울에서 보다 더 울창하게 자란 가로수를 보게 된 것은 뜻밖이었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이란은 중동지역 중에서도 유일하게 찬물이 나오는 곳이다. 이 찬물의 원천은 바로 해발 평균 3,500 m의 알볼즈 산맥에 쌓인 엄청난 양의 눈. 겨울에 쌓인 눈은 7∼8월까지 계속 녹아내려 물이 부족한 테헤란 등 이란 남쪽 주요도시에 생명수로 공급된다는 것이다. 20여분만에 도착한 송사장의 게스트하우스에는 부산과 서울에서 수출시장조사차 온 한국 중소기업인들도 있었다. 영어를 할 줄 아는 택시운전사를 불러 시내를 한바퀴 돌았다. 무엇보다 놀라 운 것은 거리의 젊은 남녀들이 한결같이 미남미녀라는 점이었다. 특히 스카프 사이로 노출된 여성들의 하얀 얼굴과 검고 큰 눈 , 짙은 눈썹은 세계 어느나라 여성보다 아름다워 보였다. ○현대 엑셀 택시 거리 누벼 택시운전사는 『많은 전쟁통에 인근의 여러종족 피가 섞였고 식 사 때마다 항상 곁들이는 과일과 야채 덕택이 아니겠느냐』고 나 름대로 그 원인을 분석했다. 안타까운 것은 이 아름다운 여성들 이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모두 차도르나 바바리코트차림이
었다는 사실이다. 79년 회교혁명이전만 해도 그렇게 엄격하지 않았으나 이제 여 자는 만 8살6개월이 지나면 의무적으로 이러한 복장을 해야한다 고 한다. 외국인도 마찬가지다. 해수욕장이나 스키장에서는 남녀 가 칸막이를 하거나 서로 다른 시간대에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미를 추구하는 여성들의 심리를 법만으로 규제하기 힘든 것이 현실인 모양이다. 테헤란 여성들은 차도르보다는 노출의 여지가 많은 바바리에 스 카프를 하는 복장을 즐겨 입고 있었다. 바바리색도 검정 뿐만 아니라 베이지색, 자주색, 심지어 초록색으로 다양하고 대담했다 . 물론 스카프의 색깔이나 무늬, 레이스 장식 등은 더욱 화려 했다. 청바지 위에 바바리를 걸치고 선글라스를 쓴 여성이 질주 하는 오토바이의 뒷좌석에서 남자의 허리를 꼭 껴앉은 채 가는 모습은 규율과 본능사이에서 갈등하는 이란 여성들의 현주소를 보 는 듯했다. 시내 북쪽에 자리잡고 있는 팔레비궁은 생각보다는 대단한 것 같지 않았다. 왕궁으로서의 화려한 외양이나 위엄도 없이 몇개의 평범한 건물로 이루어진 이 궁은 현재 박물관으로 개조돼 팔레 비 왕과 그 부친 등이 쓰던 집기와 장식물들을 보관하고
있다. 그러나 숲에 둘러싸인 이 궁을 보러온 관광객은 별로 많지 않 았다. 테헤란 남쪽의 대바자는 우리나라의 남대문시장처럼 각종 물품을 판매하는 수천 개의 가게가 많은 물건을 쌓아 놓고 손님을 부 르고 있었다. 수입품은 비싼 반면 의류나 일반 공산품, 농산물 등은 그런대로 싼 편이었다. 손님들도 제법 많았다. 그러나 의류가게 주인 모하마드 술레이만씨(45)는 『미국이 핵개발설을 퍼뜨려 놓고 경제제재를 강화하는 바람에 장사가 제대로 안돼 걱정』이라며 『그나마 요사이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등지에서 단체 로 쇼핑하러와 겨우 연명해 가고 있다』고 털어놨다. ○해수욕장도 남녀 칸막이 시내를 한바퀴 돌고나니 이국땅에서 한국인을 만난 반가움을 한 잔 술로 달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그러나 송사장은 회교혁 명 이후 시내의 일류호텔에 가도 술은 팔지 않고 음주도 금지돼 있다고 설명했다. 맥주맛만 나는 무알코올 음료수로 객고를 달 랠 수밖에 없었다. 하룻밤을 잔 뒤 이란의 현대사를 바꾼 호메이니의 성지를 찾았 다. 테헤란 남쪽 50㎞지점 베헤슈트 자흐라에 있는 그의 사원 은 황금빛으로 장식한 돔과 첨탑이 하늘을 찌를 듯했다. 내부는
한꺼번에 수만명을 수용할수 있을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컸다. 참배객들은 홀 중앙의 호메이니 묘소주위를 돌며 열심히 기도했다 . 일부는 카펫이 깔린 홀 한쪽에서 명상에 잠기거나 쉬기도 했 다. 사원 한쪽에서는 참배객을 위한 대형 호텔 및 부속 바자르 건설공사가 진행중이었다. 그는 죽어서도 이란인들의 「살아있는 신」이었다. 이란취재에는 한국대사관의 신성오 대사 이하 공관원들의 협조가 큰 힘이 됐다. 신대사는 『정부가 올해 이란근로자의 한국취업을 아무런 사전예 고도 없이 중단하고 대이스라엘 우호제스처를 취하는 것등과 관련 해 이란정부의 불만이 높다』고 전하면서 『현재 어려운 처지에 있지만 이란은 중동 최강국임을 감안, 일본과 북한 등의 예에서 보듯 정부의 장기적 대이란 정책이 절실한 때』라고 강조했다.
현지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의 황인관장은 『이란의 인구가 6천만 명이나 되고 소비수준도 높아 잠재적으로 한국의 좋은 수출시장인 데도 미국의 경제제재가 계속돼 업체들의 타격이 크다』고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테헤란=조성환 특파원>
[0018]이란 제4도시 타브리즈(유라시아 철도기행:25) 경향신문 951103 11면(문화) 기획 2171자
-------------------------------------------------------------------------------- ◎회교혁명 불댕긴 페르시아 카펫 명소/1장 짜는데 숙련공 2명 이 2년 매달려… 시내에만 공장 2,000여곳 유라시아 열차가 터키에 입국하기 전 이란에서 마지막으로 거치 는 큰 도시가 이란 제4의 도시 타브리즈다. 안내를 받기 위해 테헤란의 공보처에서 소개받은 타브리즈시 공 보과 직원을 전화로 찾았다. 그러나 그 직원은 몸이 아파 일찍 퇴근 했다고 했다. 호텔을 먼저 정할까 망설이던중 문득 테헤란 공항에서 우연히 만났던 라히니 타바르(52)가 생각났다. 테헤란에서 조그만 오 퍼상을 운영하고 있다는 그는 당시 기자로부터 타브리즈 취재 예 정을 듣고 『고향이 그곳이고 부모가 살고 계셔 자주 방문한다』 며 전화번호를 알려줬다. 큰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천만다행으로 그는 타브리즈에 와 있었고 기자의 목소리에 친형제처럼 반가워 했다. ○우리 돈으로 1천만원 호가 시내 안내를 자청한 그를 따라 먼저 세계적으로 유명한 타브리 즈산 카펫의 제조현장을 보기로 했다. 카펫 생산공장은 예상 외로 작은 가정집이었다. 집 한귀퉁이에
서 6∼7명의 10∼20대 남자들이 베를 짜듯 틀앞에 앉아 바 삐 손을 움직였다. 라히니는 『타브리즈 시내에만 크고 작은 카 펫 공장이 2,000여곳 있다』고 말했다. 낯선 손님을 반갑게 맞은 공장주인 하미드(54)는 『가로 3m, 세로 4m의 카 펫 1장을 짜려면 2명의 숙련공이 약 2년을 꼬박 매달려야 한 다』고 설명했다. 50가지 양털색실을 사용해 각 가문의 전통문양이나 사냥모습 등을 새긴 이 페르시아 카펫 완성품은 우리돈으로 약 1천만원을 호가한다고 한다. 그러나 하미드는 『눈의 피로가 너무 심해 대개 30대가 넘으면 카펫을 짜는 일에서는 손을 뗄 수밖에 없다』고 씁쓰레하게 말했다. 시내 중심가에 있는 라히니의 집은 1.5층 짜리 슬레이트 단 독주택이었다. 집안으로 들어서자 나이든 어머니와 누이, 조카들 이 깜짝 놀라며 황급히 집안으로 도로 들어갔다. 잠시후 그들은 긴 사리를 뒤집어 쓰고 나와 수줍게 인사를 했다. 오랜 여독으로 지친 기자에게 라히니의 어머니는 양젖과 마늘· 약초 등으로 만든 걸쭉하고 따끈한 죽을 가져다 주었다. 이 죽 을 먹으면 겨울에도 감기가 얼씬거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특별죽 을 먹고 나자 라히니는 『한
숨 푹 자라』며 베개를 가져다 준 뒤 방을 나갔다. 고맙기도 하고 걱정이 되기도 했으나 「나도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몸을 눕혔다. 다음날 타브리즈 공보과직원과 이곳에서 공사를 하고 있는 대림 산업에 전화를 걸었다. 대림산업에서는 고맙게도 밴을 1대 보내 주겠다고 했다. ○터키·구소 잇는 교통요지 대림 현지직원 아미르 타브리지(23)가 몰고온 밴에 아지데라 는 50대 공보과직원을 태워 타브리즈역을 찾았다. 그러나 역장 은 자신의 이름도 알려주지 않은 채 서면 인터뷰만을 고집했다. 하는수없이 대신 시청을 방문해 시장의 사회부문 비서인 테흐라 니로부터 타브리즈 현황을 설명들었다. 그는 『타브리즈시는 구소련이 지난 40년 이란을 침략해 왔을 때 독립전쟁을 벌였고 종교도시 곰과 함께 이란내에서 78년 가장 먼저 회교혁명을 일으켰던 도시』라며 『앞으로 이란·터키· 구소련권을 잇는 교통요지이자 석유·카펫 등 산업의 중심지로서 크게 성장할 것』이라고 자랑스레 말했다. 오후에 타브리즈 역장도 답변서를 통해 타브리즈 역의 가장 중 요한 역할이 터키로 통하는 유라시아 열차와 구소련 국가들로 들 어가는 기차들을 중계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터키의 맨서쪽 이스탄불까지는 1주일에 1회, 아제르바이잔 등 을 거쳐 모스크바까지 가는 편은 1주일에 2회 있다고 한다. 그러나 터키행 유라시아 기차는 93년 이후엔 객차 없이 화물차 만 운행한다는 것이다. 터키 동남부 산악지대의 쿠르드 반군들로부터의 기습공격이 잦기 때문이다. 현재 터키,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인들의 왕래가 잦으며 이들 승객이 연 1백만명을 넘는다고 한다. 대림공사현장은 타브리즈시내에서 1시간여 정도 교외의 대규모 석유화학단지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장호 소장은 출장으로 자리를 비웠고 30여명의 한국인 기술자들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이들은 현지에서 벤젠추출공장 건설 공사중이라고 설명했다. 이 란이 경제제재로 어려움을 겪고 있어 예전처럼 대형사업을 수주할 수 없는 안타까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배고픈 김에 식당에서 모처럼 고추장과 불고기 김치 등으로 맛 있게 식사를 얻어 먹었다. 터키여정이 바빠 또 서둘러 아쉬운 이별을 고할 수밖에 없었다.<타브리즈=조성환 특파원>
[0017]터키의 고도 엘라지(유라시아 철도기행:26) 경향신문 951110 11면(문화) 기획 3365자
-------------------------------------------------------------------------------- ◎석기시대 유적 즐비한 호반의 도시/고대부터 전략충지로 흥망거 듭… 피부병고치는 온천 물고기 명성 이란을 떠난 유라시아 기차는 카프쾨이라는 조그만 국경마을을 통해 터키로 들어선다. 그러나 이 기차에는 승객이 없다. 화물만 실려 갈 뿐이다. 2년여전부터 험준한 이 산악지역에 나타나 기차를 습격하는 쿠르 드 분리독립주의자들 때문이다. 유라시아 기차가 승객칸을 달고 달리기 시작하는 곳은 엘라지라 는 도시에서부터다. 카프쾨이로부터 16시간을 넘게 서쪽으로 운 행한 뒤다. 기름진 평야가 내려다 보이는 고원의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엘 라지는 인구 20만의 신흥도시지만 4,000년전 석기시대 유적 이 남아있는 고도로 유명하다. 쿠르드족의 독립운동이 본격화된 80년대 이후 계엄령이 선포된 보안민감지역답게 시외곽에는 각종 군부대와 군시설물이 즐비했다 . 또 시내거리에도 군차량이 질주하고 군인과 경찰이 득실거렸다 . 그러나 그들은 낯선 동양인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며 미 소를 보내는 등 호의적인 태도였다. 4차선의 시내 중심도로는
잘 포장돼 있었고 많은 건물들이 새로 지은 듯 현대적 디자인을 하고 있었다. 엘라지 시청의 나즈미 셀축 문화국장(58)은 『한국기자가 터 키인들도 방문하기 어려운 이곳까지 찾아왔다니 놀랍고 반갑다』며 시 역사와 풍물들을 상세히 소개해줬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현재의 엘라지는 19세기중반 도시계획에 의해 인공적으로 조성된 도시. 터키공화국 건국이후 경제발전과 함께 동부 상업도시로 변모했다. 특히 70년대 전력공급및 농업 용수 공급목적으로 계획된 인근의 케반댐이 완공되면서 호반의 도 시로 급속히 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내거리엔 군차량 질주 원래는 19세기까지 시중심에서 조금 외곽으로 떨어진 곳에 고 대 도시 하루풋이 형성돼 흥망을 거듭했다고 한다. 유프라테스강 이 발원하는 기름진 곳으로 기원전 2000년경부터 후리족과 히 타이트족 등 고대인간이 거주해 온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이 신석기시대유적들은 아직도 시 중심부에서 몇㎞만 벗어나면 발견된 다고 한다. 특히 이 지역은 하자르 산맥과 그 밑의 하자르 호수가 둘러싸 고 있는 천혜의 자연조건을 갖추고 있어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각 종 세력과 민족들의
각축장이 돼 왔다. 로마나 비잔틴제국, 몽 골, 오스만 터키 등. 시내에서 외곽으로 빠져 20여분간 험준한 산기슭을 돌아 올라 가니 독특한 양식의 나무집벽에 「하루풋」이라는 푯말이 붙어있다 . 그리고 한참을 더 올라가니 깎아지른 벼랑꼭대기에 웅장한 모습 의 돌로 지은 성채가 눈에 들어왔다. 기원전 수백년전에 세워졌 다는 이 성채는 비록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겉모습은 흉한 몰골이었지만 아직도 그 위용은 대단했다. 성채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니 널따란 평원과 도시가 한눈에 들어왔고 하자르 산맥과 호수도 손에 잡힐 듯 했다. 문외한이 보기에도 과연 이 곳이 전략의 요충이구나 싶었다. 이 하루풋 고성 바로 주변엔 터키내에서 가장 오래된 모스크중 하나라는 셀주크 터키 시대의 울루카미(대 회교사원)가 자리잡고 있었다. 대개의 회교사원 미나렛(첨탑)이 화려한 타일이나 금 빛 도금을 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이 첨탑은 붉은 색 벽돌로 쌓은 것인데다 피사의 사탑처럼 옆으로 기울어져 있어 특이해 보 였다. 하루풋 고성이 있는 산 정상은 공원처럼 조성돼 많은 시민들이 가족단위로 나와 음식을 먹거나 바람을 쐬고 있었다. 내려오는
길에 하루풋 코란학교 학생들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250명정도 학생을 수용할 수 있는 이 학교는 문교부의 정식 인가를 받은 학교라고 한다. 학생들은 국민학생부터 고교생까지 로 구성돼 있었는데 모두 남자뿐이었다. 이들은 엘라지뿐 아니라 인근 도시 등에서 유학온 학생들로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밤낮으로 코란을 공부한다고 한다. ○「하루풋」오르면 도심 한눈에 엘라지역은 우리의 시골역 같았다. 역건물은 작고 낡은데다 타 고 내리는 승객도 별로 없어 한산했다. 역장 후세인 아킨(34 )은 『한국인을 이곳에서 본 것은 처음』이라며 『88올림픽을 통해 한국에 대해서는 잘알고 있다』고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는 『유럽과 터키의 각종 화물을 이란쪽으로 보내고 반대로 이란쪽에서 온 화물을 터키국내와 유럽으로 수송토록 하는것이 이 역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현재 매주 화·목·토요일마다 1회씩 이스탄불행 유라시 아 기차가 이곳에서 출발한다』며 『이란쪽으로 가는 극동행 유라 시아 기차(화물차)도 평균 하루에 한번씩은 운행한다』고 말했다 . 승객은 하루 평균 20∼30명선. 대개 이란행 열차는 산업 원자재를 싣고 들어갔다가
돌아올때는 과일이나 야채 등 농작물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 구내 화물열차에는 어딘가로 가는 각종 군용지프와 대포들이 즐비하게 실려있어 일반화물외의 수송도 담당하는 듯 했 다. 역장은 그쪽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지 말도록 부탁했다. 지난해 이곳을 찾은 관광객 5만1천여명중 외국인이 1,000 여명에 불과했다는 사실은 이런 이유들 때문인 듯했다. 「음식의 도시」라는 엘라지에서 생선요리 등 고유의 독특한 음 식도 못먹어보고 또 이 지방 고유의 처녀·총각의 「촛불 춤」도 보지 못해 아쉬웠지만 기자는 또 갈길을 재촉해야 했다. 엘라지역에서 3시간15분여를 서쪽으로 달리자 「살구의 도시」 말라티아시가 나타났다. 말라티아주의 주도이기도 한 이곳에서는 터키 국내생산량의 50%이상의 살구를 출하한다. 열매가 크면 서도 시지않고 당도가 높아 세계적인 명성을 자랑하고 있다. 원래 중국이 원산지이나 중세시대 대상들에 의해 천산산맥을 거 치는 실크로드를 타고 이곳에 전파됐다고 한다. 기찻길 옆은 물 론 낮은 구릉지가 온통 살구밭이었다. 말라티아 역시 엘라지와 마찬가지로 기원전부터 로마제국이나 페 르시아의 사산왕조와 아랍인, 아르메니아인들에게 번갈아 침략을
당하다 셀주크 터키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말라티아역은 북서쪽으로 가는 유라시아 기차와 남쪽으로 갈라져 시리아의 알레포로 향하는 기차가 교차하는 곳이기도 하다. 유 라시아 기차가 카이세리라는 터키 중부의 상업중심지에 도착하기전 흥미를 끄는 곳이 시바스와 캉갈사이에 있는 세계 유일의 「물 고기 온천」이다. ○기찻길옆 구릉지 온통 살구밭 아직 개발이 제대로 안돼 온천시설이나 숙박시설은 보잘것 없었 지만 이 온천은 온천물에 사는 물고기와 물뱀들이 환자의 피부병 를 치료하는 특이한 곳으로 유명하다. 이곳 물고기들은 일단 피 부병 환자가 탕안에 들어오면 큰 고기가 환부를 물어뜯는다. 이 때 피가 나면 중간 크기 물고기가 달려와 피를 빨아 먹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주 작은 고기들이 달라붙어 환부를 다독거 린다. 괴이한 것은 물고기들이 용케 환부에만 달라붙는다는 사실 이다. 독일에서 손바닥이 갈라지는 피부병때문에 왔다는 한 60 대 노인은 『7년동안 독일의 유명하다는 의사들이 치료하지 못한 병을 이 곳 온천에서 2주만에 거뜬히 치료했다』며 신비한 효 험을 확인시켜 주었다.<카이세리=조성환 특파원>
[0016]터키의 카이세리(유라시아 철도기행:27) 경향신문 951117 11면(문화) 기획 2335자
-------------------------------------------------------------------------------- ◎「비잔틴」잔재 3천여 지하 동굴교회 장관/옛 실크로드 길목답 게 거리활기… 6·25 참전용사 넋기린 「한국공원」도 카이세리에 도착하기 전 기차간에서 「무서운 사람들」을 만났다 . 쿠르드족 반군을 진압하러 터키 동북부 에르주름으로 간다는 터키 민병대원들이었다. 짧은 머리에 매서운 인상을 한 그들은 민간복장을 하고 있으면서도 소총과 수류탄 등으로 중무장하고 있 었다. 독립국가를 세우겠다며 끝없는 투쟁을 벌이는 「국제사회의 영원한 난민」 쿠르드족과 자국영토 내에서의 독립국설립은 인정 할 수 없다며 무자비한 진압을 하는 터키. 어느쪽이 옳고 그른 지를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막강한 터키군에도 불구하고 민병 대가 동원되고 있다는 사실은 국토의 3분의 1에 통치권이 미치 지 못하는 터키의 현실을 잘 말해주고 있었다. 카이세리는 고대 로마 및 중세시대 유적이 많은 도시로 유명하 다. ○시장 한복판에 터키탕 유적 옛 로마의 속주인 카파도키아의 수도였을 뿐 아니라 셀주크 터 키, 몽골, 오스만 터키, 이집트, 시리아, 오스만 터키 등이 차례로 힘을
과시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특히 지중해에서 이 란 쪽으로 이어지는 실크로드가 통과하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어 고대로부터 각국 상인들의 발길이 잦았던 곳이다. 시외곽은 5∼10층짜리 아파트가 즐비했고 거리는 왕복 6차선 도로를 확장하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현지 사정을 알아보기 위해 시내 한 안내소를 들렀다가 뜻밖에 도 한 친절한 이스탄불대 학생을 만났다. 하산 보스코르트(19 )라는 이름의 이 학생은 기자가 한국인임을 밝히자 곧 88올림 픽과 레슬링을 거론하며 시내안내를 자청했다. 기차역 주변을 벗어나 시내로 들어서니 웅장한 성벽과 아름다운 돔, 하늘을 찌를 듯한 첨탑의 회교 사원들이 이방인을 압도했 다. 그는 『먼저 이스탄불 다음으로 터키 제2의 전통시장으로 유명 한 그랜드 바자를 보러 가자』고 했다. 바자는 웅장한 모습을 자랑하는 성채의 안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성안쪽 벽밑에는 포장 을 친 간이 상점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이들 가게에서는 대개 일반 공산품이나 전자제품을 주로 팔고 있었다. 하산은 『2년전만 해도 이곳 가게에는 거의 터키산 제품뿐이었 는데 요즘은 러시아나 아제르바이잔 등 구소련국들로부터 흘러들어 온 외국
가전제품이 판을 치고 있다』고 털어놨다. 시장 한 복 판에는 둥근 천장을 한 돌건축물이 남아있어 의아했는데 하산은 그것이 바로 유명한 터키탕의 유적이라고 설명했다. 45만 인구를 가졌다는 이 도시의 거리는 사람들로 붐볐고 그 들은 활력이 넘쳐 보였다. 짧은 여정을 아끼려는 기자에게 하산은 『동로마제국의 보루인 카파도키아를 안보고 그냥 갈 수 있느냐』고 유혹했다. 그를 따 라 카이세리에서 남서쪽으로 달리다 보니 케르반세라이라고 하는 중세 대상들의 숙소가 군데 군데 눈에 띄었다. ○지하 8층까지 뚫어 만든 도시 성채처럼 돌로 지은 이건물들은 평시에는 실크로드를 오가는 상 인들의 숙소이지만 비상시에는 적들의 침입을 막는 요새가 되기도 했다고 한다. 가파른 계곡을 올라가니 바위산을 깎고 뚫어 만 든 수백채의 동굴집들이 보였다. 또 반대편 괴뢰메 계곡쪽으로는 발기한 남근과도 같은 형상을 한 바위들이 수없이 나타났다. 하산은 이 기묘한 형상의 바위들이 인근 화산 에레이예스산(3, 917m)이 폭발해 그 용암이 사암층 대지를 덮은 뒤 오랜 세 월 풍화되면서 형성된 것들이라고 설명했다. 가장 시선을 끈 곳 은 지하 8층까지 동굴을 뚫어 만든 카이마클리의
지하도시였다. 아무리 약한 암반이라지만 그 옛날에 지하 8층까지 뚫어 수십 명이 예배를 볼 수 있는 광장과 식량창고 등을 만들었다는 사실 은 눈으로 직접 보고나서도 믿어지지 않았다. 카파도키아 지역 전역에는 비잔틴 제국시절 만들어진 3,000여개의 교회와 수련 장 등 지하동굴시설이 있다고 한다. 밤새 달려 다음날 도착한 이 나라의 수도 앙카라역은 깨끗했고 현대적 양식이었다. 먼저 기차역에서 멀지 않은 카짐 카바베키르 거리의 한국공원을 찾았다. 3,000여평 규모로 나무와 잔디로 제법 잘 장식된 이 공원 입구엔 한글로 「한국공원」이라 쓴 명패가 붙어있었고 안쪽엔 석가탑 형상이 서 있었다. 그리고 공원중앙 상징물 벽 면엔 6·25전쟁때 참전했다 숨진 770여명의 터키군 전사자 명단이 새겨져 있었다. 공원관리인은 『한국전 참전용사들은 기존 의 재향군인회와는 별도로 「한국전참전용사회」를 만들어 정기 모 임과 함께 이곳에서 기념식도 하는 등 단결력과 우애가 남다르다 』고 귀띔했다. 저지대에 자리잡고 있는 인구 3백만명의 앙카라 시내 중심부는 숲속의 캠퍼스같이 아름답고 깨끗했다. 한국대사관에서 만난 유병우 대사는 『한국전 참전이후
일관되게 국제사회에서 한국을 지원하고 있는 터키에 대해 본국정부의 관 심이 너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앙카라=조성환 특파원>
[0015]터키 최대도시 이스탄불(유라시아 철도기행:28) 경향신문 951124 11면(문화) 기획 3343자
-------------------------------------------------------------------------------- ◎옛 제국의 영욕 고스란히… 시전체가 박물관/보스포루스해협 두 고 아시아·유럽대륙 연결… 해상교통 요지 앙카라를 떠난 유라시아 열차는 10시간만에 이 나라 최대 도 시이자 사실상의 수도인 이스탄불에 도착했다. 서울은 한강을 사이에 두고 강남과 강북으로 나뉘어 있지만 이 스탄불시는 보스포루스 해협을 사이에 두고 유럽쪽과 아시아쪽으로 나뉘어져 있다. 종착역인 하이다르파샤역은 아시아대륙의 끝에 놓여있다. 유럽대 륙으로 연결되는 유라시아 열차는 보스포루스 해협 건너편의 옛 오리엔탈특급 종착역이었던 시르케지역에서 다시 출발한다. 마르마 라 해안을 따라 기차가 하이다르파샤역으로 들어서면서 펼쳐지는 도시의 외관은 한마디로 감탄사를 연발케 했다. 사파이어빛깔의 바닷물과 해안가의 아름다운 모스크및 궁전, 분 주히 오가는 페리선. 하이다르파샤역은 베를린∼바그다드∼봄베이를 연결하려는 독일제국 의 동방진출야욕인 3B정책의 하나로 1908년 건설됐다고 한다 . 이 역은 그 오랜 역사만큼이나 역의 규모도 컸고 건물도 고 색창연했다. 역 구내는 터키 각지로 이어지는 열차선이
어지럽게 널려있었고 짐을 가득 실은 화물열차도 여러대 눈에 띄었다. 승객들중 일부는 기차에서 내리자 마자 짐을 챙겨들고 서둘러 기 차역 옆의 선착장으로 달려갔다. 유럽쪽으로 가는 승객들이었다. 1천만 도시인구중 약 4분의 3이 살고 있고 주요 관공서와 기업들이 자리잡고 있는 유럽쪽 이스탄불로 가기 위해 이제 꼭 배를 이용할 필요는 없다. 세계에서 4번째, 유럽에서 2번째로 긴 현수교인 보스포루스 다리 (1,073m)등 양대륙을 연결 하는 크고 작은 다리들이 놓여져 있기 때문이다. ○지하경제가 50%차지 현지사정을 알기위해 찾은 한국무역투자진흥공사(KOTRA)도 유럽쪽 이스탄불에 자리잡고 있다. 김재찬 관장은 『걸프전후 대이라크 경제제재로 석유파이프라인의 터키통과수수료를 받을수 없게되는 등 연간 2백억달러를 손해보 고 있고 유고내전 발발로 이들 지역에 대한 무역이 감소 하는등 으로 현재 터키가 어려운 사정에 처한 것은 사실』이라고 설명했 다. 그러나 김관장은 『아시아와 유럽은 다리하나만 건너면 오갈 수 있는 지정학적 특징때문에 통계로 잡히지 않는 지하 경제활동 이 활발하다』며 『지난해 현재 1인당 국민소득은 2,200달러 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지만 실제 구매력은 5,000달러를 넘 는 수준』이라고 귀띔했다. 터키경제의 약 50%를 차지하고 있다는 지하경제의 실상은 시 내 어디서나 볼수 있는 환전상 「되뵈즈」를 통해서도 어림 짐작 할수 있었다. 김관장의 소개로 터키에서 8년째 살고 있다는 신량섭박사를 만 나 시내 안내를 부탁했다. 이스탄불대학에서 페르시아문학을 전공 한 그는 러시아의 차르가 『이스탄불을 얻으면 세계의 절반을 얻 는 것과 같다』고 한 말로 이스탄불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강조했 다. 이스탄불은 지리적으로 아시아와 유럽 두대륙에 걸쳐 있는 세계 유일의 도시이고 흑해의 바닷물이 마르마라해를 거쳐 에게해로 빠지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는 해상교통의 요지다. 특히 좁다란 보스포루스 해협은 전략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곳으로 평가되고 있 다. 동로마제국, 비잔틴제국, 오스만 제국 등 3개 제국이 이스탄 불을 수도로 삼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것이다. ○그랜드 바자 400년역사 이스탄불 시내는 한마디로 거대한 박물관이었다. 동로마제국 1,000년의 영욕과 오스만 터키 500년의 숨결 이 깃들여진 수많은 유적들이 고스란히 간직돼 있다. 수
십톤의 금과 은 등을 사용해 술탄들의 호사를 실감케 하는 해안가의 돌 마바체와 토푸스 궁전, 비잔틴 문화의 진수를 보여주는 성 소피 아 성당과 블루 모스크, 실크로드를 통해 들어온 동방의 물산이 부려지던 중세 그랜드 바자, 구시가지를 아우르는 동로마제국의 성벽등. 각종 박물관만해도 무려 17개나 된다고 한다. 어느 관광명소든 입장하려면 어김없이 몸검사와 가방검사를 실시 한다. 언제 회교원리주의자나 쿠르드 반군과의 테러가 있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대륙제패의 영광을 누렸던 터키답게 군사박물관은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각종 무기및 군수품발 달사를 방대한 자료및 전시품을 통해 잘 보여주었다. 이들 전시 품중에는 한국전 당시 전선에서 숨져가는 터키군을 보다못해 이나 라 고등학생들이 보낸 격려의 혈서와 경기 시흥군에서 전쟁복구사 업에서 우수한 실적을 올린 터키군에게 수여한 우승기도 있었다. 참으로 터키인들의 한국에 대한 각별한 인식을 실감케 하는 것 이었다. 이에 대해 신박사는 『터키인들로서는 한국전 참가가 오 스만터키 몰락이후 처음으로 국력을 과시한 기회였다는 점에서 대 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400년역사를 갖고 있다는 이스탄불 그랜드 바자는 정말 어마 어마 했다. 무려 8,000개의 가게가 터키 전통식품에서부터 첨단 전자제품까지 팔고 있었다. 이들 가게중에는 한국의 유명인 사들이 오기만 하면 들른다는 「톱 카피」보석가게도 있었다. 주 인 베이셀 바르텔은 기자를 보자 능숙한 한국말로 『안녕하세요』 를 연발하며 『보석값을 싸게해줄 테니 한국에도 우리 가게를 잘 좀 소개해달라』고 넉살을 떨었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지가 다 그렇듯 바가지를 씌우는 상혼은 이스탄불도 빠지지 않았다. 특히 여성이 서비스를 하는 술집에 들르면 여지없이 바가지를 쓰게 된다. 맥주 한잔에 1 0달러는 그렇다쳐도 양주나 샴페인 한잔에 150달러를 받는 것 이 보통이다. 한국 관광객들이 호기를 부리고 양주를 병으로 주 문하거나 여성에게 샴페인을 사준다고 하다가는 영락없이 지갑을 몽땅 털리고 봉변을 당하기 일쑤라는 것이 신박사의 설명이다. 동서 대륙의 연결점에 자리잡고 있는 터키는 유럽이라기 보다는 아시아로서의 분위기가 훨씬 강하다. 국민들도 자신이 아시아인 이라고 보는 사람이 80%를 넘는다고 한다. 언어도 우리와 어 순이 똑같은 우랄알타이어계다. 터키인들은 유럽에 대한 미묘한
반감과 열등감을 갖고 있었다. 로멜리 성채에서 만난 보스포루스 대학생 보아스이치(18·경제학)는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터키를 회교원리주의자들이 지배하는 국가로 바라보는 시각이 많다』고 불만을 털어놨다. 사실 터키는 국민의 98%가 회교도인 회교국이지만 거리에서 중동국가와 같은 엄격한 회교국인상은 받을수가 없었다. 여성들도 차드르를 쓴 사람을 보기가 드물 정도다. 이는 이나라의 국부 로 존경받는 케말 파샤가 일찍이 종교에 의한 폐해를 지적하며 서구식 개혁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차도르 쓴 여성 보기힘들어 신박사는 『그동안 정치적 불안과 경제난등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어온 터키는 최근 실크로드의 영광을 재현하려 애쓰고 있다』며 『서쪽으로는 유럽연합(EU)회원국가와의 관세동맹으로 내년부터 교역량을 획기적으로 늘리고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 6개국과 의 협력강화로 동방에서의 세력확대를 꾀하고 있는 것도 이같은 전략의 하나』라고 분석했다.<이스탄불=조성환 특파원>
[0014]불가리아 소피아(유라시아 철도기행:29) 경향신문 951201 18면(문화) 기획 3533자
-------------------------------------------------------------------------------- ◎오스만터키 지배 500년… 발칸 “은자의 나라”/민주화 5년 째로 과도기적 혼란… 시민들 오페라감상 등 삶의 질은 높아 아시아 대륙을 건너온 유라시아 횡단열차의 유럽구간은 이스탄불 시르케지역이 출발역이다. 기자는 이스탄불 아시아지역까지 특집 을 맡았던 조성환기자에 이어 과거 오리엔트 익스프레스의 종착역 이던 이지역에서부터 취재를 시작했다. 애거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로 더욱 유명해진 오리엔트 익스프레 스는 파리와 이스탄불을 잇는 유럽 최초의 대륙횡단 특급열차로 1883년 첫 기적을 울렸다. 호화열차의 단골손님은 유럽 각국 의 왕족과 부호들이었다. ○오리엔트 특급 77년에 중단 크리스티의 소설은 강대국들의 이해가 첨예하게 부딪쳤던 이스탄 불의 시대상황을 배경으로 했다. 실제로 마타 하리, 킴 필비 등 희대의 스파이들도 이 열차의 단골이었다. 오리엔트 특급은 그러나 갈수록 승객이 줄어 77년 운행이 중단됐다. 당시 여행객들이 묵었다는 이스탄불 페라 팔라스 호텔은 관광 비수기에도 불구하고 빈 방이 없을 정도로 북적였다. 고풍스런 실내장식에다
한 시대를 풍미하던 유명인사들이 묵었던 호텔로서의 「이름값」 때문이다. 가장 인기있는 방은 단연 크리스티가 묵 었던 411호실. 기자가 하룻밤을 보낸 118호 방문에는 「전 루마니아왕 카롤」이 묵고 갔다고 적혀 있었다. 오후 늦게 시르케지역을 찾은 기자는 역장으로부터 구내매점에서 50년째 일을 하고 있다는 네자리 사칵(72)이라는 노인을 소개받았다. 불가리아 태생으로 어릴때 피난왔다는 노인은 오리엔 트 특급이 운행되던 이스탄불의 황금시절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 다. 노인은 구유고분쟁 전인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뮌헨에서 이스 탄불을 잇는 단축구간이 운행됐다고 말한다. 역 구내매점에 정착 하기 전 야채가게와 채석장, 푸줏간 등을 전전했다는 노인의 신 산스런 인생이야기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촉수 낮은 전등이 밝혀진 역 대합실에는 스무명 남짓한 승객들 이 앉아 있었다. 배낭족으로 보이는 일본인 젊은 연인 한쌍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남루한 옷차림의 중·동구권 출신 보따리장수들 이었다. 주홍색 스카프 아래 짙은 회색 눈이 맑아 보이는 여인에게 말 을 건네니 루마니아에서 왔다며 『도베르만, 달마티안 등 애완용 강아지들을 팔고 가죽옷을 한 보따리
샀다』고 말했다. 니콜레타 아가피엘(44)이라는 이름의 이 여인은 한번 여행에 20∼30명의 동료들이 함께 온다고 전했다. 연간 1백50만 명에 달하는 중·동구권과 독립국가연합(CIS) 소속 공화국 보 따리장수들이 터키 관광수입의 3분의1을 점유한다는 게 일마즈 엘소스 역장(53)의 설명. 역을 통해 반출되는 하루 50t의 화물도 이들이 구입한 섬유와 가죽제품, 운동화 보따리가 주종 이었다. 호사스런 오리엔트 특급이 달리던 철로에는 이제 허름한 열차들 이 들어선다. 이중 소피아와 베오그라드를 거쳐 부다페스트까지 가는 열차를 발칸 익스프레스라고 부른다. 기자는 밤 9시25분발 소피아행 야간열차에 몸을 실었다. 우 리의 통일호 열차쯤 되는 수준의 객차들은 저마다 국적이 달랐다 . 터키와 불가리아, 세르비아 등지에서 만들어진 객차들이 모자 이크된 「다국적」 열차였다. 광막한 어둠 속을 달려 열차가 불가리아 소피아에 도착한 시간 은 다음날 오전 10시30분. 철도여행시 입국절차는 열차 안에서 하는 것이 상례지만 국경역 의 불가리아 관리들은 승객들에게 역사로 걸어와서 여권을 제시하 도록 요구했다. ○객차마다 국적 달라
강파른 인상의 30대 관리는 말이 통하지 않는 기자의 여권은 곧 돌려주었지만 함께 갔던 슬로바키아 남자 2명에게는 공연히 쇳소리를 내며 트집을 잡았다. 국경역에서 2시간 정차. 이러 한 사정으로 발칸에서의 열차시각은 고무줄처럼 늘어난다. 소피아 중앙역은 현대식 건물임에도 관리가 부실한 탓인지 황량 해 보였다. 고장난 에스컬레이터가 방치돼 있고 성한 공중전화를 찾기가 힘들었다. 시내 곳곳에 들어선 아파트 등 현대식 건물 들은 외양은 무시하고 크고 단단하게 짓는 것이 미덕이었던 사회 주의 「량의 경제」의 소산인듯 무미건조한 분위기를 풍겼다. 소피아 시내가 어딘가 엉성하게 보이는 또 다른 이유는 여타 유럽의 고도들과 달리 고색창연한 문화유적이 적기 때문이다. 1 4세기 말부터 꼬박 500년 지속된 오스만 터키의 지배기간동안 불가리아의 고유문화는 철저히 파괴됐다. 불행했던 역사는 불가 리아를 발칸의 은자의 나라로 남게 했다. 민주화 5년째인 불가리아 사회는 아직 안정을 되찾지 못하고 있는 인상이었다. 작년 총선에서는 급진경제개혁을 시도했던 민주 연합(UDF)이 패하고 구 공산당 계열의 사회당이 복귀했다. 설상가상으로 92년 이웃 신유고연방에 내려진 유엔의 경제제재로
80억달러의 직·간접 손실을 입었다. 소피아대학 조교수 블라디미르 졸보프(37)는 『대부분의 국민 들이 변화를 두려워하고 있다』면서 『투표는 자주 하지만 상황은 80년대 말보다 나아진 것이 없다』고 현 상황을 진단했다. 그는 『의사나 변호사, 교수 등 전문직업인들은 여전히 육체노 동자보다 열악한 대우를 받고 있어 젊은층일수록 국외로 떠난다』 고 말했다. 소피아대학 정교수의 한달 봉급은 미화 200달러( 약 15만원)로 전차운전사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이 대학에서 언어학을 전공하고 지난 9월 개설된 한국어과 교 수로 재직중인 최권진 박사(32)는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어 려움으로 초능력이나 무속신앙을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고 덧 붙였다. 그러나 오페라와 음악 등 수준급 문화를 향유하며 대부분 교외 에 별장을 갖고 계절따라 수영이나 스키 등 각종 사회체육을 마 음껏 즐기는 소피아 시민들의 삶의 질은 높아 보였다. 공해와 마피아, 뿌리깊은 관료주의 등 동구 공통의 문제들은 있지만 무상에 가까운 교육과 의료서비스, 풍부한 농축산물 등 지표로만 측정할 수 없는 삶의 내용들이 과도기를 사는 불가리아 인들을 지탱해주는 듯했다. ○“발
칸의 십자로” 야심 불가리아 정부는 보스니아 내전이 종결될 가능성이 높아짐에 따 라 이를 경제회생의 계기로 삼고 구유고재건 사업과 각종 사회기 반시설(인프라) 확충에 적극적으로 뛰어들 채비를 하고 있었다.
현재 정부가 가장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것은 파리에서 독 일∼오스트리아∼구유고지역∼불가리아∼이스탄불로 이어지는 유럽의 전통적인 동서관통도로인 「E79도로」의 복구사업. 장기적으로는 흑해연안의 항구도시 부르가스에서 아드리아해로 향 하는 동서교통망과 루마니아 부쿠레슈티에서 그리스 남부로 통하는 남북교통망을 구축해 「발칸의 십자로」가 되겠다는 것이 복안이 다. 불가리아 주재 한국대사관의 송영완참사관은 『재원확보 문제 로 교통망과 통신 등 인프라 확충이 단기간내 성과를 기대하기는 힘들겠지만 작년을 고비로 불가리아 경제가 전기를 맞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고 말한다. 차창에 비친 불가리아의 산야는 소담한 아름다움을 갖고 있었다 . 소피아 남쪽에 위치한 릴라의 사원으로 가는 길에 지나친 시 골마을 어귀의 야트막한 언덕에는 어김없이 묘지가 있었다. 기자 가 꽃이 놓여있는 묘지의 풍경을 무심히 바라보자 최박사는 며칠 전인 11월4일이 자수쉬니차라고 불리는, 망자를 위해 기도하는 날이었다고 설명했다. 빨래나 청소를 금하고 묘지에 찾아가 포 도주를 뿌리며 망자의 넋을 위로한다는 이날은 꼭 우리의 한식을 연상케 했다.<소피아=김진호 특파원>
[0013]신유고 베오그라드(유라시아 철도기행:30) 경향신문 951208 11면(문화) 기획 3241자
-------------------------------------------------------------------------------- ◎희망 앗아간 전쟁 상흔… “옛날이 좋았다”/연료부족 「냉동열 차」 운행… 보스니아 내전·경제 제재 여파 추운 겨울 소피아를 떠난 발칸 익스프레스는 신유고연방 국경을 넘으면서 모두 3번 멈춰섰다. 그럴 때마다 소총을 멘 녹색제복의 군인과 경찰, 세관원들이 올라와 여권·비자를 중복 검사했다. 6인 1실의 객차안의 승객 들은 대부분 세르비아인이었다. 보스니아 내전의 여파에다 번거로 워진 입국절차로 베오그라드를 찾는 외국인들의 발길은 거의 끊어 진 상태.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로 구성된 신유고 영토에서는 단 한 차례의 전투도 없었지만 외국인들은 베오그라드를 경유하기보 다는 대부분 하루가 더 소요되는 이웃 루마니아로 우회한다. 철로변 곳곳에는 장작더미가 쌓여 있어 유엔 경제제재 이후 4 번째로 다가오는 겨울맞이의 어려움을 짐작케 했다. 경제제재의 위력은 열차 안에서부터 실감되었다. 언제부턴가 온기가 사라지더니 베오그라드 남쪽 250㎞ 지점의 니스시에 도착할 즈음엔 완전히 「냉동열차」가 됐다. 있는 대 로 옷을 찾아입었지만 냉기는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이 곳에서
다시 40분 정차. 이곳을 떠난지 1시간쯤 지난 뒤에야 객실 에 스팀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앞자리에 앉은 드라슈코 밀로예비치(37·공무원)는 『경제제재 를 엄수하는 불가리아 당국이 국경에 도달할 만큼의 연료만 주고 난방에 필요한 연료를 주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소피아 에서 출발한 디젤 기관차를 니스에서 전동차로 바꾼 뒤에야 난방 을 재개할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빈부격차 갈수록 심화 객차 안이 따뜻해지고 니스에서 올라 탄 밀라뇨비치(25·니스 대 3년)가 끼어들면서 이야기는 활기를 띠었다. 화제는 자연히 보스니아 내전과 경제제재로 흘렀고 기자는 열차가 베오그라드에 도착할 때까지 꼬박 5시간 동안 이들과 얘기를 나누었다. 가볍게 흩날리던 눈발은 열차가 베오그라드에 도착한 저녁 무렵 어느새 솜뭉치로 변했다. 발칸 전체에서 올해 처음 내린다는 눈. 「하얀 도시」를 뜻하는 고대 라틴어 「상기두눔」에서 이름 이 유래된 베오그라드가 「본색」을 되찾은 셈이었다. 두나브(다뉴브)강과 사바강이 에두르고 있는 베오그라드는 90 년대 초까지만 해도 발칸 전체에서 가장 풍요를 구가하던 곳. 그러나 보스니아 내전 이후 「대세르비아주의와 인종청소의 본영」
으로 국제적인 비난을 받고 있다. 고층빌딩이 줄지어 들어 선 오피스타운 크네스 미하일로바를 비 롯해 도심 곳곳은 주말인파와 자동차가 어울려 활기를 띠고 있었 다. 게다가 연례 고전음악축제인 「베무스」가 열리고 있어 구 시가지 중심부의 스카달리아 거리는 성장하고 나선 시민들과 눈마 중 나온 젊은이들로 북적였다. 예술과 낭만의 거리로 불리는 스카달리아에는 「3개의 모자(3 세시르)」 「두마리 사슴(드바 옐레나)」 「나의 모자(모야 세시르)」등 재미있는 이름의 카페들과 문인기념관 등이 골목길 양쪽에 도열해 있었다. 생필품난에 허덕일 것으로 생각했던 베오그라드 시민들은 적어도 겉에서 보기에는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슬라브어로 「녹색 왕관」을 뜻하는 젤레니 베나츠시장에는 각종 농·축산물 이 가득했고 노천 벼룩시장 「부빌리야크」와 도심 상점에는 전자 제품에서 고급의상에 이르기까지 각종 상품들이 진열돼 있었다. 넉넉한 농축산물과 자급률 20%의 석유 등 풍부한 지하자원을 갖고 있는 신유고에서 경제제재가 기본 생활을 위협하지는 않는 듯한 인상이었다. 베오그라드는 그러나 속으로 앓고 있었다. 보스니아 내전은 세르비아 민족이 근·현대를 통틀어 5번째 벌
인 국제전이다. 두차례의 발칸전쟁과 세계대전에서 세르비아는 늘 분쟁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었다. 발칸이 「화약고」라면 민족의 식이 특히 강한 세르비아는 그 「뇌관」격이었다. 보스니아 내전과 뒤이은 경제제재가 신유고에 남긴 충격파는 엄 청난 것이었다. 계획경제에 대한 맹신을 일찌감치 버리고 자주관 리 사회주의라는 「제3의 길」을 선택, 50년대 이후 구축한 산업기반은 송두리째 파괴됐다. 공식적인 피해액만 1천5백억달러 . 80년대 초 현대 포니와 함께 미국시장에서 수출경쟁을 벌였 다는 자스타바사는 4개월째 임금을 지불하지 못하고 있었다. 제재는 베오그라드 시민들의 미래에 대한 희망까지 거세해 버렸 다. 고교 졸업 뒤 「아카데미아 드람스키」(영화아카데미)에 진 학하고 싶다는 마테아 네다도비치(18·학생)는 『종전이 돼도 향후 20∼30년까지는 희망이 없다고들 한다』면서 『공부를 마 치는대로 이민 갈 것』이라고 말했다. 전쟁 전 오퍼상을 했다는 스베클라나 하이넬(38·여)은 『제재의 가장 큰 피해는 중산 층의 소멸』이라면서 『93년 한때 최고 10억%에 달했던 천문 학적인 인플레로 신유고의 중산층은 모두 빈곤층으로 전락했다』고 말했다. 그는 『그 대신 전쟁터와 암시장에서 큰 돈을 번 마
피아 등 신흥부유층이 생겨나 빈부격차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겉은 풍요로운 굴절의 삶 서구에서 발칸으로 향하는 길목인 보스니아에서 벌어진 전쟁은 세르비아 뿐 아니라 동유럽 전체의 발전까지 지체시켰다. 철도와 도로, 수로가 막힘에 따라 인적·물적 교류가 정체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보스니아 종전의 희망과 함께 신유고에도 변화의 미풍은 불고 있었다. 신유고의 철도와 도로, 다리 등 사회기반시설을 총괄하는 CIP사는 막혔던 길을 뚫고 노후한 인프라를 개선하 려는 노력을 진행하고 있었다. 블라도 오스토지치 CIP부회장은 『철도의 경우 신유고 북단의 수보티차와 남단의 디미트로프그라드를 잇는 종단철도를 여객·화 물 공용의 고속철도화하는 방안이 구체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면서 『독일과 프랑스 정부가 가장 활발하게 참여논의를 벌이고 있다 』고 말했다. 장기 마스터플랜에는 또한 보스니아 지역의 철로가 복구되는 대 로 흑해연안의 오데사항까지 연결하는 동서 기간철도망도 포함돼 있었다. 그러나 길이 통한다고 전쟁의 상처가 당장 치유되기는 어려운 실정. 지난 4년간 서방언론의 일방적인 「세르비아 때리
기」로 고립감마저 느끼고 있는 베오그라드 시민들의 마음에 훈풍이 불기 까지는 상당한 기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였다. ○종전희망과 변화의 미풍 베오그라드에서 마지막 밤을 보냈던 모스크바 호텔 커피숍에서 노신사 2명과 마주쳤다. 베오그라드 대학 교수를 지내다가 정년 퇴직했다는 70대 초반의 이들은 『두나브강을 메우던 유람선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면서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 슬 프다』고 말했다. 이들이 말하는 「좋았던 옛날」은 민족과 종교를 따지지 않고 나름대로 풍족하게 살았던 구 유고연방 시절을 가리킨다. 호텔 앞 거리는 밤이 깊을수록 불빛이 줄어들었고 행인들의 발자국을 덮는 눈보라가 한층 매서웠다.<베오그라드=김진호 특파원>
[0012]헝가리 부다페스트(유라시아 철도기행:31) 경향신문 951215 11면(문화) 기획 3249자
-------------------------------------------------------------------------------- ◎르네상스 풍취 고스란히… “동구의 파리”/발빠른 시장경제 적 응… 현란한 밤거리엔 쇼걸들 “유혹” 발칸을 종단하는 열차는 위로 올라갈수록 운행 편수가 많아진다 . 이스탄불에서 소피아∼베오그라드∼부다페스트로 북상하면서 하루 운행되는 열차 편수가 각각 2편, 3편, 5편으로 늘어나는 것이다. 편수가 늘어나면 열차 종류도 다양해지게 마련. 베오그라드에서 올라 탄 부다페스트행 열차는 이스탄불에서부터 눈에 익은 발칸 익스프레스가 아니라 헝가리 국영철도회사(MAV) 소속의 최신 열차였다. 2등칸 객실도 우리의 새마을열차 못지 않은 시설에 승객들도 말끔한 차림새였다. ○서구수준 고급상품 즐비 소피아와 베오그라드가 아직 역사의 무게에 눌려 있는 듯한 인 상이었다면 부다페스트는 이미 「시장」의 한복판에 놓여 있었다. 아침 7시30분쯤 러시아워와 함께 분주한 일상이 시작되는 부 다페스트 시내 어디에서도 구 동구권 국가의 음울한 흔적은 찾아 볼 수 없었다. 보석상과 은행, 사무실 등이 밀집돼 있는 바치 우차 거리의 대형백화점에는 서구 수준의 고급상품들이 쌓
여 있 었고 시 외곽 곳곳에서는 건축공사가 한창이었다. 소피아나 베오그라드에서처럼 「자본」의 때가 덜 묻은 순박함을 이미 털어버린 부다페스트에서는 과거와 현재가 자연스런 이웃살 이를 하고 있었다. 바치 우차에는 100년 이상의 전통을 자랑 하는 카페 제르보와 맥도널드 햄버거 점포가 공존하고 있었고 마 티아스 성당과 박물관이 들어 있는 왕성 거리 안에는 나이트클럽 이 성업중이었다. 부다에는 어느새 현란한 밤문화가 호황을 누리고 있어 「유럽의 방콕」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라는 것이 안내인의 귀띔. 대부분 의 시민들이 일찍 귀가해 거리는 한산한 모습이었지만 밤업소에서 는 인근 동구권 국가들과 구 소련 지역 출신의 슬라브 여인들과 서구에서 원정온 쇼단들이 관광객들의 호주머니를 노리고 있었다 . 도심 한복판에서는 정장차림의 외국인들도 자주 눈에 띄었다. 세르비아 출신으로 프랑스기업의 에이전트를 하고 있다는 유비샤 시비노비치(37)는 『회사 설립에서 주택문제 해결까지 비즈니스 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면서 『부다페스트는 유럽의 새로운 상 업중심지로 부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진출한 지 3년이 됐다는 그는 금리·수입자유화, 관련법규 정비 등의 조처
로 외국기업들 의 진출이 꾸준히 늘고 있다고 덧붙였다. 여타 동구권 국가들과 달리 전문직종이 우대받고 있는 점도 시 장원리가 정착되어 간다는 반증. 부다페스트 경제대학(구 카를 마르크스대학) 학생들의 장래 희망은 대부분 변호사나 의사, 관 료였다. 외국인들 중에는 헝가리의 개방적인 풍토를 이용해 어부지리를 얻는 경우도 있었다. 중국인 개미군단이 대표적인 예. 이들은 섬유제품이나 운동화 등 생필품이 거래되는 노천시장을 「점령」하 고 있었다. 함부르크항을 통해 들여 온 컨테이너가 부려지는 요 셉 바로쉬역 인근의 노천시장에서는 한 집 건너 중국상인을 발견 할 수 있었다. 요셉 바로쉬역 노천시장에서 91년부터 장사해 왔다는 쑤오 쉬 동(33·북경출신)은 『컨테이너 1개분의 옷을 팔면 1만달러 정도의 이익을 남긴다』면서 『초반에는 20일 만에 컨테이너 한 개 물량을 소화한 적도 있지만 요즘엔 1달 반이나 2달이 소 요된다』고 말했다. ○중국 개미군단 노천점령 노천 시장은 영세 헝가리 상인들에게도 삶의 터전이 되고 있었 다.헝가리 상인 이스트반(24)은 『몇년 전까지 만해도 헝가리 제품이 중국제품에 비해 품질이 뒤졌지
만 이제는 많이 좋아졌다 』고 말했다. 1873년 다뉴브강 서안 언덕지역의 고도 부다와 동안 평야지역의 신시가지 페스트가 합쳐짐으로써 탄생한 부다페 스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2중제국의 영광이 보존돼 있는 역사의 도시이기도 하다. 몽골과 오스만 터키의 침략으로 중세의 유적 은 상당 부분 파괴됐지만 르네상스의 세례를 받은 최동단 도시의 풍취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동구의 파리」라고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도시의 문화유산은 민주화 이후 급증한 관광수입으로 국 가경제에도 효자 역할을 하고 있다. 여전히 비대한 복지예산, 관료주의 등 부분적인 문제는 있지만 56년 반소 유혈봉기로 잠시 햇빛을 보았던 시장경제가 부다페 스트 시민들의 공동목표인 것은 분명해 보였다. 좁은 국토에 부존자원이 빈약한 헝가리가 국가적으로 중점을 두 고 있는 분야는 단연 3차산업. 무역투자진흥공사 부다페스트 무 역관의 안영환관장은 『헝가리 정부는 특히 금융·통신·유통업 등 을 주력 업종으로 육성, 국제적인 중개무역 기지로 부상하려 노 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헝가리 정부는 신동·서양 연결철도망 건설에도 어느 나라보다 열의를 보이고 있었다. 핵심 구간은 지난해 범 유럽운송회의에서
「루트5」로 명명된 부다페스트에서 우크라이나의 키예프까지 연 결되는 노선. 궁극적으로 모스크바를 경유, 카자흐스탄의 드루스 바까지 이어지게 될 이 노선은 현재 대부분 선박에 의존하고 있 는 유럽과 아시아 간의 물자운송 패턴을 철도로 바꾸는 데 목표 를 두고 있다. 미클로서 뵐지 MAV 화물운송 부국장은 『국가 별로 다른 철도 운송요율과 기술적인 문제 등 많은 현안이 남아 있지만 내년 상반기 중에는 열차운행이 가능할 것』이라고 전망 했다. 그러나 발빠르게 시장경제 체제에 적응하고 있는 헝가리에도 과 거의 그늘은 남아 있었다. 헝가리는 관료주의와 암시장 등 구 공산블록의 공동과제와 함께 소수민족 문제라는 오헝 제국의 부 채까지 걸머지고 있었다. ○집시보상금 새 골칫거리 중부 유럽의 패자였던 오헝 제국이 1차대전 뒤 붕괴되면서 루마니아와 신유고, 슬로바키아등 인접 국가에서 3백만명이 넘는 헝가리인들이 하루 아침에 소수민족으로 전락했다. 헝가리 국제문제연구소의 아틸라 게르게이 연구원은 『보스니아 내전에서 증명됐듯이 민족갈등은 최대의 분쟁소지』라면서 『실제로 89년 루마니아 티미소와라 폭동은 트란실바니아 지역에 살고 있던 헝가리계
주민들에 대한 차별이 발단이었다』고 지적했다. 전세계적으로 루마니아에 이어 두번째로 많은 집시문제는 또 다른 과거의 부채였다. 집시는 나치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유태인 다음으로 많이 희생됐던 종족. 카타르 공산정권이 60년대 당 시 서독 정부로부터 나치의 집시학살에 대한 보상금을 비밀리에 받은 사실이 민주화 직후 밝혀지자 헝가리 집시단체들은 현 정부 를 상대로 보상금 환급을 요구하고 있었다. 「프랄리페」(연대)라는 이름의 집시결사체를 이끌고 있는 빌라 오스토이칸(47)은 『절대빈곤으로 고생하고 있는 집시들의 정 착을 위해서라도 정부지원이 절실한 실정』이라고 역설했다. 허름한 옷차림과 검은 피부로 쉽게 식별되는 그들은 더이상 자 유를 꿈꾸는 전설 속의 유랑민이 아니라 또 다른 무리의 도시빈 민층으로 보였다.<부다페스트=김진호 특파원>
[0011]중세고도 체코 프라하(유라시아 철도기행:32) 경향신문 951223 11면(문화) 기획 3234자
-------------------------------------------------------------------------------- ◎골목마다 역사의 향기… 외국관광객 “밀물”/「프라하의 봄」 「돈 조반니」 공연장앞 한겨울에도 인파 북적 블타바강 유역에 자리잡은 중세 고도. 프라하는 음습한 대륙성 기후로 잔뜩 흐린 날씨에도 불구하고 외국관광객들로 북적거렸다. 조각가 로댕이 「북쪽의 로마」라고 극찬했다는 프라하는 타임머신을 타고 날아온 듯한 착각이 들 정 도로 중세의 아름다움을 원형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다. 건립에만 1,000년이 걸려 체코 역사와 맥을 같이한다는 비 투스성당과 프라하성, 구시가지 광장, 말라 스트라나(소지구), 구시가지의 틴 교회, 카렐다리 등 시 전체가 관광객을 흡입한 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고딕과 르네상스, 바로크, 로마네 스크 양식의 건물들은 물론 마차가 다녔던 포도와 좁은 골목 하 나하나에 역사의 향기가 배어 있었다. ○숫자 거꾸로 쓰인 유태인 시계 프라하를 찾은 외국관광객은 지난 해 1천7백만명. 프라하 주 재 한국대사관의 이상학서기관은 『체코는 20억달러에 달한 작년 관광수입으로 무역수지 적자를 경상수지 흑자로 전환시킬 수 있 었다』고
말했다. 프라하가 문화유산을 고스란히 간직할 수 있었던 것은 역사적으 로 단 한 차례의 폭격도 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가 주변 강대국들의 침략으로 철저하게 파괴 된 것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오랜 지적·문화적 전통은 프라하만이 갖고 있는 「관광 인프라 」의 또 다른 축. 연례 음악축전 「프라하의 봄」이 개막되는 루돌피눔 음악당과 모차르트가 「돈 조반니」를 초연했다는 스타보 프스케 극장등 공연장 앞에는 한겨울에도 인파로 붐볐다. 프란츠 카프카 생가와 그가 「성」등 대표작을 집필하면서 머물 렀다는 프라하성내 황금골목 등에는 집단주의에 대한 개인의 소외 와 저항을 대변했던 그의 자취가 남아 있었다. 도시 속의 도시로 자리잡고 있는 유태인 지구(요세포프)는 유 럽 대륙에 남은 유일한 게토. 현재 1,000명도 안되는 유태 인만 살고 있지만 스타로노바(신구) 시나고그를 비롯해 6개의 유태교 교회와 유태인 시청, 묘지, 박물관이 보존돼 있었다. 프라하의 유태인들은 여전히 「그들만의 시간」 속에 살고 있었다 . 유태인 시청에 달린 유태인 시계에는 일반 시계와는 다르게 거꾸로 쓰인 히브리어 숫자판이 달려 있다.
유태인 희생기념관이 세워진 핀카스 시나고그 내부 벽면은 온통 노랑·빨강·검정 글씨로 장식돼 있었다. 모퉁이에 놓인 걸상에 앉아 있던 백발 노인은 『나치에 희생당한 유태인 7만7천9백 27명의 이름과 출생지, 생년월일』이라고 또박또박 설명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그는 『유태인 기념관을 보존한 것은 바로 학살의 주범인 히틀러 자신이었다』고 전해주었다. ○카렐대 한국학과 50년에 설립 히틀러는 42년 「멸종 인종 박물관」을 세우려는 의도로 체코 전역에 흩어진 152개의 게토에서 유태인 물품을 수집해 보관 토록 지시했다는 것이다. 신시가지 중심인 바츨라프 광장에는 중세와 현대의 「영웅」들이 함께 모셔져 있었다. 광장 위쪽에 있는 성 바츨라프 기마상 앞에는 68년 「프라하의 봄」 당시 소련군에 저항하다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는 꽃과 촛불, 사진들이 놓여 있었다. 89년 민주화시위가 열렸던 바츨라프 광장은 대형상가와 사무실 , 서점 등이 밀집해 있는 프라하 최대 번화가. 행인과 자동차 가 바삐 오가는 거리 곳곳에는 영어교습 광고가 붙어 있어 젊은 이들 사이에서 불고 있는 「미국 붐」을 짐작케 했다. 600년이 넘는 중부유럽 최고의 역사를 자랑
하는 카렐대학은 한국학 연구에서도 상당한 경륜을 갖고 있다. 50년 설립된 한 국학과가 소속된 동양학부는 프라하 시내 한복판에 있었다. 한국 학과 주임교수를 맡고 있는 블라지미르 푸체크박사(62)는 『프 라하에서는 이미 30년대부터 한국작가들의 작품이 번역되기 시작 했다』면서 『카렐대학에는 현재 신입생부터 5년생까지 20명의 학생이 한국학을 전공하고 있다』고 말했다. 체코는 이웃 헝가리와 함께 경제개혁의 쌍두마차로 불리는 나라 . 그러나 전통적인 농업국가였던 헝가리와 다르게 체코는 오스트 리아-헝가리 제국 시절부터 선진 산업지역이었다. 공산정권 시절 에도 기계공업과 군수산업을 중심으로 앞선 기술수준을 자랑했었다 . 게다가 상대적으로 산업기반이 취약한 슬로바키아가 93년 평화 적으로 분리됨으로써 체코의 개혁은 오히려 가속도가 붙게 됐다. 체코는 지난달 말 경제개발협력기구(OECD)에 가입, 성공적 인 개혁을 인정받았다. 경제개혁과 함께 전통 서구사회로의 복귀를 희망하고 있는 체코 정부는 서구와 보조를 맞추기 위해 낙후한 도로와 철도 등 사 회기반시설 현대화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지리적으로 유럽의 중심에 위치한 체코는 빈과 베를린을 잇는
전통적인 남북유럽 철로의 연결지점. 오스트리아와 독일과 인접해 있어 유럽연합(EU)의 중요 수송루트로서 인프라 확충 필요성 이 높아지고 있다. ○독일과 과거청산 문제로 갈등 체코 정부의 역점사업은 프라하를 중심으로 빈∼베를린과 바르샤 바∼빈을 잇는 국제 간선철도망의 현대화. 파벨 카프카 체코 교 통부장관 비서실장은 『운송비용을 줄여 수출품의 가격을 내리는 것이 최대 관건』이라면서 『각각 제1·제2 회랑으로 명명된 이 들 노선의 체코통과 구간에서 열차운행 속도를 시속 160㎞ 수 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당면 목표』라고 말했다. 그는 유럽부흥 개발은행(EBRD)과 일본은행에서 이미 재원을 확보한 상태라며 내년 초 착공해 2002년까지 완공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갈길 바쁜 체코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은 인접한 독일과의 과 거청산 문제였다. 독일은 현재 대체코 최대 투자국이면서도 제1 의 가상적국이다. 역사적으로 기름진 땅을 찾아 남진했던 독일인 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했던 주데텐지방을 둘러싼 해묵은 긴장이 현 재진행형으로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체코 동부의 주데텐지방은 히틀러에 의한 체코인 추방과 2차대 전 뒤 체코정부의 독일인 추방이 몇년 간격으로 단행됐던 곳.
주데텐에서 쫓겨난 2백70여만명의 독일인들은 현재 독일 바이에 른주와 오스트리아에 거주하고 있다. 이들은 현지 우파 세력을 등에 업고 체코정부에 재산반환을 요구하고 있다. 주한 체코 대리대사를 역임한 야로슬라브 바린카(64)는 『일 본은 한국에 대해 망언만 일삼고 있지만 독일인들은 체코에 실질 적인 위협을 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민족주의 열정이 「오른쪽」으로 기울 경우 나타나는 일 그러진 모습은 체코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프라하에는 유럽 어 느 도시에서나 쉽게 눈에 띄는 집시들을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 슬로바키아와의 분리 당시 체코정부는 집시들에게 국적을 허용 하지 않음으로써 이들을 간접적으로 「청소」했기 때문이다.<프라 하=김진호 특파원>
[0009]마지막 목적지 네덜란드 로테르담(유라시아 철도기행:33·끝) 경향신문 951229 11면(문화) 기획 3190자
-------------------------------------------------------------------------------- ◎세계 최대 항구서 멎은 철마… 새 여로가 시작/항만수입은 경 제 주춧돌… 고통의 바다서 부 길어올려 프라하에서 출발한 열차는 독일 베를린에서 시베리아횡단철도와 합류한 뒤 로테르담에서 멈춘다. 중국 연운항에서부터 2만7천리 를 달려 온 유라시아 횡단열차의 마지막 목적지에 도달한 것이다 . ○유럽화물 60%부려지는 관문 로테르담은 그러나 종착역일뿐 아니라 새로운 여로가 시작되는 출발지 이기도 하다. 라인·마스·쉘트강 하류에 자리한 로테르담 은 세계 최대 물동량을 자랑하는 항구도시. 유럽에 유입되는 화 물의 60%가 부려지는 관문이다. 세계 각국의 물산은 이곳에서 실핏줄처럼 뻗은 수로와 철도, 도로망을 통해 유럽 각지에 운 반된다. 유로시티(EC) 열차편으로 도착한 로테르담 중앙역은 상가가 빼곡히 들어선 말끔한 현대식 건물이었다. 2차대전 당시 독일공군의 집중 공습을 받은 시내에는 여느 유 럽 도시와 달리 고풍스러운 건물을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 로 테르담의 매력은 낡은 것이 아닌 새로운 것에 있었다. 연필모양의
시립도서관과 정육면체를 공중에 모로 세워 놓은 큐 빅하우스 등 갖가지 아이디어가 망라된 현대건축물들은 독창적인 조형미를 갖고 있었다. 계단 기둥에 얹혀 있는 큐빅하우스는 나무위에 기거했던 원시인 들의 주거형태에 착안한 건축물. 시 관광청 직원 하리에타 부솅 (26)은 『큐빅하우스는 주거지의 고정관념을 깬 건축물』이라면 서 『나무 한그루에 비유할 수 있는 개개의 큐빅하우스들은 또한 서로 붙어 있어 함께 하는 삶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로테르담의 이름은 암스테르담을 비롯한 네덜란드 내 「담」자 돌림 도시들과 동일한 형성과정을 갖고 있다. 라인강의 지류인 로트 강가에 댐이 서고 그 위에 시장이 열리면서 마을이 생긴 것이다. 시의 발상지인 담광장에 매주 화·토요일에 열리는 노천장(데 마르크트)은 저렴한 가격으로 시민들의 인기를 끌고 있었다. 간 이점포에는 골동품과 양탄자에서부터 의류, 채소, 과일, 헌책 등 각종 생필품이 쌓여 있었다. 오후 4시가 조금 넘자 광장은 철시준비로 부산해지기 시작했다. 꽃상인들이 몰린 곳에서는 『끝물』이라며 『종류에 상관없이 한 무더기에 5길더(약 2천5백원)』라는 외침이 시끌벅적하게 들 렸다.
항만과 무역으로 번영을 구가하는 도시답게 로테르담 시내는 활 기에 차있었다. 거리에는 유난히 흑인들이 많이 보였고 동양인은 물론 얼굴을 가린 이슬람 여인들도 종종 눈에 띄었다. 거리 곳곳에서 남루한 차림의 성인남녀가 파는 「거리신문」은 행인들의 호응을 얻고 있었다. 적지 않은 행인들은 종교단체등에서 극빈 자들에게 신문을 팔아 스스로의 빵을 해결하라고 운영하는 거리신 문(1부당 2길더·약 1,000원)을 1부씩 갖고 있었다. 다인종 모듬살이에 익숙해진 로테르담 시민들은 외국인에 대한 친절이 몸에 배어 있었다. 한국 건설업계의 항만시설 시찰단을 안내하기 위해 로테르담을 찾은 주한 네덜란드 대사관의 김만석 상무관은 『오랜 상업적 전 통으로 자신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끼치지 않는 한 외국인들에게 깍듯하다』고 말했다. 국민의 70%이상이 영어를 구사하고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이면 외국어 2∼3개를 말할 수 있어 우선 의 사소통이 가능한 것도 외국인을 편하게 대하는 이유라고 그는 덧 붙였다. ○카페들어선 스페인부두 명물 시 중심가의 올드 하버(구항)와 변두리의 델프스 하벤은 비교 적 옛 모습이 남아있는 곳. 올드 하버는 미국 인디언들로부터
맨해튼 섬을 사들이고 멀리 카리브해와 인도네시아까지 진출했던 네덜란드의 「황금시절」을 대표한다. 좁은 수로에 작은 배들이 한가로이 정박해 있고 카페가 들어선 스페인 부두는 로테르담의 명물이다. 부두 한쪽에는 1898년에 세워졌다는 유럽 최초의 오피스빌딩 「화이트 하우스」가 서 있다. 시 외곽의 델프스 하벤은 가톨릭교도들의 박해를 피해 신대륙으 로 떠났던 필그림 선조들의 교회가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교 회 앞 수로에는 메이플라워가 떠나던 선착장이 남아있고 풍차와 술도가 거리도 보존 돼 있다. 빈약한 부존자원에 국토의 27%가 해수면 보다 낮은 가혹한 환경을 극복해야 했던 네덜란드인들에게 바다는 고통의 원천이자 기회의 터전이었다. 네덜란드 내 다른 항구와 마찬가지로 로테르 담의 과거와 현재도 바다와의 인연으로 점철된다. 시대별 배 모 형과 항해장비가 전시된 로테르담 해양박물관에서는 부모들이 아이 들에게 열심히 바다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마스강 좌안 허름한 건물의 호텔 뉴욕은 로테르담의 암울했던 시절의 기념비. 93년 호텔로 개장한 이 건물은 금세기 초 기회의 땅인 미국 으로 떠나는 사람들이 몰렸던 증기선 회사의 선착장 건물이다.
「홀랜드아메리카 증기선」이라고 씌어져 있는 호텔 로비에는 가 난을 피해 고향을 떠났던 사람들과 눈물의 전송장면이 담긴 빛바 랜 사진이 걸려있었다. 그러나 고향을 지켰던 사람들은 이제 고통의 바다에서 부를 길 어올리고 있었다. 45㎞ 길이에 총면적 1만5백43㏊에 달하는 로테르담 항만(유로포르트)에서는 하역작업이 한창이었다. 항만에서 나오는 수입만으로 네덜란드 국민총생산(GNP)의 1 5%를 점한다는 유로포르트는 직·간접적으로 30만명에게 일자리 를 제공하는 시 경제의 주춧돌이다. 196개의 크레인과 무인 자동화 터미널, 복합운송시스템을 갖춘 유로포르트는 민·관 협조 체제로 운영되고 있었다. 항만 건설에 필요한 부지매입과 인프라 는 시 당국이, 하역장비와 창고 등 지상건조물과 항만운영은 민 간회사 ECT가 맡는다. 네덜란드 무역국의 한스 브론은 『시 당국은 항만 대여에서 나 온 수입중 일부를 다시 해양휴양지 조성에 투입해 균형개발을 도 모하고 있다』고 말했다. ECT가 처리하는 컨테이너 가운데 철도로 운송되는 물량은 1 0∼15%정도. ECT는 항만내 화물 전용철도를 통해 157㎞ 떨어진 독일 국경 벤로까지 셔틀 열차를 운행하고 있다. 91
년 대단위 집하시설을 갖춰 놓은 벤로는 네덜란드 최대 물류기지 . 이 곳에서부터 컨테이너는 트럭에 실려 뒤셀도르프(55㎞), 쾰른(90㎞)등 독일내 주요도시로 운송된다. ○숨가쁘게 달려온 대장정 네덜란드 교통부 공보관 카롤 반 로알텐은 『로테르담에서 모스 크바까지 잇는 화물전용 셔틀열차 운행도 계획하고 있지만 철로규 격과 관세문제등으로 가까운 시일 내에 실현되기는 힘든 실정』이 라고 말했다. 황해 앞바다의 연운항에서 출발, 중앙아시아와 이란구간을 거쳐 이스탄불에서 유럽대륙에 진입한 뒤 숨가쁘게 달려 온 유라시아 횡단열차의 철륜이 멈춘 곳. 기나긴 여정이 끝나자 길은 또 다 시 시작되고 있었다.<로테르담=김진호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