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눌프의 시베리아 여행기 (10) - 87시간, 시베리아 횡단열차 1.

[이희인88]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내부.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크게 6인실, 4인실, 2인실로 구분되는데, 가격 등 모든 면에서 4인실인

'꾸뻬'가 여행하기 가장 알맞다. 안에서 문을 잠글 수 있는 침대 4개짜리 방 옆으로 이와 같은

복도가 죽 ~ 이어져 있다. 이르쿠츠크 역에서 허겁지겁 열차를 탔다. 목적지인 모스크바까지 87시간 ...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낭만열차'가 아님을 아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횡단열차에서 만난 '가족'들.

종점인 블라디보스톡에서 모스크바까지 가자면 100여 시간, 6박7일 일정이 훨씬 넘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7개의 시간대를 거친다고 한다. 이렇게 오래 같은 열차 안에서 생활하다 보면 생면 부지의 젊은 남녀는 '연인'으로 발전하기도 하고, 처음 만난 사람들도 일종의 '가족'이 되기도 한다. 실제로 러시아 영화에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소재로 한 로맨스가 만다고 한다. 사진 속의 아이들은 이르쿠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87시간을 함께 했던 귀여운 녀석들. 사진 속 수염난 어른은 (보기엔 좀 섬뜩하지만) 중간 역인 크로스노스야르에 사시는 러시아 정교회 신부님이시다.

친친절하고 마음씨 넉넉하신 신부님과 캐톨릭, 프로테스탄트, 러시아 정교(오소독스)에 차이에 관한 여러 말씀을 들었다. 중세시대 러시아의 왕이 국교를 정할 때 '술'을 금지하는 이슬람교는 아무래도 자신의 백성들과는 안 맞을 것이라 하여 멀리하고 대신 정교회를 국교로 받아들였단다. 사진 속 아이들은 남매다. 10살 정도된 누나는 안줄르카, 그 동생의 이름은 마르크.

같은 객실에 묵은 나탈리아 아줌마와 그 친구. 

긴긴 기차 여행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사람과 같은 객실을 쓰게 되는가, 가 아닐까? 내가 들었던 객실에는 한 아줌마(나탈리아)와 그의 아들인 듯한(솔직히 아들인지 연인인지 잘 모르겠다) 비행기 조종사 알렉셰이가 침대 아래칸에 자리잡고 있었다. 과묵하여 잠만 자거나 추리소설을 읽기만 하던 알렉세이는 술만 마시면 '오 ~ 친구!' 하면서 술잔을 건네고 사뭇 친한 척을 했는데, 거의 매일 저녁 술파티를 벌였다. 이웃 기차 칸에 있는 역시 비행기 조종사 부부가 우리 객실로 놀러와 낯선 여행자를 술자리로 기꺼이 불러주었다. 한 잔 마시고 크눌프의 볼에 키스해주는 나탈리아 아줌마. ^^ 어디가나 크눌프는 인기짱이다.^^

빗속, 열차에 다가온 노점상 아줌마.

개인적으로 이번 러시아 여행의 베스트 컷은 이 사진이라고 생각한다. 열차를 탄 이튿날부터 차창 밖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가끔 시베리아 열차가 지나가는 대도시에는 20에서 30분 가량 정차하기 마련인데, 그때마다 열차 밖에는 노점상들이 다가와 먹을 거리와 꽃들을 팔았다. 비를 맞으며 열차 손님에게 맥주를 파는 아줌마의 생활력과 고단함 등이 묻어난다.

 

시베리아에 내리는 비.

하루 종일 차창밖에 비가 내렸다. 중간으로 치달은 여행에 대한 반성과 돌아봄의 시간을 가지라는 듯. 여름이 오니 비가 내리고 있지만, 겨울엔 이 차창밖이 온통 하얀 설원일 것이다. 더욱 보고싶은 것은 시베리아의 겨울이다.

비가 잦아든 시베리아 열차의 차창밖

시베리아, 낯선 도시를 지나며 ...

블라디보스톡에서 모스크바까지 연결된 시베리아 노선 상에 러시아의 주요 도시들이 걸쳐 있다. 극동의 부동항인 블라디보스톡을 시작으로, 우리 독립운동사와 깊은 연관이 있는 하바로프스크, 몽골과 접경에 있는 브리야트 공화국의 주도 울란우데, 바이칼의 도시 이르쿠츠크, 러시아의 과학도시 코로스노야르스크, 러시아의 제 3의 도시 노보시비르스크, 그밖에도 옴스크, 치타, 튜멘, 예카체린부르크 등의 도시가 1만여 킬로미터에 이르는 시베리아 횡단 노선에 걸쳐있다.

여행하는 나의 생수병과 맥주병. ^^

기차에서 하루를 다 보내고 나자,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더이상 '낭만'과는 먼 무엇이 되었다. 

 

객실, 이층 침대칸에서 발쪽을 향해 찍은 한 컷.

무료함, 무료함, 무료함 ... 가지고 온 음악 CD를 거듭 들었고, 가지고 온 책들 중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을 다 읽어치웠고, 러시아 가이드 북을 고시공부하듯이 읽었는데도 ... 시간은 ... 풀장에 가득한 물처럼 남아있었다. 시간의 잉여를 이토록 질리게 경험하기는 처음 ^^

열차 안의 아이들.

왼쪽부터 안줄르카, 그의 큰 동생 오르쭘, 이웃칸의 몽골계 러시아인인 두이안나. 지루한 여행에 그나마 활력과 재미를 불어넣어 준 것은 이 꼬마들이다. 학교에서 간신히 배운 영어를 써보는 게 신기한 듯 안줄르카와 두이안나는 이 젊은^^ 여행자 오빠에게 말을 걸어오고 장난을 쳤다. 안줄르카의 남동생들인 오르쭘과 마르크는 침대에 자고 있는 나그네를 깨워 놀자고 했다. 이들이 없었다면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지옥으로 가는 열차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

 

예쁜 안줄르카.

새침하던 이 여자아이는 이틀 쯤 되는 날부터 여행자 아저씨한테 툭툭 장난을 걸어왔다. 안줄르카가 자라면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던 백옥의 러시아 미인이 될 것 같다.

열차 앞, 노점상들과 열차 손님들.

첫날은 하루종일 비가 내리더니 둘째, 셋째날은 화창하게 맑았다. 여기 선 여자들은 중간 쯤 역에서 우리 칸에 올라온 처녀들인데 함께 몰려다니며 온갖 이쁜 척을 다 떨고 다녔다. ^^ 도시가 크면 열차가 서는 시간도 길었다. 가장 긴 정차역은 거진 1시간을 서 있었던 듯하다. 이 정차 시간이야말로 갑갑한 열차 안을 벗어나 햇살과 땅의 기운을 보충하는 시간,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한 이런저런 식량들을 비축하는 시간.

밤 11시경. 어느 대도시 기차역.

밤이 되니 바람이 시원했다. 설핏 저녁 잠에 빠져있던 나그네는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는 기차의 몸체를 느끼며 부스스 기차 밖으로 나왔다. 기차 밖에는 어느덧 한 가족이 되어있는 열차 안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나와 한데 몰려있었다. 나도 그들의 가족인지라 함께 통하지 않는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기차옆 키오스크 매점에는 다른 역에서보다 먹거리도 많았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캔맥주를 땄다. 아직도 이틀은 더 가야한다. 지리한 열차여행이 긑을 보여오자 그도 아쉬워졌다.

잠시 정차한 기차역에서 찍은 차창 밖 풍경.

대략 '오무띠느스카야'라고 쓰여있는 역이다. 러시아 여행을 하면서 처음엔 헤괴망측한 러시아 어를 끔찍하게 생각했지만 차츰 그 나랏말을 읽을 정도는 되었다. 

러시아의 밤.

백야가 멀지 않은 러시아의 밤은 늦게 찾아왔다. 황량한 들판보다 도시와 공장지대가 좀더 자주 나타나는 걸 보니 모스크바가 그닥 멀리 남지는 않은 듯했다.

2편에서 계속.

크눌.

[어열(81)]

wow. 재밌다. 중단되지 않기를...

[오병창82]

기차 여행을 보니 지난 3월 제가 겪었던 여행이 기억납니다. 프랑스에서 스위스를 들어 가던 중 목적지를 앞에 두고 갑자기 기차가 되돌아 가기 시작하던군요. 나중에 알고 보니 아마도 기차의 앞부분은 원래의 목적지까지 갔고 뒷부분은 떨어져서 되돌아 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의 황당함......

[오병창82]

영문을 몰라하며 반나절 동안 스위스에서 함께 온갖 불법과 탈법을 자행헸던 미국인 50대 아저씨는 스위스에서 장사 잘 하고 귀국했나 모르겠습니다.

[이정우81]

사진과 겻들인 설명, 역시 프로는 아름답다. 시베리아횡단열차 행간에 숨어있는 것은 지루함과 권태인 것 같다. 여행자는 항상 지루하다. 변화는 잠깐일 뿐.... 시베리아 벌판에서 지루함에 지친 눈물을 흘리고 싶구나!! 어차피 우리의 삶은 무엇을 하고 있든 "지루함"이다. 그리고 삶이 곧 지옥으로 가는 열차이다.

[개털(조원선73)]

허 허 허 .....참으로...............좋다...............멍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