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나 나왔소
고재덕
남자의 인생 항해는 괴로운 여정이다. 유년시절, 학창시절, 군복무시절, 예비군시절, 민방위시절, 지공선사(지하철 공짜)시절, 공공근로시절, 요양원시절 등 팔단계이다. 머리에 하얀 박꽃이 피니 돈줄은 끊기고, 지출은 많아진다. 고참이라고 각 단체에서 회장직, 고문직에 앉혀 놓으니 지갑 열기에 바쁘다. 주로 경조비, 상조비, 손주용돈 등으로 많이 지출된다.
요즘 시아버지들은 며느리의 눈치를 보며 산다. 손자가 귀여워 초콜릿이나 아이스크림을 사주면 이가 상한다고 며느리가 펄펄 뛰니 군것질감 사주는 것도 겁난다. 손자를 무릎에 앉혀놓고 춘향전 이야기를 해주면 손자가 먼저 " 할아버지, 이몽룡이가 암행어사 되었지요? " 심청전 이야기해주면 "할아버지, 심청이가 쌀 삼백 석에 팔려 갔지요?" 손주가 할아버지보다 더 많이 알고 있으니 손주들에게 가르쳐 줄 밑천이 없고, 할아버지가 오히려 손자한테 배우게 된다. 할아버지 체면은 닭 쫓는 개 신세다. 흐르는 세월에 고개 숙여지는 것도 억울한데 손주들에 보여줄 카드가 없으니 거리감이 생겨 외롭고 가슴이 저민다.
어느 중소기업 회장 아내의 수첩에 가족 서열이 있었다. 첫째 고삼 딸, 둘째 취직 준비 장남, 셋째가 푸들이개, 넷째가 남편이란다. 나이가 드니 아내의 바가지는 더욱 심하고, 자식들도 무관심이니 남편이 설 곳은 없다. 남편 먼저, 아버지 먼저 시대가 그립다. 요즘 남편은 괴로운 마음을 달래는 곳은 오로지 산 뿐이다. 산은 거부도 없고, 시비도 없고, 오직 포용만 있으니 남편은 산이 만만하므로 어제도 산에 오르고 오늘도 산에 오른다. 손주들에게 군것질 감도 안 통하고, 이야기도 안 통하니 손주들에게 용돈 주는 것이 환심 사는데 안성 맞춤이다. 하지만 은근슬쩍 호주머니를 만지작거리면 침이 꼴깍 삼켜진다. 손주들 용돈을 위해서 일월초에 노인종합복지관에서 공공근로 일을 신청했더니 다행히 종로의 모 초등학교로 배당되었다.
아침 아홉시에 출근, 열두시에 퇴근, 월 십오일 근무에 조금 수령하니 이일마저 백수들에게는 하늘에 별 따기다. 초등학교 봉사자는 여자 칠명에, 남자 삼명으로 합 십명이다. 학교 정문에서 학교 보안관에게 신고한 후 식당으로 곧장 갔다. 대기실에서 비닐 가운으로 갈아입고 고무장갑을 끼고 조장의 지시에 따라 먼저 청소를 한다. 코로나 방음벽과 식탁바닥을 알콜 행주로 닦은 후 열한시 반에 배식한다. 어린이들이 식판을 들고 오면 밥 한주걱에, 반찬 세개와 국물을 나눠준다. 식사가 완료되면 어린이로 부터 퇴식판을 받은 후 식탁과 바닥을 알콜 행주로 닦는다. 옛날 우리 시절과 달리 요즘 어린이들은 모르는 사람한테도 공손히 인사하고, 이동시에는 천천히 가지 않고, 뛰어 다닌다. 식사 중에는 옛날 처럼 수다를 떨지 않고 조용히 밥을 먹으니 교육을 잘 받은 것 같다. 봉사라지만 오히려 초등학생한테 배운 점도 많았다. 봉사를 마치고 비닐 가운과 고무장갑을 벗어서 가즈런히 정리하고 조장에게 인사하고 퇴근한다. 조장이 청소구역을 배당하므로 그녀의 권리는 막강했다. 공공근로는 과거의 경력이나 자존심은 내려 놓아야 하지만 때로는 본의 아니게 모욕을 당하는 경우가 있다. 어느 날 조장이 한마디 했다.“ 얼굴은 반반한데 여기서 일하는 것 보니 고등학교도 못 나온 것 같습니다” “예, 중학교도 못 나왔습니더“
이주 후에 관악구 매장으로 파견 근무를 하게 되었다. 도토리묵을 팔으라는 봉사였다. 묵을 두부모처럼 잘라서 개당 천원에 파는 장사였다. 어느 날 조장이 숙제를 주었다. 묵을 제조할 때 실수로 볼트 한 개가 묵 속이 섞었으니 이를 먹으면 큰일 납니다. 묵을 망가 뜨리지 말고, 볼트를 찾아내라는 숙제였다. 묵을 파손하지 않고 볼트를 찾는 방법은 어려운 숙제였다. 고민 끝에 답을 알아냈다. 대바늘로 찍어볼까? 먹는 음식이므로 바늘로 찍으면 더렵혀지니 안 되겠다. 바늘은 포기하고 저울로 달아보기로 결정했다. 저울로 묵을 일일히 달았더니 묵 한개가 십그램이 더 무거웠으므로 볼트를 찾았지만 생각해보니 정상적인 일과가 아니고 시험을 당한 것 같았다.
조선시대에 명나라는 조선을 신하국으로 대하며 무시했다. 해괴망칙한 숙제를 주곤 했는데 이는 국격이 먹칠당한 채 숙제 풀기에 땀을 뻘뻘 흘려야 했으니 이는 약소국으로서 비애였다. 어느 날, 뱀 두 마리를 넣은 됫박을 명나라에서 조선에 보내왔다. 이 됫박에는 아버지 뱀, 아들 뱀 등 두 마리가 있는데 어느 뱀이 아버지 뱀인지 아들 뱀인지 찾아내라. 못 찾으면 벌금으로 쌀 일 백석을 조공으로 바치라는 주문이다. 의전 비서관은 아무리 연구해도 알 방법이 없었다. 그 비서관은 퇴청 후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는 간단하다고 설명했다. 됫박에 개구리를 넣어주면 먼저 먹는 놈이 아버지 뱀이란다. 장유유서란 논리에 의해서 숙제를 무난히 풀었지만 어찌 뱀이 유교의 사상을 알수 있단 말인가
쥐꼬리만한 알바 돈을 벌기위해서 명나라 흉계처럼 조장으로부터 도토리 묵으로 시험당했으니, "손주야, 네게 준 용돈의 사연을 알겠느냐 ?" 이런 모든 시련이 아내가 품위 유지비를 주지 않는 탓이다. 젊었을 때 아내에게 바쳤던 내 봉급은 어디로 갔나 ?
가정도 민주화 바람이 불어 가부장 제도는 사라지고, 남편은 오로지 돈버는 기계, 애 낳게 하는 도구로 전락했으니 남편은 스스로 자구책을 마련해야겠다. 숫 여우가 덫에 걸리면 밤새 껒 울어댄다. 암 여우가 숫 여우의 읍소를 듣고 달려와 덫의 문을 열어 살려준다. 아! 남편이 설 자리는 어디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