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아버지, 청춘고백
내 기억 속의 아버지는 이제 얼굴마저 희미하고 별로 추억도 많지 않다. 내가 국민학교에 입학 할 때 아버지가 내 가슴에 손수건을 달아주고 내 손을 잡고 학교로 데려가셨던 것, 학교 운동회날 아버지가 축구대회에 참석하셨는데 어쩌다 공을 찬 것이 하필이면 공은 날아가지 않고 아버지의 신발 한 쪽이 하늘로 날아가 버려서 내가 창피해 하던 일, 내가 아버지의 자전거 앞 조그맣고 동그란 의자에 앉아 어딘가를 향하여 가던 때 아버지의 품속에서 나던 담배냄새와 술 냄새, 그리고 내 귀에 숨찬 호흡이 들려왔던 것 등이 어렴풋이 생각날 뿐이다.
그 후 아버지는 내가 아홉 살이 되던 1964년 음력 4월 20일 불과 44세의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다. 나는 그래서 그 때 사람은 마흔 네 살이 되면 죽는 줄로 생각했다. 아버지가 언제부터 병석에 누우셨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언젠가는 우리 집 작은 마당에 굿판이 벌어지고, 밤이 늦도록 마당에서 덩더꿍 덩더꿍 챙챙 하면서 징과 꽹과리 소리가 요란하였다. 나는 그 소리가 듣기 싫었다.
아버지는 몹시 말라서 방안에 누워 계셨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서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모처럼 집안에는 음식들이 풍부하였다. 그때 불과 여섯 살이던 동생은 영문도 모르고 먹을 것이 많다고 좋아하면서 어머니 치맛자락을 붙잡고 놓지 않았다는 말을 주책없는 형은 지금도 한다.
아버지의 꽃상여는 마을을 떠나 우리가 뽕나무배기라고 부르던 밭으로 갔다. 나는 삼베옷에 대나무 지팡이를 짚고 머리에는 둥그런 띠 같은 것을 두르고 어이 어이 하고 울며 상여를 뒤따라갔다. 사람들은 아버지의 관을 흙 속 깊은 곳에 묻고 여러 명이 그 위에 올라가 무슨 노래를 부르며 나무대기로 쿡쿡 찧고 발로 밟았다. 나는 왜 우리 아버지를 눕혀놓고 마구 밟느냐고 소리치며 울었던 것 같다. 아버지가 숨이 막힐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에 대한 단편적인 기억은 몇 가지 있다. 내가 우리 집 뒤 언덕에 있는 상수리나무에 올라가서 아버지를 기다리면 신작로 저 편에 어둠이 서서히 몰려오고 어머니가 부르시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면서 나는 아버지를 기다렸던 것 같다. 그러나 대개 아버지는 쉽사리 오지 않으셨다.
그러다가 마침내 어떤 날은 해가 지고 어두워져서야 아버지는 돌아오셨고, 그 손에는 대개 고등어, 꽁치 같은 생선이나 마른 멸치, 조기 이런 것들이 들려 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어머니를 통해서 들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대개는 그런 것들이었다.
어머니가 전해주시던 이야기에 따르면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라고 하였다. 어머니와 결혼할 때는 아주 가난했으며 결혼 초기에는 모찌장사를 한 적도 있다고 하셨다. 그 후 아버지는 철도에서 기관사로 근무하신 적이 있고, 그래서 철도에 아는 사람들이 많아 고등학교를 졸업한 형을 철도 이리역기관창에 선반공으로 취직시켰다고 하셨다.
어머니가 평하시는 아버지는 아주 정이 많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눈이 우묵하게 들어가서 ‘눈우멍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으며, 철도를 그만두신 후에는 마을 이장 일을 보셨는데 한 가지 흠이라면 술과 담배를 너무 좋아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친구들을 만나면 무조건 술이었고 담배도 많이 피우신 것 같았다.
별로 말씀이 없으셨던 어머니가 아버지를 말씀 하실 때면 가장 많이 자랑하시던 것이 몇 가지 있었다. “네 아버지는 나에게 저리가라 한번 안하셨단다. 늘 쳐다보기에도 아깝다고 하셨지. 생선을 좋아하셨는데 늘 집에 올 때면 생선을 사가지고 오셔서는 우물가에서 내장을 전부 손질해서 내놓으셨지. 술 담배를 많이 하셔서 속상했지만 노름도 여자도 가까이 한 적이 없으셨다.”
비록 아버지는 술을 많이 드셔서 어머니를 힘들게 하셨지만 노름판을 기웃거리거나 여자문제로 속을 썩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어머니가 잘 쓰시던 말씀도 늘 그런 것이었다. 아버지가 저리가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는 것, 아버지에게 있어서 어머니와 우리 자식들은 쳐다보기에도 아깝다고 말씀하셨다는 것. 그러면서 어머니는 우리에게 늘 당부하셨다. 너희들은 제발 술 많이 마시지 마라. 어머니의 당부는 이것 하나였다.
어머니가 말씀하신 ‘저리 가라’는 말씀은 무슨 뜻이었을까, 무릇 남편이 아내를 대할 때는 그러하여야 한다는 뜻일 게다. 아내가 아무리 내 앞을 가로막거나 성가시게 하더라도, 아니 나를 방해하거나 내 시야를 가리고 심지어 나의 장애물이 된다할지라도, 그리하여 나를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나의 걸림돌이 된다고 할지라도 아내에게 저리가라고 내치지 않는 것, 아내가 나에게 무슨 말을 할 때 듣기 싫어하고 무시하지 않는 것. 아마 그런 뜻일 게다.
그러나 그런 아버지에게도 잘못된 버릇이 있었다. 술을 너무 지나치게 드셨다는 것이었다. 어머니와 형은 내게 말해주었다. 아버지는 늘 술에 취해서 사셨다고 했다. 이장 일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친구들도 많았으므로 그럴 수 있었으리라고 이해하기에는 너무 지나치다. 아버지는 사람만 좋을 뿐 분별력도 자제력도 부족한 분이었던 것 같다. 국가나 지방자치단체, 농협 등에서 마을 사람들에게 배급하거나 판매하는 비료라든지 씨앗 등 이런 것들을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제대로 관리를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나는 생각해본다.
농촌에는 현금이 귀하다. 그러므로 농민들이 아마 비료나 씨앗 등 이런 것들을 공급받으면 그 대금은 가을 추수가 끝나고 벼를 수확하여 수매가 이루어진 후에 납부를 하거나 했을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농촌에는 각종 명목으로 내야 하는 소위 납부금이 꽤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농촌의 현실은 어떤가, 가을추수가 끝나고 일이 없어지면 사람들은 방에 모여 노름을 하거나 술을 마시고 집에 와서는 애꿎은 가족들에게 행패를 부리는 남편들이 많았다.
그때는 왜 그런 사람들이 많았을까, 별로 배운 것도 없고 고되고 힘든 농사일을 하던 농촌 사람들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내 어릴 적 기억에 저녁이 되면 술 취한 남편들이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면서 밥상을 마당에 내던지고, 창호지문을 발로 차서 부서뜨리고, 별 것 아닌 일로 쇠스랑 같은 농기구를 들고 죽인다고 달려들고 하던 일이 꽤 많았다.
그러면 아이들은 동네가 떠나가라고 울고, 어떤 부인은 급기야 못 살겠다면서 집을 나가버리는 일도 있었다. 그때 농촌의 현실은 왜 그렇게 가난한 집들이 많았을까, 내 어린 기억에도 대개는 집집마다 빚이 있었고, 외상술값 때문에 욕지거리가 난무하던 일도 많았다.
그렇다고 아주 나쁜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내가 기억하는 우리 마을에서는 농사철이면 이웃들끼리 서로 품앗이를 해서 오늘은 김 서방 네에서 모내기를 하면 이웃들이 함께 가서 모내기를 하고, 내일은 박서방 네 가서 김을 매고 하였다. 가을이면 우리 집 초가지붕이나 담장에도 이웃 아저씨들이 올라가서 새 짚으로 이엉을 얹어주었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사람들이 홀어머니의 농사일을 도와주셨던 것 같다.
마을에 집을 짓거나 우물을 파거나 누군가 돌아가셨을 때에도 마을 사람들이 나서서 서로 도왔고, 명절이나 단옷날에는 떡을 돌리고 윷놀이를 하던 기억, 농악을 하던 사람들이 마을을 돌며 장구를 치고 꽹과리와 징을 울리면 나도 신이 나서 그 뒤를 따라 다니던 기억도 난다.
그런 농촌의 현실 속에서 사람 좋은 아버지는 남의 빚에 보증을 서주었거나 농민들에게 비료나 씨앗을 내주고는 장부에 제대로 기록도 하지 않았을는지도 모른다. 장터에서 친구를 만나면 술집에 가서 외상술을 마시고는 아마 친구의 술값도 나한테 달아 놓으라고 큰 소리를 쳤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다가 술과 담배로 찌든 몸에 병마가 찾아왔고 아버지는 걷잡을 수 없이 병세가 악화되었다.
그렇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집안일은 전부 어머니 몫이었다. 농촌의 일은 여자 혼자서는 못하는 일이 많았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소를 부리는 일이었다. 논밭을 일구어 농사를 지으려면 밭을 갈거나 논을 파 엎어서 물을 대야 한다. 그런데 우리 집에 소가 있을 리 없었다. 그러면 어머니는 소를 가진 이웃사람에게 가서 부탁을 해야 했을 것이다. 어머니는 이를 ‘놉산다’고 표현하셨다.
어머니가 아버지 돌아가신 후 가장 힘들어 하셨던 것이 바로 이 놉사는 일이었다. 농사라는 것이 밭농사는 땅을 갈고 거름을 주고 씨를 뿌리고 풀을 매고 가꾸어 수확하는 일이고, 논농사는 벼 모종을 키워 모내기를 하고 피를 뽑아주고 때가 되면 농약을 뿌리고 벼가 익으면 수확하여 탈곡하고 나락을 방앗간에 내어 찧어야 쌀이 되어 나올 것이다.
첫댓글 그시절 아버지는 술 많이 드시고~~
어머니를 그리 아끼셨군요.
그래서 시인님도 사모님 을 많이 아끼시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