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방심의 위험성(눅 11장 23-26절) 240609 주일 설교
성경은 X인의 실존을 ‘영적 전쟁 수행자’로 예, 베드로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벧전 5:8,9)고 경고한다.
21C를 현대인들은 인류 역사의 어느 세대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전대미문의 문명의 혜택을 누린다. 이같이 획기적인 과학 및 기술의 발전 속에서 X들은 더욱 각성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보이는 세계’ 속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를 발견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자, 영 옥스퍼드 대 영문학 교수였던 C. S. 루이스는 악마에 대해서 “악마와 관련해 두 가지 오류에 빠질 가능성.
두 가지는 정반대이지만 둘 다 심각한 오류다. 하나는 악마의 존재를 믿지 않음, 다른 하나는 악마를 믿되 건전하지 못한 관심을 지나치게 갖는 일. 악마들은 두 가지를 좋아하며, 유물론자와 마술사를 가리지 않고 환영한다.”
그는 경험 많고 교활한 악마 스크루테이프가 조카이자 풋내기 악마 웜우드에게 인간을 유혹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31통의 편지로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란 책을 썼다.
책이 흥미로운 이유는 악마가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보통 악마의 모습을 어떻게 떠올리는지 생각해보자. 뿔 달리고, 코가 뾰족하며, 째진 눈을 떠올릴 것. 박쥐처럼 사람들이 싫어하는 이미지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C.S.루이스는 악마에 대한 희극적 이미지에 과도하게 집중하게 하는 것이 오히려 악마를 불신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와 비슷한 맥락의 문장이 등장한다. “우리를 불신하게 되는 제일 좋은 전략 중의 하나다.” 루이스가 활동했던 19C는 역설적이게도 악마의 전성시대라 불릴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당시 문학작품에 매력적인 악마상이 자주 등장하기 때문. 계몽주의 시대 사람들은 흔히 악의 작용 원리를 알면 진보된 이성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악도 인류 역사의 진보를 위해서 어느 정도 필수불가결하고, 때로는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여기기도 했다. 이처럼 악에 대한 낙관적인 생각을 하고 합리주의적 세계관에 익숙해지면서 사람들이 악마를 안 믿거나 악마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현상이 일어났다.
31통 편지에 두드러진 악마의 전략 뒤틀기와 비틀기. 창조의 근원 G이시기에, G께부터 등 돌린 사탄 새로운 뭔가 만들어낼 능력이 없어 사탄은 것들을 좌우로 흔들면서 인간을 유혹.
예, 자칫 ‘기독교적’ 표현에 매몰되기 쉽다.
기독교적 전통과 예배, 기독교적 교회 생활 등. 그러나 이 것들이 반드시 성경적이라는 것을 보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독교적’ 요소들이라 테두리 안에 숨어 현대 교회들 스스로 지극히 정상적 온전한 기준에 도달한다고 생각하며 안주. 누군가의 영혼을 위한다는 표현을 늘어놓지만 눈앞에 보이는 일상의 고통들에 대해서 외면한다. 따라서 지구 반대편의 영혼들에게 선교도 중요하나 우리 주변에 굶주리고 고통받는 이웃들의 손잡는 것은 더 중요하다. 열방 향해도 중요하나 사방 향해 시선 돌리는 것은 더 중요하다.
“그는 회심이 자기 내면에서 일어난 사건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지금 온통 자신의 심리상태에 관심이 쏠려있다. 이런 현상을 부추기도록. 가장 기본적인 의무는 등한시한 채 가장 어렵고 영적인 의무에만 마음 쓰게 하거라”(27p).
또 한가지는 인간이 자신의 흔들리는 감정에 몰두하게 하는 것이다. 사람의 감정을 비틀어서 실재를 보지 못하도록 하고, 욕망을 통해서 망상을 형성하고, 관계를 왜곡시켜 버린다. 이것이 루이스가 본 악마의 은밀하지만 강력한 전략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실제가 아니라 감정 자체에 집중하도록 유혹하고 있다는 것.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소위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많은 행위들이 경건한 ‘감정’을 부추기는 것이고, 그러한 활동에 매몰되어 모든 것이 경건하고, 지극히 정상적이라는 생각이 만연해 있지는 않는가? 의지를 감정에서 제거시키고, 감정을 꾸며내는 것으로 기도를 대체하게 만드는 것, 감정을 통해 ‘종교적’이 되는 것을 통해 믿음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환자(신자)가 제 마음속만 줄창 들여다보면서 자기 의지로 감정을 만들어 보려고 노력하게 만들라. 환자가 원수(G)의 사랑 구하려 하면, 실제 사랑을 구하는 대신 사랑의 감정을 저 혼자 꾸며 내려고 애쓰는 한편, 제가 이런 짓 함을 눈치채지 못하게 하란 말이지”(33p).
예수 믿음은 영적 세계 인정. 예수 믿는다면 영적 대적 마귀 존재 인정해야 예수는 믿지만 영적 대적에 대해 무지하다면, 항상 실패하는 X인이 될 수 밖에 없다.
존파이퍼 목사 다른 어떤 주제보다 사탄에 대해 많은 질문 받는다며, 성도들의 궁금증이 많음을 인정. “이 질문들의 신비한 성격을 인정한다. 성경은 사탄이 반역한 천사이며 은혜에서 타락했음을 암시하지만, 정확한 동기는 파악이 어렵지만 (사탄이) 타락한 천사고 천국에 반역이 있었다는 힌트가 있다”고 “
그러나 그것이 그가 어디서 왔는지에 대한 완전한 설명은 아니다. 왜 완벽하게 창조된 개인적· 이성적인 존재인 천사가 왜 완벽한 우주에서 반역할 동기를 찾는지 설명이 매우 어렵기 때문. 설명이 쉽지 않고, 충분한 설명이 없다. 그것은 현재 미스터리 중 하나” 파이퍼 목사는 “사탄의 영향력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뚜렷하며, 성경은 악마가 어디에나 존재하며 인류를 유혹 기만하여 영적 여정을 방해함을 분명히 한다”며 “신자들은 이같은 현상 때문에, 자비로우시고 전능하신 G께서 왜 그러한 악의적인 영향력이 지속되도록 허용하셨는지에 대한 의문을 품게 됐다”고 ‘씨 뿌리는 자의 비유’와 같이 사탄의 파괴적 힘이 명백한 몇 가지 성경 기록 비유에서 사탄은 G 의 말씀을 대표하는 ‘씨’를 사람들의 마음에서 빼앗아 영적으로 황폐하게 만든다. 바울은 ‘이 세대의 신’이 믿지 않는 이들의 마음을 혼미케 X 복음의 빛을 모르게 함에 대해 경고.
성도는 성령이 거하시는 G의 성전, 성전 더렵혀질 수 바울 거룩하라(고전 3:16~17) 어떤 이들은 ‘성령이 계시는 성전에 악한 영들이 함께 거할 수 없다’고 ‘신자들은 귀신에 들리지 않는다’고 주장. 요일 5장 18절 “G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G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근거로 사용.
그러나 신약의 기자들은 신자들이 부분적으로 사탄의 포로가 되고 혹 지배하에 놓일 수 있다고 증언. 예, 바울은 감독과 장로와 목사와 교사와 전도자와 선지자들이 귀신들릴 가능성을 경고(딤후3:6-7; 고후 11:3-4 13-15; 딤전 1:19-20; 딤후2:14-26; 딤전 4:1절 하 요일 4:1-4) 악한 영에게 사로잡힌 젊은 과부(딤전 5:9-15)및 귀신에 들린 은사가 많은 교회 지도자 및 기적 행하는 자들도 경고(요일 4:4; 마7:13-29; 살후2:1-17; 계 13장 비교).
“마귀로 틈타지 못하게 하라”(엡 4:27) 신자들 범죄 사탄이 신자들 공격할 빌미 죄 통해 사탄의 올무에 빠져(딤전 3:6-7; 5:15; 딤후 2:26) 생명 잃고(고전 5:5; 11:30-31; 딤전 1:20)
신앙생활에 가장 위험한 것은 방심. 영 청교도 목사 리차드 길핀(Richard Gilpin, 1625-1700) “만족은 확신을 낳는다. 확신은 부주의를 야기시킨다. 부주의는 G을 떠나시게 하며 사탄에게 보이지 않는 음모를 꾀할 기회를 제공한다. 종종 승리한 군대가 안도감에 사로잡히다 갑자기 놀라듯이, 흔히 영적 진보 후에 방심에 빠진다.”
● 사울 왕(삼상 16:14) 사울 죄의 직접적 결과 G의 신 떠나고 강력한 악신에게 사로잡힘.
● 가버나움 회당의 귀신들린 자(막 1:24) 여기서 귀신은 초자연 지식이 있었다. J이 누구며, 사탄과 사자들 무너뜨리고 승리하실 것 아셨고 육체적 사람을 지배할 능력이 있다.
● 거라사 지방의 군대 귀신들린 자(마 8:29; 막 5:15) J에 대한 초자연적 지식과 괴력을 발휘하는 능력. 여기서 귀신은 사람에게 들어가고 싶고 떠나기 싫어하는 모습이다.
● 벙어리 귀신들린 사람(눅 11:25-26) 귀신은 쉴 곳을 찾고 방황하다가 다시 원래 장소로 돌아왔다. 귀신이 나간 곳이 예수 그리스도로 채워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마 15:22-28; 막 7:25-30) 정확한 귀신의 활동을 알 수는 없으나 어머니의 설명을 통해 흉악한 영에 사로잡혀 있는 딸의 모습을 추측할 수 있다.
● 귀신들린 소년(마 17:18) 소년은 귀신의 영향으로 자해했다. 제자들은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으나 J은 쫓아내셨다. 제자들이 쫓아내지 못했던 이유를 J은 믿음의 부족 때문이다.
● 빌립보 성의 여자 노예(행 16:16-18) 귀신은 여자 노예에게 초자연적 지식으로 그녀의 주인을 물질적으로 유익하게 했지만 그녀를 주인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지는 못했다.
● 스게와의 아들들(행 19:15-16) 유대인 제사장 스게와의 아들들 J이름으로 귀신 쫓아내려 했으나 수치. G과 인격적 관계없이 J의 이름 부르는 것만은 귀신 쫓아낼 수 없다.
두 가지 오류 피해야 첫째, 악한 영들의 실제, 능력 및 활동 인정않거나, 과소평가 마라. 둘째, 우리들 죄와 실수에 대한 책임을 전적으로 악한 영들에게 전가하면 안 된다. 악한 영들 인간이 그들에게 어떤 법적 권리 혹 구실을 주지 않는 한 인간을 침입할 수 없다.
마틴 루터 “새가 사람의 머리 위로 날아가는 것을 금지할 수 없지만, 그 사람의 머리 위에 새 집 짓는 것을 허용하면 안 된다.” 그런데, 인간이 의식적, 혹 묵시적으로 악한 영들의 침입을 허락할 때, 악한 영들 당연하게 침입. 축사사역 때, “이곳은 내 집이다” 자신들의 법적 체류권을 당당히(?) 주장하는 악한 영들의 증언을 통해서도 입증된다.
<사악한 영을 대적하라>저자 풀러신 교수 크래프트 악한 영들 ‘침입통로’ 음식물 찌꺼기와 같은 ‘쓰레기’ 비유. 예, 쓰레기 처리않고 쥐들만 쫓으면 쥐들은 다시 온다. J 말씀 같이, 청소되고 수리된 집에 더 악한 일곱 귀신들 돌아와 거함과 같다(마12:43-45; 눅 11:24-26)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1. 죄에서 떠나라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장 27절에서 이점을 명백히 하고 있다. “마귀로 틈을 주지 말라.” 본문에서 말하는 “틈”(foothold)은 빌미 혹은 법적 근거를 말한다. 본문의 배경이 되는 에베소서 4장 25-32절에서 죄는 마귀가 침입할 수 있는 빌미를 줄 수 있다는 것을 언급한다. 거짓(25절), 분노(26절), 도둑질(28절), 더러운 말(29절) 등의 죄를 통해 사탄은 신자들을 공격할 수 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이런 종류의 죄에서 떠나라고 경고한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엡 4:31) 죄는 사탄이 신자들을 공격할 법적 권리를 제공하는 동시에 “성령을 근심시킨다”(엡 4:30)
G은 가인이 동생 아벨을 살인하는 죄를 짓기 전에 강력한 경고의 말씀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4:7)
‘엎드린다’는 단어는 아카드 어, ‘귀신’과 같은 어근의 단어로, 특별히 어떤 건물의 입구를 지키는 귀신들을 지칭하러므로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다. “선을 행치 아니하면, 즉 죄를 다스리지 않고 죄를 지으면, 마귀가 침입할 수 있다.”
죄 지으면 죄의 종이다. 인간이 죄 짓는 만큼 사탄이 인간을 공격할 수 있다(롬6:16, 20). 따라서 죄에 대한 철저한 회개 및 죄로부터 떠난 의로운 삶을 살아야(요일 1:9, 시 32:1-5, 잠 28:13, 약 4:4-10) 구원받은 신자라도 죄로 인해 사탄의 희생물이 될 수 있있다.
2. 공감과 관계
신약에 사탄은 광야에 J과 극적 대결, J의 사역으로 번개가 땅으로 내리꽂히듯 하늘에서 떨어졌다. 예수와 사탄은 철저히 적대자로 J는 사탄을 완벽히 제압, 사탄은 극렬히 저항했다.
그런데 욥기에 사탄은 G의 어전회의에 참석(욥 1장) 사탄은 법정의 검사 역할. G이 창조한 세계 내에서 G의 뜻에 부합 않는, G의 창조 질서를 위배하고 뒤집는 이들을 찾아내 G께 고소하는데 사탄은 욥기 3장부터 온데간데없다.
그 자리를 욥의 세 친구가 대신한다. 사탄이 G의 일꾼으로서 욥을 고소했듯이, 세 친구는 끊임없이 욥을 고발한다.
나는 누군가에게 욥이지만, 동시에 누군가에게 사탄이다. 마치 나는 물 위를 걸을 때는 베드로이지만, 돈 때문이라면 스승과 동료도 배신하는 가룟 유다이기도 하다. 바로 이런 불편한 진실 때문에 일레인 페이절스(Elaine Pagels)는 “사탄은 이질적이고 낯선 원수가 아니다. 이와 반대로 그는 친밀한 원수이다.” 욥기에 G의 어전회의에 G위해 일하던 사탄이 마침내 G이신 J을 살해하는 반역자다.
사탄을 ‘고소하는 자’임에 착안 자크 엘륄 언제 어디서든 누군가 비난 누군가의 사이를 갈라놓으면, 사탄 “한 사람이 다른 사람 비난하면 사탄에게 속한 것.” 까닭 없이 누군가 싫다고, 속내 감추고 어떤 사람 물고 뜯는 순간 영어 대문자 사탄 아니지만, 소문자 사탄이다.
욥기 읽을 때, 자주 스스로 욥에게 대입 반대로 세 친구와 동일시 할 때 욥기가 풍성하고도 생생한 G의 이야기, 내가 욥인 경우와 누군가 삶에서 사탄의 캐릭터로 등장 않는가?
요한 볼프강 괴테의 <파우스트>의 첫 장면은 G과 사탄이 대화하는 욥기의 장면 모티브로 G은 늙고 교활한 메피스토펠레스에게 “나는 너희 같은 무리들을 미워한 적이 없느니.” G은 악마를 미워 않는다. 미워한다고 착각한 것은 악마 자신이었고, 그리 생각했기에 G에게도 무엄하게 대하고, 사람을 자신과 똑같이 만들고 싶어 안달하는 것.
욥기의 G이 사탄을 허용 사용하심은 불편한 진실. 그러나 더 불편한 것은 내가 또 하나의 사탄이 될 수 있다. 욥의 세친구처럼 이웃의 아픔과 슬픔에 공감 못하고, 정죄, 고발, 험담, 들쑤시고 다녔던 우리도 G의 구원받은 백성임을 마주해야 한다.
욥기 42장에서 G은 욥의 세친구들에게 노하신다. “L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니라”(욥 42:7)
성경에서 장례는 보통 사람이 죽으면 먼저 눈 감기고(창 46:4) 시체를 씻었다(행 9:37) 그 후 향유나 몰약 등 시체에 바르고 온몸 세마포로 쌌다(마 27:59; 요 19:39-40) 시체는 들것에 놓여 매장지로 운반(삼하 3:31) 과정에 친척, 친구들 등 곡하는 사람들이 시체를 따라 함께 매장지로 향했다(전 12:5) 곡은 죽은 자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것(행 8:2) 때로 전문적 애곡하는 자를 고용(마 9:23) 애곡 기간은 모세 30일(신 34:8) 일반적 7일.
7년 대흉년에서 애굽과 온 세상을 구원했던 요셉의 아비 야곱이 죽었을 때 바로는 국가적 차원에서 야곱을 장사하게 한다. 애굽 사람들이 야곱을 위해 70일을 애곡하였으며 장사 지내러 가나안으로 갈 때에는 바로를 제외한 바로 궁의 장로들과 애굽 땅의 모든 장로가 함께 따르게 하였다.
장사를 지내러 가나안으로 가던 중 요단강 건너편 아닷 타작마당에서 7일간 곡을 하였는데 가나안 백성들은 이 광경을 보고 아벨미스라임 곧 ‘애굽 사람의 큰 애통’이라 하였다. 요셉은 죽은 야곱을 위해 수종 들었던 의사에게 향 재료로 아비의 몸에 넣게 하였는데 날수가 40일 걸렸고 애굽 사람들 70일 동안 곡 하였다.
곡하는 기간 후 막벨라굴에 장사하기 위해 가나안으로 떠나 요단강 건너편 아닷 타작마당에서 7일 동안 애곡 후 마므레 앞 막벨라 굴에 장사. 이처럼 애굽 왕도 요셉의 슬픔에 공감하고 슬퍼했다.
J은 눅 7:31-32 “31 또 이르시되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까 무엇과 같은가 32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3. 세속화된 가치관을 버리라
헤롯 대왕의 아들 헤롯 빌립은 헬몬산 기슭의 작은 마을에 거대도시를 신설하고, 로마 황제의 칭호인 ‘카이사르’와 자신의 이름을 붙여 ‘가이사랴 빌립보’ 당시 로마제국의 영토 내에 로마 황제의 이름이나 칭호가 붙은 도시가 여럿 있었지만, 아무 도시에나 로마 황제의 이름 혹 칭호를 붙일 수 없었다.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했다. 로마 황제의 위용에 걸맞은 대규모 도시거나, 도시의 가장 주요 지점에 로마 황제의 신전이 자리 잡아야 했다. 당시 로마 황제는 지상의 신. 명목상의 신이 아닌 신전에서 인간의 경배를 받는 살아 있는 신이었다. 헤롯 빌립이 신설도시에 로마 황제의 칭호를 붙였다는 것은 그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었음을 뜻했다. 한마디로 가이사랴 빌립보는 로마 황제의 신전이 인간을 압도하는 거대한 황제의 도시였다.
당시 로마인들이 추구하고 또 자랑하던 것은 그들의 힘이었다. 권력의 힘, 군사력의 힘, 경제력의 힘, 육체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그들은 도시나 건물을 세울 때면 으레 웅장한 석재와 화려한 대리석을 동원했다.
도시마다 시가지는 물론이요 집안 곳곳에 아름다운 몸매를 지닌 여인의 나신상과 우람한 근육의 남자 조각상들을 즐비하게 세웠다. 황제의 칭호로 불린 가이사랴 빌립보 역시 예외일 수 없었다. 거대한 황제의 도시에 J일행이 나타났다. 화려한 의복에 세련된 황제의 도시 사람들에 비하면 빈민촌 나사렛 출신인 J일행의 남루한 행색은 걸인과 다를 바가 없었을 것이다.
이렇듯 황제의 신전이 인간을 압도하는 바로 그 황제의 도시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내가 누구냐?”고 물으셨고, 베드로가 바로 그 황제의 도시에서 초라한 몰골의 예수님을 향해 “당신은 X요 G의 아들”이라 고백했음이 전제되면, 베드로의 고백이 지닌 참뜻을 깨달을 수 있다. 그것은 지중해 세계를 제패한 로마 황제가 구원자가 아니라는 말이었다. 권력·군사력·경제력을 장악하고 자기 욕망에 따라 세상을 좌지우지하는 로마 황제가 구원자가 아니라는 것. 저 웅장한 신전에서 인간의 경배를 받는 로마 황제가 신일 수 없다.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 인간의 생사여탈권 마구 휘두르는 로마 황제가 신이 아니라 비록 초라한 몰골일망정 자기 부인을 통해 참된 삶의 길을 제시해준 나사렛 예수 당신이 인간을 위한 구원자요 하나님이시라는 것이었다.
바꾸어 말해 이 세상을 압도하고 있는 황제의 논리를 따르지 않고 J의 로고스를 따르겠다는 고백.
경쟁자를 가차 없이 짓밟고 최고 최대를 지향하는 거대주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성공제일주의, 인간의 인격마저 물질로 가늠하는 맘몬이즘으로 대변되는 황제의 논리를 배격, J께서 진리 안에서 보여주신 자기 비움의 영원한 삶을 살겠다는 고백. 한마디로 자기 욕망을 목적으로 삼는 황제의 길이 아니라 J께서 자기 버림을 통해 열어 주신 영원한 생명과 사랑의 길을 좇겠다는 결단으로 교회는 황제의 길이 아니라 J의 길을 좇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X인들은 황제의 논리가 인간을 압도하는 황제의 도시에서 오히려 황제의 길을 거슬러 예수의 길을 자발적으로 걷는 사람들. 그것은 X인들이 세상을 외면하거나 등진다는 말이 아니다. 황제의 논리가 난무하는 세상 속에 살면서도 세상이나 세상의 것들을 삶의 목적으로 삼지 않고, 예수의 길을 좇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말이다. 교회가 세상의 빛일 수 있는 것은 본래 교회의 구성원들이 인간을 욕망의 노예로 황폐화시키는 황제의 길을 배격하고, 인간의 인간다움을 회복시켜 주는 예수의 길을 좇는 예수쟁이들이기 때문이다.
J은 베드로의 신앙고백 이후, 처음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유다 지도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했다가 사흘만에 되살아나야 한다는 사실을 밝히기 시작하신다.이제껏 많은 병자를 고쳐주며, 빵도 많게 하여 배고픈 이들을 먹이는 J을 직접 목격한 제자들은 J의 말씀을 듣고 당황해한다. 전혀 예상치 못하던, 아니 전혀 바라지 않던 일이기 때문입니다. J께서 모든 고통, 죽음, 어려움을 없애 줌으로써 사람들을 편안하게 살도록 이끌어 주는 메시아가 아니라, 다른 이들의 조롱거리가 되어 수치를 당하고, 심지어 죽음으로 구원역사를 이루게 되는 메시아임을 드러내신 것이다.
J의 말씀 앞에서 베드로는 제자들을 대표하여 J을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한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 아니, 오히려 G의 구원 계획을 방해하는 것. J은 이런 베드로에게 “사탄” 곧 유혹자, 대적자라 하신다. G의 구원 계획을 방해하고 다른 길 가도록 하는 유혹자, 대적자이다.
베드로의 반대가 J께 큰 유혹. 실제 J은 마지막 순간에 같은 유혹을 느끼기도 하셔서 아버지께 기도하시며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26:39) J은 이 길이 당신의 길임을 아셨기에 “제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사명 수행.
J이 유혹을 물리치심은 이때 뿐만이 아니다. J께서 사탄에게 처음 유혹 때도(마 4:1-11) 사탄에게 “물러가라”라 유혹 뿌리치셨고, 동일한 유혹에서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고
“물러가라”(휘파게)는 “내 뒤로”라는 뜻 “오피소 무”는 J이 베드로에게 하신 명령은 “떠나라”는 명령보다, “내 뒤로 물러서라” 명령 J보다 세상 가치관을 앞세우고, 내 안일을 앞세우면, 사탄처럼 G의 일 방해하는 존재다. 그냥 J 뒤로 물러서 있어야 한다.
J 뒤로 물러섬은 J뒤 따르는 것 J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 지는 것이다. J께서 이것만이 자신의 목숨을 진정 얻는 길임과 영원한 생명, 천국가는 유일한 구원의 길이기 때문. (민찬기목사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