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데 교회
주님께서 사데 교회에게 주시는 메시지
주님은 당신의 교회가 세상과 구별이 없는 안일한 삶에 대해 경고하신다(1)
계 3:1-6
오늘은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가운데 사데 교회에 대해 생각하겠습니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 가운데 칭찬받을 만한 것이 하나도 없고 책망받은 교회가 두 교회가 있습니다. 바로 사데와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이 두 교회 가운데서도 더 형편이 없는 교회가 바로 사데 교회였습니다. 이 두 교회를 제외한 다른 교회의 성도들 대다수는 신실하게 주님을 잘 섬겼습니다. 그렇지만 이 두 교회에서는 소수의 성도만이 신실했습니다. 거의 모든 성도들은 신실하지 못함으로 사실은 죽은 교회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사데 교회를 평가하실 때 살았다 하는 이름만 가졌지 실상은 죽은 교회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름만 교회이지 주님의 교회라고 할 수 없는 상황까지 타락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 대해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처음에 복음을 받았을 때로 돌아가 믿음을 회복하지 않으면 주님의 교회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세데와 사데 교회가 처한 형편
사데는 두아디라에서 동남쪽으로 약 5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고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도시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사데라는 도시는 주전 7세기에 번창했던 고대 루디아 왕국의 수도였습니다. 사데는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로 이어지는 도로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무역과 교통 중심의 도시로서 아주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사데라는 도시가 위치한 곳은 450m의 높은 언덕에 위치하였으며, 동쪽과 북쪽 그리고 서쪽, 이 삼면이 수직으로 된 암벽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삼면이 낭떠러지였기 때문에 적이 공격해 올 수 있는 곳은 남쪽밖에 없었고, 남쪽의 길도 매우 좁아서 적이 남쪽으로 공격해 온다면 쉽게 승리할 수 있는 천연요새로서 난공불락(難攻不落)의 도시였습니다. 이런 정치적, 지리적 요건 때문에 사데 사람들은 거만하고 지나치게 자부심이 강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와 같이 사데의 삼면이 절벽으로 되어 있었고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남쪽의 좁은 길만 지키면 적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한 천연요새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안전이 보장된 만큼 적의 공격에 대해 나태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난공불락의 도시였지만, 두 번이나 적에게 점령을 당하였습니다. 첫 번째는 주전 549년에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에게 점령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주전 218년에 시리아의 안티오커스 대제에 의해 점령을 당했습니다.
오늘 본문 3절에서 회개하지 않으면 우리 주님께서 도적같이 임하셔서 심판하신다고 하신 것처럼 사데 사람들은 적의 공격이 있을 때 남쪽 입구 한 곳만 지키면 되었기 때문에 남쪽 입구만 지키고 있을 때 적들이 밤에 도적같이 절벽의 갈라진 틈을 이용하여 기어 올라가 성을 함락시켰습니다. 이 절벽에는 보초 한 명도 없었다고 합니다. 적이 혀를 찌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난공불락의 요새를 가졌다고 절대 안전하다고 자만하며 방심한 결과 두 차례나 함락되는 수모를 당했습니다. 그 후 주전 17년에 대 지진이 일어나 국토가 초토화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안도감에 빠진 사데의 시민들은 도성을 재건할 힘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결과 아크로폴리스는 서서히 죽어갔고, 그 언덕 밑 주변에 새로운 도시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오늘 본문의 편지를 사데 교회에게 보낼 때 사데가 처한 상황은 찬란했던 도시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하는 때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데는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과거의 그렇게 찬란했던 영광스러운 도시라는 이름만 가지고 있었지 도시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사데 주변에 새로운 도시들이 들어서게 되어 사데는 더 이상 중심이 되는 도시로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데에 사는 사람들은 과거의 영광에만 집착하고 있었습니다. 세데는 위대한 도시라는 명성만 가지고 있었지 실제로는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데 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늘 본문 1절에 의하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사데 교회를 평가하실 때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불꽃 같은 눈으로 보실 때 사데 교회는 영적으로 서서히 죽어가는 교회였습니다. 아니 그보다는 죽은 교회였다고 말해야 옳을 정도로 심각하게 타락하였습니다. 사데라는 도시가 과거의 찬란했던 명성만 가지고 자만에 빠져 있었던 것처럼 사데 교회도 그리스도의 교회이라는 이름만 가진 교회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만 가진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무늬만 교회였지 실제로는 죽어가고 있는 교회, 아니 죽은 교회였습니다. 무늬만 그리스도인이었지 실제로는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죽어가고 있는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아니 죽은 그리스도인 이었습니다. 이것이 사데 교회 성도들에 대한 부활하신 주님의 평가입니다.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께서 이 사데 교회를 평가하실 때 다른 교회들처럼 그들의 어떤 죄에 대해서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사데 교회를 평가하실 때 다른 교회들처럼 그들의 죄에 대해 책망하지 않았다는 이 사실이 무엇을 말해주는지 아십니까? 사데 교회는 긍정적으로 평가할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모든 면에서 타락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고 겨우 숨만 쉬고 있는 그런 교회, 사망 선고가 내려진 그런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소생할 기미가 없는 그런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그런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자비하신 주님께서는 그들을 향하여 오늘 본문 3절에서 회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회개하면 살려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이 사데 교회 교회가 언제 누구에 의해 세워졌는가에 대해 우리에게 가르쳐 준 바가 없기 때문에 사데 교회가 언제 누구에 의해 세워졌는지 정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대해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하나는 요한계시록의 저자인 사도 요한이 세웠다는 설이 있고, 다른 하나는 사도 바울이 세웠다는 설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사도 바울이 세웠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정확히는 알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사데 교회는 소아시아의 다른 교회들처럼 외부로부터 박해를 받지 않았습니다. 외부로부터 박해뿐만 아니라 내부적으로도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로마 정부나 시 당국으로부터 황제 숭배를 거부함으로써 죽음에 직면하지도 않았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평화로웠습니다. 길드나 노동조합에 가입하고 우상에게 절하는 것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업을 할 수가 없고 직장에서 쫓겨나고 일자리를 구할 수 없어서 절대적인 궁핍 가운데 놓이지도 않았습니다. 내부적으로도 거짓 사도들이나 니골라당이나 이세벨과 같이 악질적인 여자의 유혹과 시험도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가장 무난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께서 오늘 본문 1절에서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겉으로 보기에는 좋은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사데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린다면, 대내외적으로 어려움이 없는 교회였기 때문에 ‘분위기가 참 좋다. 참 좋은 교회다’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성도들은 열심히 예배하고, 열심히 활동하고 있고, 내부적으로서 서로 다른 신학적인 입장 때문에 다투거나 싸우지 않는 것을 볼 때 참 좋은 교회다’라는 평을 들을 수 있는 교회였습니다. 외견상 볼 때 아무런 문제가 없고, 생명이 넘치고 살아 있는 주님의 교회같이 보였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에 의해 좋은 교회라고 소문난 교회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의해 유명한 교회로 소문난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평가는 사람들의 평가와는 달랐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자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아마도 이 편지를 받아본 사데 교회 성도들은 주님의 이런 평가에 대해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교회 안에 아무런 문제도 없고, 열심히 주님을 예배하고, 성도들 간에 친밀하게 지내고, 우리 교회가 이렇게 평안하게 살 세워져 가고 있는데, 우리가 이름만 교회이지 실제로는 죽은 교회라니요?’ 하면서 자신들을 향한 평가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니면 다른 이웃 도시의 교회들에게 전달해야 할 편지가 잘못 전달된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다른 이웃 도시 교회들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주님의 눈은 언제나 정확합니다. 주님의 평가는 언제나 정직합니다. 사람들은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그 중심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오해하고 잘못 평가하고, 그로 인하여 오해와 편견이 있게 되고, 오해와 편견으로 인하여 갈등이 일어납니다. 그렇지만 우리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오늘 본문 1절에서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일곱 영”은 성령님을 말합니다. 그리고 “일곱 별”은 이미 요한계시록 1장에서 보았듯이 “교회의 사자들”로서 세상을 향하여 주의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들을 말합니다(1:20). 그러므로 당신의 영이신 성령님을 통하여 그리고 교회의 사역자들을 붙들고 계시는 분이 교회의 형편과 처지를 다 아시기 때문에 주님의 평가는 언제나 정직하고 정확합니다. 그분은 중심으로 보는 분이시기 때문에 사데 교회를 ‘살았다고 하는 이름만 가졌지 실제로는 죽은 교회다’라고 평가하신 것은 정확한 평가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평가가 오늘 본문 2절에서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너는 일깨어 그 남은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죽어가는 원인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했다”고 하십니다. 여기 “행위”는 오늘날로 말하면, ‘교회 안에와 밖에서 행해지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예컨대 예배하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성경 공부하고, 전도하고, 선교하고 구제하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그런 모든 것들에 대해 주님께서는 하나도 빠짐없이 다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여기 “온전한”이라는 말은 ‘가득찼다’(filled up), ‘만족하다’(satisfy)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온전한 행위를 하나도 찾을 수 없다”는 말은 ‘텅 비었다’(empty)라는 의미입니다.
세데 교회는 겉으로 보기는 많은 신앙의 행위들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열심히 주님을 섬기는 교회였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열심히 예배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중심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일에 있어 속이 텅 비어 있었습니다. 속이 텅 비었다는 것은 모든 일을 믿음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4:23에서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데 교회는 모든 것이 다 형식적이었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었지만, 그러나 경건의 능력은 없었습니다(딤후 3:5).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믿음과 하나님을 향한 참된 사랑으로 행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종교적인 일을 종교적인 열심으로만 행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행위와 삶에 대해 매우 싫어하십니다.
오늘 예배하러 나온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들은 오늘 이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앉아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찬송도 올리고 기도도 올리고 헌상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하나님께서 세우신 종의 입술을 통하여 종의 입에 넣어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복창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근본적인 문제 하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교회당을 향하여 집을 나설 때 어떤 마음을 가졌습니까?’ 아니, 그보다 앞서 ‘어젯밤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잠자리에 들었습니까?’, ‘주일이면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기 때문에 오늘 예배하러 나온 것입니까?’ 우리 주님께서는 그런 마음도 기쁘시게 받으실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나와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그 크신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나와야 했습니다. ‘어젯밤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생각하면서 내일은 그 좋으신 하나님을 예배하여야 하기 때문에 잠을 자야 한다’는 생각으로 잠을 청해야 했습니다. ‘나는 죄인이며 그 죄로 인하여 나는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아야 할 자였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이 세상에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주셔서 내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구원을 이루시고, 성령님을 보내어 주셔서 구원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주셨다’고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이 자리에 나와야 했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마음으로 예배하는 이 자리에 나왔습니까? 그리고 더 나아가 여러분들이 이 땅에서 살아갈 때 모든 일을 믿음으로 행해야 합니다.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해야 합니다. 믿음이 없이,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는 삶을 살다가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한낱 공허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말씀드렸듯이 사데 교회의 성도들은 소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다 믿음으로 행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 2절에 의하면, 사데 교회는 영적으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은 “너는 일깨어 그 남은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영적으로 깊은 잠에 빠진 사데 교회가 영적인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않으면 영원히 깨어나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사데 교회는 처음 복음을 받을 때 그 믿음과 기쁨, 즉 구원을 받은 그 믿음과 기쁨을 회복하지 않으면, 사탄의 손에 넘어가 멸망 당하게 되는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징계)을 받아야 하는 상태에 놓여 있었습니다.
여러분, 부활하신 우리 주님께서 사데 교회를 향하여 오늘 본문 3절에서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고 촉구하셨습니다. 여기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를 생각하라”는 말씀은 ‘처음 복음을 받을 때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사데 교회도 처음에 복음을 들었을 때는 자신들은 사탄의 자식으로서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아야 할 자였다는, 즉 죄인이라는 사실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심으로 자신들의 구주가 되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쁨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을 사탄과 세상과 죄와 죄의 삯인 죽음과 죽음의 증상들인 질병과 고통으로부터 구원해주신 주님을 위하여 죄를 멀리하고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어느 때부터인가는 강단에서 전해지는 목사의 설교에 대해 무덤덤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타락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를 떠난다거나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이 평소와 같았습니다. 외적으로는 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여전히 열심히 행했습니다. 그렇지만 마음이 무덤덤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니까 기쁨이 없었습니다. 기쁨이 없다고 해서 교회를 떠나지는 않았습니다. 교회를 떠나는 것은 마음이 불안하고 그래서 그냥 남아 있었고 여전히 전과 동일하게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형식적으로 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는 열심히 신앙 생활하는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기쁨과 만족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눈으로 볼 때는 이들은 행위에 있어서 형식을 쫓아 행하는 형식주의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6:1에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무엇을 할 때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않아야 합니다.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얻고, 사람에게서 명예를 얻고, 자기 이름을 드러내기 위하여 행동할 때 주님은 그것을 받지 않으십니다. 이런 행위들이 바로 오늘 본문 2절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온전한 것을 찾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사데 교회는 복음의 예리함을 잃어버렸습니다. 전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복음은 날카로운 칼날과 같습니다. 복음이 하는 일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복음은 갈라놓는 역할을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을 갈라놓습니다. 복음은 복음을 들은 사람들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든지, 믿지 않고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든지 이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게 만듭니다. 둘째는 복음은 죽은 자를 살려내는 역할을 합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사람들을 살려서 영생을 주셔서 영원히 살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셋째는 복음은 하나되게 합니다. 믿은 사람들이 주님의 몸에 접붙여져서 한 몸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그래서 하나되는 일에 힘쓰게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복음는 날카롭습니다. 복음이 선포될 때에는 회색지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흰색이든지 검은색이든지 둘 중의 하나가 되게 만드는 것이 복음입니다. 다시 말하면 복음은 우리를 이 세상과 구별되게 만듭니다. 이 세상으로부터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이 세상 사람들과 같은 생각을 품지 않게 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을 추구하지 않게 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의 삶의 정신을 따라서 살아가지 않게 합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게 합니다.
그런데 사데 교회는 처음 믿을 때, 즉 처음에 복음을 받을 때 그 예리함이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외부로부터 박해를 받지 않았으며, 내부에서도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사탄이 외부로부터 박해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사탄이 교회 안에 거짓 선생이나 거짓된 가르침을 전하는 자들을 침투시켜서 그들을 유혹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 사탄은 아주 교활합니다. 그런 교활한 자가 그냥 놔둬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지 않는데 무엇 때문에 자기의 시간과 힘을 낭비하겠습니까? 사탄은 우리보다 훨씬 더 지혜롭습니다. 사데 교회는 세상의 풍조에 자신들을 맡기고 세상이 가는 데로 자신들의 삶을 맡긴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불안하니까 주님을 떠나는 일은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사데 교회의 성도들은 자신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탄은 그냥 박해 없이 내버려 둔 것입니다. 이런 교회를 주님께서는 이름만 있는 교회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실상은 영적으로 죽은 교회라는 것입니다.
사데 교회는 항상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진리로 무장하여 든든하게 서 있지 않으면, 세상의 그릇된 문화에 휩쓸려 자신의 모습을 잃어버려서 이름만 있는 교회로 전락해 버린다는 것을 오늘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데 교회처럼 이름만 있는 교회가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름만 있는 교인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명색만 교회이고 명색만 신자인 교회와 신자가 되지 않으려면, 항상 처음 믿을 때 그 믿음을 가지고 모든 것을 믿음으로 행해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이 자라나 더 큰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먹는 것도 주를 위하여 먹어야 하고, 잠을 자는 것도 주님을 위하여 자야 하고, 공부하는 것도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여야 하고, 직업을 갖는 것도 사업을 운영하는 것도 다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여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행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고 하면, 또 우리는 이 강단을 통해서 전해지는 복음 설교를 듣는 것으로 끝내지 않아야 합니다. 프리노트를 하든지, 교회 카페에 올라온 말씀을 다시 한 번 묵상하든지 하고, 오늘 들은 말씀을 날마다 소환해서 그 말씀을 따라서 기도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매 주일 모여서 예배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목사를 세워서 당신의 말씀을 주십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 교회가 한 주일 동안 먹고 살아갈 영의 약식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이 강단을 통해서 들은 말씀을 한 주일 동안 영의 영식으로 삼아야 하고, 영의 양식으로 삼으려고 하면 들은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잊지 않으려고 하면 말씀을 들을 때 기록하고 집에 가셔서 다시 계속해서 묵상해야 합니다. 아니면 카페에 오늘 말씀이 올라와 있으니까 그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따라서 기도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타락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조금만 힘쓰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왜 못하는지 아십니까? 여러분의 삶의 우선순위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행복과 유익을 위하여 구원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구원되어진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생명은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시고 사셨습니다. 바로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게 하심으로, 그리스도의 핏값을 지불하시고 여러분을 사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여러분의 생명은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도 자꾸 여러분의 생명을 여러분의 것인 양 생각하고, 여러분의 행복과 유익을 목표로 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거룩한 삶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기억해야 하고 잊지 않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행복과 여러분의 삶의 부유함은 하나님께서 덤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너스로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삶의 첫 번째 목표를 하나님의 영광에 두고 살아가면, 하나님께서 그냥 덤으로 주시는 것이 행복과 부유함입니다. 그런데도 내 힘과 내 지혜로 행복과 유익을 위하여 노력하면 잘 될 것 같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성도들이 자기 힘과 자기 지혜로 행복과 유익을 추구하면 잘 안 됩니다. 아니 잘 안 되어야 합니다. 잘 안 되는 것이 정상적이고, 잘 안되는 것이 축복입니다.
여러분, 제가 지금 이상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만약에 여러분의 힘과 여러분의 지혜로 여러분이 바라는 어떤 일들이 이루어졌다고 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으로 안다면 그것은 큰 착각이고 오해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서운 징계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자기 인생의 행복과 유익을 자기의 지혜와 힘으로 추구할 때 잘 되면, 그 사람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게 됩니다. 아니, 하나님 없이도 내 힘과 내 지혜로 이렇게 행복해지고 유익한 삶을 살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겠습니까? 하나님의 힘과 지혜가 없어도 스스로 행복하고 유익한데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힘들게 새벽에 나와서 기도하고, 저녁에 기도하고, 시간이 나는 대로 기도하는 수고를 하는 것입니까?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한다고 하더라도 형식적으로 하는 것에 불과할 것입니다. 안 하면 그 끝은 죽음인 것입니다. 사데 교회처럼 영적으로 죽은 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없이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는데도 잘 되고 성공하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인 것입니다. 여러분, 왜, 이 사실을 모르고 왜, 삶의 우선순위를 바꾸어서 생각하는 것입니까?
여러분, 이 세상 사람들과 구분된 삶을 살지 않으면, 혹은 이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중립적인 포지션을 유지하고 있다면, 지금 여러분은 대단히 잘못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목사님, 제발 우리의 삶에 지나치게 간섭하지 마시고, 이런 문제를 강조하지 마십시오. 불쾌합니다!’라고 생각하는 분이 계신다면, 지금 사데 교회 대부분의 성도들과 같이 잘못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분이 계신다면, 복음의 예리한 날을 다시 세우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 세상과 구별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무장하시기 바랍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무장하여서 자신의 존재의 의의와 사명을 확고히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 세상 사람들이 다 가는 그 길에 휩쓸려 살지 않기를 바랍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은혜와 언약의 복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탄과 죄와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세계인 이 세상으로부터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을 버려야, 참된 만족과 행복과 평안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가장 가치 있는 것들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것으로 채우시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않고 여전히 세상을 버리지 않고, 세상 사람들과 구분이 안 되는 삶을 살아가면, 즉 이 세상의 쾌락과 죄와 더불어 누리는 쾌락을 붙들고 살아가면, 삶의 만족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삶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면 행복하지 않습니다. 행복하지 않으면 평안이 없습니다. 평안이 없으니까 불안합니다. 불안하니까 온갖 정신병으로부터 시작하여 육체의 질병 가운데 빠져서 거기에서부터 헤어나오지 못하고 결국에는 죽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우리보다 일 인당 국민소득이 훨씬 적은 저개발국에 사는 사람들이 우리보다 불행하다고 생각하시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보다 일 인당 국민소득이 적은 나라의 사람들의 만족도가 우리보다 훨씬 높습니다. 물질문명의 혜택은 우리보다 누리지 못하지만, 삶에 대한 만족은 우리보다 훨씬 높습니다. 만족한 삶을 사니까 행복지수도 올라갑니다. 그리니까 자연히 그들의 삶에는 평안이 있습니다. 물론, 이 세상 사람들이 누리는 만족과 행복과 평안은 주님이 주시는 것하고는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6-7에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했습니다. 여기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란 ‘인간의 이성으로 생각할 수 없는, 즉 이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안’이라는 의미합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면 하나님께 기도하면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경험하지 못하는 이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안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그런 평안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참된 만족을 원하십니까? 참된 행복하기를 원하십니까? 참된 평안을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이 주는 향락과 이 세상이 주는 쾌락과 이 세상이 주는 즐거움을 다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오직 부활하신 주님만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모든 지각에 뛰어나 하나님의 평강이 여러분의 마음을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거기에서부터 참된 만족과 행복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 세상에 정당히 누리는 기쁨은 누려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로 인한 즐거움이라든지 죄와 상관이 없는 것들은 얼마든지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죄악된 것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죄와 더불어 누리는 쾌락과 즐거움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온전치 못한 더러운 행위들을 가지고 있다면 단호히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끝까지 그러한 행위들을 회개치 않는다면, 오늘 본문 3절 말씀처럼 하나님의 심판이 아무도 모르게 침입하는 도둑같이 어느 날 어느 시에 하나님의 심판이 내려질지 예측할 수 없습니다. 복음이 요구하는 거룩한 삶을 살아 가십시다.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형식적인 교회로서 죽은 교회가 아니라 실질이 있는 살아있는 교회가 되라는 요청을 받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교회의 사이즈(size)가 문제가 아니며, 외형적인 규모의 크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실상이 살아있는 교회가 되라는 요청을 받고 있습니다. 세상의 풍습을 거슬러가며, 하나님의 거룩하신 품성을 발휘하는 성도,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모습을 증거하는 교회가 되라는 요청을 받고 있습니다. 세상의 조류에 떠내려가지 아니하는 살아있는 교회가 되라는 요청을 받고 있습니다.
이런 요청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교회를 이루고 있는 성도들이 깨어있어야 합니다. 깨어서 기도하여야 합니다. 성도가 깨어있다는 것은 복음이 요구하는 거룩한 삶이 무엇인가를 항상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으면서 세상의 향락과 부도덕을 분별하고, 복음이 요구하는 거룩한 삶에 자신을 전적으로 드려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복음에 합당치 아니한 행위에 대해서는 단호히 회개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깨어있는 성도들이 많은 교회가 살아있는 교회입니다. 복 있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는 사데 교회를 통하여 오늘 이런 삶을 요청받고 있습니다. 아멘.
(2018. 12. 16 주일 오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