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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라1동
오라1동은 '한내동카름'으로 속칭 '모로냇가름'이라고 하고, 마을 남쪽에 '내머리왓'이 있으며, 한내(한천)를 끼고 있다. 또한 각종 체육 및 문화행사가 빈번하게 열리면서 체육1번지라 불리 울 정도로 도민은 물론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제주종합경기장과 제주도의 동서부 지역으로 운행하면서 도민의 발 역할을 하고 있는 시외버스터미널 주변 및 그 일대 지역으로서 공설동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북쪽으로는 서광로, 서쪽으로는 한천을 끼고 있고 연삼로가 가로지르고 있으며, 제주시보건소가 있는 고지교가 북쪽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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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오라2동
오라2동은 제주시 시가지 남쪽의 중산간 지대에 산재한 마을로 동쪽으로는 도남동, 아라동과 경계를 이루고, 서쪽으로는 연동과 경계를 이루면서, 오라관광지구(섬문화축제장)를 포함하고 있는 마을이다. 또한 '한내서카름'으로 사평마을, 연미마을, 정실마을(동도노미), 동성마을 등의 자연부락도 포함하고 있다. 사평마을에는 오라초등학교가 위치해 있으며, 연미마을 남쪽에는 시민들이 건강을 위해 즐겨 찾는 민오름이 있고, 민오름 북쪽에는 을사조약과 한일합방의 치욕을 씻고 왜적에 항거하고자 뜻을 같이한 12지사의 애국정신이 서려 있는 조설대가 있다. 그리고 정실마을은 제주시 중산간 마을로는 1978년 처음으로 취락구조 개선사업을 실시한 마을로 제주교도소와 오라골프장이 들어서 있어 관광지로서 큰 몫을 하고 있다.
1) 연미마을: 오라동의 한 자연부락인 이 마을은 300여 년 전 문(문)씨에 의해 설 촌 되었으나 빈번히 화재가 발생하므로 풍수지리설에 따라 마을 안에 큰 연못을 파게 되었는데, 연미라는 이름은 이 연못에서 연유한 것으로 물이 생수같이 깨끗하고 물맛이 좋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 후 이 연못은 매립되고, 1948년 4·3사건으로 인하여 마을은 완전 소실되었었으나 해방 후 피난 갔던 사람들이 돌아오면서 마을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한다. 그러나 이 지역이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이면서 마을의 발전이 둔화되었으며, 1999년 7월 22일 개발제한구역이 전면해제 되면서 마을의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특히 이 마을의 유적으로는 조설대(조설대)와 문연사(문연사)가 있는데, 이는 한말인 1905년(광무 9) 이 마을에 살던 이응호(이응호)가 중심이 되어 선비들의 모임인 '집의계(집의계)'를 결성하고 구국을 도모하던 장소라 한다.
2) 정실마을: 조선조 선조 때에 김해 김씨가 여기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하며, 이 마을의 지형 때문에 '도래뫼'라고 불리었다고 한다. 또한 1910년경에는 오늘의 제주시 오등동과 죽성 등 마을들을 한데 묶어 한북리(한북리)라고 부른 적도 있었으나 한천(한천)을 중심으로 동서 간의 분쟁이 생겨 한천 서쪽 동네가 오늘의 정실 쪽으로 옮겨 왔다는 설도 있다. 한편, 연미마을의 고씨들에 따르면 지금도 정실에 '고씨터'라고 불리 우는 지명이 있는데, 연미마을에 사는 고씨의 13대조가 정실마을에 살았었다는 얘기로 미뤄 이 마을의 설촌이 400여 년 전에 이뤄졌을 가능성이 크다 하겠다. 이를 증명하듯 이 마을에는 수령 400여 년으로 보이는 노거수 팽나무들이 있다. 그리고 이 마을 역시 4·3사건의 피해로 폐동되었다가 1960년대 초 12세대가 돌아와 마을을 재건하기에 이르렀으며, 1978년에는 제주시 중산간 마을로서는 처음으로 취락구조 개선사업을 실시하여 지금과 같은 마을을 만들었다.
3. 오라3동
오라3동은 속칭 '중댕이굴'이라 하여 월구(월구), 월라(월라)라 기록하고 있는 마을로 구제주와 신제주 중간에 있는 도심속의 조용한 전원마을이다. 또한 제주시의 동서를 잇는 주요간선도로인 연삼로와 서광로가 접해 있어 교통이 매우 편리한 곳이다.
Ⅲ. 탐방로 주변의 볼거리
1. 한천
한라산 백록담 북벽에서 발원하여 북벽을 타고 내린 물줄기는 개미등을 중심으로 동쪽에 위치한 탐라계곡을 따라 흘러 내려 탐라계곡 대피소를 지나면서 서쪽 탐라계곡 기슭의 삼각봉 일대에서 발원한 또 하나의 물줄기와 합류한다. 이 물줄기는 탐라교육원 서쪽 계곡을 지난 뒤 방선문에서 한라산 서쪽 능선에서 흘러내린 또 다른 지류와 합류한 뒤 고지내를 지나 용연으로 흐르는 하천이 된다. 유역 면적이 10.1㎢, 유로 길이(두 지류)가 26㎞인 한천의 상류 탐라계곡 일대에서 용출하는 용진각 물, 용진굴 물은 한라산 고지대의 대표적인 용천수이다. 한천의 상류 탐라계곡을 흐르면서 급경사의 하천을 극복하기 위하여 용암 폭포들이 발달해 있는데, 이들 중 이끼폭포와 비단폭포는 장관이다. 방선문계곡의 용암교 구조는 용암류의 판상절리면이 하상을 흐르는 유수 작용에 의하여 차별 침식을 받은 결과이며, 한천은 영주십경 중 영구춘화의 방선문계곡과 하천 하구에는 용연야범의 풍류를 간직한 용연이 있다. 특히 한천은 조면암 및 조면암질 안산암 분포 지역이며 하천 양쪽 벽은 기암, 주상절리로 된 깊은 협곡을 이루며 그 절벽은 상록수림으로 덮여 남국적인 경관을 자아낸다. 하천 바닥에는 단층, 풍화혈, 기암 등 기기묘묘한 모양의 암력들이 산재해 있다. 그러나 장마철에만 물이 흐르는 하천 구실을 하며, 평소에는 몇 군데의 웅덩이를 제외하고는 물이 숨골로 스며들어 물이 없는 건천을 이루고 있다. 또한 이 하천은 제주시의 서쪽 중심지를 남북으로 흐르고 있으며, 하천 주변에 종합운동장과 KBS방송국이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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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하천의 성상
: 제주도 하천의 대부분은 한라산의 1,400~1,600m 지점에서 발원하여 방사상 모양으로 발달되어 있다. 제주지역의 하천은 화산 지형상의 특징과 하천 유로 상에서 발달된 투수층, 하상에 발달한 주상 절리 등에 의하여 하수가 쉽게 지하로 스며들기 때문에 대부분 물이 흐르지 않은 건천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지형상의 특징으로 수계 발달이 미약한 편으로 지류가 발달한 하천이 많지 않다. 제주시의 하천은 주로 한라산의 북부 지역에 주로 분포하고 있으며, 동·서부 지역으로는 분포하지 않는 특성을 보인다. 동·서부 지역은 지형이 완만한 용암 대지를 형성하며, 강우를 잘 통과시키는 곶자왈이나 숨골 형태의 특수 지질층이 많이 분포하고 있기 때문에 하천이 발달하지 않았다. 북부 지역은 대체로 치밀한 조면암질의 용암이 분포하고 있어서 지표수가 지하로 침투하기가 어려우며, 조면암질 용암이 침식을 받을 경우 암괴 상으로 붕괴가 용이하여 V자형 하곡이 발달하면서 하천이 형성되어 있다.
※제주하천의 현황: 제주도에는 60개의 지방 2급 하천이 있으며, 지형적 영향으로 한라산을 중심으로 남·북사면에 하천이 발달해 있다. 한라산의 북사면을 타고 제주시로 흐르는 하천은 총 26개이다. 이중 삼수천은 대룡소천, 화북천은 방천과 조천, 부록천을 병문천은 독사천, 한천은 토천, 도근천은 어시천과 광령천, 금성천은 어음천, 한림천은 귀덕천, 옹포천은 문수천을 각각 지류로 갖는 하천으로 8개의 하천이 본류가 되고 나머지는 지류에 속한다.
그 외 산지천, 흘천, 이호천, 원장천, 고성천, 송왕천, 수산천은 지류가 발달하지 않은 독립된 하천이다. 한라산의 북사면에서 제주시 쪽으로 흐르는 26개 하천의 총 연장 유로는 293.59㎞이며 총 유역 면적은 314.37㎢이다. 제주시 하천은 계곡이 얕아서 곡심이 3~4m에 불과하지만 하류의 하폭이 20~30m로 넓게 발달해 해안선에 가까운 지역에서는 퇴적 작용이 매우 발달한 유년 지형의 특징을 갖는다.
2. 방선문과 마애명
: 제주시 오라2동 39-1번지에 위치한 영주 10경의 하나인 영구춘화로 알려진 방선문(들렁귀)계곡은 오라동 남쪽 3km 지점인 용두암으로 흐르는 한천의 상류지점에 있으며, 기암절벽과 수림으로 우거져있다. 봄에 암벽사이로 참꽃이 필 때는 아름다운 절경을 이루어 예부터 목사가 관기들을 거느리고 나와 주연을 베풀기도 하고, 시인 묵객들이 모여 시회를 열기도 했으며, 옛 선인들이 남긴 마애명으로 유명한 곳이다. 또한 이곳은 한라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두 갈래의 하천이 합류하는 곳이기도 하며, 왼쪽으로 흘러 내리는 물줄기는 백록담 탐라계곡에서부터 내려오고, 오른쪽으로 흘러 내리는 물줄기는 열안지오름 동쪽 게곡에서 흘러 내리는데 이곳 방선문에서 합쳐져 흐른다. 그리고 방선문(방선문)이라 명명한 사람은 알 수 없으나 당나라 시인 백거이가 노래한 ‘장한가’에 ‘방선’이란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가 인용하였을 것으로 보이며, 용암교 천정에 새겨진 ‘방선문’이란 글씨는 제주 목사 윤득구의 일행이 새겨놓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특히 이곳 방선문은 푸른 절벽이 깎아지른 듯 서있는 한천계곡 한 가운데 마치 대문을 열어놓고 있는 모양으로 지붕이 덮여있고 앞뒤로 트여있는 큰 바위가 있는데 예부터 이를 두고 '신선이 방문하는 문ꡑ이라는 뜻인 방선문(방선문)' 이라 불렀다. 신선이 사는 곳의 입구이니 그 경관의 빼어남은 두말 할 나위 없다. 영주 10경 중 하나인 영구춘화(영구춘화)의 현장이 바로 이곳이다. 제주참꽃이라 불리는 박달래꽃이 절벽을 붉게 물들이고 또한 맑은 계곡물에 비쳐 계곡 전체가 붉은 꽃으로 덮이면 감탄이 절로 나올 만하다. 이처럼 방선문은 신선세계로 통하는 문으로 신선세계와 인간세계의 경계선인 셈이다. 현실적으로 말하면 방선문을 경계로 한라산 안과 밖이 나누어지는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백록담에서는 매년 복날이면 하늘에서 선녀들이 내려와 목욕을 했는데 이때마다 한라산 산신은 방선문 밖 인간세계로 나와 선녀들이 하늘로 돌아갈 때까지 머물러 있어야만 했다. 그런데 어느 복날 미처 방선문으로 내려오지 못한 한라산 산신이 선녀들이 목욕하는 모습을 훔쳐보고 말았고, 이에 격노한 옥황상제가 한라산 산신을 하얀 사슴으로 만들어 버렸다고 한다. 그 뒤 한라산 산신은 매년 복날이면 백록담에 올라가 슬피 울었다. 하얀 사슴의 연못 백록담, 그 이름은 이 전설에서 유래한 것이다. 또한, 방선문 일대는 한국 고전문학 중 해학소설의 백미이자 판소리 열두마당의 하나인ꡐ배비장전ꡑ의 무대이기도 하다. 예부터 제주에 부임한 목사를 비롯한 지방관리뿐만 아니라 유배인까지 많은 선인들이 이곳에서 풍류를 즐겼고, 방선문 곳곳에는 그들이 남긴 마애명이 많이 남아 있는데 '방선문(방선문)', '등영구(등영구)' 등을 비롯해 50여개의 마애명이 남아있다. 또한 마애명은 목사가 24명, 판관 11명, 현감 4명, 회원단체 2개 등 총 230개 이상의 제액(제액)과 11수의 제영(제영)의 마애각이 있다.
※ 등영구(등영구: 들렁귀)
: 옛날 오라동 사람들은 ‘들렁귀’라 불렀다. 방선문이라고는 잘 부르지 않았다. ‘영구춘화=들렁귀’라는 등식만이 인식되고 있었다. ‘들렁귀’하면 ‘뚫어진 엉덕’, ‘들러진 엉덕’, ‘구멍난 엉덕’이라는 의미로 불리어 왔다. 또한 ‘등영구’는 ‘신선의 세계로 들어가는 곳’, ‘신선의 영산으로 오르는 곳’, ‘한라산으로 들어가는 곳’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지금은 4·3사건 이후 몰지각한 사람들이 기암괴석들을 가져가버려 들렁귀의 옛 모습이 많이 훼손된 상태다.
※ 영주십경
1. 성산일출 2. 사봉낙조 3. 영구춘화 4. 귤림추색 5. 정방하폭 6. 녹담만설
7. 산포조어 8. 고수목마 9. 영실기암 10. 산방굴사 (11.용연야범. 12.서귀진성방)
3. 애기소
: 애랑의 전설이 담긴 애기소는 애랑이와 배비장이 봄놀이판을 벌였다는 '애기소'인 이곳은 판소리 열두마당 중 하나인 ‘배비장전’에서 배비장이 기생 애랑의 목욕하는 장면을 숲속에서 몰래 훔쳐보던 ‘한라산화유(한라산화유)’의 장소인 ‘수포동 녹림간(수포동 녹림간)’으로 알려진 바로 그곳이다.
4. 판관소
판관소는 예전 인근 지역주민들이 식수로 이용하던 곳으로 소와 말에게 물을 먹이던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5. 다람지궤
깎아지른 낭떠러지와 바위가 서로 얽혀 동굴형태를 이루고 있는 바위 궤를 말하며, 다람쥐굴이라고도 한다. 이곳에서 물놀이를 하려면 다람쥐궤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불가능 하다. 특히 여름철 최고의 물놀이 명소로 이곳을 통과할 때는 기온차가 느껴지면서 새로운 별천지로 들어가는 관문이란 인식을 자연스럽게 하게 된다.
6. 항소
깊이를 알 수 없는 항아리 형태의 소(소)로 오라동주민들이 유년시절 여름철 물놀이를 하던 추억이 담긴 곳이다. 밑바닥까지 숨을 참고 들어가 돌맹이를 건져 올리는 내기를 하며 담력과 물놀이 기량을 뽐내던 곳이기도 하다. 특히 항소는 마식작용(abrasion)으로 만들어진 초대형포트홀로 유명하다.
※ 마식작용(abrasion): 물에 의해서 굴러온 돌들이 다른 돌들을 깎아 먹는 것을 말하는데 이런 작용의 결과로 만들어진 돌개구멍이 포트홀이다. 즉 자갈이나 모래 같은 물질이 바위의 움푹한 곳에 들어가게 되면 그 안에서 물살에 의해서 계속 돌면서 깎이게 되면 점점 커지면서 항아리 모양처럼 파이게 되는데 이것을 포트홀이라고 한다.
7. 족감석
족감석(설문대할망 모자바위, 족두리바위)은 고지교 다리 바로 남쪽에 있는 큰 바위로 바위면에 경주이원흠혜보비(경주이원흠혜보비)라는 글씨와 작은 글씨로 무오 족감석(무오 족감석)이라 새겨져 있다. 경주 이씨 집안에서 족보를 만들어 오래도록 전해 주었음을 고맙게 여기고 기념하는 뜻에서 비석 대신 새긴 마애명으로 족감석이란 ‘친족임을 느끼게 하는 돌’로 해석 하고 있다. 특히 이 바위를 설문대할망 모자바위 또는 족두리바위라고도 하는데, 족두리석은 영험이 있는 바위로 1950~60년대에는 냇가에서 멱을 감다가 넋이 나가면 어머니가 아이를 데리고 와서 설물대 할망 족두리석 앞에서 치성을 드리고 나면 아파 던 아이가 나아서 뛰어 놀았다고 한다. 또한 2007년 9월 태풍 「나리」의 피해로 약 20m 가량 고지교 다리까지 유실된 것을 2008년 10월 지금의 위치에 옮겨 놓았다고 한다.
※설문대할망 족도리 설화
설문대 할망에 대한 전설은 「제주를 창조한 여신으로 제주지역에 가장 폭넓게 분포되어 있는 설화」이다. 설화의 내용을 보면 설문대 할망은 몸이 너무 커서 아래바지, 즉 소중이를 해 입을 옷감이 없어서 마을주민들에게 하는 말이 “나에게 소중이 한 벌을 해 주면 제주에서 목포까지 다리를 놓아주겠다.”고 말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마을 주민들이 너무 가난해서 소중이를 못해 드리니까 쓰고 있던 족두리를 이곳에 벗어 두고 소중이를 해 줄 곳을 찾아 어디론가 떠나버렸다는 설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는데, 이때 벗어놓은 것이 『족두리석』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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Ⅵ. 탐방로 주변의 식생
1. 목본
검은재나무, 겨울딸기, 광대싸리, 구실잣밤나무, 굴피나무, 꾸지뽕나무, 남오미자, 노린재나무, 느티나무, 담쟁이덩굴, 말오줌떼, 모람, 밤나무, 보리밥나무, 보리수, 비목나무, 사스레피, 산싸리, 산유자나무, 삼나무, 상수리나무, 생강나무, 서어나무, 송악, 아그배나무, 아카시나무, 예덕나무, 오갈피나무, 왕대나무, 왕모람, 올벚나무, 왕벚나무, 이대나무, 자귀나무, 자금우, 조록나무, 졸참나무, 좁은잎천선과나무, 참꽃나무, 백량금, 천선과나무, 철쭉, 태산목, 팽나무, 푸조나무, 해송, 등등.
2. 초본
가는쇠고사리, 개기장, 계요등, 댕댕이덩굴, 도깨비가지, 둥근잎유홍초, 산박하, 새삼, 쇠무릅풀, 실고사리, 익모초, 조개나물, 주홍서나물, 질경이, 참나리, 칡, 큰뱀무, 털산박하, 파리풀, 홍지네고사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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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오줌때 | ♣가막살나무 | ♣검양옻나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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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나무 | ♣모람 | ♣남오미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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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잎천선과 | ♣소엽맥문동 | ♣봉의꼬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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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피 | ♣덧나무 | ♣멀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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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망초 | ♣생강나무 | ♣머귀나무 |
Ⅴ. 탐방경로
방선문→좀팍물→교도소밑→한북교→걸락쿰폭포→하천횡단→가카원이→몰독개→거북바위→호거바위→오라동감귤낭밭→제주아트센터→한라도서관→한북3교→깅이소→애기소→판관소→다람쥐궤→창꼼소→항소→족감석→고지래또(고지교)
Ⅵ.방선문을 통해 우리가 보고 느낀 것들
1)방선문이 속한 오라동을 알게 되었다.
오라동이 어떤 마을이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현재 오라동 하천의 동쪽으로는 오라1동 서쪽으로는 오라2동이며 상당히 넓은 마을이라는 것과 연동이 오라동에 속했다는 것도 알았다. 월구부락을 중댕이굴 연미마을을 도노미라는 우리 고유의 아름다운 이름도 좋았다.
2)하천이 무엇인지를 자세히 알고 육지와 제주도의 하천이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도 알게 되었다.
제주도의 하천은 모두 60여개이며 그 중 크기로 본 3대 하천은 천미천, 한천, 효례천이라는 사실과 개미등과 삼각봉에서 발원한 물이 탐라계곡과 대피소에서 만난 다시 밑으로 흘러 반선봉입구와 열안지오름 동편에서 만나고 이 물이 방선문 입구에서 만나 다시 용연으로 흐르는 곳이 한천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육지의 하천은 침식과 퇴적을 거치면서 구불구불해지고 또 여러 개의 지류가 흐르면서 만나 이루어지지만 제주도의 하천은 조면안산암이 피복되어 있어 유역 변경이 없는 일자형이었다. 제주도의 하천 형성은 남북으로 존재하고 동서쪽으로는 하천이 없는 데는 동서쪽으로 용암대지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거슨새미와 거친오름 사이에도 넓은 용암대지가 있으며 대록산과 가시리 주변도 용암대지를 만드는 묽은 용암이 흐른 때문이었다. 서쪽의 고산과 함창동 사이에도 용암대지를 형성되어 하천이 없었던 것이다.
3)방선문 이름의 유래를 알게 되었다.
방선문의 옛 이름은 들렁귀(석교)이다. 들렁귀라는 말은 뚫어진 언덕. 들려진 언덕이란 뜻을 지닌다. 이 말이 한자어 등영구에서 와전되어 방선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는 것과 방선문이란 기록은 윤목사의 마애명기록에도 나오고 있고 방선문이란 뜻은 시선이 방문하는 문, 인간에서 신선으로, 신선에서 인간세계로 들고나는 문이라는 뜻을 가지다는 것도 알았다. 이름만 부르던 우리가 그 이름의 유래를 자세히 알게 되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이름의 유래인가?
4)방선문이 지닌 아름다움과 방선문에 얽힌 전설을 알게 되었다.
방선문은 영주십경중의 하나인 영구춘화에 속한다. 그런데 실제로 영구춘화라는 새겨진 비석이 고마장인 사라봉과 오현교 사이로 통하는 봉개 쪽에 있어 다고 하나 방선문에서 보는 영구춘화도 그 못지않아 이곳도 역시 영구춘화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현재는 영구춘화라면 한라산 방향을 가리킨다. 이것으로 보면 아름다운 지역도 옮겨 가는 것 같았다. 이런 것과 같은 예로 귤림추색은 오현단에 있다. 조선시대에 나라의 귤밭은 오현단 일대였다. 제주도의 나라 귤밭은 정의현에 5개 대정현에 6개 제주목에 11개가 있었다 한다.
족감석은 KBS 신축건물 옆 다리 밑에 있었다. 설문대할망 족두리라는 전설이 재미있었다. 무인 족감석이란 것이 마애명으로 남아 있다. 마애는 굴러와서 마모된 돌이란 뜻이라는 것과 우리 선현들은 돌에 글을 새기는 것을 좋아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했다. 답사하면서 돌에 선인들이 여러 가지를 글을 써서 남겨 놓은 마애명을 여기저기에서 둘러 볼 수 있었다.
갈락푼 폭포의 뜻은 갈라지다 합쳐진 폭포라는 뜻이었다. 이 폭포에는 백록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복날 선녀가 옷을 벗고 목욕할 때는 한라산 산신은 땅으로 내려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어쩌다 내려오지 못하고 하늘에서 선녀들이 목욕하는 것을 내려다 보아버렸다. 그것을 안 옥황상제는 진노하여 한라산 산신을 백록으로 만들어버렸다 한다. 선녀와 폭포라는 한국적 전설이 방선문에도 있었다.
5)방선문은 지질학적으로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방선문의 아주 거대한 돌들도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여기저기 깨어져 내리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방선문 양쪽에 큰 바위 사이로 나무의 뿌리들이 박혀 돌들을 깨뜨리고 있었다. 바위 사이에 끼인 나무뿌리가 거대한 바위를 쪼갠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다. 작은 어느 날 힘이 되어 자연을 변화시킨다는 것이었다. 바위들의 변화는 풍화작용에 의해 이루어진다. 풍화작용은 물과 바람과 식물에 의해서다. 아마 깨어진 돌들은 수많은 세월이 흐른 뒤에 흙으로 변해 갈 것이다.
6)방선문 양쪽 주변으로른 많은 식물들이 분포되어 자라고 있었다.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우리들의 직접 보고 관찰한 식물들은 검양옻나무(개옻나무),붉나무,오갈피나무,가막살나무, 산싸리나무, 머귀나무 졸참나무, 생강나무,개망초 밤나무 멀꿀,덧나무, 모람, 천선과, 좁은잎천선과 벚나무 솔비나무, 봉의꼬리. 소엽맥문동,팽나무, 음나무(엄나무), 자금우, 빗자루, 겨울딸기(한탈),갈퀴꼭두서니, 팔손이, 등이다.붉게 물들어가는 풀과 나무들도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운 나무들 사이로 보는 방선문은 더욱 아름다웠다. 그래서 옛 선현들은 신선이 들어오고 나가는 곳이라고 했는지 모르겠다.
지금까지 다양한 답사를 통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지만 이번 답사는 제주시에 위치한 방선문 하천 길을 따라 걸으며 역사, 지질, 인문, 자연 등 많은 것을 보고 느껴보는 시간이었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했다. 아름다운 방선문 길은 삭막해져 가는 도시화 속에 많은 사람들의 휴식공간으로 자리매김 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도시개발 속에 많은 자연이 훼손되고 아름다운 풍광이 사라져 가고 있다. 이런 아름다운 하천 자연이 도시 한복판에 있다는 것은 제주인의 행복한 환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방선문이 잘 보존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런 아름다운 곳을 후손들에게 잘 물려줘야 한다는 생각도 깊게 가지게 되었다. 끝으로 강의 시간 내내 열정적으로 가르쳐주신 부두홍 강사님과 보조 강사님께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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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동이 어떤 마을이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에서
중대이굴은 중댕이굴로 오타 수정요!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