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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채학은 헝가리에서 태어난 한 어린소년의 흥미로운 관찰에서 비롯되었다. 그 어린소년이 바로 홍채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이그낫츠 본 페크제리이다.
그는 1826년 부다페스트 근교 에게바에서 출생하였으며, 11세때 우연히 다리가 부러진 올빼미의 눈동자에서 한가닥의 검은 선이 나타났다가 치료한 후 검은선 대신 희고 구불구불한 줄이 생겨난 것을 발견하였는데, 이것을 인상깊게 여기고 있던 이 어린소년이 그후 의사가 되어 환자들의 질병과 홍채에 나타나는 표시들과의 관계를 점진적으로 연구하여 눈을 통한 진단을 시작하였고, 이로부터 홍채학의 역사는 시작되었다.(1861년)홍채학은 그후 닐스 릴제 퀴스트에 의하여 더욱 발전하였는데 "눈을 통한 진찰"이라는 그의 저서가 영어로 번역되어 홍채를 통한 진단학이 미국에 전해지게 되었다.(1890년대) 20세기에 와서 홍채학의 발전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인물은 오스트리아 사람인 헨리 에드워든 레인 박사이다.
그는 "눈을 통한 진단법-홍채학"이라는 책을 1904년 워싱턴에서 출간하여 홍채학에 대한 강의와 이 방법을 통하여 환자들을 진찰, 치료함으로 이 분야에 큰 기여를 하였다.
홍채학의 가장 자세하고 정확성이 높은 이론과 실체를 정립한 사람은 버나드 젠슨 박사인데 그는 1908년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나 아버지의 뒤를 이어 카이로 프랙틱의사로 1929년 오클랜드에서 개업하게 된다.
그후 그 자신의 건강이 악화되어 여러 의사들을 찾아 다녔으나 치료하지 못하고 있던 중 당시 베틀크릭 세니타리움 원장이었던 켈록박사의 권유로 자연치료(自然治療)를 소개받고 그의 프로그램을 따라 행함으로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다. 이것은 젠슨에게 전환점이 되었고 이후로 그의 분야를 자연치료로 돌렸다.
자연치료를 공부하던 중 그는 시카고의 한 대학에서 홍채학을 접하게 되었다. 그후 젠슨은 자신의 요양원을 경영하며 수 많은 환자들을 접하면서 홍채학과 자연치료를 시술함으로써 홍채학에 대한 이론과 실체를 정립하고 홍채 챠-트를 발표하여 이 분야의 최고 권위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국내에서는 약 1년여의 준비 끝에 한의사, 의사, 과학자가 함께 동참하는 대한 홍채 의학회가 1998년 7월 12일 창립되어 그동안 각 개인별로 진행되오던 홍채학 연구의 방향을 정립할 수가 있게 되었다.
홍채학의 역사
홍채학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헝가리 태생의 이그낫츠 본 펙제리(Dr. Igmatz.Von Peczely)
헝가리에서 있었던 일이다. 11살짜리 꼬마가 다리가 부러진 올빼미를 보게 되었다 올빼미의 홍채는 크기도 하지만 색이 노랗고 밝아서 관찰하기가 매우 쉽다. 다리가 부러진 올빼미의 홍채의 6시방향에 흰줄이 생긴것을 관찰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다리의 상태가 호전될수록 회색에서 검정색그리고 생겼던 역순으로 희미하게 없어지는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똑똑한 아이가 의사가 되어 환자들의 눈동자 즉 홍채를 살피게 되었고 각질환의 공통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소화기계통이 문제시 동공주위에 반영되는것과 순환기계통은 홍채 가장자리에 상체의문제는 홍채의상부 하체의 문제는 홍채의 하부에 신체의 좌측의 문제는 좌측, 우측의 문제는 우측에 신호가 반영되어 나타나는 것을 발견하였다. 1861에 발간된그의 저서 “눈을 통한 진찰”을 통해 밝히고 있고 의사인 그는 부검을 통해 이를 검증 하였으니 홍채학의 선구자이고 아버지라 불리고 있다.
홍채학은 동구권에서 ,영국, 호주, 또다시 헨리 에드워드 박사에 의해서 미국을 알려지게 되었다. 한국은 호주의 의사인 브리튼 박사에의해 별로 오래되지 않은 10여전에 자연요법사들에게 먼저 알려지게 되었고 이들에 의해 한의사, 의사, 약사 그리고 대체의학 관심자들에 보급되기 시작하여 저변이 확대되어가는 추세이다.
홍채학은 1903년에 공식적인 하나의 진단학 즉 홍채학 영문으로는 IRIDOLOGY로써 가치를 인정받은지 100여년이 되었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고 독일의 경우에는 자연요법자가 아닌 의사들이 3000여명 이상이 홍채학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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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채학의 역사
눈속의 홍채에서 일어나는 변화들을 이해하고 이러한 변화들을 신체에서 일어나는 변화들과 연관성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갈대아인들(고대 페르시아만 연안에 있던 바벨론 제국의 한 지방)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면 더없이 좋겠으나, 독일 홍채학자인 데오도르 크리지(Theodor Kriege)에 의하면 홍채분석학에 관한 최초의 문서는 내과 의사였던 메옌스(Philippus Meyens)에 의해 1670년에 Dresden에서 출간된 그의 서적 「Chiromatica Medica」 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다음의 내용은 그의 저서 가운데서 발취한 것이다.
"상단 부위는 머리를 나타낸다.
위장은 뇌와 밀접한 연관이 있으므로 위장에서 발생하는 모든 질환들은 눈에서 발견될 수 있다.
우측 눈은 간과 오른쪽 폐 그리고 혈관들을 나타내며, 좌측 눈은 신체의 좌측에 놓여진 모든 장기들이 나타나는데 그 장기들은 심장, 좌측 폐, 비장과 작은 혈관들이다 심장에서 발생하는 건강의 상태 와 질환들은 여기에서 관찰할 수 있다.
하단 부위는 생식기계통과 신장 그리고 장의 상태 즉 복통, 황달, 결석, 담낭의 질환과 비뇨기 질환들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이다.
이러한 사인들은 핏줄과 자국 반점으로 구성되어 있다."
약 20년후 죤 엘츠볼츠(Johann Eltzholtz)의 저서가 출간되었으며 일세기 후인 1786년에는 크리스찬 해르텔즈(Christian Haertels)가 "눈과 눈에 나타나는 싸인들"이라고 제목된 논문을 출간하였다.
그러나 근대에 홍채학의 아버지라고 널리 알려진 홍채학 창시자인 헝가리 태생의 의사인 이그낫츠 본 페크제리(Ignatz Von Peczely) 박사의 발견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내가 11살 때의 어느날 나는 정원으로 날아든 올빼미를 잡으려고 하는데 그 올빼미는 목숨을 위하여 사투를 다해 나에게 대항하기 위해 발톱으로 나의 손을 찔렀으며 내가 나의 손을 빼내려고 하면 할 수록 올빼미는 더욱 세차게 나의 손을 발톱으로 움켜쥐어 나의 살 속으로 발톱이 들어가게 되었다.
발톱을 살로부터 빼내기 위해서는 올빼미의 다리를 부러뜨리는 것 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으며 나는 힘이 센 소년이었기에 그 일을 시행하였다.
나와 새가 싸우는 동안 우리는 서로 눈을 째려보았는데 내가 새의 다리를 두 동강이로 부러뜨리는 순간에 나는 올빼미의 눈에서 어두운 줄무늬가 나타나는 것을 발견하고 매우 놀랐다.
나는 그 새가 불쌍하게 생각되어 올빼미를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 붕대로 다리를 감고 치료가 될 수 있도록 돌보아 주었으며, 후에 나와 친구가 되어 나의 식탁에서 내가 주는 먹이를 먹고 정원에서 나와 같이 놀았으며, 올빼미가 치료되어 놓아 준 후에도 이와 같은 일을 오랜 기간 동안 계속하게 되었다.
그해 가을에 올빼미는 멀리 겨울을 보내기 위하여 날아갔으나 그 다음해 봄에 다시 돌아왔으며 그때에는 전 해 보다는 매우 순하게 길들여진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느날 올빼미는 나의 손등에 앉았는데 나는 그 새의 눈에서 다리가 부러지던 날 형성된 어두운 줄무늬를 보게되었는데 그 모습은 전보다 넓어지고 흰줄로 둘려 쌓여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 (Iris Science에서 발췌함)
↑이그낫츠 본 페크제리
페크제리는 1826년 1월 26일 헝가리의 수도부다페스트의 근교 Egervar에서 태어났다.
대학을 졸업한 후 그는 1846년 헝가리 혁명에 가담하여 중상을 당하고 1853년까지 수감 생활을 하였다.
그후 그는 그의 어머니의 중병을 동종요법으로 치료하게 되었고, 그의 이웃들은 그 소문을 듣고 그에게 자문을 구하러 찾아오기 시작하였다.
이때에 그는 어렸을 때의 사건을 기억하고 환자들의 눈들을 관찰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환자들의 증상과 눈에 나타나는 싸인들이 매우 관련이 있음을 관찰하고 "눈을 통한 검사"를 시작하였다. 눈을 통하여 건강의 상태를 판단하는 그 만의 독특한 방법은 소문에 소문이 퍼졌으며 많은 환자들이 그에게 몰려들었다.
그러자 의료의 권위자들이 이 일에 간섭을 하면서 그를 돌팔이 의사로 비난하였다.
그러나 눈을 통한 그의 분석이 매우 정확함을 알게 된 의사들은 그 후 그를 비난하는 말을 삼가하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그는 정식으로 의과대학에 들어가 공부를 하기로 작정하고 그의 나이 36세에 부다페스트의 한 의과 대학에 입학하여 과정을 마치고난 후에 비엔나에 유학을 가서 1867년, 그의 나이41세에 의사 면허를 받게 되었다.
그는 학교 공부시절과 수련의 생활을 하면서도 그의 연구를 멈추지 아니하였는데, 그는 환자를 접할 때마다 환자의 눈을 관찰하였으며 특히 병원에서 수술하기 전의 환자의 눈의 상태와 수술한 후의 환자의 눈을 비교하여 기록하므로 홍채 분석에 대한 체계적인 기술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그는 홍채에서 발견된 싸인들이 환자가 사망하기 직전까지는 아무런 증상이 없었으나, 그 질환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하여 수많은 부검을 하여 확인하였다.
1869년 부다페스트로 돌아온 페크제리는 개원을 하여 동종요법으로 환자들을 치료하였으며 그의 명성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치료를 받기 위하여 그의 병원을 찾았다.
그는 1880년에「Discoveries in the Realms of Nature and Art of Healing」을 출간하였으며 1866년 8월 「Die Homeo-patische Monatsblatter」의 편집장인 Zoeppritz씨에 의하여 페크제리박사에 의한 홍채학의 발견을 세상에 소개하였으며 Emil Schlegel박사는 페크제리의 과업을 1. V. 페크제 리의 눈분석법 이라는 내용으로 책을 출간하였다.
페크제리의 나이 33세에 스웨덴의 8살 소년 닐스 닐제퀘스트는 자신의 눈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후 그가 14세가 되었을 때 그는 예방 접종을 하였으나 부작용으로 인하여 임파가 붇고 감기와 말라리아, 인플루엔자, 코에 폴립이 생기 는 고통을 겪었다. 코의 폴립을 제거하고 말라리아를 치료하기 위하여 의사에게 퀴니네을 처방 받아 복용하였다. 이렇게 몇년이 흘러가는 동안 그는 그의 눈의 색상이 바뀌는 것을 관찰하게 되었다. 1871년 그가 20세 되던 해 , 그는 「퀴닌과 요오드는 눈의 색상을 바뀌게 한다. 」라는 제목의 잡지를 출간하였다 ꡒ나의 눈은 본래 푸른색이었으나 퀴닌과 요오드를 복용한 후 빨간 점들이 있는 녹색의 눈으로 바뀌었다ꡓ고 적고 있다.
이 내용은 페크제리의 발견과는 관련이 없이 이루어진 것이다.
↑닐스 닐제퀘스트
그는 1893년 「Om Oegen-diagnosen」이 란 제목의 책을 출간하였으며 이 책은 1916년 영국에서 번역되어 「Diagnosis from the Eye」 (눈을 통한진단법 )로 출간 되었다.
비록 닐제퀘스트는 페크제리와는 별도로 연구하였으나 그의 분석표시도나 그가 사용한 용어들은 놀랍게도 페크제리의 것과 매우 비슷하다.
많은 의학자들에 의하여 홍채학은 더욱 연구되고 발전되었으며 이들의 연구 결과의 노력으로 신체의 각 부분에 대한 차트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20세기에 와서 홍채학의 발전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인물은 오스트리아 태생의 헨리 에드워드레인박사에 의해서이며 「홍채학, 눈을 통한 분석법」이라는 책을 1904년 워싱톤에서 출간하였다.
레인 박사의 제자 중 한 사람인 린들라 박사는 홍채학에 관한 강의와, 이 방법을 통하여 환자들을 진찰, 치료함으로 이 분야에 큰 기여를 하였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환자들이 자연의 섭리를 따라 치료를 하였을 때 나타나는 치료의 법칙 즉 치료의 위기(Healing Crisis)의 발견이다
홍채학의 발전을 위하여 헌신한 인물들을 열거하자면 수많은 이름들과 그들의 업적을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독일의 펠케 목사, 죠셉 앵거러박사 등 홍채학의 발전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하지만 홍채학이 지금과 같이 널리 보급되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인물로는 미국의 버나드 젠슨 박사와 독 일의 죠셉 데크 박사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 켈리포니아에서 1908년 한 척추교정사의 가정에서 태어난 버나드 젠슨 박사는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 18세에 웨스트 코스트 카이로프락틱 대학에서 수학하고 4년 후인 1929년 졸업을 한 후 오클랜드에 개업을 하였으나 환자들을 위하여 온 힘을 다해 봉사하는 동안 과로로 인하여 건강이 점점 악화되었고 결국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게 되어 병원을 닫고 여러 의사들을 찾아 다녔으나 아무도 그의 질병을 치료하지 못하였다.
여러 해가 지난 후 당시 베틀크릭 세니타리움 원장이었던 켈록박사를 만나 자연치료에 대한 제안을 받아 그의 프로그램으로 건강을 회복하게 되었다.
이 경험은 그에게 전환점이 되었고, 그후부터 그의 분야를 자연 치료에 돌리게되었다. 그리고 그는 여러 곳을 방문하며 자연 치료를 연구하던 사람들을 만나 가르침을 받았으며 시카고의 한 대학에서 홍채학을 접하게 되었다.
그는 개인적으로 린들라 박사, 맥레인 박사, 헤스켈 크리처 박사, 콜린 박사, 아놀드 박사, 허첸스 박사, 크리스토퍼 박사, 독일의 데오도르 크리지박사 등과의 접촉을 통하여 홍채학에 대한 토론과 의견의 교환으로 많은 이론들을 정립하여 「홍채학의 학문과 시술」과 「홍채학 Ⅱ」 등 여러 가지 홍채학에 관련된 서적을 출간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보급하였다
독일에서 태어난 죠셉 데크(Joseph Deck)박사는 1992년 그의 임종시까지 전 생애를 홍채학의 발전을 위하여 바친 인물로서 「Principles of Iris Diagnosis」와 「Differenciation of Iris Markings」등 여러 서적을 발간하였다. 그는 43년 동안에 수십만명의 홍채를 관찰하여 홍채 체질론을 정립하였다. 그는 자신의 고향인 Ettlingen에 Institute for Fundamental Research in Ocular Diagnosis를 설립하여 많은 의사들과 건강 관련 종사자들에게 홍채를 통한 진단법을 보급하였다. 그는 유럽의 대다수 국가의 홍채학자들 가운데 최고의 권위자로서 인정을 받았으며 많은 세미나와 강의를 통하여 홍채 분석의 유의성을 입증하였다
죠셉 데크 박사보다는 젠슨 박사가 세계적으로 더 많이 알려진 이유로는 젠슨 박사의 서적이 영어로 되어있다는 점과 홍채학을 누구에게나 보급하려고 노력한 결과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1979년 산디에고에 위치한 켈리포니아대학교의 A. 사이몬, D. 월슨, J. 마이타스는 젠슨 박사를 포함한 3명의 홍채학자들을 불러 143명의 환자들의 홍채를 찍은 사진을 가지고 공개 테스트를 하였다 143명중 24병은 심각한 신장 질환이 있었으며 다른 24명은 경미한 신장 질환이 있었고 나머지 95명은 아무 문제도 없었다.
이 공개 테스트에서 젠슨 박사가 신장 질환이 있는 환자들을 골라내지 못함으로 그의 명성에 먹칠을 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 사건은 「A consumer's guide to AlternativeMediciaI」 잡지에 기제되었고, 홍채학에 대한 많은 공격자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젠슨은 사진의 질이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변명하였으나 목격자들에 의하면 사진의 해상도는 매우 좋았었다고 한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죠셉 데크 박사는 홍채학의 유의성을 입증하고 분석하는 방법을 알리기 위해 「Differenciation of Iris Markings」라는 책을 출간하기에 이른다.
홍채학이라는 학문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보급하는데 노력한 젠슨 박사의 공로는 인정하나 그의 분석법에는 많은 헛점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 후로 홍채학자들은 죠셉 데크 박사의 연구 결과를 기초로 많은 연구를 하고 있으며, 지금은 미국식 홍채학 보다는 유럽식 홍채 분석법이 더욱 정확하다고 인정받고 있다.
서양인의 홍채는 그들의 눈의 특성상 동양인의 홍채보다 여러 가지 홍채에 나타나는 현상들이 보다 쉽게 나타나지만 임상적으로 약5,000명의 동양인의 홍채를 수년간 분석한 결과, 서양인의 홍채와는 다르게 많은 sign들이 나타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이러한 동양인의 홍채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첫댓글 우리나라에서도 카이로프랙틱터 출신 홍채학자가 나오기를 기대하면서..... 시간이 나는대로 카이로프랙틱과 관련있는 홍채학과 이어테라피 자료를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