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을 회고하며
김광우(6회, 전(前)동아대미대학장)
1950년 6.25전쟁. 1952년 휴전협정 3년 후 1955년에 포천 중학교에 입학을 하게 된다. 그 이전에는 38선 5백 미터 북쪽 땅인 관계로 북한 사람이며 인민학교를 3학년까지 다니면서 김일성 교육을 받는 경험을 하게 된다. 6.25 전쟁은 민족의 아픔이며 슬픈 역사로 기억될 것이다. 그러나 김광우라는 사람에게는 역설적으로 민족의 비극 6.25 전쟁은 북한 사람으로 살았을 개인적인 운명을 바꾸어 놓은 극적인 사건이었다. 그래서 인간은 상황적 존재라고 말했던가? 내가 예술을 할 수 있었던 첫 번째 요인을 꼽으라면 6.25 전쟁 때문이라고 말해야 하는 것 아닌가!
물론 이 말은 사회적 요인을 지적하는 것이지 예술가가 되기 위해 갖추어야 할 조건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자기적 관심, 잠재의식, 선천성, 사회적 환경, 시대를 보는 직관, 인류를 사랑하는 마인드, 자기 희생, 인내, 감각 등을 갖추지 못했다면 예술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미술 교과서와 미술 선생님은커녕 데생을 하기 위한 석고상 하나 없었던 열악한 환경의 미술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면 눌러 담은 쌀밥 한 그릇이 그리워 매일 미군 부대를 기웃거리며 꿀꿀이통(미군이 먹다버린 음식쓰레기통)을 뒤지는 환경 속에서 무슨 꿈과 희망이 있었겠는가? 그러나 불행 중 다행이었던 것은 그것이 좋은 환경인지 나쁜 환경인지를 몰랐던 어린 시절이었기에 꿈은 지속되었다. 모르는 것이 약이 된 셈이다.
그림을 열심히 그리게 된 동기는 선생님, 동료, 가족으로부터 받는 극찬이었으며, 이것이 미술대학에 가야 한다는 결심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칭찬은 최고의 교육 방법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곤 한다. 예술을 왜 해야 하는지 그림이 왜 좋은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칭찬 받는 기쁨이 일생을 결정하는 전공으로 미술을 선택하게 한 것이다. 그 당시는 라디오, 텔레비전은 상상도 못하던 시절이기에 정보가 없었는데 우연히 홍익대학에서 미술실기대회가 있다는 정보를 얻어 접혀지지 않는 붙박이 삼각형 이젤을 간판 그리는 아저씨한테 빌려 그야말로 콩나물시루 같이 빽빽이 사람들로 들어찬 군 트럭에 같이 싣고 비포장도로를 덜커덩거리며 5시간 걸쳐 달려서 실기대회 장소인 홍익대학교에 도착할 수 있었다.
대상을 받아서 고향으로 금의환향할 꿈을 꾸며 최선을 다해 그렸지만 결과는 아무 상도 받지 못하고 낙선하고 말았다. 중고교 시절 그림을 잘 그린다고 칭찬 받으며 우쭐했던 것은 단순히 대상을 묘사했던 것에 불과하였고 그림을 그리는 방법을 전혀 모르는 촌놈이란 사실을 다시금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미술대학에 가기 위해서는 석고 데생이 필수인데 석고상 하나 보지도 못한 나로서는 암담한 현실을 마주하게 된 것이었다. 운명적이었는지 그 와중에 1학년 실기실에 들르게 되어 홍대생들이 데생하는 방법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친절하게도 그림을 그리던 홍대 1학년 선배 중 한 분이 데생하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그가 알려준 방법으로 며칠 동안 반복적으로 연습하며 얻은 지식을 가지고 모교에 돌아와 꾸준히 연습하였으나 어느 누구 하나 나를 평가해 줄 사람은 포천 바닥에 없었다. 어찌되었던 세월은 지나서 입시는 시작되었고 실기시험을 치르게 되었다. 입시 석고상으로 줄리앙이 출제되었다. 그때 내가 가진 능력은 기본적인 형태와 면을 잡고 운동감을 표현하는 정도의 수준이었다. 그러나 개성을 살려 보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힘있게 그렸다고 생각했지만 심사 결과는 알 수가 없었다.
예술가의 길을 가기 위한 운명이었는지 합격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합격의 기쁨은 잠시였고 등록금은 어떻게 마련하고 어디에서 숙식을 해결할 것인지 발붙일 곳 없는 포천 촌놈의 안타까운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서울 효창동의 허름한 단칸방에서 여섯 식구가 사는 고모님 댁에서 2년을 보냈고, 신촌의 자취방에서 하루 한 끼로 생활하며 1년을 보냈다. 그 뒤에는 역겨운 부엌냄새 속에서 여름은 덥고 겨울은 발이 얼 정도로 춥고 내 몸의 체온으로 이불을 녹이는 이태원의 다락방에서 2년을 지냈다. 오늘의 내가 내가 아니라는 울분에 찬 구호로 일기장을 메워가며 왜 예술을 하는가도 모르면서 열심히만 하면 된다는 막연하였지만 우직한 믿음을 가졌던 그 시절의 내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4학년이 되었을 무렵 인생이 무엇이며 예술이 무엇인가를 스스로 터득한 것은 이제는 더 이상 좌절도 포기도 없으며 선택의 과정은 힘들었지만 결심하면 끈질기게 밀고 가면 된다는 믿음과 의지를 가지게 되었다. 이때의 깨달음과 결심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외도하지 않고 자신과 한 약속을 지키겠다는 신념을 갖게 했으며, 그것이 50년이 넘는 동안 작품 활동을 할 수 있게 한 힘의 원천이 되었다. 그간 많은 역경과 고통이 있었고 희로애락이 뒤따랐지만 고교교사를 거쳐 대학교수로서 강단에서 학생들에게 나의 경험을 나누면서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고 작품을 열심히 하라는 격려의 크고 작은은 수상을 하면서 나름대로 명예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예술을 통하여 나 자신의 방법대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술의 진정한 의미는 그 결과와 목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으로부터 끝없는 추적을 통하여 얻게 되는 새로운 발견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포천일고 개교 60주년을 맞는 소고(溯考)
양윤택(6회, 포천문화원 부원장)
나의 사랑하는 포천일고
이름만 들어도 숙연히 머리가 숙여지고 수많은 추억과 모습들이 주마등 같이 스쳐가는 포천일고. 내 인생의 초석이 되시고 나를 향하는 무너짐이 없는 은혜(恩惠)의 성(城), 포천일고. 목이 메어 불러 보는 나의 사랑하는 모교 포천일고.
어언 당신의 연륜(年輪)이 60년을 헤아리게 됩니다. 삼가 공수시립(拱手侍立)의 자세로 경배 드립니다.
당당하신 명칭이며 당당하신 명성으로 관내의 유일(唯一)한 중‧고등(포천일고)학교로서 이 고장에 중등교육의 시초를 열어 효시(嚆矢)되시니 그 위상이 아주 위대한 존재이십니다. 그러기에 포천일고는 역사로 보나 전통(傳統)으로 보나 단연 포천 중등교육의 선두 주자임은 말할 것도 없고 내실에 있어서도 견줄 대상이 없이 당당하고 자랑스러우며 자긍심이 넘치게 됩니다.
2013년 3월 22일은 내가 평생토록 잊지 못하고 가슴에 새겨 사랑하는 포천일고의 60회 생일을 맞는 뜻 깊은 날입니다. 온 누리를 끌어안아 포용하는 크나큰 축복(祝福)이며, 오늘은 반월산 정기 받고 한내의 풍요와 부드러운 정서(情緖)를 지닌 겨레의 중견을 길러내는 포천일고, 우뚝 솟아 누리에 빛나는 포천일고에 온통 넘쳐 나는 축복으로 가득 채워 주소서. 포천일고 60년 역사가 영원으로 이어가는 고비마다 마디마다 영광의 역사로 이어지기를 기원합니다.
돌이켜 보면 60년을 지나오는 중에는 크고 작은 사건들과 우여곡절이 많았을 것이며 개교 당시를 돌이켜 보면 민족의 역사 중에 가장 비참한 동족상잔의 비극이었던 6‧25 전쟁이 끝을 알 수 없이 처절하게 전개되어 쌍방의 희생이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상태인 1953년 3월 22일 포천중학교 병설학교로 고고성(呱呱聲)을 울리었으니 그 이름이 빛나는 포천일고(당시는 포천고교)였습니다.
온민족이 너나 구분없이 헐벗고 굶주리던 시절이었습니다.
한 학급으로 개교하니 말 그대로 중학교의 병설교였습니다. 전란으로 인하여 포천 시내가 온통 폐허가 되어 중학교가 빌어쓰던 군청의 잠업시설도 자취가 없어진 상태여서 군내면 구읍리에 있는 향교 시설을 임시로 사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미군의 원조의 일환으로 지금의 학교 자리에 목조 건물이 세워지고 포천중‧고(일고)의 위용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교사 준공식에 초대 대통령 이승만 대통령이 참석하신 것은 중‧고등학교에서는 보기 어려운 가히 역사적인 일이었습니다. 포천 시내에서 건너다 보이는 학교 전경은 웅장하고 쾌적하여 어떻게 보면 지금의 학교 건물 배치보다 더 조화롭고 쾌적하고 웅장하였다고 생각이 됩니다.
해를 거듭하면서 중학교 9학급, 고등학교 3학급의 규모를 갖추어 매일 실시하는 조회와 입학식, 졸업식 의식은 어느 학교에서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절도 있고 엄숙한 의식이었다고 생각됩니다. 학교 규모로는 중학교가 크고, 고등학교는 3학급 학교지만 고등학교 3학년 학도 호국단 학생위원장(지금의 학생회장)의 지휘로 진행되었는데 위엄 있는 지휘와 웅장한 악대의 연주 장면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당시 관내에 유일한 중‧고등학교(일고) 행사로 치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포천중학교와 포천일고등학교는 영원으로 통하는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혈연(血緣)과도 같은 형제 학교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회(回)를 이어 배출(輩出)되는 후배들에게 감히 당부하고 싶은 바는 포천중학교 후배들은 고등학교(포천일고) 형들을 형님 학교 선배로 깍듯이 높여 받드는 마음으로 대하고 고등학교(포천일고) 선배들은 관내의 많은 중학교 후배들 중에 포천중학교 후배들을 친동생처럼 애정으로 각별히 대해 달라는 간절한 심정을 말하고자 합니다.
반월산 밑 유서 깊은 배움의 터전
새싹이 움트는 온상이로세
이 나라 세워 나아갈 중견을 길러
만대에 길이 빛날 우리의 모교
만세 만세 포천중학(일고) 길이 만만세
와 같이 동일한 교가를 학교의 행사 때마다 소리 높여 제창하는 중학교 고등학교는 전국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 아닌가!
교가에 대한 얘기를 하다 보니 작사자(作詞者) 허하룡(許河龍) 교감선생님 모습이 확연히 떠올라 한마디 언급하거니와 중학교 설립 이래 1953년 3월 22일 포천중학교 병설학교(竝設學校)로 설립한 후에도 6년제 학교나 마찬가지로 모든 움직임을 같이 하던 시기이니, 교가 가사의 내용도 중‧고 구분 없이 하나의 교가로 제정한 것이리라. 다만 「만세 만세 포천중학」에서 「포천중학」을 고등학교에서는 「포천고교」 지금은 「포천일고」로 바꿔 부르게 한 교가임을 알 수 있습니다. 호랑이 같으시면서 또한 자상하신 그 모습이 어린 시절 기억으로 지금도 선한 것은 학생들에게 남기신 깊은 인상이라 생각됩니다. 훗날 도내에서 제일 먼저 선발되어 종합고등학교로 개편 개교하게 되는 평택종합고등학교 초대 교감으로 승진 전보하시게 되어 전교직원과 학생들이 경하의 송별식(送別式)을 통해 송별한 기억이 새롭습니다. 세월이 흘러 관내 영북중학교 초대교장으로 오셨다는 얘기를 들었고 지금은 이 세상에 계시지 않으니 거룩한 추억(追憶) 속의 스승이십니다.
1960년대 졸업생이면 누구나 기억이 뚜렷한 스승님으로 임석순(任奭淳) 선생님을 생각하게 되는 것은 항상 웃으시는 얼굴로 사랑의 말씀으로 따뜻한 손길로 학생들을 대하시고 가르치신 스승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한 분은 이 고장 출신으로 청년 시절을 국토방위와 치안 회복에 헌신하시고 모교에 부임하시어 체육을 담당하셨던 유봉렬(柳鳳烈) 선생님이신데 유연하면서도 절도 있는 체련 동작과 학도호국단(學徒護國團)의 열병(列兵)에서 분열(分列)의 전개(展開) 지휘를 일사불란하게 하시던 지휘 능력이 인상적인 추억입니다.
지금은 두 분 스승님께서 모두 고인이시니 삼가 명복을 빌 뿐입니다.
또 한 분 잊을 수 없는 스승님으로 맹건호 교장선생님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포천중‧고(일고) 60년 역사 중 여러분 교장선생님께서 거쳐 가셨지만 맹교장 선생님께서는 중학교 교장이 고등학교 교장을 서리 자격(署理資格)으로 겸임하던 학교에 초대 고등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시어 중학교 교장을 겸임하신 교장선생님이신데 부임하신 후부터 교사진이 도내에서도 손꼽을 정도로 우수교사로 채워져서 고등학교의 대학 진학률이 높아졌으며 중학교 학력도 도내에서 인정받을 정도에 달하였습니다.
1년 반(1955. 8. 31 ~ 1957. 4. 9)을 계시다가 서울의 영등포여자고등학교 교장으로 영전하실 때 경하의 송별식을 통해 보내드린 기억이 새롭습니다.
이와 같이 중‧고 구분없이 교장․교감선생님 한 분 체제로 운영되다가 교감선생님을 중‧고로 분담하는 체제로 운영되던 중 인구 증가에 따라 학생수도 증가하여 중‧고를 분리하게 되어 중학교는 1973년 9월 1일 신북면 가채리 842번지에 부지 10,000평을 확보하여 쾌적한 환경의 학교를 이루어 명실상부 관내 제일의 명문 중학교로 오늘에 이르면서 날로달로 발전의 속도를 높이고 있으며, 고등학교(일고)도 쾌적한 환경에서 내실있는 교육을 전개하여 손색이 없는 발전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전국을 제패하던 역도의 명성을 비롯하여 축구, 육상의 명성을 오늘에 되살려 우뚝 서고, 도내 학력 경시대회에서 인천, 수원 등 도시 학생들과 겨뤄서 단연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던 영광을 되찾는 날을 기대해 봅니다.
이제 이 사람의 고등학교 3년간의 생활을 회고하여 소개함으로 말미를 접으려 합니다.
포천중학교 제8회를 수석으로 졸업을 하고 고교에 진학하였습니다. 일동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포천중학교에 입학할 때와는 전혀 다른 기분이었습니다. 3년간 정든 교정 건물 그리고 선생님들이 낯설지 않은 학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와는 다르게 친근감, 안정감이 있어서인지 모든 것이 쉬웠습니다. 3년 연속 우등이었고 졸업 최우수 도지사 표창을 받았으니,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3개 등급 학교 수석을 차지한 영예였습니다.
눈 서리 바람치는 시절을 거쳐
반월산성 울타리에 곱게 핀 꽃송이……
졸업가를 부르며 교문을 나왔습니다. 제6회 졸업이었습니다.
연임 반장, 학도호국단 학생위원장을 수행하면서 전교생을 지휘 통솔한 기억이 새로우며 지금도 자긍을 느낍니다.
지금도 학창시절 스승님들이 알아보시고 칭찬하시며 선배님들이 기억하시고 칭찬하시는 바에 힘을 입고 많은 후배님들의 인정을 힘입어 오늘에 고향 포천을 위해 봉사하는 일에 더욱 힘을 낼 수 있음을 포일고 졸업생의 긍지를 느낍니다.
졸업반 담임 유봉렬 선생님은 이 세상에 계시지 않으시니 명복을 비는 바이며 이석중 선생님의 근황은 알 수가 없어 아쉬움이 큽니다.
위의 선배님들과 아래로 기라성 같은 후배들 앞에 제6회생으로서 3년간의 회고와 모교의 역사에 언급하고 싶은 점을 기억을 더듬고 기록을 참고하여 열거하려 했으나 외람됨이 있으면 양지하심을 바랍니다.
역사는 기억하는 사람이 있는 한 스러지지 않고 빛을 발하나니 포천일고여 이 나라 이끌어 갈 중견(中堅)을 길러 만만대(萬萬代)에 길이길이 한빛을 발하소서.
선생님들의 모습
선생님의 참된 격려는 학생들의 도전의식을 자극한다
이각모(8회, 전(前)동문회장)
1962년 봄, 새 학기가 시작되면서 새로 부임하신 선생님들을 소개하는 아침조회가 시작되었다. 넓은 운동장에 정렬한 재학생들이 어떤 선생님들이 새로 오셨나 긴장하고 교장선생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어서 새로 오신 선생님 중 한 분이 소개되었는데 영락없는 배추장사? 아니 큰 쌀장사 아저씨 같은 분이 스포츠머리에 뚱뚱한 몸매를 보이시며 연단에 올라 본인 소개를 하는데, 강한 이북사투리에 걸걸한 목소리는 학생들을 어리둥절케 하여 혹시 서무과장님을 잘못 소개하신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기에 충분하였다. 존함은 노정현 수학선생님이시다.
직전 근무하시던 곳은 인천의 대표 명문고인 인천제물포고등학교이었고 수학선생님이셨단다. 그 당시 5대 공립고등학교인 경기, 경복, 경기여고, 서울, 용산이 서울대 입학률 최고의 명문으로 꼽혔는데 여섯 번째가 인천 제물포고등학교였다. 이런 명문 고등학교에서 전방 시골학교인 전신 포천고등학교로 전근이 되셨으니, 수학 명강의로 인천에서 톱을 달리던 선생님은 첫째로 부업으로 하시던 수학 교내과외수업 수입(당시에는 학교 교내 유료과외가 인정되었었음)이 없어졌음을 서운해 하셨고, 둘째로 학생들의 질적 차이가 많이 나는 대도시와 시골의 양상에 걱정을 하셨다. 셋째로 갑작스런 전근으로 포천에서 하숙을 하심으로써 몸은 자유롭되 유명한 막걸리로 무료함을 달래시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학생들의 수학실력 차이가 너무 나는 것을 보시고 이런 학생들이 어떻게 서울에 있는 일류대학에 갈 수 있겠나 하시면서 우리 같이 한번 해보자라며 학생들에게 손을 내미셨다. 당시는 대학진학반과 미진학반이 섞여서 일반 공부를 하고 오후 방과 후 수학 과외 수업을 하게 되었다.
지금도 생생하게 선생님의 호랑이 같은 목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야 이놈들아, 영양 보충을 해 주어야 열심히 가르치지, 담배도 떨어졌고 재미가 없다! 이놈들아!!” 과외 수업에 참여한 15명 내외의 학생들은 기가 죽어 부모님들의 어려운 생활 속에서 어떻게 과외비 마련과 선생님의 영양보충 그리고 담배를 사 드려야 하는 걱정을 하게 되었다. 모두 모여 의논한 결과 포천시내에 사는 찬구들은 매일 아버지 담배를 가져오든지, 용돈을 모아서 사오든지 하루에 한 갑은 반드시 준비하고 농촌 시골에 사는 친구들은 계란을 하루 2개 이상씩 가져다 준비하기로 굳게 결의하고 시행에 들어갔다. 그 결과 열의가 상당하여 두 가지 모두 2년 넘게 준비해 드렸고 수학 실력은 모두 자신 있다 할 정도로 많은 발전이 있었다.
흔히 수학 선생님은 머리가 좋아서 골치 아픈 수학문제를 잘 푸시는구나 생각하기 쉬운데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노정현 선생님께서 해 주신 강의 내용 중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어서 교무실에 선생님께 질문하러 간 적이 있다. 모든 선생님들은 퇴근을 하셨는데 혼자 남아 내일 가르칠 문제들을 너무나 열심히 예습하고 계시는 모습을 보고 선생님도 저렇게 연구하시는데 나는 더 노력을 해야 되는구나 결심하게 되었다.
나는 원래 수학에 취미가 없어 어정쩡한 상황이었는데 졸업 때쯤 되니 수학이 제일 재미있어지는 게 아닌가. 나도 놀랐다. 아니 내가 제일 좋아하고 자신이 생긴 과목이 수학이라니…….
그래! 그러면 목표를 높여 잡자하고,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을 목표로 열심히 노력하여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수의대 입학 담당교수님이 하루는 ‘이각모, 야 너는 공대에 갈 걸 그랬어’, ‘왜요?’ ‘네 수학 성적이 아주 좋더구나.’ 하는 게 아닌가. 그 후 대학 때 수학학원 강사도 하고 과외선생도 하면서 대학 과정을 마치는 밑천이 되었고 사회에 나와 사업을 하면서 수학의 응용이 이렇게 내게 큰 영향을 미칠 줄 몰랐다.
선생님 눈시울이 붉어지는군요. 죄송합니다. 생전에 다시 뵙지도 못하고 제 성의가 없어 사람노릇을 못했군요. 동문회 때 모교에 계셨던 선생님들 중 몇 몇 분을 즐겁게 모시고 있습니다만 그때마다 선생님을 모실 수 없어 한이 됩니다. 제가 제일 존경해 온 노정현 선생님 영면하소서.
포천일고, 모교를 생각하며
오영근(10회, 전(前)포천중학교장)
사람이 태어나서 일생을 살다 보면 그 역정의 굽이굽이에 희로애락이 얽힌 성장 발달의 과정을 겪지만, 우리 포천일고등학교는 정말로 파란만장의 과정과 눈부신 발전을 하고 국가발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자부한다.
내가 학교를 다닐 때는 1960년대 초반기니까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크게 격동하는 시기였다. 일제의 압박에서 해방, 그리고 전쟁, 4․19혁명 등의 커다란 영광과 시련을 겪었다. 그런데 지금 돌이켜 보면 어려웠었다는 생각보다는 애잔한 그리움을 느끼게 하는 성장기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는 중학교, 고등학교가 함께 있었고 남학생, 여학생이 한 울타리 안에서 학급을 달리하여 공부를 했고 한반 식구도 60여명이 넘는 교실이었다. 그런 과정에서도 굳세게 자란 우리들은 포천의 기둥이 되고 아니, 한국의 동량들이 된 것이다. 교실에서 담배 피우다 걸려서 선생님께 혼난 녀석들, 연애 걸다 걸려서 망신당한 녀석들, 공부 안 해 낙제 당한 녀석들, 그래도 지금은 어엿한 한 가정의 주인이고 우리 한국의 기둥이 된 것이다.
나는 포천 사람이라는 것이 좋다. 포천이 고향이라는 것이 정말 좋다. 그리고 포천일고를 다녔다는 것이 정말 자랑스럽고 대단한 일이다. 학교의 역사는 60년을 넘어 100년으로 치달리고 있다. 고등학교 시절은 그 사람이 성인으로 성장하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흔히 예술의 창조를 신이 인간을 창조하는 과정에 비유하는 경우가 있다. 학교는 그 학생에게 숨(정기)과 지식과 지혜, 용기를 불어 넣고 키우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정신, 그의 생각, 그의 모든 것을 웅대하게 키우는 시간들인 것이다. 얼마나 숭고하고 의미 있는 일인가?
사랑하는 모교의 60년을 맞으며 조그만 생각을 해 본다. 우리는 포천일고의 역사의 주인이고, 증인이고, 앞으로는 모교의 밑거름이 되어야겠다.
자랑스러운 포천일고 인이여! 영원하라. 그리고 포천일고등학교에 무궁토록 발전이 있을 지어다.
자랑스런 학교 깃발
개교 60년을 회고하면서
윤영창(12회, 전(前)동문회장)
반월산 기슭에서 순진무구(純眞無垢)한 어릴 적 친구들과 아름답고 소박한 꿈을 키워준 모교가 해가 바뀌고 세월이 흐르는 동안 오랜 연륜이 쌓여 1만 4천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게 되고 필자도 고등학교를 입학한 지 반세기가 흘렀습니다,
이러한 연륜과 전통에 걸맞게 많은 선배동문들께서 사회 각 분야에서 중추적인 역할들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짧은 인생의 여정에서 간과할 수 없는 학창시절에 추억과 동문 간에 인연을 돌아보면 한해, 두해 세월이 거듭할수록 아쉬움과 만감이 교차합니다.
어느 시인은 “하늘에는 별이 있고 땅에는 꽃이 있고 인간의 가슴에는 사랑이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보면 반갑고, 만나면 즐겁고, 생각하면 보고 싶은 것이 동문들일 것입니다. 우리 고향의 미래이며 주역인 후배들이 선배들보다 더 훌륭한 동문들이 배출되었을 때 선배들 가슴속에도 뿌듯한 자부심과 긍지를 느낄 수 있을 텐데 그것은 동문 임원들만의 노력으로는 한계가 있고 모두가 많은 관심과 성원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필자가 1964년 고등학교를 입학할 당시에는 교통편이 좋지 않아 등하교거리가 9킬로미터나 되는 먼 거리를 도보로 통학하면서 중학교 당시에는 학교 앞 교량이 징검다리이고 그후 세월교 형식으로 비만 내리면 수업을 중단하고 포천천을 건너 조기에 수업을 중단하는 것이 비일비재 하였었습니다. 수원산에 전교 학생이 토끼사냥하면서 그물로 토끼몰이를 하다보면 몇 마리씩이나 포획하는 등 마음껏 뛰어놀았던 것이 더 좋았던 것으로 기억에 남습니다.
당시에는 선후배사이 기강을 잡는다 하여 선배가 동료 학생을 집단 구타하여 다시 볼 수 없는 세상으로 떠나보내는 등 아픈 추억도 아물거립니다.
요즘은 학생들이 스승을 폭행하고, 학부모가 학교에 찾아와 자기자식을 편들어 스승을 폭행하는 등, 스승이 수난을 당하는 세태가 만연됐지만 우리가 다닐 때는 선생님에 대한 예절은 공경의 표상이 되어 “군사부 일체(君師父一體:군주와 스승, 부모는 같은 위치에 있다.), 사영부답(師影不踏:스승의 그림자는 밟아서도 안 된다.)이라는 존엄성을 견지하던 시대가 아니었나 기억합니다. “꽃을 보면 아름다움을 배우고, 선생님을 보면 위대함과 존경을 배운다.”라는 한결같은 생각으로 학생과 은사님의 만남을 통해서 진로도 큰 영향을 미치는 시대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시에는 동기생들도 나이가 제각각이어서 졸업하면서 그해에 혼인을 하는 기이한 일이 흔하였고, 고3 담임 은사와 결혼한 동창에 대한 기억도 지금은 아련한 추억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가사 형편이 좋지 않던 친구들은 중학교에서 고등학교 입학하려면 한두 해 휴학기를 맞이하고 볼펜이 없어 잉크로 글씨를 쓰면서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석유 등잔불로 집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이 다반사였을 것입니다.
살기 바쁘고 누가 나서지 않았던 우리 기수 동문을 2005년경 재소집을 하여 모임을 개최하였더니 오랜만에 만난 모임이라 아쉬워서 쉽게 헤어지지 못하고 저녁 늦도록 한담을 즐기면서 깊고 묵은 향기가 나는 오래고 정든 이야기의 꽃을 피우며, 어느덧 서로가 마음을 통하고 뜻을 공감하는 따뜻하고 마음 뿌듯한 시간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그동안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 동창들의 소식을 접하면서 여러 친구들이 유명을 달리하고, 건강이 좋지 않아 부자유스런 모습을 보고 매우 안타까웠던 시간도 흘렀습니다. 세월이 흐르면 아쉬움이 남는 것은 당연하지만 아쉬움을 추억으로 바꾸고, 그 추억을 이야기하며, 서로 위로하고 격려할 수 있는 사이는 그래도 동창뿐인가 생각합니다.
바쁘고 숨 가쁘게 살면서 지금까지 지나온 발자취를 더듬을 겨를 없이 지내 왔지만 이제는 여유를 가지고 어렸을 때의 모습이 더욱 생각나게 하는 나이에 접어들었습니다.
개교 60년을 맞이하는 지금은 우리의 자식을 이어 손자들이 모교에 입학할 때가 되었습니다. 동문들의 사회적 역할도 중요하지만 동문 후배에 대한 애정을 갖고 모교를 명문으로 육성하는 것이, 곧 우리지역을 사랑하는 것이고 우리 자손들을 사랑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평소, 지역과 모교, 동문을 위하여 빈자일등(貧者一燈)의 작은 정성과 관심을 갖도록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응답하라! 1973 포천종합고등학교
서재원(19회, 전KBS편성센터장)
요즘 인기리에 방송되는 드라마 시리즈로 ‘응답하라 1994!’, ‘응답하라 1997!’ 등과 같은 ‘응답하라 시리즈’ 드라마가 있다. 성동일, 고아라, 유연석, 정우, 이일화가 출연하는 리얼리티 TV 드라마로 1990년대 서울 신촌에 있는 대학생 하숙촌과 대학 캠퍼스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학생들 사이의 일화와 사회적 이슈들을 2010년대 복고적 시각으로 들여다보는 드라마이다.
당하게 당시의 비판적 시각과 현대의 동조하는 시각을 버무려 집어넣고, 지금과는 좀 다른 캠퍼스 풍습(?)들과 젊은이들의 70년대 러브 스토리, 정서를 함께 담고 있어 흥미를 배가시키는 드라마이다.
그런데, 이 드라마가 인기를 얻는 배경은 시청자들의 단순한 복고적 정서 때문만이 아니라 그 시대 정신과 감성이 지금과 비교하면 훨씬 순수성, 진실성에서 농도가 짙고, 문명적 측면에서 보면 눈부시게 발전한 지금의 대한민국의 기본 원동력을 찾을 수 있고, 아울러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으로 삼고 싶은 공감대가 깔려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제목의 배경에 대한 서언이 매우 길었는가 싶다.
포천일고 전신인 ‘포천종합고등학교’의 1970년대로 들어가 봅니다.
# 1973 11월, 인천 예비고사 보기 직전의 우리들
지금의 대학수학능력시험과 유사한 시험은 1970년대에도 있었다. 이른바 대학입학예비고사이다. 수능시험과 다른 점은 당시의 예비고사는 합격자만이 대학 본고사를 치를 수 있어 시험 보려는 대학이 위치한 권역의 예비고사를 통과해야 한다는 점과 경기도의 경우 모든 수험생들이 수원시와 인천시에 양쪽에 모여 예비고사를 치른다는 점이다.
1973년 11월 어느 날 포천읍내, 내일은 인천에서 예비고사 소집이 있어 수험생들은 모두 아침 일찍 전세 버스를 타고 출발해야 하기 때문에 집이 읍내에서 떨어진 학생들은 친구나 친척집에서 신세지는 수밖에 없어 밤거리는 포천종고 수험생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나도 친구 집에서 기거할 수밖에 없었다. 여장을 풀고, 모이기로 약속된 친구네 집으로 가니 7-8명의 동급생들이 집결하여 있었다. 수험생들의 긴장된 모습은 전혀 볼 수 없었고, 즐거운 수학여행을 떠나기 전야의 들뜬 분위기였다. 시험 이야기를 꺼내는 아이는 없었다. 우리는 처음 맛보는 맥주 한 잔과 함께 마치 체육대회에 출전하는 선수들처럼 파이팅을 외쳤고, 밤이 늦도록 엉뚱한 이야기를 중얼거리며 포천 읍내 거리를 헤매었다. 어려운 집안 형편을 뻔히 알면서 대학 가겠다고 고집 세우는 비슷비슷한 사정과 공부 실력을 가진 우리들 대부분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 진로에 대한 고민, 집안 사정 등으로 머릿속이 어지러웠지만 어른스럽게도 짐짓 외면하고 있었다.
인천 인일여고(?)인지 하는 학교에 가서 시험을 치르고 난 후, 예비고사 이야기를 꺼내는 아이는 없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결코 시험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중학교 입학시험, 고등학교 입학시험, 대학 예비고사, 대학 본고사를 치러야 하는 동급생들, 대부분은 포천이라는 농촌의 어려운 집안 태생으로 시험을 통과해도 속 시원한 앞길이 보이지 않았던 우리들의 1973년은 빠르게 겨울로 접어들었고, 대부분 본고사에서 고배를 마신 채 포천종합고등학교를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번민과 시련, 그것에서 비롯한 나름대로의 미래에 대한 선택은 어렵게 이루어졌고, 40년이 지난 오늘, 너무나도 달라진 모습으로 그 시절을 회상하며 포천일고 60년을 맞고 있으니 감회가 새롭다.
“응답하라! 1973년 겨울을 함께 맞았던 포천종고 동급생들이여” 우리는 그렇지 않았는가?
* 1973년 예비고사는 ‘서울시와 9개’도를 합해 모두 10개 권역으로 나누고 그 중 2개를 지망권역으로 선택, 예비고사를 치러 합격한 권역의 대학만 지원할 수 있었다. 예비고사는 일정 권역의 4년제 대학시험을 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는 시험이었다.
# 1973, 포천종합고등학교 교련 수업 단상
제일 싫어하던 과목이 교련 수업이었다. 교련 수업의 하이라이트는 교련 검열이었고, 또한 교련 검열의 백미는 시도별로 실시되었던 교련 실기대회였다.
교련모는 교모를 그대로 사용했지만 교련복은 군복이나 다름없었다. 교련복 정장은 반짝거리는 철제 학년 표식을 얼룩무늬 교련복 양 옷깃에 달고 바지 양 끝단에는 고무줄을 넣어 단정하게 접어 넣고 각반을 찬 모습이었다.
학교에 군대 편제를 도입해 간부들을 대대장, 연대장 등으로 호칭하였다. 주 2시간씩 들어있는 교련수업은 제식훈련, 총검술, 화생방 등 초보 군사훈련과 이론 교육을 내용으로 하였다. 군사훈련은 장교 출신의 교관과 하사관 출신의 조교가 맡았다.
해병대 출신의 교관은 흡사 독일 장교와 같은 표정으로 학생들을 윽박질렀고, 가장 학생들에게 원성을 샀던 것이 교련복 검열이었다. 엄격한 교련복 검열은 등교할 때 교문과 수업시간 시작할 때 구타, 기합과 함께 엄격하게 이뤄졌다. 학생들 중 상당수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 교복 외에 교련복 견장, 각반, 표식, 명찰 등등을 구비하기가 버거웠다. 수업료를 조달하기에도 힘들었던 집안 형편의 학생들로서는 고욕이었다. 급기야는 이로 인한 불만이 쌓여 교련 교관에 항거(?)하는 선량한 악동들의 거사가 일어나 1973년 포천종합고등학교에 작은 파장을 일으켰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당시 학생들이 가장 힘들어 한 것은 교련 검열과 실기대회 대비 수업이었다. 초가을 오후 뙤약볕 아래에서 교관님이 만족할 때까지 열병식, 제식훈련, 총검술 훈련은 거듭되었다. 18살 어린 나이의 학생들은 신체를 옥죄이며 이러한 끝 모를 군사 훈련을 왜 받아야 하는지 몰랐고, 그냥 고통스러울 따름이었다. 교련 수업은 90년대에 들어서야 겨우 폐지되었다.
“응답하라! 1972년 동급생들이여, 그 때 작은 거사를 기억하는가?”
人生 逆轉
유장현 (22회, 국방부 이사관)
먼저 포천일고등학교 개교 60주년을 졸업생의 한사람으로서 진심으로 축하하며, 고향 포천시와 모교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저는 포천일고등학교 22회 졸업생 유장현입니다. 태어나고 성장한 곳은 신북면 기지1리(틀못이)였으며, 신북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포천중학교를 거쳐 1974년 3월 5일 포천일고등학교에 입학하였고, 1977년 2월에 졸업하였으니 졸업한 지도 벌써 36년이 넘었습니다. 고등학교을 졸업하고 지금까지 객지 생활을 하면서 포천인이고, 포천일고등학교 출신이라는 자부심을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누구나 그러하였듯이 저도 꿈 많았던 중·고등학교 시절이 있었지만 실천이 부족하여 후회가 많았던 학창시절을 보냈습니다.
1971년 1월에 실시한 포천중학교 입학시험에서 생각지도 못했는데 24회 중학교 입학생 중에서 수석합격을 하였으며, 장학생이 되어 오치성(당시 포천지역 국회의원) 장학금을 수상하면서 개인적으로 꿈도 많았고 선생님들과 주위 사람들로부터 주목과 촉망을 받았던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골과 농촌의 가정환경을 탓하고 포천시내에 살면서 공부에만 매진하는 친구들을 부러워하였으며, 학업을 게을리 한 결과 한때는 고등학교 입학시험이 두려웠었고, 원하는 대학은 꿈도 못 꾸면서 보낸 학창시절이 지금 생각해도 후회만 됩니다.
당시 저희집 가정 형편은 학생인 제가 농사일을 안 거들어도 될 만하다고 생각되는데 부모님은 틈만 나면 집안일과 농사일 돕기를 바라셨으며, 중학교 2학년 여름에 증조할아버지(할아버지는 6.25사변 시 전사하시어 不在)께서 갑자기 돌아가신 이후, 집안에 자금(돈)줄이었던 소 한 마리 키우는 일은 제 차지가 되었고, 학교 다녀와서 소풀(꼴) 한 지게 베는 일은 기본이 되어 방과 후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늦게 집에 오면 소가 굶을 형편이었으며,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는 아침·저녁으로 소여물(죽) 끓이는 일과 주기적으로 소 외양간 두엄 치우는 일 등도 제 일이 되었습니다. 또한 이른 봄부터 주말만 되면 모심는 일, 열무·배추 심는 일, 밭 매는 일, 논에 피 뽑는 일, 벼 베는 일, 사방 공사 참여하는 일, 심지어 겨울에는 땔감 나무 준비하는 일 등 제가 거들어야 하는 일이 빈번하였습니다. 요즈음 학생들에게는 생각지도 못하는 일이지만 그때는 그러하였으며 학생이고 청소년이라는 이유로 피하고 거절할 수도 없을 만큼 아버님의 위엄은 절대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도 중학교 입학시험에서 수석 합격했었다는 자부심과 주위사람들의 묵시적인 기대심 때문에 누구보다도 공부를 열심히 하고 싶었던 저로서는 그 당시에는 농사일과 집안일 거들기를 바라시는 부모님을 이해할 수 없었고 지금 모두 생전에 안 계시지만 부모님을 많이 원망하였으며, 반항심만 커져서 점점 더 공부하고는 담을 쌓아가면서 미래에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은 꿈도 서서히 멀어져만 갔고 주위사람들의 기대심도 외면하고 말았습니다.
원하는 대학은 생각지도 못하게 되었고 현실도피 개념으로, 더 솔직히 말해서 고향에 남아있으면 농사꾼이 될 것 같아서 고등학교 3학년 가을에 교정 게시판에 붙어있는 공군 제2사관학교 모집요강을 보고 시험에 응시하였으며, 합격하여 생도생활을 거쳐 공군장교 생활을 하였고, 29년 1개월 동안 공군에 복무 후 중령으로 전역하였습니다. 그 이후 기회가 되어 전국에서 1명을 특채하는 국방부 부이사관 채용 시험에 합격하여 금년 말에 이사관으로 승진하였습니다. 학창시절에 초라하게만 여겨졌던 인생이 역전되어 군무원으로서 최고의 자리까지 승진하게 된 것입니다.
돌이켜 회상하면 학창시절에 가정·학교·농촌 환경을 탓하면서 공부에 매진하지 않았고, 어떠한 경우에도 본인과 미래를 위해 공부를 한다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 했어야 함에도 어린 그 당시에는 마치 부모님을 위해 공부하는 것으로 착각하여 공부를 게을리 하고 부모님을 원망했었습니다. 성인이 되고서야 잘못되었음을 깨달았으며, 그것을 후회하면서 지금까지 보내온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학창시절에 더욱 열심히 공부하였더라면 원하는 대학도 진학하였을 것이고 조금 다른 차원의 인생을 살아오지 않았을까도 생각하면서 많은 후회를 하였습니다. 성인이 되어서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고서는 언제 어디에서나 최선을 다하면서 불철주야 노력하였습니다. 성실과 최선의 노력은 보상을 해줍니다. 현재 국방부 이사관직에 오르게 되어 인생역전을 경험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성실과 최선의 노력의 결과물입니다.
마지막으로, 한창 학교공부에 매진해야 하는 중·고등학교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공부도 때가 있는 것이니, 집안·주위 환경 탓하지 말고 본인보다 열악한 환경 아래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고 생활하는 사람이 되어 달라는 것입니다. 또한 부모님이나 누구를 위해 공부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오직 본인의 인생을 위해 공부하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학교졸업 후 후회하지 않도록 학교생활과 공부에 최선을 다해주길 바랍니다.
속찬 알곡! 23회 친구들
양호식(23회, 법무사)
23회는 1975년에 포천종고를 입학하였다. 그 당시 포천은 서울과는 단절된 외딴섬과 같은 곳이었다. 높은 축석령은 서울과 포천의 문물교류를 더디게 하였다. 포플러나무가 심어진 편도 1차선의 43번 국도를 따라 마장동 가는 버스를 타야 간신히 서울에 갈 수 있었다. 참고서를 구입하고자 하면 돈도 넉넉하지 않았지만 서점에 비치한 책도 한정되었으므로 청계천 헌 책방을 찾곤 했다. 입학한 지 얼마 안 되어 친구 몇몇이 의기투합하여 청계천에 올라가 즐비하게 쌓아놓은 헌 책 속에서 필요한 책을 찾아낼 때에 큰 기쁨을 맛보곤 했었다. 그 당시 입시정보를 알기가 어려워서 어렵게 구한 ‘진학’이라는 잡지를 돌려가며 읽기도 하였다. 간간이 서울에 진학한 친구가 주말에 내려오면 그 입을 통하여 서울학생들의 공부하는 모습을 들을 수 있었다. 방학이 되면 친구들은 단과반 강의를 들으려고 짐을 싸서 서울에 올라가 독서실에 진을 치기도 하였다. 정통종합영어와 정석수학참고서를 강의하는 단과반이 큰 인기를 끌던 시절이었다. 분지의 지형처럼 주위와 고립된 포천의 교육환경은 충분하지 못했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선생님들께서 열심히 지도해주셨다. 서울대를 나오신 곽순명 교감선생님, 김성태 수학선생님, 최완근 물리선생님이 계셨다. 다른 학교에 비해 서울대출신 선생님들이 많으셨던 것을 보더라도 포천종고의 위상을 느끼게 하였다. 최완근 선생님이 연탄가스로 순직하신 것은 가슴 아픈 일로 기억되어 묘소를 관리해드리고 있다. 1학년 담인선생님이셨던 정구민 선생님은 음악을 가르쳐 주셨다. 정선생님은 학구열이 학생보다 크셔서 영어원서를 공부하시면서 우리들의 학습욕구를 자극해주셨다. 민완식 생물선생님은 유머가 많으셔서 늘 웃음을 선사해주셨다. 민선생님은 칠판 빼곡히 판서를 하시면서 입에 침이 마르실 정도로 열정적이셨던 기억이 새롭다. 상업을 담당하셨던 이상기 선생님은 공인회계사시험을 준비하시면서 공부를 게을리하는 우리들을 채찍질 해주셨다. 고등학교 1학년 2학기 무렵에 서울에서 이기석 수학선생님이 부임해오셨다. 이선생님은 정신여고 교감선생님을 역임하셨으나 공립학교로 전직을 하시면서 포천종고에 평교사로 부임하셨다. 그 당시 수학참고서를 저술까지 하신 분이라 수학실력이 탁월하셨다. 학생들이 선생님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선생님은 우리들이 ‘석두’를 마구 흔들어놓으셨다. 이선생님은 우리들에게 늘 “Naver Give up!(포기하지 말라!)"를 외치시며 부단한 노력을 강조하셨다. 박카스 선생님이라는 별명을 지니신 이영일 국사선생님도 계셨다. 수업을 시작하시기 전에 박카스 한 병을 드셔야 할 정도로 박카스를 유별나게 좋아하셨다. 모교 출신 선생님도 여러 분 재직하셨다. 그 선생님들은 대선배님이자 아버지같은 분이라서 특별히 엄하게 가르치셨다. 농업과목의 연봉흠 선생님(1회), 사회윤리과목의 홍운표 선생님(3회), 영어과목의 강풍길 선생님(3회), 농업과목의 이주칠 선생님(6회)이 선배님이셨다. 홍운표 선생님은 후배들의 발전을 재촉하시며 일탈을 막으시려고 애쓰셨다. 홍선생님은 원칙을 강조하시면서 다함께 잘되기를 기원하시던 모습이 선하다. 강풍길 선생님은 특히 ‘강빳따’ 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엄하게 영어를 가르쳐 주셨다. 그 당시 암기한 것이 지금도 기억될 정도로 빳따의 위력이 대단하였다. 이주칠 선생님은 작은 실수라도 있으면 ‘따시’라는 말씀을 하시곤 하여 별명이 되기도 하였다. 출신대학 때문에 우스운 별명을 가지신 선생님들도 계셨다. 중앙대학교 출신 선생님들은 성에 ‘뻥’자를 붙여 ‘○뻥’이라고 불리곤 했다. 민완식 선생님, 홍운표 선생님, 조석호 선생님, 장명섭 선생님들이 중앙대 출신이셨다. 학생들이 악의적으로 별명을 부른 것은 아니지만 들키면 호되게 벌을 받기도 하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선생님들의 열정에 비추어 우리들이 충실하게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공부를 못한 것을 통감하게 된다. 하지만 23회 친구들은 학교생활을 다양하게 하였다. 축산과가 1반, 상과가 2반, 인문과가 3·4·5반이었다. 공부를 하고자 하는 학생은 교실과 독서실을 오가며 책과 씨름하였다. 운동을 즐기는 친구들은 축구동아리, 야구동아리를 만들어 원정경기를 다니기도 하였다. 그 당시 학교운동부가 럭비부와 역도부가 있었다. 럭비부는 포천중학교 때 소년체전 준우승을 한 팀이라서 실력이 월등하였지만 생활환경이 어려워 꽃을 피우지 못한 것이 아쉽다. 취업을 목표로 하는 학생들은 취업 시험에 맞추어 준비를 하였다. 그 당시 대학에 진학하는 친구들은 많지 않았다. 실력이 부족하기보다는 가정형편이 뒷받침이 안 되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취업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30년이 지난 시점에서 23회 친구들을 돌아보면 모두 자기 일을 찾아 열심히 살고 있다. 학교 졸업 후 포천군청 공무원이 된 친구가 20명이 넘었다. 공부에 열의가 있었지만 대학을 진학하지 못하는 친구들은 공무원이 되고자 했다. 아무리 9급 시험이라고 하지만 많은 인원이 시험에 합격한 것은 자랑스런 일이었다. 공무원 친구들은 현재 포천시청 중요한 직책을 맡아 시정을 뒷받침하고 있다. 23회 졸업생 중에는 의사 친구도 있다. 한치과를 운영하는 한정현은 어려운 여건에서도 치의대에 입학하여 치과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박사학위를 받은 친구들도 2명이나 된다. 정성학은 산림학분야에서, 정광진은 농화학분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축산분야에서 종사하는 친구들도 여럿 있다. 한때 이치한은 양돈업을, 윤홍헌은 양계업을 전국적인 규모로 하였었다. 양돈업을 하던 양기원은 포천축산업협동조합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목회자의 길을 걷는 친구도 있다. 미국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이기섭, 국내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지동민, 김태완, 김두영이 목사의 길을 걷고 있다. 불교에 조예가 있는 승광익은 공무원생활을 하면서 불교를 심도있게 연구하여 친구들 모임 때마다 설법을 해주곤 한다. 1학년까지 함께 다닌 최병훈은 고대 법대를 나와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문학에 관심이 많았던 김성진은 시인으로 등단하여 주옥같은 시를 쓰고 있다. 김시인이 포천의 시화(市花)인 포천구절초를 제목으로 쓴 시는 유명하다. ‘포천구절초’를 함께 소개하고자 한다. 필자는 법원행정고시를 합격하여 법무사를 하면서 나름대로 지역사회에 양질의 법률서비스를 제공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한정된 지면에 모든 친구들의 실명을 거명할 수 없지만 23회 친구들은 속이 옹골찬 알토란처럼, 튼실하게 여문 아람처럼 자기 역할을 다하면서 지역사회의 일원으로 생활하고 있다. 또한 동문회에도 ‘뭉치기를 잘하는 23회’라는 칭찬을 듣고 있다. 선생님들의 열정어린 가르침을 토대로 끊임없이 인내하며 노력해온 과정이 속찬 알곡같은 23회 친구들을 만들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