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월 상순(10수)
하루시조091
04 01
귀밑이 세었으니
무명씨(無名氏) 지음
귀밑이 세었으니 남이 늙다 하려니와
내 마음 젊을선정 남의 말 허물하랴
꽃과 술 좋이 여기기야 어떤 노소(老少) 있으리
귀밑 - 뺨에서 귀에 가까운 부분. 주로 붉어지다, 달아오르다 라는 표현으로 사람의 감정이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여기서는 귀밑머리, 살쩍을 말하고 있습니다.
세다 - 머리카락이나 수염 따위의 털이 희어지다. 나이가 들었다는 말의 다른 표현입니다.
젊을선정 – 젊다할망정.
허물하다 - 허물을 들어 꾸짖다.
좋이 – 좋다의 부사형.
사실을 사실대로, 보이는 대로 말하는 이를 탓할 수는 없으나 귀밑이 세었다고 마음까지 늙지는 않았노라 강변(强辯)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종장에는 꽃과 술을 좋이 여기는 데야 어떤 노소 구별이 있을 수 있느냐 한 마디 더 못을 박습니다.
꽃과 술을 예로 드는 품새가 술과 색(色)을 가져다 놓는 일반적인 표현보다는 한결 청순합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092
04 02
꽃 지고 속잎 나니
무명씨(無名氏) 지음
꽃 지고 속잎 나니 녹음(綠陰)이 다 퍼졌다
솔가지 꺾어내어 유서(柳絮) 쓰리치고
취(醉)하여 겨우 든 잠을 환우앵(喚友鶯)에 깨괘라
유서(柳絮) - 버들개지.
쓰리치고 – 쓸어 치우고.
환우앵(喚友鶯) - 꾀꼬리가 제 벗을 부르는 소리.
하루가 다르게 푸르러지는 봄날의 정경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버들가지를 쓸어 치우는 목적은 술에 취해 누울 자리를 고르는 데 있습니다.
봄날의 취흥(醉興)을 읊었습니다. 술에 취할 수 있으니 작품 속의 주인공은 그래도 한량(閑良)입니다. 이제 4월초인데 날씨는 5월 기온을 보이고 있습니다. 근래 몇일간은 비가 와서 좀 수그러들긴 했지만요. 짧아진 봄에 ‘불에 데인 듯’ 백화만발(百花滿發)입니다. 행여 꽃도 못 피우고 새잎이 나버리면 어쩌나 싶은 모양이지요. 꽃으로 유명한 전국 여러 명소들의 꽃축제가 접부채처럼 겹쳐 진행됩니다. 숲에는 아직도 무심하게 나목(裸木)으로 졸고 있는 나무들이 더러 있지만 게으름 잘 피우는 모과며 대추며 회화나무들도 모두 새잎이 나왔습니다.
녹음이 다 퍼져가는 시절을 건강하게 맞이하시길 빕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093
04 03
내 사랑 남 주지 말고
무명씨(無名氏) 지음
내 사랑(思郞) 남 주지 말고 남의 사랑(思郞) 탐(貪)ㅎ지 미소
우리 두 사랑(思郞)에 잡사랑(雜思郞) 행(幸)여 섞일세라
일생(一生)에 이 사랑(思郞) 가지고 괴어 살려 하노라
괴다 – 특별히 귀여워하고 사랑하다.
자신의 사랑을 지키며 살겠노라는 다짐을 노래했습니다. 우리 말 ‘사랑’을 한자로 표기한 점이 특이합니다. 남 주지도 말고 탐하지도 말자. 옳은 말입니다. 누가 둘 사이에 끼어들어 잡탕이 되어도 안 된다는 말도 옳지요.
사랑, 생각 사(思) 사내 랑(郞). 규수(閨秀)의 입장에서는 그런대로 의미가 통하는 표기(表記)입니다만. 이 노래의 작자가 남자라면, 사내 대신 아가씨 랑(娘)으로 바꿔 쓸 수도 있으려나요.
잡(雜)사랑이라니요. 섞일 잡이니, 둘 사이만이라면 순(純)사랑이고, 다른 사랑이 섞이면 잡사랑일 터인데, 흔히 ‘삼각관계(三角關係)’가 주는 골머리 아픔에 대한 지레 절음입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094
04 04
누운들 잠이 오며
무명씨(無名氏) 지음
누운들 잠이 오며 기다린들 님이 오랴
이제 누웠은들 어느 잠이 하마 오리
차라리 앉은 곳에서 긴 밤이나 새우리다
하마 - 바라건대. 또는 행여나 어찌하면.
잠과 님, 님 다음에 오는 잠이 꿀잠이겠습니다만, 어디 뜻대로 되던가요. ‘~ㄴ들’이 생겨나게 하는 운률이 재미있습니다. 오며, 오랴, 오리 등으로 구절 끄트머리를 닫음한 기술도 운율을 지어내는 맛깔스런 작법입니다.
중장의 ‘앉은 곳에서 긴 밤을 새우는’ 상황은 초장에서 이미 ‘누운들’ ‘기다린들’하면서 시간을 많이 써버린 다음의 상촹입니다. 생체 리듬이라는 게 예민한지라 밤 시간이 지나면 새벽 시간에 참을 청하기 아주 어려워지니까요.
‘잠’은 ‘물’과 ‘공기’에 이어 새로운 판매목록이 되었다는 게 현대판 ‘봉이 김선달’들의 예견입니다. 잠은 자신의 의지로 ‘자는’ 게 아니라 은혜로움에 힘입어 ‘드는’ 것이라는 선견(先見)의 말을 곧이듣게 되는 요즈음입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095
04 05
늙고 병든 몸이
무명씨(無名氏) 지음
늙고 병(病)든 몸이 초당(草堂)에 누웠으니
청풍(淸風)은 문(門)을 열고 명월(明月)이 방(房)에 든다
두어라 청풍명월(淸風明月)이 내 벗인가 하노라
초당(草堂) - 억새나 짚 따위로 지붕을 인 조그마한 집채. 흔히 집의 몸채에서 따로 떨어진 곳에 지었다.
맑고 한가로운 처지를 노래했습니다. 병이 들어 현실에서 벗어나게 되었음을 싫다 하지 않고 자연 속에 친구로 지내게 되어 다행이라고 하는군요.
중장의 청풍과 명월이 종장에서 만나 청풍명월이 되는 수식구조가 매우 단순하군요.
나이가 들면 병이 따라 다닌다는군요. 아무리 백세시대라고 해도 병과 더불어 친구사이로 지낼 수밖에 없겠지요. 지금보다는 훨씬 덜 살았던 시절의 ‘늙고 병든 몸’이 ‘초당’에 들고 나서 자연과 벗하는 내용의 이 노래를 안분지족(安分知足)이라 해도 좋겠습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096
04 06
님의 얼굴을 그려
무명씨(無名氏) 지음
님의 얼굴을 그려 벼맡에 붙여 두고
앉으며 일며 만지며 이른 말이
저 님아 말이나 하려문 내 안 둘 데 없어라
벼맡 – 베게 가까이.
일며 – 일어나며.
이른 – 이르는, 여쭙는.
안 – 속. 마음.
님을 그리는 절절함이 행동으로 말로 뚜렷이 드러난 작품입니다. 사진도 없던 시절, 솜씨 좋아 직접 그렸든지 거금 들여 초상화가에게 맡겼든지 베개맡에 붙이는 일부터가 쉬운 일은 아닐진대, 앉을 때나 일어날 때나 또는 어루만지면서 하소연하기를 “봐라 임자야, 말 좀 해보그레이.” 한다는 것이니, 참말로 눈물 나는 정황 아닙니까.
‘벼맡’이나 ‘일며’는 입말을 들어 줄임말로 사용한 언어구사력이 돋보이고, 종장 끝의 한 음절 우리말 어휘 네 글자의 나열 또한 대단한 표현력입니다. 음수율을 따지는 정형시에서 의미를 지닌 한 음절 어휘나 접사 등은 시조 작법에 있어서 중요한 기술입니다. 저는 일찍이 국어사전에서 이것들을 탈탈 털어내서 한 권의 자료집으로 만들어 사용하고 있답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097
04 07
님이 떠나실 때에
님이 떠나실 때에 삼월(三月)달로 오마ㅎ더니
묻노라 목동(牧童)들아 삼월(三月)달이 어느 때냐
저 건너 두견이 붉었으니 삼월(三月)인가
두견 – 새를 말할 때는 두견(杜鵑)새요, 꽃을 말할 때는 진달래꽃.
삼월(三月)이 초 중 종장에 고루 등장합니다. 님이 떠나면서 다시 오마고 못박은 때를 강조 강조 또 강조하는 것이지요. 중장에서 목동을 불러 때를 묻는 방식이 돋보입니다. 세 줄 노래에 환유(喚諭)와 설의(設疑)가 조화를 이루고 있어 절창(絶唱)이라 시조창(時調唱)에서도 인기가 많은가 봅니다.
두견이 붉었다고 했으니, 진달래가 활짝 피었다는 얘기이며, 님이 온다던 약속의 춘삼월 다 지나가고 있다는 안타까움의 강조법입니다.
아직은 윤(閏)이월(二月)이죠. 춘삼월(春三月) 앞자락 한 달을 엉터리로 지나고 있습니다.
종장의 끝구는 시조 창법에 의한 생략으로 ‘하노라’ 정도로 읽힙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098
04 08
바람은 지동 치듯 불고
무명씨(無名氏) 지음
바람은 지동(地動) 치듯 불고 궂인 비는 붓듯이 온다
눈 정(情)에 거룬 님을 오늘밤 서로 만나자 하고 판(板) 첩 쳐서 맹서(盟誓) 받았더니 이 풍우(風雨) 중(中)에 제 어이 오리
진실(眞實)로 오기곳 오량이면 연분(緣分)인가
지동(地動) - 지진(地震).
궂인 비 – 궂은비.
판(板) - 신호로 치는 나뭇조각.
맹서(盟誓) - ‘맹세’의 본말.
연분(緣分) - 서로 관계를 맺게 되는 인연.
어제 국립국악원 예악당 공연장에서 들은 시조 작품입니다만, 제 소장 무명씨 작품 목록에는 없어서 특별히 대접하여 올립니다.
젊은 가객 남수연의 창으로 들었습니다. 여창 가곡 평조(平調) 우락(羽樂)입니다. 우락은 우조(羽調) 즉 평조 선법(旋法)에 의한 낙(樂)이란 말입니다. 담담하면서 흥겨운 느낌의 곡입니다.
노래를 음미해보니 만나기로 한 임이 궂은 날씨 때문에 오지 못할 것이라 짐작하면서도 내심 오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눈 정(情)에 거룬 님’은 ‘첫눈 또는 한눈에 반한 님’이겠고요, ‘판(板) 첩 쳐서’가 재미진데, 판에다 적었다는 뜻으로 굳게 맹세했다는 1차적 의미에 더하여, 만날 때 신호로 널판을 짝짝 치기로 했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둘 만 알고 있는 판 치는 소리 ‘짝 짝 짝짝짝’ 정도일까요?
음수율에 아랑곳하지 않는 장형(長型)시조의 맛은 ‘늘어져도 절대 늘어지지 않는 맛’에 있음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종장 끝구의 생략은 시조창법에 따른 것으로 ‘하노라’ 정도로 읽힙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질문드립니다. 판첩의 첩은 무슨 뜻일까요?
글쎄요
'짝'으로 읽히기도 하고
'면 面'으로도 읽히기도 하네요
예리한 질문 감사합니다
달리 해석하시면 올려주시길요
하루시조 099
04 09
도화는 무슨 일로
무명씨(無名氏) 지음
도화(桃花)는 무슨 일로 홍장(紅粧)을 지혀 서서
동풍세우(東風細雨)에 눈물을 머금었노
삼춘(三春)이 쉬운가 하여 그를 슬허 하노라
홍장(紅粧) - 연지를 바른 붉은 단장.
삼춘(三春) - 봄 석 달.
쉬운가 – 쉽게 지나가는가.
아름다운 봄날이 빨리 지나가는 것을 아쉬워하는 노래입니다.
닥 이맘때의 풍광입니다. 이화(梨花) 이화(李花) 도화(桃花) 다 지고 새잎이 연록색으로 꽃 만큼 예쁘게 돋아나고 있으니까요.
복사꽃의 곱고 아름다운 풍경을 홍장하고 서 있는 여인네로 그려냈습니다. 이어서 중장에서는 내리는 봄비에 젖으니 눈물을 머금었구나 하였습니다. 종장은 도화의 대답인 양 직설적으로 가는 봄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라고 적었습니다. 은유와 의인법을 구사하여 친근하게 다가옵니다.
곧 ‘봄날은 간다’ 노랫가락에 시름겨워할 날이 오겠지요.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100
04 10
동산에 포곡새 울고
무명씨(無名氏) 지음
동산(東山)에 포곡(布穀)새 울고 남림(南林)에 창경(倉庚)이 운다
농부(農夫)는 보리를 갈고 촌부(村婦)는 뽕눈을 본다
아마도 태평(太平)한 백성(百姓)은 전가(田家)인가
포곡(布穀)새 – 뻐꾸기. 봄철에 우는 소리가 ‘씨앗을 뿌려라(布穀)'라고 하는 것 같다는 뜻이 들어 있는 표기이다.
창경(倉庚)이- 꾀꼬리.
전가(田家) - 농가(農家).
평화로운 농촌 풍경을 노래했습니다. 뻐꾸기와 꾀꼬리가 우는군요. 한가롭습니다. 농부가 가는 봄보리는 농사요, 촌부가 보는 뽕나무 눈은 양잠입니다. 길쌈은 여성의 몫이었죠.
왕정시대에도 모범을 보여야 했기에, 군왕은 친경(親耕)으로 모를 손수 내고, 왕비는 친잠(親蠶)으로 뽕나무를 손수 쳤습니다. 산업사회로 변한 오늘날은 농가의 풍경이 사뭇 달라졌습니다만, 이 평시조 한 수를 대하는 마음은 지국히 평화롭고, 이제 농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겠구나 짐작이라도 가는군요.
뻐꾸기와 꾀꼬리의 가차(假借) 표기가 이채롭습니다.
종장 끝구의 생략은 시조창법에 따른 것으로 ‘하노라’ 정도로 읽힙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첫댓글 이름은 예나 지금이나 득도 되고 해도 됩니다. 이름 때문에 득도 보지만, 반대로 이름을 감춰야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무명씨 시조 내용의 자유로움은 무명이 득이 되는 경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