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마가복음 수양회 주제1강
말씀/ 마가복음 3:7-35
요절/ 마가복음 3:14, 15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열두 명의 제자를 세우신 이야기입니다. 핵심 내용은 제자의 정체성과 가치관 그리고 새로운 가족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를 세우신 의도와 목적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삶의 이유와 목적을 잃어버린다면 제멋대로의 인생이 되듯이,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인 이유와 목적을 잃어버린다면 제멋대로의 신앙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제자의 부르심도 똑같습니다. 이 시간 말씀을 통해 참된 제자의 모습을 준비하여 험난한 이 시대에 참 목자로 살아가길 기도합니다.
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가시니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따르며”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가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고기 잡으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 바다로 가신 게 아니었습니다.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한발 물러나 한적한 곳으로 잠시 자리를 옮기셨습니다. 권위 있는 새 교훈으로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더러운 귀신 들린 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은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졌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이 가시는 곳은 언제나 사람들로 넘쳐났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요단강 건너편과 또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 많은 무리가 그가 하신 큰일을 듣고 나오는지라” 갈릴리를 포함하여 여러 지역에서 많은 무리가 예수님이 하신 큰일을 듣고 나왔습니다. 요즘처럼 인터넷 기사나 SNS를 이용하는 시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구름 인파가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인기는 날로 치솟았습니다. 네이버가 있었다면 네이버 실시간 검색 1위였을 것이고, 유튜브가 있었다면 급격하게 오르는 조회수로 추천 영상에 도배되었을 것입니다. 자기 PR의 요즘 시대에 대부분 사람은 대중들의 관심과 인기를 얻고 싶어 합니다. 그것은 곧 명성과 돈으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추구하는 목적과 목표를 빠르게 이룰 수 있는 수단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인기와 관심이 쏠린 이때 대중심리(그들이 원하는 것)를 이용한다면 복음 사역이 수월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피하고자 제자들에게 작은 배를 대기하도록 명령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혼잡한 상황을 피하고자 작은 배에 오르셨습니다. 많은 무리가 나온 목적은 병 고침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반면 예수님의 목적은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것이었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말씀처럼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알게 하도록 바쁘게 움직이셨습니다. 더러운 귀신들만이 예수님의 정체와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알 뿐 무리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예수님을 붙잡으려 하였습니다. 마치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 이후 사람들이 예수님을 붙들고자 열광하였던 경우와 똑같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리를 피하셨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온지라” 예수님은 분위기를 전환하고자 산에 오르셨습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산에서 기도하셨다고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시면서 하나님의 뜻과 새로운 영적 방향을 구하셨을 것입니다. 어떤 영적 방향입니까? 예수님은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이 부르셨다는 말씀은 곧 예수님이 선택하셨다는 말씀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의 조건은 단순 명확하였습니다. 예수님 선택의 기준은 단 하나 “자기가 원하는 자”였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자를 부르셨다’라는 말씀은 부르심의 성격에 대하여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주권적인 부르심입니다. 이는 사람의 선행이나 자랑이 무익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외모, 성격, 자격, 능력을 자랑합니다. 다른 사람들과 차별화된 스펙은 선망의 대상이 되고 부러움의 대상이 됩니다. 한마디로 자기 의로움과 자기 영광을 뽐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의로움과 자기 영광을 쌓아야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 성공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취업난이 가중되고 있는 이 사회에서 청년들은 좋은 기업의 눈에 들고 선택을 받으려면 더욱 필요합니다. 그와는 달리 예수님의 부르심은 사람의 인성, 능력, 스펙을 따지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부르심에 나올 수 있는 순종이 필요할 뿐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은혜에 기초한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8~10절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따라서 예수님의 부르심은 후회하심도 없습니다. 흔히 인생은 후회의 연속이라는 말을 합니다. 후회의 대상은 대부분 과거에 했던 행동이나 선택의 순간입니다. 과거에는 최선이라 생각했던 것이 현재에는 최선이 아니었다는 것을 느꼈을 때 후회가 밀려오는 경험을 많이 합니다. 인생은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 더욱 크게 다가옵니다. 어느덧 40대 중반이 되어가는 저는 젊은 시절을 그리워하며 그때 좀 더 잘할걸이라고 가끔 후회하곤 합니다. 그런데 결국 후회는 과거 완강한 자기 중심성에 벗어나지 못한 결과입니다. 상황에 따라 쉽게 마음이 변하고, 세월에 따라 마음이 이리저리 변합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만약 과거, 현재, 미래를 다 알고 있다면 후회는 없을 것입니다. 후회는커녕 늘 최고의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매 순간 하는 선택이 후회가 없는 최고의 선택이 된다면 좋겠지만 인간은 그럴 수 없습니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신 하나님께서는 다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태초에 계셨으며 천지를 창조하시고 생명을 존재하도록 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시공간에 얽매이지 않고 과거-현재-미래에 계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모든 일을 아시고 모든 일에 후회하심도 없습니다. 로마서 11장 29절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우리가 부족하다고 느낄 때, 후회스럽다고 느낄 때도 하나님은 여전히 신실하십니다. 우리의 연약함, 약점과 허물이 많은 자라는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제자들로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이 은혜인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몇 명을 세우셨으며, 세우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12명의 제자를 세우셨습니다. 12명이라는 숫자는 구약의 이스라엘 12지파를 계승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12지파를 통해 이스라엘에 역사하셨듯 예수님은 새로운 시대에 12명의 제자로 새로운 역사를 이끄실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 양성에 효율적인 구성이 되도록 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많으면 분업화가 되어 훨씬 많은 일을 능률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무리 가운데 12명이 아닌 100명, 200명 채용 규모를 늘리고 갈릴리와 유대 등 지역마다 각각 교구를 두어 조직을 확장한다면 사역은 좀 더 수월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능률보다 효율을 택했습니다. 거대한 조직이나 규모보다는 친밀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소수의 공동체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다 같이 읽겠습니다.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예수님께서 제자를 세우신 목적은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2장에서 세관에 앉아 있는 세리 레위를 부르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하시니 즉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세관은 로마 정부가 세금을 거두어들이기 위해 만든 기관이었고, 세리는 세관에서 로마 정부의 세금 징수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세리들은 원래 세금 이상의 과다한 세금을 거둬 그 차액을 취하고 부를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세리들을 죄인, 창기, 이방인과 같이 취급하고 배척했습니다. 세리들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냉대와 무관심의 대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레위가 세리인 것을 아시면서도 친구로 삼으셨습니다. 사람들의 반응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함께하고자 부르신 것입니다. 자신과 함께하신 예수님이 얼마나 감격이었는지 훗날 마태복음에서 마태는 예수님을 임마누엘 하나님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세리 레위가 어떻게 성 마태가 될 수 있었는가 바로 예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많은 믿음의 인물이 나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다윗, 예레미야, 바울 등 성경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님이 함께하신 인물이라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하나의 운명 공동체로 엮으셨습니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동고동락하며 지냈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의 모든 점을 보고 듣고 체득하였을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가르침과 죄인을 향한 심정과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직접 경험한 그들이었습니다. 얼마 전 베드로 목자님께서 말씀 중에 근묵자흑이란 고사성어를 인용한 적이 있습니다. 네이버에서 뜻을 찾아보니 “먹을 가까이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검어진다”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주위 환경에 따라 변할 수 있다는 점을 비유한 말이었습니다. ‘훌륭한 스승을 만나면 스승의 행실을 보고 배움으로써 자연스럽게 스승을 닮게 되고, 나쁜 무리와 어울리면 보고 듣는 것이 언제나 그릇된 것뿐이어서 자신도 모르게 그릇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라고 예시를 들었습니다. 저는 2022년 5월 14일에 동역자를 만나 결혼하였습니다. 결혼한 지도 벌써 2년이 되어갑니다. 저는 ‘부부는 닮아간다’라는 말의 의미를 조금씩 알아가고 있습니다. 결혼 이후 출근 이외에는 우리 부부는 거의 떨어져 본 적이 없었습니다. 별다른 일 없이 집에 있을 때도 같이 있고, 어디 놀러 갈 때도 같이 가고, 함께 하는 게 일상이 되어버렸습니다. 2년간 함께 하면서 생각을 공유하고 대화하고 서로 씨름하는 과정은 우리 부부가 서로를 이해하고 배우는 시간이었습니다. 화성의 남자 – 금성의 여자만큼이나 거리가 있었지만, 이제는 하나가 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습니다. 함께 한다는 것이 때로는 힘들기도 하지만, 끊을 수 없는 사랑의 관계 안에서 하나가 되어간다는 진리의 말씀을 체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의 관계도 이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은 함께 하심으로 제자들을 끝까지 감당하고 키우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를 세우신 목적 두 번째, 보내사 전도도 하기 위해서입니다. 전도는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죄인임을 인정하게 하고, 회개하게 하며,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도록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사역 대부분이 전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실 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기 위해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예수님은 죄로 인해 끊어진 죄인과 하나님의 관계를 회복하는 일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리며 한 영혼에 대한 긍휼한 마음을 가지고 전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이후 제자들에게 부여된 명령이기도 합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이 예수님의 명령대로 어디서든지 언제든지 복음을 전하였듯 우리도 캠퍼스에서, 직장에서, 가정에서 전해야 합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전도에 소극적인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개인주의와 더불어 무사안일주의에 빠져 있는 건 아닌지 다시 생각해 봅니다. 전도를 왜 하는 것일까? 나부터 적용해 본다면 누군가의 전도가 있었기에 제가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습니다. 전도가 없었다면 아마 고집불통에 자기 멋대로 인생을 살다가 허망하게 생을 마감했을 것입니다. 뒤늦게 후회한 들 때는 이미 늦었을 것입니다. 이렇듯 전도는 한 생명을 살리는 거룩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전도는 어떻게 할 수 있는가? 의사가 생명을 살리려면 치열하게 의학을 공부하듯이 목자가 생명을 살리려면 일단 말씀을 제대로 준비해야 합니다. 말씀뿐만 아니라 치열하게 기도하고 준비되어야 합니다. 전도는 저 자신부터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전도하라 하면 항상 주저해 왔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거절당하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결혼 이후 동역자를 통해 가정의 복음화를 위해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동역자는 틈만 나면 양가 부모님, 동생들에게 전도할 기회를 찾았습니다. 그런 동역자의 모습을 보며 산 소망 예수님을 몰라 무심히 흐르는 세월 속에 점차 나이 들어가는 가족들이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친인척의 부고 소식에 죽음이 남의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미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수고하고 처절하게 살았는데 그 끝이 죽음밖에 없다면 과연 어떨지 그 무서움을 감히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죽음을 향해 가는 영혼을 방치한 죄를 따져 물으실 것만 같았습니다. 요즘 이런 심정으로 동역자와 같이 틈틈이 전도의 기회를 엿보게 되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하나님께서 제게 한 영혼에 대한 심정을 주신다면, 할 말을 내 입에 넣어 주신다면 불가능하리라 생각했던 전도를 능히 해낼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 경성2부도 전도하고자 2024년 방향을 잡았는데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심정을 주시고 말씀을 주셔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각자의 위치에서 전도할 수 있도록 힘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를 세우신 목적 세 번째,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마가복음 1장에서 예수님은 본격적인 사역에 앞서 사탄의 시험을 받았습니다. 이는 전도가 사탄과의 영적 전쟁임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사탄보다 더 강한 자임을 드러냈습니다. 마가복음 1장 24절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귀신들은 예수님을 두려워하였습니다. 사탄이 예수님의 역사를 방해하지만, 예수님은 사탄보다 강하시기에 사탄의 역사를 물리칠 수 있습니다. 본래 하나님은 자기 형상을 따라 사람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은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사탄은 사람의 영혼을 사로잡고 온전치 못하게 합니다. 세상의 왕 노릇을 하는 사탄은 물질 만능주의와 개인주의 시대에 더욱 강하게 사람들의 영혼을 붙잡고 있습니다. 거룩함이 아니라 세상 영광을 위하여 살도록 부추기고 있습니다. 당신과 무슨 상관있나이까 사탄의 말을 하도록 현혹하고 있습니다. 거짓의 아비 사탄을 몰아내고 새로운 복음 질서를 세우기 위하여 예수님은 제자를 세우시고 악한 세력을 거슬러 싸우도록 하십니다. 에베소서 6장 12절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예수님은 사탄과 대적하여 싸울 수 있도록 제자들에게 권능을 주십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사탄의 세력을 분별할 수 있는 혜안을 주십니다. 또 성령을 통해, 기도를 통해 영적 전투에서 이길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온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우리가 한 영혼의 가치를 예수님과 공유하고, 이 시대에 제자로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16~19절은 예수님이 세우신 제자들의 이름이 나와 있습니다.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또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나인 시몬이며 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 예수님이 세우신 제자들은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사회에 명망 있는 출신이거나 학식이 깊은 학자가 아니었습니다. 갈릴리 출신의 어부들, 로마 세금 관리인 세리, 급진적인 열심 당원, 심지어 나중에 스승을 팔아넘기는 자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세상의 관점으로 보면 오합지졸이라 불릴만하지만, 예수님의 관점에서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소망 가운데 이들을 택하였습니다. 나이, 성격, 생각이 다 달랐지만,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되고 예수님을 보고 배우며 성장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모든 삶의 영역을 공유하며 정체성을 확립시켜 주셨습니다. 그렇기에 이후 어부가 사도가 되고, 세리가 사도가 되고 열심 당원이 사도가 될 수 있었습니다. 비단 12명이 전부는 아닙니다. 사도 바울 등 성경에 기록된 다른 이들도 모두 예수님이 부르신 제자였고,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각자는 평범하고 다르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게 하시고 말씀을 따라 성장하게 하십니다. 고린도전서 1장 9절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을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우리가 서로 하나가 되게 하시며, 소망 가운데 제자로 불러주신 주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20~30절은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예수님은 복음 전도를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식사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부르심을 이해하지 못하는 친족들은 예수님이 다른 일에 정신 팔려 미쳤다고 하였습니다. 또 바리새인의 서기관은 예루살렘에서부터 쫓아와 예수님의 일을 훼방하러 나왔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의 능력을 부정하며 사탄의 능력이라고까지 하였습니다. 복음 사역도 힘든데 주변 사람마저 예수님을 힘들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온갖 비방에 가타부타 일일이 논쟁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많은 표적과 기사를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란 사실을 드러내셨는데 비방하는 무리들은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불러 모아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23~27절을 보십시오 “사탄이 어찌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또 만일 그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 만일 집에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고 만일 사탄이 자기를 거슬러 일어나 분쟁하면 설 수 없고 망하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강탈하지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이들의 잘못된 생각을 논리적으로 반박하십니다.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없고 이는 예수님이 사탄보다 더 강한 분이시기 때문이라는 점을 강조하십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모르고 성령의 역사를 모독하는 자에게 엄히 경고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예수님이 이 비유를 제자들에게 하신 이유는 제자들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예수님처럼 세상의 환영을 받지 못하고 비방을 받을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사람들의 반응에 휘둘리지 말고 선하신 하나님께서 맡기도록 믿음을 심으십니다. 이사야 35장 4절 “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세상은 돈에 미치고, 공부에 미치고, 직장에 미치도록 합니다. 자기 영광, 세상 영광에 미쳐 살도록 부추깁니다. 이렇듯 세상 사람들이 한마디씩 할 수 있습니다. 혹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들어오는 사탄의 역사가 아닌지 자세히 들여다보고 분별해야 합니다. 사탄은 복음 역사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우리가 예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따라 살면 망하는 게 아니라 선을 이루는 것임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사 하나님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 되게 하기를 기도합니다.
31절을 보십시오. 그때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을 걱정하는 가족들이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무리가 예수를 둘러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이 말씀에서는 밖에 있는 가족과 안에 있는 무리가 대조되어 있습니다. 이를 통해 누가 진정 예수님의 가족인지 암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무리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십니까? “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예수님의 대답이 너무 차갑게 느껴집니다. 이 발언을 가족들이 들으면 굉장히 섭섭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의도적입니다. 34, 35절을 보십시오 다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둘러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인간관계에서 있어서 가장 중요한 관계가 가족입니다. 왜냐하면 피로 맺어진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형제, 자매, 어머니라고 선언하십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가족의 기준을 제시하십니다. 밖에 있는 가족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서 맺어진 영적 가족이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혈연관계를 초월하여 하나님 안에서 한 가족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이 자기와 함께 하려고 제자를 부르신 이유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 서로 동역하는 자가 하나님 안에서 가족이 된다는 것입니다. 가족의 모습은 서로에 대한 깊은 신뢰와 사랑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를 때,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때 서로를 가족으로 생각하고, 깊은 신뢰와 사랑의 교제를 나누도록 하십니다. 요한복음 13장 34, 35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우리는 모두 이 사실을 잊지 말고 서로 사랑하며, 예수님 중심의 가족관을 확립하므로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며 배우는 주의 제자들이 될 수 있길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복음이 필요한 시대에 제자들을 부르시고 세우십니다. 제자 공동체가 되게 하시고 주님 안에서 한 가족이 되게 하십니다. 저는 예수님이 우리를 제자로 세우셨다고 믿습니다. 경성2부라는 영적인 가족을 세워주셨음을 믿습니다. 우리가 제자의 정체성과 가치관, 예수님의 영적 가족관을 새롭게 확립하고 땅끝까지 증인이 되어 예수님을 증거하는 제자들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저는 메시지를 준비하면서 문득 지난 20여 년의 세월을 생각해 봤습니다. 처음 경성2부에 와서 제일 어렸고, 어린아이처럼 자기중심적인 저를 감당하시며 섬겨 주시는 목자님들이 떠올랐습니다. 덕분에 저는 경성2부에서 가족과 같은 소속감과 포근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목자님들은 예배, 소감 모임, 기도 모임, 교제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하지 않으며 열정적으로 감당하였습니다. 어린 양들을 위한 섬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옆에서 보고 배우며, 엇나가지 않고 포도나무 가지 같은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옛 경성2부에서의 낭만을 생각해 보면 지금은 왜 이렇게 상황이 어려운가? 생각하게 됩니다. 외적인 상황과 조건을 구실로 삼기보다 우선 제 안에 제자로서의 정체성은 있는지 생각해 봤습니다. 지금 제 나이라면 20년 전에 열정이 가득했던 목자님들의 나이와 똑같았습니다. 제가 그분들처럼 똑같은 제자의 길, 목자의 길을 걷고 있는지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믿음으로 직장생활, 결혼생활을 한다고 하지만, 무엇인가 머뭇머뭇하는 제 모습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오늘 말씀이 유독 지금의 저에게 어렵게 느껴진 이유이기도 합니다. 목자님들은 이제 젊음이 지나가고 머리에는 흰머리가 희끗희끗할 만큼 세월이 흘렀습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해 출애굽 다음 세대를 준비시키는 모습이 제 머릿속에 그려지고 있습니다. “다음 세대는 너희다”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부담스러운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자 하는 마음이 컸음을 고백하고 회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경성2부의 상황을 보며 자각하도록 제 마음을 일깨우십니다. 예레미야 1장 7~9절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너는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고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제가 남아 있는 동역자들과 함께 새 역사를 이루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전진할 수 있는 믿음 주시길 기도합니다. 제가 부담감이 아니라 지금까지 하나님 안에서, 경성2부에서 받았던 은혜를 기초로 어떤 형태로든 주님의 일에 쓰임 받는 목자가 되기를 소망하고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