ㅣ서론 ㅣ
⑴ p.13-19(9줄까지)
p.13
16, 17세기에 프랑스에는 많은 영성 저술가들이 있었다.
이 두 세기의 역사 안에는 위대한 이름들이 빛을 발하고 있었으니,
바로 그들은 유럽 문명을 활성화시키는 데 있어
일익을 담당했던 자들이다.
이 위대한 이름들 중에, 전에는 공적으로 아무런 영예를 누려보지도
못하다가 오늘에 이르러서야, 한 때 별처럼 빛나던 사람에게 가졌던
애착심보다 훨씬 더한 애정으로 우리의 관심을 끄는 한 분이 있는데,
그의 이름은 코사드의 요한 베드로 (Jean-Pierre de Caussade)이다.
그의 모습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라곤 거의 없어 그저 막연해 할 뿐이다.
그의 초상화는 한 점도 없으며 키가 큰지, 작은지 혹은 뚱뚱한지,
말랐는지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다.
머리는 어떤 모양이었을까?
그리고 눈은 푸른색이었을까, 아니면 갈색이었을까?
멋졌을까, 초라했을까?
나는 초라했으리라 상상해 보지만 그러한 것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 행여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을 것들이다.
p.14
그는 1675년 3월 6일에 태어났다.
그의 출생지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프랑스 남쪽의 켈시 지방의 어느
곳이었으리라 추측이 되고, 거의 확실시 되는 것은
그가 어린 시절을 당시 대학이 있던 도시인 툴루즈(Toulouse) 북쪽에
위치한 카오르(Cahors) 읍에서 보냈다는 사실로,
20년 전 페넬롱(Fenelon)도 그곳에서 학생으로 지냈던 곳이라는 점이다.
코사드는 1693년 툴루즈에서 예수회의 수련자가 되었으며,
1704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리고 4년이 지난 다음 종신서원을 하였다.
이 기간 동안 그는 한 곳에 오래 머문 적이 없었다.
그는 오크와 오리악에서 희랍어, 라틴어를 가르쳤고 로데에서는
철학 교수를 지냈으며, 그 후 모리악과 아빌에서 같은 자리를 굳혔다.
이 모든 도시들은 툴루즈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코사드가 신학 공부를 하고 또 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던 대학은
툴루즈 뒤편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 후 1720년까지 코사드는 여러 도시에서 교수 생활을 계속하다가
그 해를 끝으로 교수직을 접고, 프랑스 남부와 중부 지방의 여러 곳에서
설교사와 고백 신부로 일하였다.
1729년 그는 프랑스 북동쪽 가장자리에 위치한 로렌느 공작가의
옛 수도였던 '낭시(Nancy)'란 시에 도착하였다.
이것은 영성사(靈性史)에 있어 기념비적인 사건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곳에 있는 수도원, 즉(방문회 수녀들)(Visitation nuns)의
영적 지도자가 되었기 때문인데, 우리는 그 결과들을 뒤에 가서 살펴볼 것이다.
그는 꼭 일년 동안 그곳에 머문 다음 툴루즈에 돌아와 알비로 갔다.
p.15
1733년 말, 낭시에 돌아온 그는 거의 6년 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그 다음 페르피냥에 있는 예수회 대학과 알비에 있는 대학의 학장으로 일했다.
그는 자신의 생애 중 마지막 5년을 툴루즈에 있는 예수회 신학원 학생들의
책임자로 지내다가 1751년 76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코사드의 요한 베드로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약간의 사실은
그 동안 낭시에 있는 수녀들에게 쓴 편지에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두 장의 우편엽서라면 충분히 채워질 만한 글이다.
이유는 그의 편지들이 영적 문제와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 편지들은 호라스 왈폴(Horace Walpole) 같은 저술가가 쓴 편지와는 다르다.
그러나 한 두 구절을 살펴볼 때, 그는 은둔 생활을 하지 않았고
이 세상의 일거리로부터 단절되지도 않았음이 분명하다.
예를 들어 그가 낭시에서 페르피냥으로 옮겨갔을 때, 낭시에 있던
마리-데레사(marieTherese)수녀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보낸 적이 있다.
"제가 페르피냥에 도착해 보니, 그곳에는 제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많은
일거리들이 쌓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만나서 상반되는 의견들을
바로잡아 주어야 했던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주교, 고관대작, 왕의 대신들, 군대 참모들과 의원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제가 형식적인 방문들, 특히 세상의 위대한 인물들과
관련된 방문들을 싫어하고 있음을 알고 계십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러한 일 때문에 크게 걱정하지는 않습니다.
p.16
저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식으로
하느님을 크게 신뢰하며 삽니다.
그래서 저는 오히려 이 다수의 복잡한 사람들에게 완전히
사로잡혀 있는 것을 원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나서 그는 마리-데레사 수녀에게
"처음에 저는 한 짐이나 되는 사무적 근심에 눌려
매우 고통스러워했습니다.
물론 이 일에 대한 걱정거리들은 대체로 제가 좋아하는 침묵이나
고독과 일치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은 저를 도와 주셨고, 이 모든 일거리에 매이지 않는
은총을 저에게 베풀어 주셨습니다. 저는 자유로운 정신으로 일하고 있지요.
많은 방문객들 때문에 제가 성가심을 당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의 의무라고 생각하거나 순전히 필요하다고 여길 때만,
제가 스스로 그들을 방문하기 때문입니다.
저의 느낌을 알아주는 제 동료들인 예수회원들은 가능한 한 빨리
저와 함께 자신들의 일을 처리합니다.
그들은 이런 것이 저에게 자랑거리라거나 사람을 피하게 만드는
인간 불신이 아니라는 점을 잘 깨닫고 있으며, 그래서 그들 중 그 누구도
저의 행동에 반대하지 않고 오히려 몇 분은 이로 인해 덕을 쌓는 것 같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그는 또 다른 수녀인
마리-앙뚜아넷(Marie-Antoinette)에게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저는 온화한 기후를 가진 곳일 뿐 아니라 매력이 넘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인 여기 알비로 다시 왔습니다.
그들이 저지르는 한 가지 잘못이 있다면, 제가 고독을 좋아하는 대신,
p.17
그들은 너무 사교적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많은 초대를 받게 될 것이고, 따라서 그들은 저에게
정말 십자가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분명히 하느님은 제가 늘 사랑해 온 시골풍경의
그 아름다움에서 한없는 기쁨을 더 이상 누리지 못하도록
다른 이들에게 저를 보내실 것입니다."
그러나 알비는 아름다운 풍경과는 별도의 다른 기쁨들을 코사드에게
안겨다 주었다. 그는 방문 수녀회의 한 수녀에게 보낸 편지에서
"수녀님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커다란 만족감을 저에게
가져다주는 그 멋을 저는 찾아냈습니다.
여기 알비에는 세상을 완전히 등진 가난한 글라라회 수녀님들의
수도원이 있습니다.
그들은 지참금 없이 입회하여 완전히 애긍으로만 살아갑니다.
그들의 장상은 제가 지금까지 만나본 분들 중에 가장 거룩한 분입니다. ...
저는 거룩한 수녀님들 사이에서 체험한 엄청난 쾌활함과
거룩한 기쁨을 전에는 결코 맛본 적이 없었습니다. ...
그것이 저에게 그 얼마나 큰 은총이고 위안이며,
또 제 자신의 성화를 위해 얼마나 좋은 본보기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코사드에 대해 밝힐 수 있는 전부이다.
한 가지 사실이 더 있다면, 그가 한 권의 책을 익명으로 발행했다는 점이다.
이 책의 제목은『모(Meaux)주교, 보수에의 가르침에 의거한 여러 가지
기도 방법에 관한 영적인 지침들. 예수회의 한 신부』로 되어 있다.
이 책은 어떤 면에서 뛰어난 작품은 아니다.
p.18
이 책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10년이나 지난 다음에서야 출간된
그의 두 번째 저서인『하느님섭리에 내맡김』(Abandonment to Divine Providence)
이 아니었던들 이미 오래전에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졌을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이 이 두 번째 책을 썼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이것은 하나의 신비스런 이야기이다.
이미 우리가 보았듯이 낭시에서 지내는 몇 년 동안 그는
그곳 방문회 수녀들의 영적 지도 신부로 일하였다.
그는 많은 편지들을 그녀들에게 써 보내기도 하였고 또 강의도 하였다.
그리고 그녀들은 그의 편지들을 보관했고 강의 내용도 적어놓았다.
이들 수녀들은 18세기의 멋진 이름을 가진 샤를롯-엘리사벳 부쉬에 드 몽뒤레
(Charlotte-Elisabeth Bourcier de Monthureux), 마리-앙뚜아넷 드 마위에드 립쿠르
(Marie-Antoinette de Mahuetde Luptcourt), 안나-말가리따 부데 드 라 벨리에르
(Anne-Marguerita Boudet de la belliere)라는 수녀들과 마리-안나 데레사 드 로산
(Marie-Anne Therese de Rosen)과 프랑스 한 원수의 딸인 루이스-프랑소와 드 로산
(Louise-Francoise de Rosen)이라는 두 수녀였다.
루이스-프랑소와는 네 번이나 수녀원 원장으로 임명되었고, 자신과 그의 자매는
코사드가 기록한 모든 것을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보관하였다.
이 두 수녀들의 조카로서 로뎀부르크의 마리아-안나-소피아(Marie-Anne_Sophie)
수녀도 있었는데, 그녀 역시 여러 번에 걸쳐 원장으로 일하였다.
코사드가 낭시에 처음 갔을 때, 그녀는 수련장이었는데 그녀에게 보낸
코사드의 편지 중 하나는
p.19
『하느님 섭리에 내맡김』의 첫 장 서두, 제2부와 제3부의 일부가 되었다.
지난 세월동안 수녀들과 장상들에게 보내진 코사드의 편지들과
피정 동안 그들에게 강의한 기록들은 박학한 프랑스 예수회원인
앙리 라미에르(Henri Ramiere) 신부에게 넘겨졌다.
그가 그것들을 모아 작은 책으로 편집하여 1861년에 발행한 이 책은
즉시 많은 사람들에 의해 애독 되었다.
그 후 새롭게 편집된 책들이 선보였고, 마침내 라미에르 신부는 오늘날 우리 손에
넣을 수 있도록 신선한 자료들을 가미시켰다. 새롭게 편집된 책들은 계속해서
발행되었고 여러 가지 언어로 번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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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문 수녀회 : 성모 마리아 방문 수녀회(Ordo Visitationis Beatissimae Mariae Virginis)
또는 성모 방문회, 방문 수녀회, 성모 마리아 방문 봉쇄 수녀회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여자 수도회 가운데 하나이다.
1610년 6월 6일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와 성 요안나 프란치스카 드 상탈 수녀에
의해 프랑스 낭시에서 창설되었다. 수녀회의 카리스마는 상냥함과 영웅적인 정신을,
자주성과 공동체 정신을, 기도에 대한 헌신을 결합시키고 묵상 생활을
사도적 위치에까지 끌어올리는 것이다.
수녀회의 모토는 “Vive Jésus”이며, 프랑스어로 “예수님, 만세!”라는 뜻이다.(위키 백과)
* 호라스 월폴(Horace Walpole) : 영국의 소설가(1717~1797).
저작은 다방면에 걸쳐서 많은데, 그중에서도 공포파의 최초의 소설인《오트란토 성》
(1764)이 유명하다. 이밖에도 《리처드 3세의 생애와 치세에 대한 사적 의혹》(1768),
비극《이상한 어머니》(1768), 기타 미술과 역사 관계의 서적도 있다.
특히《오트란토성》은 영국에 공포소설의 유행을 가져오게 하였고
W.스콧, A.뒤마 등 낭만파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1732∼1797년 사이에 쓴 그의 서간은 20세기에 10권이 넘는 방대한
서간집으로 출판되었다. 이것은 자서전적인 기술 외에 당시의 사회 ·정치에 관한
관찰과 의견을 적어 놓아 사료로서도 귀중하다.(다음 백과)
첫댓글
무심 24.02.19 08:10
< 저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식으로
하느님을 크게 신뢰하며 삽니다.
그래서 저는 오히려 이 다수의 복잡한 사람들에게 완전히
사로잡혀 있는 것을 원해야 할 것입니다. >
< 물론 이 일에 대한 걱정거리들은 대체로 제가 좋아하는 침묵이나
고독과 일치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은 저를 도와 주셨고, 이 모든 일거리에 매이지 않는
은총을 저에게 베풀어 주셨습니다. 저는 자유로운 정신으로 일하고 있지요. >
< ■ 내맡김 영성 ■
5. '내맡긴다'는 말의 의미는? (1)
지도사제 09.12.20 16:37
"맡긴다" 는 것은 맡겼다가도 다시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맡겼다가 찾을 수 있고 다시 맡겼다가 다시 찾을 수 있다. 얼마든지 말이다.
그러나 "내맡긴다" 는 것은 사전에 나온 대로 "아주 맡겨 버리는 것이다",
아주 영원히 말이다.
한 번 내맡겼으면 다시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아주 영원히 말이다.
뿐만 아니라 한 번 내맡겼으면 그 맡긴 것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리고 내 눈 앞에서 막말로 삶아 먹든 구워 먹든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을 말한다.
"내" 라는 접두어가 붙은 단어가 많이 쓰이고 있는데,
그 중에서 우리가 많이 듣고 사용하는 단어들은 내던지다, 내버리다, 내쫒다,
내딛다, 내닫다, 내갈기다 등이 있다.
그냥 적당히 던지고, 버리고, 쫒고, 딛고, 닫고, 갈기는 것이 아니라
아주 "매우 힘차게 밖으로 멀리" 던지고, 버리고, 쫒고, 딛고, 닫고, 갈긴다는 말이다.
모두 "절대 돌이킬 수 없다" 는 매우 강한 뜻을 갖고 있다.
"하느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내맡기는 것" 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한 번 우리의 모든 것을 내맡겨드렸으면 그것으로 그만 끝이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이끌어 주시든지
우리는 그저 물 위에 떠있는 낙엽처럼, 부는 바람처럼
그저 하느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대로
하느님 뜻에 그냥 내맡겨드려야 한다.
이것이 바로 "내맡긴다" 는 말의 본 뜻이며,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 의 시작이며 끝이다. >
< ■ 내맡긴 영혼은 ■
물 위에 떠 있는 낙엽처럼
지도사제 10.11.06 10:00
내맡긴 영혼의 삶은 "물 위에 떠 있는 낙엽"과 같은 삶이어야 합니다.
물 위의 낙엽은 자신이 스스로 물 위를 오가지 않습니다.
낙엽은 물과 바람에 자신을 내맡깁니다.
물과 바람이 자신을 오가게 합니다.
그 흐름도 방향도 모두 물과 바람과 계곡에 다 내맡깁니다.
천천히 흐르다 가도 어느새 빠른 흐름을 탑니다.
빠른 흐름을 타다 가도 어느새 멈추어 버립니다.
멈추어 버린 자신을 물과 바람이 또다시 흐르게 합니다.
때로는 물이 계곡을 요동치며 흐른다 하여도
그 요동에 크게 흔들리지 않고 그 흐름을 타고 그저 유유히 흘러만 갑니다.
계곡의 갈림 길도 자신이 선택하지 않습니다.
낙엽의 모든 것이 자연에 내맡겨졌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내맡겨진 영혼은,
자신의 모든 삶을 "하느님의 이끄심"에 내맡깁니다.
하느님의 이끄심에 자신을 내맡김이
곧 "하느님 뜻대로 사는 삶"임을 확신합니다. >
< ★거룩한위탁
116 pp.578-582 제 4 편 제2장 제4절 평화와 희열 ①
무화.보조 21.09.08 13:12
제 2 장 거룩한 위탁의 효과
제 4 절 평화(平和)와 희열(喜悅) ①
거룩한 위탁은 단지 인생의 무상(無常)함,
인생의 각가지 사건 안에 있어 귀중한 천주의 자녀의 자유,
유쾌한 정신의 평온을 얻게 할 뿐 아니라,
지상에 있어서의 참된 행복, 즉 깊은 평화와 내적 희열(內的喜悅)도
우리에게 가져오는 것이다.
「우리의 의지를 천주의 의지에 온전히 적합시킴으로써,
우리는 지상에 있어 맛볼 수 있는 가장 완결한 휴식을 획득할 수 있다.
그것은 지상을 낙원으로 바꾸는 수단이다.
어떤 사람이 전에『아라곤』및 『나뽈리』의 왕인 총명하고 박학한
대『알퐁소』에 묻기를,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이는 누구냐고 말을 던졌다.
왕은 이에,
천주의 인도하심에 온전히 자신을 맡기는 이,
행복 불행의 구별 없이 모든 일을 천주의 손으로부터 오는 것으로서
받아 들이는 이야말로, 그것이라고 대답하였다.」
(샹.쥬르「예수.그리스도에서의 인식과 사랑」3편 8.5)
그렇다.
위탁은 평화를, 깊고 완전한,
말하자면 산란되지 않는 평화를 생기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적 생활과 선덕」중「위탁」3)
실제 이 거룩한 위탁의 길을 걷는 영혼은,
변함 없는 정온(靜穩)을 즐기며, 그들만이 깨달을 수 있고,
또한 지상의 다른 어떤 곳에서도 찾아낼 수 없는
평화 안에 세상을 보낸다.
왜냐 하면,
이렇게 하여 그는 확실히 행복을 간직하고,
완전한 영혼의 휴식을 찾아냈으며,
모든 번잡함, 모든 폭풍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실제 사람은, 영혼이 어린이와 같이 사랑에 충만한,
전능하신 섭리의 팔에 안겨, 안식하는 상태보다도
복된 상태를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와 같이 섭리에 몸을 맡기고,
그것에 자기 일엽편주의 조종을 맡긴 영혼은
모든 고난의 한 가운데서도, 완전한 평화를 즐기며,
인생의 큰 강을 조용히 항해한다. >
< 내맡김의 삶(영성)은 하느님에 대한 신앙의 시작이자 마침입니다.
"내맡김의 삶" 을 살면 누구나 다 쉽고 재미나는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맡김의 삶(영성)은 참으로 "自由人의 삶" 입니다.
물 흐르듯 물을 타고 바람 불듯 바람을 타고,
하느님의 뜻대로 하느님의 뜻을 타고 하느님의 뜻에 이끌려 사는
"참으로 자유로운 삶" 입니다.
우리 모두 다 함께 한 번 그 뜻을 타보시지 않겠습니까?
하느님의 뜻을! >(지도사제 11.05.31)
무화 24.02.19 09:35
[ 코사드의 요한 베드로 (Jean-Pierre de Caussade)
- 그는 1675년 3월 6일에 태어났다.
그의 출생지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프랑스 남쪽의 켈시 지방의 어느 곳이었으리라 추측이 되고
- 1693년 툴루즈에서 예수회의 수련자가 되었으며,
- 1704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 4년이 지난 다음 종신서원을 하였다.(1708)
- 1720년까지
코사드는 여러 도시에서 교수 생활을 계속하다가
그 해를 끝으로 교수직을 접고,
프랑스 남부와 중부 지방의 여러 곳에서
설교사와 고백 신부로 일하였다.
- 1729년 낭시(Nancy)
방문회 수녀들(Visitation nuns)의 영적 지도자
일년 동안 그곳에 머문 다음
툴루즈에 돌아와 알비로 갔다.
- 1733년 말, 낭시에 돌아온 그는
거의 6년 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그 다음
페르피냥에 있는 예수회 대학과
알비에 있는 대학의 학장으로 일했다.
그는 자신의 생애 중 마지막 5년을
툴루즈에 있는 예수회 신학원 학생들의 책임자로 지내다가
- 1751년 76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
[ 그녀들은
그의 <편지들을 보관>했고 <강의내용도 적어 놓았다.>
<샤를롯-엘리사벳 부쉬에 드 몽뒤레
마리-앙뚜아넷 드 마위에드 립쿠르
안나-말가리따 부데 드 라 벨리에르 수녀들>
<마리-안나 데레사 드 로산
루이스-프랑소와 드 로산 수녀들>
<로뎀부르크의 마리아-안나-소피아 수녀>
지난 세월동안
수녀들과 장상들에게 보내진 코사드의 편지들과
피정 동안 그들에게 강의한 기록들은
박학한 프랑스 예수회원인
<앙리 라미에르(Henri Ramiere) 신부>에게 넘겨졌다.
그가 그것들을 모아 작은 책으로 편집하여
1861년에 발행한 이 책은
즉시 많은 사람들에 의해 애독되었다.
그 후 새롭게 편집된 책들이 선보였고,
마침내 라미에르 신부는
오늘날 우리 손에 넣을 수 있도록 신선한 자료들을 가미시켰다.
이렇게 새롭게 편집된 책들은 계속해서 발행되었고
여러 가지 언어로 번역되었다. ]
[ ★하느님섭리에내맡김(韓)
하느님 섭리에 내맡김 새번역-서문(1)텍스트의 역사
지혜(무비) 20.11.09 08:59
< 서문 - 텍스트의 역사 >
하느님 섭리에 내맡김은,
성모 방문회 창설자인
프랑수아 드 살의 이름을 내세우고 있는 데다,
특히 그루 신부에게 영감을 주고,
19세기에는 게 주교와 리지유의 소화 데레사로 대변되는
소위 내맡김 또는 어린이 영성을 불어넣어주게 될,
귀용주의적 전통의 놀라운 후예처럼 보인다.
쟈끄 가죄가 강조하듯,
이 텍스트는 일직선으로 곧게 나아가며,
완벽하게 일관성을 지니고 있고,
그 안에서 사고는 잇따른 물결에 의해 발전해 나간다.
이 작품은 무종교가 판을 치기 시작하고,
프랑스 혁명뿐만 아니라
19세기와 20세기에 기독교가 헤치고 나아가야 할
엄청난 시련들이 준비되어지고 있던 시기에 쓰여졌다.
계몽주의 시대에,
뭔가 예감과도 같은 것이 하느님 섭리의 내맡김을,
특히 그 책의 마지막 장들을 관통하고 있다.
따라서 19세기 말 이 책이 출현했을 때,
프랑스 가톨릭 신자들이 이 책에 갈채를 보낸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 책이 담고 있는 교리의 개요를 통해
우리는 이 책 속에서 역경의 시대에 필요한 영성을
찾아볼 수 있음을 보게 된다. ]
하느님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수녀님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커다란 만족감을 저에게
가져다주는 그 멋을 저는 찾아냈습니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저에게 만족감을 항상 주십니다.
저는 거저 받으면 됩니다.
사랑으로,
남을 배려하여
고통을 인내하며
순간에 성실하고
아버지와 함께 깨어서
아버지의 뜻으로 삽니다.
사랑의 표현이 삶의 목적입니다.
아버지의 섭리는 나와 남을 하나로 봅니다.
고통은 사랑의 배경입니다.
기쁨은 땀에서만 나옵니다.
현실은 아버지의 꿈입니다.
지금 저는 아버지의 사랑을 실천합니다.
모든 일은 아버지의 선물입니다.
남이 나에게 주는 고통, 굴욕, 치욕, 무시는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제가 저에게 주는 나태, 후회, 불안, 갈망은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제가 이 순간 여기에서 해야 할 일은 오직 아버지의 기쁨에 접속하는 일입니다.
저는 고개를 돌리면 아버지를 봅니다.
결코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제가 아버지께 구하면 아버지는 모든 것을 다 주십니다.
다만 제가 받았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러자면 저의 자유 의지를 사랑과 인내 정진에 모아야 합니다.
아멘~!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아버지, 감사합니다.
저를 여기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오직 아버지의 사랑으로 삽니다.
과정을 사랑하고 결과에 감사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