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타와 위빠사나 1
논점
사마타와 위빠사나의 논쟁의 쟁점은 여러 가지가 있다.
사마타를 닦지 않고 바로 위빠사나 수행을 해도 되는가?
사마타를 닦아서 삼매를 성취한 다음에 위빠사나 수행으로 들어가야 하는가?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동시에 닦는 것인가?
동시에 닦는다면 어떤 식으로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닦는가?
이런 다양한 쟁점이 있지만 결국 하나이다.
즉 사마타를 닦고서 위빠사나를 닦아야만 도과를 얻는가? 아니면 바로 위빠사나 수행만으로 도과를 얻을 수 있는가?
이것이 문제로다.
사마타와 위빠사나의 구분
사마타와 위빠사나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살펴보기 전에 사마타와 위빠사나에 대한 정의부터 살펴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럼 사마타와 위빠사나의 구분은 서로 다른 점을 살펴보면 대충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사마타는 삼매를 성취하기 위해 닦는 것이고, 위빠사나는 통찰지, 즉 지혜를 개발하여 도과를 성취하기 위해 닦는 것이다.
또 다른 차이점은 대상이다.
사마타는 오직 하나의 대상에 마음을 집중한다.
하나의 대상에 집중을 해야만 삼매에 들어갈 수 있다.
마음이 하나의 대상에서 벗어나서 한 생각이라도 일어난다면 삼매에 들어갈 수 없다.
반면에 위빠사나는 어떤 대상이든지 상관없다.
모든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오는 모든 대상이 관찰의 대상이다.
특히 대상을 관찰하는 것보다 대상으로 인해 일어나는 마음의 변화를 관찰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대상에 대한 갈애와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이 주된 위빠사나 수행의 목적이다.
나아가서 대상으로 인해 일어나는 마음이 끊임없이 변하는 일시적인 것이고 괴로운 것이며 집착할 것이 못 되고, '나'라고 믿고 있는 관념이 실체가 없다는 인식을 키워나가는 것이다.
삼매의 정의
그럼 사마타 수행이 필요한지 아닌지 알려면 먼저 사마타 수행을 통해 얻고자 하는 삼매에 대한 정의부터 이해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왜냐하면 사마디라는 것에 대해서도 다양한 용어의 사용이 있으며 그로 인해 혼란이 오기 때문이다.
사마디 samadhi는 중국어로는 음역해서 삼매三昧 의역해서 선정禪定 이라고 한다.
사마디는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가 있다.
넓은 의미로는 고요함, 생각이 일어나는 말든 마음 바탕에 고요함이 자리잡고 있으면 '사마디가 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을 위빠사나 행자들이 찰라삼매라고 부르는 것이다.
좁은 의미로는 아비담마에서 말하는 오감이 완전히 끊어지고 하나의 대상에 몰입해 있는 깊은 집중 상태이다.
여기에는 색계 4선정, 즉 색계 초선, 이선, 삼선, 사선과 무색계 4선정 즉, 공무변처, 식무변처, 무소유처, 비상비비상처가 있고 아나함과 아라한만이 들어가는 멸진정이 있다.
아비담마에는 이런 깊은 집중 상태를 일반적인 사마디 상태와 구분하기 위해서 자나 Jhana라고 부른다.
아비담마에서는 오감이 끊어지지 않았지만 고요함이 있는 상태를 삼매와 구분하기 위해서 근접 삼매(삼매에 가까이 간 상태)라고 부르기도 한다.
여기서는 용어의 혼란을 구분하기 위해서 삼매의 기준을 오감이 끊어졌느냐 끊어지지 않았느냐로 구분하기로 한다.
즉 오감이 끊어진 상태의 깊은 선정을 삼매라고 부르고, 오감이 끊어지지 않는 상태, 즉 마음은 고요하지만 여전히 소리가 들리는 상태를 사마디라고 부르자.
그럼 이렇게 정리될 수 있다.
사마타 수행으로 삼매를 성취하고 위빠사나로 전환한다고 할 때, 그 삼매는 오감이 끊어진 상태의 깊은 몰입 삼매를 말하는 것이라고.
위빠사나 수행을 하다보면 저절로 사마디가 생긴므로 따로 사마타 수행을 할 필요가 없다고 할 때의 사마디는 여전히 소리는 들리지만 마음이 고요한 상태라고.
여전히 소리는 들리지만 마음은 고요한 그 정도의 사마디만으로 위빠사나 수행으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위빠사나 행자들은 주장하므로 이런 정리는 타당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정리를 뒷바침 하기 위해 삼매에 대한 스승들의 말씀을 인용해본다.
먼저 사마타 수행으로 뫈벽한 삼매를 성취하고 깨달음을 성취한 사람으로 잘 알려진 호주의 아짠 브람 스님의 말씀을 들어보자.
몇 분 동안 지속되는 것은 삼매가 아니다. 삼매는 여러 시간 동안 지속된다. 삼매는 니밋따를 통해서만 들어간다.(여기서 니밋따는 빛을 말합니다.) 삼매 상태에서는 육체적 겸험이란 있을 수 없다. 즉 몸의 통증도 느
끼지 못하고, 외부의 소리도 전혀 들리지 않는다. 그 상태에서는 생각조차도 할 수 없다. 심지어 '좋구나!'라는 생각조차도 일어나지 않는다. 단지 단 하나의 자각, 행복감만을 오랫동안 경험한다. 이것은 황홀 상태가 아니고 높은 깨어있음이다.
-mindfulness, bliss and beyond 25페이지(아짠 브람)-
아짠 브람 스님의 사마타와 위빠사나
아짠 브람 스님은 니밋따가 없으면 삼매에 들어갈 수 없다고 강조한다.
니밋따 없는 삼매는 삼매가 아니라고 한다. 그의 주장을 들어보자.
호흡이 사라졌지만 니밋따가 일어나지 않으면, 즉 마음에 빛이 나타나지 않고, 깊은 평화, 텅빔, 아무것도 없음이 있다고 해도 이것은 삼매가 아니다. 물론 아주 좋은 마음 상태이기는 하지만 자나 jhana가 아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진전이 없다. 이것은 막다른 골목으로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그런 상태에서 나와서 다른 방법으로 니밋따를 일으켜 삼매에 들어가야 한다.
-mindfulness, bliss and beyond 140페이지-
아짠 브람 스님은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구분할 수 없다고 한다.
그는 위빠사나가 사마타이고 사마타가 위빠사나라고 한다.
위빠사나와 사마타는 한 과정의 두 측면이다. 사마디는 명상으로 일어난 고요함이고, 통찰지는 같은 명상에서 일어난 분명한 이해이다. 사마디가 통찰지로 이끌고 통찰지가 사마디로 이끈다. 나의 수행법은 사마타도 위빠사나도 아니다. 이것은 단지 수행(바와나, bhavana)이다.
-mindfulness, bliss and beyond 25페이지-
아짠 브람 스님의 말씀은 맞지만, 호흡에 집중, 니밋따, 니밋따를 통한 삼매의 성취, 이런 방법상의 절차 때문에 사마타 수행 후 위빠사나 수행이라고 할 수 있수도 있고,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서 완전한 놓아버림을 통해서 고요해진 마음으로 저절로 삼매에 들어가는 자연스런 방법을 취한다는 점에서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동시에 닦는다고 할 수도 있다.
그의 단계적 수행법은 다음과 같다.
1. 지금 이 순간의 알아차림
2. 침묵 속에서 지금 이 순간 알아차림
3. 호흡 알아차림
4. 호흡에 완벽한 집중 지속하기
5. 아름다운 호흡에 대한 완벽한 집중 지속하기
6. 아름더운 니밋따 경험
7. 삼매의 성취
8. 수다원과의 성취
9. 초선정 이선정 삼선정 사선정 공무변처 식무변처 무소유처 비상비비상처 멸진정- 열반의 성취(아나함 또는 아라한)
스님은 비상비비상처 선정을 지나 멸진정에 이르면 열반이라고 한다. 즉 모든 인식이 소멸하는 멸진정이 곧 열반이라는 것이다.
비상비비상처 속에 모든 인식의 끝이 있다. 느낌과 인식의 소멸, 즉 열반이다. 마음이 여기에 주의를 기울이면 마음은 멈춘다. 그리고 마음이 다시 시작할 때, 아나함과 또는 아라한과를 성취한다.
-mindfulness, bliss and beyond 171페이지-
그는 상수멸에서 반열반이 일어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것이 색계와 무색계 선정으로 나아갈 때 일어나는 것이다. 색계 초선에 들어갈 때 5가지 식(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이 소멸한다. 선정이 나갈 때마다 의식이 점점 소멸해간다. 8해탈(8선정)과 느낌과 지각의 소멸(상수멸) 바로 전에 나머지 마음이 소멸한다. 마음의 눈동자, 찟따가 소멸한다. 모든 것이 가버렸다. 깊은 통찰지는 마음, 찟따, 존재의 근원, 아트만이라고 불리는 '아는 자'가 무상하고 결국 마지막 최후에 이르는 것을 발견한다. 그것이 빠리닙바나(반열반)이다.
-mindfulness, bliss and beyond 194페이지-
우리는 반열반이 붓다나 아라한의 육체가 소멸할 때 일어나는 무여열반, 즉 마지막 남아있는 오온까기 소멸하는 것을 빠리닙바나(반열반)이라고 알고 있는데, 여기서는 유여열반, 즉 오염원이 완전히 소멸되고 아직 오온이 남아있는 상태를 빠리닙바나라고 말하고 있다.
즉, 상수멸에서 마지막 찟따의 소멸이 반열반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주석서에 의하면 번뇌의 소멸인 유여열반과 오온의 소멸인 무여여반을 둘 다 반열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번뇌의 소멸인 유여열반은 번뇌의 반열반이 되는 것이고, 오온의 소멸인 무여열반은 오온의 반열반이 되는 것이다.
그는 또 삼매를 얻은 후 통찰을 통해 수다원을 얻는 과정에 대해 설명한다.
선정에서 나온 후 강한 알아차림이 유지된다. 그 강한 알아차림으로 오랫동안 흔들림없이 대상을 조사할 수 있다. 들뜸과 해태와 혼침이 사라진다. 마음은 밝고 깨끗하고 고요하다. 가득 찬 행복감은 내면의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어떤 두려움도 쉽게 물리친다. 지복은 멈출 줄 모르고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용기를 준다..... 이제 삼매에서 나온 후에는 탐욕도 없고, 성냄도 없고, 보호해야하는 자기감도 없다. 삼매에 대한 반조를 통해 사물의 중심을 돌파한다. 용감하고 빛나는 마음은 쉬지않고 경험의 근원을 꿰뚫는다. 아는자와 행위자라는 두 왕에 의해 통치되는 자아의 요새라 불리는 바로 그 자리를. 그 요새가 완전히 텅 비어있음을 본다. ....
거대한 인식의 전환이 일어난다. .....많은 오래되고 소중하게 생각했던 관념과 견해의 구조물이 완전히 무너진다. 그렇게 강하고 깊은 통찰은 마음에서 폭탄이 터지는 것처럼 느낀다. .....그러나 마음은 분명하고 고요하고 행복하다. 이런 깊은 통찰의 특징은 오랫동안 지속되는 감미로운 지복이다.
-mindfulness, bliss and beyond 219페이지-
아짠 브람 스님은 이렇게 선정에서 나온 후 바로 존재의 근원, 즉 텅 비어있음, 자아라고 불릴만한 것도 없이 텅 비어있는 것을 통찰하고 바로 수다원과를 성취한다고 설명한다.
깊은 통찰이란 바로 깨달음이요, 수다원과를 말한다.
그리고 깨달음을 얻었을 때, 커다란 지복이 오랫동안 지속된다고 한다.
붓다께서도 보리수 아래에서 정각을 얻으신 후 그 지복 때문에 일주일 동안이나 움직이지 못하고 앉아계셨다고 한다.
아짠 브람 스님은 그가 깨달았는지 아닌지 구분하는 방법으로 불법승 삼보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높은 계율을 꼽았다.
그리고 윤회와 업이 존재한다는 확고 한 견해도 수다원과를 얻은 사람의 특징이라고 한다.
깨달았다고 하면서 승단에 대한 존경심이 없거나 윤회를 믿지 않거나 마음, 의식이 영원하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면 그는 확실히 수다원이 아니라고 한다.
또한 아나함은 성행위를 할 수 없으며, 아라한은 '나는 누구다'라는 자만이 없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겸손함이 있다고 한다.
아짠 브람 스님은 니밋따를 얻지 못하면 삼매를 얻지 못하고, 삼매를 얻지 못하면 도과를 얻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럼 아짠 브람 스님은 사마타를 닦고 위빠사나 수행으로 전환해서 계속 닦아나가는가?
그의 설명에 의하면 사마타 수행으로 선정을 성취한 후에 위빠사나로 수행을 전환해서 오랫동안 통찰지를 닦은 후에 도과를 성취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삼매에서 나온 후 바로 통찰 수행으로 들어가서 그 텅 비어있음을 확인하는 것으로 위빠사나 수행 끝이다.
바로 깨달음이 일어난다.
커다란 지진이 내면에서 일어나면서 인식의 틀이 깨지고 깨달음이 온다.
어찌보면 붓다의 깨달음을 연상케 한다.
붓다께서도 보리수 아래에서 사선정을 성취한 후 나와서 숙명통과 천안통을 얻고 존재의 본질을 통찰하여 바로 깨달음을 얻었지 않는가!
그러므로 스님의 입장에서는 사마타와 위빠사나가 다른 것이 아니다.
아짠 브람 스님의 수행법은 순전히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가르침으로 보인다.
그러나 스님의 말씀처럼 오로지 삼매를 성취하지 않고서는 도과를 얻을 수 없다는 견해에 대해서는 선뜻 동의할 수 없다.
일단 경전이나 아비담마와 일치하지 않는다.
경전이나 아비담마에서는 순수 위빠사나로 아라한과를 얻을 수 있다고 분명히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 장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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