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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제당하는 자의 부르짖음(2239.2024.3.3.사순절 셋째주)
출애굽기 3:1-10
할렐루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임재하셔서 우리 예배를 받으십니다. 오늘도 주의 전에 나오신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위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혹시라도 삶의 현장에서 상처와 상한 마음을 가지고 오셨으면 말씀 듣다가 위로와 치유함을 받으시고 질병과 싸우는 중이라면 여호와 라파 치료의 하나님을 만나서 치료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삶이 힘들고 지쳐서 오셨다면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은 새 힘을 얻으시기를 축복합니다. 무엇인가 계획하고 기도중에 있는 것이 있다면 응답받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삶이 해결되고 성령이 충만하여 기쁨과 감사와 웃음이 넘쳐나는 유쾌한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닮도록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애국가 가사에 ‘무궁화 삼천리’라는 구절이 아무런 저항없이 표현된 것도 무궁화가 오랜 세월을 통해 우리나라, 우리 민족과 인연을 맺어 온 때문입니다. 일제강점기에 무궁화가 한국 민족의 상징적인 꽃이라는 것을 알고 전국적으로 뽑아 없애버림으로써 큰 수난을 겪었습니다. 꽃나무가 한 민족의 이름으로 이처럼 가혹한 시련을 겪은 사례는 일찍이 없었습니다. 애국지사 남궁억은 무궁화 묘목을 전국적으로 보급해오다가 형무소에 투옥되었고, 동아일보 제호의 무궁화 도안도 삭제되었습니다.
무궁화가 태극기와 함께 한민족에게 조국을 상징하고 결속력을 키우는 강력한 존재임을 간파한 일제는 무궁화를 우리 민족과 멀리 떼어놓기 위해 무궁화를 볼품없는 지저분한 꽃이라고 경멸하여 격하시키고 일본 꽃인 벚꽃을 심게 했습니다. 해방이 된지 50년이 넘었지만 매년 진해에서 일본 꽃인 벚꽃 대축제는 하면서 우리나라 꽃 무궁화 잔치는 안보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들은 상주에 남산둘레길에 가보면 무궁화 꽃나무가 있는 것을 알것입니다. 새벽기도 후 남산에서 운동 할 때 마다 봅니다. 정부 규정상 무궁화가 나라꽃이 된 것은 1949년이지만, 실제로 무궁화가 우리 민족의 마음 속에 나라를 대표하고 상징하는 꽃이 된 것은 이미 수천년 전의 일입니다. 매, 난, 국, 죽 등 사군자가 있고 전국 각지에 진달래꽃도 피는데 왜 하필이면 무궁화가 우리 민족에게 선택된 것일까?
무궁화는 우리나라 토양에 맞는 꽃으로서 원산지가 우리나라이며 우리나라 전국에 긴 역사를 가지고 자생해 온 꽃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와 사상과 이념이 다르지만 오늘날의 북한에서도 무궁화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것은 북한이 무궁화를 대한민국의 국화로 보기보다는 분단 이전의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꽃으로 인식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나라는 분단되었지만 무궁화는 갈라놓지 못했던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무궁화는 우리 한민족의 태극철학과 완전히 일치하는 꽃이기 때문입니다. 무궁화는 천지인 삼재와 음양오행의 형상을 두루 갖춘 꽃입니다. 원줄기에서부터 끝까지 계속 한 마디에 세 갈래씩 갈라져 나가는 가지는 천지인 삼재(三才)를, 다섯 갈래로 갈라진 잎사귀와 다섯 장인 꽃잎은 목화토금수의 오행(五行)을 뜻합니다. 무궁화는 빛의 광명민족인 한민족의 정신을 상징하듯 태양과 함께 피어나 태양과 함께 지며, 태양처럼 매일 새롭게 가장 오랫동안 피우는 꽃이기 때문입니다. 무궁화꽃은 날마다 이른 새벽 태양의 광명과 함께 피어나 새로 피고, 오후가 되면서 오므라들기 시작하여 해질 무렵 태양 빛과 함께 반드시 그 날로 꽃이 떨어집니다.
무궁화는 태양과 일맥상통하는, 태양과 운명을 같이하는 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태양처럼 매일 새로운 꽃이 연속적으로 피어, 초여름에서 가을까지 백여일 동안 끊임없이 가장 오랫동안 꽃을 피우는 것이 무궁화입니다. 그야말로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란 말이 무색할 만큼 ‘피고 지고 또 피어 무궁화라네’노래가사 그대로 무궁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사순절을 은혜중에 보내고 있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역사에 대해서도 알아야 합니다. 금년은 3.1운동이 일어난지 105주년째 되는 날입니다. 3.1운동은 아무리 억압이 심해도 자유를 향한 인간의 꿈을 막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역사적 계시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 위대한 독립의 선언이 겨울과 봄의 교차점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참 의미심장합니다.
얼었던 대지를 뚫고 일어서는 풀들을 주목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생명은 장엄합니다. 누르는 힘이 강할수록 솟구쳐 오르려는 힘도 커집니다. 생명은 일어섬입니다. 일어섬이 부활인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상주감리교회 성도들의 삶은 어떠합니까? 우리는 과연 예수의 혼에 사로잡혀 일어선 자가 되었습니까? 여전히 세상에 붙들린 채 욕망의 종노릇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오늘 3월3일이지만 삼일절 기념주일로 지킵니다. 1919년 삼일운동이 일어난지 올해로 꼭 105주년이 되는 아주 뜻 깊은 날입니다. 여러분들은 삼일 독립만세 운동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민족대표자 중에 기독교측이 가장 많았다는 것입니다. 민족대표 33인중 16명이 기독교인이었다는 것은 우리가 이미 잘 아는 사실입니다. 피해를 가장 많이 본 곳도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1919년 10월 장로교 총회 당시 발표에 의하면 3.1운동으로 체포된 사람이 3,851명입니다. 이 중에 2,162명이 고문당한 후에 풀려났으며 41명이 총살이나 사형을 당해 죽었고 6명이 고문을 당하다 죽었고 1,642명이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체포된 3,851가운데 목사와 장로가 134명, 전도사가 202명, 남자교인이 2,162명, 여자 교인이 531명으로 집계되었습니다. 기독교인이 전체 체포된 사람의 78%가 되었습니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전체 인구의 1.3%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렇게 적은 숫자였음에도 기독교인 대표가 제일 많았고 교회가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다는 것은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이 운동에 참여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삼일 운동과 관련하여 우리는 유관순 열사의 행적을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유관순 열사를 검거한 일경들은 그 운동의 주동자를 찾기 위해 온갖 고문을 가하면서 누가 시켜서 이 일을 했느냐고 집요하게 물었습니다. 그 때마다 유관순 열사는 하나님이 시켜서 한 일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시켜서 한 일이 바로 삼일운동이었고 그러기에 삼일 운동은 모든 기독교인들이 사명을 갖고 참여했던 철저한 기독교운동이었습니다. 3.1절 105주년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한국 민족사에서 특별히 3.1운동에서 기독교인들이 세운 업적이 얼마나 큰 가를 다시 한 번 기억하면서 오늘의 시대적 사명을 가다듬어야 할 줄로 생각합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자들에게는 삼일절의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눌려 사는 자리에 멈추어서 순응하며 사는 삶이 아니라 분명한 푯대를 바라보며 앞으로 전진해 나가는 깃발을 흔드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깃발은 십자가가 되어야 합니다. 그 십자가의 정신이 바르게 서 있어야 십자군의 삶을 사는 것을 지양할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정신은 예수님의 삶에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이번 사순절 기간을 보내면서 십자가의 정신을 다시 한번 우리의 믿음의 중심에 새기는 시간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바로 예수님의 삶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정신은 겸손의 정신이요, 순종의 정신이요, 자신의 사명을 바르게 인식한 정신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구하는 인생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총과 칼날의 억압 앞에서 비폭력으로 나아간 겸손의 자리입니다. 겸손은 자신의 자리를 버리고 낮은 자리로 내려가는 물과 같은 인생을 의미합니다. 겸손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삶입니다. 겸손은 내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바라보기에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문제가 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남을 비판하거나 판단하는 자가 아니라 칭찬하고 세워주고 격려하고 높여주고 존종하는 삶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이런 십자가의 겸손의 넘쳐나서 주님의 사랑을 온 누리에 전하는 우리 상주감리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에 애굽에서 종살이 하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모세를 부르시는 모세의 소명장입니다. 모세가 애굽에서 도망쳐 와서 장인의 양을 치고 있었을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당시 모세는 자기 민족을 애굽에서 이끌어낸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고 있었던 시절입니다. 40년 동안 광야에서 양을 치며 젊음을 다 보내는 처지였습니다. 민족을 사랑하는 열정도 식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도 하지 못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이런 모세를 택하여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출애굽의 역사는 한 마디로 전적인 하나님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애굽은 세계 최강의 문화와 군사력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비해 이스라엘 민족은 종살이하고 있던 노예들이었습니다. 오래 동안 노예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노예근성이 몸에 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나갈 수 있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출애굽의 가능성은 0%였습니다. 가능성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애굽에서 해방을 받아 출애굽 할 수 있었던 것은 100%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100%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에 애굽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가 이스라엘에게 임하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가 이스라엘에게 임하였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1.압제당하는 사람들이 부르짖는 소리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 이유를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출2:23절부터 읽어보면‘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당된지라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이 할 수 있었던 것은 단하나 부르짖는 것 밖에는 없었습니다. 부르짖는 것 외에 이스라엘이 할 수 있었던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애굽에서 고통당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 속에서 할 수 있었던 단 한 가지는 부르짖는 것 뿐 이었습니다. 그들이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을 구원하셨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이요 출애굽의 전체적인 내용입니다.
삼일 독립만세운동을 신앙적으로 표현하면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삼일운동은 세계열강과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소망과 우리의 고통과 우리의 의지를 소리 높여 외쳤던 부르짖음의 운동입니다. 삼일 독립운동을 펼치면서 우리가 한 일은 대한독립만세! 이것을 소리 높여 부르고 태극기를 흔든 것 밖에 없었습니다. 전쟁을 한 것도 아니요 상대방을 죽인 것도 아니요 일본과 싸운 것도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간절한 소망을 담아 부르짖은 것 이것이 삼일독립만세운동의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자유를 지키지 못하면 우리 자녀들은 피눈물을 흘려야 할 것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우리가 일제 36년 동안 배운 교훈이 무엇입니까?. 나라를 빼앗기고 자유가 없는 곳에서는 우리가 노예처럼 살고 짐승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배웠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태극기를 들고 광화문에 모이고 자유를 외치는 것입니다.
우리 상주감리교회에서 예배드리는 성도여러분 한번 해봅시다.
3창해봅니다. --대한독립만세--대한독립만세--대한독립만세--
세계열방은 우리의 부르짖음을 듣지 않았습니다. 애써 외면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은 그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애굽에서 신음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이스라엘을 구워하신 하나님은 일본의 압제에서 신음하던 대한민국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부르짖는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어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너는 내게 부르짖어라’ 하나님께 부르짖으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의 명령이요 그러기에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을 향하여 언제든지 부르짖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예레미야 애가2:18-19절에 보면, 예루살렘이 망하는 모습을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요청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주를 향하여 부르짖기를 딸 시온의 성벽아 너는 밤낮으로 눈물을 강처럼 흘릴지어다 스스로 쉬지 말고 네 눈동자를 쉬게 하지 말지어다 초저녁에 일어나 부르짖을 지어다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 쏟듯 할지어다 각 길 어귀에서 주려 기진한 네 어린 자녀들의 생명을 위하여 주를 향하여 손을 들지어다 하였도다’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우리는 밤낮으로 부르짖어야 하고 쉬지 말고 부르짖어야 하고 초저녁에도 부르짖어야 하고 눈물을 흘리며 부르짖어야 하고 우리의 마음을 다하여 부르짖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렵고 힘들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부르짖는 것입니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한계의 상황에 부딪쳤을 때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부르짖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때도 우리는 부르짖어야 하고 우리 자신뿐 아니라 우리의 자녀들과 가족들과 동족들을 위하여서도 부르짖어야 합니다.
부르짖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요 본분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자녀를 키워보면 다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부르짖는 것입니다. 배가 고파서 젖을 먹고 싶은데 젖을 주지 않으면 아이들은 칭얼거립니다. 오줌을 싸고 자리가 불편해서 기저귀를 갈아달라고 할 때도 아이들은 그냥 웁니다. 칭얼거리고 우는 것은 어린 아이들이 부르짖는 한 가지 방법입니다. 그렇게 부르짖는데도 엄마가 알지 못하고 젖을 주지 않거나 기저귀를 갈아주지 않으면 아이는 더 큰 소리로 웁니다. 더 힘써서 소리를 높여 웁니다. 그러면 알았다고 젖을 주고 기저귀를 갈아줍니다. 그런데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어린 아이가 우는 것을 누가 가르쳐주었습니까? ‘배고플 때는 울어라 오줌을 쌌을 때도 울어라’고 부모님이 가르쳐 주었습니까?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우는 것을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배고프면 웃지 않고 꼭 웁니다. 부르짖는 것은 하나님이 가르쳐준 인간의 본능입니다. 부르짖어야 합니다. 부르짖을 때 주님이 함께 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한 아버지가 아직도 힘을 제대로 쓸 수 없는 젊은 아들에게 큰 돌을 치워보라고 말했습니다. 그 아들은 열심히 돌을 치웠습니다. 그러나 그 커다란 돌이 움직일 리 없었습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이 방법, 저 방법을 사용하여 한참을 수고한 아들은 내가 최선을 다했지만 도저히 못하겠다고 포기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아들에게 ‘너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고 말을 합니다. ‘아들아 너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지금까지 아빠는 네 옆에서 너를 도와주기 위하여 서 있었다 그런데 너는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 너는 최선을 다한 것이 아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전능하신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부르짖는 것입니다.
내가 열심히 해서 안 된다고 그냥 그것으로 끝나는 것은 최선을 다하는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이 최선의 삶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도와주시기 위하여 우리 곁에 계십니다. 우리가 부르짖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부르짖으면 하나님은 도와주시고 해결 해 주십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이 진리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애굽에서 종살이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너무 힘들고 어려워서 그냥 부르짖었습니다. 일제의 총칼 앞에서 어찌할 수 없었던 우리의 조상들도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 도저히 못살겠습니다. 너무 힘듭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다 죽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 어찌하시렵니까?
하나님께 그냥 부르짖었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여러분의 상황이 어렵습니까? 고통스럽습니까? 너무 힘들어서 죽을 지경입니까? 어떤 상태입니까?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이 신앙입니다. 부르짖는 것은 절대 나약한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을 주님도 기뻐하시고 원하십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방법이 없을 때도 부르짖기 바랍니다. 문제가 있을 때마다 부르짖기 바랍니다. 길이 보이지 않을 때도 부르짖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부르짖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부르짖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요, 인간의 본성입니다.
2.압제당하는 사람들의 부르짖음은 하나님께 상달합니다.
7절‘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했습니다. 우리의 부르짖음은 때로 허공을 치고 메아리쳐 사라지는 것 같지만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부르짖음은 하나님께 상달합니다. 하나님은 우상과 같은 존재가 아니십니다.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내려가서 건져내시는 인격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의 부르짖음을 분명히 듣고 그 근심을 아시고 기꺼이 도와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인줄 믿습니다.
창세기 21장을 보면 아브라함의 후처였던 하갈이 아들 이스마엘과 함께 쫓겨나서 광야에서 부르짖는 장면이 나옵니다. 물이 떨어지고 더 이상 물을 구할 수 없었을 때 하갈은 ‘이제는 우리가 죽는가 보다’ 하며 서럽게 웁니다. 자신의 죽는 것도 안타까웠겠지만 무엇보다도 아들이 죽는 것을 본다는 것은 어머니로서 얼마나 안타까웠겠습니까? 멀리 떨어져 죽어가는 아들을 바라보며 안타깝게 울고 있던 하갈을 하나님이 찾으셨습니다.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일어나 이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하나님은 우리의 부르짖는 눈물의 소리, 신음의 소리를 들으십니다. 그 소리는 하나님께 상달합니다.
복음성가 ‘주만 바라볼찌라’ 에 보면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너를 어느 때나 바라보시고/ 하나님 인자한 귀로서 언제나 너에게 기울이시니/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찌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아무고 눈치 채지 못하는 그 작은 신음소리도 듣고 응답하시는 하나님께 우리는 부르짖어야 합니다. 애굽의 종살이에서 부르짖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르짖음이 하나님께 상달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셔서 이스라엘을 노예생활의 고통 속에서 해방시켜주셨습니다.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우리 선조들의 부르짖음도 하나님께 상달하였습니다. 혹자는 삼일 독립운동이 실패한 운동이라고 하지만 그러나 삼일독립운동은 절대 실패한 운동이 아닙니다. 삼일 독립운동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 민족에게 8.15해방이라는 선물을 주신 줄 믿습니다. 삼일운동을 통하여 우리의 독립의지와 독립할 수 있다는 민족의 저력을 확인받았기에 우리는 해방이라는 선물을 받게 된 것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우리의 부르짖음이 하나님께 상달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고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껴지실 때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할 일이 있습니다. 아직도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부르짖으면 주님이 인도하시고 축복하시고 역사하여 주십니다. 우리는 부르짖지 않아도 괜찮을 만큼 그렇게 능력이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부르짖지 않고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도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께 부르짖는 것이 신앙이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삼하 22장에 보면, 여호와께서 다윗을 모든 원수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그 날에 다윗이 시를 지어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시18:6절‘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다윗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 부르짖었기 때문입니다. 환난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부르짖었더니 하나님이 그의 부르짖음을 듣고 도와주시고 인도하셨기에 그가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주님도 고통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우면 하나님께 부르짖었겠습니까?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은 창피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은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부르짖는 사람은 사람에게 부르짖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이 가장 큰 일이고 가장 큰 사랑이고 가장 큰 힘입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은 교회를 위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도 나라를 위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가족을 사랑하는 사람은 가족을 위해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목회자를 사랑하는 사람도 목회자를 위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전도 대상자를 위하여 부르짖는 사람이 전도하는 사람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 여러분들은 지금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부르짖고 있습니까?
오늘은 삼일절 기념 주일입니다. 사순절은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며 우리의 부족함을 회개하고 그리스도인의 새사람으로 거듭나는 훈련의 기간이요 연단의 기간이요 영성의 기간입니다. 이 사순절에 여러분, 주님 앞에 나와서 많이 부르짖기 바랍니다. 모두가 어렵다고 합니다. 모두가 고난이라고 합니다. 이 환난의 때에 부르짖는 성도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를 위하여 가족을 위하여 전도 대상자를 위하여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부르짖을 때 주님은 응답하시고 축복하시고 은혜를 내려 주십니다.
3. 역사의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역사를 잊으면 역사는 반복 된다고 했습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그들의 고난의 역사를 후손들에게 철저히 교육시키고 있습니다. 자랑스러운 역사는 물론 부끄러운 역사를 현장에 보존하고 가르칩니다. 독일은 과거 침략전쟁을 통렬히 회개하고 피해를 입힌 나라와 민족에 사죄하며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가해자 독일의 빌리 브란트 총리는 1970년 12월 바르샤바 유대인 위령탑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과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언어와 문화를 말살하려 했던 일본은 지금도 회개와 사죄는 커녕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겨댑니다. 침략의 역사를 진심으로 반성하기는 커녕 사과할게 없다는 투의 망언을 일삼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을 인정한 1993년 ‘고노 담화’를 재검증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위험한 역사 왜곡과 우경화가 개탄스럽습니다.
고난의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책무입니다. 중요한 것은 일제가 어떻게 나라와 민족의 국토를 침탈했는지 왜 3.1운동이 일어났는지, 6.25가 어떻게 일어났는지 분명하게 알고 가르쳐야합니다. 당시의 정치는 사색당파가 서로 물고 뜯으면서 산산조각이 나 있었습니다. 약육강식의 제국주의 시대에 힘이 없는 우리는 일본의 침략을 막아 낼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의 실상은 어떻습니까? 100년 전과 똑같습니다. 그때는 그나마 우리나라가 한 덩어리였지만 지금은 두 덩어리에, 북쪽은 북쪽대로 남쪽은 남쪽대로 정부와 국민이 갈등하고 있습니다. 여와 야가 반목하고 있습니다. 교단 교파가 갈라져 다투고 있습니다. 3.1절 이 날, 우리나라의 정치뿐 아니라 모든 분야의 지도자들이 독립선언문으로부터 지혜를 얻고 꿈을 꾸고 새로운 비전을 품기를 원합니다.
3.1운동의 부활정신은 이러한 민족적 죽음에서 깨어나고자 하는 요인이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일본제국주의 집권자가 죽음만을 생산하고 있는 그 모든 진상을 폭로시켜 버리는 것이 3.1운동입니다. 또한 모든 사악한 인위적인 제도와 부패하고 음흉한 체제와 못 되고 악한 이데올로기가 결정적인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 바로 3.1운동의 부활정신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이제 우리는 3.1운동의 세 가지 기본정신을 살려서 보다 나은 차원으로 나라의 기초를 다지고 보다 나은 삶을 추구하는 정신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를 속박하는 낡은 체제로부터 벗어나려는 출애굽정신을 살려야 하겠습니다. 또한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자기 책임을 다하는 남은 자의 정신을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표현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보다 나은 시대로 부활하고자 하는 3.1정신을 계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를 위하여 가족을 위하여 전도 대상자를 위하여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부르짖을 때 주님은 응답하시고 축복하시고 은혜를 내려 주실 것입니다. 3.1절 기념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모두가 아픔을 치유받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가지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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