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 불멸의 새, 삼족오
금오(金烏) 혹은 준오(烏)라고도 한다. 태양에 까마귀가 산다는 신앙은 『초사(楚辭)』, 『산해경(山海經)』에서 볼 수 있는데, 세 발 달린 까마귀 설화는 전한(前漢) 시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고유(高誘)가 쓴 『사기(史記)』나 『회남자(淮南子)』의 주석이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다. 태양이 하늘을 건너가기 때문에 조류와 관련시킨 얘기는 이집트나 한국의 고구려 벽화에서도 그 예를 찾을 수 있다. 한(漢)나라 때의 책인 『춘추원명포(春秋元命包)』는 태양이 양(陽)이고, 3이 양수(陽數)이므로 태양에 사는 까마귀의 발이 세 개라고 풀이하고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자주 보이는 삼족오는 발이 세 개 달린 까마귀로, 태양을 상징하는 원형 안에 삼족오를 그린 일상(日象)으로 표현되고 있는데, 항상 둥근 달 안에 두꺼비를 그린 월상(月象)과 함께 천상에 좌우 대칭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어떤 때에는 고대 동방의 우주창조신화에 나오는 복희와 여와의 머리위에 일상과 월상을 받쳐 든 형태로 표현되기도 한다. 특히 태양 안에 삼족오를 그린 것을 ‘일중삼족오(日中三足烏)’라 하기도 하고 ‘금오(金烏)’라고도 하는데, 이는 고대 동방의 태양숭배신앙과 조류숭배신앙이 합치된 우주사상이다. 삼족오가 언제부터 유래했고, 그 기원은 무엇이며, 그 모습은 어떻게 변화했으며, 삼족오가 많이 표현되는 고구려 벽화에서 삼족오는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아래에서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산해경(山海經)』 대황망경(大荒東經)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대황의 한 가운데 얼요군지(孼搖郡抵)라는 산이 있다. 그 위에 부목(扶木)이 있는데 높이가 300리이고 잎은 겨자와 같다. 골짜기가 있어 이름을 온원곡(溫源谷)이라 했다. 탕곡(湯谷) 위에 부목이 있다. 한 개의 해가 막 도착하자 또 한 개의 해가 떠오르는데 이들 해에는 까마귀가 실려 있다. 그리고 『회남자(淮南子)』권 7 정신훈편(精神訓篇)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해 안에는 준오가 있고 달 안에는 두꺼비가 있다.
한편 당(唐) 서견(徐堅)의 『초학기(初學記)』권 30 인춘추원명포(引春秋元命苞)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적혀 있다. 해 안에 있는 삼족오를 양정이라 하는데, 그것은 온윤(溫潤)한 곳에서 성장한다. 아마 앞서의 인용글을 통해 볼 때, 세발 중 하나(가운데)는 남성의 상징인 양물(陽物)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월중섬여(月中蟾蜍)와 옥토(玉兎)에 대해서는 『문선(文選)』사희일월무주 인월추원명포(謝希逸月賦注 引月秋元命苞)에 다음의 기사가 있다. 달은 설명이 부족하지만 두꺼비와 토끼는 음양으로 거처하고 밝은 양은 음을 제압하고 음은 양에 의탁한다. 특히 두꺼비는 알을 많이 낳아 다산(多産)을 의미하는 여인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상의 여러 문헌을 보면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에서 널리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일, 월에는 단순히 강렬한 빛을 발산하는 태양의 의미만이 아닌, 특별히 삼족오와 섬여(혹은 옥토)를 가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 이처럼 태양 안에 세발까마귀가 표현되고 세발까마귀가 곧 태양을 상징하게 된 그 유래는 무엇일까? 여러 학자들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먼저 중국의 저명한 신화학자 손작운(孫作雲)씨는 일중삼족오를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무엇 때문에 해 가운데 까마귀가 있는가? 왜 까마귀는 다리가 셋인가?
첫째, 이는 해와 까마귀를 합쳐 해석한데 있다. (중간생략) 고대인들은 태양이 운행하는 것은 까마귀가 실어 가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처음에는 보통의 새이지 꼭 까마귀에만 제한되어 있지 않았을 것이다. (중간생략) 이는 해 가운데 꿇어앉은 까마귀가 있는 문제를 해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새를 토템으로 숭배하는 사람들이 왜 또 태양을 토템으로 하는가, 혹은 태양을 토템으로 숭배하는 사람들이 왜 또 새를 토템으로 하는가하는 사실들을 해석할 수 있다. ··· 이는 모두 동이민족이 새와 해를 같이 공동의 토템으로 하는 까닭이다.
즉 태양이 떠오르면서부터 그 아래로 까마귀가 동시에 따르는 것과 같이 운행하는 태양과 날아가는 까마귀가 한 점에 놓여 겹치고 있어서 마치 까마귀가 태양 안에 들어가 앉아 있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그리고 일종의 조(일중삼족오, 日中三足烏)는 다름 아니라 동이(東夷)민족의 태양토템과 새토템을 합친 이른바 연합토템으로서, 이는 다시 말해서 새를 토템으로 하는 동이민족이 또 한편으로는 태양을 토템으로 믿고 있는데서 연고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손씨는 두 번째 물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둘째,이 새는 무엇 때문에 삼족인가? 나는 해 가운데 새가 있다는 전설을 본래 토템신앙에서 그 기원을 찾았는데 이런 새는 근본상 신기한 새이지 보통새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이런 새들은 세 발로써 남다르다는 것을 나타낸다.
즉, 그는 까마귀가 세 발 달린 이유를 앞 서 말한 것과 같이 일(日)중의 까마귀는 동이민족의 새토템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까마귀는 근본적으로 범조(凡鳥)가 아닌 신조(神鳥)로서 삼족을 달아 평범한 새와는 달리 하였다고 보았다. 이와 같이 손씨는 일중삼족오를 동이민족의 새토템에서 기인하였음을 강조하고 있는데, 그 발생시기를 대개 씨족사회말기 또는 하(夏)나라 성립시기로 보고 이는 산동반도일대에서 발생되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이러한 삼족오는 동한(東漢)시대에 이르러서는 일종의 상서(祥瑞)로 변하게 되는데, 마치 토템동물인 용사(龍蛇), 봉황(鳳凰), 기린(麒麟)과 같은 원시신앙이 미신숭배로 변하는 것처럼 모든 토템동물은 상서로 변하는 것과 때를 같이 한 것이다. 한편 중국의 주도(周到)씨는 이와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장형은 『영헌(靈憲)』에서 이르길, 해란 양정(陽精)의 근원이며 모두 새로 이루며 까마귀와 같고 세 발이다.(『후한서(後漢書)』천문지 유소 주에서) (중간생략) 그는 말하길 해 가운데 까마귀와 같은 것들은 더욱 가깝고 과학적이다. 이런 까마귀와 같은 것들은 나는 태양흑점이 아닌가 하고 의심한다. (중간생략) 서한시기에 이미 태양흑점이 발견되었다.
즉, 주도씨는 앞서 그의 글을 인용한 대로 일중삼족오를 태양의 흑점으로 보고 있다. 주씨의 태양흑점설은 비교적 과학적인 것 같지만, 삼족오의 기원이 태양의 흑점을 발견한 시기보다는 훨씬 앞선 것으로 여겨지는 까닭에 이 설에는 다소 논란이 있다. 한편, 이병도 박사는 「강서고분의 연구」에서 해 가운데 까마귀를 세 개의 발로 표현한 것은 역시 음양사상(陰陽思想)과 관계가 있다 하였다. 그것은 벽화의 일월상이 역시 음양가류(陰陽家類), 도가류(道家類)의 사상과 색채를 다분히 띤 것이라고 보지 아니하면 안된다고 하여 음양사상에서 기인하였음을 논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 여러 학자들은 일중삼족오에 대하여 동이민족의 태양토템과 새토템설의 ‘연합토템설’, ‘태양흑점설’, ‘음양사상’설을 주장하고 있다.
일중삼족오(태양속 세발 까마귀)와 월중섬여(달 안 두꺼비) 및 인수사신(人首蛇身, 사람얼굴을 하고 뱀의 몸을 한 것)의 복희씨와 여와씨에 대한 신화전설이 성행하기 시작한 시기인 한대(기원전 206~서기 220)에는 이러한 신상(神像)을 표현한 그림들이 그려졌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하남, 산동, 호남, 강소, 사천 및 낙랑지역에서 이런 신상들이 발견되고 있다. 여기에서 특별히 주목되는 것은 이들이 모두 발해연안의 석묘계(돌로 축조되는 고분)의 고분에서 출토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 일중삼족오에 대한 신화전설은 주로 벽화석묘를 비롯하여 화상묘(畵像墓), 화상전묘(畵像塼墓), 백화(帛畵), 칠화(漆畵), 청동기물(靑銅器物) 등에 묘사되고 있다. 가장 이른 시기의 일중삼족오의 초기형상으로는 서한 전기(기원전 175~기원전145)의 장사 마왕퇴 1호묘 출토의 백화(帛畵) 상면 좌우에 그려진 일상(일중이족오, 태양안 이족오)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태양 안에는 태양을 상징하는 원형 안에 두발 달린 까마귀가 그려져 있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이른 시기의 일중삼족오의 형상으로는 하남성 낙양 복천추묘 벽화에서 월중섬여와 나란히 그려진 일중삼족오이다. 이 삼족오는 까마귀가 나는 모습을 위에서 본 모습을 그린, 즉 부감법으로 그린 것인데 이는 역시 삼족오로 볼 수 있다. 복천추벽화묘는 기원전 86~49년경에 조성된 것으로 한대벽화로는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다. 특히 복천추벽화묘에는 인면조신(人面鳥身, 사람 얼굴에 새의 몸)의 신상이 그려져 있는데 이와 같은 인면조신의 형상은 평양채협총출토 채문칠갑의 좌측 상부에 그려진 날개가 있는 괴이한 사람 상이나 채문칠안의 상면에 그려진 괴인(怪人) 조수문(鳥獸紋)에서도 볼 수 있다. 한편 황해도 안악 1호묘의 고구려의 벽화에도 이러한 상이 보이고 있어 매주 주목된다.
비교적 이른 시기의 중요한 유물로 역시 평양 석암리 219호 왕광묘(王光墓) 출토 칠간통(漆簡筒)에 장식한 은판투조 일중삼족오를 들 수 있다. 이 은판투조에는 원형전통의 상하에 일중삼중오와 월중섬여와 토끼가 조각되어 있다. 석암리 219호묘는 대략 기원전 2년경의 낙랑 왕근(王根)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동한시대 초기의 것으로는 중국 하남성 당하현에 있는 화상석묘의 묘실 천경부에 월중섬여, 토끼와 함께 두 판석에 새겨진 일중삼족오를 들 수 있다. 이 삼족오는 세발 달린 까마귀를 측면으로 그렸다. 이는 고구려고분벽화에 보이는 측면상의 삼족오와 매우 유사한 형상이다. 한편 이 일중삼족오의 아래쪽 판석에는 장홍형(長虹形, 긴 부채꼴 모양)의 일신양수신상(一身兩首神像, 하나의 몸에 두 개의 얼굴이 표현된 상)이 새겨져 있는데 이와 같은 형상은 일신양수의 천왕지신총의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당하현 화상석과 비슷한 시기의 일중삼족오가 하남성 남양, 양관사 화상석묘에서 출토된 동제검병의 양면에 용머리위에 일중삼족오와 월중섬여와 토끼를 조각한 일상과 월상이 있다. 이 시기는 대개 동한 초기나 중기로 보고 있는데, 여기에서 용의 출현은 곧 복희, 여와의 출현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시기 이후의 것으로는 유명한 산동성 역성현 효당산 곽씨묘 석사(石祠)와 가상현 무씨사(嘉祥縣 武氏祠) 화상석을 들 수 있다. 그 중에서 무씨사화상석은 우리에게 너무도 잘 알려진 그림이다. 특히 이 화상석 그림 중에는 삼족오의 그림은 없으나 복희, 여와가 자와 콤파스를 들고 용(龍)․사(蛇)의 꼬리를 들고 있는 그림이 있다. 그리고 장흥형의 일신양수와 신상이 있다. 이 밖에 동한말기의 일중삼족오의 신상이 중국 강소성의 화상석묘나 사천성지방의 화상석과 석관에서도 보인다.
2.2.1. 고구려고분벽화에 보이는 삼족오
고구려고분벽화에 보이는 일중삼족오와 관련되는 내용을 세 가지로 분류할 수가 있는데, 첫째가 고분의 천정에 성수(별자리)과 함께 동쪽에는 일중삼족오를, 서쪽에는 월중섬여를 묘사한 ‘일중삼족오 월중섬상’이다. 다음으로 둘째는 복희․여와 신화에서 볼 수 있는 쌍룡(혹은 뱀)쌍교형(雙龍雙交形, 두 마리 용이 서로 교차하고 있는 형태)의 교미쌍룡(交尾雙龍, 혹은 蛇, 특히 꼬리를 교차하고 있는 형태) 및 양인수일사신(兩人首一蛇身, 머리는 둘인데 뱀의 형태를 띤 하나의 몸)을 묘사한 ‘교미복희여와상’이다. 마지막으로 셋째는 앞 두 개가 결합한 형상으로 인수룡신유우(人首龍身有羽, 사람의 머리에 용의 몸을 하고 날개를 가지고 있는 경우)의 복희씨와 여와씨가 양 손으로 일중삼족오와 월중섬여(혹은 옥토)를 머리 위에 받들고 있는 봉일중삼족오섬여(捧日中三足烏蟾蜍, 받들고 있는 태양안의 까마귀와 두꺼비) 복희여와상, 복희여와상으로 나눌 수 있다. 이와 같은 세 종류의 형상으로 다시 고구려고분벽화에서 찾아보면,
첫째 유형으로는 중국 길림성 집안시 통구 무용총과 각저총 그리고 장천 1호묘를 그 대표적인 유적으로 들 수 있는데, 이들은 말각조정석(사방에 판석을 세우고 천정을 바로 덮지 않고 모서리를 줄여 나가며 천장 부분을 좁혀서 천정에 돌을 덮는 방식, 즉 이 방식으로 조성할 경우 천정 부분은 여러 층의 단이 생기게 마련이고, 고구려 벽화에는 이런 단에 빽빽하게 그림이 그려져 있다.) 측면에 그려진 별자리들에 둘려 동서로 배치되고 있다. 이 밖에 이와 같은 유형으로는 주로 황해도 평안남도와 그 일대에서 발견되고 있는데, 그 예로는 황해도 안악 제 1호분, 제 3호분, 평안남도 강서 태성리연화총 등의 비사신도고분(非四身圖古墳)과 평남지구의 강서 약수리벽화고분, 강서 삼묘리중묘, 용강 쌍영총, 덕화리 제 1․2호분, 평양의 진파리 제 1․4호분 등의 사신도고분의 천정에서 대개 성숙과 함께 발견되고 있다.
둘째 유형으로는 집안 통구 삼실총과 평안남도 순천(順川) 천왕지신총(天王地神塚)을 들 수 있는데, 삼실총의 경우에는 제2실과 제3실의 천정에 각각 교미쌍사상(꼬리를 교차한 두 마리의 뱀)을 그렸으며, 이는 뱀(혹은 용) 두 마리가 몸통을 세 번 감고 꼬리에서 다시 반대로 한 차례 감은 이른바 복교미형(復交尾形)이고 머리는 서로 마주보고 있는 형상으로 이는 중국 고문헌에 보이는 ‘비유(肥遺)’라고 볼 수 있다. 한편 천왕지신총(天王地神塚)에는 주실천정상부(主室天井上部) 제 1단부 북면에 양인수일룡신상(머리 둘에 하나의 용 몸)을 그렸는데 몸은 한 마리의 용의 형상이고 머리와 꼬리에 두상으로 구사하고 있다. 중국 고문헌에는 이를 ‘연유(延維)’라고 했다. 이와 같이 교미쌍사는 일종의 신사(神蛇)로서 역시 중국 고대신화에 자주 보이는 복희씨와 여와씨의 신상(神像)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와 같은 양인수일용신상은 역시 복희씨와 여와씨의 신상이다. 또 이 고분의 현실천정상부 제 2단부 동서에는 일중삼족오를, 서면에는 월중섬여의 일월상이 별도로 그려져 있다. 그러므로 이 형식은 아마 다음 유형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형식이 아닌가 짐작된다.
셋째 유형으로는 집안통구 사신총, 오회분4호묘, 오회분5호묘 등 사신도 주제의 고분의 천정에서 북두칠성 등의 별들과 함께 발견되고 있다. 이 중 5회분 4호묘의 경우를 보면 말각조정의 제 1층석의 동북말각상에는 인수용신봉일월신상(人首龍身捧日月神像, 사람의 얼굴에 용의 몸을 한 존재가 태양과 달을 받치고 있는 형상)을 동남에는 비천과 우수인신상(牛首人身像, 소의 머리를 하고 사람 몸을 한 형상), 서북에는 승룡선인상(乘龍仙人像, 용을 탄 신선의 형상)을, 서남에는 야륜장양인상(冶輪匠兩人像, 철을 만드는 장인의 모습)이 배치되고 있으며, 천장의 덮개돌 아래면에는 교룡문(交龍紋)이 있다. 4호묘의 동서남북면에는 각각 모두 39마리의 용을 그렸다. 특히 동서말각상에 있는 일월신상을 보면 일신상은 좌측에 있고 남자의 상징으로 깃이 있는 갈색 옷을 입고 허리에는 갈색 두건을 두르고 있으며 양 손으로 갈색의 태양을 머리 위에 받들고 있다. 그리고 태양 안에는 왼쪽을 향한 삼족오를 안배하였다. 월신상은 좌측에 있고 여인상이며 산발을 하고 녹색 우의를 입고 허리에는 갈색 두건을 두르고 있으며 양쪽 손으로 흰색을 달을 머리 위에 받들고 있으며 달 안에는 섬여(두꺼비)를 그려 넣었다. 일신과 월신의 양편과 중앙에는 보리수를 그렸다. 이와 같이 셋째 유형은 인수사신(人首蛇身)의 복희씨와 여와씨만 그려지던 형태와 태양 속 삼족오와 달안 두꺼비만 그려지던 형태가 결합한 신상이다. 고구려 벽화고분에서 삼족오가 나타나는 벽화고분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유형인 일중삼족오와 월중섬여만이 출현하는 고분은 초기 벽화고분(4~5세기)에 해당하는 집안 통구 무용총과 각저총 및 평안남도, 황해도 등 주로 고구려남부지역에서 초․중․후기에 걸쳐 꾸준히 출현하고 있다.
둘째 유형은 대개 중기에 해당하는 벽화고분에서 발견되고 있으나 집안 삼실총이나 평안남도 순천 천왕지신총과 같이 복희씨와 여와씨만이 출현하는 예는 고구려 벽화고분에서는 비교적 희소한 편이다.
셋째 유형은 모두 사신도가 출현하는 후기고구려 벽화고분에서 발견되고 있다. 이 시기는 또한 일중삼족오와 복희씨가, 그리고 월중섬여와 여와씨가 결합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는데, 이 시기는 대략 6세기경으로 추정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2.2.2. 벽화 이외의 삼족오
고구려벽화 이외에 1941년 평안남도 중화권 진파리 제 7호 고분에서 고구려의 왕관으로 추정되는 일중삼족오금동관식(日中三足烏金銅冠飾)이 출토되었다. 이 관식은 높이가 약 13cm, 폭이 약 24cm의 반원형으로 금동판에 문양을 투조한 수법이며 중앙에는 태양을 상징하는 원권(圓圈)을 두르고, 그 안에 삼족오를 안치하였다. 원권의 상부에는 곧 날아갈 것 같은 봉황(鳳凰)을 올리고 있으며 원권의 하부에는 비룡(飛龍)같기도 하고 비운문(飛雲紋) 같기도 한 유려(流麗)한 문양을 조각하였다. 이 관식은 특히 2002년 겨울부터 2003년 봄까지 코엑스 몰에서 열린 ‘아! 고구려전’에 출품되었던 유물이기도 하다. 당시 이 관식의 용도에 대해서, 이제까지 왕관일 것이라는 주장과 달리 왕들이 사용했던 베개의 양 측면에 달았던 장식품이 아닐까하는 일부 학자들의 주장도 있었다.
고구려 인접지역의 삼족오에 대해서 살펴보는 일은 고구려의 삼족오가 직접적으로는 어느 나라로 그 영향을 받았는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주며 또한 당시에 고구려가 주변 국가와 매우 빈번하고 친밀하게 문화교류를 했음을 보여 줄 수 있을 것이므로, 이 부분에 대해 살피는 일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고구려 이외의 지역에서 세 가지 유형의 삼족오를 찾아 볼 수 있다. 그 첫 예로는 중국 요녕성 북표현 장군산에서 발견된 북연(北燕)의 벽화석곽묘를 들 수 있는데, 부부묘로 추정되는 2묘중 제 1호묘로 불리는 고분이 문제의 유적으로서 석곽내의 4벽에 인물도를 그리고 있으나 탈락이 심하여 잔편만 남았고 천정의 9매의 석판으로 연결된 옥개석(屋盖石)에는 별자리, 구름, 새 등이 그려져 있는데 특히 별그림 중에는 일월도가 발견되고 있다. 태양은 흰 바탕에 붉은색으로 일륜을 그렸고 태양 가운데는 검은 색으로 조류를 선으로 그렸는데 화면의 훼손이 심하여 까마귀의 다리가 두 개인지 세 개인지 분별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월상은 담황색으로 월륜을 그렸고 월중에는 흑색으로 옥토를 그렸다. 이 무덤은 북연(北燕, 409~436)의 권력자였던 풍소불(馮素佛)이란 사람의 묘로 추정되는데, 그가 사망한 해가 415년이므로 이 무덤은 415년경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 풍소불묘는 고구려 고분처럼 석실묘제를 쓰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새문양이 5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무용총이나 각저총의 것과 매우 유사하여 거의 시간 차이 없이 중국의 삼족오 양식이 고구려에 전해졌음을 추정하게 한다.
그리고 중국 섬서성 서안시에 있는 북주(北周) 건덕원년(572년)명 필류관묘석관(匹婁觀墓石棺) 선각화(線刻畵)를 들 수 있는데, 북주는 선비계의 나라로 이는 고구려의 셋째 유형에 속하는 일중삼족오와 복희씨, 월중섬여와 여와씨가 결합된 이른바 인수사신봉일월신상(사람 머리에 뱀의 몸을 하고 해와 달을 들고 있는 형상)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전자와 마찬가지로 교미형이기는 하지만 봉일중삼족오의 복희씨상을 좌측에 안배하였으며 그 형상은 상반인신에는 날개옷을 걸치고 하반신은 비늘 문양을 하고 있다. 고구려와 동일한 일중삼족오, 월중섬여와 복희여와의 신화전설을 갖고 있고 특히 북연이나 북주의 묘제가 석실 내지 석관을 사용하고 있고 또한 사람을 부장하는 풍속 등이 고구려와도 매우 상통함은 고구려가 당시 이들 북조 국가들과 매우 친밀한 관계에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 밖에 중국의 서역지방의 토노번성(吐魯番城) 동남 50리 지점의 함납화탁구성고분(唅拉和卓舊城古墳)에서 발견된 수, 당 시기의 고창국의 비단 그림에서도 일중삼족오와 복희와 여와가 결합된 신상이 보인다. 하나는 오럴 스타인(Aurel Stein)의 「Innermost Asia」에 수록된 신상(神像)으로 이는 양인수신룡미상(兩人首身龍尾像)이며 용꼬리는 고구려 두 번째 유형인 삼실총벽화의 교미쌍사와 같이 네 번 감은 이른바 복교미형(復交尾形)이다.
이처럼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나타나는 삼족오의 여러 가지 형식은 한나라에서 비롯되어 남북조시대의 북조계 국가에까지 이어지고, 북조계 국가에서 유행했던 양식이 곧 고구려에 영향을 미쳤음을 살필 수 있다.
첫째, 실제의 새 모양을 간직한 채로 변형되는 것으로 각종 고분의 삼족오와 우리나라 민속에서 보이는 삼두매(一足三頭鷹, 하나의 발을 가지고 있고 세 개의 머리를 한 매의 모습), 그리고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과 『악학궤범(樂學軌範)』 등에 보이는 삼두삼족주작(三頭三足朱雀) 등이 바로 그것이다.
둘째, 삼족오가 지닌 '3수 분화의 세계관'과 '삼신사상'이 구체적인 새 모양을 넘어서서 삼태극(三太極)으로 추상화되는 변형이 일어나는 경우이다. 삼족오에서 삼태극으로 추상화되는 중간단계의 모습이 보물 635호인 '신라 미추왕릉 지구 계림로 14호분 출포 장식보검'에 잘 나타나 있으며, 이런 추상화는 이미 주(周)나라 시대에 확립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셋째, 전국시대이후 특히 한나라 시기에는 음양오행론이 확립되면서 삼족오는 남방(南方) 화(火)를 상징하는 주작(朱雀)으로 변형된다. 중국에서 발견되는 주작들은 모두 다리가 2개로 변화하여 '3수분화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음양오행론 안에 수용된다. 그러나 우리나라 『조선왕조실록』이나 『악학궤범』에 보이는 주작은 분명하게 '머리가 셋이고 다리도 셋'인 삼두삼족(三頭三足)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어 주작이 고대 삼족오의 변형임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이런 삼족오의 변형이 학술적으로 체계적으로 설명된 것은 아님을 여기서 일단 밝혀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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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원문보다 무슨 참고문헌이 이렇게 많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