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정학(河正學) |
*** 하정학 프로필 *** 1930년 동로면 간송1리 출신 동로초등학교 12회 졸업, 한학(漢學) 수학 육군보병학교 28기 졸업 육군 대위 전역(1967년) 동로면 예비군 중대장 역임(8년간) 농업협동조합 동로단위조합장 역임(6년간) 문경시 향토사연구위원(현재) |
◆ 마광리(磨光里) : 1484년 경(약 520년 전) 단양인(丹陽人) 우진사(禹進士)가 개척하였으며, 그 후 진사
◆ 꽃재(花嶺,화령) : 마광 동북쪽에 조그마한 동리가 있는데 춘삼월(春三月)이 되면 두견화(杜鵑花,진달래꽃)가 만발하여 마을 전체를 뒤덮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2) 인곡리(仁谷里)
◆ 인곡리(仁谷里) : 동로면내 마광을 포함하여 9개 이동(里洞)이 모두 삼국시대
◆ 원터(院垈,仁板里;인판리) : 통일신라로부터 고려를 거쳐 조선 태종 13년 조령로(鳥嶺路)가 개설되기 전까지 도읍(都邑)에서 영남 지방으로 통하는 관로(官路) 및 민로(民路)가 충청도에서 경상도로 오자면 현 미륵사지(彌勒寺址)에서 대원령(大院嶺,하늘재)을 넘고, 갈평 호항령(狐項嶺,여우목고개)을 넘어서 동로 소재지를 거쳐 사벌(沙伐), 다인(多仁)으로 가는 통로와 수평리(水坪里)와 인판리(원터)를 거쳐 예천과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 및 동해 영덕 등지로 교통하던 시기에 이곳에 원(阮;여관)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곳을 지나는 길손을 위한 숙박 시설을 갖추어 쌀과 야채, 땔감 등을 항시 비치하여 놓고 빈 상자 옆에 기록된(가격표)대로 돈을 넣고 가도록 하였다. 과객의 편의를 제공했던 원(阮)이 있어 ‘원터’로 이름이 붙여졌다고 전해오고 있다.
◆ 돌문안, 돌문밖 : 마광리에서 인곡리 몽고지 동네를 약 1마장 못미쳐 가서 경천댐 축조로 신작로를 개설한 관계로 산모퉁이를 돌아서 가게 되는데 그 지점에서 약 30m 아래에 있는 마을 중앙에 돌문이 있어 그 안에 있는 마을을 ‘돌문안’, 그 밖에 있는 마을을 ‘돌문밖’이라 불렀다.
일제시 산북에서 동로 소재지까지 신작로가 개설되면서 선돌문(立石)은 큰 느티나무 옆에 묻혀 있다가 1986년 경천댐이 축조되면서 지금은 완전히 수몰되고 말았다. 돌문이 있었던 관계로 마을 이름이 그렇게 불리어졌다고 하나 돌문이 무엇을 상징하는지는 문헌상의 자료가 없어서 알 수가 없다.
◆ 사기막골(沙器幕골) :조선 초기 도자기 생산 기술이 처음 도입된 곳으로 예천의 사부리(沙夫里), 두인리(杜仁里), 산북의 소야리(昭野里), 종곡리(鍾谷里) 등 경북의 북부 지역에 광범위하게 분포된 분청자기(粉靑磁器) 요지(窯址)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3) 수평리(水坪里)
◆ 수평리(水坪里) : 원래 수평리는 갈평동(葛坪洞,칡들)으로 석평리(石坪里,돌머리; 수몰 전 東部)와 화장면(花庄面)의 수한리(水閑里, 물안,무라이)를 병합하여 이루어진 동리이다. 동로면내에서는 벌재 큰들 다음 큰들로서 처음에는 칡밭을 일구어 마련했다 하여 ‘칡들’(칫들) 또는 ‘수평’(水坪)이라 하였다.
◆ 창마(倉마) : 대동지지(大東地誌)와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보면
◆ 무라이(水閑里,수한리) : 화장면에 속해 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당시 수평리에 편입된 동리로서 사불산(四佛山) 벽에서 흐르는 개울물이 경사가 비교적 순해서 흐름이 한가롭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일설로는 어느 선지자(先知者)가 경천댐이 축조되면 ‘물안’이 될 것을 예상해서 붙여 놓은 이름이라고도 한다.
★ 비리(遷,천) : 모랭이를 돌아가는데 뚫린 길이라 하며 문경시내에서는 점촌에서 문경으로 가는 길목 진남교반(鎭南橋畔)에서 불정으로 통하던 ‘토끼비리’(兎遷,토천)가 유명하다. 그리고 우리 동로에는 갈평비리(葛坪遷, 수평에서 원터로 돌아가는 비리), 구정비리(九鼎遷, 간송1리), 마진비리(馬盡遷) 등이 있다. (참고 : 비리→벼루→벼랑)
(4) 간송리(磵松里)
◆ 솝들(솟대들), 마진비리(馬盡遷) : 송평동(松坪洞,솝들)에 함양박씨(朴氏) 성을 가진 사람이 무과에 급제하고 들 한가운데 솟대를 묻었다 하여 ‘솟대들’이라
오래 동안 전해오면서 ‘솝들’이라 변음되었다 하며, 그 동리 앞을 말을 타고 지나는 사람은 마진비리(馬盡遷)에 이르면 말에서 내려 경의를 표하며 걸어서 갔다 하여 ‘마진비리’라 전해지고 있다.
◆ 간좌골(艮坐골) : 영조 47년 경 예천군 보문면 성본리에 살고 있던 여광벽(呂光壁)이라는 분이 일찍 취처(興壤李氏)를 하였으나 불행하게도 상처를 하고, 그 곳에 머무를 뜻이 없어 예천군 하리면 맛질로 이사를 와서 재취(順興安氏)를 하였으나 그 또한 곧 세상을 떠나매 다시 이사하여 터전을 잡은 곳이 현재의 간좌골(艮坐골) 마을이다. 그 동리에 들어오니까 경주金씨네가 이미 자리잡고 살고 있었다고 전해지나 확실한 고증은 없다. 그러나 여(呂)씨의 세 번째 부인이 경주金씨임이 분명하니 金씨네가 먼저 터를 잡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 후 진성이씨(眞城李氏)네가 들어오게 되었는데, 呂씨가 바로 진성 李씨네 외손(外孫)이었던 연고로 들어오게 되었으며, 지금은 부락내 대문호(大門戶)를 이루고 있다. 처음 들어올 때는 그 동리가 풍수지리설에 의거 집 좌향(坐向)을 간좌(艮坐; 정北과 정東 간을 등지고 南西 간을 향하는 자리)로 놓아야 한다는 설에 의해 그 마을의 좌향이 간좌(艮坐)로 이루어졌고, 그래서 동리 이름이 ‘간좌골’(艮坐골)로 불리게 되었다 한다.
◆ 천주동(天柱洞), 구정비리(九鼎遷) : 행정리동으로는 간송의 주동으로 뒷산이 천주산(天主山)으로 그 산 밑에 자리잡은 동리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수평리에서 천주동 700m 못미쳐 금천(錦川)에 구정비리(九鼎遷)가 있는데 이곳에는 천작(天作)으로 암반 위에 솥을 아홉 개를 동시에 걸칠 수 있도록 홈이 패여져 있다. 옛날 보부상이 그곳에서 요기를 하기 위해 밥을 지어 먹었다고 해서 ‘구정비리’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 사부래이(沙夫洞,사부동, 四佛峴) : 고산자(孤山子)
◆ 허공다리(虛空다리) : 송평동에서 소재지 쪽으로 가다가 보면 암벽과 개울이 맞물린 곳에 암벽과 암벽 사이에 허공이 있는데, 옛날 통행인들이 그곳에 나무로 다리를 놓고 통행했다 하여 그 모퉁이 이름을 ‘허공다리’ 모퉁이라 불렀다 한다.
◆ 할무세이(姑城,고성) : 뒷산에 신라 시대시 축조된(편집자 주 : 최근 연구에 의하면 고구려의 석성이라 함. 11쪽 참조) 노고성(老姑城)이 있다 하여 ‘할무세이’ 또는 ‘할미성’으로 이름이 붙여졌다.
(5) 석항리(石項里)
◆ 돌목, 석항리(石項里) : 옛날 영주군 상리면 일부인 월경동(越境洞,지금 龜洛里;구락리)과 수진계리(水眞溪里,무진골)와 돌목을 병합하여 ‘석항리’라 부르며 1914년 동로면에 편입되었다. 여러 개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동네마다 돌이
많아 ‘돌목’으로 불리게 되었다. 돌목은 중간마와 윗돌목으로 구분된다.
◆ 솥터매기 : 예천군 용문면 용문사(龍門寺)로 넘어가는 고갯길 못미쳐 부락에 솥을 굽던 가마터가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무진골(水眞溪里, 점마) : 영조 46년에 석릉군(石陵君) 용(龍)의 5대손인 석계공(石溪公) 정선(旌善) 전학문(全鶴文)이 정선에서 예천 금곡동(金谷洞,금당실)을 거쳐 이곳에 정착하고자 와 보니 현 석항리 801번지에 예천임(林)씨가 미리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 全씨 일가의 손세(孫勢)가 번창하여 약 200여 년 동안 동리 100여 호 중 80여 호를 全씨 문중이 차지할 정도로 집성촌(集姓村)을 이루었다.
처음 마을 한복판 돌 틈에서 솟아나는 우물이 있었는데 아주 맑고 물맛이 뛰어났다. 연 중 수량의 변화가 없고 항시 흘러 넘쳤다. 동민들이 이 물은 7년대한(七年大旱)에도 다할 날이 없을 것이라면서 ‘무진골’ (水眞溪里,수진계리)라 붙여진 이름이 전해오고 있다. 한편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는 솥가마터가 말해 주듯 솥을 만들어 팔던 마을이라 하여 ‘점마’ (店마)라고도 불리고 있다.
◆지통마(紙筒마) : 닥나무를 많이 재배하여 한지를 뜨는 지통(紙筒)이 설치된 동리라 하여 ‘지통마’라 불리어졌다고 전해오고 있다.
◆ 눌기(臥旗洞, 기를 눞힌 동네) : 옛날 어느 힘센 장수가 나타나서 그곳에 오래 유진(留陣)할 계획으로 병졸들과 진을 치고, 투구는 마을 뒷산 투구봉에 벗어 두고, 말은 마산(馬山)에 매어 두고, 무리를 상징하는 깃발을 세워 두었는데 얼마를 가지 않아 그만 그 깃발이 바람에 누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전해오고 있다.
◆ 구마(舊洞) : 약 500년 전에 경주金씨가 터전을 잡고 들어와 농사를 짓고 마을을 이룩하였는데 이 마을이 이웃 어느 마을보다 오래된 마을이라 하여 ‘구마’ 또는 ‘굿마’로 불리어졌다고 전해오고 있다.
◆ 그나기(龜落里,구락리) : 옛적 어느 해 오랜 장마비로 홍수가 심하게 났는데, 갑자기 천둥이 치고 먹구름이 몰려 오는 기상이변이 일어나더니 하늘로부터 홀연히 큰 거북 한 마리가 물줄기를 타고 땅으로 떨어졌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이웃 동리 사람들이 이곳이 거북이의 운을 받은 상서로운 땅이라 하여 집을 짓고 터전을 잡아 살게 되었으며, 거북 ‘구’ (龜)와 떨어질 ‘락’ (落)을 써서 마을 이름이 생겨 났다고 한다.
◆ 성골(城골), 양지마(陽地마) : 이 마을들은 전후좌우로 바람막이 역할을 해 주는 산들이 아늑하게 둘러쳐 있어 그 골 안의 모습이 마치 성에 둘러 쌓인 것처럼 보인다 하여 ‘성골’이라 하고, 그 안의 마을에 볕이 들어가 따뜻하다 하여 ‘양지마’라 불리어졌다고 한다.
첫댓글 예 공부많이 하고 갑니다.
고향의 이름 점마 다시보니 새롭습니다 우리동네는 모두 친척이지요 ㅎㅎ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