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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3:31~32 |
마가복음 4:30~32 |
누가복음 13:18~19 |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
또 이르시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까 내가 무엇으로 비교할까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
상징과 설명
예수께서는 이 비유의 의미를 직접 설명해 주지 않으셨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비유와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사용된 상징들이 뜻하는 바를 이해할 수 있다.
1. 겨자씨 한 알: 킹제임스성경(KJV)은 장황하게 번역하여 “겨자씨라는 곡식 grain of mustard seed”이라고 했다. “겨자씨”는 그리스어 시나피 sinapi라는 말을 번역한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겨자”를 의미한다. 곡식은 까꼬스 kakkos라고 하는데, 그 뜻은 “곡식 grain”이나 “씨앗 kernel”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성경이 진정으로 말하는 바는, “겨자 씨앗 한 알”이다. 성경 전체에서 겨자씨에 대하여 언급하는 곳은 단지 두 곳뿐이다. 마태복음 17:20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원인이 있다고 설명하셨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없는 연고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믿음이 겨자씨 한 알만큼 만이라도 있다면, 이 산을 명하여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그대로 될 것이요, 너희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이를 다른 말로 하자면, 그들의 믿음이 너무 작아서 겨자씨 한 알에 견줄 정도라는 것이다. 그러나 겨자씨 한 알만큼의 믿음만 있어도 그들은 산을 옮길 수 있을 것이었다. 누가복음 17:6도 유사하다. 믿음을 크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의 믿음이 겨자씨만큼만 있을지라도, 이 나무에게 명하여 ‘뽑혀 바다에 던지우라’할지라도 그렇게 되리라.” 그러므로, 성경은 스스로 해석하는 바를 따를 때, 우리는 겨자씨 한 알은 작은 분량의 믿음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 정도만 있어도 큰 역사가 나타나리라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을 행하는 그 능력은 겨자씨만큼의 크기로 묘사된다. 겨자씨를 깨물어 보면, 당신은 내가 하는 말의 의미를 알 것이다. 또한, 그 비유 자체로부터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겨자씨는 자라나서 어떤 것의 시초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겨자씨는 작지만 능력 있는 믿음이며 후에는 거대한 어떤 것이 된다는 것이다.
겨자씨 한 알 =작지만 능력 있는 믿음으로 어떤 다른 것이 된다
2. 그 사람: 우리가 앞서 살펴본 비유에서, 씨를 뿌리는 그 사람은 예수님이라고 있다(예, 마태복음 13:37). 겨자씨 비유에서 달리 생각할 것은 없다.
사람=예수님
3. 밭, 땅, 채소밭: 각 복음서에서 설명하는 단어는 다르다. 마태복음의 설명에 따르면, “밭 field”이라고 말한다. 가라지의 비유를 설명하시면서, 마태복음 13:38에서 예수께서는 밭이라는 단어가 상징하는 바는 세상(꼬스모스-지구나 세상의 체계)이라고 말씀하셨다. 마가의 설명은 “땅 earth”이라는 것인데, 이 단어는 헬라어 “게 ge”에서 온 말이다. 그 의미는 “흙” 또는 “땅”, “바닥”, “지역”, “나라” 또는 지구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마가복음 4장에서 사용되는 이 단어가 모두 “흙” 이나 “땅”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사용된 것이 아니라면(5, 8, 20, 26, 28절) 이 단어를 적용하는 법을 아는데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의미를 여기서도 취할 수 있다. 누가복음에서는 “채소밭”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헬라어로는 께포스 kepos인데, 그 의미는 “밭”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자기 채소밭”이라고 한 점에 주목하자. 더 나은 번역은 아마, “그 자신의 채소밭”일 것이다. 내 생각에는, 이것은 겨자씨가 뿌려지는 구체적인 땅을 가리키는 말로서,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것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작게 시작하는 그 씨앗이 땅에 심어졌는데, 그것은 특별히 이스라엘이었다.
밭field =세상 the world
땅 Earth= 땅 the land
채소밭 Garden= 이스라엘Israel
4. 나물, 나무: 마가가 기록하기를, 그 씨는 “다 자라서 땅의 모든 나물보다 크게 되었다”고 했다. “나물”은 헬라어로 라카논 lachanon이다. 그것은 단지 음식을 만들 때 향신료로 사용하거나 의약품으로 사용하기 위한 나물이 아니라 채소를 의미한다. 누가는 씨가 자라나, 커다란 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나무”는 덴드론 dendron에서 온 말인데, 그 의미는 밤나무를 의미하는 드루스 drus에서 온 말이다.이것은 목재로 사용되는 나무를 가리키는 것이지 야채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이렇게 불일치처럼 보이는 두 가지의 설명을 마태가 한다. 영어성경(The World English Bible)은 마태의 설명을 다음과같이 더 분명하게 나타낸다: “그것이 자라나면 언제나, 밭의 채소보다 더 크게 되어 나무가 된다.” 이 번역이 옳음을 다른 영어성경(the King James Version)도 이렇게 증거한다: “나물 중에 가장 크게 자라난다.” 예수께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바는 그 씨가 자라나 커다란 나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나물보다 더 커지는 것이다. 그것은 나무가 된다. 마가도 그 씨가 “모든 나물보다 커지며”라고 기록한 점을 주목해 보자. 누가복음 13:19에서 “커다란”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메가 mega인데, “더 크게”, 그리고 “가장 크게”라는 단어들은 마태와 마가가 서로 연관되어 비교가 된다. 메가 mega는 크다는 말이다. 오늘날, 우리는 그런 단어를 메가처치 megachurch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말하기를, 이 비유는 단지 하나님 나라가 작게 시작해서 크게 자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한다. 그들의 말은, 예수님의 말씀은 겨자씨가 자라서 겨자 나무가 된다는 것이다. 그들의 설명은, 어떤 겨자의 변종은 상당히 크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그런 혼란을 배제하신다. 주께서는 겨자씨가 자라서 모든 나물보다 더 커진다는 것이다. 그것은 겨자 그 자체를 포함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겨자씨는 겨자를 뛰어넘는 어떤 것으로 자란다는 말이다. 사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바는, 그것이 자라나 나무가 된다는 것이다. 주목할 점은, 그것은 풀이 아니라는 것인데, 이는 어떤 주석가들도 동의하는 바다. 그것은 작은 나무도 아니다. 그것은 큰 나무 즉, 메가트리(megatree)다.
이 비유에서 겨자씨는 모든 나물이나 채소보다 더 커지게 된다는 사실은, 그리고 사실, 커다란 나무가 된다는 사실은,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하는 것처럼 그렇게 단순한 설명에 대해서 우리로 하여금 의심을 하게한다. 앞의 비유에서 곡식의 씨앗은 자라서 곡식이 되고, 가라지는 자라서 가라지가 된다. 그러나 이 비유에서, 겨자씨는 자라서 나무가 된다. 분명히, 여기에는 의미가 있다. 만약 우리가 그것을 무시한다면, 우리는 이 비유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 것은, 겨자씨는 작지만 능력 있는 믿음으로서 이스라엘이라는 땅에 심어져 전혀 다른 어떤 것으로 자라난다는 것이다.
나무=겨자씨로부터 나오리라고 예상하던 것과는 다른 훨씬 큰 어떤 것
5. 가지: 세 복음서의 설명으로부터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 나무에는 가지가 있다는 점이다. 마가는 그 나무가 “큰 가지를 낸다”고 했다. 가지란 중앙의 줄기에서 뻗어 나온 것이다. 당신이 성구사전을 찾아본다면, 이 자연적인 설명은 성경 전체를 통하여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나무는 언제나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분리되어 나오는 것 곧 가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가지 = 어떤 나무든지 거기로부터 뻗어 나온 것
6. 새들: 마태와 누가는 말하기를, 들짐승이나 공중의 새들(둘 다 동일한 헬라어로부터 번역되는 것인데)이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고 한다. 마가는 말하기를, “그 그늘 아래에 깃들인다”고 한다. 이것은 커다란 나무의 가지 아래 깃들이는 것은 그 그늘 아래에 깃들이는 것이므로 불일치가 아니다. 여기서 “깃들다”는 말은 헬라어로 까따스께노오 kataskenoo로서 그 문자적인 의미는 “캠프를 치다”는 의미다. 성경이 그 스스로를 해석하도록 하자면, 새들의 정체는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예수님이 설명하실 때, 공중의 새들은 “악한 자”(마 13:19)라고 하셨다. 이것은 사탄 마귀를 가리킨다. 새들은 복수므로, 우리는 그들을 사탄의 대리인들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사탄이 그들을 통해서 일을 하는 자들이며, 사탄의 명령을 수행하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가르치는 것처럼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명백히 알 수 있다.
새들 = 사탄의 대리인들
7. 그늘: 마가의 설명에 따르면, 새들이 나무의 “그늘에 깃들인다”고 했다. “그늘”이라는 단어는 스끼아 skia다. 그것의 뜻은 그늘이나 그림자다. 마태복음 4:16에서 그리고 누가복음 1:79에서 이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빛이 사망의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비친다는 것이다. 골로새서 2:17에서, 그리고 히브리서 8:5과 10:1에서, 그것은 구약성서의 율법과 관련되어 사용되었는데, 그것은 장차올 것의 그림자라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이 단어는 이 구절들에 사용될 때, 율법 아래에 앉아있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복음의 빛에 반대하는 자들로서 상대적으로 영적인 어둠에 있는 자라는 것을 언급하는 것이다. 율법은 단지 새 언약 아래에서 올 영광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흥미를 가져야 할 부분은, 이 나무가 그늘을 드리우고 새들, 곧 사탄의 대리인들이 그 그들에 깃든다는 사실이다.
그늘 = 영적인 어두움
씨앗 중에 가장 작은 씨
계속 나가기 전에, 내가 언급하고 싶은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이 비유와 관련하여 문제를 삼는 것이다. 예수께서 겨자씨를 “모든 씨앗 중에 가장 작은 씨”라고 하셨다. 이제 겨자씨는 작지만, 실제로는 씨앗 중에 가장 작은 씨는 아니다. 내가 알기로, 예수께서 우리에게 전달하고 싶으신 바는, 겨자씨에 대한 식물학적인 사실이 아니라 겨자씨가 나타내는 진리에 대한 것이다. 주님이 우리로 하여금 알기를 원하시는 바는, 겨자씨로 표현되는 믿음은 작은 분량의 믿음일 뿐 아니라, 또한 세상에서 가장 무시되는 것을 말한다. 마가는 특별히 기록하기를,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는, “겨자씨가 땅에 뿌려지면, 그것은 땅에 있는 모든 씨앗 중에 가장 작은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사역을 읽어본 사람이면 누구나 예수님을 멸시하고 주님의 메시지를 경멸한 권세자들이 있음을 동의할 것이다. 그의 추종자 중에, 고린도전서 1:27~28에서 우리에게 들려주기를, “그러나 하나님이 세상에서 어리석은 자를 뽑으셔서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에서 약한 자들을 택하사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며, 세상에서 낮고 무시당하는 자들을 택하셔서 있는 자들을 폐하려 하시나니”라고 하셨다. 믿음,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의 메시지와 사역은, 겨자씨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예수께서 가져오신 메시지와 사역은, 세상과 이스라엘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정부나 종교의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과 비교해 볼 때, 가장 볼품 없는 것이었다.
느부갓네살왕의 꿈
다니엘 4장에서, 느부갓네살은 한 꿈을 꾸었는데 “한 나무가 땅의 중심부에 있어서 그 키가 매우 컸다. 그 나무는 자라고 강해져서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는데, 그 모양은 땅의 끝에서도 보일 정도였다. 그 잎은 무성하고 그 열매는 많아서 모든 사람들의 음식이 되었다. 땅의 짐승들이 그 그들에 쉬었다. 그리고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었고 모든 육체가 그것에서 나오는 열매를 먹었다”(10~12절). 이 꿈에서 주목할 점은, 1)그 나무의 높이, 2)그 그늘에 깃들인 짐승들, 그리고 3)그 가지에 깃들인 하늘의 새들이다. 예수님의 비유와 유사하다는 점이 놀랍다. 22절에서,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왕이 그 나무라고 설명한다. 이제 이것이 예수님의 비유와 어떤 관련이 있을까 생각해보자.
분명히, 예수께서 겨자씨 비유에 나오는 나무를 느부갓네살이라고 우리가 이해하기를 바라신 것은 아니다. 그러나 느부갓네살의 꿈과 예수님의 비유 사이의 상관관계는 무시하기에는 너무 유사하다. 내가 믿기에는, 예수님은 틀림없이 주님의 비유를 우리가 이해할 때 느부갓네살의 꿈을 이해함으로써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의도하신 것 같다.
그 꿈에서 나무는 느부갓네살을 나타냈다. 느부갓네살은 그 당시에 세계를 다스리는 제국의 우두머리였다. 다니엘 3장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 제국은 제정일치(祭政一致)를 따르고 있었다. 느부갓네살은 세속권력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종교도 관장하고 있었다. 그의 제국을 통하여, 느부갓네살은 그의 꿈에 나오는 많은 짐승과 새들인 많은 민족에게 그늘을 제공했다. 그러나 이 백성들은 그늘 아래서 살고 있었다. 어느 뜨거운 날, 우리는 그늘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듯이, 느부갓네살의 백성들도 그가 제공하는 강력한 제국의 보호 아래 사는 것이 스스로에게 행운이라고 여겼을 수 있다. 그러나 빛이 차단된 곳이 그늘이라는 점만은 늘 변함없는 사실이다. 성경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빛이시라고 했다(요한일서 1:5). 내가 이미 지적한 것처럼, 그늘 아래 있는 것을 성경은 영적인 어두움 가운데 있는 것이라고 묘사한다. 그러므로, 느부갓네살은 거짓 예배를 장려하여 그의 백성들을 영적인 어둠에 붙잡아두고 있었다.
구약성서의 이스라엘 백성은 새 언약 아래의 진실한 그리스도인을 예표한다. 그러나 느부갓네살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다. 그는 이방인이다. 그러므로 그 자신도 그를 나타내는 나무도 구약성서가 미리 보여주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에 대한 예표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부갓네살은 하나님에 대하여 알게 되었고 자신의 믿음을 고백하였으며, 마침내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다음과 같이 인정했다:
그 기한이 차매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지라 이에 내가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자를 찬양하고 존경하였노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로 이르리로다. “땅의 모든 거민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사에게든지, 땅의 거민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누가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 할 자가 없도다.” 그 동시에 내 총명이 내게로 돌아왔고 또 나라 영광에 대하여도 내 위엄과 광명이 내게로 돌아왔고 또 나의 모사들과 관원들이 내게 조회하니 내가 내 나라에서 다시 세움을 입고 또 지극한 위세가 내게 더하였느니라. 그러므로 지금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존경하노니 그의 일이 다 진실하고 그의 행하심이 의로우시므로 무릇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니라(다니엘 4:34~37)
느부갓네살의 나라에서, 구약성서의 그리스도인을 예표하는 이스라엘 백성이 있었다. 그들은 포로로 끌려와 느부갓네살의 나라에 있게 되었다. 그들 중에 어떤 이들, 곧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바벨론 포로 상황에서 책임 있는 지위에 올랐다.
느부갓네살의 나무에 대한 몇 가지 요점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나무는 보호한다, 2)나무는 그들을 만들어 주는데, 그것은 영적인 어둠을 예표한다, 3)그 나무(즉, 느부갓네살)는 신의 형상을 하고 있었으나 진정한 신은 아니었다, 4)그 나무는 이스라엘이 아니며 그러므로 그 비유에 나오는 나무도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예표가 아니다. 5) 그 나무는 포로로 잡힌 이스라엘이며, 이스라엘은 새 언약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예표한다.
비유에 나오는 나무의 정체
만약 우리가 느부갓네살의 나무에서 알아낸 것을 예수님의 비유에 적용하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알게 될 것이다: 1) 나무는 보호한다. 그러므로 새들이 그곳에 피할 곳을 찾는다. 2) 그 나무는 거짓 종교를 장려하기 때문에 그늘을 만들어내며, 그것은 영적 어둠을 나타낸다. 3)그 나무는 신앙의 모양은 있으나 진정한 신앙은 아니다. 4) 그 나무는 진정한 기독교를 나타내지 않는다. 5) 그 나무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을 포로로 잡았다. 이 사실에 덧붙여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 곧 새들이란 주님의 비유에서 나타내는 상징 요소로서 사용되는 예를 보면, “악한 자”를 나타낸다. 즉, 사탄 마귀다. 그러므로 그 나무에는 사탄이 깃든다.
예수께서 땅에 심으신 것은 겨자씨로 표현되는데, 그것은 작지만 주님을 믿는 능력이 있는 믿음을 말한다. 심는 행위는 로마제국의 가장자리에서 일어났다. 예수님은 갈릴리라고 알려진 외진 곳의 작은 마을 목수였다. 그것은 “씨앗 중에 가장 작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 씨앗으로부터 자라난 것은 느부갓네살처럼 그리고 그의 바벨론 제국처럼 되었다. 겨자씨로부터 자라나는 자연스러운 성장과 비교해 본다면, 그것은 자연스럽지 않은 거대함이었다.
정확하게 그 나무는 무엇인가? 그 나무는 씨로부터 자라났으니 틀림없이 본래적인 믿음과 어떤 식으로든지 관련이 있다. 비유에 나오는 그 나무는 느부갓네살의 꿈에 나오는 나무를 보여주는 하나의 예다. 느부갓네살의 꿈에 나오는 나무는 느부갓네살이라는 한 개인이었다.
우리가 비유에 나오는 나무도 특정한 어떤 사람으로만 생각해야 한다고는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조건을 맞는 어떤 사람이 있는데, 그는 그 나무의 첫 모습처럼 생긴 특징이 있다. 그는 겨자씨로 표현되는 믿음과 관련이 있다. 느부갓네살처럼, 그는 믿음의 고백을 했다. 그러나 그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에 들어맞는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보호막을 제공했지만, 영적 어둠을 초래했다. 그의 타락한신앙은 “악한 자”의 대리인들을 끌어들였다. 이들은 그의 정치와 종교적인 면에 연관된 자들이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포로”로 사로잡았으며 그 중에 몇을 책임 있는 자리에 세웠다. 그 사람은 로마제국을 주후306년부터 337년까지 다스린 콘스탄틴 황제다.
콘스탄틴 시대 이전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를 받았으며 자신들의 믿음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 그들은 괴롭힘을 받았고 배척되었지만, 그들의 믿음은 끊어지지 않았고 그 수가 늘어갔다. 그 후에 콘스탄틴이 기독교를 공인했으며 그에 따라 그는 본래적인 믿음과 관계를 맺게 되었다. 학자들이 미심쩍어 하는 것은 콘스탄틴이 자신의 어머니의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인지, 아니면 그가 점차 그 신앙에 이르렀는지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인생 여정에서, 그는 종종 자신의 믿음을 고백했다. 콘스탄틴은 (루키우스를 따라) 밀라노 칙령으로 종교적 관용을 베풀었으며 교회 건물을 세우기 시작했고, 그로 말미암아 보호막과 은신처를 제공했으나 이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교를 “포로로” 사로잡았다. 그것은 처음에는 종교에 우호적인 모습이었다가 나중에는 로마제국의 국가종교가 되었다. 그들이 믿은 모든 것은 교회의 공식적인 통로를 통해서 주어졌고 교회에 의하여 걸러졌다. 콘스탄틴은 자신이 “거룩한 공교회 법”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벗어난 모든 사람들을 박해로 위협하라는 사적인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콘스탄틴의 죽음으로 그 나무의 예표가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실수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이전의 이교도적 황제들처럼, 콘스탄틴은 종교적인 대신관직(Pontifex Maximus)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문자적으로 “(신과 인간 사이의) 가장 위대한 다리 건설자”라는 뜻이다. 주후 375년에서 383년 사이에 통치를 한 그라티안(Gratian)은 이런 직함을 가진 마지막 황제였던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로마의 주교인 교황이 사용하였고 그것은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나무가 콘스탄틴으로부터 시작되어 콘스탄틴과 황제를 뛰어 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 생각으로는, 우리는 그것을 국가 주도의 전체 종교 체계, 즉 콘스탄틴이 처음 일으킨 제도화된 기독교로 보아야 한다. 콘스탄틴 아래서 일어난 교회의 이러한 타락은 콘스탄틴 시대로의 전환이라는 용어로 불렀다. 이런 변화가 강조하는 것은 단순하고 개인적인 신앙을 벗어나 규칙을 가진 제도와 성직자-평신도의 구분, 종교적 형식주의, 율법주의, 그리고 국가 권력과의 유착 등이었다. 이런 황제교황적(Caesaropapism) 특성의 정점에 이르자 교회와 국가의 권세가 출현하였고, 그것은 로마 가톨릭 교회라는 이름으로 중세에 활동하였고, 많은 개신교 국가들에서는 종교개혁 시대에 나타났으며, 헨리 8세는 자신을 자신이 만든 영국 국교회의 수장으로 취임했다. 위키피디아는 이것을 콘스탄티누스적 전환이라고 규정했으며, 그 말은 “기독교가 권력을 행사하는 것과 제국 곧 나중에 기독교 국가(Christendom)라고 부르게 될 기독교 제국을 확장하고 유지하는 도구가 되는 것을 종교적으로 정당화했다”는 의미다. (http://en.wikipedia.org/wiki/Constantinian_shift). 위키피디아는 또한 이렇게 말한다: “미국의 신학자 스탠리 하우어(Stanley Hauer)는 그런 변화를 오늘날 미국에서의 기독교가 그 모습을 갖게 된 기초가 되었으며 그 결과로 애국주의와 시민 종교가 서로 결합하게 되었다”고 했다. 나는 진심으로 이 말에 동의한다. 이런 생각은 완전히 예수님의 가르침의 노선에서 벗어난 것이다.
이 기독교 국가, 즉 가시적인 기독교로서 바티칸에서부터 변두리에 있는 교회까지 어디서나 우리가 볼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비유에서 말하는 나무다.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그 체계가 또한 그 나무가 묘사하는 것에 들어맞기 때문이다. 1) 그것은 본래적인 겨자씨 믿음에 대한 가르침과 이름에서 연관성이 있다. 2) 그것은 성직자적인 체계와 교회의 규정과 법조항들을 통해서 보호막과 안전성을 제공한다. 3) 그것은 그늘을 제공하는데, 그것은 복음의 빛을 차단하는 것으로서, 그것 대신에 영적 어둠과 맞바꾸었다. 4) 그것은 신앙의 모양을 가지기는 했지만 진실한 신앙도 아니요, 성도들에게 단번에 준 믿음도 아니다(유다서 3절). 5) 그것은 진실한 기독교인들을 그 직위를 통하여 “포로로” 잡고 가둔다. 6) 그것은 “악한 자” 곧 사탄 마귀와 그의 대리인들을 그 성직이라는 체계 속에 피한다(이것은 바울의 시대에도 있었던 일이다. 고린도후서 11:13~15을 참조하라).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 11:13~15).
그렇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분명히 이 설명에 들어맞는다. 그러나 그 나무의 가지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그것은 그 한 교회를 뛰어넘는다. 내가 믿기로, 겨자씨의 비유가 가지는 기본적인 의미는 예수님이 심으신 본래적인 믿음이 거대해져 인간이 만든 체계로 변질되어서, 사탄의 대리인들이 사람들을 어둠에 가두면서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속한 제도가 자신들의 구원을 제공해 줄 수 있는 기독교회라고 생각하게 한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기독교 국가다. 그것은 거대하고 영향력을 많이 행사하는 교회로서 오늘날 세계에서 눈에 보는 것으로서 그 중심 줄기와 많은 교단이라는 이름을 가진 가지들이 가톨릭교회, 개신교회, 그리고 정교회를 이루고 있다. 그것은 사탄의 핵심 전략으로서 다음과 같은 속담을 실천한 것이다. “물리칠 수 없다면 가담하라. 그래서 그들을 너의 방식으로 전복시켜라.” 그리고 그는 수천만의 사람들을 속이는데 성공했다. 이제 비유에 나오는 그 나무는 느부갓네살과 바벨론이었던 꿈에 나오는 나무에 기초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 나무의 운명
예수께서 그의 비유에서 그림으로 사용하신 것은 구약성경에서 바벨론 제국의 느부갓네살로 나타나는 것이라는 사실은 더 많은 의미를 포함한다. 이것은 특별히 우리가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나무가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타락하고 거대해진 기독교 국가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더욱 많은 의미를 가진다. 바벨론은 계시록에서 여섯 번이나 예언적으로 언급된다. 계시록 17장에서, 바벨론은 붉은 짐승을 탄 음녀로 묘사된다. 붉은 색은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을 조롱할 때 입혔던 외투의 색이다(마태복음 27:28). 그것은 세상 권력의 상징이다. 계시록 14, 16, 18장에서, 우리는 바벨론의 멸망을 볼 수 있다. 내가 여기서 이 예언들을 세부적으로 다룰 여유는 없다. 그러나 나는 다음의 세 구절을 인용하겠다. 계시록 18장 4절은 말씀하기를, “내가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또 다른 음성을 들으니, 가라사대, 그 여자에게서 나오라, 내 백성이여, 너희는 그의 죄에 가담하지 말라. 그러면 너희도 그 여자의 재앙을 받지 않으리라.” 이것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바벨론에 두셨음을 말한다. 계시록 18:23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등불 빛이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비취지 아니하고 신랑과 신부의 음성이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너의 상고들은 땅의 왕족들이라 네 복술을 인하여 만국이 미혹되었도다.” 내가 이 구절을 인용하는 것은“복술”이나 바벨론의 거짓 교리와 관습들이 만국을 미혹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그리고 계시록 18:24에서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및 땅 위에서 죽임을 당한 모든 자의 피가 이 성 중에서 보였느니라 하더라.” 이로서 나는 바벨론이 박해를 통하여 하나님의 많은 진실한 신자들을 죽였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겨자씨 비유가 보여주는 교훈
이 비유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바는, 오늘날 세계에 있는 제도화된 교회 즉 기독교계는 그리스도의 에클레시아가 아니며 순수한 기독교가 아니라는 점을 우리가 알고 예상해야 한다는 점이다. 분명히, 그 안에 기독교인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이 거기로부터 나오기만 한다면, 그들로 하여금 그 체계를 다루려고 노력하면서 겪게 될 많은 좌절과 고민으로부터 구원을 받게 할 것이다. 그들은 “공중의 새들”이 매주마다 전하는 왜곡된 가르침을 듣는 대신에 자신 스스로 성경을 연구하면서 더 많이 성경에 대해 이해하게 될 것이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제도화된 교회의 모든 설교자들이 악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선택된 그리스도인들로서 회중석에 앉아 있는 그리스도인들과 마찬가지로 바벨론으로부터 나와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된 자도 거짓 교리를 가르칠 수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신학교에서 그것을 배웠으며 다른 설교자들에게 그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늘에 깃들임”이 그들을 눈 멀게 하고 진리에 귀 멀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비유의 교훈은, 우리가 속지 말아야 할 것은 그럴듯한 대형교회나 매력적인 국가교회나 그들의 교제, 또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세미나나 호소력 있는 설교자 또는 신학박사 학위, 또는 대중적인 인기를 가진 개인들, 또는 따뜻한 악수나 현대음악 또는 전통적인 음악과 같은 것들이다. 성경이 명백하게 말한다: “내 백성아 그녀에게서 나오라. 그리고 그의 죄에 가담하지 말라. 그래야 너희가 그녀의 재앙을 당하지 않으리라”(계시록 18:4).
이 비유를 우리의 삶에 적용하기
이 비유로부터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1)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예수께서 이 세상에 가져오시고 심으신 작고 힘있고 단순한 믿음이다.
2) 이 시리즈에서 우리가 조사한 비유들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하게 적용해야 하나님이 명하신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이다. 추가로, 가라지의 비유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는, 사탄도 자기의 씨를 뿌려 진짜 그리스도인처럼 보이는 거짓 그리스도인들을 양산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거짓 교리를 개발하고 자신들의 제도적 기독교회를 만들어 그 가지들로 진실한 기독교를 뿌리뽑으려 할 것이다. 그러므로, 겨자씨 비유는 이런 거짓되고 제도화된 교회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 비유로써, 예수께서는 우리들을 향하여 경고하시면서 우리로 하여금 거대하고 가시적인 교회(그리고 그 가지들)을 주님이 세우신 교회로 여기지 않도록 대비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3) 이것을 알게 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것을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은 커다란 나무의 그늘 아래로 떨어진다. 그리고 복음의 빛은 그들에게 비치지 않는다. 그들은 악한 자의 대리인들의 영향권으로 들어가는데, 그 대리인들은 진리를 왜곡하고 그것을 좌지우지하는데 능하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다면, 이 세대의 기독교계를 피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직접 온 단순한 진리를 배우며 지역 에클레시아와 교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성경은 항상 교회가 가정에 있었다고 말한다. “에클레시아냐 교회냐, 그것이 중요하냐?”를 참조하라) http://www.wordofhisgrace.org/ekklesia.htm).
이 글을 거의 다 쓰면서, 나는 온라인을 살펴보면서 이 비유를 내가 여기서 이해하는 바와 같이 기본적으로 동일한 이해를 하면서 가르치는 다른 사람이 있는지 찾아보았다. 내가 찾으면서 놀란 것은, 20세기의 유명한 침례교 설교자 아더 핑크(A. W. Pink)가 이 비유를 내가 한 것과 동일한 방법으로 설명했다는 사실이다. 사실, 그는 하도 잘 정리해서 나는 그의 책, 구속자의 귀환(The Redeemer’s Return)의 일부를 인용하기로 결심했다. 그것이 이 글을 마치는 것과 요약하는 좋은 방식이 될 것이다:
이 비유(겨자씨 비유)는 나중 일을 미리 내다보는 것이며 예언적인 그림을 제공하는 것으로서 우리 세상의 4세기에 있을 물질주의를 예견한 것이다. 작은 겨자씨가 자라 거대한 나무가 된 것은 기독교 신앙이 별볼일 없는 출발을 하여 많은 특징을 가진 체계로 발전할 것을 보여준다. 주후 4세기에 기독교는 그것을 국가 종교로 받아들인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대중화되었으며, 그는 백만 명의 자기 신하들을 칼로 위협하여 세례를 받게 하였다. 가라지의 비유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바는, 기독교가 하나님의 자녀들 사이에 있는 악한 자의 자녀들이 교묘하게 들여온 것에 의해 타락한다는 것이다. 겨자씨의 비유는 타락한 기독교의 성장과 확산을 미리 보여준다. 우리들이 하는 이 주장은 그 비유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쉽게 참임을 알 수 있다.
겨자씨는 거대한 나무가 되었으며, 그것은 정말 비정상적인 것이다. 즉, 괴물스런 것으로서 콘스탄틴 시대에서 기독교의 대중화가 비자연적이고 괴상한 체계를 만들어냈는데 그것은 그 정신과 특성에 있어서 낯선 것이었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거대한 나무에 깃들인 것을 주목해 보자. 그 비유의 첫번째 시리즈에서 주님 자신이 직접 우리에 말씀하신 바는, 공중의 새들은 사탄의 부하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거대한 나무는 명목상의 국가에 속한 기독교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그것은 괴이하고, 세상 체계를 따르며, 우리 시대에 소위 “기독교 국가”라는 이름으로 정리된다. 한 마디로 하자면, 거대한 나무가 상징하는 것은 계시록 18장에서 말하는 것처럼,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을 말한다.
위에서 제시한 우리의 주장을 더욱 뒷받침 하는 것은, 겨자씨에서 자라난 거대한 나무는 타락한 기독교를 상징한다는 것은 다니엘 4장에서도 제시되는데, 거기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이방인 권력의 수장에게 온 꿈에 대한 기록이다. 그 꿈에서 느부갓네살은 “커다란 나무”를 보았는데, 그 나무가 당한 운명에서 우리가 배울 것은 우리의 비유에 나오는 나무의 종말을 그것이 보여준다는 점이다.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내가 침상에서 나의 뇌 속으로 받은 이상이 이러하니라 내가 본즉 땅의 중앙에 한 나무가 있는데 고가 높더니, 그 나무가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그 고는 하늘에 닿았으니 땅 끝에서도 보이겠고, 그 잎사귀는 아름답고 그 열매는 많아서 만민의 식물이 될 만하고 들짐승이 그 그늘에 있으며 공중에 나는 새는 그 가지에 깃들이고 무릇 혈기 있는 자가 거기서 식물을 얻더라. 내가 침상에서 뇌 속으로 받은 이상 가운데 또 본즉 한 순찰자 한 거룩한 자가 하늘에서 내려왔는데, 그가 소리 질러 외쳐서 이처럼 이르기를 그 나무를 베고 그 가지를 찍고 그 잎사귀를 떨고 그 열매를 헤치고 짐승들로 그 아래서 떠나게 하고 새들을 그 가지에서 쫓아내라”(다니엘 4:10~14).
이 비유에 대한 우리의 논의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후천년설을 주장하는 편에 기우는 대신에, 그 가르침-다니엘 4장의 빛에 비추어 볼 때-은 절대적으로 그 체계의 근간을 흩어버리는 것이다. 교회가 세상을 정복했다는 고백을 가르치는 대신에, 이 비유가 보여주는 바는, 세상이 고백하는 교회를 이겼다는 점이다. 겨자씨가 상징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이 확장되던 초기의 외견상 특징으로서, 그 헌신자들은 수가 적고 세상의 소유에 대해서는 가진 것이 없고, 땅의 위대한 자들로부터 무시를 당했다는 점이다. 3세기에, 고백하는 교회는 초라하고 작은 씨앗과 같았는데 외모에 있어서 가식이 없고 그 차원에 있어서는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나 4세기에 극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콘스탄틴이 명목상의 기독교인이 되어 기독교를 국가 종교로 받아들였다. 그렇다면 그것은 “나무”가 자란 것이고 땅에서 세력을 얻어 그 가지를 사방에 내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사탄의 새들이 그 가지가 제공하는 그늘에 찾아 들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나무가 아무리 크게 되어도 그 끝은 분명하다. 우리가 앞의 비유에서 배운 바와 같이, 가라지는 불에 던져질 것이며, 그러므로 이 커다란 “나무”도 베어져 넘어질 것이다.
(이 글을 찾은 곳: http://www.biblebelievers.com/Pink/return28.htm. 이Quoting this 부분을 인용한다고 해서 내가 핑크의 책 전체에 동의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마치기 전에, 내가 지적해 두고 싶은 것은, 이 비유에서 그 어느 것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 나무/기독교계 체계의 포로가 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하나님이 그 백성에게 거기에서 나오라고 말씀하신 바로 그 사실은, 어떤 이들은 나오지 않고 그 안에 남아 있으리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항상 자신에게 신실한 남은 자들을 남겨두신다.
다음의 비유는 누룩의 비유를 다룰 것이다.
한글 번역본: http://cafe.daum.net/Wellspring/TxEG/12
영어 원본: http://www.wordofhisgrace.org/par5leaven.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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