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진실에 깨어 있다면
주일성수와 주일예배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할 것입니다.
주일성수와 주일예배는
과연 성경의 진실인가?
기독교 신앙의 근간을 흔드는 영적 성찰은
성서와 기독교를 분리하는 벼랑 끝 탐색이 될 것입니다.
선지자와 사도의 터 위에 세워진 교회는 기독교의 중심이요,
예수의 하나님 나라를 지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로서의 교회는
기독교 신앙 안에 갇혀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하나님의 존재와 역사는 성서 안에 갇혀있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서는
하나님을 계시하며 선포하고 증거합니다.
사도행전의 오순절 성령의 임재로 탄생한 교회는
기독교 신앙의 전부이지만 하나님의 나라로서 순례하는 교회는 기독교를 포함합니다.
할례는 모세의 율법 이전의 아브라함 언약의 표징이지만
모세의 율법은 아브라함 할례의 전통성을 가졌습니다.
오순절 성령의 임재로 탄생한 신약의 교회는
기독교 신앙의 전통성, 그 자체입니다.
여기서 성경의 진실에 대한 성찰은
오순절 성령의 임재로 탄생한 신약의 교회는 주일성수와 주일예배에 대한 근간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혹자는 안식일의 주일 개념을 적용하지만
하나님의 창조를 기념하는 안식일은 안식일일 뿐이요, 주일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을 증거합니다.
레위기법의 하나님의 창조를 기념하는 안식일은
하나님의 안식을 따라 일을 하지 말고 안식하라는 명령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지켜야 할 안식일은 일을 하지 않고 집에서 편안히 쉬는 것이요,
소위 말하는 번제나 속죄제나 속건제를 드리는 날이 아닙니다.
안식일의 제의식은
성소와 성전의 불을 끄지 않는 제사장의 몫입니다.
그리고 광야의 이스라엘은 안식일을 모세의 율법으로 지켰지만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사사시대 모세의 율법에 근거한 여호와를 섬기는 일체의 종교적 삶을 잃어버렸습니다.
사사시대의 종말론적인 실상은
제사장 엘리 가문의 타락과 파문이요, 실로 성소의 파괴요, 언약궤를 블레셋에게 빼앗겼습니다.
성소와 언약궤의 분리는
사실상 모세의 율법을 근거한 여호와 신앙의 완전한 상실을 의미합니다.
성소와 법궤의 분리가 의미하는 것은
레위기법의 성막 제의식을 드리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일반 성도들은 설교만 듣다 보니
구약 시대 가나안 땅의 이스라엘은 안식일을 비롯하여 3대 절기아 5대 제사를
오늘날 주일성수와 주일 예배를 드리듯 드린 것을 착각하고 있습니다.
구약시대 유월절을 지킨 것도
애굽에서 한 번, 광야에서 한 번, 가나안 땅에 입성했을 때 한 번, 히스기야와 요시야 왕 때 각각 한 번 등
그렇게도 유월절을 지키라고 성서는 명령했지만 구약의 성서지대는 거의 그 말씀을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레위기법의 준수는 가나안 땅의 이스라엘 사사 시대에 찾아 볼 수 없고
안식일과 5대 제사와 3대 절기는 모세가 살아 있을 동안 광야의 이스라엘만 살아 있는 법으로 지켜졌습니다.
사무엘 시대에도 성소와 언약궤는 분리 되어 있었고
다윗 시대 비로소 언약궤를 블레셋 땅에서 찾아 예루살렘으로 옮겼으나
성소는 기브온 산당에 있었고 언약궤는 예루살렘의 장막에 있었습니다.
솔로몬의 성전 건축으로 기브온의 성소는 사라지고
예루살렘 장막의 언약궤는 솔로몬 성전의 지성소에 안치되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의 타락으로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로 분리되었고
북왕국 이스라엘은 멸망하는 그 날까지 벧엘과 단에 송아지 형상의 제단을 만들어 모세의 율법을 파괴하였습니다.
열 지파의 북왕국 이스라엘은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않았고
북 왕국 이스라엘에 편승된 레위인은 다른 지파의 종이 되거나 유랑하였습니다.
남 왕국 유다는 솔로몬의 성전을 중심하였지만
바알을 여호와로 섬기는 산당 신앙으로 타락하였습니다.
히스기야 시대에 처음으로 종교 개혁의 일환으로 대대적인 유월절을 지켰으나
유월절 행사를 온전히 수행할 수 있는 성결한 제사장이 없어
바알의 제의식으로 타락한 제사장을 성결하게 한 후 아빕월 다음 달에 지켰습니다.
바알의 제의식에 타락한 이스라엘의 제사장들........
요시야의 종교 개혁에도 불구하고 요시야 시대의 제사장은 율법의 멍에를 꺾어 버리고 타락하였다고
예레미야는 그 신탁으로 성토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에 투영된 예루살렘 성전의 모습, 그 실상을 보면
이사야의 시선은 개와 돼지의 제물로 제사하는 것과 같았고
예레미야의 시선에는 도적의 소굴이었으며
에스겔의 시선에는 담무스를 위해 애곡하고 각종 가증한 벌레와 짐승의 형상인 우상으로 가득하였으며
제사장과 장로는 성전을 등지고 태양신을 경배하였습니다.
앗수르에게 멸망한 북 왕국 이스라엘과 바벨론에게 멸망한 남 왕국 유다의 모습은
성전과 이스라엘 열 두지파의 완전한 파괴였습니다.
바벨론 포로 70년 동안의 유다와 예루살렘은
모세의 율법과 여호와의 신앙,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황폐하였습니다.
다만 바벨론에 포로된 기간 동안
디아스포라의 유대인은 예루살렘의 성전을 잃고 각처에 회당을 지어 안식일에 모였습니다.
회당은 성전의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모세의 율법을 공부하는 전당이 되었습니다.
70년 바벨론 포로 기간이 끝나고 3차의 귀환을 통해 유다로 귀환하였고
스룹바벨과 여호수아 제사장 중심으로 성전을 재건하였고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종교개혁을 단행하였습니다.
오늘날의 구약 성경은 에스라와 느헤미야 이후 모습을 드러냈고
이스라엘 백성이 멸망할 때까지 가나안 땅의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구약성경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포로귀환 후 성전을 재건하고 스룹바벨과 여호수아 제사장을 중심으로 성전 봉헌식과 함께 유월절을 드렸고
에스라와 느헤미야 시대 여호수아로부터 처음으로 가나안 땅의 초막절을 지켰습니다.
그 후 말라기 시대 스룹바벨의 성전은 타락하여 황폐하였고
제사장과 문지기마저 떠난 성전은 다른 불을 지피는 이방인의 놀이터가 되었습니다.
가나안 땅의 이스라엘은 모세 율법의 안식일을 전통으로 지키지 않았으며
북 왕국 이스라엘은 엘리사 시대 수넴 여인의 남편 입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안식일이 언급되었을 뿐입니다.
엘리야와 엘리사는 위대한 선지자였으나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를 드린 적이 없고
벧엘과 단의 송아지 형상의 제단을 개혁하지 못하였으며 모세의 율법을 회복하지 못하였습니다.
엘리사 시대 예후는 바알 우상을 척결하였지만
벧엘과 단의 송아지 형상의 제단을 개혁하지 않았습니다.
신약의 복음서에 나타난 해마다 유월절과 초막절과 오순절을 지킨 것은
하스몬 왕조 이후의 유대교의 전통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강조한 예수님 마저 옭아맨 안식에 대한 율법적 이해도
하스몬 왕조 이후에 나타난 유대교 신앙의 전통이었습니다.
말라기 시대 이후에 파괴된 유대교는 하스몬 왕조 때 복원되었고
하스몬 왕조의 멸망과 함꼐 로마의 속국 시대의 유대교는 복음서의 배경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서에 나타난 유대교의 모습은
포로 귀환 후 재건한 스룹바벨과 여호수아,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전통성을 계승하지 못하였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과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선포한 마태는
예수님은 유대교의 전통 계승자가 아니라 아브라함과 다윗 언약의 성취를 복음으로 선포하였습니다.
디아스포라의 유대인이 회당을 세워 유대 공동체를 형성한 것은
예루살렘 성전의 전통성을 계승한 것이 아니라 모세의 율법을 공부하는 전당이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을 공부하는 회당의 전통은
구약적 제사나 예배를 드리는 성전 개념이 아니었습니다.
신약의 교회는 회당 중심으로 복음이 전파되었고
예수를 믿어 구원받은 성도들이 교회로 모였습니다.
교회로 모인 구원받은 성도들은 주로 회당 중심의 안식일에 모였고
점차적으로 유대교의 회당과 차별되는 부활의 첫날인 주의 날 곧 주일에 교회로 모였습니다.
그러므로 유대교에서 안식일에 회당에 모이는 열심은 안식일을 지키는 개념이 아니라
모세의 율법을 공부하기 위해 모이는 그 자체의 열정입니다.
유대교의 회당에 관한 모든 정관 곧 규칙은 구약 성경의 근거가 아니라
약속의 땅 가나안을 잃어 버린 디아스포라의 유대인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규약이요, 열정이며 열심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의 복음을 듣고 구원받은 성도들이 주일날 교회로 모이는 것은
안식일을 지키는 개념이 아니라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을 증거하는 교회입니다.
구약적 제사 개념의 예배 드린다는 것은 성경의 진실을 외면한 자가당착의 모순이요,
영원한 대제사장인 그리스도는 그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은 단번의 제사로 영원한 제사를 드렸습니다.
신약의 교회는 종말론적으로 그리스도의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요,
선지자와 사도의 터 위에 세워진 교회의 사명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을 증거하며 찬양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주일성수니, 주일예배니 하는 것은
성서의 본질이 아닌 형식화된 기독교의 제도며 교회의 정관일 뿐입니다.
오순절 성령의 임재로 탄생한 신약의 교회는
소위 말하는 주일성수나 주일예배는 모세의 율법에 근거한 성서의 제사나 성전의 제사, 그 전통이 아닙니다.
성령의 충만한 임재로 모이는 교회는 주일 성수나 주일 예배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하고 선포하여 종말론적인 예수이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입니다.
복음의 증거와 성령의 동선이 일치하는 초대 교회는
예루살렘과 유대와 땅끝까지 쥬 예수의 복음이 증거되는 움직이는 순례하는 교회였습니다.
교조적 이데올로기로 고착화된 주일성수와 주일예배는
사도행전과 서신서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모습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주 예수의 복음 증거를 위해서 교회로 모였고
그 교회는 세계 각 처로 흩어져 주 예수의 복음을 증거하는 움직이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주일성수와 예배가 모세의 율법에 근거한 안식일을 지키는 방편이요,
성소와 성전의 제사를 계승한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유대교의 회당보다 못한 종교적 이데올로기의 집단에 불과할 것입니다.
성소와 성전의 제사를 계승한 주일예배는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단번의 제사를 영원히 드린 그리스도의 제사를 불신하며 모독하고 모욕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주일성수와 주일예배의 종교적 이데올로기는
그리스도의 영원한 제사를 부인하는 성서의 옷을 입은 이단과 사이비요, 바벨론 교회가 아닐 수 없습니다.
주일성수와 주일예배를 종교적 이데올로기로 강조할려면
최소한 이단과 사이비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행위라는 사실을 양심선언으로 인지하여야 할 것입니다.
예전주의식의 예배 회복은
성령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뜻과는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거리가 멀기만 합니다.
성령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이란 구원의 본질이요,
주일성수와 주일예배의식이 아니라는 사실은 요한복음의 증거며, 성서의 진실입니다.
소위 말하는 예배 중심과 그 회복이라는 양육과 훈련을 통한 종교적 이데올로기 공작의 브레인워싱은
포스트 모던의 좌파적 헤게모니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단과 시이비의 농도가 짙을수록
인본주의 조직의 시스템에 충성하는 종교적 브레인워싱은 집요합니다.
성경의 진실을 알면........
하나님 나라로서의 통치와 오순절 성령의 임재로 탄생한 교회가 하나인 것을 깨닫고
구원의 확신에 이르는 온전한 믿음을 가질 것입니다.
말세의 거울이 된 성경의 진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믿음으로 이루는 종말론적인 완전한 구원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오늘날 강단의 설교, 그 오염된 신앙의 정보에서 성경의 진실로 바로 깨닫지 못하는 것은
성전을 등지고 태양에게 경배하는 이스라엘의 전철을 밟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교회는 주일성수와 주일예배라는종교적 이데올로기로
종말론적인 고난과 환난의 때를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참으로 성령의 역사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구원을 이루는 각처의 향기가 된 초대 교회는
오늘날 중세 카톨릭의 암흑에 잠긴 것과 같은 자본주의 시스템의 교회는 이단과 사이비의 온상이 되었습니다.
이 글을 소화할 수 있는 성경의 진실에 깨어있는 크리스챤은
과연 이단과 사이비에 오염된 한국 교회, 그 가운데 얼마나 있을까?
.
.
자고 일어나 오타를 수정하면서 윤문 작업을 하며
연이어 몇 자 더 글을 써 봅니다.
카페의 글을 읽는 사람 가운데
안티적 발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혹시 이단의 글이란 생각도 할 것입니다.
혹자는 기독교적 신앙을 파괴하는 글이라고도 생각할 것입니다.
이런 저런 생각이 든다면
당신은 성서의 본질적인 진실을 외면하고 종교적 타락의 넋두리에 무속적 푸념으로 오염되었습니다.
영을 혼미하게 하는 성서 밖의 종교적 이데올로기에 세뇌되었으며
조직과 시스템에 적응하는 양육과 훈련을 받은 종교적 광신의 늪에 빠졌습니다.
올바른 성경적 가치관과 세계관으로
이단과 사이비와 같은 종교적 타락을 비판할 수 있는 능력을 완전히 상실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중심의 인본주의 시스템에 복종하는 종교적 굴레로 양육되고 훈련되었습니다.
실제 이단과 대화를 해보면
그 파괴된 영혼의 실상을 느낄 수 있습니다.
지난 날 사진을 찍다보니
도심의 공원을 산책할 때가 많았습니다.
잠시 쉬면서 벤치에 앉아 있으면 으례히 접근해 오는 사람들
하나님의 교회 사람, 여호와의 증인, 몰몬교, 신천지 장막의 사람 등
그들과 성경적인 대화를 나누면 그들이 이단적 훈련을 받았어도
성경의 말씀에 복중유서하는 제 앞에는 고양이 앞에 쥐골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교회 사람은 멜기세덱의 후손과 새 언약의 유월절을 강조하였고
여호와의 증인은 지옥은 없다면서 지옥을 말하는 교회는 비성경적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신천지 장막 사람은 보혜사 성령과 계시록의 이기는 자와 백마탄자를 지네들 교주라고 하였고
신천지교를 믿으면 죽지 않고 영생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몰몬교의 선교사를 만나 몰몬경을 달라고 해서 받았는데
몰몬교는 몰몬경을 경전으로 삼고 하나님의 유일성을 부정합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단은 접근해서 전도하는데
이단과 비례해서 그 많은 교인들 중에 벤치에 접근해서 전도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일반 크리스챤은 전도지 전도 수준이요
성경적인 대화를 통해 전도할 수 있는 교양이 없습니다.
간증 하는 사람들의 수준도 성경의 복음적인 지력에 대한 이해나 깨달음이 전혀 없고
그냥 무속적 체험 신앙을 간증하는 수준입니다.
더 더욱 사역자가 찾아와서
전도하는 경우는 평생에 전무합니다.
전도하는 것이 실례라고 생각하는 마인드로
강단의 설교에만 종사합니다.
그 설교를 듣고 전도할 수 있는 능력이 배양되지 않는 다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입니다.
이단의 성경적 이해와 해석은
대부분 자의적 알레고리 해석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알레고리적 해석은
소위 말하는 영적인 교훈과 그 의미를 찾는 비유풀이입니다.
설교를 들을 떄 가끔 듣는 영적인 교훈과 그 의미라는 것은
자의적 알레고리 해석을 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단과 사이비에 한번 걸려들면......
백이면 백 다 이단의 올무와 함정에 함몰됩니다.
왜냐하면 일반적인 크리스챤은
성서의 영적인 교훈과 그 의미를 찾는 이단의 비유풀이보다 훨신 더 약한 소스에도 감동하고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기 떄문에 최고의 세프가 요리해 놓은 별미 앞에 그저 넋을 잃고 영혼을 빼앗깁니다.
강단의 설교에 감동받는 사람은
이단의 사설 앞에 탄성을 하고 감복할 따릅니다.
한국의 교회는 이단을 비판할 수 있는 능력을 훈련하지 않았고
허접한 설교를 듣고 순종하는 것을 종교성으로 길렀기 때문입니다.
일반 크리스챤이 이단을 만나면 물을 만난 고기가 되고
평소 성경에 대한 고민을 해소하는 해우소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단보다 더 이상한 이단 설교를 하는 강단의 설교는
그 허접함의 질이 너무 낮아 이단의 졸개 앞에도 크리스챤은 단번에 무릎을 꿇고 맙니다.
성경을 가르치지 않는 한국의 교회는
성경의 맛을 느끼게 하는 이단의 밥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교회에서도 성경을 가르치지 않고
신학교에서도 성경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신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지 않으니
성경의 지력에 대한 복음적인 이해가 없는 축복의 신화를 만들었습니다.
성경을 맛있게 가르치는 이단은 진리의 전당으로 우뚝서고
한국의 이단은 승승장구할 수 밖에 옥토의 환경을 가졌습니다.
이단과 사이비의 환경을 가진 한국의 교회는
거짓 영의 역사 앞에 무능의 극치를 드러냈습니다.
알파 영성 앞에 성경적인 성령론이 무너지고
무속 신앙 앞에 개혁주의 신앙이 무너졌습니다.
신비주의 영성으로 말씀의 진리는 무너졌고
은혜는 영성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인본주의 실존 신앙 앞에
성경의 본질인 신본적 신앙은 초라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포스트 모던의 좌파적 헤게모니 앞에
한국의 교회는 적화의 통일 전략 전술의 부역자가 되었습니다.
종교적 기득권을 유지 하려다가 좌파신앙의 함정에 걸려든 한국 교회는
성도 앞에 진실한 양심고백을 해야 할 것입니다.
한국의 교회는 주일성수와 주일예배와 십일조를 콘크리트 신앙으로 붙들고 있다가
성경의 진실에서 떠나고 온갖 이단과 사이비의 덫에 걸려 사탄의 밥이 되었습니다.
주일성수와 주일 예배와 십일조는 보수 신앙의 아성이지만 교조적 이데올로기요,
성경의 뿌리가 없는 대들보여서 그 자체가 이단과 사이비의 올무가 되고 또 덫이 되었습니다.
죽어도 정신 차리지 못할 한국 교회는
적화되어 킬링필드의 참상을 당하면서 그 때도 순교의 제물이라고 맹신할 것입니다.
강단의 설교.......
자가당착의 허접한 논리로 더 이상 하나님 앞에 자신을 속이지 말고
성경의 진실 드러내고 외식의 옷을 벗어야 합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이 걸었던 여로보암의 길에서 돌이키고
강단의 벧엘과 단, 그 우상을 요시야의 종교개혁으로 제거해야 합니다.
교조적 교리의 이데올로기적 우상화는
보수 교회와 교단의 신앙, 그 거짓의 옷을 입었습니다.
바리새인의 외식은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 박았고
강단의 외식은 진리의 복음을 상실하였습니다.
복음이 선포되지 않는 강단의 설교는
복음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없는 이스라엘 멸망의 전철을 밟고 있습니다.
무슨 소리냐고 우리 교회 강단은 복음으로 철철 넘치는데........
그렇습니까? 제가 실수를 했나 봅니다.
사실 복음이 철철 넘친다는 강단의 설교를 검증해보면
대부분 복음이 선포되지 않고 꿈을 쫓는 산앙으로 도배하였습니다.
다음 카페의 글은 "꿈을 쫓는 신앙"이라는 제목의 글이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