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웅의 잭 나이프는 허열의 어깨를 10센티나 찢어 놓았다.
세브란스 병원의 응급실에서 어깨를 치료받은 허열은 고통을 이 기지 못해 두 번이나
비명을 질러 댔고, 병원측의 주선으로 즉시 특실에 입원했다.
입원을 고집한 것은 허열과 함께 백수웅을 습격했던 남성우 형사였다.
"이까짓 상처로 입원하다니 말도 안 돼. 시간이 없어.
녀석은 틀림없이 남산 숲 속으로 튀었을 거야. 가자구. 가서 뒤져 보면
녀석을 발견할 수 있어. 허벅지에 총알이 박힌 게 분명하니까."
"306호 본부에 연락해 놓았습니다. 저도 곧 달려갈 겁니다.
하지만 검사님은 좀더 정밀 검사를 받으셔야 합니다."
"검사를 받다니!"
"녀석이 칼끝에 독극물을 발라 놓았는지도 모르잖아요. 닥터 한 테 말해 놓았습니다.
만일 녀석이 칼끝에 독극물을 발라 놓았다면, 그건 치명적인 상처가 되거든요."
허열은 상처를 들여다보았지만, 독극물 증상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남 형사의 세심한 배려를 그는 몹시 고마워했다.
남 형사는 어느 새 남산 숲의 수색을 위해 떠나고 없었다.
그 다친 몸으로 반도 호텔 수사 본부 팀과 남 형사가 합세하여 남산 숲을 샅샅 이 뒤져 보았지만,
백수웅은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튀는 데 는 정말 귀신 같은 사내였다.
허탈한 표정으로 그들은 다시 신촌의 세브란스 병원을 찾았다.
병원의 벽시계는 어느 새 아침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녀석이 숨을 만한 곳은 남산 숲밖에 없는데, 어디로 사라졌는지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침통하다 못해 자못 비장한 모습들이었다. 허열이 오히려 그들을 위로했다.
"걱정하지 마. 녀석이 서울에 침투한 지 며칠이나 됐다고 이 정도의 수사 진전은 대성과라고 볼 수 있어."
"하지만 도대체 , 독 안에 몰아넣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치밀하게 도망칠 준비를 하다니 "
지난 밤 허열도 상처의 고통 속에서 내내 그 생각에만 매달려 있었다.
양동의 창녀촌 무허가 하숙집 습격은 그야말로 전광석화의 기습이었다.
정보가 새어나갈 틈도 없었고, 그가 눈치첼 만한 틈도 주지 않았다.
그의 소재를 알려 준 서지아는 아직도 치안국 수사실에 감금되어 있고.
습격을 알고 있는 것은 세 명의 부하들과 자신뿐이다.
그런데 막상 기습을 하고 보니, 그 녀석은 덫을 설치한 채 오히려 역습을 감행해 온 것이다.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녀석이다.
"어떻게 할까요?"
"뭘?"
"서지아 말입니다. 아무래도 그 여자, 놓아 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야 녀석의 소재를 파악할 수 있을 거 아닙니까?"
맞는 말이다. 백수웅을 찾으려면 서지아를 풀어 주어야 한다.
둘은 또다시 만날 것이다. 미행만 철저히 한다면,
백수웅의 은신처는 또다시 드러나게 되어 있다. 하지만 허열의 생각은 달랐다.
"서지아를 중부 경찰서로 이송시켜. 그리고 언론에 스타 바가 불법 양주를 판매하다가
적발되어 서지아가 검거되었다는 정보를 흘리라구.
중부 경찰서 서장한테는 내가 직접 전화해서 협조 구할테니."
이번에는 백수웅을 끌어들일 계산이었다. 그 치밀하고 냉혹한 사내가,
경찰에 체포된 서지아를 외면할 리 없다. 궁금했다.
백수웅과 서지아의 사이가 얼마나 뜨거운가를 시험할 케이스도 된다.
만일 그녀의 체포가 세상에 알려진 뒤에 백수웅이 외면해 버린 다면,
그녀를 석방시켜 주어도 다시는 접선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를 구출하기로 작정한다면, 백수웅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며,
자연 노출될 것이다.
이 날은 일요일이다.
내일인 월요일, 서지아를 이송시키고 석간부터 보도케 할 것이다.
백수웅이 그 의미를 모를 리 없다. 만일 서지아 구속을 알고도 사흘이 넘도록 아무 반응을 보여
주지 않으면, 그 때는 적당한 구실을 만들어 풀어 주고 뒤를 조사할 것이다.
허열은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허탈한 읏음을 지었다.
"허허허. 내가 이 꼴이 되다니. 아무튼 백수웅이란 녀석, 대단 한 놈이야. 자, 오늘은 들어가 쉬라구.
나도 집에 가서 옷이나 좀 갈아 입어야겠어. 월요일 아침 7시에 수사 회의 시작할 테니 늦지
않도록 하고."
열흘이 넘도록 집에 못 들어가 내복이며 턱수염이 엉망이 되어 있었다.
허열은 15바늘이나 꿰맨 어깨 상처에 근육까지 당겨 몹시 고통 스러웠지만,
상처에 독극물 현상이 보이지 않는다는 병원측 설명을 듣고 곧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허열의 집은 우이동 도선사 입구의 150평이 넘는 대저택이었다.
노범호 회장이 결혼 선물로 정성스럽게 지어 준 새 주택이었다.
남편이 돌아온다는 연락을 받고, 노옥진은 딸 미라와 함께 현관에서 맞아 주었다.
그녀는 남편이 어깨에 상처를 입었다는 것을 그 때서야 알았다.
"아니, 어깨를 어떻게 다치신 거예요?"
아버지 노범호 회장의 전화가 없었다면 남편의 행방을 전혀 몰랐을 것이다.
11일 전 미라의 피아노 연주회 날 호출을 받아 나간 후 남편에게 무엇인가 중대한 일이 생겼다는
아버지의 설명이 있었고, 그러니'못 들어오더라도 이해해라.
묻지 말고 잘 보살펴라.'는 엄명이 내린 것이다.
노옥진의 팔에 매달려 있던 미라가 아빠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미안하다, 미라야."
허열이 허리를 숙여, 잔뜩 토라진 미라의 볼에 입맞춤을 해 주 었다.
"선물도 없어?"
"자, 보채지 말아요. 아빠, 어깨 다치셨어."
노옥진이 남편과 아이를 재촉해 거실로 들어갔다. 남편이 피로 한 듯 소파에 몸을 눕히다가
비명을 질러 댔다. 상처를 건드린 것 같았다.
"이--앗!"
"어머, 왜 그래요?"
아내의 고함 소리가 함께 터졌다. 잠바를 걸친 어깨가 붕대로 감겨져 있어,
어느 정도의 상처인지 그녀는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의자를 끌어당겨 허열의 옆에 앉았다.
"미라야, 너는 가서 피아노나 쳐라."
미라를 2층으로 올려 보낸 노옥진은 굳은 표정으로 허열을 바라 보았다.
"열흘이 넘도록 전화 한 통 없었어요."
"미안해, 사정이 그렇게 되었어."
"그래도 열흘이 넘었어요. 또 어깨는 그 모양이고 무슨 일인지 말해 줄 수 없어요?"
" "
"당신 일에 일일이 참견하고 싶지는 않아요. 또 지금까지 8년동안 그렇게 살아 왔고
하지만 이럴 수는 없어요.
당신이 어깨를 다쳐 치료를 받도록 가족이 모르고 있다는 건 무시한다는 것밖에는 되지 않아요."
그녀는, 누운 채 눈을 감은 남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잘생겼다는 것, 머리 좋다는 것,
장래가 보장된 젊은 공안 검사라는 것 외에는 아무 의미도 없는 사내다.
성격 자체가 무뚝뚝한데다가 직업 또한 그렇기 때문에, 남편을 이해하려고 무척 노력하지만,
남편으로서의 모습보다는 자신의 야망을 위해 날뛰는 맹수로밖에는 달리 감정을 가질 수가 없었다.
하긴 결혼부터 잘못 채워지기 시작한 단추였다.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던 남편은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소파에 누운 채 어느 새 코를 골기 시작했고,
2층으로 올라간 미라는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일어나 창 밖을 바라보았다. 엊그제만 해도 살을 찢는 추위였는데,
계절의 순리는 어쩔 수 없는지 어느 새 봄을 재촉하는 바람이 잉잉거리며 불어 대고 있었다.
웬지 그녀는 요 며칠 동안 알 수 없는 두려움과 슬픈 감정에 휩싸여 있었다. 이상한 예감이었다.
피로와 긴장으로 지쳐 있던 허열은 네 시간이나 깊은 수면에 빠져 있었다.
그가 깨어났을 때 노옥진은 아침 모습 그대로 옆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허열이 눈을 뜨자, 노옥진이 먼저 말을 걸어 왔다.
"피곤하신 건 알아요. 하지만 아무래도 오늘은 무언가 말해 주어야겠어요."
"무슨 말을?"
허열의 대답은 퉁명스러웠다. 언제나 그랬다. 잔정이 없는 사람 이란 건 알지만,
직장 일이나 가정 일에 대해 남편답게 오순도순 상의 한 번 한 일이 없다.
그래도 그는 언제나 자신에 넘쳐 있었고, 좌절이란 걸 모르는 사내다.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아무리 집에만 처박혀 있는 여자지만, 아내로서 알 건 알아야 할 거
아니에요? 당신이 공안 검사라는 걸 몰라서 하는 말은 아니지만,
내가 흉악범이거나 빨갱이는 아니잖아요. 뭐예요, 이게. 열흘이 넘도록 밖에서만 생활을 했으면
최소한의 사정은 알아야 할 거 아니에요. 내가 당신 아내인가요? 아니에요.
나는 집 지키고 빨래나 하고 아이나 키우는 가정부라구요.
당신은 남편이 아니에요. 내게까지 감추며 돌아다니는 이유가 뭐냐구요."
질문이 아니라 항의였다. 아니, 항의가 아니라 그건 절규였다.
남편에게서 따뜻한 정을 느껴 보지 못한 불만도 아니었다. 이토 록 격렬히 대들어 본 일도 없었다.
알 수 없는 초조와 불안, 그리고 무시당한다는 모욕감이 기어이 이렇게 폭발해 버린 것이다.
그녀는 거실 구석에 있는 화병을 들어 유리창을 향해 난폭하게 던져 버렸고,
유리창은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누워 있던 허열이 벌떡 일어났다.
"남자가 밖에서 하는 일에 일일이 참견하지 말라구. 계집질하고 돌아다니는 건 아니니까
때로는 말할 수 없는 사건이 생기기도 하는 게 내 직업 아냐?"
"그럼 난 뭐죠? 들어와도 그만, 안 들어와도 그만, 전부 이해하고 참기만 하며 살라는 거예요?"
2층의 피아노 소리가 멈추었다. 오전부터 지금까지 미라는 피아노만 치고 있었다.
집안이 살벌해지면 미라는 피아노를 치든가 방구석에 처박혀 얼굴도 내밀지 않았다.
미라의 불안해하는 낌새를 알아차렸는지, 허열의 목소리가 한결 조용해졌다.
"미안해. 하지만 이번 사건은 그 핵심이 너무 커. 아버지와도 관계가 돼 있고.
말하지 말라고 했지만, 당신에게만은 숨길 필요가 없을 거 같애."
더 이상 집안이 시끄러워서는 안 된다. 이웃집 채면도 있다.
더구나 앞으로 자신의 위치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아내에게만은 이야기를 해 주어도 괜찮을 것이다. 앞으로도 많은 날을 뛰어야 할 처지이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테러리스트가 밀입국했어."
"테러리스트? 목적이 뭐예요?"
"그건 잘 몰라. 대통령이 목표 같아."
허열은 가장 편한 방법으로 말해 주었다. 대통령을 목표로 한 테러라면 국가 A급 비상이다,
더구나 대통령 측근에는 아버지도 있다.
허열은 이번 기회에 아내의 버릇을 고쳐 놓고 싶었다. 그것은 충격을 주는 일이다.
"녀석이 내 생명을 노렸어. 은신처를 찾았는데 날 먼저 습격해 버린 거야.
한국인인데 빨갱이였어. 백수웅이라는 "
'백수웅.'
남편 허열의 입에서 분명히 백수웅이라는 이름이 불려졌다. 노옥진의 얼굴이 창백하게 일그러졌다.
"야생마 같은 녀석이라구. 대통령과 경제계 1인자인 아버지가 목표인 거야.
그래서 못 들어왔는데 집에서 앙탈만 부려 댈 거야? 못난 여자 같으니라구."
"테, 테러리스트 ,"
노옥진의 시선은 허열의 얼굴에 꽃아 박은 듯 움직일 줄 몰랐다.
잠시 그렇게 앉아 있던 노옥진의 입술이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무엇인가 말하려던 그녀가 기어이 의자에서 쓰러져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정신을 잃은 것이다.
허열이 깜짝 놀라 일어났다. 수건에 물을 적셔 아내의 얼굴을 닦아 주었고,
전화를 걸어 주치의를 불렀다. 그는 너무 심한 충격을 준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으며,
다소 미안한 마음까지 갖게 되었다.
자신과 아버지의 생명을 노리는 테러리스트란 말에 커다란 충격을 받은 것이다.
진정제 주사를 놓고 약을 먹인 의사와 간호원이 떠났다.
그들이 떠난 후에도 약 기운 때문인지 노옥진의 혼수 상태는 오후 내내 계속되었다.
'가슴 깊이에는 날 아끼는 마음이 있었어. 이런 여자가 왜 그렇게 냉랭했는지 알 수가 없단 말이야.'
부부 간의 애정 갈등이란 두 사람 모두에게 책임이 있게 마련이지만,
허열과 노옥진의 관계는 오히려 여자측에 문제가 더 많았다.
허열은 결혼식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밝은 노옥진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마치 우울증에 걸린 사람 같기도 하고, 또 때로는 몽유병 환자같이도 보였다.
첫 딸 미라를 낳았을 때도 그녀의 모습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딸에 대한 애정은 어느 부모보다도 뜨겁고 강렬했지만, 그러나 그 기쁨이 표현된 일은 없었다.
허열은 약 기운에 떨어진 아내 주변을 두 시간이나 서성이며 보냈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새삼스럽게 들여다보았다. 분명 미인 축에 드는 여자다.
얼굴의 균형이 잘 잡혀 있고, 몸매도 결코 뒤떨어지는 여인이 아니다.
비록 B 클래스 대학의 문과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기는 했지만,
용모 못지않은 지성을 갖추기도 했다. 그러나 그래서 결혼을 승낙한 것은 아니다.
이 여인과의 결혼은 당사자인 노옥진 보다도 그의 아버지 노범호 회장의 영향이란 것을
부정하지는 않 았다.
"특이한 성격이긴 하지만, 괜찮은 아이야, 눈 꼭 감고 살아봐.
그리고 자네도 자네의 장래를 생각해 보고 자네가 수재인데 다가 남자다운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란 걸 알기 때문에 우리 옥진 이를 맡기려는 거야."
노범호 회장, 당대의 재벌에 권력 중심부에 들어앉아 있는 그가 장래를 기약하며 사위로
들어올 것을 권했다.
자신이 대학가의 가장 유망한 스타로 군림하고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이건 눈물이 날 만큼 감동적인 포옹이었다.
법조계에 첫발을 디더 병아리 검사로 출발할 때, 노범호 회장은 공안 검사로 일하도록 지시했다.
어느 정도 훈련이 쌓아지면 정적 (政敵)을 두들기는 데 활용할 생각이었고.
장차 정계로 진입, 큰 인물로 만들어 보겠다는 것이 노 회장의 속셈이었다.
그러나 그런 대가만큼 가정은 날이 갈수록 메말라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마침내 아내가 충격에 쓰러진 것이다.
아내 노옥진의 충격은 상대적으로 허열에게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
아내의 그늘에 묻혀 산다는 콤플렉스도 한꺼번에 해소되는 것 같았다.
처음부터 노옥진을 사랑해서 결혼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 성격에 배경을 두려워해서
공처가가 될 못난 위인도 아니었다. 가정의 건조한 분위기는 이런 이유 때문에 형성된 것이다.
허열은 오랫동안 옆에서 아내를 정성스럽게 간호해 주었다.
어깨의 아픔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백수웅에 대한 생각조차 잠시 잊고 있었다.
노옥진이 눈을 떴다. 자신은 침대에 누워 있고,
옆에서 남편이걱정스러운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괜찮아, 여보?"
그녀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리고 손으로 나가 달라고 했다. 혼자 조용히 쉬고 싶은 것 같아 보였다.
"내가 필요하면 불러요."
"알았어요. 미라는 , 미라는 뭐하죠?"
"걱정 말아요. 텔레비전 만화 영화 보고 있으니까."
노옥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허열은 아내가 무척 쓸쓸해 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혼자 남겨 두고 나간다는 것이 애처롭게 생각되었다.
"옆에 있어 줄까?"
"아녜요, 좀 조용히 쉬고 싶어요."
허열이 이불을 다독거려 주고 밖으로 나갔다. 남편의 모습이 사라지자,
노옥진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심장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차라리 예리한 칼날로 심장을 마구 난도질하는 것이 훨씬 나을 것 같았다.
'어떻게 된 거지? 백수웅이 테러리스트가 되어 잠입했다고? 대통령과 아버지와 남편이 테러 목표라고?
하느님, 이게 꿈이 아닌가요? 백수웅이 돌아왔답니다.
어디서 무얼 하다가 이제 나타나 아버지와 남편을 살해하겠다는 건가요? 맞죠, 하느님?
그 백수웅 이 맞죠? 살아는 있었군요. 고마워요. 그를 살려 주셔서. 내가 만나 볼 수는 없나요?
8년이나 지났군요. 보고 싶어요. 하지만 이번에 만나면 그냥 떠나라고 할 거예요.
그렇지만 한 번만 만나 보게 해 주세요.
목소리라도 한번 듣게 해 주세요. 나를 원망해도 좋아요. 용서를 바라지도 않을 거예요.
그 냥 보고 듣기만이라도 하게 해 주세요, 네? 하느님.'
베개가 눈물로 흥건히 젖어 버렸다. 아무리 흐느껴 울어도 눈물은 마르지 않았다.
창 밖에선 차가운 봄바람 속에서도 싹을 틔우려는 나뭇가지들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울음을 그친 그녀는 한동안, 생명과 투쟁하는 메마른 나뭇가지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생명의 끈질김을 바라보며 이번에는 감동에 취해 있었다.
생명, 그것은 참으로 고귀하고 끈질긴 것이다. 그녀의 눈에 미라의 웃는 모습이 떠올랐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것에게는 아픔과 비극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백수웅을 만나면 우리 미라를 위해서라도 조용히 떠나가라고 할것이다.
그리고 8년 동안 가슴에 맺혀 온 그에 대한 처절한 그리움을 지워 버릴 것이다.
한 번만 만나 보면 모든 것은 해결된다.
노옥진이 백수웅을 처음 알게 된 것은 K 대학에 입학하던 1964년 3월, 바로 8년 전이었다.
남학생, 여학생 가릴 것 없이 모두 공화당 정부의 대일 굴욕 외교에 적극 항거하던
그 격동의 시기였다.
노옥진은 이 때, 성균관 대학에 백수웅이라는 괜찮은 학생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백수웅은 금호동의 초라한 집에서, 그것도 전세 들어 살고 있었다.
아버지 없이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데, 어머니는 시장에서 좌판을 벌여 놓고 장사를 하고 있었고,
백수웅은 학교에서 장학금을 받고도 돈이 모자라 아르바이트까지 하면서도 수석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고 했다.
문리대 철학과의 창백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줄 알았던 백수웅을 처음 본 노옥진은,
그의 웅변과 파워에 넋을 잃었다. 그는 수백 명의 학생들이 운집한 야외 교정에서 열변을 토하고 있었고,
노옥진은 학생들 틈에서 그를 바라 보고 있었다.
"민족이란 자존심이라는 뜻과도 일치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조상들은 일본 제국주의의 무기 앞에서 거침없이 피를 홀렸던 것입니다.
비록 우리 손으로 독립을 이룩하진 못했지만, 이 땅은 일본에 항거했던 열사들의 피로 이룩된 땅입니다.
그런데 해방된 지 불과 20년 만에 일본에게 우리 나라가 다시 머리를 숙이려 하고 있습니다.
돈, 돈 때문에 현 박정권은 조상과 영혼을 한꺼번에 팔아 치우려 한다 이겁니다."
"와 ."
함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뒤의 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3-4 학년 학생 운동 리더들도 감격에 떨며
손바닥이 터져라 두드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비굴한 외교 정책을 부추기는 자가 누군지 아십니까?"
백수웅이 단상의 물을 들이켰다. 그리고 웃으며 청중을 둘러보았다.
"바로 일제 시대 때 일제의 앞장을 섰던 친일파 재벌들이다 이겁니다.
조상들이 알면 무덤 속에서도 벌떡 일어나 호령을 할 겁니다.
한 번 매국노는 영원한 매국노라고 하하하."
당찬 웃음소리가 광장을 쩌렁쩌렁 울려 댔다. 이번에는 환호도 박수도 없이 숙연해졌다.
"여러분! 피죽을 들이켜는 인간이 되는 것을 원하십니까, 고기를 먹는 돼지가 되기를 바랍니까?
우리 민족은 풀뿌리 민족입니다. 전통이 그렇습니다.
허리띠를 조르더라도 온 민족이 일어나 최소한 일본에만은 머리를 숙이지 못하도록 해야 할 겁니다."
신입생 환영 축제를 불과 일 주일 앞둔 어느 날의 데모 집회였다.
노옥진은 연설을 들으며 눈물을 흘렸다. 이런 감동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어딘가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머리라도 처박고 싶었다.
공화당 정부의 대일 외교에 앞장 선 사람은 바로 자신의 아버지 였으며,
아버지 노범호야말로 친일파의 대명사격인 인물이었다.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해, 젊은 나이에 조선 재산 수탈의 원흉이었던
동양 척식 주식 회사의 고급 간부로 일했고,
그 때 모은 돈으로 대구에 제사 공장(製絲工場)을 차려 단번에 재벌이 되었다.
해방 후에는 은행장이나 경제 장관 자리를 제의받기도 했지만,
노 회장은 오로지 사업에만 몰두했다.
그러다가 5.16 혁명이 터졌다. 경제 재건의 굳은 의지를 표명한 정희 대통령은,
노범호 회장을 경제 고문으로 생각하고 측근에 앉혀 두었다.
노범호 회장은 그 때 대구의 공장을 처분하고 건설 사업에 손대기 시작했다.
그는, 경제 발전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먼저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해야 한다고 대통령을
설득했다. 그것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노옥진은 아버지의 과거가 부끄러웠다고 해서, 아버지를 거역하거나 집을 뛰쳐나오지는 못했다.
왜 일본에게 경제 구걸을 해야 하느냐고 따지지도 못했다.
심성이 착하고 여린 그런 평범한 여학생에 불과했던 것이다.
노옥진의 관심사는, 흔히 대학생들이 갖는 정치 문제가 아니었다.
친구 박영란을 따라 백수웅의 강연회에 갔다 온 이후, 그녀는 온통 백수웅 생각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당당하고 우렁찬 목소리, 뚜렷한 자기 소신, 분명한 국가관에 매혹되어 버린 것이다.
"사내다워. 멋있는 남자야."
한번 관심을 갖게 되자, 관심은 무서운 집념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중앙 여고 출신인 그녀는 성균관 대학에 입학한 동창생,
그것도 정치 데모에 앞장 선 박영란을 들볶기 시작했다. 한 번만이라도 단둘이서 만나고 싶었던 것이다.
강연이 있은 지 일 주일이 지난 후, 박영란은 마침내 백수웅을 종로 고려당 빵집으로 끌어 내는 데 성공했다.
노옥진은 자신의 신분을 감출 수밖에 없었다.
백수웅의 공격 목표 중에는 바로 자신의 아버지도 있기 때문이었다.
시골서 올라와 자취하고 있는 소박한 여학생으로 둔갑한 노옥진.
그녀를 본 백수웅도 놀랄 만큼 호의적인 태도를 보여 주었다.
"굉장히 예쁘게 생기셨군요. 문학을 공부하신다구요.
서울 생활 어렵지는 않습니까? 정치에는 관심이 없으시겠죠?"
이상하게도 그 호랑이 같던 백수웅이 노옥진만 만나면 사자 만난 개처럼 꼬리를 감추며 부끄러워했다.
대학의 1년 후배 되지만, 티없이 맑고 깨끗한 인상과 어딘지 모르게 배어 있는 귀족 같은 품위를
그녀에게서 느낀 것이다.
격렬한 데모가 이어지는 중에도, 두 사람은 틈틈이 영화관도 찾아갔고 고궁을 거닐기도 했다.
노옥진은 주로 문학에 관한 이야기를 했고, 백수웅은 사회와 국가의 부조리를 찾아 내 헐뜯었다.
그 무렵, 백수웅은 친구들과 어울려 민속 주점을 드나들었고,
그 곳을 거점으로 학생 운동을 전개했는데, 어쩐지 노옥진만큼은 그런 곳에 휩쓸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노옥진도, '민속 주점'을 '민족 주점'으로 간판을 바꿔치기했다는 말을 웃으며 들었지만,
가 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 술집 주인 여자 딸이 엉뚱하게도 백수웅을 좋아한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6.3 대규모 데모가 터진 것이다.
노옥진이 다니던 K 대학 학생들도 거리로 뛰쳐나갔지만,
노옥진은 데모 때문에 튀어나간 것이 아니었다.
성균관 대학의 백수웅이 걱정되어 미칠 지경이 된 것이다. 그녀는 먼저 성균관 대학으로 달려갔다.
백수웅이, 다칠지도 모르니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지만, 그녀는 그 제의를 거절했다.
"다치기로 든다면 백수웅 씨가 더 위험하죠. 제 걱정은 마세요. 끌까지 뒤따를 테니까."
노옥진은 처음으로 데모에 가담했다. 명륜동.원남동을 거쳐 데모대는 종로로 빠져들었고,
거기서 곧바로 광화문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아예 청와대에까지 돌격해 박 대통령과 끝장을 볼 셈이었다.
돌과 곤봉, 소방차의 물줄기가 난무하는 전장터 속에서도, 노옥진은 백수웅을 놓치지 않고 뒤따랐다.
광화문은 완전히 전장터로 바뀌었다. 노도 같은 데모대와 철통 같은 데모 저지 병력이 맞붙어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학생들은 블록과 돌을 저지 경찰대에 던져 댔고, 경찰들은 소방차의 물 세례와 곤봉으로 대항했다.
머리가 깨지고 쓰러지고 피를 홀렸다.
데모 주도는 주로 2학년 리더가 맡았고, 3-4학년 주동자는 학교에 남아 지휘했다.
백수웅이 앞장 설 수밖에 없었다. 백수웅이 광화문을 맡았고, 이성구는 시청 앞을 맡았다.
데모 전열이 마침내 흐트러지기 시작했고, 경찰에 몰리게 된 학생들이 퇴각하기 시작했다.
흐트러진 데모 대열 속으로 경찰들이 뛰어들어, 닥치는 대로 갈겨 대기 시작했다.
앞장 서던 백수웅이 꼴찌로 처졌다.
후퇴하면서도 그는 악을 쓰며 구호를 외쳐 대고 있었다.
"굴욕 외교 철회하라! 민족 긍지 잃지 말자! 한일 수교 결사 반대!"
노옥진은 백수웅을 두 번이나 놓쳤지만, 뛰다 말고 돌아서서 돌을 던져 대는 그를 발견하고
미친 듯이 달려갔다.
"안 돼!"
노옥진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고함을 질렀다. 경찰 하나가 뒤에서 곤봉으로 백수웅의 머리를 갈긴 것이다.
"딱!"
그 혼란한 가운데서도 노옥진은 머리를 갈기는 둔탁한 소리를 들었다.
비틀거리는 백수웅의 목덜미를 경찰이 움켜잡았다. 연행할 작정이었다.
불과 5미터 앞이었다. 놀란 그녀는 엉겁결에, 굴러다니는 돌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 경찰의 머리를 향해 힘껏 던졌다.
"아이쿠!"
이번에는 경찰이 얼굴을 감싸안으며 고꾸라졌다. 돌은 용케도 얼굴을 강타했다.
노옥진이 달려가 백수웅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그것은 틀림없이 신(神)의 도움이었다. 신이 돕지 않았다면 경찰의 손아귀에서 구해 내지도
못했을 것이고, 힘이 모자라 그를 끌고 가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디서 그런 힘이 나는지, 백수웅의 어깨를 부축하고도 나는 듯이 달릴 수 있었다.
데모대 사이를 비집고 도망치던 노옥진은,
다친 학생들을 구해주려고 몰려온 택시와 삼륜차들을 만날 수 있었다.
"살려 주세요. 사람이 죽어요."
얼굴이 피 범벅이 되었고, 깨진 머리에서는 계속 피가 솟구치고 있었다.
눈물도 나지 않고 겁도 나지 않았다. 어떻게든 이 곳을 빠져나가 병원으로 달려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고맙게도 삼륜차 하나가 와서 멈추어 셨다. 운전 기사가 내려왔다.
"빨리 태워요."
운전 기사와 노옥진이 부축해서 백수웅을 삼륜차의 짐칸에 태웠다.
차가 출발하자, 노옥진은 스커트를 이빨로 찢어 백수웅의 터 진 머리를 동여맸다.
그리고 비명을 지르는 그를 향해 소리쳤다.
"참아요. 조금만 참으라구요."
머리를 찍어 누르는 손가락 사이로 피가 흘러내렸다. 그녀는 그때부터 울기 시작했다.
"안 돼, 죽으면 안 돼. 으흐흐 "
그녀는 가슴으로 백수웅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그냥 여기서 숨을 거둘 것만 같았다.
덜컹거리던 삼륜차가 왕십리에서 멈추어 섰다. 병원 앞이었다.
기사가 달려나와 백수웅을 둘러메고 병원으로 뛰어들어갔다.
하늘은 이번에도 백수웅 편이었다. 그렇게 심한 상처를 입었는데도, 다행히 뇌는 다치지 않았다.
30분에 걸친 수술 끝에 찢어진 머리를 완전히 봉합했다.
다시 살아난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수혈을 필요로 했다. 피를 너무나 많이 홀린것 이다.
백수웅은 A형의 피를 가졌고, 노옥진은 o형의 피를 가졌다.
"괜찮겠습니까?"
의사가 물었다. 노옥진이 팔뚝을 걷어붙인 것이다.
"괜찮구말구요. 전 건강하거든요."
"좋습니다. 그럼 옆에 누우세요."
노옥진이 백수웅의 옆 침대에 누웠고, 그녀의 팔뚝에 바늘이 꽃 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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