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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론 스크랩 천년왕국 운동에 대한 사회과학적 고찰: 시한부 종말론을 줌심으로
기획실 추천 0 조회 18 14.10.11 11:2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천년왕국 운동에 대한 사회과학적 고찰: 시한부 종말론을 줌심으로

 

 

 

주제발표 : 이 원 규 (감신대교수) / 논평: 송봉모 (서강대 교수)

 

 


1. 머리말

지난 1992년 10월 휴거를 주장하던 일단의 시한부 종말론자들에 의해 한국 교회와 사회가 크게 시끄러웠던 적이 있다. 그러나 그들이 믿었던 종말이 임하지 않자 한동안 종말론은 수그러드는 것 같았다. 그러나 20세기의 마지막 해, 두 번째 천년 시대를 마감하는 해가 가까워 오면서 전 세계적으로 다시 종말신앙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1999년에 지구가 멸망할 것이라는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 2000년에 예수가 예루살렘에 재림한다는 예루살렘 신드롬, 새 밀레니엄에서의 Y2K에 대한 불안, 지구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지진, 태풍, 가뭄, 홍수, 화산폭발과 같은 자연적 재난은 지구의 종말에 대한 믿음을 확산시켰다. 그리하여 세계적으로 1,200개 정도의 종말론 집단이 생겨났고, 국내에도 70-80개의 종말론 집단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원래 유대-기독교 전통에서 특히 발달한 종말신앙은 절대자의 역사 개입에 의하여 현재의 세계질서는 끝나고 새 시대가 도래한다고 하는 대망의 신앙이다. 종말신앙 가운데 가장 현저한 것은 천년왕국 신앙 혹은 천년왕국운동이다. 천년왕국운동이 때로는 미래의 완성을 위해 준비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변혁적인 예언운동으로 발전할 수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현실 도피적이고 체념적인 삶을 살게 만들고 심지어는 왜곡된 성서해석으로 종말의 시기를 임의로 산출하여 공포와 불안의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한다. 특히 후자의 종말신앙을 우리는 시한부 종말론이라고 부른다.

이 글에서 우리는 최근 한국에서 널리 퍼져있는 시한부 종말론의 문제를 논의해 보려고 한다. 이를 위하여 시한부 종말론의 신앙적 토대가 되고 있는 천년왕국운동의 성격과 그 배경에 대하여 살펴볼 것이고, 나아가서 시한부 종말론의 문제점과 그 종교적, 사회적 배경, 그리고 그 신앙의 전망과 평가에 대하여 논하게 될 것이다.

2. 종말신앙과 천년왕국운동

종말신앙은 모든 종교들에서 발견되고, 또한 종교가 생긴 초기부터 있어온 것이 사실이지만, 그 경향은 유대-기독교 전통에서 특히 강했다. 그 이유는 유대-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시간관 혹은 역사관, 그리고 메시야 사상(Messianism) 때문이다. 종말사상은 시간을 직선적인 것으로 보는 종교에서 주로 생겨난다. 직선적인 시간관과 역사관은 시간을 분명히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하면서 역사의 종말이 미래에 임할 것이라고 본다. 따라서 종말사상은 시간이나 역사를 순환적인 것으로 혹은 주기적인 것으로 보는 힌두교나 불교에서보다는 시간을 직선적인 것으로 보는 유대-기독교 전통에서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종말신앙은 또한 절대자(대체로 유일신)를 믿고 메시야 사상을 가지고 있는 종교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자력에 의한 구원의 가능성을 믿는 종교에서는 종말신앙이 생겨나기 어렵지만, 절대자에 의한 타력구원에 대한 확신을 갖는 종교에서는 그의 역사개입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이 생기게 된다. 이 때 특히 중요한 것은 구세주 신앙으로 메시야의 오심이 새로운 시대를 열 것으로 믿고 이를 대망 하게 된다. 따라서 종말신앙은 유대-기독교 전통에서 현저하게 보여지고 있다.

종말신앙 가운데서 특히 두드러진 것은 천년왕국운동(Millenarian movement) 혹은 천년왕국신앙(millenarianism 혹은 millennialism)이다. 이 운동이나 신앙도 역시 기독교 전통에 그 뿌리를 가지고 있다. 천년왕국신앙이란 최후의 심판이 있기 전에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재림하여 사탄의 세력을 물리치고 천년동안 세상을 통치하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다. 이 믿음은 신약성서 요한계시록 20장 1-7절에 근거하고 있다. 천년왕국의 기간 동안에 의인들은 부활하며 그리스도와 함께 평화와 기쁨의 생활을 하며, 천 년 후에는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게 될 것이라고 본다. 즉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곧 세상의 종말이 임하여 최후의 심판과 구원이 있기 전 천년을 그가 다스리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천년왕국운동이란 천년왕국 신앙을 토대로 하여 천년왕국을 대망 하면서 "전체적으로 임박한 궁극적인 집단구원을 이 세상에서 추구하는 종교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콘(Cohn)은 천년왕국운동에서 나타나고 있는 천년왕국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첫째로, 천년왕국은 한 집단으로서의 충성스러운 자들에 의해 누려질 것이라는 의미에서 집합적(collective)이다. 천년왕국 신앙은 개인적인 구원에 집착하는 신앙이 아니다. 둘째로, 그것은 어떤 타계적 하늘에서가 아니라 이 세계에서 실현될 것이라는 의미에서 지상적(terrestial)이다. 그러나 지상적이라고 해도 새로운 시대에서의 지상의 삶은 지상에서의 현재의 삶과 매우 다를 것이다. 셋째로, 그 왕국은 곧 그리고 갑자기 올 것이라는 의미에서 임박해(imminent) 있다. 그러나 임박한 세계의 변형은 초자연적 힘에 의해 주로 시작될 것이다. 넷째로, 그것은 지상에서의 삶을 철저히 변형시키고, 그리하여 새로운 통치가 단순히 현세에 대한 개선이 아니라 완성 자체일 것이라는 의미에서 전적인(total) 것이다. 다섯째로, 그 왕국은 초자연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작인(作因)들에 의해 성취될 것이다. 그러나 비록 변형이 초자연적 힘에 의해 궁극적으로 성취될 것이지만, 인간은 그 길을 준비하는 데 하나의 적극적이고 중요한 역할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천년왕국 신앙은 하나의 운동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 탈몬(Talmon)은 천년왕국 신앙의 몇 가지 다른 특징들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우선 그 신앙은 환각적인 경향이 있다. 대부분의 운동에서는 그 의례가 거칠고, 흔히는 격앙된 감정적 표현과 관계되어 있다. 이 운동에서는 병적인 흥분, 과대 망상적 현상, 집단 사로잡힘(possession), 황홀과 환각의 경험이나 춤이 흔히 발견된다. 천년왕국 신앙의 대부분은 메시야적 성격을 띠고 있다. 즉 구원은 신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인 구속자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과 그 운동 사이의 중요한 중보자는 종교 지도자로서 그 지도력은 카리스마적인 경향이 있다. 천년왕국운동은 대체로 비조직적이고 그 수명이 짧은 것이 전형적인 형태이다.

천년왕국 신앙에 따르면 이 세상에서의 삶은 고통받고 시험받고 있는 시간으로 보여지지만, 새로운 시대는 정의가 지배하는 새로운 사회질서의 강림을 의미한다. 따라서 불이익을 당하고 있는 집단에게 천년왕국 신앙은 미래에 대한 커다란 희망을 제공한다. 흔히 이러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집단은 그들의 종교적 표현에서 매우 감정적이고, 새로운 시대를 시작하기 위한 그들의 노력은 광적인 것이 되기 쉽다. 따라서 천년왕국운동에 참여하는 집단이 사회적인 혹은 종교적인 기성권위에 대항하여 적극적인 반항을 촉진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물론 어떤 천년왕국운동은 신비적 방법을 사용하기 때문에 멤버들에게 호전성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변화전략에 비효과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전체적 경향은 천년왕국운동가는 활동주의자라는 것이다. 만일 사람들이 부정의 하거나 심지어는 본질적으로 악한 것으로 보는 현재의 사회질서를 뒤집도록 돕는 데 그들이 하나님께 책임이 있다고 믿는다면 종교적 의무에 대한 그들의 신념은 사실상 사회변동을 자극하는 것이다.

천년왕국운동이 때로는 정치적인 성격을 띠기도 한다고 지적되어 왔다. 이 운동에 참여하는 집단은 흔히 공통의 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외부적 위협에 직면하여 자원을 동원하여 이에 대항하는 수가 있다. 이렇게 되면 천년왕국운동은 유토피아적 목표로부터 보다 제한된 세속적인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있는, 보다 진보된 운동으로 바뀔 수 있다. 조직화된 정치적 저항의 형태로 나타나는 천년왕국운동은 서구국가의 식민지배 아래 있는 부족사회에서도 흔히 보이고 있다. 멜라네시아(Melanesia)의 화물제의(Cargo Cult)나 인디안 부족의 망령의 춤(Ghost Dance) 등이 그 예가 될 것이다. 이러한 천년왕국운동은 부족의 생존에 위협이 되는 압제자에 대한 반항이 종교적 형태로 발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워슬리(Worsley)는 또한 하류 사회계층과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었던 천년왕국운동의 열망을 그들이 지배계급의 지배적인 가치와 이데올로기를 거절한다는 점에서 잠재적으로 혁명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만하임(Mannheim)도 지상에서의 천년왕국의 도래에 대한 관념은 항상 혁명적 경향을 포함하고 있다고 보면서 그것은 정치적 급진주의에 훨씬 더 가깝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급진적 종교운동에서 핵심적인 영향은 카리스마적인 지도자 혹은 예언자에게서 온다. 사회적 긴장이 고조되고 반동이 국가적 수준에 이를 때 사회 주변에서는 그러한 동요를 묵시적 투쟁이나 세계의 마지막 정화로 바꾸려는 의도를 가진 예언자들이 추종자들을 이끌고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천년왕국운동은 대중 소요와는 다르다. 그것은 정치운동의 '현실적' 목적과 종교적 혁명의 '비현실적' 환상 사이의 대조라고 할 수 있다.

천년왕국에 대한 믿음은 전통적인 기성종교뿐만 아니라 새로운 종교운동 가운데서도 나타나고 있다. 한편 그러한 믿음은 세속적인 운동에서도 비슷한 양태를 보일 수 있다. 즉 19, 20세기의 여러 '주의'(isms)가 세속적인 천년왕국운동을 투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상 많은 형태의 민족주의가 옛 사회질서의 파괴 가운데서 그들의 운명을 실현시키려는 사람들의 비전에 기초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러시아 혁명, 나치즘, 구 소련이나 중국의 공산주의가 모두 천년왕국운동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본다. 즉 초자연적 영역에의 참조 없이도 이 믿음체계는 질서와 의미의 문제에 대한 천년왕국적인 반응이라는 것이다.

천년왕국운동의 기능에 대하여는 엇갈린 평가가 있다. 그 운동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입장에서는 그것을 위험한 집단적 광신으로 본다. 즉 천년왕국운동은 신봉자들 자신을 온전히 선하고 박해받고 있다고 생각하게 하며 적대자는 악마적 세력으로 보고 인간존재의 불가피한 한계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며, 지나친 감정주의와 반율법적 의례에 집착하여 파괴적인 활동을 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는 천년왕국운동은 정신분열적 환상이며 극단적 불안의 표출이고 절망의 기만인 것이다.

그러나 그 운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입장도 있다. 이 관점에서는 천년왕국운동이 옛 질서를 뒤엎고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려는 노력으로 보면서 그것의 이데올로기는 신자들에게 귀중한 보호수단과 도움을 제공한다고 본다. 그 운동의 지배적 요소는 절망이 아니라 내면적 확실성과 희망이며, 그 운동은 신자들에게 새로운 정체성, 소속감, 그리고 목적의식을 마련해 주는 것으로 설명한다. 이렇게 천년왕국운동은 침체되어 있고 정치적으로 소극적인, 격리된 집단 안에서 해방시키고 활기 있게 하며 일체화시키는 힘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반된 평가는 각기 다른 형태의 천년왕국운동을 염두에 두고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천년왕국운동에는 크게 두 가지 종류가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숙명적 종말론에 입각한 것으로 여기에서는 단순히 때를 기다릴 뿐 현실세계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나 책임의식이 결여되어 있다. 세상을 단순히 부정하기 때문에 현실에 대하여는 체념이나 거부 혹은 도피의 태도를 보여주게 된다. 더욱이 이분법적 사고를 가지고 그 신앙을 가진 사람들만이 선택받고 구원받으며, 나머지는 종말의 때에 저주받고 심판 받게 될 것이라는 배타적인 의식을 가지고 있다. 여호와의 증인이나 안식교가 그 예가 될 것이다.

또 하나의 천년왕국운동은 창조적 종말론에 근거하고 있는 것으로 현실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은 전자의 경우와 같으나 상황에 대처하는 방식이 도피나 거부가 아니라 적극적인 참여를 통한 변형의 의지를 보여주는 운동이다. 여기서는 세상을 거부하거나 포기하기보다는 이 세상을 변화시키며 종말을 준비하려는 태도를 나타내며, 따라서 다분히 정치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이러한 운동이 만하임에게는 '정치의 영화'(spiritualization of politics)를 의미하는 것이지만, 로버트슨(Robertson)은 그것을 '종교의 정치화'(politicization of religion)라고 부르고 있다. 토마스 뮨쩌(T. M?nzer)의 종교운동이 그 예가 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숙명적 종말론에 근거한 천년왕국운동이 반사회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면, 창조적 종말론에 근거한 천년왕국운동은 오히려 사회변혁의 한 원동력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앞으로 논의될 '시한부 종말론'은 전형적으로 전자의 경우라 할 수 있겠다.

3. 천년왕국운동의 배경

하나의 종말신앙으로서의 천년왕국운동은 어떤 사람들에 의해 어떤 상황에서 생겨나는가? 천년왕국운동은 그 자체가 다양한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발생 배경과 발전 과정도 다양할 수 잇다. 그러나 여기서는 전형적인 경우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일반적인 종말신앙의 출현배경에 대하여 밝혀본다.

종말신앙은 특별한 사회적 상황에서 생겨날 가능성이 많다. 종말사상은 우선 정치적 격변상황에서 생겨나는 경우가 많은데, 특히 전쟁이나 심한 정치적 압제 또는 내분이나 혼란의 상황이 전개될 경우에 그렇다. 구약시대에도 종말론적인 묵시사상은 주로 포로기 및 포로후기 시대에 생겨났고, 신약시대에 있어서도 종말사상은 주로 로마의 박해 상황에서 생겨났다. 그 외에도 역사적으로 보면 미국독립전쟁, 프랑스혁명, 그리고 1, 2차 세계대전 당시 종말사상이 유행했다. 한국에서도 종말사상은 구한말 정치부재의 상황에서, 일제치하의 억압상황에서, 그리고 6.25 동란 직후에 크게 확산되었다. 최근에는 걸프 전쟁 전후에 세계 도처에서, 그리고 한국에서 종말사상이 유행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정치적 격변 상황만이 아니라 이에 대응할 능력이 없다고 느끼는 정치적 무력감이다. 정치적 격변과 이에 대한 무력감이 종말사상을 확산시키는 것이다.

둘째로, 종말사상은 악화된 경제적 상황 가운데서 생겨날 가능성이 많다. 특히 급변하는 경제적 상황이나 불황의 상황, 그리고 대기근이나 빈곤과 같은 경제적 어려움이 심화될 때 종말사상이 대두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산업혁명으로 인해 갑자기 빈곤계층이 생겨났을 때의 유럽에서, 19세기 전후 산업화 과정에서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었던 미국에서, 그리고 세계 대공황이 있었던 20세기 초 세계적으로 종말사상이 확산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셋째로, 종말사상이 생겨날 수 있는 사회적 상황은 사회적 혼란이나 갈등의 상황이다. 범죄, 편법, 불법, 부조리, 모순 등이 편만해 있다든가, 급변하는 사회상황에서 전통적인 사회구조가 붕괴되거나 급격하게 변화되는 상황에서 종말사상은 유행할 수 있다. 급격한 인구이동이나 계층이동 혹은 직업이동과 같은 변화가 그 예가 될 것이다.

넷째로, 종말사상은 문화적으로 가치의 혼란이나 갈등, 그리고 도덕적인 무규범 상태(아노미)에서 생겨나는 경우가 많다. 전통적인 가치의 붕괴로 인한 가치부재 상황, 혹은 전통적인 가치와 새로운 가치 사이의 대립과 긴장 상황에서, 그리고 때로는 도덕규범의 부재로 무질서와 무규범의 상황이 전개될 때에 종말사상이 싹트게 된다.

마지막으로, 종말사상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사회의 여러 영역에서 문제가 생겨나는데 비해 기성종교가 만족할만한 해답을 제시하지 못하거나 대안을 마련해 주지 못할 때 생겨나는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하면, 사회상황에 대한 불만이나 불안에 대하여 이것을 극복하거나 수용할 수 있는 정신적, 영적 능력을 기성종교가 상실할 때에 종말사상이 그 대안으로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천년왕국 신앙은 종말론의 특수한 형태이다. 다라서 천년왕국운동이 생겨나는 배경은 앞에서 논의한 일반적인 종말사상의 출현배경 이외에도 특수한 상황적 요인이 중요하게 작용한다고 하겠다. 천년왕국운동은 주로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이들에 의해 생겨나는가? 그것은 낮은 사회계층, 억압받고 박해받는 소수인들에게 주로 받아드려진다. 즉 천년왕국 신앙은 박탈당한 집단의 신앙인 것이다. 그들에게서 우리는 박탈감, 곧 가난, 낮은 지위, 무력감의 혼합된 영향을 발견한다. 여러 측면에서 바닥에 있기 때문에 그들은 선택받은 자의 특권, 역할의 역전(reversal)에 대한 환상("첫째는 마지막이 되고 마지막은 첫째가 될 것" 이라는 등의 기대)에 매력을 느낀다. 삶의 조건들의 축적된 비참에 대한 반응으로 천년왕국운동이 생겨난다. 그것은 또한 재난의 배경에서도 흔히 생겨난다. 역병, 커다란 화재, 반복되는 긴 한재, 광범한 실업과 가난에서 생겨나는 경제적 위기, 재난적인 전쟁 등이 그 예가 될 것이다.

천년왕국운동은 현실에 비추어 희망 없는 미래의 전망을 가질 때 생겨난다. 그것은 특히 기대와 만족수단 사이의 현저한 불균형적 관계에서 생겨난다. 이 때에는 좌절이 실제적 재난보다 훨씬 더 중요할 수 있다. 많은 경우 천년왕국운동은 조건의 악화보다는 새로운 희망과 기대에 비해서 성취되지 못하게 만드는 현실적 제한 때문에 생긴다. 여기서는 소위 상대적 박탈감(relative deprivation)이 중요하다. 이것은 왜 때로는 경제적으로 안정된 사람들 가운데 그러한 신앙을 받아드리는 사람이 생겨나는가에 대한 설명이 된다.

천년왕국운동은 전통적인 집단 연대(group solidarity)가 파괴되면서 사회적 고립이 야기될 때 생겨날 가능성이 많다. 그것은 잘 통합된 친족집단을 가지고 있고, 응집력이 있는 지역 공동체 안에서 효과적으로 조직화되고 보호되는 사람들에게는 별로 매력을 주지 못한다. 천년왕국 신앙에 빠져드는 사람들은 주로 응집적인 원초집단 안에서 확고하고 인정받는 자리를 갖지 못한 비통합적이고 고립된 사람들이다.

따라서 천년왕국운동은 전환의 시기에서 주로 생겨나게 된다. 그것은 근대화에 접하지 못한 지역에서는 별로 생겨나지 않는다. 그리고 근대화가 충분히 이루어져 진보단계에 도달한 지역에서는 드물게만 나타난다. 그러한 신앙은 전근대와 근대의 생활방식의 전환기에 성행하는 경향이 있는데, 특히 정치적으로 수동적이고 정치조직의 경험이 없고 정치적 힘에 도달할 수 없는 계층들에게 그것은 매력을 준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급격한 사회변동으로 인한 가치관의 혼란이다. 새로운 가치의 출현은 전통적 가치를 붕괴시킨다. 다양한 가치체계의 만남은 문화적 해체와 방향상실을 초래한다. 토착적 영향과 외부적 영향 사이에 부조화가 생겨날 수도 있다. 이러한 가치혼란과 갈등은 사람들에게 불안의식을 심어주고 목적의식을 상실하게 만든다. 이러한 상황에서 천년왕국운동은 문제해결의 한 대안으로 받아드려지기 쉬운 것이다.

전통적으로 종교는 사람들, 특히 박탈당하고 좌절감을 느끼는 사람들, 고립감과 무력감을 느끼는 사람들, 불안과 공포에 휩싸여 있는 사람들에게 위로나 도움을 주어 왔고, 때로는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어 주기도 했다. 어떤 경우에는 그들을 위하여 사회운동을 전개하기도 하고 구제나 봉사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종교가 항상 약한 자들의 편에서 그들에게 힘과 도움이 되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많은 경우 종교는 안정된 사람들, 혹은 기득권자의 편에 서 왔었다. 이러한 상황이 심각한 정도에 이르게 되면 민중계층은 신앙을 버리던가 새로운 신앙을 추구하게 된다.

그렇다면 천년왕국운동이 생겨날 수 있는 또 하나의 조건은 기성종교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들을 수용하지 못하거나 그들에게 만족할만한 해답을 제시하지 못한 경우라고 하겠다. 사회적으로 소외당하고 있는 계층이 종교로부터도 소외당할 때 그들은 반사회적(세상의 파멸과 비극적 종말을 기대하는), 반기성종교적(기성종교에는 구원이 없다고 보는) 신앙을 갖기 쉬우며, 이에 따라 천년왕국 신앙으로 눈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왜 천년왕국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대개 종교를 처음 갖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종교를 가졌던 사람인지에 대한 설명이 된다.

결국 천년왕국운동은 정치적 불안감, 경제적 좌절감, 사회적 고립감, 문화적 허무감이 사회에 팽배해 있을 때, 무력감을 느끼면서 현실에 대한 패배주의와 숙명주의에 빠져있는 사람들에게 임박한 미래의 보상에 대한 기대감을 충족시켜 주면서 확산되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천년왕국운동은 문제적인 사회상황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그 문제를 극복하거나 수용할 능력이 부족한 현실이 맞물려서 생겨난다고 하는 사실이다.

사실상 일제시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한국의 신비주의 계열의 종파운동들은 대부분 천년왕국 신앙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으며, 한국전쟁 직후 급속히 증가된 기독교계 신흥종교들은 거의 모두 천년왕국운동으로서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시한부 종말론이다.

4. 시한부 종말론의 성격

천년왕국운동의 극단적 형태가 시한부 종말론이다. 시한부 종말론은 특정 시점에서 종말이 임할 것이라고 예고하는 종말론이다. 그것은 천년왕국 신앙을 토대로 하고 있지만 그 왕국이 시작되는 시점을 예언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휴거설을 주장하기도 한다. 시한부 종말론의 출현 배경은 일반적인 종말론이나 천년왕국운동이 생겨나는 배경과 비슷하지만, 그 어느 경우보다 '위기의식'과 '선민의식'을 불어넣어 준다는 점이 특이하다.

앞에서 논의되었던 것처럼 종말론으로서의 천년왕국운동이 주로 기독교적 현상이라면 시한부 종말론 역시 기독교적 신앙이라 할 수 있다. 일찍이 한국에는 1920-30년대 신비주의와 관련된 종말론을 설파했던 유명화와 황국주, 6.25 전쟁 후에 종말사상을 배경으로 등장한 문선명의 통일교와 박태선의 전도관(천부교) 등이 있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시한부 종말론이 확산된 것은 1980년대 이후이다. 특히 '1992년 종말론'을 내세운 신흥 종파집단은 1992년 당시 50여 개에 이르렀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물론 다미선교회이지만, 그 외에도 디베랴선교교회, 갈릴리선교회, 성화교회, 샬롬복음선교회, 지구촌선교회, 마라나다선교회, 다니엘선교교회, 셀라단선교회, 예수휴거선교회, 서머나교회 등이 있었다. 당시 '1992년 시한부 종말론'을 적극적으로 신봉한 신자는 약 2만 명, 그 영향권 내에 있는 개신교 신자 수는 약 1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되었다.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시한부 종말론 신앙집단인 다미선교회는 1992년 10월 28일 종말이 시작된다고 설파했다. 원래 한국사회에서 '1992년 종말론'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986년 콜레(Percy Collet) 목사의 저서「내가 본 천국」이 번역 출판되면서부터였다. 이에 자극 받은 이장림 목사는 직접「다가올 미래를 대비하라」,「하늘 문이 열린다」,「경고의 나팔」,「1992년의 열풍」등 '다미 시리즈'를 계속 출판했고, 이 책들은 시한부 종말론의 바람을 일으키게 되었다. 다른 시한부 종말론자들도 대체로 다미선교회의 주장을 따르고 있다.

1992년 종말론자들이 주장하였던 세상의 종말이란 이 세상이 일정한 시점에서 갑자기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몇 단계를 거쳐 이루어지는 하나의 과정이다. 이들이 설명하는 세상 종말의 과정은 1) 그리스도의 공중재림, 2) 성도들의 휴거, 3) 7년간의 대환란, 4) 그리스도의 지상재림, 5) 천년왕국, 6) 백보좌 심판, 7)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 등 일곱 단계로 진행된다. 그러나 이들은 주로 세상 종말의 첫 단계인 그리스도의 공중 재림으로부터 다섯 번째 단계인 천년왕국의 도래에 이르기까지 전개될 사건에 주목하고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게 되면 성도들이 공중으로 들어올림을 받는 휴거 사건이 발생된다고 본다. 이어 7년간의 대환란 기간 중에 소위 '적그리스도'가 나타나서 세상을 통치하게 되지만, 7년 후인 1999년에는 그리스도가 지상으로 재림하여 천년 동안 왕국을 통치할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 기간에 사탄의 무리에 대하여 그리스도는 흰 보좌에서 심판을 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영원한 세계가 전개될 것이라고 본다.

그러면 1992년을 예수의 공중재림 및 휴거의 시간으로 잡은 것은 어떤 근거에서인가? 몇 가지로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으나 대표적인 것은 창세기 1장에 언급된 하나님의 세상 창조 기간이 인류의 역사기간을 상징하는 것이라는 해석이다. 이들은 하나님이 엿새동안 세상을 창조하고 일곱째 날 안식을 취하였다는 것은 이 세상이 하나님의 시간으로 엿새 동안 지속되고 그 후에는 안식의 하루가 있게 될 것을 예시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이들은 "주께서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벧후 3:8)는 성경 구절에 비추어 하나님의 6일은 인간의 6000년이며, 그 후에는 안식의 하루인 '천년왕국'이 있게 될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천년왕국이 이루어질 시기는 아담이 창조된 때부터 6000년이 되는 서기 2000년이기 때문에 1999년까지 인류역사는 종결될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세상 종말 직전 7년간의 대환란이 있게 되므로 세상 종말의 시작은 1992년이라는 것이다.

다미선교회에서 10월 28일을 종말의 날로 보는 이유도 몇 가지로 설명하고 있으나 대표적인 것은 이스라엘 절기에 대한 해석이다. 그들은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17절의 내용에 따라 예수의 공중 재림과 성도들의 휴거는 이스라엘 7대 절기 중의 하나인 나팔절에 있게 될 것이라고 이해했다. 그 나팔절이 양력으로는 9월 28일이지만, 성결된 제사장이 부족하고 유대 백성들이 정한 기한 내에 예루살렘에 모이지 못하여 하나님께서 한 달을 늦춰서 유월절 제사를 드리게 하였다는 사실 등을 들어 하나님께서는 세상 종말의 시작을 한 달 늦은 1992년 10월 28일로 예정하셨다고 주장했다.

1992년 10월의 종말을 믿었던 다미선교회 등의 시한부 종말론은 대부분의 천년왕국 신앙과 어떤 점에서 다른가? 이에 대하여 김성건은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대부분의 천년왕국신앙은 '완전한 시간'을 '완전한 공간'과 결합하는 데, 시한부 종말론은 특정 지역을 구원이 이루어지는 공간으로 강조하지 않고 '92년 10월'이라는 재림의 시간만을 특별히 강조한다. 일반적으로 천년왕국 실현 과정은 두 단계 곧, "파멸 뒤에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주장하여 파멸과 구원을 균형 있게 결합하고 있으나, 시한부 종말론은 구원의 소망과 사랑보다는 상대적으로 파멸 시기와 고난과 최후 심판의 공포를 주로 강조하고 있다. 예수가 재림하여 지배한다고 하는 천년왕국의 도래에 대하여 시한부 종말론은 구원의 '긴박성'과 '절박함'에 대해 매우 강한 생각을 갖고 있다. 다수의 천년왕국운동과는 달리 시한부 종말론은 사회참여적이 아니라 도피적이고 수동적이다.

그런데 사회적 불안감을 조장하는 시한부 종말론이 최근 들어 다시 퍼져나가고 있다. 지난 1992년 10월 휴거를 주장하던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그동안 잠복해 있다가 다시 대열을 정비하고 IMF 한파와 같은 경제적 위기와 국내외적인 많은 사건들, 그리고 새로운 천년 시대와 21세기를 앞두고 생겨나는 세기말적 불안과 같은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시한부 종말론을 다시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문화관광부 자료에 따르면 현재 국내의 시한부 종말론 추종자는 모두 15만 명에 이르고 있으며 종말론을 신봉하는 신흥종교 집단은 2백여 개나 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시한부 종말론이 다시 활동하기 시작한 때는 지난 95년경부터다. 과거 92년 이장림 목사의 다미선교회에서 부목사, 전도사 등을 지냈던 몇 몇 교역자들이 독자적인 활동에 들어가기도 했고, 얼마의 종말론 단체의 열성 광신자들이 그러한 종말론을 다시 퍼뜨리기도 했다. 그리고 과거의 시한부 종말론 주창자들이 자신들의 조직을 다시 활성화시키기도 했다. 최근의 대표적인 시한부 종말론 집단은 이장림의 다미선교회, 권미나의 성화선교교회, 하방익의 디베라선교교회, 전양금의 다니엘선교교회, 이재구의 시온교회, 오덕임의 대방주교회, 유복종의 혜성교회, 이재록의 만민중앙교회, 공명길의 성령쇄신봉사회, 이현석의 한국기독교승리제단, 이천성의 한국중앙교회, 공용복의 종말복음연구회 등이다.

그러나 최근의 시한부 종말론자들은 1992년의 경우와는 다소 다른 면이 있다. 우선 이들은 92년처럼 구체적인 날짜를 지정하지 않고 종말이 "몇 년 후에 온다"든가 "가까왔다"든가 "금세기가 끝나기 전에 온다"는 식으로 다소 막연하게 그 시점을 말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그들은 92년처럼 크게 홍보를 하며 사회적으로 떠들석하게 시한부 종말론을 내세우기보다는 은밀하게, 혹은 점조직 형태로 그 세력을 확산시켜 나가려고 한다. 이미 92년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했던 이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여러 가지 이유로 연기되었을 뿐이라고 변명한다. 그것은 더 많은 사람을 구원받게 하려고, 혹은 아직 그리스도를 맞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그 이유를 둘러대고 있다. 그러나 정확한 일시는 예측할 수 없어도 이번에는 분명히 세상의 마지막이 도래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시점은 대개 1999년이 끝나거나 2천년대가 시작되는 그 무렵일 것이라고 말한다. 때로는 종말이 21세기 초 어느 시점이라고 다소 길게 그 시기를 잡기도 한다.

5. 시한부 종말론의 배경

시한부 종말론은 천년왕국 신앙의 극단적인 형태이지만, 어쨌든 특히 1980년대 이후 한국 사회에서 심각한 사회적, 종교적 문제로 크게 부각되고 있다. 왜 시한부 종말론은 한국 사회에서, 그리고 요즈음 그렇게 유행하고 있는가? 여기에는 몇 가지 배경적 요소가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하겠다.

첫째로,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이 시한부 종말론 부류의 신앙을 쉽게 받아드리게 했다고 할 수 있다. 종교문화적 측면에서 볼 때 한국인은 주술적, 비합리적, 열성적 종교성을 가지고 있다. 즉 한국인의 신앙 경향은 신비적이면서도 열광적이고, 초자연적이고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것이다. 여기서는 현실참여와 변혁의지 보다는 수동적인 태도가 중요시된다. 이러한 감성적이고 신비적이고 열정적인 종교성은 시한부 종말론과 같은 자극적이고 의존적인 신앙을 만들어 내기에 적합한 신앙경향이다. 이성적, 지성적, 합리적 신앙이 발달된 사회에서는 극단적인 종말론 사상은 잘 생겨나지 않는다. 한국인의 주술적이고 감성적인, 의존적이고 열광적인 종교적 심성이 결국은 시한부 종말론의 유행을 가능하게 했던 하나의 근원이라고 하겠다.

사실상 한국의 대부분의 신흥종교들은 전통적으로 후천개벽사상과 지상천국신앙과 같은 말세론이 이념적, 실천적 토대로 중요하게 작용했다. 그리하여 많은 민족종교들은 지금까지의 시대를 선천시대라고 부르고, 앞으로 도래할 시대를 후천시대라고 부른다. 각종 모순과 부조리로 가득찬 선천시대가 끝나고 말세가 되어 후천시대에 들어서면 선천시대에서 억눌린 자들이 인간다운 대접을 받게 되고, 참다운 인간의 자유와 평등이 보장되며, 물질적인 풍요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리하여 비록 그 용어가 다르기는 하지만 여러 민족신흥종교들은 지상천국신앙에 대하여 주장하고 있다. 예를 들면 동학, 천국복음전도회, 동방교의 '지상천국', 증산교의 '후천선경'(後天仙境), 정도교의 '계룡낙원'(鷄龍樂園), 미륵불교의 '후천극락세계'(後天極樂世界), 용화교의 '용화선경'(龍華仙境), 전도관의 '천년성'(千年城), 세계일주평화국의 '통일평화세계', 산성기도원의 '천년세계', 갱정유도의 '춘일원선경'(春日園仙境), 통일교의 '공생공영공의주의사회'(共生共榮共議主義社會) 등이 그것이다. 물론 신흥종교에서 주장하는 말세의 시기는 저마다 달라서 이미 말세가 시작되었다고 하기도 하고, 지금이 말세라고 하기도 하며, 말세가 임박해 있다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부 신흥종교들은 말세의 구체적인 시간을 예언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이러한 시한부 말세의 시간에 대하여 용화교는 1964년 10월 1일, 동방교는 1965년 8월 15일, 장막성전은 1969년 11월 1일, 일월산기도원은 1971년 8월 15일, 팔영산 기도원은 1972년 6월 25일, 천국복음전도회는 1973년 11월 10일, 중앙예루살렘교회는 1975년 8월, 하나님의 교회 안산홍증인회는 1988년을, 영생교 하나님의 성회 승리제단은 1990년을 세상종말의 시기로 예언한 바 있다. 그리고 다미선교회를 위시한 많은 신흥종교 혹은 교회들이 1992년을 그 시점으로 잡았다.

둘째로, 요즈음 시한부 종말론은 주로 기독교 계통의 교회들에서 생겨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신앙이 생겨난 배경은 신학적인 측면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시한부 종말론은 철저하게 근본주의, 섭리주의 신학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근본주의(fundamentalism)란 원래 자유주의적 신학이나 신앙 성향에 대하여 공격적인 태도를 갖는 종교적 보수주의 경향을 말하는 것으로 모든 종교에 해당되는 것이지만 그것은 개신교에서 가장 현저하게 나타났다. 개신교 근본주의는 19세기부터 현대주의(현대적 상황과 자유주의적 이념)에 대한 반작용으로 미국을 중심으로 생겨난 이념적, 실천적 신앙 성향이다.

근본주의자는 그 어느 신앙집단보다도 성경의 영감설과 무오설을 강조하고, 천년왕국설을 신봉한다는 점에서 다른 보수 신앙집단과 구분된다. 근본주의자는 다음의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우선 그들은 철저한 성경주의자이다. 성경은 문자 그대로 불멸의 진리라고 믿으며, 이에 따라 성경 내용도 쓰여진 내용을 해석이나 가감 없이 그대로 믿는다. 인간의 모든 운명은 하나님의 절대적 섭리에 의한 것이라고 믿는다. 근본주의자는 또한 천년왕국 신앙에 기초해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마지막 때에는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악에 대한 최후 승리가 있을 것이기 때문에 우주적 일정의 마지막 단계로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며, 일부는 그것이 휴거의 과정을 거쳐 올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들에게는 중생의 경험이 중요하며, 세상가운데 있는 이들에 대한 전도가 강조되고 있다. 근본주의자는 구원의 확증이 강한 만큼 배타성도 강하다. 여기서는 지도자의 권위와 카리스마가 매우 큰 힘을 가지고 있다.

근본주의의 한 형태는 섭리주의(dispensationalism)이다. 이것은 세계의 모든 사건과 인간의 운명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보는 신앙이다. 19세기 영국에서 시작된 섭리주의는 성경무오설을 가르치지만 특히 하나님은 일곱 시대를 정했는데, 지금은 여섯 번째 시대(은총이 구원이 되는 교회시대)라고 가르친다. 매 시대는 재난으로 끝났는데 이제 마지막 시대에는 타락한 모든 교파가 파멸될 것이고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참된 기독교인은 구원받을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섭리주의는 시한부 종말신앙의 강력한 이념적 토대가 되고 있다.

문제는 한국교회가 근본주의 성향이 매우 강하다는 점이다. 그 이유로는 종교문화적으로 한국에는 미륵사상, 동학운동, 정감록 등에서 나타나는 메시야적 전통이 있었고, 영적 무아경을 중요시하는 샤머니즘 전통이 있었으며, 초기 미국 선교사들은 대부분 근본주의자였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한국 교인들은 쉽게 근본주의, 섭리주의 신앙을 받아들일 수 있었고, 그리하여 시한부 종말론을 용이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셋째로, 시한부 종말론의 확산에 작용한 또 다른 중요한 근원은 급격하게 변하고 있는 한국의 사회 상황이다. 국내적으로는 오랜 억압과 독재를 경험해 왔고 이에 따라 불안과 위기감이 심화되어 왔다. 유신체제, 10.26 사태, 광주 민주화 운동, 1987년 6월 항쟁, 김일성 사망, 5공 비리, 사정과 개혁 등의 정치적 사건들이 있었다. 국제적으로는 천안문 학살 사건, 동서독 통일, 동구권 몰락, EC통합(시한부 종말론자는 이것마저 적그리스도의 증거라고 한다), 걸프전, 보스니아 내전이나 동티모르 내전과 같은 세계 곳곳에서의 민족분규와 종교갈등으로 불안과 위기 의식이 고조되어 왔다.

사회적으로는 비행기 추락사고, 건물과 다리의 붕괴, 대형화재와 폭발사고 등의 대형사고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친부살해나 지존파, 막가파의 연쇄 살인과 같은 끔찍하고 흉악한 범죄들이 계속 생겨나고 있다. 이러한 사고와 사건은 전세계적으로 쉴 새 없이 매일 벌어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대형 사고나 사건들이 통해 말세의 징조라고 믿고 있다. 나아가서 급격한 도시화와 산업화는 공동체성의 붕괴와 정체성의 상실을 초래하기도 했다.

경제적으로는 지난 몇 십 년간 경제성장을 이루어내기는 했으나 분배정의가 이루어지지 않아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어 상대적 박탈감이 생겨났고, 계층간의 갈등과 위화감이 조성되었다. 노사분규도 심해졌는데, 시한부 종말론자는 이것도 말세현상이라고 본다. 물질주의 가치관의 만연은 물질에 대한 욕구를 증대시키지만, 동시에 그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좌절감을 경험하게 만들었다. 더욱이 IMF 구제금융 시대를 맞아 경제적 불안과 미래에 대한 불신이 심화되었다.

나아가서 되풀이되고 있는 이상 기온과 자연적 재난도 문제로 인식되고 있다. 특히 세계적으로 엄청난 피해를 가져오고 있는 지진, 가뭄, 태풍, 홍수와 같은 재난, 환경오염과 환경파괴 때문에 발생하는 수많은 환경문제들 역시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또한 UFO에 대하여 믿는 사람도 늘고 있다. 항성과 지구의 충돌 가능성 때문에 불안해하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모든 일반적인, 그리고 구체적인 사건이나 상황들은 한국의 시한부 종말론자들의 말세의 징조로 설명하고 있는 사건이나 상황들이다.

시한부 종말론이 유지되는 데는 몇 가지 메카니즘이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시한부 종말론자의 신앙은 일종의 광신적 신앙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상반된, 그러나 서로 관계되어 있는 의식이 작용하고 있다. 하나는 패배주의, 다른 하나는 우월주의이다. 패배주의는 현실에 있어서의 심한 좌절감과 무력감에서 생겨나는 것인데, 이것은 곧 외부 세계에 대한 거부감이나 적대감의 태도를 만들어 낸다. 한편 우월주의는 세상적 기준이 아니라 신앙적 기준에 따라 패배주의적 현실이 역전되어 우월한 지위를 갖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나타낸다.

시한부 종말집단과 같은 광신적 신흥종교에서는 반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하고 때로는 집단최면을 걸기도 하는 지도자의 카리스마적인 능력이 중요한 작용을 한다. 그는 때로 초능력(대체로 위장된)을 행사하기도 하고 앞일을 예언하며 강한 신념을 불어넣어 준다. 그렇게 하여 불안과 불만에 젖어있는 사람들에게 패배주의 의식을 고취시키면서 무력감과 분노를 일으키고, 다음에는 우월주의 의식을 고양시켜 교주 및 집단에 대한 충성심과 집단 연대감을 강화시킨다.

광신적 신흥종교 집단은 집단충성과 결속을 매우 중요시한다. 따라서 이것을 위한 수단으로 결단과 헌신과 같은 희생을 요구하고, 돈과 시간과 노력을 가능한 한 많이 투자하도록 하며, 사적소유를 포기하고 기존관계를 단절하도록 강요하고, 자기들끼리는 소유를 공유하거나 집단의례를 통해 교제를 강화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위협이나 폭행 등의 제재를 가하기도 한다. 특히 집단적으로 거주하거나 자주 모이게 하며 의식화시키고 세뇌시킴으로 집단에 대한 충성심과 연대감을 갖게 만든다. 때로는 배교자에 대하여 가혹한 보복이 가해지기도 한다. 이러한 메카니즘은 시한부 종말론 집단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하겠다. 기대했던 종말이 오지 않으면 스스로 그 종말을 재촉하여 집단자살을 하는 극단적인 경우도 있다. 1978년 11월 18일 짐 존스를 추종하던 종교집단「인민사원」(Peoples Temple) 신도 923명이 남미 가이아나에서 집단 자살한 사건, 1987년 8월 29일 우리 나라의 오대양 신도 32명의 집단자살 사건, 1997년 3월 26일 미국에서 벌어진「천국의 문」(Heaven's Gate) 신도 39명의 집단자살 사건 등이 그 예가 될 것이다.

6. 평가와 전망 : 시한부 종말론의 경우

시한부 종말론이 어떤 기능적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시한부 종말론의 "첫째는 마지막이 되고 마지막은 첫째가 되리라"는 약속은 열등감을 우월감으로 바꾸며 자신감을 부여한다. 그리하여 신자들에게는 보호수단과 도움을 제공하며 확신과 희망을 부여한다. 그리고 집단 내에서는 강한 일체감을 마련해 줌으로 소속감과 목적의식을 갖게 해 준다. 종교적으로는 기성교회가 사회의 소외계층에 대하여 무관심하고 방관해 온 태도에 대한 반성의 계기를 마련해 줄 수 있다. 또한 사회적으로 문제적인 상황이 사람들의 삶을 왜곡되게 만들 수 있다는 현실비판적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그러나 시한부 종말론은 종교적, 사회적으로 심각한 역기능을 수행한다. 우선 반사회적 의식을 심어줌으로 그 추종자들이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지 못하게 만든다. 즉 현실세계를 거부하고 도피하게 함으로 사회의 직장, 가정, 학교생활에 제대로 참여하지 못하게 만든다. 때로는 가정을 파괴하고 직장이나 학교를 이탈하게 만들며, 사회규범이나 법을 무시하게 만든다.

경우에 따라서는 시한부 종말론을 주창한 사람이 카리스마적인 교주로 군림하여 추종자들을 세뇌시키거나 금전적인 갈취를 하는 수도 있다. 특히 모든 재산을 헌납 형식으로 거두어 들여 착복하는 경우도 있다. 때로는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끼리 격리된 게토생활을 하며 광신적인 행위를 할 수도 있다. 이 때 그들은 기존 사회질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면서 사회갈등을 유발시킬 가능성이 많다.

시한부 종말론은 종교적으로도 기성교회의 질서를 거부하고 파괴하는 작용을 할 수도 있다.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참된 기독교 진리를 왜곡시키는 경우가 많다. 뿐만 아니라 강한 선민의식을 심어줌으로 그 추종자들로 하여금 기성교회에 대하여 배타적인 태도를 갖게 만든다. 그리고 구원, 용서, 사랑, 삶보다는 심판, 저주, 멸망, 죽음과 같은 용어를 강조함으로 제임스(W. James)의 표현대로 '병든 영혼'의 사람들을 만들어 내게 된다.

이와 같은 시한부 종말론은 왜곡된 현실인식과 왜곡된 성경이해에 근거한 뒤틀린 종말론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시한부 종말론의 미래는 어떻게 전망될 수 있을까? 때가 되면, 예컨대 종말이 약속된 날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 경우 시한부 종말론은 자연히 소멸될 수도 있고, 새로운 약속을 제시하는 식으로 그 내용이나 예측이 변경될 수도 있다. 그러나 시한부 종말론은 상황에 의해 생겨난 것이기에 상황이 변하지 않는 한 그러한 신앙은 되풀이해서 생겨날 것이다. 그러므로 시한부 종말론에 대한 전망은 전적으로 사회적, 교회적 상황에 달려 있다고 하겠다. 민주화를 토대로 하는 정치적 안정, 분배 정의에 입각한 경제적 평등, 복지화를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질서, 건전한 가치와 규범이 정착되는 성숙된 문화, 그리고 도덕적, 정신적 가치를 창출하며 소외계층을 끌어안을 수 있는 종교적 갱신이 가능할 수 있다면 시한부 종말론과 같은 신앙은 한국 사회에 뿌리를 내리지 못할 것이다.

7. 맺는 말

종말신앙은 모든 종교, 특히 직선적인 역사관, 시간관을 가지고 있는 기독교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독특한 신앙 형태이다. 그 가운데 천년왕국운동은 사회상황의 파생물이며 동시에 사회변형의 역동성을 가지고 있는 신앙적 실천운동이기도 하다. 그러나 천년왕국 신앙의 극단적 형태로서의 시한부 종말론의 경우 반사회적, 반교회적 성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어 문제라고 하겠다.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불안을 조성하며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왜곡된 신앙인 시한부 종말론은 문제적인 사회적, 교회적 상황에서 생겨난다. 특히 현실세계에 대한 희망 없음과 이를 개선할 능력 없음에 대한 극단적인 종교적 반응이 곧 시한부 종말론인 것이다. 종교진리를 왜곡하고 여러 가지 사회문제를 야기하는 것이 시한부 종말론이라면 이것은 극복되어야 할 신앙구조이다. 물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영역에서의 개선과 발전이 요구되고 있으나, 한편 기성교회는 사회적으로 소외당하고 경제적으로 박탈당하고 있는, 그래서 좌절감과 무력감을 느끼고 있는 이들에 대하여 희망과 용기를 주고 사랑을 베풀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시한부 종말론과 같은 왜곡된 신앙을 바로잡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한편으로는 상식이 통하고 믿을 수 있으며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껴질 수 있는 사회질서의 확립과 다른 한편으로는 돌봄과 나눔을 통한 종교신앙의 실천이라 하겠다.

 


천년왕국 운동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 시한부 종말론을 중심으로"에 대한 논평

송봉모(서강대 교수)   


 

천년왕국 사상은 그리스도교 신학논쟁에 있어서 유일하게 정립되지 못한 종말론 사상이다. 2000년 역사의 그리스도교 교회 안에서 논의된 중요한 신학 논쟁은 구원론, 그리스도론, 그리고 종말론이었다. 구원론 문제는 49년 경 예루살렘 공의회를 통해서 정립되었다. 공의회는 인간이 유대교의 율법을 준수하므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신앙하므로서 구원받는 것임을 만방에 천명하였다. 그리스도론은 325년 니케아 공의회를 통하여 정립되었다. 공의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반신(半神) 반인간(半人間)인 튀기나, 아니면 인간이었다가 나중에 신의 아들로 입양된 존재가 아니라, 100%의 인성과 신성을 온전히 누리신 분이심을 믿을 교리로서 만방에 선언하였다. 한편 세상 종말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질 것인가를 다루는 종말론 문제, 특히 세상 종말 전에 천년 간의 지상통치가 이루어질 것인가를 다루는 천년왕국 논쟁은 아직 정립되지 않고 있다. 천년왕국의 성서적 근거가 되는 묵시록 20장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세상 종말 전 천년 동안 그리스도의 가시적 지상통치가 있을 것이라 주장하는 종파가 있는가하면, 반대로 묵시록 20장을 상징적으로 해석하여 천년왕국은 그리스도 초림에서 재림에 이르기까지 교회시대에 이루어짐을 주장하는 종파가 있다. 한편 천년왕국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의 공중재림과 휴거를 강조하는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있다. 이들에 따르면, 그리스도께서 천년간 지상통치를 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재림하시기 직전에 7년 동안 대 환란이 있을 것이다. 이 때의 환란은 문자 그대로 대환란이 될 것이다. 예수는 이 대환란에서 당신의 충실한 성도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7년 대환란 직전에 공중재림하시어 선택된 성도들을 하늘로 들어 올릴 것이다. 이른바 휴거 사건이다. 그리고나서 7년간 적그리스도가 이 세상을 통치할 것이요, 그 7년이 끝나면 그리스도께서 지상재림하여 적그리스도를 물리치고 천년왕국을 건설할 것이다.

이렇게 종말론이 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리고 새로운 천년기 2000년이 두 달도 남지 않은 상태에서 천년왕국을 둘러싼 종말론 논쟁은 다시금 세간의 관심을 끌고 있다. 특별히 그리스도의 공중재림과 휴거를 강조하는 시한부 종말론자들의 움직임은 1999년 새해 벽두부터 세상을 떠들석하게 만들고 있다. 올해가 시작된지 며칠 지나지도 않아서 이스라엘에서는 일단의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소란을 피우다 추방되었고, 한국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어서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에 대한 억측들이 여기저기 신문지상을 채웠으며, PC 통신에서는 네티즌들을 위하여 종말론에 대한 여러가지 서비스들을 제공하고 있다.

이렇게 종말에 대한 혼란이 야기되는 천년기 마지막 해에 이원규 교수가 시한부 종말론을 중점으로 천년왕국운동에 대한 훌륭한 논문을 발표해 주신 것은 아주 시기적절한 조치라 보겠다. 이 교수의 연구 논문은, 시한부 종말론을 어떤 한 종파적 시각에 의존해서 편파적으로 분석한 것이 아니라, 사회학적 방법론을 동원해서 객관적으로 분석한 것이기에 더더욱 현실적인 도움을 주고 있다.

그에 따르면, 천년왕국운동은 주로 전환의 시기에 생겨난다. 급격한 정치적 사회적 변동으로 인한 전통적 가치관의 붕괴와 혼란 시기에 문제해결의 대안으로서 천년왕국운동이 자리를 잡는다는 것이다. 또 천년왕국운동은 사회적으로 소외당하는 계층이 기성종교로부터도 소외당하면서 임박한 미래 보상에 대한 기대감을 천년왕국운동에서 찾는다는 것이다. 특별히 대환란과 휴거에 초점을 맞추면서 위기의식과 선민의식을 강조하는 시한부 종말론자들은 세상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재난을 말세 현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이원규 교수는 2000년을 두 달 넘짓 남겨놓은 올 해 또는 내년에 종말이 오지 않을 경우 시한부 종말론자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지 다음같이 진단하고 있다. "종말이 약속된 날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 경우 시한부 종말론은 자연히 소멸 될 수도 있고, 새로운 약속을 제시하는 식으로 그 내용이나 예측이 변경될 수도 있다. 그러나 시한부 종말론은 상황에 의해 생겨난 것이기에 상황이 변하지 않는 한 그러한 신앙은 되풀이해서 새역날 것이다.? 여기서 이교수가 언급하는 상황이란, 정치적 안정, 경제적 평등, 사회적 질서, 건전한 가치와 규범이 정착되는 성숙된 문화, 그리고 소외된 계층을 안아주는 종교적 갱신 등이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을 가리킨다. 상황이 개선되지 않는 한 시한부 종말론자들은 다시금 활동할 것이란 이원규 교수의 결론적 제언은 이 자리에 참석한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내적 성찰의 자료일 것이다.

끝으로 논평을 마치면서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전하는 종말론의 부정적 측면과 묵시록 저자가 본시 전하고저 했던 종말론의 적극적인 측면을 대비한다. 시한부 종말론자들은 종말이 갖고 올 진노의 심판을 강조함으로써 두려움과 공포감을 조장시키고 반사회적 도피적 삶을 살아가게 만든다. 그들은 회개하고 구원받아야 한다고 얘기하지만, 실제로 역점을 두어 말하는 것은, 악이 이 세상을 점거하고 모든 것은 다 파멸로 끝날 것이기에 꼭 휴거에 참여해야 된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파멸의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고, 가정도 버리고, 오로지 휴거받고 구원받게 해달라고 외치게 만든다. 이른바 종말론이 아니라 재앙론이다. 한편 묵시록 저자의 종말 예고는 구원의 기쁨과 미래에 대한 희망에서 신앙을 갖도록 요구한다. 머지않아 해방과 구원의 시간이 가까이 왔으니 성도들은 믿음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고 죄인들은 어서 회개하라는 복음적 초대를 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하느님 나라가 예수 초림에 의해서 시작되었지만 아직도 세상은 타락한 세상으로서 우리의 죄스런 경향을 흔들고 우리 삶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다. 하지만, 하느님 나라가 언젠가 오게되면 상급이 주어질 것이므로 신앙인들은 불굴의 희망과 용기를 갖고서 살라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교가 전하는 올바른 종말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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