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대로 덕망이 높은 가문은 중간에 반드시 쌓기는 두텁게 하고 쓰기는 적게 하여 후손들의 복록을 넉넉하게 하는 사람이 반드시 있기 마련이다. 이것은 좌계(左契)를 가지고 있으면 반드시 배상을 받는 것과 같다. 생각건대 관찰사(觀察使) 오공(吳公)은 관대하고 화락하며 부드럽고 온화하였으니, 크게 보상을 받을 만하였다. 하지만 조정에 크게 쓰일 인재라는 평가를 받았으면서도 나이와 지위는 공의 덕(德)에 비해 만족스럽지 못했으니,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한스럽게 여겼다. 비록 그렇지만 공이 운명한 뒤에 자손들이 더욱 번성하여 영화와 존귀함이 한 시대에 우뚝하였으니, 군자들이 또 이것을 통해 천도(天道)를 알 수 있었다. 공의 휘(諱)는 단(端), 자는 여확(汝擴)이다. 선대에 대승(大陞)이 처음 동복(同福)에 살았는데, 돌을 쪼아 48개의 등을 만들고 밤마다 반드시 하늘에 예를 올리니, 오씨 가문이 비로소 드러나게 되었다. 참의(參議) 천경(天經)에 이르러 비로소 배천(白川)에서 노년을 보냈는데, 자손들이 그곳의 반월강(半月岡)에 장사하였으니, 공에게 8대조가 된다. 다시 5대를 지나 직장(直長) 휘 극권(克權)이 증조(曾祖)이다. 이분이 공의 조부(祖父) 직장(直長) 증(贈) 영의정(領議政) 휘 세현(世賢)을 낳았다. 이분이 공의 선고(先考) 이조 참판(吏曹參判) 증(贈) 우의정(右議政) 휘 백령(百齡)을 낳았으니, 제주 고씨(濟州高氏)에게 장가들어 만력(萬曆) 임진년(1592, 선조25)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삼가고 조심했으며 고상하고 엄정하였다. 성장해서는 침착하고 심원하여 국량과 품격이 있었으니, 몸가짐을 순정하게 갖추어 스스로 너그럽고 점잖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였다. 의정공(議政公 오백령(吳百齡))은 이미 독실한 행실로 명성이 있었고, 백씨(伯氏) 참찬공(參贊公 오억령(吳億齡))과 함께 조정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거기다가 공의 형제와 종형(從兄) 셋도 전후로 조정에 출사하여 모두 옥당(玉堂)에 몸담고 있었으나, 복덕(福德)은 모두 공에게 모이고 있었다. 기미년(1619, 광해군11)에 생원시(生員試)와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다. 갑자년(1624, 인조2)에 음직(蔭職)으로 직장(直長)이 되었다. 그해 겨울 인조(仁祖)께서 시학(視學)하셨는데, 공이 병과(丙科)로 합격하고 전적(典籍)에 임명되었다. 제조(諸曹)의 좌랑(佐郞), 병조(兵曹)와 호조(戶曹)의 정랑(正郞)을 거쳐, 시종신(侍從臣)의 반열에 들어가 정언(正言)이 되었다. 지평(持平)에 아홉 번, 사서(司書)에 네 번, 수찬(修撰)과 교리(校理)에 열 번, 장령(掌令)에 세 번 임명되었다. 산질(散秩)과 만국(漫局)의 이력은 생략한다. 기사년(1629, 인조7)에 필선(弼善)을 거쳐 개성 경력(開城經歷)이 되었다. 너그럽고 간략하여 고을을 다스림에 까다롭지 않았으므로 아전과 백성들이 편안하게 여겼다. 1년 만에 훌륭한 정사가 이루어지니, 교리(校理)에 임명하여 조정으로 불러들였다. 공이 개성에서 백성들에게 남긴 사랑과 은혜는 사실대로 돌에 새겨졌다. 예전에 참찬공(參贊公)이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재직하면서 은혜로운 정사를 펼쳤는데, 이때에 이르러 큰 비석이 나란히 서게 되었으니, 길 가는 사람들도 반드시 경의를 표하였다. 신미년(1631)에 계모 양 부인(梁夫人)의 상을 당하였다. 의정공(議政公 오백령(吳百齡))이 이때에 연로하여, 돌보아 주는 사람이 있어야만 편안히 지낼 수 있었다. 그러므로 공이 의정공에게는 혼정신성(昏定晨省)의 봉양을 다하고 계모의 영전에는 궤전(饋奠)을 올려, 양쪽에 마음과 예절을 극진하게 하였다. 겨우 삼년상을 마쳤는데, 의정공이 운명하셨다. 공이 죽만 먹으며 너무 슬퍼한 나머지 몸이 상할 정도였으니, 비통해하는 모습이 사람들을 감동시켰으나, 결국 말질(末疾)의 원인이 되었다. 갑술년(1634, 인조12)에 인평대군(麟坪大君)이 공의 딸에게 장가들어 부인으로 삼았는데, 공은 상제(喪制)를 지키느라 감히 빈주(賓主)의 예를 갖추지 못하였다. 집안사람들을 경계하여 “한미한 집안이 왕가와 혼인하니, 영광스러운 일이 아니라 두려운 일이다.”라고 하고, 검소하게 예법에 따라 혼례를 치렀다. 상기(喪期)를 마치자 말과 비단을 하사받았다. 겸양이 지나쳐서 여러 차례 태복시 정(太僕寺正), 장령(掌令), 교리(校理)에 임명되고, 세자시강원 문학(世子侍講院文學)을 겸임하게 되었으나, 그때마다 물러나서 청요직(淸要職)에 있으려 하지 않았다. 소장을 올려 임금의 몸을 보호하고 군진을 설치하여 적을 방어하는 합리적 방법을 말하였는데, 그에 대한 비답(批答)을 받았다. 병자년(1636, 인조14) 봄에 인열왕후(仁烈王后)의 산릉(山陵)이 완성되었다. 빈전도감(殯殿都監)의 노고를 인정받아 통정대부(通政大夫)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승진하였고, 외직으로 나아가 전주 부윤(全州府尹)이 되었다. 그해 겨울에 임금께서 남한산성으로 병란(兵亂)을 피하셨는데, 오랑캐의 세력은 날로 거세졌다.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가 군대를 거느리고 북상(北上)하면서 공에게 업무를 위임하였다. 남쪽 지방은 예부터 드센 사람들이 많았는데, 변란을 틈타 소동을 일으켜 떼를 지어 다니며 사나움을 일삼으니, 전주부(全州府)가 거의 혼란에 빠져들 지경이었다. 그러나 공이 사태에 따라 어루만지고 달래서 마침내 진정되었다. 어떤 아전이 공의 부탁을 받고 일을 하다가 문득 지시사항을 어기게 되었는데, 이에 말하기를 “늙은 내가 어진 부윤을 저버렸으니, 무슨 낯으로 뵐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는 스스로 목을 매 죽었다. 무인년(1638, 인조16) 여름에, 호서 관찰사(湖西觀察使)에 임명되었는데, 전주부의 백성들이 공을 떠나지 못하도록 잡으려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성안에 비(碑)를 세웠다. 얼마 뒤에 어떤 사람의 견제를 받아 부임하지 못하고, 황해 감사(黃海監司)로 옮겨 임명되었다. 황해도에는 청나라 사신들이 잇따라 오갔으므로 사람과 가축이 빈번히 죽어나갔다. 공이 살아 있는 백성들을 이롭게 하고 죽은 사람들을 걱정하느라 오랜 기간 밤낮으로 근심하고 부지런히 일하다가 오래된 병이 도졌다. 세 번 소장을 올려 사직을 요청하니, 이에 해임되어 조정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거듭 승지(承旨)와 예조 참의(禮曹參議)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휴가를 요청하여 면직되었다. 어느 날 병세가 심해졌는데, 의원을 부르지 못하게 하며 말하기를 “수명의 장단은 운명에 달린 것이다.”라고 하고, 집안 여인들을 나가게 하고서 마침내 운명하였으니, 경진년(1640) 5월의 일이었다. 궁궐에서 의복과 황장목(黃腸木)을 하사하여 염하게 하였다. 고양(高陽)의 만월강(滿月岡)에 안장하였고, 의정부 우의정(議政府右議政)에 증직되었다. 공은 넓은 도량과 원대한 자질을 지녀 백성을 다스리고 구제하는 데에 넉넉히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갈무리하여 내면에 간직한 것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발휘하여 시행한 것은 적었으니, 때를 만났지만 그 길을 다 가지 못하였고,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나 그 능력을 다 쓰지 못하였다. 아아, 먼 길을 가는 사람은 다리 힘을 다 쓰지 않고, 재화를 축적하는 사람은 쌓아 놓은 것을 다 비우지 않는 법이다. 주기도 하고 빼앗기도 하며, 남게도 하고 부족하게도 하며, 가득하면 흘러가게 하고 겸손하면 더해주기도 하나니, 하늘이 사람의 운명을 공교롭게 조절하는 것이 또한 너무 심하도다. 부인 청송 심씨(靑松沈氏)는 이조 판서(吏曹判書) 휘 액(詻)의 딸이다. 5남 4녀를 두었으니, 정일(挺一)은 대사헌(大司憲)이고, 정원(挺垣)은 승지(承旨)이고, 정위(挺緯)는 참의(參議)인데, 이들은 모두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정벽(挺壁)은 요절하였고, 정창(挺昌)은 진사(進士)이다. 장녀는 도사(都事) 이상정(李象鼎)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곧 인평대군(麟坪大君)의 부인이며, 셋째와 넷째 딸은 진사(進士) 이수번(李粹蕃)과 유이태(柳以泰)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대사헌(大司憲 오정일(吳挺一))은 7남 2녀를 두었으니, 시태(始泰)와 시익(始益)과 시겸(始謙)은 모두 진사(進士)이고, 시정(始鼎)은 요절하였고, 시진(始震)과 시항(始恒)과 시만(始萬)은 유학을 공부한다. 딸들은 사인(士人) 정종상(鄭宗祥)과 진사(進士) 강석신(姜碩臣)에게 출가하였다. 승지(承旨 오정원(吳挺垣))는 4남 4녀를 두었으니, 시수(始壽)는 지평(持平)이고, 시대(始大)는 유학을 공부한다. 딸은 진사 민홍도(閔弘道)에게 시집갔다. 도사(都事 오정창(吳挺昌))는 4남을 두었으니, 윤협(允協)과 윤적(允迪)이다. 인평대군(麟坪大君)은 5남 3녀를 두었으니, 복녕군(福寧君) 욱(栯)과 복창군(福昌君) 정(楨)이다. 여기 기록하지 않은 친손과 외손들은 모두 어리다. 이처럼 많은 자손들이 모두 빼어난 자질을 지녀 그 가문에 걸맞았다. 이것은 대개 공이 쌓은 음덕이 넉넉하니, 그 발복(發福)이 반드시 큰 것이다. 하늘이 앎이 없다고 하는 것은 또한 이미 거짓이리라.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적벽이 남쪽에 병풍처럼 둘러 있고 / 赤壁南屛 배천이 서쪽으로 돌아 흐르니 / 白川西滙 일어나기도 하고 옮겨 살기도 하며 / 或發或遷 경사가 여기에 모였네 / 慶鍾斯會 공이 선세의 복을 이었으니 / 公承世胙 그 가문 더욱 번창했지 / 益昌其門 평탄한 길도 멀리 달려가면 / 夷塗遠駕 어찌 어렵지 않겠는가 / 何往不蹇 부절 잡고 지방 순시하며 / 巡方杖節 그 능력 다 발휘하지 못했지 / 莫訖其庸 내면에 쌓은 것을 미루어 / 推其內積 집에 모범 보인 것은 많았네 / 視家則豐 온갖 복을 받아 / 受以百福 자손이 집안에 가득하고 / 子孫盈室 귀한 왕손도 / 王孫之貴 공에게서 나왔도다 / 謂公自出 황하가 넓고 태산이 높아도 / 河洪岱崒 근원 있고 기반 있듯이 / 有源有基 대인이 몸을 닦아 / 大人禔躬 아아 후세에 길이 드리웠네 / 於永厥垂 진실한 마음 아니면 어찌 지켜내며 / 非沖胡守 검소한 태도 아니면 어찌 넉넉하랴 / 非約胡裕 이것을 후손들에게 밝게 보이나니 / 昭玆來裔 공경히 그 바른 자취 따를지어다 / 式遵矩武 - [주-D001] 이것은 …… 같다 :
- 증표를 가지고 있으면 반드시 배상을 받을 수 있는 것처럼, 조상이 음덕을 쌓으면 그 자손이 반드시 하늘의 보답을 받아 복을 누리게 된다는 말이다. 좌계(左契)는 좌권(左券)과 같은 말로, 둘로 나눈 부신(符信) 가운데 왼쪽 것을 의미한다.
- [주-D002] 오백령(吳百齡) :
- 1560~1633. 본관은 동복(同福), 자는 덕구(德耉), 호는 묵재(默齋)이다. 《東州集 文集 卷10 吏曹參判吳公墓碣銘 幷序》
- [주-D003] 시학(視學) :
- 봄과 가을에 임금이 몸소 태학(太學)에 거둥하여 선성(先聖)에게 제사를 올리고 나서 제생(諸生)들을 고시(考試)하던 제도이다.
- [주-D004] 산질(散秩)과 만국(漫局) :
- 실직(實職)은 없이 관품(官品)만 있거나 자잘한 업무를 담당하는 벼슬을 가리키는 말이다.
- [주-D005] 참찬공(參贊公)이 …… 펼쳤는데 :
- 오단(吳端)의 백부 오억령(吳億齡)이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있으면서 선정을 베푼 것을 말한다. 장유(張維)의 글에 “개성부 유수로 나갔는데, 비정을 통렬히 개혁하여 고달픈 백성들에게 생기를 불어넣는 동시에 방치되어 있던 모든 일들을 다 거행하였으므로 잘 다스린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비석을 세워 훌륭한 정사를 칭송하였다.[出爲開城府留守, 痛革秕政, 以蘇凋瘵, 百廢俱擧, 治理流聞.……又伐石立碑, 以頌美德政.]”라고 하였다. 《谿谷集 卷11 故議政府右參贊吳公墓誌銘》
- [주-D006] 말질(末疾) :
- 사지가 저리고 마비되는 증상의 병을 말한다.
- [주-D007] 겸양이 지나쳐서 :
- 구루(傴僂)는 공손한 자세를 말한다. 《춘추좌씨전》 소공(昭公) 7년 기사에 “대부가 되면 고개를 숙이고, 하경이 되면 등을 구부리고, 상경이 되면 몸을 구부린다.[一命而僂, 再命而傴, 三命而俯.]”라고 하였다.
- [주-D008] 인열왕후(仁烈王后) :
- 1594~1635. 청주 한씨(淸州韓氏)로 한준겸(韓浚謙)의 딸이다. 소현세자(昭顯世子)와 후일의 효종(孝宗)인 봉림대군(鳳林大君), 그리고 인평대군(麟坪大君), 용성대군(龍城大君)을 낳았다. 1635년(인조13) 42세의 늦은 나이에 출산을 하다 병을 얻어 타계하였다.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 장릉(長陵)에 인조와 합장되었다.
- [주-D009] 황해 감사(黃海監司)로 옮겨 임명되었다 :
- 《인조실록》 16년 12월 5일 기사에 오단을 황해 감사로 삼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 [주-D010] 가득하면 …… 하나니 :
- 《주역》 〈겸괘(謙卦) 단(彖)〉에 “하늘의 도는 가득 찬 것을 이지러지게 하여 겸손한 데로 보태 주고, 땅의 도는 가득 찬 것을 변하게 하여 겸손한 데로 흐르게 한다.[天道, 虧盈而益謙, 地道, 變盈而流謙.]”라고 하였다.
- [주-D011] 모두 …… 걸맞았다 :
- 오단의 자손들이 모두 훌륭하여 가문의 명성에 부합한다는 말이다. 한유(韓愈)의 글에 “어린 아들은 아름답고 예쁘며 고요하고 빼어나 옥가락지, 옥귀고리와 같고 난초 싹이 돋아난 듯하였으니, 그 집안의 아들에 걸맞았다.[幼子娟好靜秀, 瑤環瑜珥, 蘭茁其芽, 稱其家兒也.]”라고 하였다. 《古文眞寶後集 卷4 殿中少監馬君墓銘》
- [주-D012] 적벽(赤壁)이 …… 흐르니 :
- 오단의 관향(貫鄕)은 동복(同福)이고, 배천으로 옮겨서 살았기에 한 말이다. 적벽은 동복에 있는 명승지이다. 《만기요람(萬機要覽)》 군정편(軍政篇) 〈관방(關防) 전라도(全羅道)〉 기사에 “동복의 옹성산에는 바위 셋이 있는데, 독처럼 생겼기 때문에 옹성산이라 합니다.……성 안엔 일곱 군데의 우물이 있는데 수량이 그다지 풍부하지는 못하지만, 서쪽 봉우리 아래에서 몰래 적벽으로 통하는 길이 있습니다.[同福甕城山, 有三巖形如甕, 故名.……城中有七井, 不甚豐足, 而西峰之下, 潛通赤壁.]”라고 하였다.
- [주-D013] 귀한 …… 나왔도다 :
- 인평대군(麟坪大君)이 오단의 둘째 딸과 결혼하였기에 한 말이다.
- [주-D014] 대인이 …… 드리웠네 :
- 오단이 덕을 쌓아 후손들에게 남은 경사가 있게 했다는 말이다. 제궁(禔躬)은 제신(禔身)과 같은 말로, 수신(修身)을 의미한다. 양웅(揚雄)의 《법언(法言)》 〈수신〉에 어떤 사람이 “선비가 어떻게 해야 몸을 평안히 할 수 있습니까?[士何如, 斯可以禔身.]”라고 묻자, “마음속이 크고 깊으며 외면이 엄숙하고 법도가 있으면 몸을 평안히 할 수 있다.[其爲中也弘深, 其爲外也肅括, 則可以禔身.]”라고 대답한 내용이 보인다.
觀察使吳公墓誌銘 幷序 a_094_407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