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당시 동점역 주변도 꽤나 번창 했었다.
그곳엔 해선이, 목종이, 창희, 종선이, 종태, 옥길이, 기차에 바쳐서 머리가 움푹 파인친구 (이름기억 안남)
가 있었다,
늦으막이 전학온 해서니는 그시절 얼굴엔 눈밖에 보이지 않았었는데....요즘은 오동통.. 보기도..먹기도...?
좋게생겼다.
어린시절 동점역 방면은 육송정 소풍때 지나갔던 기억과 ,목종이 집에서 하루밤 잠을잔 기억과, 옥길이와
몇몇이 그동네에서 놀았던 기억이 난다.
우리의 어린시절은 신발이 비록 검정 고무신 이었지만 그행동 반경은 참으로 방대하였다.
돌꾸지 중심으로 북으로는 통리 미인폭포요, 남으로는 육송정 까지며, 동으로는 방턱골 심심산골 깊은곳
까지였고, 서쪽으로는 하장성 까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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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2학년 중반 까지는 군데군데 구멍이난 교실 마루에 앉아 비가오면 비가 새는곳에 물동이를 받쳐놓고 빗방울
소리를 음악삼아 나무껍질이 더덕더덕 박힌 검으틱틱한 노트에 몽땅연필로 필기하던 생각이 많이 난다.
새 연필을 무척 아끼던 시절이었다.
옥수수 가루빵과 우유 굳힌 덩어리를 학교에서 나누어 주었고 봄에는 진달래꽃과 봄과 여름 중간에 아카시아꽃이
만발한 학교주변 나무에 올라가 아카시아꽃을 따 먹었고, 여름이면 학교앞 구문소에서 흘러내려오는 냇가에서
몸에걸친 모든것을 홀라당 벗어 젖히고 목욕하던 청순한 시절이 그립다.
비포장 신작로에 트럭이 지나치면 먼지가 폴~폴~ 나는 트럭뒤를 광기어린 동작으로 달려가 차 뒤에 매어 달리고
뿜어 나오는 매연의 냄새를 코로 킁킁 거리며 한번이라도 더 맡아보려던 철없던 시절...그시절...,
한여름 뙤약볕에 매미가 맴~맴~ 거리던 오후, 먼지묻은 고무신을 손에들고 맨발로 돌꾸지 친구 몇놈과 우리보다
한두살 연배인 현걸이와 함께 신작로를 따라 집으로 오는데, 성숙하게 보였던 현걸이의 휘파람 소리와 간드러진
노래소리가 생각난다.
"가~아 련~다~ 떠나련~다~ 어린자식 손을~잡고~ ....,
지금 생각하니 나이에 걸맞지 않은 그 가사를 같이 흥얼거리며 터덜 터덜 집으로 향했던 기억도 난다.
2학년 중반에 새학교가 완공 되면서 전교생이 새학교로 이사하게 되었고 이때 비로서 책상과 의자에 앉아보게 된다.
나왕 으로된 마루바닥과 책상 의자 깔끔한 흑판과 지우개판 모두가 새것이어서 신바람이 났었다.
그때 철암초등학교에 다니던 학생들이 학년별로 줄지어 새학교에 들어서던 장면이 눈에 선 하다.
어린 마음에 새로운 친구를 만난다는 기쁨도 있었지만 내것도 아닌데 내것을 빼앗긴다는 아쉬움도 있었던것 같다.
학교가 새 학교이다보니 운동장엔 잔돌이(그땐 짱돌 이라고했다) 많았고 주변은 벌거숭이 어서 틈만나면 학생들을
모아 돌을 줍게하고 생명력이 강한 아카시아 나무들을 뒷산에 열심히 땀흘리며 심던 기억이 생생하다.
또는 나무에 자기 이름을 붙여 책임있게 그 나무를 키웠던 기억도 난다.
철암쪽 에서는 철암시장 입구에 안신애가 있었고, 교장선생님이 운영 하시던 약국집딸, 그러니까 교장 선생님의딸,
송연자가 있었고, 철암극장 부근에 배창식과, 전학온 이후 우리의 반장으로 등극한 김정보가 있었다.
그리고 월천동엔 그시절을 보면 절대 카페지기가 될수 없는 우리의 쌍쑤가 있었고, 철암 초등학교에서 늦으막이 전학온
김진곤이 있었다.
니들은 왜...??? 더 가까운 철암 초등학교에 안다녔냐...??? 매우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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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서 조금 내려오면 강원산업 배급소에 황영수가 있었다.
배급소 하면 생각 나는것은 매월 쌀 배급날이 있어 그날은 배급소가 시끌벅쩍하다.
쌀을 져다주는 지게꾼과, 배급받아 직접 나르는 여러 식구들로인해 인산인해였다.
우리 부모님은 지게꾼에게 쌀을 맡기는 일이 없다보니 우리 형제가 직접 날라야 했기에 쌀 배급날이 무척이나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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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 보면 어린시절 부모님 덕에 쌀밥먹고 등따뜻이 고이 자란것이 지금 생각하면 너무도 감사하다.
그시절 점심땐 시골 친구들이 쌀이 없어 점심꺼리로 옥수수나 감자를 싸가지고 온 친구들과 자주 바꾸어 먹었던 기억이
있다. 그땐 상부 상조였다.
강원산업 정문 앞에도 사택이 있어 열체가량될까...?
그곳에는 재환이와 창복이, 그리고 여친은 분이와 이분이, 행안이가 있었다.
그런데 분이와 이분이는 왜 이름을 뒤집어 놓았을까...? 작명소가 없어서 일까..? 생각이 딸려서 일까...? 의문이다....
거기서 출렁다리를 건너면 왼쪽으로 직원 숙소와 병원과 이발관이 있었고, 가족 목욕탕이 있었다.
그옆엔 제재소가 있어 통나무와 엄청난 톱밥 무더기도 있었다.
신작로 양옆 하늘거리는 코스모스길을 따라 아름다운 코스모스 향취에취해 겉다보면 넓은 운동장이 나온다.
일년에 한번씩 강원산업 전체 체육대회도 하였고, 하교후 또는 공휴일이면 공차기, 야구,등 우리들의 놀이터였다.
그위엔 조금더 작은 운동장이 있었고, 그옆엔 가뭄에도 흐르는 맑은 샘이 하나 있었다.
운동후 마시는 그 물맛은 마셔본자만이 안다.
그 왼편엔 심심하고 답답할때마다 올라, 한눈에 들어오는 동네를 바라보며 그 아름다운 풍경에 심취했던 "돌산" 이 있다.
그곳에서 불 장난과 망우리 돌리기, 칼 싸움, 총 싸움, 많은 놀이로 참으로 정든 작은 산이다.
겨울이면 비행기스케이트를 만들어 차들이 다져놓은 눈위를 신작로 저 위에서부터 운동장 저밑 까지 신나게 타고놀던
비행기스케이트 놀이와 운동장에 물을받아 스케이트장을 만들어 롱-스케이트를 탓던 기억들이 그립다.
돌산에서보면 아래쪽에서 성복이와,문식이 집이 있었고, 그위 공동샘 이쪽옆이 민명숙, 저쪽옆이 이제자네 집이다.
학교 재 쪽으로 상은이와, 그위에 우리의 영원한 골키퍼 복우와 그옆에 도창이가 있었고중앙으로 약간 올라가면
신작로 아래로 우리집이 있었다.
원래 우리집 바로밑에 문식이네가 살다가 그어린마음에 회의를 느끼고 성복이 옆집으로 이사...또 윤식이네 살던 집으로 이사하였다는 이야기 입니다.
우리집 옆집에 또옆집이 형욱이가(김형수) 뻔질나게 드나들던 영순이네 집이었고 저밑은 정용수와 알콩달콩 잘살고 있는
혜숙이집이보였다.
우리집뒤 신작로를 따라 가다보면 공동샘이 나오는데 그위에 영명이와, 그 부근에 이춘산(대부분 모를껄...?),변화옥,
강인구가 있었고,아마 오용환도 이모티에 살았지..싶다. 그밑에 윤식이가 있다가 마끼방 (일본어:줄감는곳 중,고등학교 재넘기전 첫집)
으로 이사했다.
공동우물 윗쪽에 창길이가 사촌집에서 중학교 시절을 보내었고, 신작로를 계속 거닐면 연못이 하나 나오는데, 중,고등학생
(장학회) 청소시 모임장소 이기도 하다.
그옆으로는 휴식과 연애코스로 잔디밭이 있었고 그 동네는 강원산업 직급이 있는 말하자면 고급 동네였다.
거기엔 기자가아닌 안기자가 있었고, 송경재, 공장장아들 눈이큰녀석..김영철인가...?(이름까먹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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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위로 올라가면 중간쯤 형수(김형욱)네가 있고 산아래 정용수네 집이 있다.
녀석 아버님이 우리 아버님과 절친하여 부전자전 우리둘도 그 뒷산에서 꾀나 누비며 지냈다.
그밑 독체집에 도창이 녀석이 저거집 이사하고 하숙을 하면서 한따까리 하는 친구들이 제법 모여들었던 기억이 난다.
(발뺌마라...!)
그옆으로 중원 지대에 양희옥,손미애,신천수,이경애,조현자,강미숙자,담배가게 옆집 황정순,등이 있었던것 같다.
또 가이당 (일본어:계단) 위라하여 생쥐같은녀석 윤용수가 있었고, 그 옆으로 선조,향옥이,정숙자,조금순,권혁세,가
있었다.
그리고 우리집 저밑,입구에 중봉이와,박수목이가 있었고, 나중에 박광진이 수목이 집으로 이사 왔었다.
광진이 아버님은 사택에 연탄을 공급하는 연탄 트럭을 운전 하셨다.
그시절 트럭을 시동 걸때는 "Z" 자 막대기를 이용하여 엔진을 수동으로 돌리면서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집집마다 연탄 창고가 있어 (일부 가정은 방으로 개조도 함.) 연탄배달 아저씨들이 일렬로 서서 서너장의 연탄을
한꺼번에 흭~ 던지고 받고 하여 신속하게 100장 200장을 창고에 쌓아놓기도 했다.
그당시 그것은 신기하고도 묘기였다고 생각이된다.
그시절 중학교 진학은 시험제도 였기에 많은것을 암기 했던것이 지금도 큰 도움이 된다.
6학년때엔 과외공부로 밤늦게 무섭고 두려운 어두운 산을 넘어야 했기에 모두가 똘똘뭉쳐 두려움을 없애기위해 힘과 지혜를
합쳤던 시절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땐 매일 하루도 걸르지않고 매를 맞은것 같다.시험에서 점수미달시 1점에 한대요, 질문에서 못한답마다 또한대요.....
방턱골 깊은 산중에서 가래추자,머루,다래, 한푸대 따오던시절...따온 머루다래 와작~와작~ 배불리 혀가 갈라지도록
먹던시절, 도시락 하나에 고추장 하나로 나물케고 더덕 도라지케어 현지 흐르는 물에 씻어 고추장에 찍어 먹던시절,
주전자 가득 가제잡고 딸기 가득담던 아련한 그 시절이 그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