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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부모님 생애노정 9권
제1절 1989년-한국통일
9. 언론기반과 미중소 국가교류
워싱턴 타임즈 창간 7주년 기념행사
1989.5.17.
워싱턴 타임즈가 1,772개 이상 되는 일간신문 가운데서 3대 신문에 들어갔어요. 월 스트리트 저널이 우리 신문에 떨어진 겁니다. 그래서 워싱턴 포스트∙워싱턴 타임즈∙뉴욕 타임즈 이렇게 됐어요. 그게 말이 쉽지, 말만이 아닙니다. 거기까지 올라가기 위해 얼마나 혈투전을 했는데요.
요전에, 5월 17일이 워싱턴 타임즈 창간 7주년 기념일이었습니다. 거 공산당 앞잡이 워싱턴 포스트, 뉴욕 타임즈 난다 긴다 하는 것들, 무슨 CBS NBC 뭐 ABC 이런 이름있는 텔레비전 방송국 같은 데서 재고있던 녀석들, 레버런 문이 워싱턴 타임즈를 창간한 지 7주년 돼 가지고 다 기념행사 하는 데‘어디 오나 안 오나 보자’했는데….
지금 기자클럽 회장이 워싱턴 타임즈의 3류급 우리 사람입니다. 내가 지령을 내려‘그 자식 훑어라’하면 자리를 못 떠나게 해 가지고 쑥새 집을 만들 수 있다구요. 그거 언제 그렇게 됐어요? 그러니까 수수께끼 인물이지요. 백악관의 기자 클럽 단장이 우리 사람이예요. 레버런 문 부하예요. 아침 저녁 모시고 다니고, 어디 갈 때 전부 다 의논하고 말이예요, 이래 가지고 정책적 방향제시를 하는 사람이 우리 워싱턴 타임즈 3류, 4류 기자입니다. 그럼 나는 뭐예요? 회장이지요? 사장을 마음대로 모가지 뗄 수 있고 편집국장을 마음대로 모가지 뗄 수 있고, 한다 난다 하는 사람들 마음대로 모가지 뗄 수 있는 왕초 아니예요?
언제 그렇게 닦았어요? CIA가 놀라자빠져요. 언제? 레버런 문 조사하다 보니…. 벌써 이게 얼마나 빠른지 한 단체 만들어 놓은 걸 조사하려면 6개월 걸리거든요? 이 6개월 동안에 선생님은 수십 개 단체로 만들어 놓고 이러니 따라올 수 있어요.(웃음. 박수) 그들이 나한테 잡히지, 내가 그들한테 잡히지 않아요. 아직까지 그들은 날 못 잡아요.
중국 팬더 자동차 공업도시 조성
통일그룹 주최 중국 팬더 자동차공업도시 조성 설명회가 1989년 10월 12일 서울 신라호텔 다이너스티홀에서 각계 인사 1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자동차 공업도시 조성 기공식은 중국 중앙정부로부터 1989년 3월 23일 자동차 공업도시 조성에 관한 허가를 받아, 6월 27일 중국 광동성 혜주에서 광동성, 혜주시 일대의 중국 고관, 유지 등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가졌다. |
우리 팬더 자동차 공업단지, 3천 2백만 평을 계약해 놨어요. 그것이 얼마나 크냐 하면 말이예요, 워싱턴 시 만큼 크다구요. 계약을 다 끝냈어요. 중앙정부하고 광동성하고 다 끝냈어요. 이게 홍콩 옆이라구요. 홍콩에서 해상으로 40분 되는 거리인데 이 곳이 혜주(蕙州)라는 곳입니다. 124 지금 장관을 통하여 계획을 세우기 위해 12명의 미국 전문가들이 들어가 있어요. 사무소를 깨끗하게 세워 놓고 일을 하고 있어요.
등소평의 맏아들이 있습니다. 문화혁명 때 3층에서 떨어져 장애자가 됐어요. 이래서 이 사람이 장애자 휴양지를 만들었어요. 12억이나 되는 인구 가운데 장애자가 얼마나 많아요. 3천 2백만 평이 되는 땅을 이 장애자 휴양지로 혜주에 만들어 왔다 이거예요. ‘이 레버런 문의 프로젝트는 중공을 살리는 데 있어서의 장애자 휴양지를 만드는 것보다 몇백 배 가치가 있기 때문에 아들 되는 나는 이 프로젝트를 위해서는 내 아버지가 특별히 나에게 부여해 준 장애자 기지를 바치겠습니다’하며 눈물로써 호소하는 거예요. 나라를 살리기 위해서 주겠다는 거예요. 그리고 ‘정치적 풍토에 있어서 석양길로 밤을 찾아가는 이 때에 이 프로젝트를 빨리 선전함으로 말미암아 아침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이러는 거예요.
이래 가지고 보고를 하니 등소평이가 그 자리에서 이 분에게 전화 한 거예요. ‘임자가 팬다 프로젝트 반대하는데 왜 그러느냐, 내가 하는 거다. 알겠어?’‘알겠습니다!’한마디예요, 전화 들어 가지고 딱 하니까. ‘내가 관심을 가지고 하는데 왜 이래? 왜 반대해? 알겠어?’‘알겠습니다!’이래 가지고는 당 회의에 와서 보고하게 됐거든요, 행정 책임자로서. 그 연설문에 우리 프로젝트를 집어넣어서 발표해 버렸다구요. 그러니 이 붕이도 반대 못 하고, 중국 국회도 반대 못 했어요.
중국은 아직도 공산주의를 고집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6∙4 천안문 사태가 일어났을 때 대부분의 자유세계 경제인들은 중국에서 철수를 해 버렸습니다. 그 와중에 선생님은 자동차공업을 추진하고 있는 실무자에게 조금도 동요치 말고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하라고 지시해서 6월 27일 광동성 혜주惠州 현지에서 대대적인 기공식을 하였습니다. 어려운 사정에 몰린 중국 지도자들에게 큰 혜택을 줌으로써 깊은 심정적 인연을 맺고 대국大局을 함께 의논하고 태평양시대를 공조(共助)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중국에 진출하는 동기가 목전의 이익 추구가 아니고 하늘의 뜻을 받드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원래는 기공식을 언제 하게 되어 있느냐 하면, 9월 23일까지 2억 5천만 불을 홍콩에 있는 중국 은행에 예금하고 나서 중국 정부가 좋다고 공인해야 기공식을 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려면 10월 달이 되어야 가능했다구요. 그런데 뭣 때문에 6∙4사태 직후인 6월 27일에 해요? 그러면 며칠 만이예요? 23일 만이 아니예요? 그때는 대사관에서 후퇴명령을 했는데 보따리도 못 싸고 있던 환경이었어요. 선발대는 태국으로 피난해 가지고 눈치 보고 있던 때였어요.
세상에 어떤 미치광이가 그래요? 내가 이렇게 해 줌으로 말미암아 중국에 있어서 앞으로 외교무대의 경제기반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50퍼센트는 확보된 상태에서 정착시킬 수 있는 거예요. 그것은 뭐냐 하면 중국 자체에서 3년 내지 5년은 그냥 업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미중 사절단 교류
소련에서 아는 것이 뭐냐? 중공에서는 지금 매달 두 사람씩 넉 달째, 벌써 넉 달째예요. 11월부터 12월, 1월, 2월까지 넉 달째 벌써 여덟 명이 왔다 갔어요. 매달 두 명씩 오는 거예요. 중공의 최고 기관원이 온다 이겁니다. 밝히지는 않아요. 우리 총재 고문단이라든가 언론관계를 중심삼아 가지고 우리가 초청해 오는 거예요. 신문사 안내한다고 전부 다 초청해다가는 미국의 기관장들을 다 만나게 하는 거지요. 국무성, 국방성에 다 보고시키고 다 시찰시키는 거예요. 이래 가지고 보냅니다. 정보활동에 이런 정보활동이 없는 겁니다.
중공 대사관에서는 불가능하거든요. 그런데 워싱턴 타임즈가 떡 앞에 서서 이 놀음 해 주니까 얼마나 멋져요. 이래 가지고 길을 열어 주는 거예요. 이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중공에 우리를 거쳐 간 사람들이 막후에 넓어진다는 겁니다. 이 사람들이 그냥 있으려고 안 한다는 겁니다. 미국에 대해 전략적인 계획을 세우는 데 있어서는 워싱턴 타임즈를 중심삼고 배후 체제를 연결시켜 가지고 나오려고 그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 보희랑 떠났다구요. 후루다랑 박보희랑 11월 14일날 어디에 갔느냐 하면 중국에 간 거예요. 북경에 간 거예요. 북경에서 누구를 만나려고 하느냐 하면 이 붕을 만나려고 해요. 그래서 선생님을 중심삼은 사절단이 가는 거예요. 한국 대표, 미국 대표, 일본 대표, 미국의 이 두 사람 정계 대표, 경제인 대표, 그 다음에 맥아더 대사, 군관계에 있는 사람, 외교 문제라든가 이런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사절단으로 가는 거예요.
미국 부시 행정부의 경제담당 총책임자와 맥아더 대사, 일본의 항서를 받고 중국을 해방한 그런 공신이 맥아더 장군인데, 그 사람의 조카거든요. 그 사람들을 문총재의 사절단으로 보낸 거예요. 사절단으로 가 가지고 연막을 쳐야 되는 것입니다. 이 붕을 만나라 이거예요. 그래서 이 붕이 통일교회의 팬다 프로젝트를 절대 지지한다는 소문을 내야 된다구요. 이 붕이 그래야 세계적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지, 그러지않으면 별의별 요사스러운 사건이 벌어져요.
미소 언론사절단 교환
타락 전에 아담, 해와, 그리고 세 천사장. 아담 국가와 해와 국가와 그리고 주위의 세 천사장들인 중국 소련 미국이 아주 꼭 그 결실체로서 그것을 총합체에서 빼서는 아니 되는 것과 같은 협동체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내가 소련 모스크바에 다섯 번씩이나 세계 일등 가는 언론인들을 순회 시찰단으로 보냈어요. 소련 정부가 반대 못 해요. 이제는 우리 사절단을 환영해 들이는 겁니다. 이제는 사절단 대신 교류하자고 나한테 부탁하러 오는 겁니다.
선생님은 40년 전에 말이예요‘1988년이 전환점이다’했어요. 1945년부터 43년 동안 기다리기에 얼마나 지루했겠어요? 1988년이 여기 언제까지냐 하면 1989년 4월달까지입니다. 왜? 부모님이 결혼을 4월달에 했거든요. 그 기간에, 작년 1988년 1년을 중심삼은 기간에 중공, 소련이 전부 다 이렇게 돼 가지고 세계언론인대회에 왔는데, 전부 다 한다하는 그 언론계의 장長들이 선생님을 존경하고 박수하고 다 이러는 거예요. 그거 있을 수 있는 일이예요? 얼마나 기다렸던가!
3월 23일 언론인 대회(제10차 세계언론인회의, 89.3.22~25, 워싱턴D.C, 12개국 대표 350명 참가)에 선생님이 열두 명의 소련측 대표자를 초청했었어요. 그것은 레버런 문이 언론인 대회라든가 하는 것을 통해서 언론세계에서 유명하기 때문이예요. 소련 정부는 소련의 언론인을 12명 정도 초대해 주기를 바라고 있어요. 그들은 특히 언론인 대회에 초대받고 싶어해요. 왜냐하면 미국 최고 언론인들도 거기에 모이기 때문이예요. 거기에서 그들은 미국 저명 언론인들을 만나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선생님이 초대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달에 말이예요, 미국의 언론계의 열두 사람을 내가 추천해 가지고 소련에 보내요. 소련 모스크바에 가긴 가지만 2주일 동안의 비용은 소련 정부가 책임지는 거예요. 왜? 요전에 언론인 대회에 참석했을 때 소련 정부가‘레버런 문, 우리가 언론인 대표 열두 사람을 보낼 테니 2주일 동안 미국에 체류할 때 그 비용 일체를 문선생이 대면 그 대가로 미국 최고의 언론인 대표 열두 사람을 모스크바에 보내면 2주일 동안 소련정부가 레버런 문이 해 주던 이상으로 해 주겠소. 레버런 문 개인보다 소련정부가 지지 않을 수 있게 후대할 것입니다’그러더라구요. 그래서‘그래, 너희들 비밀 보따리 다 풀어 놓아’ 제10차 세계언론인회의 광경 워싱턴D.C. 하니까‘다 풀어 놓을 겁니다’그러는 거예요.
소련 언론과의 인터뷰
세계일보사 초청으로 소련 중진언론인 5명(소련 정부기관지 이즈베스티 야지 정치평론가 비탈리 코비치, 노보스티통신사 주필 나탈리아 야코브레 바, 소련 국영방송 고스텔라디오 정치평론가 파리드세이풀 무루코프, 모스크바 주간신문 자∙루베좀 부주필 블라디미르 이로르단스키, 고스텔라디오의 블라디미르 고우세프 기자)이 1989년 10월 7일부터 14일까지 한국을 방문해 산업시찰, 판문점 관광, 정치인 면담 등을 했다. 참아버님께서는 10월 8일 서울 한남동 공관에서 이들을 접견하셨다. 아래 말씀은 소련에서 100만 부 이상 발행하는 가장 권위 있는 주간신문 자∙루베좀지 부주필 이로르단스키 씨가 참아버님을 특별 인터뷰해 11월 17일~23일자에 ‘정신혁명은 필요하다’라는 제하로 게재한 회견 발췌문이다. |
나는 소련이 두 분야에 노력을 경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바로 종교의 자유입니다. 나는 고르바초프 서기장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이 분야에서도 상당한 진전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여러분이 기업과 무역분야에서 보다 더 광범위한 기반을 갖게 해 주는 개인동기시스템Individual Incentive System을 발전시키는 데 노력을 기울이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사람들은 자극을 받았을 때 더 열심히 일하고 더 많이 생산할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자유시장 경제체제의 비밀이 들어 있습니다.
40여 년 전부터 나는 이미 마르크스주의의 반대자였습니다. 내가 칼 마르크스를 싫어했기 때문은 아닙니다. 칼 마르크스가 인간의 고통과 착취에 분개한 점은 옳습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마르크스주의는 신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의 생생한 영적인 경험은 나에게 신은 존재하고 신의 마음을 찾고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나에게 러시아 민족은 소중합니다. 러시아 민족은 역사 속에서 유럽과 아시아 문화의 중재자로 소명을 받은 위대한 민족이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소련 사람들이 고르바초프 서기장의 역사적인 과업의 성공적인 완수에 대한 나의 희망을 알아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진정한 민주주의와 종교의 자유를 위한 그의 노력이 결실을 맺는다면, 소련이 서구와 견줄 상태가 될 뿐만 아니라 서구를 능가하리라고 나는 예견합니다.
나는 소련 국민을 믿고 싶습니다. 나는 당신들의 친구입니다. 130개국에서의 통일교회 활동도 소련에 우호적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지구는 폭풍우 치는 대양을 항해하는 배처럼 보입니다. 만일 배가 폭풍우를 잘 견디어 낸다면 우리 모두는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살기 위해서 형제처럼, 가족의 일부처럼 함께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 때 우리는 단지 살아 남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 때는 나의 진정한 소망이 이루어져 신이 소련을 축복해 주고, 러시아 민족의 미래를 축복해 줄 것입니다. 빠른 시일 내에 당신의 아름다운 조국을 방문할 수 있기를 진실로 바랍니다.
소련 언론인 접견과 모스크바대회 준비
내적으로는 가인 아벨을 중심삼고, 내적 교회 기독교문화권을 중심삼고 가인 아벨, 즉 기독교중심으로 한 미국을 수습하면서 외적인 공산주의를 방어해 나오는 것이 우리의 활동입니다. 그러니까 40년 동안 뭘 해 나왔느냐 하면, 오른편 강도 왼편 강도가 싸우는 것을 말려 나온 겁니다.
통일교회에 있어서 예수시대의 로마와 같은 것이 미국이고 유대교와 같은 것이 기독교인데, 그 기독교가 반대를 하지 않고 로마와 같은 미국이 반대하지 않고 환영하는 자리에…. 미국 역사시대에 자유세계에서 통일교회 교인들이 십자가에 못박히고 순교를 해야 할 것인데 순교의 시대는 다 지나 갔어요. 선생님은 살아 생전에 전부 다 거쳐왔어요. 이제는 순교의 피를 흘릴 수 있는 통일교회 시대는 넘어갔다고 말이라구요. 공산세계가 지금 선생님을 모셔 가려고 그러잖아요.
여러분들이 알다시피 희랍정교하고 우리 종교의회하고 명년에 모스크바에서 회의하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키로프라고 하는 레닌 그라드의 유명한 무용단이 나하고 관계 맺으려고 지금 프로포즈하고 있어요. 그래서 이제 미스터 박박보희 만나 가지고 전부 사인할 것입니다. 그리고 언론계를 통해서 지금 접선하고 있다구요.
지금(1989.10.7~14) 서울에는 선생님의 초청으로 소련의 노보스티 통신사의 야코브레바 편집국장을 비롯한 다섯 명의 중견 언론인이 와서 한국의 발전상에 경탄하고 있으며, 귀로에는 일본 공산당의 위상(位相)을 시찰하고 중국을 거쳐 그들이 가고 싶지 않다는 평양을 꼭 들러 달라고 일렀습니다. 한국의 발전상과 생생한 인상을 이북의 지도자들에게 꼭 전하게 함으로써 그 곳 지도자들의 오판을 막는 데 일조(一助)시키기위해서입니다. 이들 중에는 한국을 소개할 한 시간 짜리 기록영화를 제작하는 팀이 있어서 소련에 돌아가면 전국에 방영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11월 26일에는 소련 국립방송사의 회장, 노보스티 통신사의 회장 등 6명의 대표적인 언론인들이 역시 선생님의 초청으로 미국에 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달 초(10.2)에는 세계정상의 키로프Kirov 발레단의 올레그 비노그라도프 단장이 서울을 방문하여 선생님이 설립한 워싱턴 디 시에 있는 유니버설 발레 아카데미의 학장을 겸임하기로 확약했을 뿐만아니라 소련 내에서 하나님의 뜻을 크게 돕기로 약속하고 떠났습니다.
선생님이 워싱턴 타임즈에‘앞으로 모스크바가 내 손에 들어올 것이다’하고 선언을 했습니다. 그것이 앞으로 있을 중대한 섭리적인 대회입니다. 그 때 틀림없이 열두 나라가 참가할 것입니다. 내년이지요? 1990년 4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될 언론인 대회를 누가 주최할 거예요? 모스크바에서 4월에 언론인 대회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언론인들이 와서 내일(12.11.) 프로그램을 결정하고 그러는 것입니다.(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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