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제, 수요일, 세종 강의를 마치고, J 선생님의 청으로 모처럼 술을 마셨다. 자리가 생길 때마다 나를 가운데에 앉히려는 선생님들의 배려(?)로 어색함에 둘러싸여, 그 어색함을 풀어보려고 많이 마셨다. 차를 집현전 지하주차장에 놓고 BRT를 타고 대전으로 돌아왔다. 늘 그렇게 하듯이 여러 선생님들이 나를 실은 버스가 떠날 때까지 정류장에 와 함께 서 있었다. 얼마 전 책을 내며 나에게 추천글을 부탁했던 선생님은 그녀의 하늘색 우산까지 내어주었다. 자신의 집은 가까워서 괜찮다고 했는데, 세종의 보람동 전체가 비닐하우스 안에 있는 것도 아닌데, 그 거센 비를 어떻게 피해 집으로 가셨을까. 그 선생님의 출판사에서 나온 아르바이트 비용으로 J선생님이 술값을 다 계산하셨고, 나는 돈 한푼내지 않고 배터지게 술과 안주를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많은 마음씀들이, 지지부진한 읽기와 쓰기로 시간을 보내고 있는 평생교육 강사에게 쏟아진다. 돌아오는 차창 밖엔 비가 계속 내렸고, 내가 받는 호의들이 참으로 과분하다는 생각, 그걸 갚자고 한다면, 좋은 문학을 하는 것인데, 내가 그럴 수 있을까, 자문부답.
그제 술의 숙취로 어제의 오전은 아주 괴로웠다. 몸도 그랬지만, 시간이 갈수록 세종에 두고 온 차를 가져와야 한다는 강박감이 커졌다. 평소 술을 마시지 않는 아들이 무슨 일인지 술병이 났는데, 하필 차가 없는 날을 받아 그를 출근시켜주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다. 백날 천날 라이드를 해봐야 뭐하나. 꼭 필요한 날을 빼먹었으니. 자, 이제 창 밖 하늘이 사양으로 물들고 있으니,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갈아타고, BRT로 환승하여 집현전으로 가자. 차를 가져오자. 게으른 자는 석양에 바쁘다. 하루 종일 먹은 게 없어 배가 고팠지만, 행동주의자처럼 버스와 지하철, 두 단계를 일사천리 수행하고, 반석동의 BRT 정거장까지 나아갔다.
그, 런, 데,,,,거기서, 누군가를 보았다. K, K였다. K가 그 자리에서 과일 노점을 한다는 얘기를 듣긴 들었는데, 사실이었다. 귀로 들었던 사실과 그것을 눈으로 목격한 사실은 다르다. 차이가 크다. 귀로 들은 사실은 사실에 가까운 것이다. 눈으로 본 것은 그냥 사실이다. 들은, 저편에서는 들려주는 사실에는, 그것이 사실에 더 가까워지기 위한 서사적 위장이 포함되어 있다. 그 위장을 벗겨내면, 종일 태양에 노출되어 더욱 까매진 얼굴, 그 위로는 주름진 피로, 거리에 나 앉아 팔리기를 기다리는 샤인머스켓의 파란 피부, 더 많은 상품이 진열된 된 듯 규모를 부풀린 빈 박스들, 노점상 매니저가 대여해준 삼톤 트럭 안 또 박스들, 남은 샤인머스켓들이..남루를 감추기 위해 과장하는 목청과 표정들이...말 그대로 보인다. 나는 세종에 가기를 포기했고, 차를 가져오기를 단념했고, 이제 철시를 해야겠다는 K를 도와 노점 철거를 도왔다. 그리고, 그가 '우리 동네 가서 맥주 딱 세병만 먹어'라고 했을 때, 고개를 끄덕였다. 보문산 아래 박가네 칼국수에 갔다. 맥주 두병, 소주 한병. 그리고, 나룻터. 셀브르 출신의 사장님이 노래했고 나와 노점주인도 노래를 하라고 마이크를 내주셨다. 술 마시고, 노래 부르고, 밤이 깊어 집에 왔다.
이제 오늘 일을 쓸 차례다.
숙취는 오리무중이다. 그제도 많이 마셨지만, 어제는 더 많이 마셨는데, 오늘의 몸과 마음은 어제보다 더 가뿐했다. 차를 가져오자. 점심 전에 집을 나서서 버스를 타고 현충원 역까지 갔고, 지하철을 타고 반석역까지 갔다. BRT 정거장에 K는 없었다. 다행인가...세종 정부청사 남측 정거장에서 하차하여 집현전까지 걸어가는 동안, 가을 바람이 아주 좋았다. 지하주차장에서 사흘만에 차를 만나니 차에게 미안했다. 사물에 대해 이런 감각을 갖다니. 비인간주의 존재론에 다가가는 것인가, 멀어져가는 것인가. 늦은 밤 때 아니게 톡으로 그립다는 말을 자주 해오는 K1한테 질문해보면 답이 나올까. 이 의문도 K1처럼 오리무중이다. 지하주차장을 빠져나오며 전선생에게 전화를 했다. 아부지께 들르고 싶었고, 그 다음 영상대학에 들러 그녀를 만나 차를 한잔 하면, 감정의 등고선이 심하게 출렁거리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막 이마트 쇼핑을 마친 참이었고 연결되기는 어려워보였다.
아부지에게 갔다. 가니 원통했다. 원통해서 실컷 울었다. 하늘이 무너지고 나서 처음 그렇게.
아부지한테서 내려오며 어제 밤, 술을 마시다 통화했던 한 화백에게 전화했다. 어제의 통화에서 그녀에게 그림 두 점을 백만원에 달라고 했었다. 미안하지만 거래가 아니고 그냥 통보다. 가을이 오는 그녀의 집은 초여름과는 전연 다른 풍경이었다. 그녀가 사는 모습은 그녀의 그림과 다르지 않다. 그녀의 남편, 복수형님의 시도 그렇고. 고수란 이런 경지다. 말이 필요없다. 이제 그녀는 내 마음과 눈썰미도 잘 헤아리는지, 골라놓은 그림이 딱 맞춤하다. 연한 커피를 마시고, 고양이 여러 마리, 짖는 소리가 고막을 찢을 듯한 강아지 한 마리, 그리고 식물들, 꽃들, 그림들, 부부의 시골살이들, 새로 만든 산 가까운 텃, 텃, 터전. 짧은 시간동안 풍경들을 몸에 채색하고 돌아왔다. 아내가 좋아하는 한화백표 매실액과 과일쨈들, 복수 형님이 특별히 챙겨준 마음을 듬뿍 안고.
그림들은 제 주인들을 잘 찾아 가고 있다. 만날 인연은 만난다. 작품과 사람도 인연이다. 그런데,
이 좋은 세상과 사람들을 남겨두고, 아부지, 당신은 어디로 가셨나요,
원통합니다.
나날 나날들이 그저 긴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