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를 움켜쥐고 내달리던 김경창의 다리가 꺾이며 바닥으로 꼬꾸라진다. 지면에 닿은 상처에서 피가 쏟아져 흘러 금방 웅덩이를 만든다. 겨우 몸을 뒤집어 하늘을 바라본다. 사그라드는 의식 속에 자신에게로 천천히 걸어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멀어지려 발버둥을 쳐보지만 힘없이 버둥대는 구둣발이 바닥에 갈린다. 고통에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이 힘을 잃던 찰나 멱살이 잡혀 들어올려진다. 거구의 김경창이 힘없이 끌려간다. 시멘트 난간에 김경창을 기대 앉힌 사내가 천천히 무릎을 굽혀 그와 시선을 맞춘다. 백창기였다.
얼마 안 가 숨이 다 할 듯 김경창의 입과 코에서 피가 섞인 체액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미 젖다 못해 핏줄기를 흘리는 셔츠를 보던 백창기가 김경창의 입에 귀를 가져다 댄다.
"비밀번호 말야"
"알려주고 가"
"김여시에게 물을까"
흐려지는 의식 속 두 사람이 아는 이름이 나오자 김경창이 눈을 홉떠 백창기를 노려본다. 차분하고 무미한 목소리였지만, 방금의 살인으로 백창기의 눈동자 역시 형형하게 빛난다. 백창기가 그의 복부 상처를 짓누른다. 김경창의 입술이 벌어지고 백창기가 다시 한 번 귀를 가져다댄다. 새액 새액 생명이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퉤, 미지근한 피가 백창기의 귓가에 튄다. 잠시간 미간을 찌푸린 백창기가 몸을 물리고 김경창을 바라본다. 허공을 바라보는 눈은 더이상 백창기가 원하는 답을 내줄 수 없다. 죽은 김경창을 응시하다 완전히 죽었음을 확인한 그가 가볍게 일어나 셔츠 단추를 풀어 얼굴을 닦아낸다. 뒤에 상황을 이미 끝낸 조부장이 그의 입이 떨어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작업자 불러야겠다"
그들의 차가 떠나고, 동이 트자 한적한 도롯가에 널부러진 시신들의 그림자가 길어진다.
.
.
.
아빠가 죽었다. 혼자 남겨지는 게 두려워 언제나 아빠보다 먼저 죽기를 소망했지만 기어코 아빠가 내 곁을 떠나버렸다.
소식을 듣고 혼절한 이후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경찰을 따라가 차갑게 누워있는 아빠의 신원확인을 하던 일도, 돈 냄새를 맡고 나타난 사람들과 장례식을 치르던 것도, 한국인 양아치들의 이권 다툼에 피로를 느끼는 경찰들의 성의없는 수사도 그들의 질문에 예의상 대답하는 것도 너무 힘이 들었다.
나약한 나의 무의식이 거부하는지 아무리 떠올려 보려해도 아빠의 죽음과 관련된 모든 기억이 흐릿하다. 그래서 다행이라고 해도 될까. 아빠의 부재가 뼈저리게 실감나도 그닥 슬프지 않다는거다. 아니 어떻게 슬퍼해야할지 모르겠다. 소리를 내며 울어봐도 아빠의 죽음에 대한 슬픔보다 혼자 남은 나의 처지가 더 생생하게 실감됐다. 그러니 때가 되면 밥을 처먹고 잠이 오면 엎어져 잘 수 있었으려나. 내가 너무 역겨웠다. 하나뿐인 가족인 나조차도 충분히 슬퍼해주지 않다니..
억지 눈물을 쥐어짜며 마지막 아빠의 모습을 떠올려보지만 구름같이 흩어진 기억 속 차가운 아빠의 피부 감촉만이 느껴질 뿐이다.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 나는 혼자였다. 비참하게도 나는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속으로 백창기를 불렀다. 우리는 결코 그런 사이가 아니지만 나는 너무 간절하게도 그가 필요했다. 미쳐버린건지 보고싶어 죽을 것 같았다.
불행은 꼬리를 물고 온다고 했던가 아빠의 집을 관리하던 관리인들이 아빠의 사망소식을 듣고 집을 다 털어갔다고 한다. 굳이 그럴필요까지 있었을까 사진 한 장을 못 건지게 집이 다 불태웠다. 아빠가 준 생일선물도 사라졌다. 그날 어떻게든 들고 왔어야 했다. 그게 마지막이 될 줄도 모르고, 마음에 들고 안들고가 뭐가 중요하다고, 백창기가 기다리는게 뭐가 어때서...
내가 이러는 동안 백창기는 어디있었냐고? 그는 말도 없이 사라졌었다. 조부장도 함께 없어졌다. 그 사실을 인지 했을 때의 공포는 이루 말할 수 없다. 길에 죽은 채 발견된 아빠는 피묻은 옷가지를 제외하고 금반지와 시계까지 돈이 될 만한건 전부 도난당했다. 구두까지도...당연히 차도 도둑맞았으니 수사는 난항을 겪었다. 그 자리에 함께 죽어있던 필리핀 마약조직단으로 경찰들은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증거하나 없는 아빠의 죽음 시나리오에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그랬겠거니 했다. 경찰에게 되묻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아빠의 또 다른 모습을 마주할 용기가 안 났다. 그 소설에 백창기가 등장하지 않아 다행이라 여겼는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
호텔을 옮겨다니며 지내봤지만 아무리 좋을 곳을 가도 흉기를 든 누군가 찾아오는 망상에 시달렸다. 불면의 밤은 괴로웠다. 한순간에 오갈 데가 없어져 백창기가 없는 백창기의 집에 다시 기어들어갔다. 그 곳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쥐 죽은 듯이 숨어있었다. 인터넷 뉴스에 IT천재 장동철의 사망소식을 보고 그의 행선지를 알게되었다.
.
.
.
.
.
<몇 주 전>
김경창이 자신의 집에서 백창기와 마주보고 있었다. 제가 집주인인냥 다리를 벌리고 앉은 꼴을 보는 그의 눈이 매섭다. 이미 꽤 오래 전부터 그는 직감했다. 네버다이 김경창, 나의 운이 곧 다할 것이라는 걸. 모든 걸 받아들일 준비가 됐지만 물러설 수 없는 게 있었다.
여유롭게 쇼파에 팔을 걸치고 앉아 담배를 피는 백창기를 보는 김경창은 며칠 전 딸아이의 얼굴을 떠올린다. 자기가 배운데가 없어 곱게만 키우면 되는 줄 알았다. 백창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며 고백하는 딸애 얼굴에 쑥스럼이 가득했다. 지 딴에는 연기인 척 했겠지. 내뱉은 대사는 어색했지만 자신도 모르게 지은 표정은 숨길 수 없었다. 애엄마 얼굴을 한 딸을 보고 있으니 속이 뒤집어진다. 악행을 저지른 업보를 마주한 기분이다.
사업권을 넘기라는 백창기의 말에 묵묵부답을 일관했지만 피할 수 없다. 시간문제였다. 주어진 시간 안에 해결해야 할 문제는 하나였다. 오늘 백창기를 부른 건 자기 자신이었다.
"우선 여시는 한국으로 보내. 이제 알만큼 알았잖나"
분노로 억눌린 김경창의 말은 허공에 흩어진다. 재떨이를 끌어온 백창기가 담배를 비벼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하고...나머지 빨리 마무리해서 넘기세요."
"장동철은 너와 생각이 다르던데. 누구말을 들어줘야하나 재밌네"
"시간이 많았나?"
이미 데드라인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느리게 꿈뻑이는 백창기의 눈꺼풀은 권태롭기만 하다. 귀찮다는 말투에서 김경창의 협박 사실 여부따위 중요하지 않다는 자신감이 흐른다. 장동철의 변심을 언제부터 눈치챘을까. 전면에서 나서지 않던 백창기가 여기서 게임판을 쥐려 했다. 김경창의 예감이 맞아떨어졌다. 위험수위였다. 정말 시간싸움에 돌입했다. 이미 총알을 많이 잃었으니 자신이 제일 먼저 희생될 것이다. 빨리 모든 것을 끝내야 한다.
"빨리 해결해야 할거야"
그의 마음을 읽은 듯 백창기가 경고를 하며 떠난다.
.
.
.
결국 김경창이 약속한 기한을 넘겼다. 같이 일한 사이라 예우를 다했다 생각했는데 능구렁이처럼 뒷구멍을 파고있었다. 약속을 이미 두 번이나 어긴 장동철은 김경창의 정리를 서둘렀다. 일을 피곤하게 만드는 걸 싫어한다. 김경창이 평소에 가던 경로를 이탈했다. 할 일이 많은데 일이 자꾸 생긴다. 빠르게 뒤를 밟아간 곳에는 마체테와 도끼를 든 놈들이 이미 김경창이 차에 올라타있었다. 동철이구나. 차에서 내리는 백창기의 목소리는 위험한 결투를 앞둔 사람 같지 않게 건조하다.
"비행기 알아봐야겠다"
백창기 차 정보를 이미 아는지 눈치를 채고 달려드는 괴한들 속으로 그가 칼을 빼며 다가간다. 동시에 백창기를 쳐다보던 조지훈이 빠르게 차에서 내려 그의 반대편부터 달려나간다.
무식하게 달려드는 놈들의 수가 만만치 않다. 그들은 전문적이진 않았지만 스스로의 광기에 취해있었다. 하나둘씩 처리하던 백창기가 김경창의 차를 흘끗본다. 문이 열린 차에 두세명이 달라붙어있다. 백창기의 손과 발이 더 빨라진다.
"할 건 하고 가자"
바닥에 엎어져 미약하게 죽어가는 신음소리를 찾아 다시 목에 칼을 꽂아넣아 완벽하게 끊어낸 백창기가 김경창에게 다가가며 말한다. 조지훈이 그의 말을 알아듣고 김경창 쪽을 보자 이미 그는 배가 뚫려 몸을 휘청인다. 어디서 숨어있었나 몇명이 뒤늦게 달려든다. 조지훈이 빠르게 몸을 날려 백창기의 길을 열어준다.
이미 엎어져 죽어가고 있다. 겨우 몸을 돌려 누운 채로 피를 뿜어내는 김경창을 내려다 본 백창기는 그제야 피식 웃었다. 자신이 이미 올 줄 알았다는 눈빛에 그대로 그의 멱살을 잡아 질질 끌고간다. 억지로 그를 앉히고 마주봤다. 장동철에게 속은 놈들이 시선을 교환한다. 김여시는 내 집에서 탈출하지 못할 것이다. 마음이 급해지면 판단력이 흐려진다. 급해진 김경창이 결국 사냥개 노릇을 다 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