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도서관 수필쓰기 강좌 –9차시 (2022년 6월 15일 수)
수필의 구성-화소 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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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품 첨삭 지도
1. 학생과 교사 사이 / 권삼국
아침 일찍부터 교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반장·부반장이 분주히 왔다 갔다 하면서 반원에게 뭔가를 당부하는 모습이 보였다. 운동회 날처럼 모두가 들떠 있었다. 반장이 다가오더니 “선생님! 자리 좀 피해 주시면 안 돼요”. 밝게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왜 그래 아침부터’. 부산하게 들뜬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아 버럭 화를 냈다. ”저희들이 모시러 갈 때까지 교실에 오시면 안 돼요“. 하고 채근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학년연구실로 가 어제 온 공문을 살펴보고 있었다.
한참 후 반장이 교실로 가자고 팔을 잡아끌었다. 교실에 들어서니 부반장이 윗옷 주머니에 꽃을 꽂아 주었고, 반장의 지휘 아래 모두가 일어나 박수를 치면서 스승의 노래를 합창했다.
노래가 끝나자 창문 넘어 큰 종이가 펄럭이는 것이 보였다. ‘저게 뭐야’. 하고 반장에게 물어보았더니 대답은 없고 모두가 깔깔 웃고만 있었다. 창문을 열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라는 크게 쓴 글자가 보였다. 3월 환경구성 하고 남은 전지를 잘라 대형 프랭카드를 만든 모양이었다.
‘반장 빨리 거둬라 누가 보면 뭐라 하겠노’? 나는 역정을 내면서 고함을 쳤지만 아이들은 웃기만 한다. 한 아이가 ”벌써 소문 다 났습니다. 그대로 둡시다“ 한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다 하다니. 아직도 철없는 개구쟁이로만 보었는데..... 가슴이 뭉클해지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봄 방학이 끝나 갈 무렵이면 새 학기엔 새로 맞이할 아이들이 누구일까? 궁금해진다. 그리고 얼굴도 알 수 없는 그들에게 이미 사랑이 기울어져 가고 있음을 느낀다. 조금 진실성이 부족한 아이, 의지가 약한 아이, 자신감이 없는 아이. 모두 다 내 사랑이 필요한 아이들이다. 이렇듯 나에게는 언제나 사랑이라는 단어가 현재진행형으로 다가 온다.
학생과 교사 사이에는 언제나 일정한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어느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하면 한쪽은 반드시 상처와 갈등을 겪게 된다. 5월쯤에 들어서면서 그 순백의 기대와 기쁨들이 조금씩 조금씩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조용한 날이 없다는 것이다. ‘싸우지 마라’ ‘조용히 해라’ ‘떠들지 마라’. 등. 짓 굿은 장난에 잔소리의 횟수가 점점 더 많아졌다.
학년초 몇 주 지나자 S가 방과 후 면담을 요청했다. 평소 말이 없는 조용한 아이였지만 자기 일은 성실히 하는 학생이었다. 말 못 할 사정이라도 있는 듯 뜸을 들이다가 반을 좀 옮겨 달라는 것 이였다. 각 반에서 4~5명을 모아 새로운 반을 만들었으니 친한 친구도 없고, 지금의 친구들과는 쉽게 어울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지금까지 이런 경우가 없어서 몹시 당황하였다. 나는 몹시 섭섭함을 느끼며 그의 어려움을 되물어 보았다. 그리고 그를 달래어 돌려보냈다.
다음날 일찍 출근하여 어제 S가 찾아왔던 일들이 떠오르면서 한없이 내 자신이 부끄러워짐을 느꼈다. 그가 반을 옮기고 싶다고 했을 때 순간적으로 느꼈던 그 섭섭함, 그것은 내 자아의 못된 허영이었던 것이다. 나의 부족한 사랑을 반성하지 않고, 또, 그의 고통을 먼저 염려하지 않고 어줍잖은 사랑에 교만해 있었던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지는 힘든 시간이 되었다.
선생님의 케케묵은 이야기들을 새 풀을 씹듯 진지하게 듣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느덧 쌓였던 피로가 가시고 새로운 그리움으로 다시 차오르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사랑이 관심이고, 그리움이라면 아이들에 대한 나의 사랑이 충분히 깊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이들에게 느끼는 일종의 좌절감. 그것은 분명 학생에 대한 내 기대치의 반영이었다. 되돌아오지 않는 사랑에 대한 애증이 나에게 있었던 것이다.
사랑은 결코 요구하지 않은 것임을 아직도 나는 실천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그 아이들은 어디에서 그 푸른 웃음들을 솎아내고 있는지......
2. 닫힌 문/김을수
1. 친정어머니가 전화를 하셨다.
“집에 있나? 시골에 모내기는 다 했으려나?”
“왜요? 바람 쐴 겸 한번 가볼까요?
“그럴 시간 있나? 바쁠 텐데.......”라며 말을 흘리신다.
친정어머니는 아흔이시다. 몇 년 전부터 둘째 오빠가 경기도 전원주택으로 모시고 싶어 했다.
평생을 사시던 고향과 너무 먼 것이 싫다고 하셔 고향 가까이 살고 있는 딸들과 이웃해 살고 계신다. 때때로 고향이 궁금해지면 내게 연락을 하신다.
얼마 전 맹장염으로 일주일간 입원한 적이 있다. 그때 가장 그리운 것이 바깥공기였다. 병원 특유의 냄새가 싫었다. 어머니랑 이심전심이었다. 수시로 나도 고향에 가고 싶은데 어머니는 억지로 도시로 나와 계시니 오죽하실까. 고향으로 가는 길이다. 어머니의 표정이 정든 님을 만나러 가는 듯 기대에 차있다.
2. 모내기가 끝난듯 고향 들판은 풀빛바다다.
개망초 꽃도 잡초 속에서 무리 지어 피어나 흥겨운 듯 방긋거린다. 뒤에는 산이 병풍처럼 가려주고, 앞에는 넓은 내(川)가 흐르는 마을은 언제 보아도 평화롭다. 옛 모습을 간직한 마을 입구에 도착하자 익숙한 골목길을 걸어 들어가신다. 인적없는 정적이 우리를 맞는다. 마을 안쪽에 있는 어머니와 같은 세월을 살아온 큰집에 들렀다. 어릴 때부터 부지런히 오고 갔던 집이었는데 자식들 모두 떠나가고 노인네 혼자 오롯이 남아 적막하다. 어머니를 보자 반색을 하며 황급히 축담으로 내려온다.
3. 넓은 마당을 밭으로 만들어 수시로 풀을 뽑고 있다지만 사정 봐주지 않고 자라난 잡초가 무성하다. 옛날 큰집 담 밑으로 도랑물이 흘렀다. 그곳이 신나는 놀이터가 돼 주기도 했었다. 이제는 모두 말라 허물어진 담장이 곰삭은 세월을 말해주고 있다.
두 분은 서로를 부축하며 마을 경로당으로 향한다. 서너 명의 노인네 들이 맥없이 앉아 계셨다.
“어서 오소~ 어서 오소”
오랜만에 만난 동무의 늙고 메마른 손을 잡고 흔든다. 이제는 남은 이보다 가버린 이가 더 많음을 한탄한다.
4. 어머니가 친구 분들과 해후하시는 동안, 천천히 마을 안 골목을 돌아본다. 우리가 살던 집은 굳게 문이 닫혀있다. 문틈 사이로 안을 들여다본다. 우물 옆,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감나무에 노란 감꽃이 자잘하게 달려있다. 더러는 떨어져 여기저기 뒹군다. 성큼 들어가 하나하나 줍고 싶다. 떫음과 달콤함이 오묘하게 섞인 감꽃 맛을 보고 싶다. 아랫방 문 앞에 어머니가 아끼던 석류나무도 보인다. 석류꽃과 열매가 올망졸망 정겹다.
5. 어머니가 진정 오시고 싶은 집은 바로 닫힌 문안의 집 저 마당이 아닐까? 평생을 사시던 곳인데 어느 날부터 우리는 그 집에 들어가지 못한다. 어머니 마음에 큰돌덩이 되어 누르는 자식인 큰 오빠가 있다. 장남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쏟아부은 세월이 눈물겹다. 한없이 퍼주고도 대접받지 못하는 관계다. 부모님 집을 잘 고쳐주면 함께 모시고 살겠다고 약속하더니 해주니 또 다른 욕심을 부렸다. 선산과 과수원 논 밭 등을 모두 이전해 달라는 요구였다. 다른 형제들에게 주기 싫다는 이기심이다. 부모님 살아계실 때 해결해야 나중에 귀찮은 일이 없다는 억지 소리까지 했다. 아버지 상식으론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불효막심한 소리에 충격을 받고 쓰러지셨다. 병원으로 가신 몇 년 후에 돌아가셨다. 그때 이후 제 집 인 냥 굳게 자물쇠를 채우고 가버렸다.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는 금지된 집이 되고 말았다. 물론 자기 뜻대로 모든것을 차지했다. 이의를 거는 사람도 없는데 혼자 앞서간 것이 미안해서 피하는건지 그속을 아무도 모른다. 둥글둥글한 형제들 속에 모난돌이다
6. 어머님의 가슴엔 여전히 장남에 대한 애증이 남아 있는 것일까? 닫힌 대문을 무심한 듯 지나치신다. 결코 입 밖으로 자식 탓하지 않으신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오랜만에 바람 실컷 쐬셨어요?” 물으니 “휴우~” 긴 한숨을 내 쉬는 것이 대답이다.
또 몇날을 끙끙 앓으며 속 앓이를 하실지, 그 깊은 속을 짐작할 수 가 없다.
자식이 닫은 마음의 문이 열리는 날을, 그리고 닫힌 대문이 열릴 날이 오길 기다리고 계실 것이다. (2010년)
3. 당신의 커피 한 잔 / 김형윤
1. 노인의 얼굴에서 선한 표정이 드러났다. TV 화면 너머 보이는 얼굴은 주름이 깊지만 웃는 모습이 곱다. 아들의 고추밭에서 풀을 뽑고 있다. 카메라 앞이라 그런지 수줍은 듯 활짝 웃지도 않았다. 대처에서 큰 수술을 받고 돌아왔다는데 노인은 쉴 틈도 없이 다시 일을 시작했다. 아들이 쉬라고 해도 막무가내이다. 팔순의 어머니는 어떻게든 아들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하다.
2. 노인은 커피를 무척 좋아하지만, 낮에는 커피를 마시지 못한다고 했다. 뜨거운 걸 빨리 마시지 못하는 노인은 커피가 식을 때까지 기다릴 시간이 없단다. 커피 한 잔은 세상의 어떤 것보다 기분 좋은 식후의 달달한 마침표일 텐데 말이다.
3. 노인은 잠깐의 시간도 아까워 점심을 먹은 다음에 바로 일어났다. 한잔의 커피가 주는 삶의 위로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지만 그녀를 붙들지는 못했다. 염전에서 일하는 아들 대신 노인은 집 주변의 밭뙈기를 돌보았다. 콩밭을 매고 배추를 솎는 등 억척스럽게 일하는 모습을 보자 가슴이 뭉클했다.
4. 노인은 몸의 고단함도 잊고 오래도록 밭에 매달렸다. 그런 어머니의 마음에 감동한 자식은 허투루 살지 않았다. 어머니의 마음과 정성이 아들에게는 살아있는 경전이었다.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아들을 움직이는 동력으로 자리 잡았다.
5. 아들은 염전에서 일한다. 넓은 염전에서 고무래로 소금을 미는 힘든 작업이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에게 배운 일이었다. 친구들은 공부하고, 육지로 나가 사는 사람도 많았지만, 얼굴이 검게 그을린 그는 이 생활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털어놓았다. 하얀 소금밭에서 흰옷을 입고 일하는 그의 모습이 성스럽게 보였다. 다이아몬드보다 더 정결하고 순수한 소금이 햇빛에 반짝였다. 어머니와 아들의 마음이 합한 것처럼 보석처럼 빛났다.
6. 정성을 다해 애면글면 아들을 돕는 노인을 보며 어머니의 희생은 가없다는 노랫말을 떠올렸다. 자신을 위해 쓰는 시간은 단 몇 분도 아까워하면서도 자식을 위해서라면 어떤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아무리 많이 줘도 부족하고, 오히려 더 주지 못해 안타까운 노인의 진심이 나를 아프게 했다.
7. TV 다큐에 나오는 어머니와 아들의 이야기 때문에, 나는 한참 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문득 내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머니는 고생을 낙으로 알고 평생 일벌레처럼 살았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힘든 줄도 모르고 뭐 하나라도 더 도와줄 게 없나 주위부터 살폈다. 때로는 입에 있는 것도 기꺼이 꺼내주고 싶어 하셨다.
8. 성인이 되어서도 나는 어머니 앞에서 늘 어린애처럼 굴었다.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줄도 모르고 사는 게 힘들다고 징징거렸다. 나는 어머니의 아픔을 밟고 일어선 못난 딸이었다. 그런데도 치매에 걸린 어머니에게 잘해 드리지 못했다. 늘 핑곗거리가 많아 자주 찾아가 뵙지 못했다. 어머니가 나를 진정으로 필요로 할 때 외면했던 것 같아 늘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가슴속에 회한처럼 새겨져 있다. 이제는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가끔 내 가슴이 뻥 뚫린 느낌이 드는 허전함은 어머니의 부재 때문이 아닐까.
9. 모든 걸 포용하고 나를 오래도록 기다려주신 분, 어머니야말로 사랑의 大家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된 나는 얼마나 어머니를 닮았을까 반성해 본다. 그래도 보고 배운 흔적은 조금 남아서 자식을 위해 애쓰는 흉내를 내고 있지만, 내가 받은 사랑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10. 이 땅의 역사는 어머니라는 이름의 모성이 있었기에 아름답게 흘러온 것이 아니었을까. 근래에 들어 개인주의적 풍조가 만연해지고 여성들도 자신의 행복을 우선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다. 세상이 삭막해지는 것은 어머니의 진심을 만나기가 어려워서가 아닐까.
11. 다큐의 장면이 바뀌자 아들이 어머니의 산소에 가는 것이 소개되었다. 안타깝게도 그새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이다. 이 땅에서 사랑을 다 베풀고 자연 속으로 돌아간 어머니. 이제는 애틋한 모자의 사랑은 지상에 남은 아들의 영원한 짝사랑이 되었다. 다시는 다가갈 수 없는 그 사랑은 영원히 닿을 수 없어 안타깝고 외로운 것이 되었다.
그녀 때문에 나도 한동안 내 어머니 생각으로 절절해졌다.
12. 마음속 그녀에게 삼가 커피 한 잔을 올린다.
4. 주말의 소확행 / 남병웅
1. 오랜만에 소확행을 느껴본 하루였다. 아내가 손녀육아에서 해방되는 주말에 같이 맛점하고 커피 마시고, 쇼핑하고, 저녁먹고, 영화보고, 산책하고, 한잔 한 하루였기에 말이다.
2. 토요일 낮에 아내와 같이 전에 살던 동네의 전통시장에 있는 보리밥식당으로 점심을 먹으러 갔다. 양푼이 비빔밥 전문으로 간단한 뷔페식 셀프 식당이다. 밥과 나물이 국내산이고 무한리필이 가능하다. 된장찌개, 숭늉과 미역국이 기본으로 나오는데 양푼이에 밥과 나물을 듬뿍 넣고 고추장을 비벼서 먹으니 맛이 아주 좋다. 전통시장이라서 가격도 저렴하고 주인장 인심도 좋았다.
3. 맛점후 오랜만에 백화점에 들러서 쇼핑을 했다. 코로나사태 이후 강의나 행사가 많이 없어져서 차려입고 나갈 일이 별로 없었기에 새 옷을 사러 가본 일이 없었던 것 같다. 내년부터 코로나 거리두기기 완화되면 입을 일이 많이 생길 것 같은 새해 기대감으로 외투를 구입했다. 길이를 줄이기 위해 수선센터에 맡기고 기다리는 동안 시간을 보내려고 백화점 내에 있는 스타벅스로 갔다.
4. 딸내미가 주말에 엄마아빠 데이트 하라며 보내준 쿠폰으로 케익과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그런데 커피 값이 점심값보다 더 많았다. 이런걸 두고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고 하는 것 같다. 아무튼 딸내미 찬스로 백화점에 입점해 있는 커피숍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고마웠다.
5. 테이블에 놓인 커피잔 위로 창 밖의 도시철도 3호선 범물역이 보인다. 이따금 역으로 들어왔다가 출발하는 전동차를 구경한다. 커피를 마시며 스마트폰으로 블로그 포스팅을 하면서 간만의 여유를 부려 본다. 아내는 딸내미와 통화하며 보내준 쿠폰으로 아빠와 데이트 하면서 커피 잘 마시고 있다고 인사 겸 자랑도 한다.
6. 수선을 마친 외투를 찾아서 집으로 오는길에 동네마트에서 회 초밥을 사가지고 왔다. 회초밥 먹을때는 우동 국물이 있어야 구색이 맞다. 물론 우동은 내가 끓였다. 라면은 한달에 한 두번 끓여 먹는편인데 우동은 몇 달 만인지 모르겠다. 뜨끈뜨끈한 우동국물이 역시 기대한 만큼 맛이 좋았다. 초밥집에서 외식하는 대신 집에와서 오랜만에 초밥과 우동으로 맛있는 저녁식사를 했다.
7. 저녁도 일찍 먹었으니 영화 한편 보기로 의기 투합하여 ‘장르만 로맨스’ 라는 영화를 예매했다. 오후에 쇼핑하러 갔던 백화점에 입점해 있는 CGV 영화관이다. 영화관은 코로나 이후 올해 처음으로 갔다. 백신 접종자만 입장 가능한데 관객이 10명도 채 되지 않았다. 우리도 사실은 지난해 아내가 휴대폰을 새로 구입하고 통신사에서 나오는 무료 관람티켓이 몇 매 있었음에도 한 장도 사용하지 않았다. 손녀 육아를 책임지고 있기에 영화관은 밀폐된 공간이라서 코로나 감염이 우려되어서 무조건 삼가했기 때문이다. 대신 이름난 영화는 집에서 넷플릭스로 보곤 했다. 영화를 보는동안 마치 코메디물 같이 재미가 있어서 오랜만에 많이 웃고 즐겼다.
8. 영화관이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곳이어서 승용차를 두고서 가고 오는길에 운동을 겸해서 산책하듯이 아내와 손잡고 밤길을 걸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도 가질 수 있었다.
9. 주말에 멀리 가지 않고 아내와 함께 시장에서 보리밥으로 맛점하고, 몇 년 만에 외투 하나 사고 수선 기다리는 동안 카페에서 커피타임을 가지며 휴식을 취했다. 우동과 회초밥으로 맛있는 저녁식사후 둘이 손잡고 걸어가서 영화 한편을 감상하고 와서, 오징어 숙회를 안주로 기분좋게 막걸리도 한잔 했다. 이정도면 주말 오후 오랜만에 아내와 함께 한 소확행이었다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 본다.
5. 청량산 / 박송애
처음 느낌은 늘 그대로다. 청량산 청량사는 마음이 가는 사찰이다. 거리가 멀어 일 년에 한 번 정도 가는 곳이지만 마음은 매일 오르고 또 오른다.
그곳 풍경 소리는 때때로 삶에 지친 나에게 비워라! 전언을 들려준다. 바람을 만나고 소리를 만난 탓일까?
불교 신자도 아닌 내가 절을 유난히 좋아하는 까닭은 마음이 편해지기 때문이다. 청량산은 한 번도 오른 적이 없다.
육육봉(12봉우리)이, 바위 봉우리가 아름답다는 표현은 많이 들었지만 어디가 금탑봉인지, 자소봉인지, 선학봉인지 둘러봐도 알 수가 없었다. 외 청량과 내 청량도 이번 산행에서 알았고 봉우리 저마다의 이름과 풍광을 눈으로 보고 나니 옛사람들이 이름을 참 걸맞게 잘 지은 것 같다.
길가 서 있는 바위(입석)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산속으로 접어들자 가까운 길과 멀리 있는 모습만 보게 된다. 바위 틈새로 샘물이 나오는데 총명 수다. 예전에는 저 물을 많이 마셨으리라. 요즘 사람들은 총명보단 그 물의 오염에 더 신경을 쓰는 것 같다. 아무리 총명 하다손 치더라도 선뜻 마실 용기는 나지 않는다.
지나오다 보면 나무 하나가 온 산의 아름다움을 대변하기도 한다. 단풍나무 한 그루가 찬란하게 빛을 떨군다. 바람이 일자 나뭇잎은 한가지가 아닌 여러 색을 도출한다. '빨갛기도 하고 노랗기도 하고 주홍으로 물들다가. 다홍색으로도 보인다. 그 고운 모습에 마음속까지 다 물이 든다.
어풍대에서 바라다본 청량사는 말이 없고 조용하다. 청량사에서 늘 바라보던 봉우리를 이 곳 대에서 바라보는 소감은 또 다르다. 짝사랑하는 마음일까?
청량사를 뒤로하고 세로로 길게 생긴 바위를 병풍 삼아 아찔하게 서 있는 응진전 담쟁이덩굴 잎이 눈부시게 붉다. 암자에서 심어둔 고추, 배추, 무가 가을바람에 푸르게 자라고 있다.겨우내 스님들의 지상의 양식이다. 저들도 도를 닦는 듯 정갈하다.
지상에서 멀어질수록 잎들과 꽃들은 그 크기가 작아진다. 몇몇 코스모스들은 꽃잎이 새로 나온 십 원짜리 동전만 하다. 올라갈수록 작아지는 저들의 마음을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닮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탁필봉을 지나 자소봉에선 사진도 찍고 주위를 조망하는 여유도 부려본다. 먼지 나는 길 한줄로 길게 서서 기다리고 오르는 길. 한 시간여는 먼지와 더불어 입도 벙긋 못하고 오르기만 한 것 같다. 긴 가뭄 탓인지 먼지는 고운 입자를 날리며 눈앞에서 춤을 춘다. 앞사람의 먼지를 내가 먹고 내가 만든 먼지는 뒷사람이 먹고 아무리 발꿈치를 들고 조심스레 걸어도 먼지는 풀썩인다.
그곳 높은 하늘과 맑은 공기가 정화 시키지 못한다면 질식할 것 같은 순간을 지나 하늘다리. 자란 봉과 선학 봉을 잇는 다리 위에도 사람들 꽃이 피었다. 풍선 속에 산삼 씨를 넣고 날린 꿈이 일본에서 발견되어 작년 매스컴에 떠들던 그 다리다. 다리 준공식 때 날린 풍선이 일본까지 날아갔단다.
나는 어떤 꿈을 가졌는가? 내 꿈은 일본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서 싹도 띄우지 못하고 움츠리고 있다. 어느 때 기회가 된다면 그 꿈의 씨앗 멀리멀리 날려 보내고픈 마음이다.
그날. ‘이 다리에서 내 꿈의 주머니를 날려 보내고 싶네’. 잠시 그런 생각을 하며 다리를 건너니 발아래는 아득하다. 천 길 낭떠러지. 한 번 건너고 나면 그만인데 사람들은 새로움에 열광한다. 그러면서 대둔산의 다리가 어쩌니, 비교까지 한다.
연결, 이 봉우리와 저 봉우리는 본래 멀리 떨어져 있어 힘들게. 오래도록 걷게 되어 있었다. 직선으로, 사람의 편리를 위해. 지자체의 새로운 명소를 위해 연결된 다리. 산을 사랑하는 이에겐 그렇게 필요한 존재는 아닌 것 같다. 위험을 불사하면서, 오래도록 걸어온 사람에게 쇳덩어리는 낯설다. 산과 산 사이를 녹색으로 연결한 그 부조리. 자연은 이미 자연이 아니고, 산은 이미 산이 아닌 이물로 다가온다.
나는 산인은 아니지만, 산에, 절에 새로움이 생기는 걸 반대한다. 참 거북살스럽다. 내 몸에 쇠말뚝 하나 박는 것 같다.
어디가 고장 나 뼈 와 뼈 사이를 연결하는 쇠. 이물감은 오래도록 사람을 힘들게 할 것 같은 데 산은 오죽하랴. 산이 몸살 앓는다는 소리도 오래전 일이다. 우리가 오르기만 했지, 산에 무엇을 해 주었는지, 괜히 산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길은 멀다. 주봉인 장인봉, 예전엔 의상봉으로 불린 곳. 장인봉 비문 뒷면에 주세붕이 쓴 글이 한자와 한글로 적혀있다. 신선 세계는 어디란 말인가?
두들마을이 그곳인가? 모두 감탄한 두들마을. 흙벽이 손때묻은 가구 마냥 정겹다. 참 아이러니하기도 하지? 집은 곧 무너질 것 같은데. 전기는 공급될까? 이런 걱정을 비웃기나 하려는 듯 둥글게 서 있는 안테나. (SKY) 이런 곳에서 광고를 찍으면 제격일 것 같은, 가을 늦은 햇살은 두들마을을 온통 비추고 있다. 따사로운 햇살이다.
병풍바위를 배경으로 이 마을은 그림처럼 앉아 있다. 고추밭과 들깨밭, 붉은 수수밭, 나는 수수밭을 보자마자 공리 주연의 중국영화, 붉은 수수밭을 떠올렸다.
끈적거리는 땀과 벗은 몸에서 나던 땀방울. 미끈한 근육, 수수밭에서의 젊은이들의 사랑
나귀 한 마리에 팔려 가는 어린 신부, 고량주, 일본군의 초토화, 붉은 수수밭이 타들어 가던 풍광, 총을 맞고 쓰러지던 추알. 수수밭은 몸의 수분을 온통 버리고 서걱댄다. 그 칼날에 몸이 베일 것 같은데.
좁은 길. 산허리를 빙 돌아 병풍바위를 지나는 길엔 황국이 짙은 향기를 발하며 나부댄다. 이런 곳에서 사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할까?
날이면 눈 떠서 바라보는 병풍바위와 저 멀리 청량산 봉우리들, 눈 아래론 낙동강이 유유히 흐르고, 마음먹으면 절간에 가서 부처님 전에 아픈 마음 달랠 수도 있고.
살아 보지 않아 불편한 것들은 보이지 않고 눈앞의 광경은 그저 평화롭고 목가적이다. 모든 걸 버릴 수 있다면 이런 곳에서 밭 갈고 씨앗 심으며 사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던 박경리 님의 말처럼 눈 속에 든 풍경 마음속에 꼭꼭 쟁여 넣고 청량사로 향하는 길은 본처 눈을 피해 애첩 만나러 가는 기분이다. 꼭꼭 숨겨두고 꺼내 보는 재미랄까.
여기까지 와서 못 보면 어쩌나 했는데 마침 그런 팬이 더 있었나 보다. 안심당에 걸린
"바람이 소리를 만나면“
현판은 오늘도 바람을 만나고 간다. 절 입구엔 골드 메리가 짙은 황색으로 물들어 저물어 가는 석양빛을 더한다. 유리보전 위로 넘어가는 햇살이 잠시 걸렸다.
'절에 가서 절도 안 하면서 웬 절을 그리 좋아하느냐?' 어느 날 내가 내게 물은 물음이다. 이미 삼라만상에 절을 한 뒤다. 아집과 망상 모두 벗어 버리고 한발 한 발 내디딜 때 이미 떨구어 놓은 것들, 언젠가는 절에 가서 절을 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내가 불교에 대해서 좀 더 아는 날, 절(寺)에 대해서 절에 대해서
하산길은 터벅터벅. 천천히 아주 느리게 걷는다.
뒤로 돌아보는 하루는 정겹다. 산을 다시 되짚어 오르는 동안, 몸은 아래로 내려오고 있다. 산행의 아쉬움은 이 나리 강가의 조약돌만큼 크다.
6. 역전식당 /이문자
1 어느 소도시 역전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있었다. 어찌나 배가 고프던지 근처 사찰에서 본 풍경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숟가락을 국그릇에서 입으로, 입에서 다시 국그릇으로 부지런히 옮기고 있었다.
2 평소의 밥 먹는 때를 넘겨서 생긴 허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심해진다. 시간이 좀 더 지나면 어느 순간부터는 오히려 허기를 느끼지 않게 된다. 그러다가 식당에 들어가 음식을 주문하고 나면, 푸릇푸릇한 허기가 되살아난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것은 가뭄 끝에 비 만난 풀잎처럼 엄청난 속도로 싱싱해진다. 색깔이 더 짙어지고 모양은 생선가시처럼 뾰족해진다.
3 시간으로 봐서는 점심이라기보다 차라리 저녁이라고 하는 게 더 맞을 듯한 때의 배고픔은 밥을 먹을수록 더 활개를 치는 것 같았다.
4 “아자씨, 삼천 원에 된장하고 밥 한 공기 줄라요?”
엄지손가락만큼 열린 식당 출입문 사이에 주름투성이 얼굴만 빼꼼 들이민 채로 백발이 말했다.
5 허기를 메우려고 부지런히 숟가락을 놀리던 우리 일행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밥을 푸던 식당 아주머니와 텔레비전을 쳐다보던 식당 아저씨도 마치 약속이나 한 듯 거의 동시에 고개를 문 쪽으로 돌렸다. 식당에는 주인 내외와 우리밖에 없었다. 점심으로는 너무 늦고, 저녁으로는 너무 이른 어중간한 때여서 그럴 것이었다.
6 식당 아저씨는 가타부타 말 한마디 없이, 여닫을 때마다 끼긱거리는 미닫이 출입문을 열어 주었다.
7 노파는 지팡이를 짚고 식당 안으로 들어와 텔레비전 앞쪽의 자리를 잡았다. 먼저 짚고 있던 지팡이를 의자에 기대 놓았다. 지팡이는 구불텅한 나무로 된 것인데, 얼추 자기 키보다 더 길어 보였다. 다음 복대를 풀어 두 번 접어서 지팡이를 세워 놓은 의자에 얹었다. 지팡이와 복대를 내려놓자 키가 훨씬 더 작아지고 구부정해졌다.
8 노파가 그러는 동안, 식당 아저씨는 둥그런 알루미늄 차판에 추어탕 한 보시기와 공기밥을 가져왔다. 밥과 탕을 탁자에 놓자마자, 꼬부랑 할매는 밥공기를 팍 뒤집어 탕에 밥을 쏟았다. 탕이 무척 뜨거울 텐데도 전혀 개의치 않고 후루룩 후루룩 잘도 먹었다.
“아자씨, 여 밥 쪼매마 더 줄라요?”
9 식당 아저씨는 이번에도 아무 말 없이 온장고로 가서 밥 한 공기를 꺼냈다.
10 나는 밥을 먹다가 말고 노파와 아저씨를 번갈아 보았다. 그러는 내 눈에 새로 지은 밥을 푸고 있던 아주머니의 심상찮은 눈짓이 딱, 보였다. 아주머니는 밥을 푸다 말고 아저씨에게 무슨 암호 같은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아저씨는 온장고에서 꺼냈던 밥공기를 도로 넣고, 온장고 저 안쪽에 밀어두었던 공기 중의 하나를 집었다. 아저씨의 행동을 보고 아주머니의 눈짓이 뭘 의미하는지 알 것 같았다. 새로 지은 밥 말고, 안쪽에 밀어놓은 헌 밥을 주라는 의미였다.
11 할매는 이런저런 사정은 모르고, 금방 갖다 준 밥공기를 또 탕 그릇에 팍, 뒤엎어 말았다.
12 맘이 조마조마해서 할매와 아저씨를 번갈아 보던 나도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래 아침에 지은 밥이면 어떻고 어제 지은 밥이면 어떻단 말인가. 따뜻한 밥을 배불리 먹으면 그만이지. 더군다나 삼천 원짜리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국그릇을 들고 후룩, 한 모금을 마셨다. 그릇을 막 내려놓는데 할매 목소리가 또 들렸다.
13 “아자씨, 여 궁물 쪼매마 더 줄라요?”
14 나는 또 맘이 조마조마했다. 저 할매, 참 넉살도 좋으시다. 들어올 때, 된장에 밥 한 공기 삼천 원에 달라 해 놓고…. 이런 생각을 하면서 밥 푸는 아주머니를 흘금거렸다. 마치 노파 대신 나라도 아주머니의 눈치를 살펴야 한다는 듯.
15 턱선이 둥그스름하고 살집이 푸근한 아주머니는 밥 푸던 주걱을 솥에 걸쳐놓고, 큼지막한 국자와 씻어 엎어놓은 보시기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국솥의 뚜껑을 확 열어젖혔다.
16 국솥에서는 갇혀 있던 미꾸라지들의 마지막 가쁜 숨소리가 뽀얗게 피어올랐다. 그 숨소리는 마치 만어사의 만 마리 물고기가 승천하기만을 기다리며 내뱉는 숨소리 같기도 했다.
17 뜨끈한 추어탕이 담긴 보시기를 식당 아저씨가 들고 와 백발 앞에 놓았다.
18 할매는 뜨거운 보시기를 뒤엎어 밥을 만 보시기에 국을 몽땅 쏟아부었다. 그리고는 다시 게걸스럽게 퍼먹기 시작했다.
19 우리 일행 중 밥값을 낸 사람이 노파의 것까지 내려고 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식당 아저씨가 받지 않더라고 했다.
20 기차를 타고 돌아오면서 우리는 잠시 노파 이야기를 했다. 정말로 삼천 원이 있었을지가 궁금하다는 사람이 많았다. 몇 명은 식당 아저씨가 삼천 원을 받았을지가 몹시 궁금하다 했다. 만어사에서 만난 만 마리 물고기는 어디로 사라지고, 노파와 식당 주인 내외의 잔상이 떠올라 오래 머물렀다. (13매)
7. 엄마의 글공부 –이영혜-
엄마의 어린 시절은 글 배우는 것이 중요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신다. 당장 입에 풀칠하기에 급급하여 풀뿌리라도 캐러 들로 산으로 다녀야 했다고 말씀하신다. 물때가 되면 바다에 나가 조개라도 캐 볼라치면 엄마 눈에는 보이지 않아 한 식구 한 끼가 어려웠다고 말씀하셨다. 똥구멍 찢어지게 가난한 때였다. 말씀하시며, 엄마의 엄마가 계시지 않아 힘들었을 엄마는 자신의 어린 시절의 희미한 기억을 더듬으며 눈동자의 초점은 과거에 있다.
엄마는 글을 읽고 쓸 줄 모른다. 그래서 구청에 봉사활동을 신청한 학생들이 와서 글공부를 가르쳐 준다. 처음엔 연필 잡는 법부터 시작해 점선으로 된 글씨 위에 엄마는 그 위에 덮어쓰기를 한다. 글씨라고 할 수도 없다. 점선에 줄긋기인데 쉽지 않아 보인다. 연필을 손에 잡은 일도 처음이고 하얀 종이에 줄을 긋는 일도 처음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엄마의 줄 긋기는 지렁이가 사람 발에 치여 몸서리치는 것보다 더 이상했다. 지렁이는 부드러운 곡선을 가지고 있지만, 엄마가 그린 줄은 어딘지 모르게 돌기가 서 있는 듯했다. 그렇게 하기도 어렵겠지만 엄마는 줄 긋기를 열심히 하셨다.
어느 날 엄마 집에 가보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동안 엄마는 하루도 빼먹지 않고 글씨 연습을 하셨다고 자랑을 늘어놓으셨다. 팔꿈치 피부는 까맣고 굳은살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여러 권의 완성된 노트가 엄마의 침대 머리맡에 쌓여 있었다. 엄마의 글씨 하나하나에 정성이 들어가 있었고 간격과 줄은 조화를 잘 이루어졌다. 글씨체는 함초롱 바탕체로 경필 쓰기 대회에 나가도 될 정도의 실력이었다. 글씨가 무슨 글자인지 알고 쓴 것이 아니라 글씨라는 그림을 그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학생들의 노고가 보였고, 엄마의 그림 솜씨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홀로 방구석에 앉아 할 일이 없어 잡생각에 하루하루가 지루하고 잠도 오지 않는다고 늘 말씀 하셨다. 그런 엄마에게 일이 생긴 것이다. 아기가 젓 달라고 보채듯 숙제를 많이 달라고 보채를 것이고 일주일에 한번 오는 봉사활동을 자주오면 안 되느냐! 고 했을 것이다. 우연히 그 학생들을 만나는 날이면 “할머니께서 너무너무 열심히 하시고 열의가 대단하시다.”라고 엄마를 칭찬으로 보듬는다.
엄마는 손주 같은 학생들이 멀리서 와서 엄마에게 친구처럼 이야기 나누고 공부 가르쳐주는데 작은 야쿠르트 한 개라도 먹였을까! 하고 미안함과 고마움이 앞선다. 엄마가 정이 없는 것도 아니고 엄마에게 바쁜 일도 아닌데 본인 스스로 바쁘게 생각하고 때아닌 지금 해야 할 일이 생기면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학생들이 힘들고 피곤했으리라 생각된다. 관공서에서 실시하는 학생봉사프로그램이 좋은 효과를 보고 있다.
8. 착각/ 이장희
1)저녁 일곱 시가 다 되어 아내가 나서며 말했다. 물과 점심꾸러미를 챙겨 든 채 밭일하러 가야지 안 서둘고 뭐하냐고. 내일 아침에 가기로 한 곳을 어두워질 참에 서두는 까닭을 알 수 없었다. 어안이 벙벙해 무엇이 잘못 됐는지 곤혹스러웠다. 설마 내게 무슨 잘못이 있나 싶었지만 시간은 해거름이 분명했다. 혹여 아내에게 치매라도 닥쳤나 싶어 덜컥 가슴이 내려앉지만 이내 정신을 차려 착각의 뿌리 캐기에 나섰다.
2)점심 먹고 한참 시간이 흘렀다. 낮이 길어진 요즘 간혹 눈꺼풀이 감기고 살짝 졸음이 오긴 한다. 잠시 전에도 TV 앞에서 그랬지만 정신 차리고 어제 하던 일을 잠시 했으니 날이 새고는 자리에 눕지는 않은 것이다. 더욱 분명한 건 겨울용 슬리퍼를 열심히 문질러 빨아 널었던 방금 전 해놓은 일도 밤낮이 바뀌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3)아내가 착각하고 있음을 설명하다 보니 아침 일찍 걸어서 가까운 계곡과 저수지 있는 산등성이까지 오르내린 것이 오늘 오전이다. 고즈넉하고 짙푸른 계곡에 앉아 떠날 생각을 않던 아내가 아직은 같은 날 저녁이라는 걸 한참만에야 깨닫는 듯했다.
서서히 제 정신을 찾은듯하던 아내가 벽시계를 숫자를 가리키며 그러면 지금이 왜 07:00시냐고 재차 묻는다. 며칠 전, 19:00시라는 표시가 헷갈린다 해서 바꿨는데 그세 또 깜빡했나 보다.
4)아내가 처음부터 ‘아침’이란 단어를 넣어 ‘왜 바쁜 아침에 그걸 씻느냐?’ ‘오늘은 아침부터 왜 이리 낮같이 밝으냐?’ 라고 얘기했다면 지금 저녁이라고 바로 이해시켰을 터이다. 해질 녘이 멀었는데 혼자 아침인줄 착각해 새벽인데 늦은 아침만큼 밝다 했다. 갈 길 바쁜데 내가 꾸물댄다고 오해도 한 것이다.
5)삼십 년 넘도록 단독추택에 살던 몸이라 새 동네 새 아파트의 각방 생활에 적응이 덜 됐나 보다. 뭔가 시간을 다퉈 해내야 할 일이 있다 싶을 때 급한 마음에서 싹트는 게 착각인가 싶었다. 짧은 순간이지만 치매 노인들의 별난 모습들이 떠올라 섬뜩했다.
6)노인 복지관에서 여러 해 치매어르신 상대로 미술치료수업을 했다. 견본 그림을 보고 윤곽만 그려놓은 종이에 색을 채우는 단순작업이다. 그러는 사이에 기억을 찾고 자신을 깨닫는 훈련이기도 하다. 때로는 과제를 하다말고 절에 가야한다던 노인이 있었고, 자신이 교수인데 가르치는 나더러 당신은 누구냐고 묻는 이도 있었다. 치매도 결국 착각의 누적에서 오는 질환이 아닐까.
7)아내가 시간적 착각에 갇혀 벗어나기 힘들었다면 나는 공간적 착각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린 때가 있었다. 친구와 며칠 해외를 다녀온 날이었다. 제사 드는 날이라 터미널에서 형님 댁으로 바로 가야 하는데 노선버스 정류소를 몰랐다. 부득이 택시를 잡아 그 동네에 내렸지만 수십 년 알고 다녔던 아파트가 보이질 않았다.
8)어렵사리 행인을 붙들고 오른쪽 길 모서리의 건물이 A백화점인지 확인까지 해도 허사였다. 시간은 늦고 기다릴까봐 형님께 전화했더니 그럴 때가 있다며 예사로 여기는 게 아닌가. 안쪽의 아파트를 길 가의 아파트라고 착각하다니 넋이 나간 날이었다.
9)인간은 저마다 착각 속에 살아가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위대한 발견, 발명이 착각 속에 이루어지기도 하고 착각이 남에게 큰 상처를 입히기도 한다. 지위가 높고 권한이 클수록 자신을 알고 주위를 살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이들이 보인다. 아랫사람이 잘 따르면 자신의 능력이라 믿고, 잘못을 저지르고는 제도의 불합리나 남들의 오해 탓이라 변명한다. 누군가 잘못하더라도 남을 해치지 않았고 사소한 착각에서 비롯됐다면 모두가 폭넓은 배려와 아량으로 다독여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9. 1센티미터의 여유 /차갑희
1.딸아이가 수선할 옷을 내밀었다. 환절기에 아껴 입는 옷이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한번 손 본적이 있는 옷이다. 출근시간이 다가오기에 대충 되감기로 마무리 해 둔 터였는데 다시 솔기가 삐져나왔다. 새로 하나 사 입는 게 낫겠다고 하니 이번이 마지막 수선이라고 한다.
2.옷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시접의 여유가 하나도 없다. 나의 솜씨로는 어림도 없다. 전문 수선점에 맡기니 천을 덧대어야만 고칠 수 있다고 한다. 수선비용이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 비싸지 않다고 대충한 옷의 바느질에 살짝 기분이 상해진다. 박음질 할 옷의 1센티미터의 여분이 아쉽다.
3.그날 밤 위층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밤늦은 시간의 소음이 늘 있던 터라 대수롭지 않게 넘어 가려고 했다. 예민한 아이는 막대로 천정을 마구 두드려댔다. 합판으로 공사한 천정은 쉽게 구멍이 나 버렸다. 갑작스런 구멍에 아이는 움찔거린다. 별일 아니란 듯이 테잎을 붙였다.
3.네가 어릴 땐 장난이 심해 시끄럽다고 아래층에서 올라 온 일이 있다. 층간소음으로 인해 그 집을 방문한다는건 무척 어려운일이다. 아이들이 있어 이해를 해줄법도 했건만 내 마음 같지 않았다. 처음이 힘들지만 나중엔 자주 우리 집에 올라왔다. 심지어 피아노가 없음에도 다른 집 피아노 소리에 애궃은 우리가 오해를 사기도 했다. 아파트 생활의 소음은 어느 집에서 나는지 확실치 않다. 소음 하나로 이사가는 것도 쉽지 않다. 그러니 네가 마음을 비워야 한다.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는 아이에게 조근조근 타일렀다. 아이는 말없이 고개만 좌우로 흔든다. 또 ‘차보살’ 납시었다는 표정이다. ‘차보살’은 나의 성뒤에 아이들이 붙여준 내 별명이다.
4.내 성격이 꼭 느긋하지만은 않다. 어느날, 이른 시간에 거래처와 약속이 잡혔다. 좁은 골목길에서 한 무리가 길을 막고 있다. 보행자가 있음에도 비켜줄 생각이 없음에 살짝 심사가 뒤틀린다. 횡단보도의 파란 신호를 기다리고 있을 때 내가 탈 버스가 지나가 버렸다. 20여분을 더 기다려 탄 버스는 더디기 한량없다. 내릴 손님도 없는데 나만 태운 버스는 정류장마다 섰다가 출발한다. 약속한 시간은 가까워지고 있다. 기사에게 빨리 가자고 채근하고 싶다. 어느 비 오는 날의 여유로움이 생각났다.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음악에 취해 출근도 잊고 종점까지 느긋하게 가고 싶은적이 있었다. 그때의 느긋한 마음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다행히 거래처와의 약속시간은 아슬아슬하게 지킬수 있었다.
5.그날 아침 머피의 법칙처럼 다가온 출근시간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매일 1센티미터의 여유가 함께 한다면 하루는 또 다른 모습으로 다가 올 것이다. 나 하나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면서 아이에게 내 생각만 심어주기 급급했다. 거실보다 아이의 방에서 들려오는 층간소음은 훨씬 더 크게 들린다. 아이는 엄마가 먼저 제 편이 되어 주지 않아 섭섭해 했다. 예민한 아이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잣대로 생각을 하고 판단하는 오류를 범한다. 상대방을 바꾸기는 쉽지 않다. 그러니 내가 먼저 바뀌어야 한다. 부족한 1센티미터의 여유는 내가 먼저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10. 507호 공동체 /한외근
1. 오후에 시골 조카에게서 전화가 왔다.
“큰아버지, 할머니가 허리를 다쳐 영주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한다. 잠시 집에 들렀다가 할머니께서 편찮으신 것 같아 병원으로 모셨다는 것이다.
“알았다, 고생했다. “
하고 전화를 끊었다.
2. 어머니는 전에 허리를 다쳐 수술 한 적이 있다. 그 뒤로 걸음이 불편하여 지팡이를 짚고 다니셨다.
3. 걱정되어 마침 그 병원에 근무하고 있는 동생에게 전화했다.
”허리뼈 12번 골절입니다. 전에 수술한 척추 11번의 콘크리트도 손상을 입었습니다. “
3개월 가만히 누워 있으면 자연 치유력으로 뼈가 아물 수도 있다. 그러나 다리를 쓰지 않아서 걸음을 걷기가 쉽지 않다. 시술을 하고 한 달쯤 병실에 누워 있는 게 좋겠다. 골다공증도 있고 연로하여 수술은 어렵다는 의료진의 소견이란다. 정확한 검사 결과가 나오는 대로 다시 의논하기로 했다.
4. ”긴급 통지 – 할머니 입원“
가족 밴드가 댓글로 요동쳤다.
”어떻게 다쳤어요? “
”치료는 어떻게 해요?
“그럼, 집은 누가 지키니껴?
동생들과 조카들의 문의가 계속됐다. 집에 자주 오지 않는 막내 여동생이 제일 먼저 상태를 묻는다.
”많이 다치셨는지……? “
5. 동작 빠른 순서로 흩어져 있던 식구들이 병원에 왔다.
”할매, 마이 아파?
“엄마 괜찮아?
세상 참 좋아졌다. 전에 어머니가 편찮을 때는 걱정한다고 장남인 나한테도 연락하지 않은 때도 있었으나 스마트폰 가족밴드의 위력은 걱정을 뛰어넘는다. 반응도 재깍 전달된다.
6. 척추 골절이어서 위급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안심이 되었다. 아내와 병원을 찾았다. 동생들도 와 있었다. 어머니가 507호실 6인 병실의 창가 침대에 쭈그리고 누워 계셨다. 은빛 파마머리가 헝클어져 새집을 지었다. 몸에는 가뭄 든 논바닥처럼 갈라 터진 주름살 더욱 깊다. 얼굴의 거뭇한 저승점이 슬픈 표정이다. 왼손에는 영양제 호스를 달고 있다. 가뭄 때 소방차가 논에 물 대던 모습이 연상된다.
7. 문병 간 나와 아내를 방 사람들에게 인사까지 시킨다.
“여기는 대구에 사는 큰아들 내외니더.”
벌써 우리가 가기 전에 우리 얘기가 한 바퀴 돌았다는 느낌이 든다.
8. 마당 옆에 있는 텃밭에서 호박을 따다가 넘어졌다 했다. 애호박이 몇 개 달려 있어 경로당에 갖고 갈려고 했다. 바로 일어날 수가 없었다. 한참 동안 땡볕에 그대로 넘어져 있다가 기다시피 하여 방에 들어가 누웠다.
9. 그때 조카가 봉화에 출장 나왔다 집에 들렀는데 할머니 안색이 이상한 것을 눈치 챘다. 처음에는 아무렇지 않다고 시침을 뗐다. 누워만 있으니까 재차 확인했다.
“할머니 어디 아프시지요 ?”
할 수 없이 사실대로 얘기하여 조카가 어머니를 모시고 입원을 시켰다는 것이다.
10. 어머니는 문안객이 올 때마다 일어나 앉는다. 영양제와 진통제를 맞고 있으니 통증이 덜한가 보다. 골절된 부분이 심해질 수도 있으므로 누워있어야 한다고 억지로 누워 있게 했다. 그것도 잠시 또 슬그머니 일어난다.
11. 507호 병실 안은 친밀하다. 그 동안에 정이 붙은 공동체이다. ‘콩도 반쪽으로 나누어 먹는다’는 속담처럼 옆 침대끼리 서로 음식물을 나눈다. 문안객이 들고 온 음료수는 이내 돌려진다. 나눔은 병실공동체의 특별한 일이 아니다. 숙연한 일상에 불과하다.
12. 간병인이 자리를 비우면 옆에서 도와준다. 식사 시간에 보호자가 없는 환우를 돕는다. 자기 병에 대해 소상하게 밝힌다. 치료 과정에 대해서도 낱낱이 애기한다. 집안 이야기도 모두 털어놓는다. 자식들 얘기까지 숨기는 게 없다. 텔레비전은 지지직거리며 혼자 놀고 있다. 대화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13. 급성 파킨슨병으로 기억을 잃은 옆 침대 아주머니의 젊은 아들이 어머니 간병에 정성을 다하는 것을 칭찬한다. 이구동성으로 요새 젊은 사람 같지 않게 착하다고 말을 한다. 같은 방 환우의 상태가 나빠지는 상황 설명엔 병실에 그늘이 드리운다. 자기네 일처럼 걱정한다. 병실은 가족이나 다름없이 다정하다.
14. 1인실에 있다가 옮겨온 환자가 말했다.
“그곳은 혼자 있으니 꼭 감옥 같았다. 종일 텔레비전하고만 놀았다. 6인실이 훨씬 좋다. 서로 허심탄회하게 가족 이야기며 세상 이야기까지 하니 좋다. 사람들이 계속 들락거리니 심심하지도 않다.”
15. 서울 매제가
“어머니 피서하라고 대들보(?) 고장 났나 봐요.”
라는 우스갯소리에 병실은 웃음바다가 된다. 그 말도 맞다. 이번 여름은 507호에서 퇴원할 때까지 지낼 수밖에 없다. 몸이야 불편하겠지만 더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과연 그럴까? 그렇지 않다. 침대에 누워서도 더위에 시골집의 밭곡식 타들어 가는 것을 생각하고 있을 것 같다.
16. 찜통더위에 대한 화제도 이어졌다.
“이런 더위는 평생 처음 만났다.”
“올해 더위는 숨이 컥컥 막힌다. ”
어머니는 어지간히 더워도 선풍기를 틀지 않으셨다. 혼자 계실 때는 에어컨을 돌린 경험이 없을 것이다. 어머니는 아흔이 훨씬 넘었는데도 잠시도 쉬지 않던 분이다.
17. 작은 동생네와 함께 살지만, 올해부터 동생네가 영주에서 가게를 운영하면서 낮으로는 독거노인이나 다름없었다. 평생을 농사를 지으며 살아왔기에 날씨가 더워도 쉬지 않으셨다. 가끔은 동네 경로당에 가서 어르신들과 어울릴 때를 제외하고는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한다. 그래서 동생에게서
“좀 가만히 계시소.” 라는 핀잔 아닌 걱정 소리를 듣기도 했다.
18. 조금이라도 덜 움직이기 위해 소변은 침대 옆에 둔 납작한 스테인리스 간이 소변기를 이용하라고 해도 듣지 않는다. 시집올 때 놋요강을 가져오신 분이다. 집에서 요강을 사용해 본 적이 있음에도 남 앞에서 환자복 걷어 올리고 엉덩이 드러낸 채 볼일을 볼 수 없다고 한다.
19. 지팡이 짚고 꾸부정하게 큰딸 팔에 매달려 복도 한쪽에 있는 화장실로 가신다. 시술하면 호스로 소변을 처리할 수 있으나 아직 검사단계이다.
20. 허리 골절은 덜 움직이는 게 최선임에도 평소에는 상춧잎처럼 순하시던 분이 이때만큼은 막무가내다. 옆 침대에 문안객이 찾아와 병실이 부산해진 틈을 타서 어머니가 슬그머니 일어나 앉는다. 이때 이 병원에 근무 중인 넷째 아들 냉정한 목소리로 지시했다
“환자분! 누워 계세요. ”
21. 허리가 더 굽어 퇴원하신 후에도 가끔 그 병실 사람들 얘기를 하시는 것을 보면 507호 공동체가 사람 사는 곳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