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 4:1
이스라엘의 복구 운동에 대하여 "산발랏"은 본격적으로 방해 공작을 개시하였다.
그는 어느 나라 사람인지 그 신원이 분명치 않으나 종교적으로는 혼합주의자였다. 따라서 그도 여호와를 따르는 듯이 그 두 아들들의 이름을 여호와란 성호와 관련시켜 "들라야"와 "쉘레마야"라고 하였다(A.N.E.T., p.492). "산발랏"이란 이름은 바벧론식 이름 "시누발릿"과 같은데, 그 뜻은 '신(月神)이 생명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름이 아람의 파피루스 문서에도 나온다(A.N.E.T., p.492:Cowley, ram.Pap.No.30 line 29).
느 4:2
이 미약한 유다 사람들의 하는 일이 무엇인가 - 이것은 산발랏의 교만한 말이다.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들을 멸시하는 자는 그 자신이 거꾸러진다.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산발랏과 느헤미야를 대조적으로 생각게 된다. (1) 느헤미야는 그때 구약 교회의 지도자로서 하나님의 신의 감동에 의하여 이스라엘의 복구 운동에 이바지한 반면에, 산발랏은 그것을 반대하는 적기독 정신으로 맞섰다. (2)여기서 성령의 구속(救贖) 역사와 타락한 인간 정신과의 대조점도 보인다. 육체, 곧 인간 정신에 속한 자는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배척한다(고전 2:12-14). 롬 8:6-8 참조. 기독자(기독교)의 참된 영적 경험을 일반 인간(인간 단체)의 정신적 경험과 동일시하는 현대 판넨버그(Wolfhart Pannenberg)의 주장도 이 점에서 그 잘못된 것을 드러낸다. 그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영과 인간의 영을 구분하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 아니다"라고 하였다(Theology loses this chance when a fundamental distinction is accepted between divine and human spirit. Therefore, such a distinction doesn't seem wise.-Spirit, Faith and Church, 1969,p.21). 그는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영이란 것은 다만 인간의 정신이 자신을 초월하여 살때에 체험된다"라고 하였다(같은 책, pp.18-19). 판넨버그의 이와 같은 주장은 결국 인간 정신의 전적 부패를 부인하고 인간과 하나님과의 교제는 인간 자율(自律)에 의하여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과 반대되는 그릇된 말이다. 렘 17:9;롬 3:4 참조.
하나님의 영을 받아서 이스라엘의 구속 운동에 이바지한 "느헤미야"는 그리스도의 사상 체계에 속하였으니 어떤 의미에서는 그리스도의 모형이고, "산발랏"은 순 인간 정신으로 느헤미야의 복구 운동을 핍박하였으니 적그리스도의 모형이다.
느 4:3
"도비야"는 "암몬 사람"인데도 그의 이름은 여호와의 성호와 관련되었다. "야"은 야웨의 축소형이다. 이것을 보면 그도 산발랏처럼 종교적으로는 혼합주의자였다. 혼합주의는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하는 것인 만큼 말씀의 순결성 파수를 생명시하는 진정한 여호와의 종교와 배치된다.
느 4:4
우리 하나님이여 들으시옵소서 -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일에 난관을 당하였을 때에 그 해결을 위하여 먼저 기도하였다. 기도는 모든 풍랑에서 동요치 않게 하는 닻이다.
누구든지 환란을 당하여 지체하지 않고 기도에 전심하는 자들은 멸망하지 않는다 (The Preacher's Homiletic Commentary on The Book of Nehemiah, p.94). "우리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느헤미야는 자기가 하나님 편에 있는 사실을 심령으로 느꼈다. 그때에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고 그 일에 가담한 그로서는 그 사실을 느낄수 밖에 없었다.
우리가 업신여김을 당하나이다 원컨대 저희의 욕하는 것으로 자기의 머리에 돌리사 노략거리가 되어 이방에 사로잡히게 하시고 -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자를 저주하는 자는 그 자신이 저주를 받게 된다. 창 12:3에,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라고 하였다. 이때의 느헤미야의 기도는 이기주의도 아니고 독선주의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산발랏에게 대한 정당한 심판 선언이었다.
"저희의 욕하는 것으로 자기의 머리에 돌리사"란 것은 극악한 자들이 받을 수밖에 없는 심판 선언이다. 동양의 옛글에도 말하기를, "네게서 나온 것이 네게로 돌아온다" (出乎爾者反乎爾)고 하였다. 이것이 성경과 같은 권위에 속하지는 못하나 양심과 경험에서 나온 말이다.
느 4:5
주의 앞에서 그 악을 덮어 두지 마옵시며 그 죄를 도말하지 마옵소서 저희가 건축하는 자 앞에서 주의 노를 격동하였음이니이다 - 하나님께서 회개하는 자의 죄는 덮어 주시기도 하시고 도말해 주시기도 하신다. 미 7:18-19에 말하기를, "주와 같은 신이 어디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그 기업의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라고 하였다. 그와 반면에 회개하지 않고 죄악을 쌓는 악인의 죄는 도말되지 않고 그가 쌓아놓은 죄 값을 그대로 다 받게 된다(롬 2:4-5). 느헤미야는 이와 같이 진리대로 기도하였으니 그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되었을 것이다.
느 4:6
이는 백성이 마음들여 역사하였음이니라 - 일반 민중이 이렇게 협력하게 된 것은 성령의 감동에 의하여 된 것이다. 느헤미야는 이때에 예루살렘 성 중건에 대한 민중의 열성을 그 공사 성취의 능력으로 간주하였다. 그는 그들의 열성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본 것이다. 삿 5:2;느 2:18 참조. 그는 여기서 민중을 칭찬함보다 그 중심으로는 하나님께 감사한 것이다.
느 4:7,8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아스돗 사람들이... 다 함께 꾀하기를 예루살렘으로 가서 쳐서 요란하게 하자 - 이들은 모두 다 이스라엘의 숙적(宿敵)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들이 인간의 죄악성을 비유한다고 생각된다. 우리 속에서도 이런 요소들이 기회만 있으면 발작한다. 이 악한 소질들은 우리에게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방해 공작을 한다. 롬 7:21-23 참조.
느 4:9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기도하며 저희를 인하여 파숫군을 두어 주야로 방비하는데 -느헤미야가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먼저 기도한 것은 그의 승리의 비결이다. 그가 이렇게 시종일관 하나님 제일주의로 처사하였으니(2:4), 주 안에 있는 승리를 거둘 수밖에 없다. 빌 4:13 참조.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시지만 그는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일을 해결해 주신다. 그러므로 기도자는 사람으로서 할 일을 부지런히 해야 된다. 느헤미야는 그때에 침략자들을 막기 위하여 파수꾼을 세웠다.
느 4:10,11
느헤미야는 그 복구 공사에 있어서 난제들을 만났다. (1) 유다인들의 낙심(10절). 선한 사업에 주요한 난관은 그 당사자들의 의기저상이다. 선한 일에 대한 낙심은 언제나 마귀로부터 오는 법이다. 성경은 우리를 격려하여 말하기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하였다(갈 6:9).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의 열매를 주시되 우리의 오래 참는 덕을 배양하신 후에 주신다. 그러니만큼 선을 행하는 자는 모든 난관을 겪으면서 오래 참아 나아가야 된다. 참지 못하는 신자들은 선의 열매를 거두지 못한다.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던 유다인들이 낙심하였었으나 느헤미야의 강력한 지도를 따라(13-14) 다시 굳게 서게 되어 마침내 그 중건 사업에 성공하였다. 민중의 힘도 귀하지만 강한 지도자는 그 민중을 성공으로 이끈다. (2)원수들은 이스라엘을 실패케 하려고 음모를 꾸밈(11절). 마귀의 특징은 남들의 선행을 방해하는 것이며, 악한 비밀공작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참된 성도는 언제나 공명 정대하고 남을 해롭게 하지 않는다. (3) 위험하다는 소문(12절). 안전을 해치는 소문은 선한 일을 행하는 자들의 심리를 혼란케 한다. 그러나 성도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때에 모든 의심을 물리치고 목표를 향해 돌진하게 된다.
느 4:13,14
느헤미야는 많은 난관 중에도 낙심하지 않고 백성으로 하여금 폭력의 침해를 막도록 방위 태세를 갖추게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만 신뢰하도록 격려하였다.
너희는 저희를 두려워말고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주를 기억하고... 싸우라(14 절하반) - 느헤미야는 마땅히 두려워할 주님을 두려워할 때에 인간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비결을 체득한 신앙적 지도자였다. 이런 지혜를 소유한 자는 평안하고 침착하게 그 원수와 싸워 이긴다. 신약 시대 신자들도 (1) 영전(靈戰)에 있어서 하나님의 적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힘있게 싸워야 한다. (2) 국민의 자격으로는 무력으로 도전해 오는 침략자에 대하여 마땅히 정당방어를 해야 된다. 그 이유는 그런 때에 싸우지 않는 자는 결과적으로 잔인한 자로 판정된다. 그 이유는 그가 그런 옳지 않은 무저항주의로써 자기의 형제와 처자와 동포를 원수의 악독한 손에 내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3)신자가 전도하다가 그 신앙 때문에 악인의 박해를 당할 경우에는 폭력으로 그 대적을 대항하지 말고 주님을 위하여 고난을 감수해야 된다(마 5:10-12,44).
느 4:15
하나님이 저희의 꾀를 폐하셨으므로 - 원수들의 간교한 계획(11절)이 느헤미야에게 알려졌음(12절)에 따라 이스라엘의 방위 태세가 강화되었다(13절). 이것은 우선 원수들의 전략상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이 하나님의 간섭으로 되었다
고 느헤미야는 믿었다. 신자는 대소사 간에 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바로 판단한다.
느 4:16,17
그 때에 이스라엘은 성을 건설하면서도 전쟁 태세를 갖추고 일하였다. 신자들이 침략전은 하지 않아야 되지만 방어전은 정당시 해야 된다. 정당한 방어전은 (1) 정의를 세우는 일이며, (2)원수의 행동을 제재하여 그 악한 열매를 맺지 못하게 만든다. 그것은 원수로 하여금 반성과 회개의 방향으로 인도해 주는 한 가지 방법도 된다.
느 4:18-20
느헤미야는 언제든지 있을 수 있는 원수의 침해에 대비하여 이스라엘에게 전쟁을 수행할 수 있도록 지시하였다. 그는 전쟁의 승리를 하나님께서만 주장하신다고 선포하였다(20절 끝). 이것은 그의 신앙이다. 그런데 그에게는 어떻게 이런 신앙이 있었던가? 이점에 대하여 그의 확신의 근거를 몇 가지로 분석할 수 있으니, (1) 하나님은 반드시 정의의 편을 도우신다는 것. (2)예루살렘 복구 운동은 하나님 자신의 일이라는 것. (3) 이스라엘의 역사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전쟁(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기 위한 전쟁)은 모두 다 승리하였다는 것. (4) 하나님께서 반드시 함께하여 주신다는 사실 등이다.
느 4:21
동틀 때부터 별이 나기까지 창을 잡았었으며 - 그 당시 위기에 직면한 이스라엘의 노력은 비상하였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노력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고 소망 중에 힘써야 할 것을 강조한다.
느 4:22
사람마다 그 종자와 함께 예루살렘 안에서 잘지니 밤에는 우리를 위하여 파수하겠고 낮에는 역사하리라 - 여기 "종자"란 말은 '종'(奴)을 의미하고, "잘지니"란 말은 '유한다'는 뜻이다. 느헤미야는 백성으로 하여금 낮일(성을 중건하는 일)을 마친 후에도 집으로 돌아가지 말고 방위를 계속하기 위해 성 안에서 지내도록 당부하였다.
느 4:23
내나 내 형제들이나 종자들이나 나를 좇아 파수하는 사람들이나 다 그 옷을 벗지 아니하였으며 물을 길으러 갈 때에도 기계를 잡았었느니라 - "물을 길으러 갈 때에도 기계를 잡았었느니라." 이 문구는 다음과 같이 개역된다. 곧, "씻기 위한 것 외에는 우리가 옷을 벗지 아니하였더라"라고. 이것은 그들이 일상생활에 있어서도 얼마나 긴장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