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 이영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드디어 내가 왕궁에 들어가게 됐어!"
올해로 25살인 평민 아일 카스만은 현재 굉장히 흥분한 상태였다. 절대로 될 리가 없다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노력한 그만의 결실의 씨앗이 드디어 꽃을 피운 것이다. 평범한 농민의 아들이었던 아일이 기사가 되기 위해 노력하게 된 계기는 좋게 보면 어린아이 때의 순수함이고, 나쁘게 보면 세상 물정을 모르는 어린아이의 철없는 생각이었다. 아일이 아직 6살이었을 무렵의 일이었다. 아일은 보통 그 나이 때의 아이들이 다 그렇듯이 엄마의 간단한 심부름을 하러 잘 아는 과일 가게로 가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로 왕족의 호위를 하며 지나가고 있던 기사들의 행렬을 보게 되었다. 햇빛을 받아 보는 이의 눈이 아플 정도로 번쩍이는 은빛 갑옷, 기사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장검 등은 아직 어린아이인 아일이 보기엔 너무나 멋진 것들이었다. 가끔씩 엄마가 해주시던 용사와 마왕 이야기에 나오는 멋진 기사들의 모습. 그것은 환상이 아닌 현실이 되어 아일의 눈앞에 비춰졌고, 그것은 곧 순수한 어린 평민소년의 꿈이 되었다.
그 일이 있은 뒤부터 아일은 부모님을 졸라 겨우 마련한 작은 목도로 열심히 수련을 했다. 자신도 반드시 멋진 기사가 되어 아름다운 공주님을 지키고, 사악한 무리들을 없앨 것이라는 순수한 소망에서 나온 힘이었을까, 아니면 의외의 재능이 아일에게 있었던 것일까. 가장 가까웠던 부모님조차도 놀랄 정도로 아일은 빠른 성장을 보였다. 주위 사람들이 그 정도면 기사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놀라워하며 기적이라고 웅성댈 때도 아일은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대로 자신의 실력에 만족하고 검을 손에서 놔버린다면 자신은 영영 훌륭한 기사가 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마침내 아일은 평민출신에다 25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왕족의 호위기사가 되었다. 물론 그 호위하는 대상인 왕족이 아무런 권력도 없는 6왕녀일지라도 그동안의 전래를 따져보면 이것은 굉장한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작위 수여식 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쿵쾅대는 심장을 가라앉히기 위해 검 수련을 할 때보다 더 신경을 썼던 탓인지 홀을 나오는 아일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너무 힘을 줬던지 뒷목이 뻐근했다.
"으… 너무 긴장을 했나 봐. 목이 뻐근해서 내일 제대로 호위를 할 수나 있을까?"
작위 수여식을 한 것은 오늘이지만 정식으로 호위기사의 임무를 다하는 날은 내일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신나게 파티를 한 뒤 푹 쉴 예정이었다. 생각만 해도 즐거운 듯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정원을 거닐던 아일에게 척 보기에도 착해보이는 인상의 소녀가 꽃밭에서 꽃구경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복장도 수수하고 왕족이나 귀족 특유의 오만함이나 근엄함 등이 느껴지지 않아 길을 잃어버린 시녀 정도로 생각한 아일은 말이나 걸어볼까 싶어 그녀에게 다가갔다. 꽃에 보는 일에 굉장히 집중한 듯 아일이 가까이 다가가도 소녀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 진지한 모습에 장난기가 발동한 아일은 슬그머니 뒤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소리를 질렀다.
"와악!"
"꺄아악!"
아일의 예상대로 소녀는 깜짝 놀랐다. 그냥 가볍게 장난을 쳤을 뿐인데 너무도 놀라는 소녀를 보며 아일은 괜스레 미안해졌다.
"미안해. 많이 놀랐니? 내 이름은 아일 카스만이야. 오늘 정식으로 6왕녀님의 호위기사가 됐지. 평민치고는 많이 출세한거라고 주위에서 다들 놀라더라고. 하하핫!"
"아, 네. 반가워요. 제 이름은 미네리아 드… 아니, 미네리아라고 해요."
"미네리아? 예쁜 이름이네. 넌 어느 분의 시녀야?"
"높은 분의 시녀에요. 이 이상은 비밀이니까 더 이상 묻지말아 주세요."
"음……, 알았어."
자신을 미네리아라고 밝힌 소녀는 겉모습만큼이나 착했다. 자신의 장난으로 인해 많이 놀랐을텐데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웃어보였다. 그 모습에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아일은 비록 처음 본데다, 얼마 후에 헤어질지도 모르지만 그녀에게 친구가 되어달라고 부탁할 생각을 가졌다.
"저기, 미네리아. 나랑 친구하지 않을래? 사실 난 왕궁이 처음인데다 평민출신이라 말단 기사였을 때부터 알게 모르게 따돌림을 받았었거든. 그래서 친구가 적었어. 음… 없었다고 하는 쪽이 더 맞겠다. 나랑 같은 평민출신도 이상하게 나를 싫어했었으니까……."
"전 상관없어요. 저도 친구가 없었거든요."
"어, 정말? 너 같은 애한테 친구가 없다니, 그거야말로 이상한 일이네. 나라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가지만 넌 착하잖아. 그런 경우엔 보통 친구가 많지 않나?"
"후훗, 글쎄요……."
마지막에 지은 웃음은 어딘가 쓸쓸해보이는 웃음이었지만 아일은 잘못 봤겠지, 하고는 그냥 대충 넘어가버렸다. 물론 이런 안일한 생각도 있었지만 자신의 친구가 되자는 제의에 진심으로 기뻐하는 미네리아의 모습에 아무런 생각도 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도 이유 중의 하나이다.
어찌됐건 그렇게 친구가 된 둘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아일이 어렸을 적에 했던 평민놀이를 하기도 하면서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
다음 날, 아일은 정식으로 왕족의 호위를 하기 위해 왕궁에 있는 6왕녀의 처소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지나가는 도중에 경멸어린 시선과 깔보는 듯한 기분 나쁜 시선을 받았지만 그런 눈길에는 이미 익숙해질대로 익숙해진 아일이었다.
똑, 똑-
"왕녀님, 호위기사인 아일 카스만입니다."
"들어오세요."
명색이 왕녀의 처소인데 이렇게나 시녀와 기사가 없을 줄은 몰랐다고 생각하며 아일은 처소로 들어갔다. 물론 왕족을 향해 고개를 빳빳이 쳐들 수는 없었기에 고개는 숙인 채였다.
"반가워요, 카스만 경. 그대가 호위해야 할 대상이 아무런 권력도 없는 하찮은 6왕녀라는 사실에 조금 실망했을지도 모르겠네요. 제 이름은 미네리아 드 칼리온. 방금전에도 말했다시피 칼리온 왕국의 6왕녀입니다."
"저 같은 평민기사에게 경어를 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미네리아 왕녀님. 모시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제 목소리가 낯익지 않으시나요, 카스만 경?"
"예?"
서로에 대한 소개가 끝난 뒤에 갑작스레 이어진 질문에 아일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고 반문을 했다. 하지만 곧 자신이 무슨 무례한 짓을 저질렀는지 안 아일은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는 식은땀을 흘렸다. 자칫하면 호위기사가 된 첫날부터 왕녀에게 내쳐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탓이다.
하지만 왕녀는 그에게 처벌을 내릴 마음이 없는지 그저 웃기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아일은 왕녀의 목소리가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한참을 생각한 뒤 아일은 또 무례하게 소리를 질렀다.
"미네리아!"
"이제야 생각나는가 보군요, 카스만 경. 그 정도로 제가 잊혀지기 쉬운 인물인 줄은 저도 처음 알았답니다."
"어, 어떻게 미네리아 니가 여기에……?"
"그 때도 느꼈지만 카스만 경은 정말로 기사답지 않은 기사네요. 이렇게 당당하게 왕족인 제 앞에서 고개를 들고 반말을 하다니. 후훗."
"흡! 죄, 죄송합니다!"
재빨리 고개를 숙인 아일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방금 전의 일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이건. 이번 일은 기사 자리를 내놓는 것만으로는 끝나지 않을 만한 일이었다. 곧바로 사형에 처할 정도의 일.
고개를 푹 숙인 채 불안감에 눈을 이리저리 굴리는 자신의 순진한 호위기사를 보던 미네리아는 작게 웃으며 말했다.
"쿡쿡, 안심하세요. 본 왕녀의 유일한 친구인 그대를 이런 일로 사형시키진 않을테니까요. 자, 그럼 어제처럼 꽃밭에서 재밌는 이야기라도 할까요?"
"예. 원하신다면."
미네리아의 말에 아까보다는 훨씬 나아진 듯 담담해진 어투로 대답을 하는 아일이었다. 그렇게 둘은 어제 처음 만났던 꽃밭으로 나왔다.
"혹시 이거 아시나요? 저한테 친구 제의를 해준 사람은 카스만 경이 처음이라는 걸. 6왕녀라는 위치 탓인지 아무도 저에게 친근하게 대해주는 사람은 없었어요. 귀족 영애들도 아무런 쓸모없는 6왕녀 같은건 자신들의 무리에 끼워주지 않았어요. 아바마마께서도 제게 그리 기대하지 않는 눈치셨고, 그 외의 언니들이나 오라버니들도 저를 있는 듯 없는 듯 대했어요. 저는 항상 외로웠어요. 시녀들도, 기사들도 모두 저에게 깍듯이 대하기만 할 뿐이었지요. 정작 제게 필요한 것은 어제 제가 만났던 바보같을 정도로 순진한 기사와 같은 친구였는데도 말이죠."
"……."
그녀의 어두운 과거이야기를 들은 아일의 심정은 착잡했다. 신분이 높으면 그저 행복할 것이라는 그의 상상이 미네리아에 의해서 깨지는 순간이었다. 얘기를 끝낸 뒤 하늘을 올려다보며 슬프게 웃고 있는 미네리아를 보던 아일은 결심했다. 이 착한 왕녀를 지켜줄 것이라고. 이 때까지 제대로 된 정을 받아본 적 없는 이 왕녀를 자신의 손으로 꼭 지켜내고 말 것이라고.
그렇게 우연한 계기로 만나 친해지게 된 둘은 함께 반년을 보내며 더욱 사이가 가까워졌다. 그리고 남에게 말하지 못할 감정도 자라버려서 둘은 그것을 숨기기에 급급했다. 그것만 제외하면 나무랄 데 없이 행복한 이들의 하루하루를 하늘이 질투한 것인지 가혹한 운명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뭐라고요? 제게 청혼이……?"
"그래. 이웃 나라의 3왕자의 청혼이다. 우리로서도 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고, 또 너도 마침 결혼 적령기이니 우리 쪽에서도 손해볼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미네리아?"
"그것이 폐하의 뜻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이겠나이다."
"좋다. 미리 얘기를 해두었으니 내일 떠나도 될게다. 미리 짐을 싸두도록 하거라."
"예, 폐하."
미네리아의 결혼소식. 그것은 그녀를 남몰래 사랑하고 있던 아일에게 있어서는 정말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었다. 청혼을 받은 미네리아 본인도 상당한 충격이었던지 결혼한다는 말을 한 이후로는 아무 말이 없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미네리아를 흘낏 쳐다본 아일은 어차피 자신 따위에게 왕녀라는 존재는 어울리지 않았다고, 평민출신인 자신과 어울릴 리가 없다고 자신을 타일렀다. 그렇다곤 해도 역시 사람 감정은 어쩔 수 없는 것인지 괜히 눈물이 나왔다. 그래서 아일은 고개를 숙인 뒤 최대한 덤덤하게 말했다.
"축하드립니다, 미네리아 왕녀님. 왕녀님이라면 이웃 나라에 가서도 분명 사랑받을 수 있을 겁니다."
"진심… 인가요, 카스만 경?"
"축하할 일은 축하해야지요."
아일의 말을 들은 미네리아는 흐르는 눈물을 최대한 참아보려는 듯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하지만 그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 나오기만 할 뿐이다. 미네리아의 그런 모습에 아일은 더 이상 참기가 힘든 듯 결국 솔직한 심정을 내뱉었다.
"사실은 아닙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지금 당장 왕녀님을 데리고 어디 산구석으로 도망치고 싶습니다. 보지도 못한 상대에게 왕녀님을 보내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럼… 도망치면 되잖아요."
"저라면 괜찮겠지만, 왕녀님은 아닙니다. 저같은 평민기사와 산구석에서의 생활이라니, 그런 것은 왕녀님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전 상관없어요."
"제가 용납할 수 없습니다. 이만 짐을 싸는 게 좋을 듯 싶습니다, 왕녀님. 내일이 출발이라고 하셨잖습니까."
"알겠어요."
아일의 솔직한 심정을 들은 미네리아는 자신도 같은 심정이라고, 그냥 도망치자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에겐 비록 지극한 애정을 가지고 대해준 것도 아닌 단지 명목상으로만 아버지일 뿐인 이 나라의 국왕의 명령에 거역할 힘이 없었다. 그저 가라면 갈 수밖에. 다만 아쉬운 것은 아일에게 단 한번도 해주지 못했던 말을 앞으로도 영원히 못하게 될 거라는 것뿐이다. 짐 싸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 온 시녀들의 이목 때문에 '좋아한다' 는 간단한 말도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미네리아는 처소를 향했다. 그런 미네리아의 뒷모습을 보며 아일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생각을 했다.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나서, 정말 하늘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 다시 만나게 해준다면 그 때는 놓치지 않을 겁니다. 반드시 지켜줄테니까, 기다려 주십시오.'
그런 아일의 마음 속 다짐을 듣기라도 한 듯이 하늘은 고요했다.
참고한 노랫말: 태왕사신기의 허락-준서
아무 말도 못 해됴 아무렇지 않아요
그댈 볼 수만 있다면
가질 수가 없어도 만질 수가 없어도
시린 가슴 한번 쓸어내리고 참아내죠
어디에 있는지 잘 있는지 그대 하루가 걱정이죠
달빛 머금은 애타는 밤에는 그 생각에 잠 못 들죠
또 다시 태어나는 그 날엔
하늘이 허락하길 바래요
우리의 이뤄질 수 없었던 사랑을
그대곁에 없어도 그대 뒤에 있어요
외로운 그림자 되어
돌아보고 싶어도 돌아봐선 안돼요
한뼘 행복마저 줄 수 없는 날 피하세요
한 걸음 두 걸음 나보다 더 조금 서둘러 걸어가요
나의 두 손이 또 나의 두 발이 그대 길을 막지 않게
또 다시 태어나는 그 날엔
하늘이 허락하기 바래요
우리의 이뤄질 수 없었던 사랑을
하늘아 내 사랑을 가려줘
바람아 내 아픔을 날려줘
그대가 내 눈물을 모르게 부탁해-----2007.1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