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4년 반 차. 고교입시 준비한다고 서로에게 조금 소홀해진 것 같아, 조금은 쓸쓸했던 16번째 생일날. 나는 여느 소녀들처럼 작고 예쁜 선물을 준비했다. 쥐뿔도 없는 실력으로 며칠 밤새 뜨개질한 목도리와 모자를 들고 남자친구의 집 앞으로 갔다. 밤 열시 반. 레슨갔다 올 시간 됐는데.
'야, 바이올린 이선화있지? 걔 이번에 열매여고 간다더라.'
'...'
'걔가 너 마음에 든대. 너도 걔 예쁘다며.'
'...'
'너 김여주 여자로 느껴지지도 않는다고 했잖아.'
'...'
'어? 놓치면 후회한다 존나예뻐.'
'...'
'어차피, 너 예고가면 김여주랑 헤어질 거 아니냐? 만나보라니까.'
김종대는 내가 모르는 친구와 함께 있었다. 깜짝 놀래주기 위해 숨어있던 승용차 너머로 종대와 친구의 모습이 슬플 만큼 선명하게 보였다. 나는 김종대를 믿었다. 내가 믿는 만큼 김종대도 나를 믿을 거라 확신했다. 그래서 당당하게 한 발자국 움직였다. 짜잔, 김종대! 나 너 생일 축하해주러 왔어. 깜짝놀래켜 주려고. 두발 내디뎠다. 그러나 내 발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걔 전화번호가 뭔데.'
내가 좋아하는 그 목소리가 하필이면 너무도 선명해서. 그래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웍..."
눈이 떠지자마자 나는 본능적으로 달렸다. 이미 오픈되어있는 변기를 부여잡고 내용물을 잔뜩 쏟아냈다. 아 속 왜 이래. 연거푸 나오는 내 토사물에 내가 되레 혐오를 느낄 때 즈음 커다란 덩어리 하나와 속이 급격히 편안해짐을 느꼈다. 이마엔 땀 한줄기, 아. 전쟁이었다.
"....?"
어라, 근데 이상하다. 내 자취방 화장실 벽지가 언제부터 이렇게 초록초록했나. 변기통에 비데가 달려 있었나. 욕조시설 대신 샤워부스가...으악! 잠깐! 여기 우리 집 아니잖아!
"개미쳤나봐..."
진짜 미쳤다. 심지어 여긴 박찬열 집도 아니었다. 머리가 급하게 회전했다. 여기가 어디지? 단서를 찾기 위한 눈동자가 핑핑 돌았다. 아아.
정신을 차리니 서서히 고통이 밀려왔다. 아, 눈 따가워. 뭔 일인가. 벌떡 일어서 거울을 보면 동공이 유난히 크다. 아, 미친. 렌즈끼고 잤어. 당장 렌즈부터 빼서 그대로 변기통에 투척했다.
우리 집도 아닌 주제에 뭐가 이렇게 태평한지, 수납장을 열어 새 칫솔을 뜯었다. 치약을 묻히고 이를 박박 닦았다. 세수도 했다. 집주인이 누구든 일단 이 마스카라 번진 몰골부터 해결해야 했다. 수건까지 찾아 쓱쓱 닦고, 조금은 상쾌해진 마음으로 화장실을 막 나왔을 때였다. 내 안면 근육이 뻣뻣하게 굳었다.
나오자마자 보이는 벽면 가득 김종대의 연주회 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 밑으로 각종 트로피들과 수여증이 눈에 들어왔다. 이로써 명백해졌다.
"후배, 일어났냐."
"악!"
멘붕, 또 멘붕. 얼빠진 얼굴로 수건을 떨어트림과 동시에 방문이 벌컥 열렸다. 김종대 사진 보고 놀란 가슴, 진짜 김종대보고 또 놀란다. 내 외마디 비명에도 김종대는 무반응, 무표정으로 한마디만 남기고 나가버렸다.
"얼씨구. 와서 밥이나 먹어."
다시 문이 닫혔다. 자리에 주저앉아 내가 왜 이곳에 있는가, 지난밤 있었던 일을 떠올리려 부단히도 애썼다. 기억이 날듯, 안날 듯.
어젯밤, 그러니까...
'아이고 우리 오병 후배님~! 취하셨어요!'
'너 나한테 후배랬냐?'
'돗자리좀 드려라. 우리 오병 후배분 취하셨어요~'
'다 엎어버려! 다!!!!'
으악! 나 미쳤나 봐. 나 어제 2학년 선배들한테 대고 나이부심 부렸던 거야? 이거 꿈 내용 아니었어? 내가 진짜로 그런 미친 짓을 했다고?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짐과 동시에 또 생각났다. 윽...
'내가 데려다 준다니까.'
진상부리고 갑자기 슈퍼맨처럼 등장한 김종대에게 업혀(실려) 나가는 길, 박찬열이 우리 앞을 가로막았었다. 그리고 다짜고짜 나를 내놓으라며 그랬었지.
'내가 치사해서 이런 협박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
'너도 반주 취소 당해볼래?'
그리고 김종대는 치사하게도 깝치면 반주 안해주겠다는 협박으로 나를 데리고 나왔어... 미친 나년아.
진상. 진짜 진상. 술 먹고 개가 된다는 말은 나를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그래서 김종대가 집에 데려다 준 건가? 아니야, 분명 김종대는 나를 길거리에 버렸어.
'왜...나 왜 내리는데... 다시 업어줘... 나 왜 또 버려...'
아... 진짜 미친 거 같다. 죽고 싶다. 날 두고 가려는 김종대에게 왜 버리냐고 울먹였어. 다시 업어달라고, 그렇게 징징짰어. 그래서 내가 울컥해서...
'...내가 늙는 동안 넌 뭐했는데? 내가 네 소리만 듣고 네 눈 맞추며 늙는 동안 너는 뭘 잘했다고!'
소리를 질렀는데. 소리를 질렀어. 맞아. 그리고 어쨌더라. 뭐라고 그랬더라, 김종대가.
머리가 아팠다. 기억날 듯, 말 듯.
김종대가 나와 눈높이를 맞춰 앉았었다. 나쁜놈이라고 개새끼라고 윽박지르는 내 목소리를 다 들었었다. 그리고 뭐라 말했었다. 되게 중요한 말이었는데, 뭐였지. 기억이 안나...
일단 배가 고팠다. 배때기를 채워 놔야 무슨 사고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전신거울 앞에 선 김종대가 윗옷을 걸치고 있었다. 나 두고, 지금 어디 나가나? 아니, 날 어떻게 믿고?
"김종대, 어디 가?"
"레슨있어."
거울을 뚫고 눈이 마주쳤다. 이상한 적막감에 손에서는 식은땀이 났다.
"밥 먹고 정리하고 가."
돌아선 김종대는 나와 달리, 그리고 몇 년 전과 달리 참 깔쌈했다. 순둥순둥한 이미지를 더했던 앞머리는 발랑 까올리고, 눈꼬랑지가 바짝 올라간 게, 프로페셔널한 느낌이랄까?
하하 표현 진짜 고품격이네.
뭐, 한마디로 나를 버리고 다른 여자를 만난 건 미웠지만, 결과적으로는 수긍할 수밖에 없는, 그런 모습이었다는 거다. 확실히 과분했던거 같다. 그렇다고 내가 후달린다는 건 절대 아니다. 그냥 쟤가 조금 과분했던 것....아니그 말이그 말이잖아!
"간다."
"...어, 가."
문이 열렸다가, 닫혔다. 그 자리 그대로 어벙하게 서 있던 나는 곧 식탁으로 향했다. 국과 반찬들이 다소곳이 차려져 있긴 한데. 동네 반찬가게에서 사온 티가 대놓고 난다. 찹쌀 밥, 그리고 콩나물국은 그래도 집에서 끓인 거 같은데. 국을 한가득 담은 숟가락이 일순간 멈췄다. 아 잠깐. 배고픔에 이성을 잃어선 안돼. 정신 차려, 정신. 김종대가 왜 이렇게 호의적이지? 술 취했다고 버리지 않고 집에 데려와서, 밥까지 먹일 정도로 우리가 친한 사이던가? 아니잖아. 혹시 이 국에 머리가 나빠지는 약이라던가, 일년 내내 설사를 유발하는 뭐 그런 악질적인 성분이 들어가 있는 건 아닐까.
"....음..."
에라 모르겠다. 그냥 먹자. 냠냠 쩝쩝, 꿀꺽 삼켰다.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 나니 배가 아팠다. 진짜 약이라도 탄 거야? 위에 경련이 일어났다. 쇼파에 드러누워 끙끙거리다 나도 모르게 잡히는 리모컨에 티비를 틀었다.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어! 알찬도전!"
나란 병신, 아픈 것도 잊고 한참 방영중이던 알찬도전 페이스에 맞춰 한참을 낄낄거렸다. 재미있는 걸 어떡하나.
그러다가 문득 바라본 시계에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열한시. 아, 맞다. 여기 우리 집 아니지. 그리고 나 오후에 강의있지. 아, 이 미친 적응력...
부엌으로 다시 돌아가 반찬을 대충 개어 냉장고에 넣어두고, 그릇을 설거지통에 담가놓았다. 물론 설거지는 하지 않았다.
물 묻은 손을 탈탈 털고 폰과 겉옷을 챙겨 입었다. 서둘러 나가다 문득 돌아본 뒤로, 집안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오피스텔 한가운데 비치된 스타인웨이 그랜드 피아노,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씨디들, 오디오, 그리고 악보들. 누가 봐도 음대생 방.
어렸을 땐 꼭 한 번쯤 와보고 싶었던 방인데. 기분이 묘하다. 영어울렁증에 외국 한 번 안 나가본 우리 부모님은 지나치게 아메리칸스타일인 방면, 유아기를 미국에서 보낸 김종대와 교포2세 부모님은 반대로 워낙 엄격하셔서, 내가 좀 많이 무서워했었다. 그래서 몇 번 초대받았음에도 못 갔었지. 김종대집.
"김종대 집, 안녕."
비록 집이 아니라 학교 근처 자취방이었지만, 김종대가 그동안 어떻게 지내왔는지 보여주는 솔직한 공간이었다. 여전히 잘 살고, 잘 먹고, 피아노도 잘 치고.
바이올린 한다는 그 예고 소녀는, 잘 만나고 있나?
캠퍼스 로맨스는 누구나 한 번쯤 꿈꿔 보는 환상이다. 여기서 포인트는 '환상'이다. 현실은 이렇다. 좀 잘났다 싶은, 예를 들면 박찬열 같은 남자는 이 여자 저 여자 만나고 누군가의 순결한 첫경험을 무용담하듯 떠들고 다니는 파렴치한 놈이었고, 누구나 '연애해보고 싶다' 하고 꿈꾸는 만인의 남자는 하필이면 내 악몽이어서, 마주칠 때마다 혈압을 상승케 했다.
연애하러 대학왔나, 잘 먹고 잘 살려고 대학 왔지. 안경을 추켜올리고, 교수님의 한마디 한마디에 집중했다. 오늘부터 시험때까지 열공이다. 누구나 한 번쯤 꿈꿔본다는 과탑을 목표로 패기 넘치게 전공 관련 책을 세 권이나 빌렸다. 인생 뭐 있냐? 사랑? 사랑이 밥 먹여줘? 재수때의 열정을 끓여보자.
저녁 늦게까지 공부했다.
뻐근한 목을 돌리며 나오는 길, 복도에서 선배들과 딱 마주쳤다. 윽, 딱 보니 삘이 온다. 술 마시러 가는 거 같은데, 잡히지 말아야지. 냉큼 방향을 틀어 최대한 빨리 걸었다. 혹시라도 쫓아올까 열심히 걷고 또 걸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편의점 앞까지 와있었다. 아, 마침 출출했는데. 이건 배를 굶주리지 말라는 신의 계시일까.
컵라면과 삼각김밥, 그리고 레모네이드를 구매해 한쪽 자리에 잡고 앉았다. 후르륵, 후륵. 잔뜩 김서린 안경이 불편에 벗어두고 정말 열심히 먹었다. 뭐, 이런 것도 나중엔 나름의 낭만으로 기억되려나.
"언니!"
교양수업이 막 끝났다는 동기 하나가 반갑게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라면을 호로록 먹여주고 이런저런 소식을 주고받았다. 그래 봤자 다 쓸데없는 것들. 3학년 누구랑 4학년 누구랑 연애한대요! 뭐 이런 거? 어쩌라고.
"언니, 저 도서관가요. 언니는요?"
과탑 자리를 노리는 애가 비단 나뿐만은 아니었나 보다. 학업에 불타는 열정을 보이는 동기를 보며 잠시 고민했다. 아, 공부 좀 더 할까. 그러나 고개를 저었다.
"난 집에 갈래."
"네, 갈게요. 언니 또 봬요!"
빌려놓은 책도 많겠다, 집에 가서 남몰래 하지 뭐. 공부는 원래 남몰래 해야 제맛이니까. 공부 안 한 척, 원래 똑똑한 척, 알고 있었던 척해야지.
저녁 바람이 살랑거렸다. 박찬열을 처음 만났던 날 그 바람과 닮아있다. 무슨 바람까지 기억하냐, 진짜 태생적으로 감각을 타고난 건지, 아니면 그냥 생각난 김에 끼워 맞추는 건지, 나도 모르겠다.
발꿈치가 여전히 조금 땅기긴 했지만 거동이 불편할 정도는 아니었다. 내 상처가 아문만큼, 딱 그만큼 나도 너를 잊었으면 좋으련만, 그게 잘 안되나 보다. 괜히 땅만 보고 걸었다. 이따끔씩 가려워지는 귀를 후비면서. 그러다가 문득 걸음이 멈췄다. 내 몸을 완전히 드리우는 그림자에 반사적으로 고개가 들렸다.
"여주야."
무시하고 지나치려고 했다. 또 막는다. 대꾸없이 옆으로 한 걸음 비켜서서 걸었다. 붙잡혔다. 박찬열, 니가 뭔데 나를 잡아. 무슨 자격으로?
"다리는 좀."
"..."
"몸은 좀 괜찮아?"
"놔."
"괜찮냐고."
"응 괜찮으니까. 놔."
날 놓지 않았다. 말도 없었다. 짜증을 담아 박찬열을 노려봤다. 내가 눈을 맞추길 기다리고 있었나. 그 입이 열렸다.
"나 용기 많이 냈어, 여주야."
"..."
"좋아한다는 애가 혹시."
"..."
"김종대야?"
말문이 막혔다. 이렇게 잡혀서 꼬치꼬치 캐묻는 행위가 공감도 안됐고, 또 괘씸했다. 어디 한 번 해봐. 하고 바라봐주니 다시 한 번 말한다.
"...걔 좋아해?"
그리고 잠시 고민하던 나는 대답했다.
"응."
긍정. 순전히 자존심 세우기에서 비롯된 긍정.
"나는?"
"..."
"나는 뭐였는데?"
애원하듯 나를 바라보는 눈을 외면했다. 손을 뿌리쳤다. 혼란스러워지기 직전, 나는 걸음을 옮겼다.
"여주야."
"너는."
다시 한 번 내 이름이 불렸을 때, 나는 뒤를 돌았다. 그리고 또렷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