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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악웅은 안절부절 못했다. 가주인 악비환의 눈이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불길은 고스란히 악웅에게 향했다.
"그 급한 성질을 고치라고 내가 몇 번이나 말했는가!"
악비환의 외침에 악웅이 찔끔 놀라 살짝 목을 움츠렸다. 원래 악비화은 이렇게 말로 일을 해결하는 법이 거의 없었다. 일단 먼저 손부터 나가고 보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보는 눈이 있어서 참고 있을 뿐이었다.
악웅은 새삼 미안한 감정과 고마운 감정을 섞어서 단형우를 쳐다봤다. 단형우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가만히 서 있었다.
"그래, 우리 세기의 친구라고?"
"그렇습니다."
단형우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존댓말이 튀어나왔다. 그 옆에 있는 형표는 정말로 놀랄 지경이었다.
지금까지 자신은 단형우가 존댓말을 쓸 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고 있었던 것이다. 왠지 서운함이 밀려왔다.
"세기와는 어떻게 알게 되었나?"
악비환의 물음은 당연했다. 악세기가 사라진 지 벌써 십 년이 넘었다. 처음 삼 년간은 악세기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손을 썼다. 하지만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악세기를 포기했을 무렵 악가장에 기연이 찾아왔다.
천기자의 무공을 얻은 것이다.
패도를 기반으로 하는, 이름조차 짓지 않은 도법이었는데 악비환은 그 도법의 이름을 파월도법(破月刀法)이라 짓고 악가장 무사들에게 전반부 세 초식을 전수했다.
악가장은 하루가 멀다 하고 강해졌고, 악비환도 아들 잃은 슬픔을, 무공수련을 통해 잊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아무리 잊으려 노력해도 악세기를 잊을 수 없었다. 워낙 뛰어났던 아인지라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지는 데 너무 긴 시간이 필요했다. 아니, 미련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십 년이 지났다. 이제 악세기를 잃은 슬픔에서 세가가 막 벗어나려 하고 있는 찰나에 단형우가 온 것이다. 그것도 악세기의 죽음이라는 비보를 들고.
"동료입니다."
형표의 대답에 악비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료, 동료라......"
악비환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의 아들은 대체 어디서 무엇을 했단 말인가.
"만일 세기가 살아 있다면 스물이 되었겠군. 자네도 같은가?"
"그렇습니다."
단형우의 대답에 악비환이 고개를 끄덕이며 단형우 옆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을 쳐다봤다. 형표야 그렇다고 해도 우문혜의 등장은 꽤 놀라웠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에 놀라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래, 우리 세가가 어떻게 죽었는가?"
악비환의 눈에서 진한 슬픔이 일어났다. 단형우는 그 슬픔을 몸으로 느끼며 잠시 뜸을 들였다.
슬픔이었다. 새로운 감정 하나를 몸에 새기며 단형우가 입을 열었다.
"제 목숨을 구하기 위해 죽었습니다."
단형우의 대답에 악비환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아들다운 죽음이로군. 그래, 그랬군. 그랬어."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은 악비환의 눈가에 살짝 비친 눈물을 볼 수 있었다. 분위기가 점점 숙연해졌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악비환이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단형우를 똑바로 쳐다봤다.
"그래, 내 아들의 친구라고 했지? 이름이 단형우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오늘부터 너도 내 아들이다. 앞으로 날 아버지라 불러라."
악비환의 갑작스런 말에 악웅이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렸다. 너무도 파격적인 말이었다. 악웅이 놀란 눈으로 단형우를 쳐다봤다.
단형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알겠습니다."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입을 크게 벌렸다. 사태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가늠을 할 수가 없었다.
"으하하핫! 과연 세기의 친구로다! 호탕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군!"
악비환의 웃음소리가 크게 방 안을 뒤흔들었다.
악웅은 그런 악비환의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 아들에게 못 다 한 것을 그 친구에게라도 하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자그마치 십 년이나 속으로 묵혀온 감정들이었다. 오늘은 그 감정들을 모조리 날려 버린 날이었다. 그것은 악웅도 마찬가지였다.
"자자, 십 년 만에 아들이 찾아왔는데 이러고 있을 수는 없지. 가세!"
악비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악웅은 악비환의 등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술이로군."
악웅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점점 짙어지더니 급기야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으하하핫! 이 얼마만이냐! 술이다! 술!"
그렇게 웃어젓히던 악웅은 결국 방 안에 남아 있는 세 사람을 쳐다보지도 않고 나가 버렸다.
형표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슬며시 일어났다. 그것은 우문혜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어쩌실 거죠?"
우문혜가 단형우에게 물었다.
"글쎄."
단형우의 머릿속은 혼란으로 뒤죽박죽이 되어 버렸다. 단형우의 혼란은 시간의 괴리로 인해 온 것이었다. 고작 십 년. 십 년이었다.
이것은 정말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죽기 전까지 매일 날짜를 헤아리던 동료 하나가 있었다. 그가 헤아린 날만해도 십 년이 넘었다.
비록 그 회색의 세상에서 하루를 가늠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 친구는 자신의 계산법을 확신했다.
그 친구가 죽고 다른 모든 친구들이 죽어 나갈 때까지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날짜를 헤아리던 친구는 꽤 일찍 죽은 셈이었다.
그런데도 고작 십 년이라니. 그럼 그 회색의 세상, 잿빛 지옥은 대체 무어란 말인가.
모든 친구들이 죽고 홀로 그 세상을 방황하며 각종 괴물들과 싸운 시간만 해도 친구들과 함께한 시간의 몇 배는 될 터였다.
단형우는 고개를 저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혼란만 가중되었다.
"자네 괜찮은 건가? 혹시 칼을 머리에 맞아서 이상이라도 생긴 건 아닌가?"
형표가 걱정스럽게 말하자 단형우가 그를 쳐다봤다.
형표의 눈빛에는 진실이 담겨 있었다. 오로지 단형우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 외에 다른 사심은 보이지 않는 순수한 눈빛이었다.
단형우가 눈을 돌려 우문혜를 쳐다봤다.
우문혜 역시 비슷한 표정으로 단형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단형우의 입가가 살짝 가늘어졌다. 조설연이 봤다면 웃었다고 좋아할 만한 표정이었다.
"어? 설마......"
우문혜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마, 그게 웃는 건 아니죠?"
우문혜의 말에 단형우가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우문혜와 형표가 급히 그 뒤를 따랐다.
방 밖에는 영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영사는 우문혜가 방에서 나오자마자 뒤에 따라붙었다. 그리고 우문혜의 표정을 보고 살짝 굳어졌다.
우문혜의 얼굴에 너무나 확연히 드러나는 감정의 선들을 볼 수 있었다. 십 년이나 우문혜를 모셔오면서 처음 겪는 일이다.
영사의 머리도 점점 혼란으로 빠져들었다.
악가장에서 술판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사천(四川) 성도(成都)에 있는 한 객잔에 있는 소녀는 한숨으로 마음을 달래고 있었다.
"하아, 왜 아직도 안 오는 거지?"
조설연은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조설연이 있는 방은 객잔 2층에 있었기 때문에 창밖으로 거리 풍경을 멀리까지 살필 수 있었다.
단형우와 형표가 사라진 후부터 조설연의 시선은 창 밖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두 사람이 사라지는 뒷모습을 볼 수 있었으니 다시 돌아오는 모습도 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단형우를 떠올린 조설연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지금 이런 사치스런 감정을 가져선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이 흐르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조설연은 손을 들어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단형우가 떠나기 전 자신의 머리에 손을 얹어주던 것이 생각났다.
당시 느꼈던 그 아득한 느낌이 아직도 생생했다. 마치 온 몸을 뭔가로 가득 채우는 듯했다. 그리고 그것이 아직도 몸에 남아 자신을 지켜주고 있는 것 같았다.
"후훗."
입에서 웃음이 살짝 새나왔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봤다.
"음?"
잠깐 눈을 뗐던 것뿐인데 거리 풍경이 상당히 달라져 있었다. 그 많던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보이는 사람들도 황급히 몸을 피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사람들이 사라진 거리에 일단의 무리가 나타났다. 푸르스름한 무복을 입고 허리에 검을 찬 사내들이 날카로운 눈빛을 사방에 뿌리며 우르르 몰려다니고 있었다.
모두 스무 명이었는데 뭔가를 찾는 듯 연방 두리번거렸다.
“저기다!"
그중 한 명이 소리치자 순식간에 스무 명의 사내들이 몸을 날렸다. 상당한 고수인 듯 앞으로 쏘아져 나가는 속도가 상상 이상이었다.
조설연은 그 광경을 보며 깜짝 놀랐다. 그들이 향하는 곳이 다름 아닌 그녀가 묵고 있는 객잔이었기 때문이었다.
콰지직!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객잔 문이 부서지는 소리였다.
조설연은 다급히 문을 박차고 나갔다. 혹시라도 1층에서 술이나 음식을 먹고 있을지 모르는 쟁자수들이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조설연이 방에서 나와 일단 난간으로 향했다. 1층을 폭넓게 살피는 데는 그곳이 가장 좋았다.
난간에서 살피니 역시나 종칠을 비롯한 몇몇 쟁자수들이 술을 마시다가 놀란 표정으로 객잔 입구를 쳐다보고 있었다.
"흥, 고작 여기인가?"
푸른 무복을 입은 사내 하나가 비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사내의 눈이 향한 곳은 쟁자수들의 바로 옆에 있는 세 중년인이었다.
세 중년인의 표정은 낭패가 가득했다. 하지만 눈빛만큼은 결국 죽지 않았다.
"네놈들도 결코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당가에서 가만있을 거 같으냐!"
중년인의 말에 청의(靑衣) 사내가 더욱 짙은 비웃음을 흘렸다.
"흥, 당가? 우리가 당가를 무서워할 것 같은가? 지금 당가의 상황이 어떤지 아직 소문을 듣지 못 했나보지?"
중년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역시 최근 당가의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이유가 바로 눈앞에 있는 청의 무사들, 즉 흑사방 때문이라는 것 또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우리 대천문(大天門)을 이리도 핍박하는 이유가 대체 뭔가!"
중년인의 외침에는 울분이 가득했다. 그들의 실력으로는 흑사방 무사들을 도저히 막을 수 없었다.
흑사방 무사들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아무리 방의 하급 무사라 할지라도 대천문 일대 제자를 가볍게 압도할 만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알며서 왜 묻는 거지? 방주님의 말씀을 무시했지 않나."
"우, 우리가 언제......"
서걱!
중년인은 말을 잇지 못했다. 어느새 다가온 청의 무사 하나가 목을 날려 버린 것이다.
사방으로 피분수가 퍼져 나갔고, 객잔 안은 짙은 혈항으로 가득 찼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쟁자수들이 흠칫 놀라 한 발 물러섰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단형우의 살육을 몇 번이나 지켜보고 그 뒤처리를 해 온 쟁자수들답게 표정의 변화는 그리 크지 않았다.
그리고 그 틈을 타서 조설연이 재빨리 쟁자수들 곁으로 다가섰다.
"어서 안으로 들어가세요."
조설연의 말에 쟁자수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자리에 있어 봐야 득 될 것은 하나도 없었다.
쟁자수들이 조심스럽게 자리를 이동했다. 그리고 조설연 역시 그 뒤를 따르려고 몸을 돌렸다. 그 순간 청의 무사 하나가 조설연을 발견했다.
"호오, 이런 보잘것없는 객잔에 왠 꽃이지?"
청의 무사는 느끼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조설연을 향해 걸어갔다. 조설연은 순간 몸이 살짝 굳는 것 같았지만 이내 입술을 깨물었다.
사내를 보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2층으로 향하려 하는데 사내의 빠른 몸놀림이 어느새 조설연의 앞을 가로막았다. 쟁자수들은 벌써 2층으로 올라갔고, 조설연만 1층에 남아 있었다.
앞이 막힌 조설연이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비켜주세요."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잘 생각해 봐. 잘하면 팔자를 고칠 수도 있으니까."
사내가 능글맞은 표정으로 조설연의 얼굴과 몸을 훑어봤다. 사내는 스스로의 눈을 믿었다. 아직 피어나지는 않았지만 장차 천하를 뒤흔들 우물(尤物)이 될 게 분명해 보였다.
"상일! 뭐 하고 있나? 다 끝났어!"
뒤에서 동료가 부르는 소리에 상일이라 불린 사내가 슬쩍 고개를 돌려 동료들을 쳐다봤다. 그리고 덕분에 사내들 역시 조설연을 발견하고 말았다.
"제길, 어쩔 수 없군."
상일이 나직하게 투덜거렸다. 상일의 염려대로 동료들이 몰려들며 조설연을 둘러쌌다.
"호오, 이거 꽤 괜찮은데?"
청의 무사 스물에 둘러싸인 조설연은 살짝 몸을 떨었다.
도저히 피해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조설연의 눈가에 살짝 눈물이 어렸다. 단형우가 뇌리에 떠올랐지만 지금 그는 조설연 옆에 없었다.
사내들의 눈에 음심(淫心)이 어리기 시작했다.
만일 조설연의 행색이 조금만 더 그럴듯했다면 이렇게 함부로 나오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조설연의 행색은 그리 좋지 못했다. 비록 깨끗한 옷을 입고 있긴 했지만 고급스럽거나 좋은 옷은 아니었다.
오랜 도망에 이어 표행을 해 왔고, 또 앞으로 긴 여정이 기다리고 있는데 옷 따위에 함부로 돈을 쓸 수는 없었다.
청의 무사들은 흑사방 청월단(靑月團)이었다.
청월단은 비록 흑사방에서 가장 하급에 속하는 무사단이었지만 흑사방이 워낙 사천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기 때문에 그 위세가 막강했다.
사내들은 조설연의 겉모습만을 보고 자신들 정도라면 충분히 건드릴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최근 흑사방 사람들이 사천에서 일삼고 있는 패악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지금 벌어지는 일 정도는 상당히 가벼운 편에 속했다.
객잔 안에는 세 구의 시신이 바닥에 뒹굴고 있었고, 피와 음심에 취한 사내들이 충혈 된 눈으로 조설연에게 한 발 한 발 다가가고 있었다.
조설연은 용기를 내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이대로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마음이 일어나자 몸이 움직였다. 그리고 몸이 움직이자 내력이 일어났다.
조설연의 발끝이 바닥을 찍었고, 순식간에 청월단 무사들 틈을 빠져 나갔다.
"헛!"
청월단 무사들은 깜짝 놀랐다. 그저 일개 힘없는 소녀라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녀는 무공을 익히고 있었던 것이다. 조금만 더 신중했으면 충분히 알 수 있었는데 너무 마음을 놓고 있었다.
"잡아!"
누군가가 소리쳤다. 이대로 놓칠 수는 없었다. 자칫 일이 커질 수도 있었다.
물론 일이 커진다고 해서 사천 지방에서 자신들이 피해를 입을 리 없겠지만 그래도 쉽게 처리할 수 있는 일을 굳이 크게 키울 필요는 없었다.
스무 명의 사내들이 거리로 뛰쳐나갔다.
거리에 들어차려고 했던 활기가 다시 가라앉아 버렸다.
조설연은 힘껏 달리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 자신은 분명 실력 이상의 힘을 내고 있었다. 그저 마음을 일으킨 것뿐이었는데 어느새 화살처럼 몸이 날아갔다.
저쪽이다!"
뒤에서 사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설연은 더욱 힘을 내서 달렸다. 하지만 곧 파탄이 나고 말았다. 다시 속도가 원래 실력으로 돌아온 것이다.
청의 무사들이 어느새 조설연 주변을 둘러쌌다.
조설연은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긴장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이대로 그냥 당할 수는 없었다. 조설연이 작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악가장의 술판은 두 시진이나 계속되었다. 악비환과 악웅은 마치 지금 아니면 절대 술을 못 먹는다는 듯 술을 동이 째로 입에 들이 부었다.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형표나 우문혜, 그리고 영사는 질린 눈을 감추지 못했다. 이렇게 술을 무식하게 먹는 사람들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놀라게 한 사람이 더 있었으니 바로 단형우였다.
단형우는 놀랍게도 악비환이나 악웅과 거의 비슷한 양의 술을 마셨다. 그렇게 마시고도 얼굴 색 하나 변하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놀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정말 질리도록 마시는군요."
우문혜의 말에 영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두 사람의 말에 옆에서 조용히 술잔을 연방 들이키던 악가장 무사 하나가 웃으며 변명했다.
"최근 금주령(禁酒令)이 내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지막으로 술을 마셨던 것이 두 달이 넘었으니 이해해 주십시오."
무사의 말에 형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사고라도 있었습니까?"
"사고라기보다는 싸움이 있지요. 사실 이렇게 괜찮은 분위기는 정말 오랜만입니다."
형표는 더욱 궁금해졌다.
"싸움이란 말입니까? 악가장은 꽤 대단한 가문이라고 알고 있는데......"
악가장 만큼 강한 가문이 싸움으로 긴장할 정도라면 상대가 보통이 아니라는 뜻이다. 사천에서 그 정도로 강한 곳은 구파(九派)에 속하는 청성파, 아미파 정도였다.
"아직 제대로 된 충돌은 없었지만 아마 조만간 흑사방과 크게 한 판 붙을 겁니다. 흑사방이 일방적으로 악가장을 흡수하겠다고 했으니까요."
말을 하는 무사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흑사방의 도발은 악가장 사람들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사내는 말을 하고 나니 화가 치미는지 연방 술잔을 들이켰다.
형표는 그 말을 들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아는 흑사방은 이렇게까지 강한 문파가 아니었다.
비록 최근 상당한 성장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절대 아니었다.
더군다나 흑사방은 지금 당가와도 대립 중 아닌가.
형표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우문혜가 형표에게 살짝 다가왔다.
"왜 그러세요? 표사님?"
우문혜의 은근한 목소리에 형표가 화들짝 놀랐다. 형표는 놀란 눈으로 우문혜를 쳐다봤다. 술을 마셔서 살짝 불그레해진 볼이 더욱 매력적이었다.
"뭐, 뭐가 말이오?"
형표가 말을 더듬자 우문혜가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더욱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형표가 언제 이런 도발을 받아봤겠는가. 그저 당황한 얼굴로 뒤로 물러나는 것 외에는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
"뭐가 그리 이상하시냐고요?"
우문혜의 질문에 형표가 잠시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그리고 길게 한숨을 내쉰 후, 다시 눈을 떴다.
"내가 이상하게 생각한 것은 흑사방 때문이오. 소저."
우문혜는 형표의 대답을 들으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 정도로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은 우문혜도 몇 겪어보지 못했다.
게다가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나이가 많았다. 형표 정도되는 나이에서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남표국......이라고 했죠?"
우문혜의 뜬금없는 말에 형표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문혜는 그런 형표를 보며 빙긋 웃었다. 그 미소가 너무나 화려하게 피어나 형표의 숨이 다시 한 번 멎을 수밖에 없었다.
"크, 크흠, 큼. 아, 아무튼 흑사방이 너무 일을 크게 벌이는 것 같소. 당가와 악가장을 동시에 상대한다니 지나친 무리수요."
형표가 당황하며 재빨리 말을 쏟아내자 우문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흐응, 그건 그렇죠. 그렇지? 영사?"
우문혜의 말에 영사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그렇죠. 그런데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흑사방은 지금 사천 쪽의 다른 중소 문파들마저 모두 건드리고 있습니다."
"그게 정말이오?"
형표가 놀란 표정을 짓자 영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벌서 꽤 많은 문파가 무너졌고, 그와 비슷한 수의 문파를 흡수했소. 기세가 너무 대단해서 웬만한 작은 문파는 손도 못 쓸 지경이라고 했소."
영사의 설명에 형표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뒤에 뭔가가 있는 게 분명하오."
형표의 말에 영사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하지만 증거는 없소."
형표와 영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우문혜는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형표를 쳐다봤다. 이건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이 갑자기 튀어나온 격이었다.
지금까지 일개 표사 정도로 생각했던 사람인데 지금 보니 대단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우문혜의 묘한 눈길을 느낀 형표가 급히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점점 잔치가 무르익어 갔다.
단형우는 익숙지 않은 자세로 앉아 연방 술을 들이켰다. 단형우 역시 악비환, 악웅과 마찬가지로 동이를 잔 삼아 술을 마셨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전혀 취하지 않았다. 다만 술이라는 새로운 맛을 경험하고 있을 뿐이었다.
크하하핫! 자네 정말 대단하군!"
한껏 취기가 오른 악웅이 단형우를 향해 엄지를 치켜세우며 소리쳤다. 단형우의 입가가 살짝 가늘어졌다. 단형우의 기억 깊은 곳에서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약속한 거지?>
기억들이 떠오르며 자신이 왜 친구들의 집을 찾으려 했는지 생각났다. 악세기 때문이었다.
단형우가 살짝 눈을 감았다. 기억 깊은 곳에 스며 있는 악세기와의 추억으로 슬며시 잠겨들었다.
끝도 없이 펼쳐진 회색 하늘과 잿빛 땅, 그리고 그 위에서 새까맣게 몰려드는 별의 별 모양의 마수들.
악세기는 그것을 보며 부리부리한 눈이 반달이 될 정도로 깊이 웃었다.
"이거 아무래도 불안한데?"
악세기의 말에 단형우가 무심히 중얼거렸다.
"걱정하지 마라. 별것 아니니까."
단형우가 보기에는 그저 수만 많았지 진짜 강한 마수는 하나도 없었다. 그런 마수들에게 악세기나 자신이 당할 리가 없었다.
"나도 알아. 그냥 불안해서 그래."
악세기가 중얼거리며 미소를 거둔 얼굴로 몰려오는 마수들을 잠시 쳐다봤다. 악세기의 눈빛이 아련하게 물들었다.
"반드시 여기서 나가자. 이 지겨운 회색 세상에서 나가서 화려한 세상에 몸을 담는 거야. 그리고 그동안 못 해 봤던 것들을 모조리 다 해 보는 거야. 어때? 멋지지?"
단형우는 악세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따라 악세기는 지나칠 정도로 말이 많았다.
"그렇게 하자."
"약속한 거지?"
악세기의 다짐에 단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악세기의 표정이 환해졌다.
"마음이 놓이네. 만일 나가게 되면 꼭 우리 집에 들러줘. 그리고 아버지께 내 얘기를 전해 줘. 죄송하다고. 그때까지 살아계실지 모르겠지만."
악세기의 말에 단형우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직접 해라."
"하하하! 당연하지. 직접 할 거야."
악세기는 크게 웃다가 마물들을 보며 검을 뽑았다. 그리고 단형우를 쳐다보며 환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것이 단형우가 본 악세기의 마지막 미소였다.
당시 마수들을 뒤에서 조정하던 강력한 괴물들 몇 때문에 단형우는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고, 악세기는 자신의 목숨을 던져 단형우를 구해냈다.
덕분에 단형우는 지금까지 살아 있을 수 있었다. 그 오랜시간 동안.
기억 깊은 곳에서 다시 떠오른 단형우가 감았던 눈을 떴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술을 퍼붓고 있는 악비환을 쳐다봤다.
악비환은 갑자기 단형우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술동이를 내려놓았다.
"왜 그러느냐."
악비환의 부드러운 말에 단형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단형우의 말에 악비환의 눈이 더욱 커졌다. 그리고 이내 그 커다란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크흐흐흑!"
악비환의 눈물을 주변 분위기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친구의 마지막 말을 전해 준 단형우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갑작스런 단형우의 말에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라 그를 쳐다봤다.
"무슨 일이냐?"
악웅이 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급히 물었다. 단형우는 그 모습을 보며 간단히 대답했다.
"급한 일입니다."
단형우의 대답에 어느새 눈물을 그치고 원래의 얼굴로 돌아온 악비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럼 나도 도와야지. 아들의 급한 일을 나 몰라라 하는 부모는 없는 법 아니냐."
악비환의 말에 단형우가 그를 쳐다봤다. 악비환은 어느새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의 눈길에 단형우는 갑자기 가슴 한구석에 뭔가가 슬며시 들어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지나치게 생소한 감정에 당황한 단형우가 급히 고개를 저었다.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술자리가 끝나기 전에 돌아오겠습니다."
단형우의 말에 악비환이 아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어쨌든 꼭 돌아와야 한다."
"예. 그럼."
말을 마친 단형우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바로 앞에 있던 악비환마저 단형우가 갑자기 어떻게 사라졌는지 볼 수 없을 정도였다. 모든 사람들이 방금 전 단혀우가 있던 자리를 멍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조설연은 조심스럽게 발을 움직였다. 무기도 가지고 있지 않았으니 저들을 막을 수 있을 리 만무했지만 그대로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 볼 생각이었다.
쉬익!
조설연의 손이 앞에 있던 사내의 목을 향해 날아갔다. 청의 사내는 그 손을 간단하게 낚아챘다. 아니, 낚아채려고 했다.
퍼벙!
"헉!"
사내는 놀란 신음을 삼키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손목을 이리저리 돌렸다. 조설연의 손목을 낚아채는 순간 강력한 반탄력에 의해 손이 튕겨져 나갔다.
조설연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여기까지 도망칠 수 있었던 그 능력과 비슷한 것 같았지만 정확히 무슨 일인지 파악할 수는 없었다.
청의 무사는 화난 표정으로 몸을 날렸다. 자존심이 상한 것이다. 어차피 약간의 상처야 상관없었다. 그 짓만 할 수 있으면 그만이었다.
쉬익!
퍼버벙!
사내의 손이 조설연의 가슴을 가격했다. 보통 무인들이 여인을 향해서는 절대 쓰지 않는 치졸한 수였지만 사내는 그런 것쯤은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사내는 조설연이 바닥에 누웠을 거라 확신했다. 하지만 드러난 광경은 전혀 달랐다.
비록 몇 발 뒤로 물러서긴 했지만 조설연은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게 서 있었다.
"과연, 한 수가 있긴 있단 말이지."
챙!
사내가 검을 뽑았다. 이대로는 분이 풀리지 않았다. 미색을 해칠 생각은 없었으니 다리 쪽을 찌를 생각이었다.
"흠집 나지 않게 조심해!"
사내의 동료들이 음흉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청의 무사 역시 비슷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하지 마. 그쪽 방면에는 천하제일이니까."
사내의 손에서 검이 이리저리 춤추다가 눈 깜짝할 사이에 조설연 앞으로 쇄도했다.
조설연은 황급히 몸을 피하려 했지만 도저히 검을 피해낼 수 없었다. 사내의 검이 날카로운 기세를 내뿜으며 조설연의 가슴 얼림을 지나 허벅지로 미끄러졌다.
서걱!
가슴 쪽 옷가지가 잘려 나가며 옷이 나풀거렸다. 그리고 허벅지에 검이 빨려들듯 꽂혔다.
쩡!
뭔가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조설연이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청의 무사 역시 뒤로 물러섰다.
청의 무사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설마...... 호신강기?"
마치 단단한 철벽을 찌르는 듯했다. 게다가 손목까지 저릿저릿하게 만드는 반탄지기(反彈之氣) 때문에 뒤로 세 발이나 물러나야 했다.
조설연은 조설연대로 놀랐다. 꼼짝없이 허버지를 뚫렸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은 멀쩡하고 상대만 타격을 입은 듯하나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내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몸속 가득히 들어 있던 뭔가가 빠져 나간 것이다. 지금까지 자신을 지켜 주던 것은 바로 단형우가 자신에게 넣어준 그 무언가였다.
"아......!"
조설연은 그제야 단형우가 왜 자신의 머리에 손을 얹었는지 깨달았다.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자신을 지켜 준 것이다. 하지만 이젠 그나마도 끝났다. 방금 전 한 번의 호신강기로 모든 힘이 소진되었다.
청의 무사가 조심스럽게 조설연에게 다가갔다.
섣불리 혼자서 움직이지 않았다. 방금 전의 그것이 호신강기일지도 모르기 때문에 조심해야만 했다. 잘못하면 괜한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청의 무사들이 하나둘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 모두 검을 뽑았고, 눈에서 음심이 뒤섞인 살기를 뿜어냈다.
조설연은 초탈한 표정으로 손을 내렸다. 이제 더 이상 희망이 없었다. 차라리 자결을 하는 것이 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보고 싶어......'
죽음을 예감한 조설연의 뇌리를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단형우의 얼굴이었다. 죽기 전에 그를 보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조설연이 앞에 있는 사내에게 뛰어들었다.
그는 조설연이 갑자기 움직이자 최선을 다해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강한 초식으로 검을 휘둘렀다. 호신강기를 본 마당이니 힘을 아낄 수 없었다.
콰콰콰콰!
강렬한 검기가 폭풍처럼 몰아쳤다. 그리고 그 검기들이 조설연의 온몸으로 쏟아졌다.
조설연은 자신을 휘감으며 화려하게 터져 나가는 검기들을 바라보며 사내의 검으로 뛰어들었다.
턱!
막 검 끝에 배가 뚫리려는 순간, 누군가 조설연의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어느새 사방을 조여오던 검기들은 흔적도 없이 공중에 흩어져 버렸다. 조설연은 떨리는 눈으로 고개를 돌려 손의 주인을 쳐다봤다.
"무슨 짓이지?"
단형우였다. 조설연이 보기에 화가 난 듯했다. 무표정했지만 입 꼬리의 모양이 살짝 쳐진 걸로 봐서 분명히 화가 나 있었다.
"아......! 오, 오라버니!"
단형우는 조설연의 말을 들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단형우의 눈에서 무시무시한 광망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청월단 무사들은 단형우의 눈빛에 걸려든 순간부터 전혀 움직일 수 없었다. 그들을 지배하는 것은 단 하나, 공포였다.
"넌 뭐야!"
무사 하나가 있는 용기와 기력을 모두 쥐어 짜 소리쳤다. 그러자 몸을 옭아매던 압력이 조금 느슨해졌다. 사내의 용기가 조금 더 솟아났다.
"감히 우리가 누군 줄 알고! 흑사방이 무섭지도 않느냐!"
사내의 외침은 동료들에게도 용기를 주었다. 그렇다. 자신들은 장차 사천을 지배할 흑사방의 무사들이었다.
"흐아아압!"
"하아압!"
연방 거친 기합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사내들의 몸 주위로 기(氣)가 휘몰아쳤다. 비록 완전히 속박에서 빠져 나올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조금 나아졌다.
사내들은 무서운 눈으로 단형우를 노려봤다. 단형우는 무심히 그 광경을 쳐다보다가 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간단하게 검을 좌(左)에서 우(右)로 그었다.
콰드드득!
청월단 무사들과 조설연은 놀란 눈을 감추지 못했다. 단형우의 검이 지나간 궤적을 따라 사방으로 당이 파헤쳐지며 수십 개의 지룡(地龍)들이 생겨났다.
마치 땅 속을 뭔가가 이동하는 듯 땅이 마구 파헤쳐지며 청월단 무사를 향해 뻗어 나갔다. 그것이 무려 스무 개였다.
단 한 번의 손짓으로 땅을 이리저리 헤집고 꿈틀거리는 기의 덩어리 스물을 만들어 낸 것이다.
"으아아아!"
청월단 무사들은 본능적으로 공포를 느꼈다. 사방으로 몸을 날리며 흩어져 도망가는 그들의 뒤로 땅에 숨은 지룡이 빠른 속도로 쫓아갔다.
애초에 도망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단형우가 만들어 낸 지룡들은 각자의 속도에 맞춰 빠른 자는 빠르게, 느린 자는 느리게 쫓아갔다. 그리고 결국 그들의 발아래에서 터져 나갔다.
콰과과광!
마치 화산이 폭발하는 듯 흙과 돌멩이들이 고중으로 치솟아 올랐다. 흙 알갱이 하나하나, 돌멩이 하나하나에 막대한 기운이 잠들어 있었다.
퍼버버버벅!
그리고 그 기운들은 청월단 무사들은 흔적도 없이 지워버렸다.
조설연은 넋을 잃고 그 잔인한 광경을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그때는 하나였지만 이번에는 스물이라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그리고 그때는 이것을 이용해 무덤을 만들었지만 이번에는 살육을 자행했다는 점이 달랐다.
정말로 무시무시한 무공이었다. 이것이 이리도 대단한 무공이라는 생각은 전혀 해본 적이 없었다.
"무, 무서운 무공......"
조설연이 중얼거리자 단형우가 그녀의 말을 막았다.
"지룡(地龍)이다. 삼재검법의 두 번째 초식이지."
단형우가 그렇게 말을 끊은 후, 조설연을 쳐다봤다.
조설연은 단형우와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다시는 그러지 마라."
단형우의 말에 조설연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연방 움직이는 그녀의 눈에서 슬며시 눈물이 흘렀다.
누군가 자신을 생각하고 지켜 준다는 기쁨이 만들어 낸 눈물이었다. 그리고 단형우를 보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이 이루어져서 흘리는 눈물이었다.
악가장의 술잔치는 슬슬 열기가 식어갔다.
악비환과 악웅이 더 이상 술을 마시지 않은 것도 있고, 단형우가 사라질 무렵 분위기가 가라앉았기 때문에 거의 파장 분위기였다.
다만 단형우가 술자리가 끝나기 전에 오겠다고 했으니 그것을 기다리기 위해 자리를 정리하지 않고 있을 뿐이었다.
악비환은 눈앞에 놓인 술동이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십년이나 지났지만 아직까지 어린 아들의 모습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젠 지워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을 아들이 원하니 그렇게 해 줄 생각이었다.
악비환이 말없이 술동이를 집어 들었다.
벌컥벌컥.
술동이에 가득 담긴 술이 악비환의 목을 타고 시원하게 넘어갔다.
"크아하! 좋다!"
빈 술동이를 내려놓은 악비환의 표정은 더없이 개운해 보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악웅도 악비환을 따라 술동이를 들고 술을 목에 흘려 넣었다.
악가장 사람들이 모두 악비환이나 악웅처럼 단순하고 호탕한 것만은 아니었다.
만일 그랬다면 이렇게 규모가 큰 장원을 이끌어 나갈 수 없었을 것이오, 이만한 발전을 이룰 수도 없었을 것이다.
연백. 그는 악가장의 살림을 거의 도맡다시피 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악가장 고수들에 비하면 조금 손색이 있긴 하지만 지닌 무공도 꽤 대단했고, 무엇보다 계산이 빠르고 머리가 좋아 악가장 같은 큰 장원을 이끌어 나갈 만한 역량이 있는 사람이었다.
연백은 악비환 옆에서 살짝 근심 어린 표정을 짓고 앉아 있었다.
거의 술도 마시지 않고 있다가 악비환이 마지막 술동이를 비우자 결국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가주님."
"왜 그러는가? 또 뭔가 걱정이 있는 겐가?"
악비환이 농을 섞어 말했지만 사실 악비환은 연백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연백 역시 악비환의 마음을 잘 이해했다.
"사실 걱정이 됩니다. 흑사방은 그 어떤 파렴치한 짓도 할 수 있는 곳입니다. 이렇게 무방비 상태로 사람을 받아들이시는 건......"
"자네의 걱정이 뭔지는 다 알고 있네. 하지만 내 아들의 친구일세. 그리고 이젠 내 아들이나 다름없네. 아니, 내 아들일세. 그러니 걱정 하지 말게나."
악비환의 말에 연백의 표정이 더욱 심각해졌다.
"그래서 문제입니다. 만일 이 일 자체가 흑사방이 만든 음모라면......"
사실 연백의 걱정은 너무나 당연했다. 그리고 악비환과 악웅 역시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십 년 전 사라져 악비환의 가슴에 커다란 생채기를 남긴 악세기의 친구라는 것은 이성으로 알고 있다고 해서 거부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악비환의 아들이었다. 그것도 유일한. 악비환은 슬하에 자식이 없었다. 악세기가 유일한 자신인 것이다.
연백의 걱정은 바로 그것이었다.
흑사방이 그런 틈을 그냥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어떤 방식으로든 찔러올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이번 악세기의 친구 역시 흑사방이 만들어 낸 함정일 가능성이 높았다.
연백은 우문혜와 형표를 쳐다봤다. 한 명은 서시도 울고 갈 경국지색(傾國之色)이고, 다른 한 사람은 평범한 표사, 어딘가 어울리지 않았다.
하나를 의심하게 되니 모든 것이 의심스러웠다.
우문혜 옆에 있는 영사조차 의심스러웠다. 영사의 실력은 그야말로 대단해서 거의 악웅과도 맞상대를 할 수 있을 듯했다.
"끄응, 골치 아프군."
정말로 골치 아팠다. 자신이 어떻게 하기 어려우니 더욱 그랬다. 그래도 뭔가 수를 내지 않으면 곤란했다. 현재 악가장의 상황은 그리 낙관적이지 않았다.
당가에서 뭔가 힘을 발휘하지 않는 한, 악가장 역시 괴멸될 것이 분명했다. 물론 악가장이 그렇게 쉽게 당하고 있지만은 않겠지만.
'우리의 힘도 절대 무시하지 못하지. 방심이라도 하지 않는 한, 흑사방도 결코 쉽게 넘보지 못하지. 암.'
연백은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흠칫 몸을 떨었다.
'어쩌면......!'
악가장이 가장 방심하고 있을 때가 언제인가.
바로 지금이었다.
두 달간의 금주령을 풀고 잠깐이나마 환영의 자리를 만들려고 하는 지금이었다.
원래는 절대로 해선 안 되는 일이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연백도 찬성을 했다. 너무 조이기만 하면 삐걱댈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이렇게 공교롭게 흑사방이 일을 벌이지는 않을거라는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만일 단형우가 흑사방의 간세라면? 그리고 지금 사라진 것이 흑사방에 적절한 시기를 알리기 위함이라면?
연백은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이건 위험했다.
그리고 그런 연백의 걱정이 사실이 되어 나타났다.
"가, 가주님! 큰일입니다."
악가장 주변을 지키고 있던 무사 하나가 황급히 달려오며 소리쳤다.
연백은 그것을 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뿔싸! 설마 흑사방인가!"
연백의 외침에 장내가 싸늘해졌다. 그리고 달려온 무사가 다급히 소리쳤다.
"맞습니다! 흑사방에서 작정하고 쳐들어왔습니다. 흑월단(黑月團)과 백월단(白月團)을 모조리 끌고 왔습니다!"
악비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분노로 몸을 떨었다.
"이놈들 하필 이럴 때!"
악비환과 악웅의 몸에서 싸한 주향이 퍼져나갔다. 내력을 이용해 주독(酒毒)을 배출해 버린 것이다.
흑월단과 백월단은 흑사방에서도 정예 중의 정예였다. 그것이 악가장에까지 알려질 정도로.
술잔치를 벌이고 있던 악가장 무사들이 분분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취한 사람답지 않게 눈을 부라리며 각자 무기를 꺼내 들었다.
"오늘 끝장을 보자!"
악가장 무사들이 도를 하늘 높이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하아!"
강렬한 기세가 하늘 높이 뻗어 올라갔다.
무사들의 기세가 극에 이르렀을 때, 악비환은 슬쩍 미소지으며 소리치려 했다. 이런 기세를 이용하면 훨씬 더 강한 기를 낼 수 있었다.
비록 흑사방의 흑월단과 백월단이 대단하다고 하지만, 그리고 연백의 분석에 의하면 악가장의 온 힘을 다해도 이기기 힘든 상대지만, 이 정도라면 해 볼만 했다.
악비환이 막 소리치려는 순간 누군가가 악비환 옆에서 말을 걸었다.
"무슨 일입니까?"
악비환은 숨을 크게 들이마신 상태로 옆을 돌아봤다.
"컥, 쿨럭! 쿨럭!"
악비환은 너무 놀라 숨을 내뱉으며 기침을 했다. 악비환의 등에 손바닥이 와 닿았다.
그리고 짜릿함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마치 몸속에 있던 노폐물과 찌꺼기들을 모조리 밖으로 배출시킨 듯한 상쾌함이 밀려왔다.
"대, 대체 언제 왔느냐?"
"방금 왔습니다."
악비환은 단형우의 말에 혀를 내둘렀다.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단형우가 언제 왔는지, 어디로 어떻게 왔는지조차 몰랐다 .그런데 바로 옆에 있었다니 놀랄 만한 일이었다.
"아, 그렇지.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아무래도 얘기는 잠시 후에 해야 될 것 같구나."
악비환의 말에 단형우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연백은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제발 사실대로 말해 주시오. 흑사방과 관계가 있소?"
연백의 표정에는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뭔가를 숨기거나 할 시기는 지나 버렸다. 잔심을 이용해 상대의 마음을 알아낼 수밖에 없었다.
연백의 진심어린 말과 표정에 단형우가 잠시 그를 쳐다봤다. 그리고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대답은 옆에 있던 사람에게 나왔다.
아까 그 사람들도 흑사방이라고 했어요."
사람들의 시선이 단형우 옆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조설연이 서 있었다.
"아가씨!"
형표가 깜짝 놀라 외쳤다. 조설연은 분명히 성도(成都)에 있는 객잔에 있었다. 헌데 언제 이리로 온 것인가.
"끄응......"
연백은 한 발 물러섰다. 자신의 능력으로는 더 이상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제대로 대답해 주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연백의 생각으로는 흑사방과 관계가 있는 것이 분명한 듯했다.
"자자,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이러는 순간에도 그 까맣고 하얀 놈들한테 우리 애들이 당하고 있을 테니까 빨리 가야지."
악비환이 소리치자, 악가장 무사들이 다시 기세를 끌어올렸다. 동료의 죽음을 나 몰라라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때 또 다른 악가장 무사 하나가 황급히 달려오며 소리쳤다.
"가, 가주님!"
"무슨 일이냐! 설마 벌써 그놈들이 여기까지 온 것은 아니겠지!"
악비환의 말에, 달려온 무사가 약간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 그게...... 흑사방 놈들이 전멸했습니다."
"뭐?"
"전멸?"
"지금 나랑 장난 하자는 거냐?"
악웅이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하지만 무사는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저, 정말입니다. 갑자기 나타난 악귀 같은 사람이...... 허어억! 아, 악귀다!"
말을 하던 무사가 갑자기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나다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 무사는 손가락을 하나 들어 악비환이 있는 쪽을 가리키며 덜덜덜 떨며 소리쳤다.
"아, 악귀입니다. 그 악귀!"
악비환의 얼굴이 있는 대로 일그러졌다. 손님들과 아들이 있는 자리에서 이 무슨 개망신이란 말인가.
"내가 악귀라고? 그래, 과연 무엇을 악귀라고 하는지 내 똑똑히 가르쳐 주마."
악비환이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도를 도집 째 꺼내들었다. 악비환이 주로 쓰는 훌륭한 몽둥이였다.
"으, 으악! 가주님! 그, 그게 아니라!"
"이제 가주로 보이나 보지? 악귀가 아니라?"
퍼버버벅!
악비환의 손에서 도가 경쾌하게 움직였다. 무사는 그것을 고스란히 맞으며 최대한 생존의지를 담아 소리쳤다.
"크악! 커억! 가, 가주님! 으악! 가주님이 아니라! 컥! 가주님 뒤에! 키에엑!"
필생의 의지가 담긴 무사의 외침에 악비환의 손이 멎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뒤를 쳐다봤다. 그곳에 있는 사람은 단 하나였다.
악비환의 커다란 눈에 단형우의 모습이 들어왔다.
단형우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악비환의 눈이 인자함이 가득 담긴 미소를 그려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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