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장. 고대릉(高大陵) 질풍노도(疾風努濤)의 길에 들다.
하나의 방 안.
커다란 다탁(茶卓)을 가운데 두고 세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 중 하나는 모전동이고, 나머지 둘은 사오십 대로 보이는 장년인들이었다.
그들 두 장년인들이야 말로 바로 혈방의 방주 예대(芮岱)와 부방주 단후(旦珝)이다.
혈방의 최고 수뇌인 그들은 지금 한 가지 문제에 대해 자못 심각한 논의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일이 생각외의 방향으로 흘러 버렸군. 음! 그런데 강호오공자와 일가인의 출현은 갑작스러운 것이었다고 치고, 일단 일이 그런 형편에까지 이르렀으면 형편에 맞도록 적당한 마무리를 하고 물러날 것이지, 애매하게 여지를 남겨 놓았다는 것은 아무래도 자네답지 못한 처사였어."
모전동의 경과보고를 듣고 나서 예대는 사못 마뜩치 않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단후는 어느새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제 생각에는 모 당주의 조치가 오히려 약했던 것 같습니다."
"무슨 소리야? 그럼 감히 무황성을 상대로 칼이라도 한 번 빼어 보겠다는 거야?"
단후가 성질을 못 이기겠던지 곰과도 같이 우람한 어깨를 부르르 떨며 주먹으로 다탁을 후려쳤다.
쾅!
"아니, 형님! 수하들이 둘이나 죽었다지 않습니까? 그런데 상대가 어떤 놈들이건 그걸 가리게 됐습니까, 지금?"
예대가 버럭 하고 고함을 내지르려다 말고 잔뜩 이마를 찌푸린 채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휴우~!"
평소 깍듯이 방주에 대한 예의를 지키려 노력하는 단후가 '형님' 어쩌고 하는 소리를 하는 것은 벌써 그가 한도를 넘어 흥분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사실 그와 단후, 둘로 시작한 혈방이 그나마 오늘날과 같은 작은 번영이라도 이루게 된 데는.
단후의 그런 불같은 성질과 한 번 불붙으면 앞뒤가릴 줄 모르는 악착같은 근성이 크게 기여를 했다는 것은 결코 부인할 수 없었다.
"단 아우는 조금만 진정을 해. 모 당주에게도 무슨 생각이 있는 것 같으니까, 우선은 그의 얘기를 먼저 들어보자고."
그러나 단후는 마치 노려보듯 눈을 부릅뜨며 계속하여 말을 쏟아 내었다.
"우리 혈방이 기껏 십 몇 년의 짧은 역사와 작은 규모에도 불구하고, 이 곳 대도(大都) 북경에서 기존부터 자리를 잡고 있던 다른 놈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어깨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상대가 그 누구이건 당한만큼은 반드시 갚아 주고야 마는 악착같은 근성 덕분이 아니었습니까? 그런 근성을 철칙으로 지켜 온 우리 혈방이, 상대가 아무리 무황성이라고 하더라도 찍소리 한 번 못해보고 그냥 물러선다면,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이 북경 바닥에서 지금까지와 같이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거리를 다닐 수 있겠습니까? 이 바닥에서 한 번 약한 모습을 보이면, 그걸로 그냥 끝이라는 것은 형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수하들 둘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먼저 시비를 건 것도 아니고, 우리 구역에서 벌어진 시비에 놈들이 함부로 개입한 것인데, 무황성이건 나발이건 간에 그냥 물러설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깟 강호오공자라는 애송이 놈들, 그냥 으슥한 곳에 다 몰아넣고 머릿수로 확 밀어 버리면..."
"어허!"
버럭 일갈을 해 놓고서 예대는 그만 고개를 설레설레 젖고 말았다.
그 때 두 사람이 주고받는 말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모전동이 침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부방주님의 말씀이 아주 틀린 말씀은 아닙니다."
"뭐야? 자네까지 왜 이래?"
예대가 인상을 확 일그러뜨렸으나, 모전동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이번 일이 표면적으로는 상당한 위험한 것 같지만, 사실은 본 방을 위해 어렵게 찾아 온 기회라고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허어! 기회라고?"
"그렇습니다. 본 방이 북경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또한 여러 가지 측면에서 한계점에 직면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솔직히 표현을 하자면, 만약 이대로 간다면 본 방은 언제까지나 북경의 삼대(三大) 또는 사대(四大)조직 중의 하나라는 말을 듣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할 것입니다."
"으음!"
예대의 입에서 묵직한 침음성이 흘러나왔고, 단후의 퉁방울 같은 두 눈이 은근한 노기를 담고 모전동을 향했다.
모전동이 잠시 숨을 고르고 나서 말을 계속했다.
"가장 큰 한계는 규모의 한계입니다. 앞으로 북경 제일, 그리고 더 나아가 하북 제일의 조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방의 규모를 획기적으로 키워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본 방의 이름을 크게 알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새로운 인력, 특히 젊은 피들을 대규모로 영입할 수 있을 테니까요."
단후가 잔뜩 불만이 섞인 목소리를 뱉어 냈다.
"어이! 모 당주! 자네 지금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지금 방의 발전이 어쩌고 하는 그런 얘기를 하자고 하는 것이 아니잖아?"
모전동이 단후를 향해 가볍게 머리를 숙여 보이고 나서, 약간은 상기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바로 이 번 일로 해서 우리는 어쩌면 북경이나 하북만이 아니라 온 천하에다 혈방의 이름을 크게 알릴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제길! 도대체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건지 원... 어이, 좀 알아듣게 말을 해야 할 거 아니야?"
단후가 아주 노골적으로 부아를 내비치는 데 비해, 예대는 좀 전부터 모전동의 말에 대해 조금씩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는 모습이었다.
자못 굳은 표정으로 예대가 물었다.
"자네에게 뭔가 복안이 있는 모양인데, 어디 자세하게 말해보게."
모전동이 단후와 예대의 얼굴을 차례로 한 번 보고 나서 단호한 목소리를 뱉어 냈다.
"그들과 정면으로 은원을 해결하는 겁니다."
"맞장을 뜨겠다고? 무황성과...?"
좀 전까지 일전불사를 외치던 단후가 오히려 펄쩍 뛰듯이 경악성을 토해냈다.
모전동이 차분하고도 힘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속하가 감히 무황성과 상대할 생각까지야 할 수 있었겠습니까? 본질은 이 사건의 발단을 만든 놈들에 대한 응징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어쩌면 우리 혈방이 무황성을 상대로 무모하고도 당찬 도전을 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겁니다. 물론 속하가 바라는 바가 바로 그런 것이지만..."
예대의 눈빛이 더욱 깊숙이 가라앉았다.
"도박을 하자는 얘기군. 그러나 조직을 걸고 도박을 할 수는 없는 일이지. 자칫 잘못하였다가 본 방 정도는 한 순간에 날아가는 수가 있어."
"충분히 승산이 있는 도박입니다."
"모든 도박에는 다 승산이 있어. 그러기에 도박을 할 마음을 먹게 되는 거지."
"만약 생각한대로 되지 않는다 해도, 염려하시는 것과 같은 최악의 경우를 맞을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 이미 우리는 충분한 명분을 확보해 놓고 있습니다. 최악의 경우라고 해 봐야 강호오공자가 나서는 경우일 텐데, 그런 다고해도 우리가 감수해야 할 것이라곤 기껏 승부에서 지는 것뿐입니다. 후후! 우리에게는 강호오공자, 그리고 나아가 무황성과 당당히 일전을 결하였다는 사실만 중요할 뿐, 승부의 승패는 어차피 중요할 것이 없으니, 결국 우리가 잃을 것은 없다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한동안이나 침묵을 지킨 끝에 예대는 천천히 모전동과 눈을 맞췄다.
"나쁘지는 않은 것 같군. 음! 그런데 말이야, 물론 강호오공자가 굳이 개입을 하겠다면 우리로서는 어떻게 해 볼 방법도 없겠지만, 그래도 일단은 애초에 일을 만든 그 두 놈들에게 제대로 빛을 받아 낼 방도는 마련을 해야겠지?"
"물론입니다."
"놈들 중의 하나가 제법 대단한 무공을 지녔다며?"
"예! 혈을 제압할 정도의 내공과, 특히 발재간에 상당히 능한 자인데, 그렇다고 고수라고 할 정도는 못됩니다."
"흠! 어쨌거나 제대로 무공을 익힌 자라는 얘기군."
"속하의 생각으로는... 물론 방내에서도 기공(氣功)과 권각술(拳脚術)에 능한 인물들을 고를 수는 있겠지만, 상황의 중함을 보아 동(棟) 공자를 한 번쯤 활용하는 것도..."
"그래...?"
톡!
툭!
다시 한동안 손가락 끝으로 탁자를 두드리고 있던 예대가 마침내 생각을 정한 모양이었다.
"좋아! 그 동안 들인 공이 있으니, 이번 기회에 동종호(棟宗豪)의 진재실력을 한 번쯤 확인해 보는 것도 괜찮겠지. 일단은 말이야, 방내에서 야물고 독기 강한 친구로 몇을 골라 놓도록 해. 그리고 상황에 따라서 대처를 하도록 하지. 흠! 그리고 이 일에 대해서 나와 부방주는 구경이나 하고 있을 테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자네가 다 알아서 처리를 하도록 하라고. 내 말 뭔 뜻인지 알아 듣겠나?"
"형님!"
단후가 당장에 소리를 지르고 나섰으나, 예대는 아주 단호한 표정으로 손을 저어 단후가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하도록 했다.
모전동이 차분한 표정으로 복명했다.
"존명!"
등평은 잠결에 몇 차례나 고대릉이 내는 미약한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웅얼거리는 잠꼬대 같기도 했고, 끙끙대며 앓는 소리 같기도 했다.
등평은 그냥 고대릉이 몹시도 피곤하였었나 보다 여기고 말았다.
하긴 어제오늘의 그 난리를 겪은 데다, 지난밤에는 자시(子時)를 훌쩍 넘겨 축시(丑時)에 접어 들어서야 방으로 돌아와 자리에 누웠으니, 피곤하지 않다면 오히려 더 이상할 일이었다.
아침이 밝았다.
평소 같으면 등평에 앞서 벌써 자리에서 일어났었어야 할 고대릉은 여전히 누워 있었다.
등평이 가만히 다가가 살펴보니, 호흡은 숨을 쉬는 듯 마는 듯 가늘었고 얼굴은 타는 듯 붉었다.
이마에 살짝 손을 얹어 보니 마치 불덩이 같다.
'어허! 이거 변고가 생겼구나. 그 동안 쌓였던 몸과 마음의 피로와 고초가 한꺼번에 터져 나온 탓이리라.'
등평이 다시 고대릉의 손목 맥문을 잡고 기혈의 상태를 자세히 살피려 하는데, 죽은 듯이 있던 고대릉이 문득 손을 빼며 힘겹게 눈을 떴다.
"저는 괜찮습니다. 잠시만 더 누워 있다 일어날 것이니, 의숙께서는 다른 일을 보도록 하십시오."
등평이 잠시 걱정스런 눈길로 고대릉을 보다가 곧 방을 나섰다.
마침 정원에는 석여령과 강호오공자들이 나와 있었다.
그들이 담소하며 정원을 거니는 모습이 마치 한 무리의 용봉(龍鳳)과도 같아서, 등평은 그만 자신도 모르게 나직이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강호오공자들이 하나같이 준수하고 뛰어난 기품을 가진 청년들이었지만, 또한 그들 각자의 특징과 개성이 너무도 뚜렷하여 등평은 이제 누가 누구인지를 확연히 알아볼 수 있었다.
그들의 신상내력에 대해서야 직업상 이유로도 이전부터 줄줄이 꿰고 있는 터였지만. 등평은 다시금 그들 하나하나를 자세히 뜯어보았다.
남궁위덕(南宮暐德).
올해 스물여섯으로 남궁세가의 당대 장손(長孫)이다.
오대세가의 공동추천을 받아 무황의 후계자 후보로 지명되었다.
후기지수들 중 최고의 호남아라고 불릴 정도로 대인적 풍모와 후덕한 성품을 지닌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강호오공자 간에는 딱히 정해진 서열이랄 게 없었지만, 주위로부터는 물론 그들 강호오공자 내에서도 그는 맏형 뻘로서 은연중 인정을 받았다.
화인영(華仁英)
올해 스물넷이다.
특이하게 무가(武家)가 아닌, 이름난 학자 가문인 산서화가(山西綾家)의 후손이다.
그의 조부 능운(綾運)은 선황(先皇) 때 오래도록 태사(太師)를 지낸 바 있는 당대의 거유(巨儒)이기도 하다.
가히 임풍옥수(臨風玉樹)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수려한 용모를 지녀, 강호의 호사가들이 천하의 미남을 말할 때는 그와 무황성 공손가문의 공손도중을 함께 꼽아 천하이대미남(天下二大美男)이라 하였다.
세 살에 사서삼경을 읽었다고 할 정도로 어렸을 때부터 절세신동으로 이름이 자자하였는데, 나이 일곱에 조부와 친분이 있던 무당 전대장로 무우자(無憂子)와 인연이 닿아 비인부전(非人不傳)의 무당절기 양의무극신공(兩儀無極神功)을 전수받았다.
이후 무당과 구대문파의 공동추천을 받아 무황의 후계자 후보로 지명되었다.
위지호준(尉志豪俊)
올해 스물다섯이다.
무황성의 주축을 이루는 이대무존가(二大武尊家)중 위지가문 출신이다.
이대무존가는 무황 석광의 의제(義弟)들로 과거 정마대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던 위지천(尉志天)과 공손무랑(公孫武郞)의 가문을 일컫는다.
위지호준은 바로 위지천의 손자가 된다.
본인의 능력도 능력이려니와, 무황성의 최대실세인 가문의 영향력으로 강호오공자 중 무황의 최종 후계자에 가장 가까이 근접해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공손도중(公孫到中)
아직 약관도 되지 않은, 금년 열 아홉의 미소년이다.
강호오공자 중 가장 어린데다, 금년 스물인 석여령보다도 한 살이 어린 까닭으로, 일단은 강호오공자간의 경쟁에서 한 발을 물러나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나이로 보았을 때 그렇다는 것이고, 막상 그가 가진 신분과 능력으로 보았을 때는 강호오공자의 그 누구와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욱 거대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고 해야 했다.
그는 우선 무황성의 이대무존가 중 공손가문의 후예이면서, 또한 소림과도 밀접한 인연을 맺고 있었다.
알려진 바로는 공손도중이 어렸을 때, 무황성을 방문하였던 전대 소림방장 오현(悟玄)대사가 공손무랑에게 손자를 제자로 줄 것을 요청하였고, 소림방장의 제자라 함은 대단한 신분을 가지게 된다는 것 외에 한편으로는 승문(僧門)에 들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었음에도, 공손무랑은 흔쾌히 수락을 하였다고 한다.
공손도중의 나이 열두 살 때 오현대사가 입적하면서 공손도중의 인연이 결국 승문에 있지 않고 세상 중에 있다 하여 속가제자로 삼을 것을 유언하였고, 그는 이후 자신의 가문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비록 속가제자로 되었다 하나, 소림에서 그의 배분은 현임 방장인 운불(雲佛)대사의 사제가 되었다.
거기에다 무황성의 이대무존가 출신이라는 신분을 더하면, 신분만으로 따져서는 가히 천하에서 가장 화려하다 할 만 하였다.
그밖에 공손도중은 가히 전설의 송옥(松玉)과 반안(潘安)을 능가할 절세미남으로, 화인영과 더불어 천하 이대 미남으로 불리지만 기실 얼굴의 아름답기로만 따진다면 공손도중이야말로 천하의 으뜸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독고자강(獨孤自强).
금년 스물여섯으로 남궁위덕과 함께 강호오공자 중에서는 가장 연장자이다.
그 역시 특이한 내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사공자들과는 사뭇 대조되는 의미에서의 특이함이라고 해야만 했다.
그는 본래 혈혈단신(孑孑單身)으로 강호를 떠돌던 고아였는데, 열한 살 무렵에 마침 강호를 주유 중이던 무황 석광의 눈에 띠어 거두어졌다고 한다.
무황은 평생 제자를 거두지 않았으나, 독고자강에게는 직접 무공을 가르친 것으로 알려졌다.
독고자강이라는 이름 역시 무황이 새로 지어준 것이라고 한다.
독고자강은 이후 끊임없는 노력과 출중한 능력을 발휘하여 약관 스물을 갓 넘긴 어린 나이에 무황성 내에서 유일한 무황의 친위조직이라 할 수 있는 호천단(護天團)의 부단주 직위에까지 올라섰다.
그가 강호오공자의 대열에 든 것은 무황 석광의 직접 지명에 의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강호오공자 간의 경쟁에서 가장 멀리 비켜나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다른 경쟁자들과 비길 수 있는 출신배경이 없다는 이유 외에도, 무황이 그를 강호오공자의 대열에 합류시킨 이유가 진정한 후계자가 결정될 때까지 석여령을 바로 곁에서 돌보고 지키는 역할을 맡기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독고자강은 무뚝뚝하고 반항적인 성격으로 알려졌으며, 무황성 내에서도 무황 외에는 누구도 그를 제대로통제하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알려진 바로, 무황은 그들 다섯에게 직접 강호오공자라는 별칭을 붙여 주고, 비록 제자로 삼지는 않았지만 제자와 마찬가지로 여긴다는 뜻에서 그들 각자에게 특성에 맞는 무공을 전하였다고 한다.
천하제일을 넘어 고금제일이라고까지 평가를 받는 무황의 무공은 흔히 칠대절학(七大絶學)으로 알려져 있는데, 기본공(基本功) 두 가지와 절기(絶技) 다섯 가지가 바로 그것이다.
오공자에게는 기본공 두 가지와 절기 각 한 가지씩이 전해졌다.
그 같은 일은 사실 무황이 자신의 독문무공의 비밀을 만천하에다 공개하는 것이나 크게 다름이 없었으니, 가히 무황다운 배포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공자들은 무황에게 전수받은 무공을 연구하기는 하였으되, 실제로 익히지는 않았다.
아니, 익히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한 사정에 대해서는 강호의 고수급이라면 누구나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이었다.
오공자들 모두가 이미 각자의 출신가문과 문파의 최고절기들을 익히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 최고절기라고 하는 것들 중 어느 하나도 소위 절세신공절학(神功絶學)이 아닌 것이 없었으니, 그 무공들과 무황의 칠대절학 중 어느 것이 더 낫고 더 못하다 우열을 가릴 수 있을 것인가.
그 무공들 중 어느 것 하나도 사람의 짧은 일평생 수련으로 십이 성 대성(大成)의 경지에 오르기는 불가능하다고 해야 할 광고절금의 절학들이었다.
다시 말해 어느 누가 그 절기들 중 하나에 대해 단지 십성의 성취만 이루어 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가히 천하제일의 명성을 얻지 못할 바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이미 그러한 절기들에 입문하여 많게는 이십 년 이상의 수련을 쌓고 있는 중인 오공자들이 굳이 무황의 무공에 새삼 욕심을 낼 일은 아닌 것이었다.
다만 무황의 무공에 대한 장단점을 연구하여 스스로의 수련에 참고와 도움으로 삼는다면 모를까.
그런 점에서 무황의 배포는 한편으로, 자신이 이미 성취한 바에 대한 도도한 자신감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따뜻한 물을 담은 대야를 준비하고, 또 여러 개의 깨끗한 면포(棉布)을 준비하는 등 부산을 떠는 등평의 모양새를 멀리서 보고 있던 석여령이, 문득 가까이로 걸어왔다.
그녀가 웃으며 등평에게 물었다.
"고공자는 아마도 귀한 집안에서 곱게 자란 모양이지요?"
세면 준비를 방안으로 들이려는 데 대해 은근한 비꼼을 담은 말일 것이었다.
등평이 조금은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 게 아니라, 저희 공자께서 지금 많이 아프십니다. 온 몸이 마치 불덩이같이 달아올랐지요."
그 때 석여령의 뒤로 다가와 있던 위지호준이 툭 던지듯이 한마디를 뱉었다.
"쳇! 어쩔 수 없는 약골이군. 그만한 일로 자리보전하고 누워 버리다니..."
석여령이 가벼운 책망의 빛을 담아 위지호준을 흘겼다가, 품속에서 작은 옥 빛 자기병 하나를 꺼내고 그 속에서 다시 단환을 하나 집어내어 등평에게 내밀었다.
"이 걸 한 번 복용시켜 보세요. 호심단(護心丹)이라고, 본래는 내상을 다스리는 약인데 지친 심신을 회복시키는데도 탁월한 효과가 있지요."
등평이 자세히 보니 콩알만 한 단환에서 은은한 황금빛 광택이 나는데다가, 손에 받아 들기도 전에 벌써부터 싸하니 향긋한 약향이 먼저 코끝으로 몰려들었다.
"어이구. 귀한 영단 같은 데, 이런 걸 다..."
"호호호! 사실 귀하다면 귀한 영단이라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어제 등(鄧) 아저씨께서 베푸신 호의에 비하면 아직도 부족하다고 해야겠지요."
등평의 입이 쩍 벌어졌다.
등 아저씨라는 호칭 때문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일가인 석여령으로부터 듣는 호칭이다.
어제 잠깐 지나가는 얘기로 고대릉과 자신의 이름을 언급했는데, 그녀는 그것을 기억해두었다가 지금 이처럼 살갑게 불러주는 것이었다.
등평은 지금까지 일가인 석여령이 도도하고 냉엄한 성품인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겨우 어제 만난 데다, 조금이라도 걸리는 관계가 있는 사이도 아니고, 더구나 보호를 애걸하는 신세로 쉽게 무시할 수도 있는 입장인데도 불구하고 이처럼 살갑게 호칭을 만들어 붙여 주는 것을 보면, 그녀는 강호에서 흔히 평가하는 대로가 아닌, 붙임성 있고 다정한 성품의 일면도 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사실 그녀와 같이 고귀한 신분에다 모든 것을 다 가진 입장에서는, 등평의 지금 처지와 같이 하찮은 신분의 사람에게 그처럼 자그마한 호칭에까지 배려를 해주기란 결코 쉽지가 않은 일인 것이다.
지켜보고 있던 남궁위덕이 문득 밝게 소리내어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무림인들에게는 값을 따지기조차 어려운 영단인데, 누구는 너무도 쉽게 횡재를 하는군."
비아냥거린다기보다는 은근히 그 단환이 보통의 단환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하는 투였다.
뒤이어 위지호준이 나직하니 코웃음을 쳤다.
"흥!"
화인영은 싱긋이 웃고만 있었고, 석여령의 뒤를 지키고 선 독고자강은 시종 무표정하였다.
공손도중은 아예 관심이 없는 듯 멀리 동쪽 산마루로 얼굴을 내미는 아침 해를 바라보며, 눈부신 듯 미려하기 짝이 없는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방으로 들어 온 등평이 잠시 호심단을 이리저리 살피고 또 냄새를 맡고 하다가, 가만히 고대릉의 입안으로 밀어 넣어 주었다.
과연 영단이라 그런지 입에 들어가자 마자, 물이 없이도 스르르 녹아내리며 일순 강한 향기를 뿜어내었다.
영단의 효험이 곧바로 나타난 것인지, 아니면 그 향긋함에 정신을 차린 것인지, 고대릉이 천천히 눈을 떴다.
"으음! 이게 무엇입니까?"
"석 낭자가 공자님을 걱정하여 내어 준 것입니다."
"으음!"
고대릉의 표정이 일시 묘하게 찡그려졌다.
그러나 그는 이내 입안에 고인 침을 모아 묵묵히 목구멍으로 삼켰다.
잠시 후.
힘겹게 몸을 일으켜 앉은 고대릉이 등평이 가지고 들어 와 주변에 늘어놓은 그 거창한 준비들을 보고는 쓰게 웃었다.
그러나 고대릉은 역시 묵묵한 모습으로 세안을 하였다.
정좌를 하고 앉은 고대릉의 얼굴은 하룻밤 새에 무척이나 수척해져 있었다.
그러나 비록 창백한 얼굴이었지만, 고대릉의 눈빛은 전에 비할 바 없이 한결 맑아지고 깊어진 것 같았다.
등평은 고대릉이 한 걸음 훌쩍 마음의 넓이를 키웠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죽을 준비하라고 주방에다 얘기해 놓았습니다."
"고맙습니다. 저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몸을 추스를 것이니, 의숙께서 제게 신경 쓰지 마시고 먼저 아침을 드십시오."
그리고 고대릉은 정좌한 채 두 눈을 감았다.
곧바로 깊은 명상에라도 들어간 것인지 호흡이 금방 잔잔하게 변했다.
그 옆에 계속 버티고 있기도 멀뚱해지는지라, 등평이 조용히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다들 아침식사를 마치고 별채로 돌아와 차를 나누고 있을 때, 모전동이 찾아왔다.
그는 혼자였다.
모전동이 강호오공자를 가볍게 일별(一瞥)한 후, 석여령을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그녀가 일행을 대표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리라.
"본 방에서는 어제 일에 대해 분명한 처리를 해야 한다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처음부터 모전동을 못마땅하게 쏘아보고 있던 위지호준이 불쑥 끼어 들었다.
"후훗!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석여령이 미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등평이 보기에, 위지호준은 일행에 관련되어 일어나는 모든 일을 자신의 주도하에 두고자 하는 것 같았다.
그런 과정에서 다른 오공자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 지에 대해서는 조금도 안중에 두지 않는 듯 하였다.
그것은 언제나 중심에만 서 왔던 사람의 전형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강호에서 은원을 처리하는 가장 분명한 방법은, 역시 서로간에 승부를 가리는 것이겠지요."
모전동의 대답에는 별 망설임이 없었다.
위지호준이 비릿하게 웃었다.
"흐흐흐! 너희들이 진정 본 공자 등을 능멸해 보겠다는 건가?"
"그럴 리가...? 저희는 다만 본 방에 죄를 지은 자들에 대해 합당한 응징을 하고자 할 뿐...."
"닥쳐라! 그 자들이 이미 우리의 보호아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따위 허튼 수작을 부린다는 것은, 결국 우리에게 도전을 하겠다는 것이 아닌가? 흐흐흐! 만약 그 승부에 본 공자가 직접 나서겠다면, 그 때는 또 어찌할 테냐?"
위지호준이 두 눈에서 날카로운 광망을 쏘아 내며 모전동을 압박하였으나, 모전동은 공손함을 잃지 않는 가운데서도 결코 기를 꺾지는 않았다.
"이미 방론(幇論)에 의해 결정된 일이니, 저희로서는 그 어떤 경우에도 물러설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원하신다면 목숨을 내 놓겠습니다. 단, 죽을 때 죽더라도 공식적인 승부가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 대책없는 당당함에 위지호준이 결국은 답답한 침음성을 흘리고 말았다.
"으음!"
그 때 남궁위덕이 가볍게 웃으며 모전동을 향해 말을 끼어 들었다.
"하하하! 이 거 이렇게 되면 우리가 제대로 물린 셈이 되는구먼. 내 가만히 듣고 있자니, 당신들은 밤새 아주 궁리를 많이 한 것 같소이다. 하하하! 기껏 수하 하나의 목숨 값으로 혈방과 강호오공자를 동등한 위치로 만들어 버렸으니 말이오."
은근히 넘겨 집는 듯한 남궁위덕의 말에 모전동은 그저 담담하게 미소를 떠 올렸고, 그제야 모전동의 속셈을 어느 정도 짐작하게 된 위지호준은 아주 벌레 씹은 얼굴이 되고 말았다.
위지호준의 화는 느닷없이 등평에게로 돌려졌다.
"이 모두가 당신들로 인해서 벌어진 일이니, 당신들이 알아서 하시오."
등평은 일순 날벼락을 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사실은 그 정도에 조금이라도 곤란해 할 등평은 아니었다.
참담한 표정을 연출하며 연신 두 손만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마침 기다리고 있던 바대로 석여령이 한 걸음을 앞으로 나서며 차분히 입을 열었다.
"잠깐만요. 이 일은..."
그러나 그녀의 말은 계속 이어지지를 못하였다.
바로 그 때 고대릉이 방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오며 맑고도 또렷한 목소리로 말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일은 애초에 나로 인해 벌어진 일. 모든 것은 내가 책임을 지겠소."
전혀 예상치 못한 뜻밖의 말에 모두는 잠시 고대릉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가장 놀란 것은 바로 등평이었다.
일시 멍하니 고대릉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던 그가 펄쩍 뛰듯이 고대릉을 만류하고 나섰다.
"아이고 공자님! 무슨 말씀을 그리 하십니까? 혹시 어젯밤 너무 심하게 앓으셔서 아직까지 정신이 혼미한 것이 아닙니까? 그렇지 않다면 어찌 그와 같이 허황된 말씀을 다 하실 수가 있단 말입니까?"
주위에다 들으라는 듯 등평의 수다가 늘어지는데, 고대릉이 다시 한 번 분명하고도 또렷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 일은 저의 일입니다."
등평의 어투가 한층 강하고도 급해졌다.
"안됩니다. 이건 다릅니다. 지금 얘기되는 승부라는 것은 단순히 멱살잡이나 하는 정도의 쌈박질과는 아주 다른 것입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고대릉의 목소리는 단호하기만 했다.
"의숙! 더 이상 저를 만류하려 하지 마십시오. 의숙께서 저를 가주로 인정한다면 말입니다. 일가(一家)의 가주라면, 적어도 제 스스로 벌린 일에 대한 책임을 남의 힘에 의지하여 모면하려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일순 등평은 그만 멍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노회한 그로서도 이 순간 고대릉이 그런 말을 할 것이라곤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갑작스러운 고대릉의 등장에 이은 그들 주종(主從)간의 이해되지 않은 실랑이를 보고 있던 위지호준이 할 말을 잃고 있는 등평을 보며 빈정거렸다.
"후후! 귀 주인의 기개가 참으로 가상하지 않은가. 당신은 대단한 주인을 모신 것 같소. 암! 남을 거느리는 입장이라면, 그리고 남자라면 당연히 자신의 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법이지."
늘 대범한 표정이던 남궁위덕도 이 순간만큼은 미미하게 이마를 찌푸리고 있었다.
그가 고대릉에게 두어 걸음 다가가 타이르듯 나지막하게 말했다.
"이 보게, 고 공자! 자네는 의숙의 말씀대로 따르게. 이런 일은 아무래도 자네같이 닭 모가지 하나 비틀 힘도 없는 백면서생이 감당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일이 아닐세."
그러나 고대릉은 목소리에 힘을 주어 강경하게 대답했다.
"귀공의 염려는 고맙지만, 더 이상의 관심은 사양하겠소. 이 일은 어디까지나 나의 일이오."
고대릉의 강한 눈빛과 어조에 남궁위덕은 물론, 다른 오공자들과 석여령까지도 다시 한 번 뜻밖이라는 얼굴이 되고 말았다.
고대릉은 어제까지의 그와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그런 중에 화인영 만은 아주 흥미롭다는 듯 묘한 미소로 웃고 있었다.
모두가 잠시 할말을 잊고 있는데, 위지호준이 다분히 비아냥거리는 어투로 혼잣말처럼 나직이 중얼거렸다.
"흐흣! 어느 가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당대에 제법 뼈대가 센 가주를 배출하였군."
한편 당혹스럽기는 모전동도 매 일반이었다.
그의 염두(念頭) 속에서 고대릉은 처음부터 조금의 비중도 차지하지 않고 있었다.
모전동의 염두가 새삼 급박하게 돌아갔다.
'허! 잘못하다가는 모양새가 이상하게 되어 버린다. 저 촌티 나는 먹물 나부랭이가 끝내 고집을 피워 막무가내로 나선다면, 일이 자칫 시전바닥에서 벌어지는 한때의 구경거리와 다를 바 없게 되지 않겠는가. 그리 된다면 방의 위신을 세우기는커녕 세간의 웃음거리가 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이 순간 누가 뭐라 해도 가장 바쁘게 머리를 굴리고 있는 사람은 바로 등평이었다.
더 이상 그가 고대릉을 만류하기는 어려웠다.
고대릉이 돌연 무영가의 가주 위(位)를 들먹거리면서까지 생고집을 부려 대는 데야, 어쨌거나 무영가의 충직한 가솔임을 자부하는 등평으로서는 끝까지 항명(抗命)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더구나 고대릉이 이미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극단의 호언을 해 버린 마당에, 일개 충복에 불과한 그가 더 이상 나선다는 것은 주제넘은 짓일뿐더러, 감히 가주의 체면을 크게 꺾어 놓는 결과가 되지를 않겠는가.
등평의 머리가 그야말로 정신없이 돌았다.
'허어! 어찌한다? 저 놈들이 방의 이름을 걸고 승부에 내세울 자라면, 최소한 뒷골목의 파락호 따위는 아닐 것이고, 웬만큼은 무공을 익힌 자를 내세울 것이 분명할 터. 더군다나 저 혓바닥 매끄러운 놈이 잔머리를 굴리는 품이, 자칫 하다가는 눈앞에서 가주가 죽어나간다 해도 정식승부니 뭐니 해서 손쓰기가 쉽지 않을 지경이 될지도 모를 일인데... 허어! 대체 이 일을 어찌한다?'
등평과 모전동은 지금 각자의 머리 속에서 수 없이 많은 경우의 수들을 만들어 냈다가는 다시 지우곤 하고 있었다.
등평이 조금 더 빨리 어떤 결론에 도달한 모양이었다.
그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반짝 빛을 발하며 모전동에게로 향하였다.
"우리 가주께서는 결자해지(結者解之)의 순리를 말씀하신 것이다. 당연히 혈방 쪽에서도 이 사태의 발단을 만든 소아자라는 소매치기로 하여금 이 일을 책임지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순간 모전동의 안색이 노화로 붉게 달아올랐으나, 그의 눈빛은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모전동이 짐짓 표정을 굳히고 등평을 꾸짖기라도 하듯이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흐흐흐! 고작 세 치도 안 되는 혓바닥을 놀려 상황을 호도시키려 하다니... 이제 겨우 열 네살 먹은 꼬마를 상대로 해서 대체 무슨 수작을 부리겠다는 것이냐? 본 방에서 받아 내고자 하는 것은 바로 수하의 목숨에 대한 혈채(血債)다. 그리고 그 혈채를 진 자는 바로 네 놈이 아니더냐? 엉뚱한 어린놈을 내세워 허튼 수작부리지 말고 네 놈이 직접 나서라."
와락 일그러지는 등평의 얼굴을 보고, 오공자와 석여령이 또 다시 뜻밖이라는 듯 등평의 모습을 훑어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등평에게서 도무지 그럴 듯한 무인(武人)의 모습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물론 그들은 제작기 고심(高深)하달 수 있는 수준의 안목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러나 등평이 보유하고 있는 어떤 특별한 능력을 유추해내기란 그들뿐만 아니라 강호의 누구에게도 결코 쉽지는 않은 일이었다.
실제로 등평의 내공은 기껏 이류에 들기도 어려울 정도로 척박한 수준이라 해야 했고, 더구나 그의 내공체계는 용천(湧泉) 이단전(二丹田)을 근거로 하는 특별난 것이어서, 통상적인 개념으로는 쉽게 상상이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위지호준이 짐짓 등평의 입장을 옹호라도 해 준다는 듯 모전동을 향해 쏘아 붙였다.
"참으로 딱한 자로군. 저 친구가 이 양반의 주인이라지 않나? 주인인 그가 직접 나서겠다고 저리도 강하게 고집을 피우는데, 이 양반이 나서고 싶다고 해서 나설 수 있는 입장이 되겠나?"
위지호준의 핀잔을 듣고서도, 모전동의 얼굴은 그리 격동하거나 곤란해 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모전동이 위지호준의 말에 대해서는 대응을 하지 않고, 등평을 향해 차갑게 말했다.
"좋다. 네가 굳이 저 어린놈을 내세우고자 한다면, 본 방에서는 소아자 이전에 금화궁에서 먼저 네 놈들에게 피해를 입은 바 있는 사두(蛇頭) 금욱으로 하여금 상대를 하게 할 수는 있다. 그러나..."
모전동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등평이 급하게 말을 가로챘다.
"제기랄! 좋다.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 털보 놈을 데리고 와라. 기왕지사 일이 여기에까지 이르렀으니, 더 이상 일을 복잡하게 만들 것 없이 서둘러 해결을 보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사실은 여기까지가 등평이 미리 염두를 굴려 놓았던 내용이었다.
소아자를 걸고넘어지면, 상대는 반드시 금화궁에서의 그 털보를 들먹일 것이라고 미리 예측을 하였던 것이다.
그 털보가 제법 힘께나 쓰게 보였던 것은 맞지만, 그래 봐야 기껏 뒷골목에서나 통하는 힘이 아니겠는가.
물론 이미 한 번 그 자에게 호되게 당한 바 있는 고대릉이, 이제 다시 정식으로 맞붙는다 해서 새삼 상대가 되리라고 조금이라도 기대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최소한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험악한 지경에까지는 가지 않으리라 하는 계산은 섰다.
그리고 지금 고대릉의 일견 대단한 각오로 보아하니, 둘의 싸움은 필경 엎치락뒤치락 뒤엉켜 버리는 볼상사나운 꼴로 진전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였다.
그렇다면 정히 급하게 되었을 때, 그냥 달려들어 후다닥 뜯어 말린다 해도 누가 크게 뭐라고 하지는 못할 것이었다.
그런 난장판의 싸움에 무슨 승부의 법(法)이 있고 도(道)가 있겠는가.
그러나 모전동은 상황을 등평이 의도하는 쪽으로만 가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았다.
"흐흐흐! 내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등평을 향해 음침하게 웃고 난 뒤, 모전동이 이번에는 석여령과 위지호준 등을 향해 말했다.
"소저와 공자들께서도 바라시는 듯 하니, 본 방에서도 일단은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해 둘 것은, 그 이후에도 혈채가 걸린 은원은 여전히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이번에도 모전동의 말에 대꾸를 하고 나선 것은 위지호준이었다.
"당신은 말을 꽤나 복잡하게 하는 버릇이 있군. 그래서 또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모전동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제대로 된 승부를 다시 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 태연한 대답에 위지호준은 문득 약간의 흥미를 느끼게 된 모양이었다.
"흠! 그거야 뭐 일단은 당장의 일부터 진행해 놓고 나서, 그 다음에 다시 생각을 해 보도록 하지."
다시 석여령의 아미가 살풋 찡그려졌다.
그리고 독고자강의 눈빛이 날카롭게 위지호준을 향하였다.
위지호준이 짐짓 불쾌한 기색으로 독고자강의 눈빛을 맞받았다.
일시 불꽃이 튀는 듯 하던 눈싸움은 위지호준이 약간의 경멸과 껄끄러움을 표정에 담아 눈을 돌려 버림으로써 금방 끝이 났다.
"쳇!"
그 때.
"좋군. 일이 점점 더 재미있어 지는군. 그럽시다. 일단은 일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구경부터 한 번 해 보기로합시다."
화인영이었다.
묘하게 분위기의 맥을 끊으며 화인영이 흘리는 그 한 마디에, 조금의 여지를 남기고 있던 상황은 졸지에 기정사실화가 되고 말았다.
모전동은 승부의 시간과 장소를 정하고 나서 곧바로 돌아갔다.
시간은 반 시진 후인 사시(巳時) 초.
장소는 바로 별채의 정원으로 정하였다.
어차피 무공도 없는 자들이 치고 박는 싸움이니, 그리 넓은 공간을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비록 정식승부라는 말을 달기는 하였지만, 사실 혈방이든 오공자 측이든 외부로 드러내어 진행시키고 싶은 승부는 결코 아니었다.
"좀 전에 자네가 무슨 가문의 가주라고 했었지?"
위지호준이 묻는 말에 대해, 고대릉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렇소."
위지호준이 피식거리며 웃었다.
"그래, 어디에 있는 무슨 가문인가?"
고대릉의 미간이 미미하게 좁혀졌다.
위지호준의 말 속에 은근히 담겨 있는 조롱이 거슬리기도 했지만, 사실은 대답할 말이 궁하기도 했다.
하긴 지금 등평 역시도 위지호준의 그 질문에 대해서는 당혹스러워 하고 있었으니, 고대릉이야 오죽하랴?
'어디에 있느냐라? 허어...?'
등평으로서도 한 번도 심각하게 생각해보지 않은 질문이었다.
그러나 대답을 하지 않을 수도 없는 일.
등평이 얼른 나서 고대릉을 대신해 대답을 했다.
"장백산에 있는 무영가(無影家)라고 하지요."
"장백산...?"
이번에는 위지호준이 이마를 찌푸리고 말았다.
처음부터 그럴 듯하게 알려진 가문의 이름을 듣게 될 것이라고는 조금도 기대하지 않았었다.
다만 고대릉이나 등평이 도무지 어울려 보이지 않게 무슨 가문이니, 가주니 하고 거창한 말을 하였기에 그 엉터리의 내막을 까뒤집어 창피나 한 번 주려고 꺼낸 말이었다.
그런데 장백산이라니...
그 넓고도 험한 장백산중에 그들의 가문이 있다는 데야 넘겨짚어서라도 의심스럽다고는 할 수 없는 노릇이 아닌가?
"무영가? 그 이름이 좀 이상하군."
이어지는 위지호준의 트집에 고대릉은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데, 막상 등평은 또 한 번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무영(無影)이라는 말이 무림에서 그리 좋은 의미로만 쓰이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역시 등평이었다.
"흠! 대대로 학문을 연마해온 은유(隱儒)의 가문이오. 무영이란, 세상의 밝은 이치만을 추구한다는 뜻이니, 바로 어둠이라면 자신의 그림자와도 결코 친하지 않겠다는 가문대대로의 학문적 신념인 것이오."
곁에서 싱글거리며 그들의 수작을 보고 있던 화인영이 짐짓 감탄을 하는 체 하였다.
"호오? 그것 참으로 대단한 신념이로다."
정확하게 사시가 되자, 모전동이 다시 왔다.
이 번에 그는 다섯 명의 인물들을 대동하고 있었다.
모두 잘 다듬어진 몸매에 안정된 눈빛을 가진 자들이었다.
비록 일류니 이류니 하고 등급을 매길 정도는 못되었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 모두에게서 적어도 파락호 수준은 넘어서는 수련의 흔적을 엿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 중에 어울리지 않게, 전형적인 파락호의 상에 잘 어울리는 한 사내가 섞여 있긴 하였다.
등평과 고대릉에게는 이미 낯이 익은 구레나룻의 장한.
그 때 금화루에서는 몰랐지만, 그는 바로 혈방이 관리하는 북경의 삼십 여 개 구역 중 서단북로(西單北路)의 사두인 금욱이었다.
그들 간에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다만 금욱과 고대릉 그들 두 사람간의 승부만 진행되면 되는 것이다.
금욱이 등평을 날카롭게 노려보고 있다가, 문득 고대릉을 보고는 빙글거리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진득한 위협과 조롱이 담긴 미소였다.
고대릉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바로 이틀 전 그는 금욱의 거친 기세에 눌려 온 몸이 얼어붙는 경험을 하였으며, 그의 손발에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일방적으로 얻어맞은 기억을 생생히 가지고 있는 것이다.
금욱의 노골적인 위협이 담긴 눈길을 다시 받는 것만으로도 고대릉의 가슴 속에서는 다시금 한 가닥의 두려움이 슬며시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죽었으면 죽었지, 다시는 그런 따위의 치졸한 두려움을 결코 용납할 수 없다는 반발이 솟구치기도 하였다.
'이제부터는 그 어떤 경우에도 결코 두려워하거나 회피하지 않는다.'
고대릉의 눈길이 자신도 모르게 흘깃 한 곳을 향하였다.
그 곳에 그녀, 석여령이 묘한 흥미를 담고서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고대릉은 그녀의 시선이 결코 자신에 대한 특별한 관심이 아닌, 보잘 것 없는 존재가 부리는 예상치 못했던 만용을 바라보는 그런 눈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어쨌든 그녀 앞에서 만큼은, 위협에 굴해 두려움에 떠는 그런 못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상대에게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최소한 정신만은 결코 굴하지 않는 그런 남자다운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고대릉의 이빨이 악다물었다.
그리고 그의 두 눈에 서서히 힘이 실리면서, 금욱의 시선을 정면으로 맞받아 갔다.
금욱이 잠깐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미소를 더욱 짙게 했다.
그럴수록 고대릉의 얼굴은 더욱 굳어졌다.
고대릉의 표정에서는 강한 투지와 솔직한 두려움이 함께 교차하고 있었다.
그러나 곧 고대릉의 얼굴은 비록 느리지만 조금씩 조금씩 평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는 결국 두려움에 굴하지 않고 이겨내 스스로의 당당함을 되찾고 가고 있는 것이다.
아주 조심스럽게 고대릉의 표정 하나하나를 지켜보고 있던 등평의 얼굴로 그제야 희미한 한 가닥 안도의 표정이 스쳐 갔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일가인 석여령도 좀 전부터 고대릉의 변해가는 표정변화를 여인다운 섬세함으로 지켜보고 있는 중이었다.
문득 그녀의 입가로도 엷은 웃음기가 어렸다.
'호오?'
그녀에게 지금까지의 고대릉은 그저 순진하고 소심하며 여려 보이기만 했었는데, 고대릉은 지금 뜻밖의 고집과 당찬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것은 평범하기만 했던 고대릉이라는 소년의 새로운 모습이었다.
석여령은 언뜻 등평의 표정을 살폈다.
그런데 등평의 모습은 조금 어둡기는 했어도, 크게 불안 해 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녀가 지금껏 느낀 감으로 고대릉을 가주로 모시는 등평의 태도에 크게 가식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등평은 단순한 주종간의 관계를 넘어 어른으로서의 자애로움과 깊은 정성을 가지고 고대릉을 대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그다지 불안 해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저 평범하기만 한 소년에게 내가 모르는 어떤 특별한 것이있다는 얘기인가?'
남궁위덕은 마침 그 때 석여령을 보고 있었는데, 석여령의 눈살이 미미하게 찌푸려져 있었다.
남궁위덕은 그것을 그녀의 고대릉에 대한 걱정으로 보았다.
남궁위덕이 보기에도 고대릉은 도무지 털보장한의 상대가 되지 못할 것 같았다.
털보장한이 내공을 익힌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제법 기골이 있는데다 날렵하게 보이는 체형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세를 비교하더라도 이미 둘은 상대가 아니었다.
털보장한은 그 수준이나 실력을 논하기 이전에 이미 싸움을 많이 겪어 본 자임에 분명해 보였다.
서두르지 않고 은연중에 상대를 핍박해 들어가는 그의 기세가 그것을 여실히 말해주고 있었다.
그런데 고대릉은 어떤가?
그는 지금 털보장한의 기세에 맞선다기 보다는 오히려 자기 자신을 진정시키는데 온 힘을 다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남궁위덕의 얼굴에 일순 안쓰러운 기색이 스쳤다.
아마도 고대릉의 딱한 처지가 안쓰럽다기보다는, 석여령이 고대릉에 대해 걱정하는 모습이 그를 더욱 안쓰럽게 만들었으리라.
"좋다. 그럼 두 사람 간의 대결을 시작한다."
위지호준이 낭랑한 목소리로 싸움의 시작을 선언하였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건만, 그는 마치 이 승부의 공증인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어쨌든 그것으로 싸움은 시작되었다.
금욱은 천천히 여유 있는 걸음으로 고대릉의 주위를 돌았다.
어차피 승부 랄 것도 없는 상대였다.
사실 평소의 그 같았으면 인정사정 볼 것 없이 그냥 치고 들어가 벌써 끝장을 보고 말았겠지만, 지금 장내의 분위기는 그로 하여금 약간의 격식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어쨌거나 혈방을 대표하여 나섰고, 거기에다 강호오공자와 일가인 석여령이 지켜보는 자리였다.
금욱이 이태 껏 경험해 왔던 적지 않은 싸움에서 언제 한 번이라도 격식 같은 것을 차려 보기는커녕 그럴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지만, 그래도 무림인들의 대결장면을 귀동냥으로 들은 바가 없지는 않았다.
신중하게 상대를 탐색하고 나서, 그럴 듯 한 초식을 몇 차례 교환하고, 그리고 번개 같은 한 수로 멋진 마무리.
고대릉은 가만히 서 있었다.
역시나 잔뜩 겁을 집어먹고서 얼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상대가 받쳐 주지도 않는데 혼자서 격식을 차린답시고 돌고 있자니 머쓱하기도 하여 금욱이 힐끗 모전동의 눈치를 보았다.
그런데 모전동의 눈빛은 차갑기만 하였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서둘러 끝을 내라는 뜻이다.
우뚝!
금욱이 걸음을 멈추며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그의 양 손이 엇갈리며 쾌속하게 허공을 갈랐다.
짜작!
짜자자작!
고대릉의 머리가 잇달아 좌우로 출렁거렸다.
그의 뺨과 얼굴 전체가 금방 벌겋게 변했다.
위지호준은 차라리 허탈해 했다.
물론 약골에다 심약하기까지 해 보이는 고대릉이 제대로 반격을 하리라고는 처음부터 기대조차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반항이라도 할 줄 알았다.
상대에게 맞았으면 하다못해 악다구니를 쓰고 독기 어린 몸짓이라도 보여 주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피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꽁꽁 얼어붙어서 멍청히 얻어맞고 있는 저 한심한 꼬락서니라니...
"큿! 도저히 못 봐 주겠군."
그 몇 대의 따귀에 고대릉은 정신이 번쩍 드는 듯 했다.
타격은 생각보다 그리 크지 않았다.
금욱이 손속의 재빠름과 변화무쌍함을 과시하기 위해 힘을 제대로 싣지 못한 이유도 있었지만, 타격에 대해 고대릉 자신의 몸이 적절한 반응을 하고 있는 덕분이기도 했다.
외단(外丹)의 작용이었다.
상대의 손이 따귀를 때려 오는 순간에는 차라리 눈을 감고 말면서도, 외단의 느낌으로 상대의 손속이 어디에서부터 어떤 속도로 다가오고 있는지를 선명하게 알아지게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도저히 피하지 못해 정통으로 맞는다 싶었는데도, 막상 타격이 가해지는 그 찰나적인 순간에 마치 몸이 저절로 반응을 하는 듯이 조금씩 비켜나서 충격을 상당부분 해소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잇달아 얻어맞은 뺨은 화끈거리고 얼얼하다 못해 이제는 아주 감각마저 없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문제는 아직도 그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일말의 두려움과, 그의 온몸을 지배하고 있는 터질 듯한 긴장이었다.
고대릉은 다시금 힘 주어 이빨을 깨물었다.
마치 늪 속에 두 발이 깊숙이 빠진 자가 혼신의 힘을 다해 움직이듯, 그는 그렇게 엉거주춤 움직이기 시작했다.
짜작!
퍽!
타닥!
금욱의 타격은 점점 더 그 강도를 더해가고 있는 와중에, 막상 그것과는 무관하게 행해지고 있는 고대릉의 그 같은 이상한 행동은 차라리 희극적이었다.
다만 한 가지.
그토록 일방적으로 무수히 구타를 당하면서도 용하게 쓰러지지 않고 버티고 서 있는 고대릉의 맷집에 대해서, 사람들은 어느 정도 대단하다고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몸을 움직이면서부터 고대릉은 급속하게 온 몸의 긴장이 풀리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고대릉의 눈은 상대의 움직임을 쫓고 있었다.
맞는 순간에도 그의 눈은 더 이상 감기지 않았다.
고대릉의 눈은 서서히 불타오르고 있었다.
고대릉의 대단하다고 할 수 밖에 없는 맷집에 대해 금욱은 점점 경각심을 가지게 되었다.
금욱의 움직임은 신중해졌고, 일권일퇴(一拳一腿)마다 힘을 집중하고 급소를 노렸다.
그럴 즈음.
"엇!"
금욱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한 소리 경호성이 나직하게 터졌다.
그가 마음먹고 노려 친 일 권을 고대릉이 우연인 듯 피해버린 것이다.
처음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 때부터 고대릉은 금욱의 권각(拳脚)을 회피해 내기 시작하였다.
금욱의 주먹과 발은 아주 아슬아슬하게 고대릉의 머리와 몸통 주변으로 비켜나갔다.
조금 전부터 석여령의 눈빛에는 한 가닥 이채가 서려 있었다.
순박하기는 하나 숫기 없고 꽉 막힌 어린 서생정도로만 보았더니, 지금 상대를 노려보는 고대릉의 눈빛은 투사(鬪士)의 눈빛이었다.
비록 어설프고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몸놀림이었지만, 그리고 반격을 염두에 두지 않고 단지 황급히 피하는 동작에 불과 했지만, 얼굴을 상대의 가슴으로 묻고 바짝 거리를 당겨 좁힘으로써 연신 찍어 들어오는 상대의 무릎 공격을 무력화 시키고 있는 고대릉에게서는 이제 투지와 근성이 보이고 있었다.
줄곧 속수무책으로 얻어맞기만 하던 것과 비교하면, 놀라운 변화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대단한 체력과 근성이다. 여리고 순박하게만 보이던 그의 어디에서 저런 근성이 나오는 것일까?'
퍽!
"욱!"
처음으로 내뻗은 고대릉의 엉거주춤한 일권이 하필이면 금욱의 콧잔등을 정통으로 때려 버렸다.
그 한 방으로 금욱의 코에서는 피가 터졌다.
고대릉이 제풀에 놀라기라도 한 것처럼 흠칫하며 뒤로 한 발짝을 물러섰다.
그 찰나 금욱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대로 고대릉을 덮쳐눌렀고, 그 바람에 둘은 한덩어리가 되어 바닥으로 나뒹굴고 말았다.
이어 두 사람의 싸움은 땅바닥을 뒹굴며 치고 박는, 말 그대로의 이전투구(泥田鬪狗)의 양상으로 들어갔다.
엎치락뒤치락.
서로 뒤엉킨 상태에서 간간이 뻗어 내는 주먹은 대부분 헛손질이 되고 말았다.
헉헉대는 거친 숨소리.
결국은 체력과 근성의 싸움이 되었고, 그런 점에서라면 시간이 갈수록 고대릉은 금욱을 압도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 고대릉은 금욱의 배 위에 올라타고 앉아 양 무릎으로 금욱의 어깨를 찍어 누른 채, 마구 두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다.
퍽!
퍼억!
퍼퍽!
금욱의 얼굴은 금세 피투성이로 변해버렸다.
"잘한다."
"양팔을 완전히 제압해."
"어깨를 더 꽉 눌러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해."
남궁위덕과 화인영, 그리고 위지호준이었다.
처음에 그들로서는 생각할 수조차 없었던 낯선 방식의 대결에 이마만 잔뜩 찌푸리고 있던 그들은, 어느 순간부터 싸움에 빠져 들어 있었다.
멋도 없고 격도 없었지만, 원초적인 투지가 넘실거리는 싸움이었다.
보고 있자니, 마음을 흥분시키는 그 무엇이 있었던 것이다.
독고자강도 어느 순간부터인가 눈빛에 미미한 열기를 담고 있었다.
다만 공손도중만이 그 옥같은 얼굴에 경멸과 조롱을 감추지 않은 채, 뒷짐을 지고서 멀찌감치 떨어져 서 있었다.
"크윽! 그만해!!"
턱에까지 받친 숨을 헐떡거리며 겨우 뱉어 내는 금욱의 그 한 마디에, 짙은 미망(迷妄)에 빠져 있다가 문득 정신을 차린 사람처럼 고대릉이 멈칫하고 손을 멈추었다.
그리고 곧 허탈한 얼굴로 천천히 금욱의 배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바로 그 때였다.
어디서 그런 힘이 새삼스럽게 솟아난 것인지 금욱의 상체가 튕겨 올라오며 그의 머리가 고대릉의 얼굴을 그대로 들이받아 버렸다.
퍽!
뒤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나동그라지는 고대릉의 코와 입으로 피가 터졌다.
"어어?"
"저저..! 저런 비겁한 자식!"
남궁위덕 등이 제각기 안타까움의 소리를 질러 대었다.
"야! 이 쥐새끼 같은 놈아!"
등평이 또한 흥분하여 소리를 지르며 금방이라도 달려나갈 듯 몸을 들썩거렸다.
그러나 막상 그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않았다.
금욱이 몸을 일으켜 세우고 잠시 헐떡거리며 숨을 고르는 사이, 고대릉이 벌떡 몸을 일으켜서는 그대로 달려가 금욱을 덮쳤다.
금욱의 목을 한 팔로 휘감고 체중을 실어 바닥으로 쓰러뜨린 고대릉이, 이어 두 팔로 단단히 고리를 만들어 금욱의 목을 조이기 시작했다.
금욱의 입에서 금방 숨막히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컥!
커억!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그 광경은 오히려 도검을 맞대고 싸우는 것보다 훨씬 더 위태로워 보였으나, 등평 만은 감개무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틀만에 이루어지는 이 한 판의 역전(逆轉)은 얼마나 대단하고도 통쾌한 장면인가?
금욱은 악착같이 버둥거리다가 마침내 한계에 도달한 듯, 손발에 점차로 힘이 빠져 가는 모습이었다.
그의 얼굴은 백지장같이 하얗게 탈색이 되었고, 눈은 이미 돌아가 흰자위만 보였다.
그러나 고대릉은 전혀 아랑곳없이 막무가내로 조이고만 있었다.
지금 이 순간 고대릉에게는 금욱의 목을 조르는 것이야말로 지상과제라도 되는 듯하였다.
아마도 지금 그의 팔 안에서 조임을 당하고 있는 것은 금욱이 아니라, 요 이틀 동안 고대릉 자신을 견딜 수 없이 비참하게 만들었던 바로 그 두려움일지도 몰랐다.
지켜보고 있던 등평이 더 이상은 안 되겠던지 고대릉에게로 달려갔다.
등평이 고대릉의 팔을 풀며 귀에다가 소리를 질렀다.
"가주님! 그만하십시오. 조금만 더 하면 이 자는 절명하고 맙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고대릉이 천천히 팔의 힘을 풀었다.
등평이 다시 나직하게 속삭였다.
"가주님! 잘 하셨습니다."
철썩!
등평이 아직도 숨을 토해내지 못하고 있는 금욱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후려쳤다.
"커어억!"
그제야 길게 밭은 숨을 토해내며 금욱의 안색에 혈색이 돌아왔다.
금욱이 겨우 몸을 일으키자, 고대릉이 다시 달려들 듯 한 걸음을 가까이 다가섰다.
그러자 금욱은 비칠거리며 두 걸음을 얼른 물러났다.
그의 눈빛에 질린 기색이 완연하였다.
등평이 고대릉의 옷자락을 잡아채며 금욱을 향해 큰 소리로 변죽을 울렸다.
"이 놈! 너는 정말로 죽고 싶어서 아직도 여기서 미적거리고 있는 게냐? 썩 꺼지지 못할까?"
금욱이 움찔하였다가 고개를 푹 숙이고 어깨를 축 늘어뜨린 모습으로 모전동 등 무리들이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등평의 기세등등한 큰 소리와 금욱의 그와 같은 풀 죽은 모습에, 오공자와 석여령 등은 저마다 피식거리며 웃고 말았다.
고대릉은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그가 승자인 것은 분명한 사실인데, 오히려 그가 더 많이 맞았고, 그 흔적들은 고스란히 그의 얼굴에 붉고 푸른 색채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고대릉은 지금 가슴 속에서 뭔가 알지 못할 쾌감이 폭죽처럼 분출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뭐랄까?
참을 수 없는 희열이랄까, 아니면 승자로서의 자랑스러움이랄까.
하여간 고대릉으로서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껴 보는 그런 감정이었다.
그러나 그런 감정은 그야말로 잠깐 뿐이었다.
금방 감당하지 못할 우울과 비탄이 몰려들었다.
고대릉은 가만히 등평의 손을 뿌리치고 비틀거리며 정원 구석의 나무아래에 있는 바위를 향해 걸어갔다.
스스로의 비참한 모습과 처량한 심정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녀에게.
짜악!
모전동의 매서운 손길에 금욱의 고개가 홱하고 옆으로 돌아갔다.
"쓸모없는 놈!"
모전동이 차갑게 내뱉었다.
금욱은 감히 모전동의 눈길을 받지 못하고, 절뚝거리며 뒤쪽으로 물러섰다.
"장걸(張杰)!"
모전동의 외침에 네 명의 사내들 중 호리호리하면서도 단단해 보이는 체형을 지닌 사내가 짧게 대답했다.
"예! 당주님!"
"다음은 네 차례다. 준비하거라."
사내가 복명하며 한 걸음을 앞으로 나서는데, 바로 그 때 화인영이 느물거리며 모전동에게 말을 던졌다.
"에이, 여보시오! 염치가 좀 있어야지, 지금 무슨 차륜전이라도 한 번 해 보겠다는 거요? 그럼 우리 쪽에서는 이 번에 내가 한 번 나서 볼까?"
다분히 가볍고 시비조의 말투였지만, 그러나 그 말을 한 사람은 다름 아닌 화인영이었다.
모전동이 일시 뭐라고 대꾸를 못하고 있자, 화인영이 다시 달래듯 느물거렸다.
"너무 빡빡하게 그러지 말고, 좀 쉬었다가 다시 합시다. 거 구경하는 사람 입장도 생각을 좀 해주어야지, 안 그래도 엉겨 붙기나 하는 동네싸움이라 조금 지겨워질라 하는 판인데, 이제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에서 다시 붙여 놓으면 그 걸 무슨 재미로 보고 있으란 말이오?"
막상 모전동은 여전히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는데, 엉뚱하게 위지호준이 인상을 있는 대로 찡그리고서 막 뭐라고 일갈을 하려는 태세였다.
그러나 그는 마침 독고자강이 잔뜩 날이 선 무거운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것을 보고는 그만 멈칫하고 말았다.
위지호준이 다시 노화를 터뜨려 내기 전에, 석여령이 가만히 한숨을 불어 내쉬며 말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는 것으로 하죠. 오늘 중에 우리의 생각을 그 쪽에다 전하도록 할 것이니, 지금은 이대로 돌아들 가세요."
모전동은 그가 처음에 미리 말했던 바에 대해 다시 한 번 확실하게 못을 박아 놓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러나 그는 감히 입을 열지는 못했다.
석여령의 뒷쪽에 버티고 선 독고자강의 눈빛에서 한순간 번뜩이며 지나가는 살기를 보았기 때문이다.
이미 독고자강의 인물됨에 대해 알고 있기도 했지만, 모전동의 본능이 또한 경고하고 있었다.
독고자강과 같은 눈빛의 사람은, 오히려 말이나 기세로 위협하는 사람보다도 백배는 더 위험하다는 것을.
그런 사람은 위협을 하지 않는다.
다만 상대가 자신이 마음 속으로 정하고 있는 기준이나 어떤 한계를 넘어서는 순간, 가차없이 칼을 뽑아 들뿐이다.
독고자강은 바로 그런 유형의 사람이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