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姓)씨 사용의 의의
각 성(姓)의 시조란 그 성씨를 최초로 쓰게 된 사람을 말하는데, 성씨의 발생근원은 정확한 기록이 없어 상세히 알 수 없으나, 대략 중국의 성씨 제도로부터 영향을 받아 고조선(古朝鮮)시대에 왕족(王族)에서부터 사용한 것으로 전해진다.우리 민족은 인종학적으로 보면 황색인종(黃色人種), 언어학적으로 보면 우랄알타이어족에 속하는데,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구석기(舊石器) 시대의 유물로 미루어 볼 때 이미 몇 만 년 전에 만주와 한반도에 걸쳐서 석기인들이 살고 있었으며, 그 후 신석기 시대에 이르기까지 대체적으로 세 갈래길[랴오허강 상류와 씅화강 유역에서 압록강 중류와 상류를 남하하여 척량산맥(脊梁山脈)을 넘어 한반도 동해에 이르는 길, 중국의 북방으로부터 해안을 따라 한반도 서해안으로 이르는 길, 중국의 산둥반도에서 바다를 건너 한반도 서해안에 이르는 길 등]로 흩어져 들어와 한반도 전역에 걸쳐 원시사회를 형성하여 살게 되었다.이후 사회형태가 점점 발달하여 고대씨족사회로 접어들면서 그 집단을 통솔하는 지배자가 출현하게 되었을 때, 다른 씨족과 구별하여 통솔에 필요한 정치적 기능을 부여하기 위해 사용한 호칭이 곧 성(姓)으로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 후 지방세력이 점차 중앙 귀족화되면서 다수의 부족을 통솔하는 칭호로서 정치적 신분을 표시하는 의미로 발전하였다. 따라서 성은 초기에 왕실이나 귀족에서만 국한되어 사용되다가, 국가에 공이 큰 공신(功臣)들이나귀화인(歸化人)들에게 그들이 대대로 살아온 주거지역이나 강 산 등의 명칭을 따서 성을 내리게 되면서 확대되게 되었다.그러나 일반서민들의 성씨 사용은 과거제도가 발달되기 시작한 고려 문종(文宗, A. D. 1047년) 이후부터 보편화되었으며, 상민(常民)과 노비(奴婢) 등 모든 사람들이 성을 갖게 된 것은 조선말 개혁정치가 시행되면서부터이다.
시조(始祖), 중시조(中始祖), 파시조(派始祖)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이름 앞의 성(姓)은 언제부터 쓰기 시작했을까요? 사주명리학의 국내 권위자로 알려진 김동완 역술가가 지은『사주명리 인문학, 2019』에서는 성씨(姓氏)의 기원(起源)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성은 모계사회에서 시작되었다. 성(姓)이란 글자는 계집 ‘여(女)’자와 낳는다, 탄생한다를 뜻하는 ‘생(生)’자가 조합된 것인데 이것만 보아도 곧바로 유추할 수 있다. 계집 또는 여자는 보통 어미를 상징하기 때문에 원래 성은 어미의 성을 의미했다. 그러다 부계사회로 바뀌면서 아버지 성을 따르게 되었고 그때는 성을 씨(氏)라고 부르게 되었다. 부계사회가 완전히 정착된 후에는 성이나 씨나 모두 아버지의 성을 상징하게 되었다.』
고대에는 성씨(姓氏)가 곧 신분을 상징하였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그저 이름만 있었지 성씨(姓氏)는 없었습니다. 부족국가였던 삼한(三韓)시대부터 삼국시대에 이르기까지 성(姓)을 사용했지만 성을 사용하는 사람보다는 성을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이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백성(百姓)이란 말은 백가지 성씨(姓氏)란 뜻입니다. 오늘날 국민이란 말과 비슷한 뜻으로 사용했습니다. 원래는 나라에 공(功)을 세워 일정한 지위를 지닌 벼슬아치를 부르던 명칭이었다고 합니다. 성(姓)은 임금이 나라에 공이 있는 신하에게 내려 주던 것이었습니다. 임금이 성(姓)을 하사(下賜)해 주는 것을 사성(賜姓)이라고 합니다.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은 개국공신(開國功臣: 새로 나라를 세울 때에 공훈이 많은 신하)들과 지방 토호(土豪: 지방에 살면서 세력을 떨치던 사람)세력들을 규합하기 위해 전국을 군(郡), 현(縣)으로 개편하면서 성(姓)을 하사했습니다. 그로 인해 우리나라 성씨(姓氏)의 체계가 확립됩니다. 이 때 성(姓)을 하사받은 개국공신과 토호민(土豪民)은 각 성씨의 시조(始祖)가 됩니다. 이처럼 고려 초기부터 귀족, 관료들은 거의 다 성(姓)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고려 문종 9년(1055년)에 성(姓)이 없는 사람은 과거시험에 응시할 수 없다는 법령을 내렸다고 하는데 이때까지도 성을 쓰지 않은 사람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귀족, 관료들만 성(姓)을 사용하고 민중은 성(姓)을 쓰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고려 문종 이후부터 서서히 성(姓)이 늘어난 것 같습니다.
조선시대에는 개국초기부터 일반 백성들도 성(姓)을 사용했습니다. 다만 노비와 천민계급은 조선 후기까지도 성(姓)을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1909년 새로운 민적법(民籍法)이 시행되면서 누구라도 성(姓)과 본(本)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씨(氏)와 가(哥)는 모두 성씨(姓氏)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웃어른이 나에게 성(姓)을 물으면 ‘원주 변가’ 라고 대답을 해야 합니다. ‘원주 변씨’ 라고 대답하면 잘못된 표현입니다. 가(哥)는 씨(氏)보다 자기를 낮추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상대방에 대해 표현할 때는 ‘그는 김씨입니다’ 라고, 나를 상대방에게 말할 때는 ‘변가입니다’ 라고 하는 것이 예법에 맞습니다.
중시조(中始祖)는 쇠퇴한 가문을 일으킨 조상(祖上)을 의미합니다. 시조(始祖)는 그 성씨(姓氏)의 최초 시작인 분으로 한 분인데 반해, 중시조(中始祖)는 여러 명이 되기도 합니다. 시조의 후손 중에서 파(派)를 나누게 되면 분파(分派)를 한 첫 번째 조상이 파시조(派始祖)가 됩니다. 파시조(派始祖)는 파조(派祖)라고도 합니다.
종파(宗派)란 지파(支派)에 대한 종가(宗家: 한 문중에서 맏이로만 이어 온 큰집으로 종갓집이라고 함)의 계통을 말하며, 종파(宗派)로부터 자기가 갈리어 나온 계통을 파속(派屬)이라고 합니다.
대체로 가문(家門)을 중흥시킨 중흥조(中興祖)를 중심으로 파(派)를 설정하며, 직함(職銜: 벼슬 이름), 시호[諡號: 사망 후에 그 공덕을 칭송하여 임금이 추증(追贈: 나라에 공로가 있는 벼슬아치가 죽은 뒤 그 품계를 높여 줌)하던 이름], 아호(雅號: 본명 외에 갖는 호나 별호를 높여 이르는 말), 세거지명(世居地名: 대대로 살고 있는 고장의 이름), 봉군지명[封君地名: 2품 이상의 종친과 공신 등이 군(君)으로 봉(封)받은 이름] 등에 공(公)자를 붙여서 파속(派屬)을 결정하는 것이 통례(通例)였습니다.
전씨의 유래
우리나라 전(全)씨는 백제 개국공신인 전섭(全聶)을 도시조(都始祖)로 하고 있다.
그는 고구려 동명왕의 셋째 아들 온조(溫祚)가 백제를 건국할 때 마려(馬黎), 오간(烏干), 전섭(全聶), 을음(乙音) 등과 함께 온조(溫祚)를 도운 10명의 십제[백제]공신 중의 한 분으로 후에 환성군(歡城君)에 봉해졌다. 신라통일 이후 8세손 전선(全愃)이 신라 성덕왕 22년 당나라에 입국하여 중국의 문물을 국내에 소개한 인물로 후에 벼슬이 전법판서(典法判書)에 오르고 정선군(旌善君)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전섭(全聶)을 시조로 하고, 전선(全愃)을 득관중시조로 하고 있다. 전씨문중은 정선,천안,성산 등 18본으로 분관되지만 모든 전씨는 전섭(全聶)을 도시조로 하고, 정선(旌善)을 대종으로 한다.
시조 소개
도시조(都始祖) 전섭(全聶)의 8세손 전선(全愃)이 신라 성덕왕 22년 백제(百濟)로부터 대광공주(大光公主)를 배행(陪行)하고 신라(新羅)에 들어와 봉익대부(奉翊大夫)로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를 지냈으며 전법판서(典法判書)에 올라 정선군(旌善君)에 봉해졌다.그리하여 후손들이 전선(全愃)을 득관중시조로 받들고, 정선(旌善)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정선(旌善)은 강원도 남동부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의 잉매현(仍買縣)인데, 통일신라 경덕왕 때 정선(旌善)이라 개칭하여 명주(溟州)의 영현(領縣)이라 하였고, 1018년(고려 헌종 9) 그대로 명주(溟州)의 속현으로 하였다가 군으로 승격시켰다. 1895년(조선 고종32) 5월에 지방관제 개편에 따라 충주부(忠州府) 정선군(旌善郡)이 되었고, 1896년 도제(道制) 실시에 따라 다시 강원도 정선군(旌善郡)으로 환원시켰다.
전씨(全氏)의 도시조(都始祖)인 전섭(全聶)의 8세손 전선(全愃)이 신라(新羅) 때 백제(百濟)로부터 대광공주(大光公主)를 배행(陪行)하고 신라(新羅)에 들어와 봉익대부(奉翊大夫) 부지밀직사사(副密直司事)를 지냈으며 전법판서(典法判書)에 올라 정선군(旌善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전선(全愃)을 중시조로 받들고, 정선(旌善)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이곳의 묘(墓)는 하나의 언덕에 위아래로 묘역(墓域)이 조성되어 있다.
부인 내성신씨(奈城辛氏)의 묘(墓)가 위에 있고 정선군 전선(全愃)의 묘(墓)가 아래에 있다. 봉분(封墳)에는 둘레석을 두르고 상석과 비석이 있고, 문인석과 석양과 사자, 망주석, 장명등이 좌우로 설치되어 있다. 보통의 묘역(墓域)에는 장명등이 상석 앞에 하나가 있는데 이곳에는 특이하게 좌우로 장명등을 설치하였다. 묘역(墓域) 주위는 깨끗하게 손질을 하여 후손들의 조상 공경에 대한 정성을 느끼게 한다.
혈장(穴場) 주위에는 문필봉(文筆峰)과 쌍천귀(雙薦貴)를 비롯하여 귀인봉(貴人峰)들이 서로 자랑하여 솟아있는 듯하다.
설심부(雪心賦)에서 사요수(沙要秀)라 하였는데 이곳의 산들이 모두 사요수(沙要秀)에 해당하고 형이특달위조(形以特達爲尊)에 해당하며 주위의 모든 산이 이곳에 모여 있는 듯하다.
설심부(雪心賦)에서 중산지처시진혈 중수지처시명당(衆山止處是眞穴 衆水止處是明堂)이라 하였는데 과연 이곳에 진혈(眞穴)이 있는 듯하다.
전씨 시조, 18개 본관(분파) 및 인구
전씨 시조의 휘(諱)는 섭(聶)이요 성(姓)은 전씨(全氏)이며, 백제(百濟) 온조왕(溫祚王)을 도와 마려(馬黎), 오간(烏干), 전섭(全聶), 을음(乙音) 등 10인과 위례성(慰禮城)에 이르러 국도(國都)를 정하고 나라를 세우는 큰 사업을 완수함에 십제공신(十濟功臣)에 책봉되고 환성군(歡城君)으로 피봉(被封)되었으니 공(公)의 훈덕(勳德)은 기술할만한 것이 많으나 연대(年代)가 아득히 멀어 부인(夫人)의 성씨와 아울러 묘지(墓地)도 전해지지 않는다. 그 후 서기 1925년에 서울 동대문 밖 이문동에 설단(設壇)하고 해마다 향사(享祀)한다.
공(公)의 아들인 휘(諱) 호익(虎翼)은 병상(兵相)을 지냈고, 손(孫) 휘(諱) 반(槃)은 한(漢)나라에 입조(入朝)하여 대장군(大將軍)이 되어 홍농후(弘農侯)에 봉해져 대대로 세습(世襲)해오다 8세손인 휘(諱) 선(愃)께서 신라(新羅)로 돌아와 정선군(旌善君)에 봉해진 후 자손이 번성하였으며, 자손들 중 대략 크게 현달(顯達)한 분만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6세손 휘(諱) 이갑(以甲)은 정선군(旌善君)이고, 의갑(義甲)은 죽산군(竹山君)이며, 락(樂)은 천안군(天安君)이다. 25세손 휘(諱) 원태(元台)는 팔거군(八莒君)이오, 26세손 휘(諱) 흥(興)은 성산군(星山君)이고, 휘(諱) 익(翼)은 황간군(黃澗君)이오, 27세손 휘(諱) 유(侑)는 관성군(菅城君)이고, 휘(諱) 공식(公植)은 계림군(鷄林君)이오, 휘(諱) 영령(泳齡)은 옥산군(玉山君)이며, 28세손의 휘(諱) 한(僩)은 죽산군(竹山君)이고, 휘(諱) 순(順)은 성산백(星山伯)이요, 29세손의 휘(諱) 살리(撒里)는 함창군(咸昌君)이며, 휘(諱) 빈(賓)은 평강백(平康伯)이고, 30세손의 휘(諱) 영(泳)은 기장백(機張伯)이오, 휘(諱) 집(潗)은 완산군(完山君)이고, 휘(諱) 경(卿)은 나성군(羅城君)이며, 휘(諱) 언(彦)은 감천군(甘泉君)이오, 33세의 휘(諱) 원발(元發)은 축산부원군(竺山府院君)이니 봉지(封地)에 따라 분관(分貫)된 분이 18명에 달한다.
전씨(全氏)는 시조인 전섭(全聶)으로부터 정선, 천안, 옥천, 나주, 전주, 용궁, 옥산, 죽산, 성주, 감천, 평강, 부여, 함창, 계림, 황간, 기장, 팔거 등 18본이 분관되었다.
고관대작이 된 전씨 인물을 총정리하여 1906년 간행된『전씨관면록(全氏冠冕錄)』에 따르면 역사상 봉군(封君) 35명과 정승급(政丞級) 12명, 상서급(尙書級:判書級) 43명, 참판(參判) 4명, 대장(大將) 7명, 병사(兵使)·수사(水使) 4명 등을 배출했는데, 이는 대부분 고려시대의 인물들이며 반면에 조선시대에는 전체적으로 가세가 많이 기울었다. 조선시대에 가세가 기울게 된 이유는 당시 대부분의 전씨 인물들이 조선 건국을 반대하며 각자의 고향으로 낙향했기 때문이다.
평강 전씨(平康全氏) 학송(鶴松) 전유형(全有亨)의 문집(文集)인 학송집(鶴松集)에는 전유형(全有亨)이 임진왜란 때 조헌(趙憲)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을 때의 일을 기록한 학송일기(鶴松日記)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 일기의 내용 중 조헌(趙憲)과 주고받은 편지에서 조헌(趙憲)이 전씨(全氏) 가문을 삼한구족(三韓舊族) 즉, 옛날에 지체가 높았던 오래된 집안이라고 칭하는 부분이 있다. 조긍섭(曺兢燮)의 문집인 암서집(巖棲集)에 옥산파인 추파(秋坡) 전억기(全抑己)의 묘갈명이 실려있는데 그 내용 중에 “전씨(全氏)는 백제와 고려가 일어났을 때 모두 공훈과 작록이 있었다”라는 부분이 있다. 옥천 전씨(沃川全氏) 전팽령(全彭年)이 1554년에 작성한 족보의 서문에 백제와 고려에서 높은 관직에 올라 명성이 있었다는 언급이 있다. 또한 원문에 ‘이제 조선조(朝鮮朝)가 들어서서는 전사(음서)를 하신 분이 역시 많으니’라는 문구가 있다. 고려 초기 공산전투(公山戰鬪)에서 순절한 전이갑(全以甲), 전의갑(全義甲) 형제의 충절을 치하하여 그 후손에게 군역을 면제하고 음덕(蔭德)을 내리라는 명이 태조 왕건 때 있었는데 이것이 조선조(朝鮮朝)까지 유지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족보 서문에 적힌 전사를 하신 분이 많다는 말은 바로 전이갑(全以甲), 전의갑(全義甲) 형제의 충절로 받은 음서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옥천, 완산(전주), 옥산(경산) 등 대개의 분파들은 정선(旌善)을 대종으로 하는 상계(上系)를 존중하는 반면, 천안 전씨(天安全氏)의 경우 정선파 위주의 상계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로 인해 1924년 『전씨총보(全氏總譜)』, 1966년 『전씨대동보(全氏大同譜)』를 간행한 이래 모든 전씨(全氏)를 아우르는 대동보 편찬이 번번이 무산되어 왔다. 1991년 『전씨대동보』가 한 차례 더 발간되긴 했지만 정선파의 일부 계파가 관향(貫鄕)을 명시하지 않고 단지『전씨대동보(全氏大同譜)』라고 명명하는 것에 대한 불만으로 천안파가 참여하지 않아 불완전한 대동보에 그치고 말았다. 전씨(全氏)의 인구는 2015년 통계청의 성씨.본관별 인구조사에 의하면 총 559,110명으로, 18개 본관(분파) 중에선 정선(旌善)과 천안(天安) 양대 분파 인구가 각각 17만 명을 상회한다. 본래 정선 전씨(旌善全氏)의 인구가 더 많았으나 2015년 기준 통계로 천안 전씨(天安全氏)에게 역전되었다. 이외에 옥천, 용궁, 경산(옥산), 완산이 중견급의 규모를 보이며 나주, 죽산, 성산, 성주, 안동, 평강, 부여, 함창, 계림, 기장, 황간, 팔거, 경성 등의 분파가 현전한다. 천안 전씨(天安全氏)는 충청도와 전라도에서 주로 볼 수 있다. 정선 전씨(旌善全氏)는 정반대로 강원도와 경상도에 주로 거주한다. 용궁과 옥산은 90% 경상도 지역이다.
• 정선 전씨(旌善全氏); 도시조 전섭(全聶)의 8세손인 신라조(新羅朝) 정선군(旌善君) 전선(全愃)을 중시조로 한다. 그는 백제의 대광공주(大光公主)를 배행하고 신라에 들어가 신라 성덕왕(재위 702년∼737년) 때 전법판서(典法判書)를 지내고 정선군(旌善君)에 봉해졌다고 한다. 정선 전씨(旌善全氏)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10명을 배출하였다. 2015년 인구는 176,226명이다.
• 천안 전씨(天安全氏); 도시조 전섭(全聶)의 16세손인 고려조(高麗朝) 천안부원군(天安府院君) 전락(全樂)을 중시조로 한다. 그는 고려 개국공신으로 삼사좌복야(三司左僕射)를 지냈으며, 천안부원군(天安府院君)에 봉해졌다. 천안 전씨(天安全氏)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4명을 배출하였다. 2015년 인구는 176,239명이다.
• 옥천 전씨(沃川全氏); 도시조 전섭(全聶)의 23세손인 고려조(高麗朝) 동정(同正) 전학준(全學俊)을 중시조로 한다. 그는 영동정(領同正)을 역임했으며, 그의 5세손 전유(全侑)가 고려 때 밀직부사(密直副使), 판도판서(版圖判書), 상호군(上護軍) 등을 지내고 관성군(管城君)에 봉해졌다. 옥천 전씨(沃川全氏)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6명을 배출하였다. 2015년 인구는 47,681명이다.
• 경산 전씨(慶山全氏) 또는 옥산 전씨(玉山全氏); 도시조 전섭(全聶)의 27세손인 고려조(高麗朝) 옥산군(玉山君) 전영령(全永齡)을 중시조로 한다. 고려 신종(神宗) 때 신호위대장군(神虎衛大將軍)으로 공(功)을 세워 옥산군(玉山君)에 봉해졌다고 한다. 전억령(全億齡)의 손자 전백영(全伯英)이 1371년(고려 공민왕 20년) 문과에 급제하여 1405년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에 이르렀다. 2015년 인구는 경산전씨(慶山全氏)가 23,923명, 옥산전씨(玉山全氏)가 13,113명이다.
• 죽산 전씨(竹山全氏); 도시조 전섭(全聶)의 28세손인 고려조(高麗朝) 죽산군(竹山君) 전한(全僩)을 중시조로 한다. 그는 고려 때 문과에 합격하여 고종 때 밀직부사(密直副使)되어 1231년(고종 18)에 몽골군이 침입했을 때 성신진(成新鎭)을 방어하여 공을 세웠다. 그리하여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책록되었고, 죽산군(竹山君)에 봉해졌다. 2015년 인구는 10,757명이다.
• 용궁 전씨(龍宮全氏); 도시조 전섭(全聶)의 28세손인 고려조(高麗朝) 용성부원군(龍城府院君) 전방숙(全邦淑)을 중시조로 한다. 그는 고려 충렬왕 때 한림학사(翰林學士)를 거쳐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에 올랐으며, 용성부원군(龍城府院君)에 봉해졌다. 2015년 인구는 37,922명이다.
• 평강 전씨(平康全氏); 도시조 전섭(全聶)의 28세손인 고려조(高麗朝) 평강백(平康伯) 전승(全勝)을 중시조로 한다. 그는 고려 때 시중을 지냈으며, 그의 아들 전빈(全賓)은 1371년(고려 공민왕 20년)에 문과에 합격하여 정언(正言), 숙천부사(肅川府使) 등을 역임하고 조선이 개국되자 간의대부(諫議大夫)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지내고 평강백(平康伯)에 봉해졌다. 2015년 인구는 3,467명이다.
• 나주 전씨(羅州全氏); 도시조 전섭(全聶)의 30세손인 고려조(高麗朝) 나성군(羅城君) 전경(全卿)을 중시조로 한다. 그는 고려 충렬왕 때 국자좨주(國子祭酒)를 역임하고 1341년(충혜왕 복위 2년) 조적의 난에 공을 세워 나성군(羅城君)에 봉해졌다. 2015년 인구는 3,288명이다.
• 완산 전씨(完山全氏) 또는 전주 전씨(全州全氏); 도시조 전섭(全聶)의 30세손인 고려조(高麗朝) 완산군(完山君) 전집(全潗)을 중시조로 한다. 그는 1361년 고려 공민왕(恭愍王 10년) 때 중랑장(中郞將)으로 홍건적을 물리치는데 공을 세워 추충정난호성공신(推忠靖亂扈聖功臣)이 되었고, 완산백(完山伯)에 봉해졌다. 2015년 인구는 전주전씨(全州全氏)가 24,886명, 완산전씨(完山全氏)가 1,753명이다.
• 감천 전씨(甘泉全氏) 또는 안동 전씨(安東全氏); 도시조 전섭(全聶)의 30세손인 고려조(高麗朝) 감천군(甘泉君) 전언(全彦)을 중시조로 한다. 그는 고려 충숙왕(忠肅王) 때 밀직부사(密直副使)를 거쳐 판전농사사(判典農寺事)를 지냈으며,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책록되어 감천군(甘泉君)에 봉해졌다. 2015년 인구는 3,870명이다.
• 성산 전씨(星山全氏); 성산군파(星山君派); 고려조 성산군(星山君) 전흥(全興)을 중시조로 한다. 성산백파(星山伯派); 고려조 성산백(星山伯) 전순(全順)을 중시조로 한다. 인구: 2,772 가구, 8,738명
• 경주[계림] 전씨(慶川全氏); 고려조 계림군(鷄林君) 전공식(全公植)을 중시조로 한다. 인구: 1,892 가구, 6,005명
• 함창 전씨(咸昌全氏); 고려조 함창군(咸昌君) 전살리(全撒里)를 중시조로 한다. 인구: 115 가구, 392명
• 황간 전씨(黃澗全氏); 고려조 황간군(黃澗君) 전익(全翼)을 중시조로 한다. 인구: 64 가구, 237명
• 기장 전씨(機張全氏); 고려조 기장백(機張伯) 전영(全泳)을 중시조로 한다. 인구: 68 가구, 223명
• 팔거 전씨(八莒全氏); 고려조 팔거군(八莒君) 전원태(全元台)를 중시조로 한다. 인구: 34 가구, 115명
• 보성 전씨(寶城全氏); 조선조 참의(參議) 전영달(全穎達)을 시조로 한다. 인구: 224 가구, 737명
• 부여 전씨(扶餘全氏); 조선조 부여에 수령으로 부임했던 전권(全綣)을 중시조로 한다. 인구: 148 가구, 473명
<기타>
• 강릉 전씨(江陵全氏) 인구: 2,044 가구, 6,333명
• 온양 전씨(溫陽全氏) 인구: 1,729 가구, 5,606명
• 성주 전씨(星州全氏) 인구: 1,410 가구, 4,654명
• 김해 전씨(金海全氏) 인구: 530 가구, 1,634명
• 원주 전씨(原州全氏) 인구: 524 가구, 1,606명
• 광산 전씨(光山全氏) 인구: 494 가구, 1,519명
• 선산 전씨(善山全氏) 인구: 459 가구, 1,519명
• 진주 전씨(晉州全氏) 인구: 487 가구, 1,501명
• 거창 전씨(居昌全氏) 인구: 467 가구, 1,474명
• 강원 전씨(江原全氏) 인구: 451 가구, 1,431명
• 경성 전씨(鏡城全氏) 인구: 431 가구, 1,374명
• 남원 전씨(南原全氏) 인구: 426 가구, 1,288명
• 고령 전씨(高靈全氏) 인구: 340 가구, 1,120명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가나다 순)
• 전공취(全公就); 고려(高麗) 때 상서(尙書)를 역임하였다.
• 전덕기(全德基); 독립운동가. 경기도 이천(利川) 출신. 서울 상동교회(尙洞敎會) 목사로 상동청년회(尙洞靑年會)를 조직, 애국청년을 모아 민족운동을 지도하고, 1906년(광무 10) 이준(李儁)·박정동(朴晶東)과 함께 국민교육회(國民敎育會)를 창설, 국권 회복(國權回復)을 위해 노력했다. 이듬해 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安昌浩)를 중심으로 양기탁(梁起鐸)·이갑(李甲)·윤치호(尹致昊) 등과 신민회(新民會)를 조직, 그 중앙위원(中央委員)이 되어 전국적인 배일(排日)운동을 벌였다. 1911년 105인 사건으로 한때 투옥되었다가 석방된 후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서울에서 병사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單章)이 수여되었다.
• 전덕명(全德明); ?~1926. 독립운동가. 평북 용천(龍川) 출신. 한일합방 후에 종형(從兄) 덕원(德元)과 남만주로 망명, 독립단(獨立團)에 가입한 뒤 남만주의 각 단체 통일후원대장(各團體統一後隊長)이 되었다. 1926년 참의부 참의장(參議府參議長) 최석순(崔碩淳) 등과 고마령(古馬嶺)에서 군사회의를 하던 중 일본 경찰의 습격을 받고 전사했다.
• 전덕원(全德元); 1870(고종 7)~?. 독립운동가. 호는 호은(湖隱)·정송(挺松). 평북 용천(龍川) 출신. 유인석(柳麟錫)의 문인으로 1905년(광무9)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자 상경, 각국 공사(公使)에게 일본 침략을 규탄하는 격문(檄文)을 보내고 의병을 일으켰다가 이듬해 황주(黃州)로 귀양갔다. 1910년 한일합방으로 풀려나와 1912년 만주로 망명, 1919년 유하현(柳河縣)에서 동지들과 조선독립단(朝鮮獨立團)을 조직, 재무부장이 되었다. 그 해 부하를 이끌고 입국, 5천 7백원의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했고, 이듬해 다시 국내에 들어와 30여만원의 거액을 모금했다. 1922년 독립운동단체의 연합체인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가 조직되자 다시 재무부장에 취임, 이듬해 환인현(桓仁縣)으로 이주하여 의군부(義軍府)를 조직하고 군무부장(軍務部長)이 되어 80여명의 부하를 이끌고 귀국, 신의주(新義州)·성진(城津)·청진(淸津) 등의 주재소(駐在所)·세관 관공서를 파괴하여 임가구(林家溝)에서 체포되었다. 평양에서 1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출옥 후에는 이병기(李炳基)·홍주(洪疇)·박승연(朴勝衍) 등과 독립운동사를 편찬하며 계속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박상문(朴尙文)의 밀고에 피체, 옥사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單章)이 수여되었다.
• 전보인(全輔仁); ?~1019. 고려 현종(高麗 顯宗 10) 때 문신. 989년 고려 성종(高麗 成宗 8) 때 나주목 경학박사(羅州牧經學博士)로서 후학(後學)지도에 힘써 포상(褒賞)을 받았다.
• 전봉준(全琫準); 1855~1895. 조선말기의 녹두장군 전봉준(全琫準)은 이 땅에 최초로 자유민주주의의 싹을 트게 한 동학혁명의 지도자이다. 그는 삼충공의 한 사람인 전락(全樂)의 후손으로, 그의 아버지가 민란의 주모자로 처형되자 사회개혁을 결심하고 30세 때 동학에 입문하여 고부접주(古阜接主)가 된다. 그리고 당시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학정에 백성이 고통받자 보다 못해 동학혁명을 일으켜 백성이 나라의 주인임을 일깨워준다. 처음에는 계속 승전하여 전주를 점령하고 크게 전세를 떨쳤으나 정부의 요청으로 청군이 들어오고, 천진조약(天津條約)을 빙자해 일본군도 입국하자 이천, 목천, 공주의 혈전에서 패배하고, 현상금을 탐낸 한신현(韓信賢) 등의 지방민에 의해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당했다. 이러한 동학혁명에서 불붙기 시작한 민족혼은 일제의 암흑기에 이르러 숱한 독립투사를 배출한다.
• 전봉학(全奉學); ?~1905(광무 9). 조선의 순국지사.육군 평양대(平壤隊)의 병졸로 있다가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자 동료 윤두병(尹斗炳)·주병준(朱秉濬) 등과 함께 대궐 문 앞에서 자결, 순국했다.
• 전 선(全 愃); 신라(新羅) 내물왕(奈物王) 때 백제로부터 공주(公主)를 배종(陪從)하고 신라에 들어와 봉익대부(奉翊大夫)에 책록(策錄)되었으며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전법판서(典法判書) 등을 역임하고 정선군(旌善君)에 봉해졌다.
• 전수송(全守松); 고려(高麗) 때 상서(尙書)를 지냈다.
• 전 숙(全 淑); 고려(高麗) 때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이르렀다.
• 전 순(全 順); 고려(高麗) 때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지냈다.
• 전승택(全承澤); 고려(高麗) 때 승상(丞相)을 역임하였다.
• 전 신(全 信); 고려(高麗) 때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냈다.
• 전 언(全 彦); 고려(高麗)의 공신. 1324년 충숙왕(忠肅王 11) 때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고 감천군(甘泉君)에 봉해졌다.1326년 원(元)나라가 고려(高麗)를 통합하여 그들의 성(省)으로 만들려는 것을 찬성사(贊成事) 김이(金怡)·전영보(全永輔) 등과 함께 극력 반대하여 물리침으로써 1등 공신(功臣)에 올랐고, 1331년 충혜왕(忠惠王 1) 때 찬성사(贊成事)가 되었다.
• 전영보(全英甫); 고려(高麗) 충렬왕(忠烈王) 때 낭장(郞將)을 거쳐 대호군(大護軍)·밀직부사(密直府使)·대사헌(大司憲) 등을 역임하였으며 1324년 충숙왕(忠肅王 11) 때 첨의평리(僉議評理)를 역임하였다. 1326년 충숙왕(忠肅王 13) 때 원(元)나라가 고려(高麗)를 그들의 성(省)으로 만들려하자 김이(金怡)·전언(全彦) 등과 함께 강력히 반대하여 이를 물리쳐 1등 공신(功臣)에 올랐고, 1321년(충숙왕 8)부터 충숙왕(忠肅王)을 원(元)나라에서 시종했던 공으로 1327년 충숙왕(忠肅王 14) 찬성사(贊成事)로서 1등 공신(功臣)이 되었다. 그 후 1339년 충숙왕(忠肅王 복위 8) 때 삼사사(三司使), 1341년 충혜왕(忠惠王 2) 때 순군만호(巡軍萬戶)가 되었다.
• 전예순(全禮淳); 1896(건양 1)~1928. 독립운동가. 평남 안주(安州) 출신. 3·1운동 때 안주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1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출옥 후 만주로 망명,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여 군자금 모집과 연락 임무를 담당하다가 신의주에서 다시 체포되어 5년형을 선고받고 1927년에 출옥했다.
• 전오륜(全五倫); 정선아리랑의 작가. 고려(高麗) 때 문신(文臣)으로 호는 채미헌(採薇軒), 1391년 공양왕(恭讓王 3) 때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형조판서(刑曹判書)를 지냈고 1392년에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절개를 지켰으며, 후에 고향인 서운산(瑞雲山)에 은거(隱居)하며 옛날 중국의 백이(伯夷), 숙제(淑齊)가 수양산(首陽山)에 숨어 살며 고사리를 캐어 먹은 고사(故事)를 본따 호를 채미헌(採薇軒)이라고 하였다. 안의(安義)의 서산서원(西山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 전우화(全遇和); 고려(高麗) 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 전응견(全應堅); 고려(高麗) 때 상서(尙書)를 역임하였다.
• 전 의(全 懿); 고려(高麗) 때 상서(尙書)를 역임하였다.
• 전의갑(全義甲); 고려 개국(高麗開國) 초(初)에 대장군(大將軍)을 지낼 때 형(兄) 이갑(以甲)과 함께 순절(殉節)하였다.
• 전이갑(全以甲); 자(字)는 자경(子經), 호(號)는 도원(桃源), 시호(諡號)는 충렬(忠烈), 고려(高麗) 때 시중(侍中)을 역임하였으며 고려 개국(高麗開國) 때 태사공(太師公)으로 공(功)을 세워 개국공신(開國功臣)에 책록(策錄)되었다. 특히, 고려개국 삼충공(三忠公)인 전이갑(全以甲), 전의갑(全義甲), 전락(全樂) 등 3형제를 빼놓을 수 없다. 이들은 후삼국 통일의 야망을 키우던 왕건이 팔공산 오동숲에서 후백제 견훤의 군사와 일대 접전을 벌이다 적에게 포위를 당하자 전이갑(全以甲)이 왕건으로 가장하여 적의 주력부대를 유인하여 왕건을 탈출시키고 3형제는 최후까지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했다.
• 전이도(全以道); 고려(高麗)의 문신. 공민왕(恭愍王)이 세자로 원(元)나라에 머물 때 시종(侍從), 1351년 공민왕(恭愍王)의 즉위로 귀국하여 낭장(郞將)이 되고, 이듬해 1등 공신(功臣)에 올라 의성창사(義城倉使)가 되었다. 후에 예부시랑(禮部侍良)으로 경상도 진제사(慶尙道賑濟使)를 거쳐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를 역임하고, 1362년 공민왕(恭愍王) 11년에 홍건적(紅巾賊)의 침입 때 경성(京城:개성) 수복에 공을 세워 이듬해 2등 공신(功臣)에 안동도 병마사(安東道兵馬使)가 되었다.
• 전인학(全仁學); 1896(건양 1)~?. 독립운동가. 일명 일(一). 함북 길주(吉州) 출신. 한일합방 후에 블라디보스톡으로 건너가 이정국(李政國)·신대용(申大勇) 등과 만주·시베리아 각지를 순회, 독립운동을 벌였고, 1919년 3·1운동 때 시베리아 각지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했다. 신한촌(新韓村)에서 「한인신보(韓人申報)」가 발간되자 총리 겸 기자로 있으면서 항일기사를 썼으며, 1920년 대한민국의회(大韓民國議會)가 발족할 때 선전부장이 되어 러시아 혁명군 사령부 연해주(沿海州) 선전국장 포리소와 협의, 일본군대에 사회주의를 선전하는 전단(傳單)을 돌리다 체포되었다. 4년형의 선고를 받고 청진(淸津)에서 복역 중 감옥에서 비밀결사 적유 의용단(赤油義勇團)을 조직, 1923년 탈옥을 감행했으나 다시 체포되어 5년간 서울에서 복역했다. 1926년 만기 출옥, 북간도 혼춘(琿春)으로 돌아가 일생을 독립운동에 바쳤다.
• 전장이(全藏二); 고려(高麗) 때 상서(尙書)를 역임하였다.
• 전존걸(全存傑); ?~1193. 고려 명종(高麗 明宗 23) 때 문신. 1193년 고려 명종(高麗 明宗 23) 때 대장군(大將軍)으로서 장군 이지순(李至純)·이공정(李公靖)·김척후(金陟侯)·김경부(金慶夫)·노식(盧植) 등을 거느리고 운문(雲門)의 초적(草賊) 김사미(金沙彌), 초전(草田)의 초적 효심(孝心) 등을 칠 때, 초적의 재물을 탐낸 권신 이의민(李義旼)의 아들 이지순(李至純)이 적과 내통함으로써 관군의 동정이 수시로 누설되어 여러 번 패전했다. 이에 법대로 이지순(李至純)을 다스리면 그 아버지 이의민(李義旼)의 박해를 받을 것이며, 그대로 두자니 더욱 성할 것이라 개탄하고 기양현(基陽縣:안동)에 내려가 음독 자결했다.
• 전종도(全宗道); 신라(新羅) 때 승상(丞相)에 올랐다.
• 전 진(全 震); 고려(高麗) 때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였다.
• 전 총(全 寵); 고려(高麗) 때 상서(尙書)를 역임하였다.
• 전충수(全忠秀); 고려(高麗) 때 상서(尙書)를 역임하였다.
• 전충우(全忠佑); 고려(高麗)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하였다.
• 전함정(全咸正); 고려(高麗) 때 상서(尙書)를 역임하였다.
• 전 협(全 協); 1878 고종(高宗 15)~1927. 독립운동가. 서울 출신. 1898년에 농상공부 주사(農商工部主事)가 되고 제주 군수(濟州郡守)를 거쳐, 일진회 평의장(一進會評議長)·부평 군수(富平郡守) 등을 역임하고 만주로 망명, 서간도(西間島)·상해(上海) 등지로 왕래하며 항일운동을 하다가 1919년 귀국하여 3·1운동에 가담하고, 종교단체·상공단체·부인회·유림회(儒林會) 등 각계각층을 총망라하여 대동단(大同團)을 조직, 김가진(金嘉鎭)을 총재에 추대, 상해 임시정부와 연락하며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이듬해 김가진(金嘉鎭)을 상해로 탈출시키고, 이어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을 상해로 보내려다 안동현(安東縣)에게 발각되어 서울로 돌아왔으나 체포되어 10년 징역을 선고받고 복역 중 병보석되었다.
• 전호익(全虎翼); 백제(百濟) 때 승상(丞相)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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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성(姓)씨 사용의 의의를 통하여 우리 전씨 시조인 전섭((全聶) 할아버지는 이미 백제 개국 전부터 성(姓)씨를 가지게 되었답니다.
성(姓)은 초기에 왕실이나 귀족에서만 국한되어 사용되다가 국가에 공이 큰 공신(功臣)들에게 성(姓)을 내리게 되면서 확대되게 되었으며, 일반서민들의 성(姓)씨 사용은 과거제도가 발달되기 시작한 고려 문종(文宗, A. D. 1047년) 이후부터 보편화 되었고, 상민(常民)과 노비(奴婢) 등 모든 사람들이 성(姓)을 갖게 된 것은 조선말 개혁정치가 시행되면서부터라고 하니 백제 개국 전부터 성(姓)씨를 가지게 되었다니 참으로 후손으로써 자긍심을 가질만 합니다. 또한 가문을 빛낸 선조들도 소개하였으니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또한 시조, 중시조, 파시조 개념을 이해하면 뿌리탐구에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