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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9장 이혼과 독신에 대한 교훈 및 어린이 안수 사건과 한 부자 청년의 질문
구속사적 개관
본장과 다음 제 20장 두 장은 주께서 이제 전 3차에 걸쳐 진행되었던 갈릴리 사역을 모두 필하시고 마침내 십자가 수난을 당하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전까지 대략 6개월 동안 유대 및 베레아 등지에서 행하신 사역과 교훈을 보도하고 있다.
이런 문맥의 본장은 1-2절이 예수께서 이제 갈릴리 사역을 필하시고 유대 사역을 개시하셨음을 개략적으로 보도함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3-12절의 전반부에는 예수를 무조건적이고도 악의적으로 대항하는 종교지도자들이 예수의 약점을 잡고자 시도한 일련의 논쟁 사건의 하나로 교리상 까다로운 이혼 문제를 예수께 제기한 사건과 그에 즈음하여 예수께서 주신 독신에 대한 교훈이 보도되어 있다. 그리고 후반부 중 13-15절은 어린아이의 안수 사건을, 16-30절은 한 부자 청년의 영생을 얻을 방법에 대한 질문과 이에 즈음한 예수의 교훈을 보도하고 있다. 후반부의 두 문단은 천국에 들어갈 자의 자세 문제와 그에 따른 상급 문제에 대하여 교훈하신 말씀이라는 공통성을 갖고 있다.
전반부 3-12절의 이혼 논쟁도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께 제기한 논쟁이 모두 다 그러하듯이 순수한 논쟁이 아니었다. 즉 구약의 일부 내용만을 인본주의적으로 곡해한 그들의 유대교적 편견에 치우쳐서 자신들의 정치, 종교적 기득권이 침해될 것을 염려한 나머지, 사실 예수의 사역이 구약의 성취요 신약의 시작임을 인정하지 않고 무조건적 이고 악의적으로 예수를 배척하면서도 겉으로는 순수한 논쟁임을 가장하여 까다로운 문제만 제시하여 약점을 잡고자 제기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논쟁의 경우도 급기야는 예수의 무고한 처형에까지 이르러 결국 예수의 구속사역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던 당시 유대 지도자들의 예수 배척이라는 전반적 배경 하에서 이해하여야
하는 바 이에 대해서는 막 12장 연구 자료를 참조하라.
한편 본 논쟁 자체에서 특히 드러나는 특징을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먼저 예수께서는 유대주의자들이 율법의 참 정신을 도외시하고 형식적 규정에만 집착한 오류를 지적하셨다. 동시에 예수는 이제 당신의 성육신으로 새 국면을 맞은 새로운 구속사(救贖史)의 새 시대 곧 신약 시대에는 구약 시대보다 더욱 온전한 계시가 주어졌으므로 우리의 결혼이나 성생활의 기준도 새 시대에 맞는 온전한 것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력히 전제하셨다. 그리고 이에 부속되어 주어진 독신에 대한 교훈에는 결혼과 독신은 그 자체가 좋고 나쁜 것이 아니며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데 어느 것이 보다 더 유익한 것인가 하는 관점에서 결정될 문제임이 강조되어 있다.
한편 이런 이혼 논쟁의 배후에는 여성을 남성의 부속물처럼 생각하고 천시했던 당시 유대인의 사고방식이 깔려 있었다. 반면 예수님의 답변에는 여성도 남성과 함께 하나님의 동등한 피조물로서 그 인격과 지위에 있어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동등한 기준의 적용을 받아야 한다는 남․녀 평등주의(平等主義)가 그 기조를 이루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은 과도히 왜곡된 남성 우위의 가부장 문화 시대에 살았으면서도 그 오류에 물들지 않고 하나님이 태초부터 세우신 남․녀 평등사상을 견지하고 계셨음을 발견한다. 남․녀는 하나님 앞에서 역할과 상호 질서를 위한 순서상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동등하다는 것은 전 구속사의 일관된 원리이다.
한편 13-15절의 어린 아이 안수 사건과 이에 즈음하여 주신 어린이 같은 자만이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는 예수의 말씀은 결국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이요 죄인인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하고, 어린이가 부모를 사랑하여 믿고 따르듯이 순수한 영혼으로 전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의뢰하고 또 순종하는 자만이 결국 구속사의 은총인 천국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교훈을 전해주고 있다. 또한 여기에도 신체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미성숙한 약자를 경시 내지는 무시했던 고대의 일반적인 사고방식을 깨고 그들의 존엄성을 제고시키려는, 시대를 뛰어넘은 주님의 의도도 담겨있다 하겠다.
그리고 16-30절의 부자 청년의 질문 사건과 예수께서 이에 덧붙여 주신 교훈에서 우리는 다음의 구속사의 원리들을 재확인하여야 한다. 먼저 구원은 오직 주의 구속의 은혜를 깨닫고 회개하는 믿음으로만 가능한 것이지 절대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한 인간의 상대적인 선행이나 경건으로는 불가능함을 깨닫는다. 우리가 천국 구원의 실체를 깨닫고 믿음을 갖는 것, 그리하여 마침내 구원을 얻는 것 그 모두가 사람의 힘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주권과 간섭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즉 구원 사역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독립적 절대 주권의 원리를 깨닫는다. 둘째 비단 재물뿐 아니라 학식, 명예, 권력, 심지어 체력과 미모 등 이 세상의 세속적 가치를 하나님 나라보다 우위에 두는 것, 다시 말하면 당장 눈에 보이고 유익을 주나 일시적이고 죄로 소멸될 이 세상의 것을 눈에 보이지 않으나 영원하고 순전한 하늘나라의 것보다 더 우위에 두는 타협적이고 주객 전도적(主客顚倒的)인 신앙은 결코 천국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즉 천국은 일시적이고 상대적인 이 세상의 그 어느 것에도 비견될 수 없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 의 절대적 은혜와 사랑으로만 주어지는 것이므로 천국(天國)을 절대 제일로 삼는 천국 제일주의의 가치관은 필연적이며 천국 제일주의의 가치관을 갖지 않는 한 천국은 주어지지 않을 것임을 깨닫는다. 하나님 나라의 절대성과 영원성을 인지하고 믿고 순종하여 이를 최우선에 두는 구속사적 가치관을 정립한 자만이 천국의 실체를 바로 볼 것이며' 또 천국에 이를 수 있다는 이 말씀은 이 세상과 하나님 나라를 혼동 내지 타협시키는 소위 중간자적 태도를 가진 대부분의 인간에게 준엄한 경고가 아닐 수 없다.
끝으로 예수께서 부연하셨듯이 우리가 하늘나라의 복음을 위하여 이 세속의 가치를 포기하였을 때에는 천국에서 그 몇 배의 상급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인간이 보기에는 이 세상의 일과 신앙생활에 잘나고 앞선 것처럼 보이는 자가 기실 하나님이 보실 때는 천국 상급에서 뒤쳐질 수도 있음을 기억하면서' 지금 이 순간도 도도히 흐르는 구속사의 도상에서 먼저는 천국이 이 세상 모든 것보다 더 고귀하고 영원한 가치를 가진 것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나중에 천국에서 더 큰 상급을 얻기 위하여서라도 지금 이 세상에서의 삶 전체가 천국을 지향하는 구속사적 자세를 가다듬어야 하겠다(골 3:1-4).
외울 말씀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린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 (마 19:14)
예수의 유대 사역 요약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갈릴리에서 떠나 요단 강 건너 유대 지경에 이르시니
2 큰 무리가 좇거늘 예수께서 거기서 저희 병을 고치시더라
이혼 논쟁과 독신에 대한 교훈
3 ○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가로되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5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6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7 여짜오되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어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8 예수께서 가라사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10 제자들이 가로되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삽나이다
11 예수께서 가라사대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
12 어미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주께서 아이들을 안수하심
13 ○ 때에 사람들이 예수의 안수하고 기도하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14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린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 하시고
15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거기서 떠나시니라
한 부자 청년의 질문과 예수의 대답
16 ○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7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18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20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하나님의 전적 주권에 대한 구원과 상급
23 ○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25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26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27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28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29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30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본문 & 자료노트
지도-19:1 예수의 유대 지방 사역
원어연구-19:6, 짝지어 주다
본문에 쓰인 헬라어 '쉬쥬그뉘미'( )는 '함께'라는 뜻의 접두어 '쉰'( )과 '연합하다'라는 뜻의 '쥬그뉘미'( )의 합성어이다. '쥬그뉘미'는 '멍에'(yoke)를 뜻하는 '쥐고스'( ) 또는 '한 쌍'(a pair)을 뜻하는 '쥬고스' ( )와 같은 어군에 속한다. 그러므로 '쉬쥬그뉘미'의 원래 의미는 '함께 멍에를 메다'이다. 이것의 형용사 '쉬쥐고스'( )는 '함께 멍에를 멘'(yoke-fellow)이라는 뜻으로 '동료'(빌 4:3) 또는 '아내'를 뜻하는 명사로도 쓰인다.
이와 같은 원어적 의미는 결혼의 진정한 의의를 잘 설명해 준다. 즉 결혼은 단순히 자기 욕구 충족의 이기적인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마치 일하는 종이나 짐승이 멍에를 함께 메는 것처럼 모든 수고와 고통을 함께 감수해 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혼은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성실히 결행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맺어져야 하는 것이다. 또한 구약에서 멍에를 메는 한 쌍의 짐승은 반드시 동일한 종류이어야 했다(레 19:19 ; 신 22:10). 바울은 이를 비유로 신자가 불신자와 함께 하지 말 것을 교훈하였다(고후 6:14). 그리고 함께 멍에를 멘다는 것은 멍에를 멘 두 당사자의 상호 동등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결혼은 어느 한 쪽은 군림하고 다른 한 쪽은 종속되는 상명하복(上命下服)의 관계가 아니다. 또 한 쪽만 잘한다고 해서 잘되는 것도 아니다. 두 사람이 동등한 입장과 위치에서 상호 협력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할 때 그 결혼은 성공적인 것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한 남자와 한 여자를 한 멍에 아래 짝지어 주실 때 원하시는 것도 바로 이런 것일 것이다.
보감-19:4-6 결혼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당시 유대 사회에는 이혼 문제에 관해 불륜의 이유로만 이혼이 가능하다는 보수적인 견해와 다른 이유로도 가능하다는 자유로운 견해 간에 극단적인 대립을 보이고 있었다. 이렇게 이혼이 어느 범위 안에서 가능한가에 대해 크게 논쟁을 벌이면서도 막상 결혼의 본질과 중요성은 망각하고 있는 그들에게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은 교훈으로 일침을 가하셨다. 이에 예수의 가르침과도 그 맥을 같이 하는 결혼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모아 보면 다음과 같다.
1. 결혼은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에 의한 것이므로 존엄한 것임(창 2:24)
2. 결혼은 각각 다른 특성을 지닌 두 성이 만나 조화를 이루는 것임(창 1:27)
3. 일부다처제는 하나님의 결혼 원리에서 어긋나는 것임(창 1:27)
4. 결혼은 부모에게 의지하던 삶의 자세를 청산하는 것임(창 2:24)
5. 결혼은 두 남녀가 분리될 수 없는 하나된 관계를 형성하는 것임(창 2:24)
6. 결혼은 육체적, 전인격적의 완전한 결합을 의미하는 것임(창 2:24)
7. 인간적 동기에서 야기되는 이혼은 하나님께 부당한 것임(마 19:6)
보감-19:10-12 독신에 대한 성경의 교훈
1.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자만 독신으로 지낼 수 있음(마 19:11)
2. 정욕을 절제할 수 있는 자만 독신으로 지낼 수 있음(고전 7:1-9)
3. 자신의 쾌락을 위한 독신은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음(고전 7:7,32,33)
4. 믿음을 지킬 수 있을 때 그냥 독신으로 지내는 것도 좋음(고전 7:25-28)
5.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스스로 독처하는 자도 있음(고전 7:32-40)
주요 주제-19:17-22 계명 준수에 관한 예수 교훈의 특징
막 12장 자료 노트 참조.
주요 주제-19:23-30 천국과 하나님 나라의 이해
눅 서론 특별 자료 참조.
지리 배경-19:1 갈릴리
막 1장 자료 노트 참조.
주요 주제-19:3-12 바리새인과 예수 논쟁
눅 6장 연구 자료 참조.
주요 주제-19:5 신약과 구약의 연속성과 점진성
본권 신약총론 특별 자료 참조.
보감-19:13-15 성경상의 안수(按手)의 용례
안수(按手)는 구약 시대부터 신약 시대까지 다양하게 사용된 중요한 의식이다. 이는 자신의 내적인 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轉據)시키는 데 그 의미가 있다. 성경상의 안수를 행한 용례는 다음과 같다.
용례 의미
1. 제물에 대하나 안수 죄의 전가(레 1:4; 민 8:10)
2. 하나님을 모독한 사형자에 대한 안수 의식상 불경의 전가(레 24:17)
3. 축복으로서의 안수 정신적 성숙이나 영적 생명력 전달
(레 19:22; 마 19:15)
4. 병자에 대한 안수 생명력의 회복 기원(막 5:23; 행 9:12)
5. 성직 임무자에 대한 안수 직임의 공적 임명과 성별(행 6:6; 13:3)
보감-19:16-22 부자 청년의 5가지 실수
'관원'(눅 18:18)이라는 신분을 가진 부자 청년이 자신의 구원문제 즉 영생을 얻기 위해 예수님께 나아와 그 길을 물었다. 그러나 그는 구원과 관련하여 예수께 다음과 같은 실수를 범하였다. 다음 도표에서 이 부자 청년의 5가지 실수를 알아보고 우리도 이런 실수를 범하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보도록 하자.
1. 예수를 주가 아닌 선생님이라 부름(16절)
2. 영생을 믿음이 아닌 선한 일로 얻으려함(16절)
3. 자신의 선행을 자긍하여 자만함(20절)
4. 구원보다 세상의 재물에 더 집착함(22절)
5. 결국 주님을 따르지 않음(22절)
도표-19:16 주를 끝까지 좇지 못한 사람들의 주요 실례
인물 이유
1. 어떤 서기관 이 땅에서의 고난에 대한 두려움(마 8:19,20)
2. 어떤 제자 부친의 장사가 더 급하다고 여김(마 8:21,22)
3. 어떤 부자 청년 재물에 대한 미련 때문에 예수의 부르심을 거절함(마 19:16)
4. 가룟 유다 탐심 때문에 은 삼십을 받고 예수를 팔음(마 26:15,16)
5. 데마 이 세상에 대한 사랑 때문에 동역자를 바울을 떠남(딤후 4:10)
주요 주제-19:16,17 거듭남
요 3장 자료 노트 참조.
19:1-12 이혼에 관한 교훈
공생애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갈릴리 사역을 마무리 지으신 예수께서는 이제 십자가 수난과 죽음의 현장이 될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대 지방의 사역을 시작하고 계신다(1절). 따라서 예수님의 유대 사역을 소개하고 있는 본장과 다음 장의 내용은 마 21장에서부터 소개되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과 십자가 수난, 그리고 죽음과 부활에 대한 서론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유대 사역을 개시하시자마자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음모에 찬 도전에 직면하시게 되었는데, 그들은 신학적으로 매우 민감한 문제라고 할 수 있는 이혼에 관한 질문을 던짐으로써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려고 했다(3절).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번에도 역시 그들의 음모를 간파하셨기 때문에, 당시의 바리새인들 가운데서 이혼에 관해 서로 상반된 교리를 주장하던 힐렐 학파나 샴마이 학파 그 어느 쪽의 견해에도 동조하지 않으셨다. 이에 대해서는 본장 3절 주석을 참조하라. 그 대신에 예수께서는 타락한 인간의 완악함에서 비롯된 이혼(신 24:1-4)보다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입각한 결혼(창 1:27; 2:24)에 관심을 더 집중시키면서, 부부 사이의 전인격적(全人格的) 결합을 통한 상호 신뢰와 헌신에 대해 말씀하셨다. 이는 이혼의 가능성을 배제하도록 교훈하신 것이 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① 이혼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으로 인하여 비롯된 제도이다. 비록 율법에 이혼을 허락하는 규정이 있다 할지라도, 이것은 결코 이혼을 정당화시키거나 장려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완악한 인간들이 더 큰 죄를 범하지 않도록 만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허용된 조처에 불과하다.
② 결혼은 반드시 남녀 간의 뜨거운 사랑과 굳은 신뢰를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져야만 한다. 만약 그렇지 않고 결혼을 쾌락의 수단이나 출세의 방편으로 이용한다면, 바로 이것은 결혼 제도를 만드신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처사이다. 우리 주변에서 사소한 이유로 이혼하는 자들이 자꾸만 생겨나는 것도 결혼 제도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한 채 인격과 인격의 결합이 아닌 외부적 조건끼리의 결합으로 결혼을 오해한 탓이라고 할 수 있다.
③ 독신주의는 특별히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별로 바람직하지 못하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창조 원리는 생육하고 번성하는 데에 있으므로(창 1:28).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자신의 전 생애를 바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자연스러운 남녀의 결함을 통해 보다 완전하고 성숙한 생활을 도모하는 것이 옳다. 그런데 만약 자유분방한 생활을 즐기기 위해 독신주의를 고집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크게 잘못된 태도이다.
19:1 갈릴리에서‥‥유대 지경에. - 대부분의 공생애 기간 동안 갈릴리 지방을 중심으로 보내셨던 예수님의 입장에서 볼 때, 갈릴리 지방은 자신의 성장지이자 사역지로서 각별한 관계가 있었던 곳이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은 자신의 지상에서의 사역을 예루살렘에서 마감하기 위해서 정든 땅 갈릴리를 떠나야 하는 시점에 이르렀다. 두 차례의 수난 예고(마 16:21; 17:22,23)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한 제자들은 아마도 자신들의 능력 있는 스승이 이스라엘 종교 정치 ․ 문화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 자체를 너무도 당당한 행진으로 이해했을 것이고, 그래서 갈릴리를 떠나는 것이 어쩌면 홀가분 했을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이유를 알고 있는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갈릴리 지방을 떠나는 것이 지상에서의 마지막 사역을 마감하기 위한 이별의 전주곡과도 같았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방을 떠나서 유대 지경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의견이 일치되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눅 9:52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신 것처럼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요단 강 서편 사마리아 지방을 통과하셨다고 한다(Weiss, Delitzsch). 또 다른 사람들은 두 편으로 나뉜 예수님 일행이 한편은 사마리아 지방을 지나고, 나머지 한편은 베레아로 갔다고 주장한다(Burkitt). 이 견해는 본절과 눅 9:52의 상이점을 조화시키려 한 데서 발생한 의견이다. 하지만 가장 지지를 받는 의견은 역시 예수께서 요단 동편 베레아 지역을 통과하셨다는 견해이다(Carr, Bruce, Plummer). 다만 눅 9:52의 기록은 예수께서 베레아 지역으로 가시기 전에 있었던 사건으로 보인다. 즉 예수께서는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여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하여 제자들을 앞서 보내셨으나 사마리아인들에 의해 배척을 받자 방향을 바꾸어 베레아 지역을 경유하여 유대 지역으로 가신 것으로 추정된다. 예수께서 유대 지역으로 가신 경로에 대해서는 본장 자료 노트 지조를 보다 참조하라. 한편 본절 이하를 보면 예수께서 갈릴리 지방에서 유대 지방으로 가서 그곳에서 계속하여 사역하신 것처럼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본절 이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 순회전도 사역 이후에 해당되는 부분으로 그 사이에는 후기 유대 사역을 비롯하여 베레아 사역, 단기 유대 사역 등이 생략되었다. 이 생략된 부분에 관해서는 사복음서 개론, '사복음서 대조표'를 참조하라.
19:2 큰 무리가 좇거늘 예수께서…저희 병을 고치시더라. - 병행 구절인 막 10:1과 종합해 볼 때, 예수님은 병자들을 치유하셨을 뿐 아니라 무리들을 가르치셨음을 알 수 있다. 다만 마가는 예수의 가르치신 사역에 보도의 초점을 맞춘 반면, 마태는 예수의 병 고치신 사역에 보도의 초점을 맞추고 있을 뿐이다.
19:3 바리새인들이 시험하여. - 예수께서는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면서 맨 처음 광야에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신 이후(마 4:1-11) 줄곧 사단의 사주를 받은 자들에 의해 시험을 받으셨는데(마 16:1; 22:18,35), 사단의 사주를 받은 자들의 대표적인 존재가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었던 바리새인들이다. 이들은 할 수만 있으면 예수를 음해하기 위해 줄기차게 예수를 시험하였는데, 본절에서는 당시 그들 간에도 쟁점이 되었던 이혼 문제로 예수를 시험하고 있다.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 이혼법에 관한 바리새인들의 질문이다. 물론 이 질문이 예수를 올무에 걸리게 하기 위한 것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 시험을 통해 바리새인들은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첫 번째는 종교적 목적이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신 24:1,2의 이혼법에 관한 해석 문제로 인하여 그 안에서도 두 부류의 학파, 즉 샴마이(Shannai)와 힐렐(Hillel)로 구분되었다. 즉 바리새인들 가운데 비교적 엄격했던 샴마이 학파에 속했던 자들은 간음한 이유 외에는 이혼을 할 수 없다고 주장했던 반면, 보다 자유로웠던 힐렐 학파에 속한 자들은 아내에게 지극히 사소한 잘못이 있거나 아니면 남편이 다른 여자를 좋아하는 경우에라도 이혼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비추어 볼 때 본절의 바리새인들은 힐렐 학파의 입장에서 질문했음이 분명하다. 아무튼 이들의 의도는 만일 예수께서 힐렐 학파의 주장에 동의한다면 예수를 도덕적으로 엄격하지 않은 자유주의자라고 공박하고, 그와는 반대로 샴마이 학파의 주장에 동의한다면 예수를 죄인들에 대한 그의 행동이 위선적인 것이라고 매도하고자 하는 것이었음에 분명하다. 두 번째는 정치적 목적이다. 바리새인들은 예수께서 세례 요한을 가리켜 그의 선구자라고 하신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와 세례 요한의 가르침이 비슷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헤롯 안디바와 헤로디아의 이혼과 부정한 결혼을 반대하다가 결국 참수형을 당했다(마 14:3-12). 이에 바리새인들은 이혼문제를 예수께 질문함으로써 만일 예수께서 이혼을 금지하신다면 이를 정치적 쟁점으로 삼아 결국 세례 요한과 같은 운명에 빠뜨리고자 획책한 것이다(Schaff).
19:4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 예수님의 답변은 창 1:27에 근거하고 있다. 즉 예수께서는 당시 바리새적 율법 해석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에 입각해 남녀 관계를 취급하신 것이다. 특별히 예수께서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서로의 반려자로 창조하셨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혼 허용을 주장하는 바리새인의 주장에 이혼 금지의 선언을 하시기 위해 굳이 창조 때의 하나님의 의도를 상기시키신 것은 먼저 바리새인의 이혼 허용 규정의 근거가 되는 여자에 대한 선입견을 무너뜨릴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바리새인의 이혼 규정에 의하면 그 주도권은 남편에게만 귀속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남편들은 이 규정을 악용하여 자신의 여성 편력증을 정당하게 보장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남성 우월주의적인 규정은 기본적으로 여성이 모든 점에서 남성보다 열등하다고 하는 당시의 사고방식에 근거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Josephus). 그래서 여성들은 성전에서도 '여인들의 뜰'까지만 들어갈 수 있었고, 남자들이 아침저녁에 드리는 '쉐마'(신 6:4-9)를 암송할 필요도 없었다(Jeremias). 이 같은 관습은 당시 여인들의 지위가 노예의 처지와 진배없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따라서 이혼 허용 규정은 남성 중심적 유대 사회에서는 당연한 귀결이었고, 다만 여인에게 이혼 증서를 써줌으로써 그 여인이 다른 남자에게 시집갈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한 것은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여성의 지위를 보장해 주고자 하신 하나님의 배려의 결과였다. 아무튼 예수님 입장에서 이혼 금지 선언을 하시기 위해서는 먼저 바리새인들의 사고방식 저변에 흐르는 여성 천시 경향을 들추어내는 일이 무엇보다 우선적이었을 것이다. 결국 예수께서는 지금 하나님께서 태초에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것은 여자에게 남자가 있어야 함같이, 남자에게도 여자가 수단이 아닌 존재(being)로써 필요함을 강조하고 계신 것이다.
19:5 사람이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 몸이 될 지니라. - 창 2:24의 인용으로서 부부의 독특한 연합 상태를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본절은 결혼으로 인한 부부의 연대는 혈육으로 맺어진 부모의 관계보다 근본적으로 더 우선하고 더 친밀함을 보여 주는데, 그것은 합법적인 성적 결합을 통한 연합의 결과이다. 특별히 히브리 사고에서 '몸'은 단지 육체만을 의미하지 않고 사람 전체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남녀가 '한 몸'을 이루는 결혼은 단지 육체적으로 하나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결코 나뉠 수 없는 한 인격으로의 합일을 의미한다. 따라서 결혼한 부부는 서로를 자신의 몸의 일부로 여기면서, 아내는 남편을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된 것처럼 존경하고, 남편은 아내를 자기 몸처럼 세심한 사랑으로 다루어야 할 것이다(엡 5:22-31). 이에 대해서는 본장 자료 노트, 결혼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보다 참조하라.
19:6 그러므로…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 이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창조 섭리 가운데 맺어진 결혼은 피조물인 인간의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 파기할 수 없음을 명백히 하셨다. 이런 의미에서 이 구절의 말씀은 이혼의 범위를 확대시키면서, 결혼의 결속력을 이완시켰던 바리새파의 무절제한 인본주의적 이혼 허용법을 원천적으로 거부하는 것이라 하겠다. 한편 '짝지어 주신 것'(쉬쥬그뉘미)이란 '함께 멍에를 메다'라는 의미로서 이 말 앞에는 중성단수형 관계 대명사 '호'( )가 사용되어 이제 짝지어진 두 개체는 한 개체로 인정됨이 강조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본장 자료 노트, '짝지어 주다'를 참조하라. 본절은 결국 결혼이란 결국 하나님의 섭리로 말미암아 남녀 두 사람이 결합하여 새로운 한 인격체로 된 것으로서 인간이 임의로 나눌 수 없는 성격의 것임을 나타내 준다. 한편 히브리어로 '결혼'이란 말은 '키두신'( )인데, 이는 본래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바치는 봉헌이란 의미가 있다. 그처럼 부부란 서로에게 바쳐진 몸으로 서로에게 계속적으로 헌신해야 할 대상일 뿐만 아니라, 또한 둘이 하나로 하나님께 바쳐진 헌물이다. 그러므로 부부는 결코 나뉠 수 없는 것이며, 만일 인위적으로 부부의 관계를 나눈다면 그것은 자기 몸을 헤치는 죄악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바쳐진 예물을 부정하게 하는 죄악으로 하나님의 정죄하심을 면치 못할 것이다.
19:7 어찌하여 모세는 … 명하였나이까. - 이혼의 절대적 금지를 명하신 예수님의 대답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항변이다. 바리새인들에게는 모세가 최고의 권위였다. 그래서 모세의 법에 이혼이 허용된 사례를 예수께 제시하고(신 24:1), 그의 이혼 금지 교훈이 모세의 법과 상치되므로 옳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결국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거짓이라고 공박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의 이러한 주장은 실체와 그림자를 구분하지 못한 어리석음의 소치였다. 뿐만 아니라 모세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한 무지의 결과였다(8절).
19:8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 여기서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이혼 허용 근거로 삼는 모세법의 설립 취지를 설명하시고 계신다. 모세가 이혼을 허용한 것은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의 완악함' 때문임을 상기시키셨다. 이 지적은 다른 말로 환언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완악하지 않았다면 이혼은 허락되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을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도덕적·신앙적 수준은 이방인과 다를 바가 없었다. 특히 이방인의 관습 중에서 결혼과 관련된 영향은 매우 심각했는데, 그것은 결혼과 이혼이 남성의 이기적인 판단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이다. 고대 풍습에 의하면 여자는 노예나 가축과 같이 하나의 재산과 같이 취급되었다. 따라서 결혼은 여성을 소유물로 인정하는 것이고, 이혼은 그 소유권을 포기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불합리한 상황에서 경제수행 능력이 전무했던 여성에게 이혼은 매우 치명적인 것이 아닐 수 없었으며, 더 비참한 것은 이럴 경우에도 재혼은 철저히 금지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이혼은 여성에게 태아의 생명줄을 끊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하여간 이러한 이방 풍습은 오랜 이방 생활에 젖어 있던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서도 널리 행해지고 있었다. 이것은 결국 그들이 창조의 섭리 가운데 제정된 하나님의 결혼법을 수용할 만한 신앙적 수준이 되지 못한 상태임을 보여 준다. 이러한 사실을 익히 잘 알고 계신 하나님은 그러한 무분별한 이혼 관행을 방지하기 위해 모세를 통해 이혼법을 제정하기에 이르셨던 것이다. 따라서 모세가 이혼 허용과 관련해서 이혼증서라는 조건을 제시한 것은 계시의 점진성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매우 진보된 명령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거의 전횡(專橫)에 가까운 남자의 폭력적 이혼에 속수무책이었던 여성의 입장에서 '이혼 증서'는 최소한 남성들의 일방적인 이혼 결정을 다시 한 번 재고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이혼 당한 여인으로 하여금 다른 남성과 재혼할 수 있는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했다. 결국 모세의 이혼 허용법은 이혼을 합법화시키기 위해서 제정된 것이 아니며, 오히려 결혼의 신성한 결속을 깨뜨리는 이혼을 방지하는 것을 목표로, 제도적인 필요에 의해 제정된 진행 중인 율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혼은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가 결코 아니다. 다만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의 약점 때문에 부득이 허락한 것 뿐이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그것도 모르고 이혼은 정당하고 모세는 마치 이혼의 장려자인 것처럼 오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율법은 상대적인 선이요,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교훈은 절대적인 선이요, 모든 윤리의 기준이 된다. 한편 모세의 이혼법과 관련해서는 신 24:1-4 강해와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19: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 이 구절은 마 5:32 말씀과 내용상 같은 것이다. 따라서 그 내용에 대해서는 그곳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한편 여기서 예수님의 교훈이 '내가'(에고)로 시작하는 형식은 자신의 권위가 모세의 권위보다 뛰어나고, 모세의 권위 역시 자신의 권위 앞에 굴복해야 할 권위이며, 자신만이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보여 줄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심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더 나아가 이런 사실은 예수님의 말씀이 설득이나 이론의 제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하다는 선포임을 충분히 암시해주고 있다고 하겠다.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이혼의 조건으로 단 한 가지의 경우인 음행만을 제시함으로써 사실상의 이혼을 금지 시키셨다. 이러한 예수님의 견해는 당시 소수 의견이었던 샴마이 학파의 그것과 형식상 같은 보조를 맞추고 있다. 이혼의 유일한 사유로서의 음행은 당시 힐렐 학파의 광범위한 이혼 사유에 비해 볼 때 가히 혁명적이라고 하겠다. 또한 이것은 신 24:1의 수치되는 일의 범위를 아내의 성적 타락과 같은 부도덕성을 넘어 사소한 실수까지도 포함시키는 힐렐 학파의 견해를 명백히 거부한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것은 힐렐 학파가 내세우는 주장의 최종 권위인 모세의 이혼법까지 뛰어넘은 새로운 법이었다. 사실 모세 역시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저급한 신앙과 도덕 수준으로 인해 계시의 점진성의 전제 하에 수치되는 일의 범위를 다소 광범위하게 허용한 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수치되는 일이 성적타락과 같은 경우라고 한정한다면, 이것은 이혼 사유가 되기 전 이미 사형에 해당하는 죄악이 되기 때문에 (신 22 : 22) 이혼법을 제정한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모세의 이혼법은 이혼을 합법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백성들의 완악함 때문에 주어진 것이라는 것은 이미 살펴본 바 그대로이다. 이 같은 맥락에서 볼 때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이혼의 사유는 모세의 법보다 계시의 완전성에 더 근접한 것으로서, 이는 하나님의 창조의 법(창 2:24)인 결혼의 신적인 결속은 어떠한 경우를 막론하고 깨뜨릴 수 없음을 분명히 한 것이라 하겠다. 물론 여기서 '음행'이 이혼의 유일한 사유로 제시되지만 이것은 결혼의 성숙한 의무를 파기하는 중대한 범죄이기 때문에 하등의 문제될 것이 없다.
19:10 사람이 아내에게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삽나이다. - 이 구절은 제자들의 말이다. 제자들은 바리새인들과 이혼에 관한 논쟁을 벌이신 예수님의 입장이 너무나 경직하다고 생각한 나머지 항의성 발언을 한 것이다. 이것은 당시 언제든지 이혼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 결혼 생활을 했던 이스라엘 남성들의 위기감을 반영한 것으로 보이는데, 여자들을 소유물의 일부로 생각했던 당시의 습관을 고려해 볼 때 분명 예수님의 이혼 금지법을 일종의 억압으로 생각했던 것이 당연하다 하겠다. 따라서 결혼으로 인해 한 아내에게 속박당하고 사느니 차라리 독신으로 사는 것이 좋게 보인 것이다.
19:11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 - 이 구절은 독신 생활에 대한 예수님의 견해를 보여 준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독신이 결혼에 대한 부자유스러움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도피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임을 강조하고 계신다. 즉 독신 생활은 인간적인 고집이나 선택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부르심과 허락으로만 가능한 것이다(공동번역). 이에 대해서는 본장 자료노트 '독신에 대한 성경의 교훈'를 보다 참조하라.
19:12 어미의 태로부터 된 고자. - 본절에서는 전절의 '타고난 자'들의 구체적인 종류 중 그 첫 번째 경우인 선천적인 성 불구자를 뜻한다.
사람이 만든 고자. - 보통 내시들을 말하는데, 이들은 궁중 일을 맡은 사람들로서, 궁궐 내의 성적인 문제를 방지하기 위한 조치로 생식기를 인위적으로 잘린 자들이다.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 - 이 경우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명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 특별하게 독신의 은사를 받은 자들을 가리킨다(고전 7:32,33). 이상과 같은 독신의 세 가지 경우를 열거하신 예수님의 의도는, 독신은 단지 결혼에 대한 속박으로부터 해방하기 위해 고려되는 도피처가 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하기 위함이었다. 즉 독신은 선·후천적인 생식기의 결함을 지녔거나 특별한 은사를 받은 자들의 최후의 선택으로서, 보편적인 경우가 될 수 없는 것이다.
19:13-15 어린아이들을 축복하신 예수
앞단락(1-12절)에서 결혼과 이혼의 본래 의미를 교훈하신 예수께서는 본문에서 결혼 생활의 열매라 할 수 있는 어린아이들을 축복하시며 천국에 들어가는 자의 자격 내지는 조건을 언급하고 계시다. 당시의 유대 사회에서는 부모가 어린아이를 랍비에게 데리고 가서 축복 기도를 받는 풍습이 있었다. 따라서 예수님의 권세 있는 가르침과 초자연적인 이적에 관한 소문을 들은 바 있는 사람들 중의 일부가 자기자녀들을 데리고 예수께로 왔다. 하지만 여자와 어린아이를 천대하는 유대 사회의 풍습에 젖어 있던 제자들은 오히려 그들의 앞을 가로막으며 예수님을 성가시게 하지 말도록 꾸짖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제자들의 태도는 불과 얼마 전에 예수께서 하신 어린아이들에 관한 교훈(마 18:1-14)을 잊어버린 처사로서, 주님의 책망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진정 길 잃는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해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는 목자처럼(마 18:12,13), 예수께서는 인간들의 눈으로 보기에 너무나 나약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라 할지라도 일일이 영접하여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삼아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본문에서 깨달을 수 있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① 성도들은 절대로 사람을 외모로 판단치 말아야 한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비록 사회적으로 지위가 낮고 경제적으로 매우 궁핍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일지라도 함부로 대하거나 인격을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된다. 특히 교회 안에서 그와 같은 일이 발생하는 것은 복음 전파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으므로, 더더욱 조심해야 한다(약 2:1-9).
② 성도들은 언제나 어린아이처럼 겸손하고 순수한 믿음의 자세를 지녀야 한다. 왜냐하면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요청되는 삶의 태도이기 때문이다(마 18:3,4). 진정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게 된다면, 신앙의 연륜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전혀 교만한 마음을 품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더욱 겸손한 마음을 지닐 수밖에 없다(롬 12:16; 빌 2:3-8).
19:13 때에. - 결혼과 이혼에 관한 교훈이 끝날 무렵을 가리킨다. 결혼에 관한 교훈에 이어 결혼 생활의 열매라 할 수 있는 어린아이에 대한 예수님의 축복은 그의 교훈의 맥을 이어 줄 뿐만 아니라 실로 마치 처음부터 준비된 사건인 듯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사람들이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 본 구절에서부터 15절까지는 예수님의 안수를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온 사람들을 둘러싼 짤막한 에피소드를 기록하고 있다. 특히 본 단락은 전체 문맥과의 상관관계 내지는 연관성이 다소 희미한 감이 없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피상적인 관찰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겠다. 여기에는 마태가 계속적으로 강조하고자 하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자격 내지는 조건'에 관한 심오한 진리가 담겨있다. 본 단락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시 인구 계수에도 끼지 않았던 어린아이를 기꺼이 안수하시면서 이들이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라고 천명하셨다. 반면에 마지막 단락에서 예수께서는 선한 일을 통해 천국을 소유하려는 부자 청년의 하자를 지적하셨다(16-30절). 이 두 단락을 비교해 볼 때 하나님 나라는 세상에서의 선한 행위를 통해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어린 아이와 같은 심령을 가진 자들의 소유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두 단락은 서로 대조적인 기사를 기록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자격 내지는 조건에 대한 기준을 뚜렷히 해주고 있다. 한편 이혼 문제를 다루는 첫 단락(1-12절)은 나머지 두 단락에 비해 그 주제(천국에 들어가는 조건과 자격)의 선명성에서 뒤지고 있다. 왜냐하면 첫 단락은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이나 자격에 관한 직접적인 교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혼 금지를 선포하신 예수의 말씀을 통해서 당시 소유물로 취급받던 여성들의 지위에 대한 격상이 이루어졌고, 이 새로운 교훈이 천국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입에서 선포된 것임을 감안할 때 이것은 천국의 자격에서 여성들이 남성들에 비해 열등하다는 종래의 단정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이혼문제에 관한 교훈을 언급하고 있는 첫 단락 역시 비록 표면적인 주제는 아니라 할지라도 그 이면에는 천국에 들어가는 자격에서 여인들이 제외되거나 불평등을 받을 수 없다는 교훈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므로 본장 전체는 천국에 들어가는 자의 자격 또는 조건을 언급하고 있으며 결국 한 주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사람들이 어린아이들을 예수께 데리고 온 이유는 안수 기도를 받기 위해서 였는 데, 이것은 당시 회당에서 어린아이들을 안수하는 랍비들의 모습을 연상시켜 준다(Carr).
제자들이 꾸짖거늘. - 제자들의 이 같은 행위는 어린 아이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일반적인 태도를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어린아이의 지위는 귀머거리나 벙어리, 여자, 노예, 장님 등과 같은 반열에 속했는데, 이는 어린 아이가 귀머거리나 벙어리와 같이 충분한 지적 능력이 결여되었다는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여간 제자들은 이미 어린아이에 대한 교훈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마 18:2-4) 아직도 그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했음에 분명하다.
19:14 어린아이들을 용납하고…금하지 말라. - 본 구절에서는 예수께서 어린아이들의 접근을 가로 막는 제자들에게 부드럽게 말씀한 듯 보이지만 마가의 병행구절을 볼 때 제자들의 행위에 대단히 격분하셨음이 확인된다(막 10:14).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 - 이 구절은 마 18:3에서 더 자세히 언급이 되어 있다. 즉 그것은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천국의 객관적인 기준을 제시한 듯한 본문보다 더 강력한 선포가 된다. 이에 대해서는 그곳 주석을 참조하라. 아무튼 예수께서는 천국이 어린 아이와 같은 자들의 소유가 될 것이라고 천명하심으로써 제자들을 비롯한 사람들의 어린 아이에 대한 편견을 바꾸도록 요구하고 계시다.
19:15 안수하시고. - 예수께서는 어린아이들에게 안수를 해주심으로써 천국이 어린아이와 같은 심령을 소유한 자의 것이라는 사실을 확증하셨다. 한편 학자들은 이 구절을 유아 세례의 기원으로 보기도 한다.
거기서 떠나시니라. - '거기'가 어딘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그러나 마 20:29에 비추어 볼 때 요단 근처 어느 곳일 것으로 추정된다.
19:16-22 예수와 부자 청년
예수님의 권세 있는 가르침과 초자연적인 이적에 관한 소문을 듣고 축복 기도를 받기 위해 자기 자녀들을 데리고 예수께로 온 사람들(13-15절)과 마찬가지로, 유대의 관원으로서 상당한 부자였던 한 청년도 예수님을 찾아 왔다.
그런데 이 청년은 영생의 비결에 관한 질문을 예수께 던짐으로써 자신이 당시의 유대 사회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경건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은연 중에 드러내었다(16절). 실로 그는 풍족한 재물과 안정된 사회적 지위(눅 18:18)를 누리고 있었지만, 결코 방탕에 젖지 않았으며 오히려 늘 의롭게 살려고 애쓰는 종교적 열심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가 갖춘 경건의 지식과 모양에도 불구하고 그가 참된 경건의 능력을 지니지는 못했음을 단번에 간파하셨다(딤후 3:5). 즉 그는 율법의 외부적 규정은 충실히 준수했으나 율법의 근본정신을 깨달아 실천하지는 않았으며, 영생의 길은 탐구했으나 진정으로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그에게 율법의 근본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 이웃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시면서, 그의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오직 하나님 나라에 모든 소망을 두도록 촉구하셨다(21절). 이와 같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부자 청년은 근심하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말았는데(22절), 결국 이것은 그가 얼마나 세상 재물과 지위에 집착하고 있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①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과 영생에 이를 수 있는 자는 전혀 없다. 부자 청년은 율법의 모든 계명을 준수했다고 자신 있게 말했으나, 이웃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순종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스스로 영생의 길을 포기하고 말았다. 참으로 누구든지 모든 율법을 지키다가 단 하나의 계명이라도 어기게 되면 결국 그는 율법을 범한 자가 될 수밖에 없다(약 2:10,11). 따라서 성도들은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롬 1:17; 엡 2:8).
② 두 손으로 세상 재물을 움켜잡은 채, 입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노라고 말하는 것은 거짓된 태도이다. 누구든지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기 때문에, 하나님과 세상 재물을 겸하여 섬기려는 것은, 위선적인 행위이다(마 6:24; 골 3:5). 부자 청년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율법의 모든 계명을 준수한다고 자부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세상재물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경건이 헛된 것임을 드러내고 말았다(약 1:26,27).
19: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 본절부터 22절까지는 부자 청년에 관한 기사로, 이 기사는 공관복음서에서 공히 언급하고 있는데(막 10:17-22; 눅 18:18-23), 이를 종합해 볼 때 여기서 '어떤 사람'은 청년 부자 관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그는 분명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훌륭한 교육을 받았을 것이고, 그 결과 관직에 입문한 엘리트 청년이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예수께 와서 꿇어앉은 것으로 미루어 보건대 그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 했던 교만한 자세와는 뚜렷이 구분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즉 그가 예수께 겸손한 마음으로 찾아온 것은 자신의 훌륭한 교육과 명예와 그리고 부, 이런 세상의 성공의 척도들을 충분히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영생에 대한 확실한 보장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 부자 청년 관원의 질문인데, 이것은 그가 받았던 유대교 종교 교육의 내용을 충분히 짐작하게 해 준다. 즉 그는 영생을 선한 일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여겼는데, 이는 당시 유대교의 '공로 개념'의 반영인 것이다. 유대교의 '공로 개념'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생은 인간의 선행에 의해서 쟁취할 수 있는 노획물로 생각했는데, 특히 바리새인들은 이 개념의 대표적인 간판 주자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부자 관원 청년은 자신이 바리새인이었거나, 아니면 최소한 바리새인 교육의 영향력을 깊이 받았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하여간 그의 질문을 자세히 분석해 볼 때 그는 이제까지 자신이 행해온 선한 일을 가지고 영생을 얻기에 불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지금 자신의 마음에 영생에 대한 확신이 될 만한 어떤 선한 일의 종류를 애타게 찾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자신이 받아왔던 교육에 대한 일말의 회의가 있었다는 반증이 되기도 하지만, 그는 여전히 그 종교 교육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동시에 지니고 있음을 보여 주기도 한다.
19:17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 마가와 누가의 병행 구절에는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라고 되어 있는데(막 10:18; 눅 18:19), 이것은 각각 근거하고 있는 사본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어떤 사본을 정하든지 의미의 차이는 별로 없지만 각각 이 구절은 변형시키지 않고, 그대로 두는 것이 문맥상 더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다. 즉 마태에서는 부자 관원 청년이 예수님을 단지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마가와 누가에서는 '선한 선생님'으로 호칭하고 있다. 그래서 마태의 경우는 호칭에 대한 설명보다 '선한 일'에 대한 관심을, 마가와 누가는 '선한 일'보다는 '선한 분'에 대한 관심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어떤 경우이든지 예수님께서는 부자 관원 청년의 어설픈 질문을 교정해 주시는데, 그것은 오직 선한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한데서 잘 드러나고 있다. 본 구절의 예수님의 말씀은 부자 관원 청년의 이해 정도에 상관없이 크게 두 가지 사실을 계시하셨다고 할 수 있다. 첫째, 예수께서는 자신을 선한 선생으로 불렀던 청년에게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선하다는 사실을 주지시켜줌으로써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 아닌 일종의 유능한 랍비 정도로 알려지시는 것을 염려하셨다. 즉 자신을 선한 하나님으로 고백하든지, 아니면 아예 모르겠거든 부르지 말라는 말씀을 하셨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오직 하나님만이 선하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상대적인 선행을 절대화시키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절대적 선을 상대화시키는 경향들에 쐐기를 박음으로써, 인간의 상대적 선으로서 영생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셨다고 할 수 있다.
계명들을 지키라. - 이 구절은 '영생의 방법'에 대한 대답이 되고 있다. 즉 영생은 하나님의 계명인 율법을 준수해야 주어진다는 것인데, 이는 예수님의 율법관을 짐작케 해 주는 대목이다. 평소 자신을 모세의 율법과 대립되는 위치에 놓으셨던 예수께서(마 5:21,22,27,28,31,32,33,34,38,39,43,44), 여기에서 율법을 영생의 적극적인 방법으로 제시했다는 사실은 의외가 아닐 수 없다. 그렇지만 원래 율법이 단지 타락한 인간의 죄를 억제한다는 소극적인 기능보다는 하나님의 백성의 거룩한 도리를 제시하는 적극적인 의미로 제정되었다는 측면을 고려해 볼 때, 본 구절에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계명인 율법에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실제 예수께서는 모세의 율법을 폐기 처분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이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오셨음을 여러 번 천명하시기도 했다(마 5:17,18). 따라서 예수님께서 영생의 적극적인 조건으로 계명 준수를 제시하신 것은 율법 제정의 실제적인 의미가 자신의 가르침과 아무런 모순이 없다는 사실을 보여 주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제 3장 연구자료, '구약 율법의 이해' 참조.
19:18 어느 계명이오니까. - 부자 관원 청년의 반문이다. 이것은 첫 질문인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16절)라는 것과 같은 맥락인데, 그는 아직도 공로 개념을 전제로 한 영생의 쟁취를 굳게 믿은 듯하다. 그는 계명을 지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가 아직도 모르는 계명이 있는 것으로 들었고, 그래서 어떤 계명인지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묻게 되었던 것이다. 마치 그가 이전에 열심히 계명을 준수했듯이 그 계명도 충분히 준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과시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 본 구절과 다음 구절에서 제시된 계명은 십계명 중에서 둘째 돌비에 새겨진 5-9 계명들이다. 물론 순서에는 별로 유의치 않은 듯 보이지만, 여기서 예수께서 인간들과의 관계들로 규정된 계명들만 제시하신 것은 표면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누구보다 각별했던 바리새인들에게 첫째 돌비에 새겨진 하나님에 대한 계명을 가지고서는 도저히 대화의 접촉점을 마련하기 힘들다고 판단하셨기 때문인 것 같다. 동시에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계명의 준수를 빌미로 인간에 대한 계명을 희생시켰던 바리새인들의 위선에 대한 질책의 뜻도 담겨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지금 예수께서 제시하셨던 계명들이 당시 바리새인의 교육에 영향을 받았던 제자들에게 하늘나라의 새 계명을 주셨던 산상 수훈에서와 동일한 순서로 언급되어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즉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 증거에 대한 계명은 산상수훈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차원에서 새롭게 선포하고 있는데(마 5:21-48), 이런 의미에서 본 구절에 제시된 계명들은 모세의 율법 차원에서의 준수를 훨씬 뛰어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예수께서 제시하신 계명들은 이미 그 속에 산상 수훈의 격조 높은 수준을 담고 있는 것이다.
19:19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 이것은 십계명의 구체적인 항목에 포함되는 것은 아니지만, 둘째 돌비의 핵심적인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은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롬 13:9).
19:20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 청년은 머뭇거림도 없이 예수께서 제시하신 계명을 다 준수했노라고 공언하고 있다. 그의 이 말은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막 10:21)라는 기록에 비추어 볼 때 상당히 진실성이 내포된 것 같다. 물론 청년의 계명 준수는 예수께서 이미 산상 수훈에서 제시하신 교훈에 근거한 계명에 대한 준수라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왜냐하면 이 청년은 아직도 영생을 인간의 공로에 의해서 노획할 수 있다는 바리새적 논리에 사로 잡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청년의 계명 준수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율법을 바리새인들이 상대화시켜 버린 결의법을 준수한 것이라고 봄이 옳다.
19:21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 이 구절은 부자청년 관원의 계명 준수의 불충분함을 전제로 한 것인데, 이는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막 10:21; 눅 18:22)라고 한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의 병행 구절이 잘 증명해 주고 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 볼 때 부자의 계명 준수는 자기만족적인 수준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일 것이 당연하다고 하겠다. 한편 본절의 '온전함'의 의미에 대해서는 마 5:48 주석을 참조하라.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 여기서 예수께서는 부자 관원 청년의 불충분성을 정확하게 지적하시는 바, 그것은 청년의 재산을 모두 가난한 자들에게 분배하는 것이다. 물론 청년은 이전에 가난한 자들에게 물질을 베푸는 자선 행위(20절)를 했다고 믿어지지만, 이는 자신의 재산에 별 지장이 없는 수준에서의 동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정도의 수준은 당시 사회 분위기상 분명 존경받을 만하고, 스스로 자족할 만한 정도였을 런지는 모르지만 하나님 나라의 영생을 얻기를 원하는 자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좋은 진주와도 같기 때문에 이것을 발견한 사람은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과 진주를 사는 법인데(마 13:44-46), 부자 청년은 아직 보화나 진주를 발견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발견하고서도 현재 눈앞의 현실적 이익에 눈이 어두워 자신의 재산을 처분해서 그것을 구입하지 못한 경우 중 하나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가 진정 영생을 얻기를 원한다면 그가 영생을 얻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말씀하신 것이다. 사실 재물은 이 청년에게 있어서 우상이었다. 따라서 그가 재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면 그는 영생을 얻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우상과 하나님은 결코 겸하여 섬길 수가 없기 때문이다(마 6:24)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 여기서 '보화'란 결국 청년이 애타게 희구했던 '영생'을 가리킨다(마 13:44-46). 즉 예수께서는 지금 부자 청년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좇아 산다면 영생이 있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 영생을 얻는 두 가지 길이 제시되었는데, 첫째는 재산을 포기하는 것이고, 둘째는 그 이후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첫째 조건이 충족된 이후의 일이고 보면 재산을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 즉 그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고, 두 주인을 섬기는 종교적 간음 행위와 진배없다고 하겠다.
19: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근심하며 가니라. - 하나님이냐 재물이냐를 선택하는 선택의 기로에서 부자 청년은 재물을 그의 주인으로 선택하여 돌아가고 말았다. 즉 부자 청년은 자신의 재산이 주는 안전과 위력에 너무도 깊이 젖어 있었기 때문에, 비록 그 생활에 부분적으로 오는 회의와 영생에 대한 갈급함이 전혀 전무했다고 볼 수는 없었다 하더라도 영생을 얻기 위해 자신의 우상인 재산을 포기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재산이 많다는 그 자체가 죄가 될 수는 없지만 그 재산의 풍요가 하나님의 제자가 되지 못하도록 작용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정죄 받게 될 것이다.
19:23-30 부자와 하나님 나라
예수께서는 본문에서 부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해 경고하고 계시는데, 바로 이것은 앞 단락에 언급된 부자 청년의 경우(16-22절)를 염두에 둔 교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의 경고를 들은 제자들이 아연실색(臣然失色)하고 있는 모습을 우리는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25절), 이는 당시의 유대 사람들은 물질적 풍요를 하나님의 축복으로 간주했던 반면, 가난과 질병은 하나님께서 저주하신 결과로 여겼기 때문이다(욥 5:17; 잠 19:7; 요 9:2).
따라서 제자들은 과연 예수님의 말씀처럼 부자가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겠는지 의문을 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구원과 영생이 결코 인간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강조하심으로써, 본문에 나타난 주님의 교훈이 특정한 계층의 사람들을 매도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제자들에게 새로운 영적 안목을 열어 주기 위한 것임을 암시하고 계신 것이다.
한편 본문의 후반부는 앞 단락에 언급된 부자 청년과는 대조적으로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의 뒤를 따르는 자들이 누리게 될 축복과 상급에 대해 소개하고 있는데(27-30절), 바로 이것은 다음 장의 첫 단락(마 20:1-16)에 언급되는 포도원 품꾼의 비유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본문을 통해 우리가 깨닫게 되는 사실은 다음과 같다.
① 인간의 구원은 스스로의 힘과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결과이다(슥 4:6). 따라서 구원의 문제에 관하여 자신의 무기력함과 무능력을 인정하고 겸손히 하나님께 의지하는 자가 복되다(롬 3:9-18; 7:19-24).
②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심지어 자기 목숨마저 버리는 자는 장차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할 수 있는 축복을 받게 되며, 또한 이 세상의 것들과는 감히 비교도 할 수 없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롬 8:18; 계 20:4-6). 따라서 성도들은 이 땅에 사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께서 맡기신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자신의 재능과 시간을 바치며, 더 나아가 생명까지라도 바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행 20:24; 계 2:10; 22:12).
19:23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 이 교훈은 부자 청년과 예수님 간의 대화 내용을 끝까지 지켜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교훈이다. 특별히 여기서 '어렵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는 말이라기보다는 부자라도 천국에 들어갈 수는 있지만 그 확률에 있어서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임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서 '부자'는 비단 재산이 많은 것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이와 같은 원리는 세상의 지식, 지위, 명예 등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즉 세상적으로 높은 가치의 것을 많이 소유한 사람은 그만큼 천국을 소유하는 데 장애가 많은 것이다.
19:24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 -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임을 강조하기 위해 도입된 비유이다. 그런데 이 비유에 사용된 '바늘귀'와 '약대'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그 해석에 있어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먼저 '바늘 귀'가 예루살렘 성의 '바늘 귀문'을 가리킨다는 견해가 있다(Barclay). 이 견해에 의하면 당시 예루살렘 성에는 크고 작은 두 개의 문이 있었는데 이 중 작은 문은 주로 밤에 사용되는 문으로 사람이 허리를 숙이고야 겨우 지날 수 있어서 '바늘 귀문'이라고 불렸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문으로 약대가 지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듯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한다. 다음은 '약대'(카멜로스)가 '밧줄'(카밀로스)을 의미한다는 견해가 있다(Calvin). 즉 약대가 아니라 밧줄이 바늘 귀로 들어가기 어려운 것처럼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도 어렵다는 말이다. 결국 두 견해 모두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어렵다고 하는 것을 가리킨다는 면에서 동일하다. 따라서 본절은 문자 그대로 취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19:25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 어떤 이유에서든지 예수님의 교훈은 제자들에게 충격이 될 만한 것이었다. 마치 제자들은 부자가 영생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자신의 일처럼 충격을 받고 있는 듯하다. 제자들의 충격은 제자들 역시 부가 아브라함이나 욥의 경우처럼 하나님의 축복의 상징으로 생각했던 유대적 사고방식이 허물어진 데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Carr, Plummer). 또한 제자들 역시 부를 하나님의 축복의 결과라고 믿고 염원했던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하고 보면, 그들도 넓은 범주의 부자 군(群)에 해당할 수 있다고 하겠다. 그래서 제자들의 충격은 예수님의 말씀이 자신들의 마음에 있는 잠재적인 부에 대한 갈망까지도 드러난 것 같은 생각에 더했을 것이다.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 여기서 가난한 자들 역시 부자가 되기를 소원하는 광의의 부자 군(群)에 속한다면 과연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느냐는 제자들의 항변은 이해할만 하다. 제자들은 자신들까지도 구원 밖의 범주에 해당되지 않을까하는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위로가 필요했을 것이다.
19:26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할 수 있느니라. - 이는 구원이 은혜로서 오직 하나님께만 달려 있다는 말씀으로, 당시 결의법과 선행으로 구원을 획득할 수 있다고 믿었던 바리새인들의 견해를 전면 부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살핀 대로 부자 청년은 바리새인이었거나 그들의 영향 하에 있었던 사람인지라 자신의 계명 준수를 통해서 영생을 얻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자력 구원의 가능성을 믿고 추진한 계명 준수는 마치 약대가 바늘 귀로 들어가려는 허망한 노력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따라서 구원은 어떤 경우이든지 사람의 노력이나 부와 같은 것으로 교환될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가능할 뿐인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란 인간의 자력 구원 가능성을 전제로 한 인간 행위와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전적인 순종까지도 제외시키는 것은 아니라 하겠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순종을 촉발시켜 그로 하여금 오직 하나님한 분만을 의지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19:27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 사람의 힘과 능력으로는 영생을 얻을 수 없다는 예수의 엄격한 말씀에 불안을 느낀 제자들을 대표하여 베드로가 예수께 한 질문이다. 여기서 베드로는 부자가 자신의 소유를 포기하지 못함으로 구원을 받지 못한 사실과 자신들의 전적인 포기를 통한 순종을 대비시키고 있다. 제자들은 이미 오래 전에 자신들의 생업을 포기하면서 예수님을 좇았던 자들로서(마 4:20), 이들의 입장에서는 응당 구원의 여부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즉 이들은 비록 그들이 자신들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를 좇았으나 예수님의 준엄한 말을 듣자 구원에 대한 불안을 느끼고 구원에 대한 확증을 얻고자 예수께 이 질문을 한 것이다.
19:28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 여기서 '새롭게 되다'(팔링게네시아)라는 말은 '중생', '영적 혁신'(딛 3:5)과 같은 말로, 메시야적인 회복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말이다. 따라서 본절에서는 만물의 '재창조' 또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관련이 있다(Carson). 이러한 재창조 또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그리스도의 초림과 더불어 이미 시작되었으며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될 것이다. 물론 재창조 또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현존하는 질서나 자연의 개선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는 현존의 질서와 우주가 종말을 고하는 자연의 대 파국이 있게 될 것이며(마 24:35) 이 세상은 완전히 새로운 질서와 모습을 갖추게 될 것이다(계 21:1-5). 이와 관련해서는 사 43장 자료노트, '재창조'를 보다 참조하라. 한편 '인자가… 보좌에 앉을 때'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여 심판의 주로 보좌에 앉으실 때를 가리킨다.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 예수께서는 자신들의 생업을 버리고 주를 따랐던 열두 제자에게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할 수 있는 권세를 주겠다는 약속을 주심으로써 이제 민족적 이스라엘인 12지파가 영적 이스라엘의 시초인 12제자들로 대체될 것임을 예고하셨다. 제자들에게 주어진 이 같은 특권은 사도라는 역사상 유일하고 일회적인 독특한 직분에 주어진 하나님의 독특한 배려로 보인다. 물론 이 특권은 교회와 하나님 나라의 연관성 속에서만 주어진 것이지만 제자들은 이를 철저 지상의 나라와 관련시켜 이해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제자들 사이에서 열두 보좌 중 상좌를 차지하려는 일 때문에 다툼이 생겼던 사건(마 20:20-24)은 제자들이 열두 보좌의 영광을 세상 나라의 서열로 생각했음을 잘 보여 주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 여기서 '이스라엘'은 학자에 따라 영적 이스라엘을 의미한다고도 하며, 문자 그대로 육적 이스라엘을 의미한다고도 한다. 전자의 견해를 취하는 학자들은 본절을 그리스도의 초림 이후 거듭난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교회를 심판할 것을 가리킨다고 이해하며(Calvin, Clarke), 후자의 견해를 취하는 학자들은 그리스도가 재림하여 새 세상이 올 때 12사도가 육적 이스라엘을 심판할 것을 가리킨다고 한다(Bengel, Bruce, Plummer). 이러한 견해 가운데 대체로 후자의 견해가 지지를 받는다(Baumgarten, France).
19:29 또 내 이름을 위하여…버린 자마다…영생을 상속하리라. - 이 구절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특권이 제자들에게 한정된다는 오해를 깨고, 자신의 소유 및 관계를 포기하고 주님을 따르는 모든 자들에게도 주어질 것임을 보여 준다. 이들의 경우는 제자들의 특권과는 특징상 성격을 달리 하지만 이것이 서열이나 그 상급의 질적인 차이를 뜻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본래적인 의미에서 제자들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하겠다. 다만 제자들의 경우는 '사도'라는 독특한 위치로 인해 주어지는 하늘나라의 임무가 일반 성도의 그것과 성격을 달리할 뿐인 것이다. 아무튼 하나님 나라의 영생과 상급은 자신의 소유와 관계를 버리는 것이며, 예수님의 제자가 될 때에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19:30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 이 금언은 예수께서 포도원 품꾼 비유의 결론으로 하신 말씀이기도 하다(마 20:16). 사실 이는 포도원 품꾼 비유의 도입부에 해당한다고도 할 수 있다. 특히 이것이 소유와 관계를 청산하고 주의 제자가 되기로 작정한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임을 감안할 때, 소위 주님을 믿고 따르기로 작정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하나님 나라를 오해할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즉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영생을 자신들의 선행이나 계명 준수의 결과로 얻을 수 있다고 믿었지만, 예수께서는 이런 사상을 단호히 거부하셨던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오직 그 분의 은혜에 의존할 뿐인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하나님 나라를 보장 받은 사람들 중에서 자신들의 순종과 희생, 그리고 봉사의 정도를 가지고 하나님 나라에서의 서열을 정하려는 경향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이런 세상주의적 사고방식에 근거한 경향을 미리 예상하시고, 혹 제자들에게 주신 열두 보좌에서의 심판권을 이런 식으로 이해할 것을 염려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응당 자신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먼저 될 것으로 의심치 않았던 제자들에게 나중될 가능성이 많다는 사실을 주지시켜 줌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서열은 결코 인간의 노력이나 공적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백히 하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는 그 입문에서부터 서열까지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할 뿐이며, 여기에 인간의 공로와 노력이 개입될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이다. 다만 은혜 받은 자로서 마땅한 반응으로 순종과 봉사가 있을 뿐인 것이다. 따라서 이 순종은 은혜에 대한 감사이기 때문에 우리는 대가에 대해서 연연해서도 안되고 바래서도 안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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