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타사 가기전 사단복지법인 승가원 건물
입구
불교대학으로 사용하였으나
현재는 어린이집으로 사용하고 있다.
대원암(大圓庵)
한국 근대불교 교육 도량
보타사 절 안에 있는 대원암(大圓庵)은 조선 후기인 1845년 지봉 우기(智峰 祐祈) 스님이 세운 가람이다.
일제 강점기 시기에는 근대불교계의 대강백인 영호 정호(映湖 鼎鎬, 1870~1948) 스님이 이곳에 불교전문강원을 개설하여 많은 석학들을 배출하였다.
영호 정호 스님은 박한영(朴漢永) 스님이다. 정호(鼎鎬)는 본명이며, 호는 석전(石顚)이다, 후일 당호(堂號)를 영호(映瑚)라 하였다. 한영(漢永)은 자(子)이다.
영호 정호 스님은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명진학교의 강사로부터 불교고등강숙 숙장을 거쳐 중앙학림의 교장과 중앙불교전문학교의 교장 및 혜화전문학교의 명예교수를 역임하고 조선불교의 교정과 대한불교의 교정을 지낸 분으로 우리나라 불교 교육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영호 정호 스님께서 계시던 당시 대원암은 우리나라 지식인 사회의 대표적 인물들이 모여들어 불교학을 접했던으로도 유명하다.
이곳에는 운허, 고봉, 청담, 성능, 철운, 운성, 운기, 청우, 남곡, 경보 등의 출가 제자와 석정 신석정, 미당 서정주 등의 재가 제자 및 동경 삼걸로 불리던 벽초 홍명희, 춘원 이광수, 육당 최남선을 비롯한 문인과 백화 양건식, 산강 변영만, 가람 이병기, 위당 정인보, 범부 김정설, 지훈 조동탁 등 당대의 대표적 지식인들이 모여 들었다.
또 불교의 3대 강백으로 불린 박한영 스님은 이곳에서 20여 년 동안 머물면서 한국 사회에 불교의 영항을 증대시키는데 크게 공헌했다.
영호 정호 스님의 입적 이후 1970년대의 대원암에서는 탄허 택성(呑虛 宅成, 1912~1983) 스님이 머물면서 이통현장자의 『신화엄합론』의 역경 사업을 진행하였다.
최근에는 조계종부설어산작법학교가 이곳을 교육 공간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현재 이곳에서는 법회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보타사 종무소가 위치하고 있다.
대원암 앞 불상
대원암 앞 불상
서울보타사마애보살좌상
Rock-carved Seated Bodhisattva of Botasa Temple, Seoul 首尔普陀寺磨崖菩薩坐像「今心 求夕步(普陀寺)磨崖菩薩坐像
지정번호:보물 제1828호
시대: 고려시대
소재지:서울특별시 성북구 개운사길 60-46(안암동5가, 보타사)
서울 보타사 마애보살좌상은 보타사 대웅전 뒤쪽 바위의 면을 따라조각된 상이다.
넓은 어깨에 당당한 신체를 지녔으며, 머리에 쓴원통모양의 관 좌우로 장식이 늘어져 있다.
둥글넓적한 얼굴에눈이 길며, 입은 자그마하다.
몸에는 보살의 옷인 천의(天衣)를 걸쳤으며, 어깨 위로는 보살의 머리카락이 늘어져 있다. 양손은몸에 비해 큰데, 오른손은 어깨까지 올려 엄지와 검지를 맞대고있고, 왼손은 무릎 아래로 내려 엄지와 중지를 맞댔다.
마애보살상의 무릎 왼쪽에는 위패* 모양의 조각에 신중과관련된 적혀 있는데, 이 내용이 마애보살상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분명히 알 수 없다. 좌우에 있는 직사각형 홈은 과거 목조 구조물이있었던 흔적이다. 마애보살상에 관한 문헌기록이 전하지 않아정확한 제작 시기를 알 수 없지만, 5m에 달하는 크기, 넓은 어깨의당당한 신체와 작은 입, 좌우에 장식이 달려있는 관 등은 고려후기부터 조선 초기까지 유행한 마애조각상의 특징으로, 마애보살좌상도 이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위패 : 죽은 사람의 이름을 적은 나무패
* 신중: 불교의 수호신
관음전에서 바라본 마애보살좌상, 보물
서울보타사 금동보살좌상
普陀寺金銅菩薩坐像
지정번호 : 보물 제1818호 시대 : 조선시대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개운사길 60-46 (안암동 5가, 보타사)
서울 보타사 금동보살좌상은 오른쪽 다리의 무릎을 세우고, 왼쪽 다리는 아래로 내리고 있는 독특한 자세로 앉아 있다. 이러한 자세를 '유희좌’라고 하는데, 중국 송나라와 요나라의 보살상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후기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다. 오른팔은 오른 무릎 위에 두고, 손에는 물을 담는 정병(淨瓶)을 들고 있다. 왼팔은 팔걸이 받침대에 기대었던 것으로 추정하는데,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얼굴은 갸름하며, 부드러운 턱선이 특징이다. 머리에 쓴 화려한 관에는 관세음보살의 특징인 화불(化佛)*과 불꽃무늬, 넝쿨무늬, 연꽃무늬 장식이 있다. 보살의 머리카락은 세 가닥으로 갈라져 양어깨를 타고 흘러내린다. 독특한 자세와 머리에 쓴 관에 표현된 화불로 미루어『화엄경』입법계품에 나오는 보타락가산(補山)의 바위 위에 걸터앉아 있는 관세음보살을 표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화불:부처가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여러 모습으로 변화하는 일
관음전 주련
종무소 옆면
종무소 정면
벽봉스님이 소신고양한 기념비(왼쪽)와 부도탑
벽봉 큰스님이 81살 되던 해에 소신공양 하신 것입니다. “소신공양(燒身供養)”이란 부처에게 공양하려고 자신의 몸을 불사르는 것을 말합니다. 《묘법연화경》〈약왕보살 본사품〉에 “약왕보살이 향유를 몸에 바르고 일월정명덕불(日月淨明德佛) 앞에서 보의(寶衣)를 걸친 뒤 신통력의 염원을 가지고 스스로 자기 몸을 불살랐다 한다. 경전은 이를 찬양하여, '이것은 참다운 법으로써 여래를 공양하는 길이다. 나라를 다 바치고 처자로 보시하여도 이것이 제일의 보시이다.'라고 하였다.”라고 전합니다.
우리나라에도 소신공양을 한 고승이 있었다고 하나 이름이나 흔적 등은 전하지 않지요. 그런 흔치 않은 소신공양이 보타사에서 있었던 것입니다. 스님이 소신공양한 까닭은 자신의 성불을 위해서 한 것이 아니라 호국과 남북통일에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