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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장 결례 논쟁과 이방 땅 두로에서의 치유 사역
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2:1-8:26까지 이어지는, 세상 지도자들의 배척에도 불구하시고 하나님의 구속의 섭리에 따라 구속사역(救贖事役)의 최종 성취를 위한 십자가 수난을 향하여 능력과 사랑으로 묵묵히 일하셨던 예수의 사역을 보도한 일련 기사의 연속부분이다. 마가는 이를 통하여 구주 예수조차도 세상의 배척은 받았으나 이를 오히려 당신의 구속 사역 성취의 기회로 삼으시고 또 이를 이기고 부활 승리하셨듯이 자신의 복음서의 1차 수신자인 그 시대의 성도들로서 당장의 박해에 처해 있던 성도들도 박해를 받겠으나 이는 잠시이며 오히려 구원을 얻는 지름길에 불과하고 곧 구원 승리를 얻을 것을 격려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런 문맥 하에 있는 본장은 전 ․ 후반부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내용을 보도하고 있다. 즉 전반부 1-23절은 하나님의 선민(選民)인 이스라엘의 유대교 지도자들이 무조건적이고 악의적으로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을 배척하기 위하여 소위 결례 논쟁을 제기하자(1-5절) 이에 대하여 주께서 유대 지도자들에게 책망하신 내용(6-13절)과, 이에 관하여 다시금 당신을 따르는 무리들에게 교훈하신 내용(14-23절)을 보도하고 있다. 반면 후반부 24-37절은 주께서 본래 이방 땅인 두로(The Tyre)에 가시자 이방인인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24-30절)과 귀먹고 어눌한 자(31-37절) 등이 예수를 믿고 구원 얻었음을 보도하고 있다.
이러한 본장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전반적으로 이해할 때 결국 이제 우리 주 예수님의 성육신 강림으로 개시된 신약시대에는 구속사의 중심이 육적 선민인 이스라엘 중심에서 벗어나 영적 선민인 세계 만방의 이방인 출신의 성도에게로 확장될 것이라던 구약의 예언(시 10:15; 사 1-4; 렘 4:2)이 실현되어 나가는 과정을 보여 준다 하겠다. 이제 이를 보다 상술하면 다음과 같다. 예수님은 구약에 약속된 구속주(救贖主)요, 영원한 메시야(the Messiah)로서 이 땅에 성육신하여 오신 본래 제 2위 하나님이신 성자(聖子)이셨다. 그리하여 이제 세계 만민 중에 택한 자의 구원의 근거를 마련하기 위한 구속사역을 마침내 십자가 수난으로 성취하시기 전에 당신의 구속사역을 믿고 회개하는 자에게는 구원이 있을 것임을 미리 보여주는 복음을 가르치시고 전파하시기 위한 공생애를 묵묵히 진행해 가셨다. 이런 예수님의 사역은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이는 구약 예언의 성취요, 또 이를 보다 확장한 것이었다. 즉 주님의 사역은 당신이 초림하사 일단 구속사역을 성취하심으로 인간 구원의 영적 근거가 일단 마련된 것을 주로 예언한 옛 약속 곧 구약의 성취였다. 한편 이처럼 구약의 성취로 오신 주님은 이제 다시금 구속사역의 최종 실현인 천국 구원을 새로 약속한 새 언약 곧 신약을 새로이 주셨다. 따라서 구약은 주님 안에서 신약으로 성취 확장된 것이었다. 그러나 신약으로 계승 확장된 구약의 참 본질을 망각한 채, 자신들 이스라엘 민족을 중심으로 전개되기는 하였지만 신약 시대의 모든 이방 만민의 구원을 예표하는 것에 불과했던 구약의 일부 내용만을 민족주의적(民族主義的)이요, 인본주의적(人本主義的)으로 곡해하며 메시야가 와서 자신들을 최고의 지배자로 만드는 지상 나라를 건설해 줄 것이라는 착각과 기대를 갖고 있던 유대교에 편협하게 집착하여 그릇된 메시야관을 갖고 있던 유대인들은 예수의 메시야 사역을 자기들 민족을 위한 정치적 행위로만 착각하였다. 그래서 우매한 민중은 예수를 정치적 해방자로 알고 맹종하다가 실망한 반면에 정치․종교적 기득권자들은 자신들을 위협하는 정치적 선동자 및 이단자로 몰아붙이는 어리석음이 자행되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예수를 배척하여 무고하게 죽이는 지경까지 나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훗날 예수는 이런 과정을 통하여 오히려 택한 죄인을 위하여 대신 피를 흘리는 구속사역을 성취하사 사탄의 사주를 받은 유대인의 배척이 오히려 구속사역을 성취하시고 나아가 복음이 이방인에게 전달되게 되는 계기가 되게 하셨던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1-23절의 결례 논쟁 관련기사들도 결국 순수한 토론이 아니라 처음부터 편견에 사로잡혀 무조건 예수를 거부한 유대인의 우매한 예수 배척의 일환으로 일어난 것이었다. 유대인의 예수 배척에 대한 전반적 오류는 막 12장 연구 자료를, 그리고 특히 유대지도자들의 오류에 대해서는 마 23장 구속사적 개관을 각각 보라.
한편 전반부와 대조되는 후반부 24-37절의 기사를 전반부와 대조시켜 이해할 때 더욱 깊은 구속사적 교훈을 깨닫는다. 특히 구약이 그토록 저주하던 가나안(the Canaan) 출신의 여인이었던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의 치유 사건은 구속사가 갖고 있는 일종의 역설적 측면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앞 단락에서 보듯이 선민으로서 예수님이 탄생한 혈통의 민족이요 주님이 주신 신약의 전신인 구약을 먼저 받았던 한 유대인은 그토록 위대한 주님의 사역을 거부하고 배척했다. 반면에 이 이방 여인이 당신은 먼저 유대인을 위하여 사역하여야 한다는 예수의 냉엄한 답변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개로까지 비하(卑下)하는 절대 겸손과 절대 신앙을 보이며 딸의 구원(救援)을 재차 간청하였다. 이것은 결국 그녀가 메시야로서의 예수의 참모습을 발견하고 절대 의뢰하는 참 신앙을 가졌던 증거였다. 한편 귀먹고 어눌한 자를 고치신 주의 능력과 사랑을 보고 많은 이방인들이예수님 의 사역 을 있는 그대 로 받아들여서 주님의 선함을 인정한 것도 우리가 열린 마음으로 주님을 바라보기만 하면 그 구원의 본질을 깨달을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어쨌든 본장 후반부의 이 두 사건은 구약의 육적 선민인 유대 인들이 예수를 배척한 반면 이제 구약을 성취하시고 신약을 세우신 예수의 강림과 사역으로 구속사의 주역이 신약의 영적 선민인 세계 만민 중에 택한 성도들에게로 확산될 때가 이르렀음을 강력히 암시(暗示)한다. 나아가 이는 구원은 복음을 많이 듣고 아는 자가 아니라 참으로 자신을 깨닫고 겸손한 자가 받을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세상의 다른 것들은 모두 다 힘세고 잘난 자가 차지하지만 구원은 참으로 겸손한 자가 차지하는 것이다.
현대의 우리도 본래 죄인으로서 아주 구원받을 자격이나 근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은혜로 구원의 복음이 드높이 전파되어 우리에게까지 주어지므로 자칫 교만하여 복음을 무시할 수 가 있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로 복음이 오늘날 우리에게 값없이 그리고 풍부하게. 또한 간곡하고도 애처롭게 주어지는 것은 복음이 값싸서나, 아니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슨 빚을 지어서가 아니라 다만 죄인을 사랑하는 뜨거운 사랑 때문임 을 깨달아 이 가나안 여인처럼 겸손하고 뜨거운 신앙을 견지(堅持)하여(행 20:19) 마침내 주님의 구원에 동참하여야 할 것이다.
외울 말씀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세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막 7:6,7)
결례 논쟁
1 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예수께 모였다가
2 그의 제자 중 몇 사람의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더라
3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이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어 손을 부지런히 씻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4 또 시장에서 돌아와서는 물을 뿌리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
5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준행치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6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7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8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9 또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10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였거늘
11 너희는 가로되 사람이 아비에게나 어미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12 제 아비나 어미에게 다시 아무것이라도 하여 드리기를 허하지 아니하여
13 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고
부정의 참된 원인에 대한 교훈
14 무리를 다시 불러 이르시되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15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16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시고
17 무리를 떠나 집으로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그 비유를 묻자온대
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19 이는 마음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에 들어가 뒤로 나감이니라 하심으로 모든 식물을 깨끗하다 하셨느니라
20 또 가라사대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21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22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23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을 위한 축사
24 ○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경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25 이에 더러운 귀신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 엎드리니
26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27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28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29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30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귀먹고 어눌한 자의 치유
31 ○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경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경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
32 사람들이 귀먹고 어눌한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33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 뱉아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34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35 그의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더라
36 예수께서 저희에게 경계하사 아무에게라도 이르지 말라 하시되 경계하실수록 저희가 더욱 널리 전파하니
37 사람들이 심히 놀라 가로되 그가 다 잘하였도다 귀머거리도 듣게 하고 벙어리도 말하게 한다 하니라
본문 & 자료노트
풍습 -7:1-4 유대인의 식사 정결례
본문에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예수의 제자들이 식사전에 손을 씻어야한다는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지 않았다 하여 이를 비난하며, 또 이에 대해 예수께 질문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이에 당시 유대인들의 식사 정결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 식사와 관련된 여러 규례
바람과 먼지가 유독히 많은 팔레스틴에서는 고대로부터 식사 전에 손을 닦거나 몸을 씻는 것이 관례였다(왕하 3:13). 특히 이스라엘이나 근동의 국가들에서는 대부분 스푼이나 포크 등과 같은 식사 도구 없이 손으로 음식을 집어 먹는 것이 관습이었기 때문에 손 씻는 일은 꼭 필요하였다. 본서 마 26장 자료노트 참조
그런데 이러한 자연스러운 이스라엘 사람들의 관습이 포로 귀환 시대 이후 의식적인 측면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유대주의자들에 의해 종교적인 규례들이 되었고, 이것이 장로들의 유전이라는 이름으로 후손들에게 계속해서 교육되어 왔다. 이 규혜들에 관한 상세한 자료는 발견할 수 없으나 본문에서 간략히 언급한바에 따르면 식사 전에는 반드시 손을 깨끗이 씻어야 하며, 먼 곳으로 외출했다가 돌아올 때는 몸까지도 다 씻도륵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손을 씻을 때는 대야에 물을 담아 손을 담구어 씻지 않고, 하인이나 다른 사람이 부어주는 물로 씻도록 했는데 이는 고인 물은 부정한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그릇, 주발. 잔 등도 깨끗이 씻도록 했는데. 이는 이것들이 대부분 이방인의 손으로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이러한 규례들을 지키지 않으면 종교적으로 크게 부정한 것으로 여겨져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크게 질타를 당하기 가 일쑤였다.
2. 교훈
이처럼 유대인들이 식사 정결례를 지키는 것은 충분히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본문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같이 겉으로는 종교적 정결을 강조하면서도 실상 하나님을 향한 신실성이 없는 것은 참으로 문제이다. 더욱이 유대인들은 외적인 의식 준수 그 자체를 의로 여기고 그것을 지키지 못하는 자들을 비판함으로써 정결례를 지키는 본질을 완전히 왜곡한 것이다. 이처럼 우리도 자칫 내면적인 신앙, 곧 하나님과의 내적 관계에 대해서는 도외시 한 채, 지나치게 외적인 종교적 형식들에만 치중함으로써 신앙의 본질을 왜곡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결코 안될 것이다.
풍습 -7:11, 고르반
1. 정의 및 관련 풍습
고르반( )이란 '하나님께 드린 예물', 또는 '하나님께 드림'이란 뜻으로서 히브리어 '코르반'( )을 음역한 것이다. 구약 성경에서 이 단어는 단순히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바치는 제물 혹은 예물을 가리키는 단어로 쓰였다(레 2:1,4,12). 그런데 바벨론 포로기 이후 외적인 의식 및 규례를 강조하는 유대인들에 의해 이 단어는 하나의 맹세어로서 스스로 헌신하여 하나님께 바치는 모든 물건에 확대 적용되었다. 즉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신앙의 진정성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 여러 사람 앞에서 '고르반', 즉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라고 맹세하고 예물을 하나님께 바쳤고 이것이 풍습이 되어 후대에 전해져 왔다. 한편 고르반'으로 바친 물건은 비록 자신의 집에 소유하고 있더라도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종교적인 목적 이외에 2. 고르반과 관련된 장로들의 유전과 그 폐단
이상에서 본 바 '고르반'은 본래 매우 신앙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종교적 풍습이었다. 그러나 장로들의 유전은 이 풍습을 종교적 규례로 크게 강화하여 그 세부 규정을 많이 정했다. 즉 예를 들면, 장로들 외 유전은 자식이 부모에게 드려 봉양해야 할 것을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말하기만 하면 부모 봉양 의무는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쳤다. 물론 이는 부모 봉양보다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우선한다는 종교적 가르침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점점 이 규례는 부모와 사이가 나쁜 자식이나 부모 봉양을 꺼려하는 불효자식들에게 부모 공경을 회피할 수 있는 변명거리를 제공하게 되었다. 결국 본질적이지 않고 인위적인 규례를 지키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이 직접 명하신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십계명의 제 5계명을 범하게 하는 중대한 오류를 저지른 것이다.
또한 '고르반'하고 맹세한 사람은 그 물건을 성전에 바치지 않고 그대로 소유할 수도 있었다. 때문에 겉으로는 신앙적인듯이 하면서 실상은 그 물건들을 자신들을 위해 사용하는 기만적인 행위도 빈번히 있었다. 이에 예수께서도 고르반의 본래적인 종교적 목적을 부정하신 것이 아니라 바리새인들의 외식되고 기만적인 행위들에 대해 책망하신 것이다. 본장 연구자료 '장로들의 유전'을 참조하라.
주요 주제- 7:1 신약의 사회 . 문화적 배경
풍습-7:11, 고르반
1. 정의 및 관련 풍습
고르반(헬, 코르반)이란 '하나님께 드린 예물', 또는 '하나님께 드림'이란 뜻으로서 히브리어 '코르반'( )을 음역한 것이다. 구약 성경에서 이 단어는 단순히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바치는 제물 혹은 예물을 가리키는 단어로 쓰였다(레 2:1,4,12). 그런데 바벨론 포로기 이후 외적인 의식 및 규례를 강조하는 유대인들에 의해 이 단어는 하나의 맹세어로서 스스로 헌신하여 하나님께 바치는 모든 물건에 확대 적용되었다. 즉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신앙의 진정성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 여러 사람 앞에서 '고르반', 즉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라고 맹세하고 예물을 하나님께 바쳤고, 이것이 풍습이 되어 후대에 전해져 왔다. 한편 고르반'으로 바친 물건은 비록 자신의 집에 소유하고 있더라도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종교적인 목적 이외에 다른 목적으로 사용할 수 없었으며, 또 다른 사람이 일체 그 물건에 손댈 수 없었다.
2. 고르반과 관련된 장로들의 유전과 그 폐단
이상에서 본 바 '고르반'은 본래 매우 신앙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종교적 풍습이었다. 그러나 장로들의 유전은 이 풍습을 종교적 규례로 크게 강화하여 그 세부 규정을 많이 정했다. 즉 예를 들면, 장로들의 유전은 자식이 부모에게 드려 봉양해야 할 것을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말하기만 하면 부모 봉양 의무는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쳤다. 물론 이는 부모 봉양보다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우선한다는 종교적 가르침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점점 이 규례는 부모와 사이가 나쁜 자식이나 부모 봉양을 꺼려하는 불효자식들에게 부모 공경을 회피할 수 있는 변명거리를 제공하게 되었다. 결국 본질적이지 않고 인위적인 규례를 지키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이 직접 명하신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십계명의 제 5계명을 범하게 하는 중대한 오류를 저지른 것이다. 또한 '고르반'하고 맹세한 사람은 그 물건을 성전에 바치지 않고 그대로 소유할 수도 있었다. 때문에 겉으로는 신앙적인 듯이 하면서 실상은 그 물건들을 자신들을 위해 사용하는 기만적인 행위도 빈번히 있었다. 이에 예수께서도 고르반의 본래적인 종교적 목적을 부정하신 것이 아니라 바리새인들의 외식되고 기만적인 행위들에 대해 책망하신 것이다. 본장 연구자료 '장로들의 유전'을 참조하라.
원어 연구- 7:34, 탄식하시며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에스테나크세'( )이다. 이는 '신음하다'. '탄식하다'. 또는 '불쾌한 감정을 고의적으로 드러내어 투덜거리다'라는 뜻의 동사 '스테나조'( )의 부정 과거형이다.
여기서 동사 '스테나조'는 일반적으로 동사 '히스테미'( )에서 유래 했을 것으로 본다. 동사 '히스테미 '는 매우 다양한 용법으로 쓰이는 용어로서 '붙잡다', '가져오다', '멈추게 하다', '서다' 등의 의미가 있다.
이로 볼 때 동사 '스테나조'는 어떤 일이나 혹은 사람에게 붙들려 안타까워하는 감정을 나타내는 동사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본문에서 '에스테나크세'. 즉 '탄식하다'의 의미는 예수께서 귀먹고 어눌한 자를 보시고 안타까워하시며 기도하시는 모습을 묘사한 단어라 볼 수 있다.
이는 롬 8:26에서처럼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는 것과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가 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죄인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심정이 얼마나 안타까운 상태에 있는가를 다시 한 번 발견하게 된다.
도표-7:21-23 막 7:21-23과 갈 5:19-21의 비교
막 7장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 갈 5장의 육체의 일
1. 음란 음행 음행
2. 도적질 더러운 것
3. 살인 미움 호색
4. 간음 음욕 우상 숭배
5. 탐욕 탐심 시기
6. 악독 우상숭배 분냄
7. 속임 거짓 당 짓는 것
8. 음탕 호색 분리함
9. 흘기는 눈 시기 이단
10. 훼방 시기 투기
11. 교만 미련함 술 취함
12. 광패 방탕함
주요 주제- 7:5-13 계명 준수에 관한 예수 교훈의 특징
막 12장 자료 노트 참조.
주요 주제- 7:24-30 축사의 이해
막 9장 자료 노트 참조.
지도- 7:31 본장의 예수의 행로
7:1-23 유전(遺傳)에 관한 논쟁
예수님의 제2차 갈릴리 사역이 마감되고 제 3차 갈릴리사역이 시작되는 시기에 발생한 사건들을 소개한 바 있는 앞장의 내용에 이어서, 본장 후반부부터는(막 7:24)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 서쪽의 게네사렛을 출발하여 지중해 연안의 두로와 시돈을 거쳐서 갈릴리 호수 동쪽의 데가볼리지방에 이르기까지 주로 이방인들의 땅에서 행하신 사역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이 부분은 예수께서 아직 갈릴리에 계실 매 있었던 일로서 민중들 사이에 펴진 예수의 명성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예수를 올무에 빠뜨리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유대종교 지도자들의 간계로 시작된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예수께서 갈릴리를 떠나 이방 땅을 방문할 계기를 마련해 줌으로써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밝은 빛이 비추어지고 있음을 전할 24절 이하의 내용에 대한 서론의 역할을 한다.
한편 이때 예수님과 유대 종교의 지도자들 사이에 전개된 유전(遺傳) 논쟁은 부정(不淨)에 대한 바리새인의 문제제기와 예수님의 첫 번째 응답(1-8절), 유전의 한계에 대한 예수님의 두 번째 논증(9-13절), 진정 부정한 것에 대한 예수님의 결론(14-23절), 이렇게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무튼 본문은 하나님의 뜻이나 율법의 근본정신을 도외시한 채 그저 율법의 문구에 얽매여 위선적인 종교 생활을 일삼고 있던 바리새인들에 대한 비판과 책망으로 귀결되고 있다. 정녕 유대 종교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기보다 장로들의 유전(tradition)을 엄수하는 데에 더 열심이었으며, 내적인 성결을 이루기 위해 죄악과 불의를 멀리하기보다 의식법(儀式法)에 규정된 부정을 피한다는 명목으로 외식적인 자세로 일관했다. 그러나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께서는(마 5:17) 행위를 규정한 율법의 근본 목적이 율법 준수를 통한 내적 성결의 완수에 있음을 가르치신다. 뿐만 아니라 인간이 부정케 되는 원인이 정결 규례를 준수치 못한 데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행위에 있음을 밝힘으로써 당시 예수를 올무에 빠뜨리려던 자들의 마음 상태를 간접적으로 비판하셨다. 이에 대해서는 마 15:1-20 문단 강해를 보다 참조하라.
따라서 우리가 본문 가운데서 발견할 수 있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① 경건의 모양뿐만 아니라 경건의 능력을 아울러 갖추는 것이 성도들에게 요구된다(딤후 3:5). 겉으로 보기에 바리새인들은 누구보다도 거룩한 자들이었으나. 참된 경건이 그들에게 없었기 때문에 위선자로 책망 받을 수밖에 없었다. 혹여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인간 사고의결과나 경험을 더 우위에 두는 폐습이 반복되고 있지는 않
는가?
② 성도가 위선에 빠지는 것은 자신의 영적 품성보다 주위의 평판에 더 관심을 기울이거나.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지도 않으면서 단지 외부적 종교 행위에 열심을 쏟을 때 발생한다. 유대 종교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경외심의 발로에서 예배를 드리기보다 오히려 대중 앞에서 스스로를 과시하기 위한 방편으로 예배를 드렸다. 실로 하나님께서는 입술로만의 경배가 아닌 마음의 예배를 원하신다.
③ 하나님에 대한 헌신을 핑계로 하석 도덕과 윤리에 어긋나는 처사를 일삼는 것은 전혀 비성경적인 태도이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을 섬긴다는 구실로 부모 부양의 책임을 회피하는 행위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단호히 비판하셨다. 만약 성도가 부모와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또한 그들을 돌보지 않는다면. 불신자들보다 더 악한 자라고 책망받을 수밖에 없다(딤전 5:8).
7:1 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 '바리새인들'은 헬라어로 '파리사이오이'( ), 히브리어로는 '페루쉼'( )으로 '분리된 자' 혹은 '분리주의자'란 뜻이며. 성경에서는 본문에서와 마찬가지로 단수로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눅 7:36; 행 5:34; 빌 3:5). 바리새인들은 그 어떤 종파보다 더 경건한 종파였으므로 헬레니즘에 반발하던 일반 민중들에게 많은 영 향을 미쳤고 지지를 받았다. 한편 서기관들은 율법에 능숙한 직업적인 학자 계급이었다. 신약 성경에서 이들은 대부분 '성경에 능한 자'(그람마테이스, 눅 7:30; 14:3)와 '교법사'(노모디다스칼로이, 눅 5:17; 행 5:4)로 언급하고 있다. 이들의 기능은 율법을 세밀하게 분석하여 그 안에 담긴 뜻을 설명해 주는 것 뿐만이 아니라 율법의 요구 사항들을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그 법적인 결정 사항들을 후대에 전수시키는 것이었다. 한편 서기관들 역시 열렬한 율법 수호자들이었으므로 백성들에게 인기가 있었으며 그만큼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러한 호평은 그들이 '람비'( )즉 '나의 선생님'이라고 불리운 사실에 잘 나타나있다(신약 총론 '신약시대의 사회 문화적 배경' 참조).
예루살렘에서 와서. -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산헤드린의 명령에 따라 예수께 왔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Hendriksen). 그들이 내려온 목적은 예수를 책잡아 모함의 구실을 마련하기 위함이었다(막 3:6; 11:18). 왜냐하면 당시 전통적인 유대주의자의 입장에서는 예수의 언행이 너무나 파격적이었으며 이러한 행동으로 인하여 예수와 심각한 갈등의 언쟁이 전개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민중들 사이에 폭발적으로 예수의 인기가 높아지고 있었고, 또한 그가 전통적인 유대주의의 관행과 의식을 외식된 형식주의라고 책망하였기 때문이다. 즉 예수의 모든 활동들이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으로 기존 질서를 무너뜨리며 자신들의 기득권을 손상시키는 많은 파문을 불러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에 대한 소문의 진상을 확인할 뿐 아니라 예수의 언행 가운데서 잘못된 것을 찾고자 혈안이 되어있었던 것이다(행 3:22).
7:2 부정한‥‥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더라. -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예수를 책잡기 위한 모함은 제자들의 '부정한 손, 곧 씻지 않은 손으로 떡을 먹는 행위'에서 표면화되었다. 한편 본문의 '부정한 손'과 '씻지 않은 손'은 같은 의미로 씻지 않았기 때문에(원인) 불결한 손(결과)이란 의미이다. 이처럼 자세히 설명하는 까닭은 마가가 의도하고 있는 바 유대인의 종교적 관습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이방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이다(Hendrikson). 그리고 여기서 '부정하다'란 말은 비위생적이란 것보다 종교적 의미에서 의식적 부정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장로들의 유전을 집대성한 미쉬나의 한 부분 전체가 이 의식적 정결의 문제에 대하여 논하고 있을 만큼 유대인들은 이를 중요시 하였고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에게는 민감한 문제였다. 사실 근동 지방의 식사 관습은 손을 사용하여 음식을 먹었기 때문에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러한 위생적인 관습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에게 의식적 측면으로 강조되어 하나의 규례처럼 되었다. 물론 이러한 규례는 모세의 율법에는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고 있었으나 당시 유대인들은 이 규례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본장 자료노트. 유대인의 식사 정결례 참조). 한편 제자들 역시 이러한 결례를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리새 인들과 서기관들이보는 앞에서 무시해 버린 것은 예수께서 이러한 규례들에 집착하는 자들의 위선을 책망하는 일이 많았던 것에서 연유된 듯하다. 한편 논쟁은 이렇게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규례의 문제로 시작했지만 이것이 발전하여 모든 규례상의 청결을 근본적으로 검토하는 데까지 논쟁이 발전하였다. 그러므로 결국 이러한 사실을 기록한 마가는 의식상의 씻음의 규례들뿐만 아니라 의식상의 청결에 해당하는 모든 규정들을 파기함으로 내적 청결의 새로운 도덕으로 외적 청결을 대치시키는 예수의 의도를 널리 전하기 위해 이 사건을 보다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성도들이 얻는 교훈은 형식에 얽매여 그 근본 정신을 상실한 의식주의는 본질을 이해하는데 장애가 될 뿐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7:3 본절과 4절이 괄호로 묶여진 것은 그 내용이 없어도 이해가 가능하나 이방인 독자를 위해서는 이러한 논쟁의 배경을 설명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 마가의 해설 부분이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이. - 모든 유대인 앞에 바리새인을 앞세운 것은 손씻는 관습이 모든 유대인에게 통용되나 특히 바리새인에 의해 주도됨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장로들의 유전. - 본문의 '장로'(프레스뷔테로스)란 말은 '연장자' 흑은 '조상'을 의미하는 것이나 여기서는 당시 유대인들의 지도자인 지방의회 의원(눅 7:3)이나, 산헤드린 회원 또는 권위 있는 율법 교사와 종교 지도자를 지칭한다. 그리고 '유전'(파라디도미)이란 '․․․․로부터'(파라), '건네주다'(디도미)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유대인들의 조상때부터 구두로 전승되어온 관습법 내지는 판례법을 말한다. 유대인들의 관습은 성문화된 율법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나온 구전들이 대부분이었다. 이것이 A.D. 200년경에 미쉬나에 기록되었고 그것의 목적은 사람들의 생활을 성결하게 규제하기 위함이었으며 예수 당시에도 이러한 구전 율법이 여전히 사람들의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면서 전해 내려 오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들이 원래의 정신에서 변질되기 시작하여 성경보다 더 중요하게 취급되어 성문 율법의 권위와 맞먹는 정도로 백성들의 양심을 구속하게 되었던 것이다(본장 연구자료 '장로들의 유전' 참조). 본절에 있어서도 이러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손을 부지런히 씻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 손 씻는 것이 식사 전의 필수적인 행사임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그러나 본절의 '부지런히'의 해석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다. 즉 이에 해당하는헬라어 '퓌그메'( )를 '손목까지' 혹은 '쥔손으로'로 해석하여 손에 물을 움켜잡고 손목까지 씻는 동작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시내 사본과 프리얼(W)사본에는 이 단어가 '퓌크나'( )로 나와 있는데 이는 개역 성경과 유사하게 '자주'란 의미를 갖는다. 여하튼 본문이 강조하는 바는 식사 이전에 손을 씻되 건성으로 씻는 것이 아니라 정성을 기울여 씻어야 함을 뜻한다.
7:4 시장에서 돌아와서는. - '시장'은 많은 사람들이모이는 장소였고 또 이방인들과 자주 부딪치는 장소였기 때문에 부정한 곳으로 간주되어 여기서 돌아온 유대인들은 필수적으로 의식적 정결례를 행했다.
물을 뿌리지 않으면. - '물을 뿌린다'는 말은(밥티손타이) '씻다' 혹은 '적시다'의 뜻을 가진 밥티조( )의 3인칭 복수 중간태로 쓰여 '그들 스스로 씻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는 곧 목욕을 하거나 몸을 물에 담그는 행위를 말한다(Meyer, Could). 그러나 원문에서 반드시 온몸을 물에 담그는 사실만을 말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아마도 적은 양의 물을 가지고 몸을 닦는 행위나 손을 씻는 것도 이런 표현이 가능했을 것이다.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 - '잔'(포테리온)은 '마시는 그릇'을 뜻하며, '주발'(크세스테스)은 포도주나 식초 등의 액체를 담는 용기를 뜻하며, '놋그릇'(칼르키온)은 요리를 위해 만들어진 구리 그릇으로 아직도 시리아(Syria)에서 취사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도구들이 이방인들의 손에 의해 주로 만들어졌으므로 의식적으로 부정하다고 생각했으므로 정결 예식의 대상으로 삼았다. 마가는 이렇게 생활상의상세한 것까지 열거함으로 그들의 의식적 행위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Meyer).
7:5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 결국 책잡는 대상은 예수이나 바리새인들은 먼저 제자들의 전통을 벗어난 행위를 언급했다. 이들은 이에 대한 예수의 대답에서 말꼬리를 잡아 예수의 허물을 들추어내고자 한 것이다. 한편 당시 이들은 자기들이 설정한 기준에 대해서는 일말의 의심도 갖지 않은 채 이에 반하는 제자들의 행위만을 나무란 것으로서 진리를 알기 위한 진지함은 전혀 결여된 행동을 취했다.
7:6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잘 예언하였도다. - 예수를 책잡기 위한 저들의 질문에 대하여 예수는 이사야의 말을 인용하여 대응하심으로(사 29:13) 간접적으로 먼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장로들의 유전으로 생활의 규범을 삼는 자들을 경계하셨다. 한편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늘 반복적으로 저지르는 근본적인 잘못을 지적하는 외식에 대한 선지자의 질책을 선지자의 완성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다시 인용하신 것이다. 이밖에도 예수께서는 외식하는 자에 대해 심한 질책을 그의 생애 가운데 많이 하셨다. 이는 특히 고난 주간에 주신 마 23장에 집중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한편 '외식하는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휘포크리테스'( )로서 자신들의 본래 모습을 감추고 다른 사람으로 분장하여 행동하는 '배우들'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자신의 나쁜 의도를 감추고 이를 선(善)으로 위장하는 위선자, 이중인격자란 의미이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수호하느라 하나님의 말씀까지 손상시키는 자들이었다.
이 백성이‥‥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 예수의 사 29:13의 인용은 문자적으로 히브리 원문과 일치하지 않지만 그 의도하신 바는 일치한다. 즉 이사야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적인 과오를 지적하고 있는 것과 같은 동일한 과오가 예수 당시 교권주의자들에게도 발견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사람의 유전을 따라 행동함으로써 외형적으로는 믿는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하나님의 계명을 저버린 저들을 비판하시는 것이다. 이는 마치 후에 사도 바울이 지적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딤후 3:5)와 같은 모습이다.
7:7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강조하는 구전에 의한 전통은 인간들이 만들고 그 후에 덧붙혀지고 해석된 것으로서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이 갖는 신적 권위가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삶의 원리를 제시할 뿐, 비록 인생 제반사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을 다 제공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인간이 만든 인위적 규례와 전통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유전을 하나님의 율법과 동일한 권위를 가지거나 혹은 그 이상의 것으로 사람들에게 부과했을 뿐 아니라 허망한 인간의 규례와 그로 인한 구전이 실제적으로는 율법의 정신에 위배됨으로 인하여 오히려 사람을 올무에 빠지게 했던 것이다.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 이사야 시대의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이 경건의 외적 모습만 찾고 중심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짐으로 결국 하나님이 진노를 받아 나라를 멸망에까지 이끈 사실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적용시킨다. 즉 이들은 종교적 경건의 참다운 대상이신 하나님에게 그들의 삶 전체를 바치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인간들의 존경을 유도하기 위하여 행동하였으므로 실제 경배의 대상인 하나님에게는 아무런 경배의 효과가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예수는 진정한 경건은 게을리 하고 외면한 채 인위적인 장로들의 유전에만 복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불신앙적인 행동임을 들어 바리새인들의 외식주의를 비난하신 것이다.
7:8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 삶의 최종적인 원천과, 최종적인 규범은 성경이다. 비록 유전이 계명을 보충하고 설명하는데 뜻이 있으나 이것은 방편적 인데 불과하므로 항상 기록된 계명에 의해 점검을 받아야 한다. 이 점에 있어서 예수께서는 '버리는 것'과 '지키는 것'을 대비시켜 계명의 근본적인 가치와 유전의 제한적 효용성을 분명한 어조로 말씀하신다. 한편 본문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계명'은 레 19:18과 신 6:5에서도 보여지는 바와 같이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막 12:28-34). 결국 예수께서는 본절을 통해서 모든 율법적인 관습이 인간을 억누르며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하며, 도리어 인간이 만든 관습이 하나님의 계명에 어긋나는 모습으로 나타날 때 단호하게 이를 버려야 한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7:9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계명과, 인간의 전통이 상충될 때 저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오히려 사람의 전통을 따르는 그래서 율법의 참 본질과 방편을 왜곡시키는 과오를 범했다. 뿐만 아니라 실제로 세세한 문제까지 규정한 유전이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원칙적인 면만을 주로 규정한 율법의 가치와 필요성을 축소시키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율법을 피해가는 수단이 되기도 했었다. 또한 저들은 유한한 인간이 만든 인위적인 유전을 전능하신 하나님의 계시 위에 올려놓으며,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규례를 하나님의 신적 지혜의 반영인 계명 위에 올려놓는 죄악을 범하고 있었다. 사소한 법령을 늘리며 구체적 삶의 상황에 그러한 법령을 적용하는 데에만 목적을 두었기 때문에 훈계에 훈계를 더하고 경계에 경계를 더하기를(사 28:10)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의 통일성과 목적이(신 6:4; 레 19:18; 미 6:8) 완전히 상실될 때까지 계속했던 것이다(Robertson).
7:10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의 유전이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데 어떻게 사용되었는가를 실례를 통해서 설명하고 있다. 이 구절은 출 20:12과 신 5:16에 나오는 십계명의 다섯 번째 계명으로서 예수는 이와 병행 귀절인 마 15:4에서 '하나님이 이르셨으되'로 표현함으로써 모세가 말한 것을 하나님의 말씀 자체로 간주하고 있다. 이는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하고 그것을 기록한 성경의 제 2차 저자에 불과함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아비와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 본 구절은 제5계명(출 20:12)을 보충으로 설명하고 있는 규례로서 출 21:17에 언급되고 있다. 즉 부모를 욕하고 저주하는 것조차 하나님이 싫어하실 뿐 아니라 사형까지 명하셨다는 것을 천명하고 있다. 이로써 예수는 부모에 대한 범법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강조하여 다음절에 이어 간접적으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유전으로 말미암은 불효를 지적하며 그들의 너무나 심각한 허위의식을 폭로하고자 하신 것이다.
7:11 고르반‥‥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 본절은 자녀들이 부모에게 행해야 할 의무가 율법에 명백히 규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10절) 자녀가 부모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 길이 유전 때문에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함으로써 유전의 폐해를 실증하고 있다. 한편 '고르반'( )은 '헌물'의 뜻이며 레위기와 민수기에 자주 나타나는 히브리인의 전통적인 관습이었다(레 2:1; 민 6:3,5). 그런데 유대인들은 하나님에 대한 서약 형식으로 원래는 부모에게 드려야 될 물질을 하나님께 물질을 바쳐 그것을 헌물을 드리면 부모 부양의 의무는 면제 되는 것으로 여겼다. 이러한 관습은 처음에는 하나님을 지극히 높이는 신앙에서 나온 좋은 동기에서 시작되었으나 차차 이를 악용하여 부모 부양을 거부하는 핑계로 삼게된 것이다. 이처럼 아들이 그의 부모에게 드리고자 했던 것을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말하기만 하면 부모에게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로써 부모에게 효도를 규정한 하나님의 계명이 유전에 의해서 이행치 않아도 됨으로써 실상 인간의 유전이 하나님의 계명을 깨는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본장 자료노트 풍습 '고르반' 참조.
7:12 제 아비나 어미에게 다시 아무 것이라도. - 자녀들이 부모에게 어떤 것을 바치길 원한다 하더라도 자녀들이 이미 그것을 하나님께 바치기로 '고르반'이라 하여 서약했다면 그 서약을 깨뜨리고 부모에게 바치는 것은 신성 모독죄를 범하는 것이 된다. 이때 신성 모독죄를 불효죄보다 더 크게 취급하여 불효죄를 짓더라도 신성모독죄를 짓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논리를 유대인들은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0절의 언급된 바와 같이 부모 훼방죄도 죽음을 그 벌로 하는 만큼 다른 이유로 이를 무시하는 것은 율법의 정신과 맞지 않는다.
7:13 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시할 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무가치하게 만들었다. 한편 본절에서 '폐하며'(아퀴룬테스)란 말은 9절에 언급된 소극적으로 '저버리다'는 뜻보다 훨씬 더 강한 적극적으로 '무시하다', '파기하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처럼 저들의 유전이 이기적 목적으로 이용되거나 왜곡됨으로 말씀이 명하고 있는 본질을 실제로 패하게 하였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 계명의 본질적인 핵심인 이웃 사랑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도구로 삼았던 것이다. 이에 대한 실례로 교리사를 살펴보면 그 당시의 사상 조류의 흐름은 성경보다도 전통 우위론적인 사고가 팽배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편견도주의해야 할 일이지만 그보다 말씀에서 벗어난 아집과 비성경적 사고가 우리 신앙생활에 자리 잡고 있지 않는지 늘 살펴야 한다.
이 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 지금까지 언급한 고르반 규례를 통한 부모 공경의 율법을 폐할 뿐만 아니라 이와 유사한 범법 행위가 많음을 지적한 것이다. 여기서 '행하느니라'(포이에이테)는 '제조하다', '행하다'. '완수하다'(포이에오)의 현재 능동태로서 습관적으로 반복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7:14 무리를 다시 불러 이르시되. - 예수께서는 지금까지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대상으로 그들의 잘못을 지적했으나 여기서부터는 무리들을 다시 가까이 오게 하여 그들을 대상으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외형적 행위만을 강조함으로 가리워진 진리를 명백히 가르치기를 원하셨다.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 예수께서는 무리를 향해 '자신의 말을 들으라'는 선지자적 부름(call)으로 그들의 주의를 환기시킴으로 말을 시작한다. 이는 곧 이제까지는 예수의 말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한 그들의 잘못된 행위에 대한 비판적인 안목에서 말씀하셨다면 이제부터는 이러한 비 신앙적인 행태를 극복할 올바른 것을 깨우쳐 주려는 가르침을 시도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7:15,16 밖에서 사람에게로‥‥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 본 두절은 사본 비평에 있어서 약간의 논란이 있는 구절이다. 대부분의 사본들이 16절을 독립적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권위 있는 알렉산드리아 사본에는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16절의 내용은 생략하고 15절을 둘로 나누어 16절에 배치하는 경우도 있다(NIV). 또한 베다 사본(D)과 노스코 사본(K)은 16절의 내용 대신에 '들을 귀가 있는 자들은 들을지어다'로 되어 있다. 아마 이러한 첨가는 후대 필사자들이 중요한 가르침을 베풀기 이전에 그리스도께서 흔히 사용하신 관용어를 이 부분에도 의도적으로 삽입시켰기 때문일 것이다(Metzger, Textual commentary). 어쨌든 마가는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 즉 물질적 부정과,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 즉 영적이며 도덕적 부정을 날카롭게 대조함으로써 사람을 진정 더럽히는 것이 무엇이고 그렇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Tailor). 즉 예수께서는 당시 외식주의자들과는 달리 외적인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더럽히는 것은 안으로부터, 즉 마음과 의지로부터 나오는 것들이라 밝힌다. 이로 말미암아 진정한 더러움은 육체적, 또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도적적이며 영적인 것으로 마음에서 나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로써 예수께서는 모세의 율법이 명하는(레 11-15장)부정의 규례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그것은 곧 부정에 대한 영적 중요성과 함께 참으로 부정한 것의 원인은 자기 안에 있는 인간의 마음이며, 의식적 정결 예법만 중시하여 부정한 것을 은폐시키려는 모든 위선적인 정결예법은 부정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참다운 정결은 의식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지 정 ․의를 동반한 참다운 회개와 삶을 통한 개혁으로만 되어진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7:17 무리를 떠나‥‥제자들이 그 비유를 묻자온대. -다시 예수로부터 교훈을 받는 청중이 '무리'(14절)에서 '제자'들로 바뀌고 있다. 그들은 15.16절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의미를 예수께 물었다. 아마 본서의 장소적 배경은 가버나움에 있었던 베드로의 집이었던 것같다. 한편 본서는 제자들이 질문한 것으로 묘사하는 반면 마태는 베드로가 예수께 질문한 것으로 말하고 있다(마 15:15). 이처럼 마태는 당시 질문에 있어 주도적 역할을 하였던 베드로를 부각시키는 반면, 마가는 제자들 모두가 영적으로 무지했다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의도인 듯하다.
7:18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 제자들의 영적 무지함에 대하여 예수께서 실망하시는 반응이다. 그런데 본문은 '너희도"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청중들도 제자들과 같이 예수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밝히고 있다. 제자들은 비록 많은 시간을 예수와 함께 지냈고 예수의 행하는 여러 이적들을 보았지만 그의 가르침에 대한 참다운 의미를 깨닫는 데는 여전히 둔했다. 그 까닭 가운데 하나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당시 일반 사람들에게 있어 의심의 여지가 없는 진리라고 생각한 것과 전면 상이되는(15절) 파격적인 말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제자들은 영적 진리를 깨달음에 있어 인간적 이해력을 의존하기 보다는 성령의도우심을 간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준비가 부족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에 대하여 역사적 지식이 있거나 단순한 성경적 지식이(biblical in-formation) 있다 하더라도 성령의 조명과 도우심이 없다면 영적 무지를 면하지 못하는 것을 제자들을 통해서 배우게 된다.
7:19 마음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에 들어가. - 예수께서는 사람의 안으로 들어가는 식물이 사람을 더럽게 할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마음으로 들어가지 않고 '위'와 '창자'를 통해서 배설되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사실 인간으로 하여금 도덕적 ․ 비도덕적 행동을 하는 근원이 되는 마음은 물질적인 것과는 무관함을 밝힘으로써 도덕적 ․ 영적인 면과 물질적 면을 구별하신 것이다.
모든 식물을 깨끗하다 하셨느니라. - 병행 귀절인 마 15:1-20 가운데는 이에 해당하는 귀절이 없다. 따라서 이는 예수가 직접적으로 한 말씀이기 보다는 이를 종합한 마가의 결론적 해설로 본다. 이러한 해석이 본서에 첨가된 것은 본서 저술시에 음식에 대한 논쟁이 많았으며 이에 대한 예수님의 견해를 확실히 밝힐 필요가 있었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 즉 복음의 이방으로의 확산과 초대 교회내 유대주의자를 이해시킴에 있어서 이 선언이 갖는 의미가 크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신약 성결 가운데 이와 관련된 문제가 많이 수록되어있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행 10:1-16; 롬 14:13-17; 고전 8,9,10장; 갈 2:11-14; 골 2:16). 이것은 모세의 율법을 절대시하고 장로들의 유전을 성경보다 권위있는 것으로 추종하던 유대인들에게는 혁명적인 선언이었다.
7:20 사림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 무리들과 제자들이 예수의 가르침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자 다시 한번 더 부정함의 근원이 마음인 것을 말씀하시고 본 귀절에 이어서 다시 이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설명하고 있다.
7:21 악한 생각곧 음란과 도적절과 살인과. - 인간이 가지고 있는 사상이나 생각 그리고 겉으로 나타나는 행동 또한 인간의 마음, 즉 인격의 내부에서 흘러 나온 것이다. 이렇게 마음이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모든 부정의 원천임을 밝히면서 그 악한 생각으로 인해 나오는 것들을 본절과 다음절에 걸쳐 구체적으로 열두 가지를 말씀하신다. 그 항목들 가운데서 앞의 여섯 개의 항목들은 복수 형태로, 뒤의 여섯 개의 항목들은 단수형태로 쓰이고 있는데, 처음 여섯 개는 악한 행동들을, 다음의 여섯 항목들은 그와 같은 행동들에 결부된 악한 충돌들과 언사들을 묘사하고 있다. 마태는 본절과 병행 귀절인 마 15:19에서 6가지의 항목만을 언급하는데 그 순서는 십계명 6,7,8,9의 순서를 따르고 있다(Hendrikson). 여기서 '음란'(포르네이아이)은 폭넓은 의미에서 결혼의 유․무에 관계없이 여하한 모든 종류의 성범죄 행위를 가리킨다(출 20:13; 레 18:21; 20:22; 왕하 23:10; 렘 32:35; 마 7:12; 엡 4:32; 5:1,2). 예컨대 강간, 도색 잡지, 도색 영화를 보는 행위, 혼전 성적 관계, 음탕한 농담을 주고 받는 행위 등도 이 범주 안에 포함되는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 한편 '도적질'이란 신약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지 않지만 이것은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만이 아니라 직무태만 낭비, 세금을 포탈 차는 것 모두를 포함한다(엡 4:28; 딛 2:9,10; 몬 1:18-20). 또한 '살인'은 남의 목숨을 빼앗는 것만이 아니라 형제를 미워하고 욕하는 그것 자체가 살인이다(마 5:21,22). 한편 왜 살인이 두 선행하는 항목들에 연이어 언급되고 있는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넓은 의미에서미움이나 상대방의 인격적 손상까지 포함하는 살인은 부도덕한 행위나 도적질이 행 하여지고 있는 그 현장에서일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7:22,23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이 모든 악한 것이다 속에서 나와서. - 간음(adulteries)은 결혼한 남 ․ 여가 자기의 아내나 남편이 아닌 사람과 성적 관계를 갖는 행위를 말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정욕에 가득찬 눈으로 다른 사람을 보는 것도 간음이라고 가르치셨다(마 5:28). 또한 '탐욕'(플레오넥시아이)은 타인을 해치면서까지라도 좀 더 많이 가지려는 욕망으로 인간의 근본 속에 포함된 악한 본성을 말하며, '악독'(포네리아)은 사악함이 겉으로 드러나는 모든 행위를 말한다. 그리고 '속임'(돌로스)은 '올가미', '덫'이란 원뜻에서도 알 수 있는바와 같이 남을 유인하여 고통에 빠뜨림을 통해 이익을 추구함을 말하는 것이며, '음탕'은 사악한 충동을, '흘기는 눈'은 질투와 시기를 가리키는데 질투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상실한데 대한 손상감을 타인에게 투사하는 것을 말하며, 시기는 다른 사람이 무엇인가 가지는 것에 대해 못 마땅히 여기는 것을 말한다(Hendrikson). 또한 '훼방'(블라스페미아)은 문자적으로 '모독'을 말하는데 이는 어떤 사람에 대한 명예 훼손, 비방, 중상, 경멸적이며 무례한 언사를 말한다. 또한 '교만'은 자신이 누구보다도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악한 성향을 말하며, '광패'(아프로쉬네)는 도덕적 판단력이 결여된 어리석음을 뜻한다(foolishness, AV, RSV), 이 모든 항목들이 악한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전부는 아니라 할지라도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대표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은 이런 일련의 부패한 모습을 자신 안에서 발견하여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고 고백했던 것을 볼 수 있다. 진정 성도는 성령 안에 있는 삶만이 우리의 악한 품성들을 제어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7:24-30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을 고치신 예수
예수의 메시야로서의 사역이 이방 땅의 이방인에게도 미치고 있음을 보여 주는 부분이다. 본문은 마 15:21-28과 동일한 기사로서, 앞 내용(1-23절)에서 의식적(意識的) 정결에 관한 장로들의 유전(遺博)을 거부하신 바 있는 예수님께서는 이제 두로 지방으로 친히 가셔서, 이를 몸소 실천하셨음을 보여 준다. 즉 유대인들이 의식법상 부정하게여기던 이방 여인의 딸을 치유해 주심으로써 예수님의 초림으로 말미암아 구약의 율법 중에서 의식법(儀式法)이 완전히 폐지된 사실을 실증적으로 보여 주신 것이다. 한편 수로보니게 여인의 간절한 믿음은 앞 단락에 언급된 바리새인들의 형식적인 신앙과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처럼 두 사건이 대조됨으로 인하여 율법을 준수함으로써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유대인과 이방인을 막론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부각된다(롬 3:19-31). 아울러 유대인이 배척했던 예수님이 이제 이방인에게 환영받게된 사실을 보석 줌으로써 유대인의 복음 거부로 인해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파된 사실과 앞으로 복음이 이방 지역에 급속도로 전파될 것임을 압시해 준다.
이러한 본문이 우리에게 일깨워 주는 구체적인 교훈은 다음과 같다.
① 성도들은 때때로 자신의 기도가 즉각적으로 응답되지 않는다고 해서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더러운 귀신들린 어린 딸을 고치기 위해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려 간구하는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예수님께서는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는 말씀으로 거절하셨다. 물론 예수님께서 이처럼 매정한 대답을 하신 이유는 그녀의 믿음을 시험하시기 위해서였는데, 이러한 난관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절망하여 포기하지 않았고 '부스러기'라도 줄 짓을 간청했다. 이와 같이 낙심하지 않고 꾸준히 기도할 때 웅답의 기적을 체험하게 된다. 따라서 참으로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치 않는 자는 비록 자신의 기도에 대한 주님의 응답이 지체될 f!과도 결코 낙망치않고 끝까지 인내하는 자세를 지니게 된다(합 2:3; 눅 18:1-8; 히 10:36; 약 1:4, 7).
➁ 올바른 신앙의 특성 가운데 하나는 바로 겸손이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그녀를 '개'에 비유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주여 옳소이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결국 이것은 수로보니게 여인이 주님의 은총을 입을 만한 자격을 전혀 갖추지 못했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고 고백하는 겸손한 성품의 소유자였음을 드러낸다. 따라서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예수님께서는 그녀의 간구에 귀를 기울이셔서 귀신들린 딸을 치유해 주셨다(욥 22:29; 잠 3:34; 15:7; 약 4:6).
③ 주님께서는 성도의 처지와 연약함을 긍휼히 여기사 그 아픔을 치유해 주시는 분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부정하게 여기며 멸시했으나 오히려 예수님은 친히 이방인을 찾아가셨고, 수로보니게 여인을 긍휼히 여기셨으며. 또 그의 소원을 이뤄주셨다. 이처럼 예수님은 소외받고 멸시받는 자에게도 자비를 베푸시며 그들을 위해 봉사하는 종으로서의 사역에 충실하였다. 이에 우리도 낙심하지 않고 연약하고 궁핍한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나아가며 주님의 자비로운 손길을 기다릴 수 있는 것이다.
7:24 거기를 떠나 두로 지경으로. - 예수께서는 유대지도자들의 반대에 직면하여 갈릴리 전도를 중단하시고 그 곳을 떠나 두로 지방으로 거처를 옳기셨다. 그러나 몇몇 사본에서는(시내 사본, 알렉산드리아 사본, 바티칸 사본) 본절에 두로 뿐 아니라 시돈이란 지명까지 첨가하고 있으나 31절의 언급으로 볼 때 두로만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한편 당시 예수께서 두로의 본토까지 깊숙히 들어가셨는지에 대하여는 의문이 많다. 이러한 의문은 '지경'(호리온)이 '지방'(마 8:34) 이란 뜻 뿐만 아니라 '경계'란 의미 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제기될 수 있다. 즉 본문으로 보아서는 당시 예수는 두로 지방의 경계 지역까지 가셨는지, 그 곳 여러 지역을 두루 다니셨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곳에서도 여러 이방인과 접촉한 것은 사실일 것이다. 한편 두로는 지중해 동쪽 해안에 위치하며 베니게의 수도로 원양 항해술과 공예술이 뛰어난 곳이었다. 과거에 이곳은 왕들이 다원과 솔로몬 왕과 동맹을 맺었던 곳이었고, 이스라엘이 필요로 하는 삼림과 능숙한 기술공들이 있었으며, 반면에 이스라엘은 두로의 백성에게 필요한 곡물을 히람과 그 이후의 통치자들에게 배로 보내 주었다(왕상 5장; 행 12:20). 한편 이 두로 지경의 백성이 언젠가는 메시야 시대의 축복을 나누게 되리라는 것이 이미 구약에 예언되어 있었는데(시 87:4) 이 예언은 두로 지경 백성들이 예수의 말씀을 듣기 위해, 그리고 그들의 병을 고침받기 위해 갈릴리로 왔을 때 성취되기 시작하였다(마 4:24,25; 눅 6:17). 그래서 본절의 사건도 그러한 예언이 성취되는 일부분이라 할 수 있다.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 본절을 통해서 예수께서 두로 지경으로 오신 이유를 추측할 수 있다. 즉 자신의 신분을 숨김으로써 전도나 가르침을 베푸는 공적인 목적보다는 휴식을 취하며 새로운 활동을 위한 준비를 위해 오신 것임을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이방 지역에서 조차 예수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음으로 본래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전도 사역을 계속하게 되었다. 예수의 생애 가운데는 이와 같은 사례가 여러 번 있었다(막 6:30-34,53-56). 한편 예수께서 '한 집'에 들어가셨는데 이곳이 유대인의 집이었는지(Meyer) 이방인의 집이었는지(Weiss)는 알 수 없으나 짐작컨대 예수를 알고 공경한 집임이 분명한 것 같다(Meyer). 그리고 두로 지경으로가실 때 마가는 밝히지 않지만 마태의 병행(마 15:23) 구절로 보아 제자들도 예수와 함께 동행한 것으로 보여 진다.
7:25 더러운 귀신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 - 예수를 찾았던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그에게 나아온 한 이방인 여인의 상황이 어떠한가를 보여 준다. 즉 남편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 여자는 과부일 것으로 추정되며 어린 딸을 두었는데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고 밝힌 것으로 보아 사람들에게 기피되며 육체적 괴로움과 정신적 고통을 당하는 그 처지가 갈급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막 9장 자료노트, '축사의 이해' 참조).
곧 와서‥‥엎드리니. - 본서의 특징적 표현인 '곧'(유뒤스)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그녀가 이미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들었고 그 즉시로 예수께 나왔음을 밝힌다. 이와 함께 예수의 발아래 겸손과 존경의 표시로 엎드린 것으로 보아 그녀의 믿음이 얼마나 확고했나를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예수의 활동 무대가 주로 유대지역이었음으로 이방인인 그녀가 복음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예수를 '주 다윗의 자손'이라(마 15:22) 부른 것 역시 그리스도 출현에 대한 구약적 배경을 알며 그것이 예수에게서 성취됨을 인정한 것으로 이와 같은 행동은 놀라운 일이다.
7:26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 예수께 나아온 여인에 대해 구체적으로 그 혈통적 배경을 설명한다. 그러나마 15:22은 그녀를 '가나안 여자'로 설명한다. 이로 보아 여기서 '헬라인'(a Greek)이라는 표현은 헬라 족속이란 의미보다는 헬라어를 사용하는 족속이란 의미가 강하다. 또한 '수로보니게 족속'이란 설명 역시 북아프리카 해안에 위치한 리비아의 베니게와는 다른 시리아 지방에 속한 베니게 사람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사실은 '수로보니게'는 '수로'지방의 '보니게'라는 뜻이며, 지금의 '시리아'에 속한 '뵈니게'(Phoenicia) 지방을 말하는 것에서도 확인된다.
간구하거늘. - 본문에서 동사의 시제가(에로타) 미완료로서 동작의 계속을 표현하고 있다. 자신의 딸을 치유받기 위해 예수께 거듭 호소하는 장면은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주님을 향한 돈독한 믿음이 있었음을 잘 나타내 준다.
7:27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개들에게. - 예수께서는 여인의 간구에 대하여 은유적인 표현으로써 대답하고 있다. 본문에서 '자녀'(테크논)와 '개'(퀴나리온)는 특권을 부여받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특권을 부여받지 못한 '이방인들'의 지위를 대조하고 있다. 즉 '개'란 표현은 자신을 비하시키거나 택함을 받지 못한 이방인을 경멸할 때 사용하는 용어이다(시 59:6). 또한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란 표현은 유대인에게 먼저 구원의 권능이 베풀어져야 하며 개와 같은 이방인에게 우선적으로 사랑을 베풀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러한 예수의 말은 이방인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심을 거부한 것은 아니다. 단지 이스라엘이 구속사의 경륜상 먼저 복음을 전달받으며 그리스도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음을 밝힐 따름이다. 이러한 사실은 '먼저'(프로들)라는 말을 통해 알 수 있다. 즉 본문은 시간이 흐르면 이방인에게도 이러한 특권이 돌아간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심으로 그 여인의 열심을 자극하고, 정열을 부채질하며(Calvin) 동시에 구원의 과정에서 이방인을 도외시하지 않으심을 밝히신 것이라고 볼 수 있다(마 22:1-10; 행 13:44-48; 18:6; 롬 1:17). 이러한 사실은 이어지는 구절에서 그 여인의 딸이 고침을 받은데서 확인된다.
7:28 주여 옳소이다마는. - 마가복음에서 예수가 '주여'(퀴리에)라 불리운 곳은 이곳 뿐이다. 이런 호칭은 그 내면에는 절대적인 주권과 능력을 신뢰하는 믿음이 내포되어 있는 존칭인 것이다. 그리고 '옳소이다마는'이란 표현은 반의 접속사로서 일단 상대방의 의견을 인정하지만 이에 비해 자신의 강한 뜻을 더 강조적으로 표명할 때 사용한다. 따라서 본절에서이 여인은 자신의 개와 같은 이방인으로서의 지위를 인정하면서 그렇다고 자신이 은혜로운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된다는 생각을 단호히 거부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주님의 구원 사역이 전적으로 그리고 예외 없이 특별히 선택된 유대 민족에게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을 주님께서 이방인 백부장을 향해 '가라 내 믿음대로 될지어다'(마 8:10-12)라는 말씀에서도 잘 나타난다.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부스러기를 먹나이다. - '개'라는 표현으로(27절) 자신의 지위에 대해 모욕감을 느끼며 자존심을 크게 자극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지혜롭게 주의 은총을 간청하는 모숨은 극한 겸손과 믿음의 모습을 보여 준다. 실제로 이 여인이 간청한 것은 유대인들에게 이미 허락된 선민으로서의 특별한 은혜와 그리스도가 그 땅에 임하여 천국 복음을 베푸신 축복에 비하면 '부스러기'에 불과했다. 식탁에 앉아 있는 '아이들'과 상아래 있는 '개들'을 대조함으로 자신이 미천함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부스러기 은혜라도 입어야겠다는 수로보니게 여인의 간청은 딸이 구원받고도 남음이 있는 믿음이었다(CranSeld).
7:28 이 말을 하였으니. - 예수께서는 겸손의 극치를 보인 수로보니게 여인의 중심을 보싱 뿐 아니라 그 내면에 있는 큰 믿음을 보시고 만족해 하셨다. 따라서 마태는 병행 구절에서(마 15:28)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기록함으로 이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돌아가라 귀신이‥‥나갔느니라. - 무엇보다도 수로보니게 여인의 확고한 믿음을 확인하시고 기뻐하시는 주님은 수로보니게 여인의 순수한 믿음을 보시고 그녀의 간청하는 소원을 들어 주셨다. 결국 여인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자녀들'(유대인)이 하나님의 계획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을 부인하지도 않았고, 그것을 빼앗기를 원치도 않았다. 다만 상에서 떨어진 조그마한 축복의 부스러기들을 원했을 뿐이다. 이렇게 자신의 위치를 겸손히 인정하고 주님의 말씀을 믿으며 견고한 소망을 가지고 계속되는 간청을 하자 주님은 여인의 확고한 믿음을 보시고 필요를 채워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 믿음도 칭찬하셨다.
7:30 집에 돌아가 본즉. - 예수의 한 마디의 명령에이 여인이 의심치 않고 집으로 돌아간 사실은 여인의 믿음을 다시 한 번 드러내 준다. 주님은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요 20:29)을 기뻐하신다.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 일반적으로 귀신이 나갈 때 최후의 발악을 하는 경험으로 보아(막 9:26) 그로 인해 아이가 기진맥진하여 누워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귀신이 나갔더라'는 말은 완료 능동태 분사로 귀신이 완전히 떠나갔음을 말해 준다. 예수깨서 공간을 초월해서 기적을 베푸신 것이다. 이런 예는 왕의 신하를 원거리에 두고 고치신 것이나(요 4:46-53), 백부장의종을 고치신 경우에도(눅 7:1-10) 잘 나타난다. 한편 우리는 본 사건을 통해서 이방인을 향한 주님의 놀라운 사랑과 함께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을 통해서 다시 한 번 믿음과 이적의 맞물림을 발견할 수 있다. 이와 동시에 딸을 향한 어머니의 믿음 있는 간청을 통해서 성도의 타인을 위한 중보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배우게 된다.
7:31-37 귀먹고 어눌한 자를 고치신 예수
예수님께서 이방 땅을 두루 들아 데가블리 지방에 이르러 또 다시 병자를 고치신 본문의 치유 기사는 앞 내용(24-30절)과 연관하여 이방인들에게 복음의 빛이 비춰진 사실을 밝힘으로써 이방 선교에의 비전을 강조하여 준다. 그런데 병행 귀절인 마 15: 29-31에 의하면 갈릴리 호수의 동편에 도착하신 예수님께서 이밖에도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서의 기록자 마가는 그중에서 가장 대 표적인 하나의 예만 택하여 본문에서 그 내용을 자세하게 소개 한다. 아마 이러한 차이 점은 본서가 예수님의 구체적인 행적에 초점을 맞추어 서술되고 있기 때문이며, 또한 이방인들과 관계된 사건을 세밀하게 언급함으로써 본서의 수신자들인 로마의 성도들에게 감동을 더하기 위한 의도를 지니고 본서가 쓰여졌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한편 귀먹고 어눌한 자를 치유하심에 있어서, 예수님께서는 그를 따로 데리고 가셨으며, 또 친히 손가락을 내밀어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아 그의 혀에 손을 대시는 방법을 사용하셨는데, 이것은 대개의 경우에 예수님께서 단지 '말씀'으로 병자들을 고치신 것과 좋은 비교가 된다(29절). 예수님께서 이와 같은 행동을 행하신 의미에 대해서는 아래 해당 귀절의 주석을 참조하라.
이제 우리가 본문을 통하여 발견하게 되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나 성도들을 위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친히 하나님께 간구하신다(롬 8:26,34; 히 7:25), 귀먹고 어눌한 자를 고쳐 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셨는데(34절), 결국 이것은 이 땅의 버림받은 자들에 대한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지극했는지 보여 준다(6:34; 마 9:36).
➁ 성도들은 이적에 대해 지나친 호기심을 갖기보다 오히려 주님의 말씀에 더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예수님께서 귀먹고 어눌한 자를 고치심에 있어서, 군중들로부터 떠나 그를 따로 데리고 가셨을 뿐만 아니라, 정작 그를 치유해주신 후에도 그러한 사실을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말라고 경계하셨다. 이는 오로지 이적 그 자체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군중들의 잘못된 태도 때문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이적을 행하신 것이 결코 아니었다. 진정 '오모한 일'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므로 우리 인간들이 지나치게 호기심을 가질 필요가 없으며, 다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신의 삶 가운데서 그것을 실천하는 일이야 말로 우리들에게 요구되는 과제이다(신 29:29).
③ 귀먹고 어눌한 자를 향해 '에바다'를 명하신 예수님께서는 오늘날 영적으로 귀머거리 되고 벙어리된 자를 향해 '에바다'를 명하시고, 또 치유하신다. 그리하여 주의 복음을 기뻐하며 듣게 하시고. 또 은혜의 복음을 즐거이 찬양하고 증거토록 하신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의 영적 상태를 직시하여 말씀을 듣지도 전하지도 못한다면 치유하시는 예수님께 나아와 병 고침 받아야 한다. 혹여 우리는 영적으로 귀먹고 어눌한 자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깨닫지 조차 못하는 것은 아닌가?
7:31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 - 예수께서 두로와 시몬 등 이방 지역에서 활동하시다 다시 전도 활동의중심 무대인 갈릴리 주변 지역으로 돌아오셨다. 그러나 그 동안 예수가 이동한 경로를 지리적으로 추적하는 것은 쉽지 않다. 다만 두로에서 북쪽으로 올라가서 시돈을 통과하여 다시 남동쪽으로 내려가 헤롯 빌립의 영토를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의 동쪽에 이르러 데가볼리(Decapolis) 지역으로 들어갔을 것으로 추정할 따름이다(Wessel). 물론 여행 중에 무엇을 하셨는지에 관해서도 전혀 알 수 없다. 한편 여기에 언급된 데가볼리는 대부분이방인들이 거주하는 헬라화된 10개의 도시들을 일컫는 명칭이다. 이렇게 다른 복음서 기자들이 기록치 않은 것을 마가가 언급하고 있는 것은 이방인의 지역에서 행한 치병 이적을 소개함으로써 이방인을 향한 주님의 사랑을 나타내려는 의도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7:32 귀먹고 어눌한 자. - 마태는 '절뚝발이와 불구자와 소경과 벙어리와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왔다' (마 15:20)고 말한다. 이러한 사실은 비록 성경에는 묘사되어 있지 않으나 두로와 시돈 지방에서도 예수께서 여러 치병 사역을 하셨고 현재 방문 중인 데가볼리 지방에서도 이미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막 5:20). 이로 보건대 예수께서 이곳에 도착했을 때 예수에 대한 소문은 파다했고, 그러므로 여러 각색 병자들이 모여 왔을 것이다. 마가는 '그 중에서 특히 귀 먹고 어눌한 병자를 대표로 들고 있다. 그런데 본문의 '어눌한 자'(모기랄로스)는 '말할 때 어려움을 느끼는 자'를 지칭하는 것으로 신약에서는 이곳에만 사용되었다. 그러나 동일한 단어가 70인역의 사 35:6에서 '벙어리'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어 신약시대 메시야의 치병 사역을 예언하고 있다. 마가는 이사야의 메시야 예언이 예수를 통해 성취된 것을 확인하는 의미로 이 단어를 사용했을 것이다.
안수하여주시기를 간구하거늘. - 이미 이 지역에서 치유로 말미암는 여수의 기적이 널리 알려져 있었고(막 5:20) 그리고 병자에게 안수하는 행위는 흔한 일이었으므로 이러한 요칭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볼 수 있다(막 5:23; 6:5). 한편 이때 '안수'는 병 고침을 위한 것으로 오늘날과 같은 특별한 의식으로 사명을 부여하거나 위임을 뜻하는 의미는 전혀 들어 있지 않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마 19장 자료노트 '성경상의 안수의 용례'를 참조하라.
7:33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 환자를 따로 데리고 간 이유는 명확히 알 수 없지만 우선 고통 받고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주의력을 예수께 집중시키고 환자와 개인적으로 인격적 관계를 나누기률 원하셨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Wessel). 또한 흥분된 무리들의 예수의 치병 기적을 보고 예수에게 또 다른 이적을 요구하는 부작용을 없애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으로 볼 수 있다. 예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릴 때도(막 5:40) 이러함을 요구하신 것으로도 보아 후자의견해가 더 타당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 뱉아. - 땅에 침을 뱉어서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고 이를 씻음으로 감겨진 눈을 뜨게 한(요 9:6) 이적과 더불어 예수의 이와 같은 행동은 구체적 방법을 취하심으로 이적을 일으킨 대표적인 경우에 속한다. 한편 이런 방법의 치유 행위는 당시에 보편적으로 알려져 있었다(Taylor). 즉 침을 사용하여 환자의 환부에 손을 접촉하는 치료법은 당시 민간요법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Teritus). 예수께서 말씀으로 능히 환자를 치유할 수 있었는데 (요 4:50) 자칫 미신으로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도 있는 방법을 사용하여 치유 이적을 행하신 이유는 분명치 않으나 귀먹고 어눌한 자의 신앙을 각성시켜 스스로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함과 동시에 치유 이후에 있을 축복의 생생함을 갖도록 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그 병자가 귀머거리여서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손가락이 몸에 와 닿음을 느끼므로 주님에 대한 구체적인 사랑을 느끼게 하려는 의도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서는 눅 10장 자료노트, '예수의 치유 사역이해'를 보다 참조하라.
7:34 하늘을 우러러. - 예수께서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하시기 전에도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셨다(막 6:41). 곧 이러한 동작은 기도하는 모습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함을 나타내고 있다(Hendrikson). 다시 말해 예수께서는 성자로서 신적 능력을 가지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기도를 통해서 하늘 아버지를 의지하는 것의 중요성을 실증하신 것이다(사 64:7; 요 11:41; 행 8:55).
탄식하시며. - '탄식'은 신음과 같은 소리로서 예수께서 사람의 처지를 마음속 깊이 동정하셨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Calvin). 긍휼이 무한하신 예수께서 궁극적으로 죄로 인해 고통당하는 인간을 향해 탄식하신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는 마지 못해 치유이적을 행하는 것이거나 자신의 신적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 이적을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모든 이적은 인간을 향한 자비로우심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마 8:17; 9:36; 14:14; 15:32; 18:27; 20:34).
에바다. - 문자적으로는 '완전히 열리다'란 뜻으로 아람어의 음역이며(엡파다), 마가는 아람어를 모르는 사람에게 있어서도 그 의미를 알 수 있게 그 뜻을 '열리라'(디아노이크데티)로 밝히고 있다. 이는 마가가 이방인을 독자로 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7:35 귀가 열리고‥‥곧 풀려. - 본문에서 어눌한 자가 '말이 분명하더라'(엘랄레이오르도스)는 것으로 보아 그가 언어 장애자의 위치에서 완전한 정상인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열리라'는 예수의 명령과 함께 귀가 완전히 열리는 일이 선행되었는데 그것이 '즉시'(유뒤스) 일어났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보여 준다는 일차적인 결과 외에도 메시야 시대에 '귀머거리의 귀가열릴 것이다'는 사 35:5의 예언의 성취로 예수가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야 이심을 실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7:36 경계하사 아무에게라도 이르지 말라. - 본문에서'경계하여'(디에스테일라토)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분리함' 흑은 '구별함'이란 뜻이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무리들의 관심으로부터 자신의 행동이 분리되어 알려지지 않기를 적극적으로 원하셨다. 이렇게 자신에 대한 소문이 퍼져 나가지 않기를 원하신 것은 막 1:44과 같이 자신이 단지 이적을 행하는 자로 잘못 알려지기를 원치 않으셨기 때문이다. 즉 무리들의 그릇된 메시야관으로 인해 자신의 본질적인사역인 복음 전도가 방해 받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경계하실 수록 저희가 더욱 널리 전파하니. - 어떤 주석가들은(Hendton) 본절을 주석하면서 예수께서 강조하시는 경계의 강도가 크면 클수록 이를 더욱더 널리 전하는 인간들의 불순종을 보여 주는 것으로 인간의 도전적이고 완고한 성품을 나타낸다고 한다. 그 보다도 예수의 명령을 어기고 전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감격적 체험을 상상해 보아야 한다. 거기에 예수의 능력과 그로 인한 권능의 역사는 인간이 의도적으로 어찌할 도리가 얼었던 것이다. 이것은 37절의 무리들의 반응에서도 잘 입중된다.
7:37 심히 놀라‥‥그가 다 잘 하였도다. - 예수의 치병 이적을 들은 무리들의 경탄의 반응을 단적으로 잘 모사해 주고 있다. 본절에서 '심히'(휘펠페리쏘스)라는 부사는 신약에서 유일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대단한'이란 뜻의 '휘펠'()과 '이상의'란 뜻의 '페리쏘스'( )의 합성어로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극한의'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본절은 무리들의 억제 못하는 놀람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와 함께 무리들은 '그가 다 잘 하였도다'란 긍정적인 말로 예수를 신뢰하게 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한편 병행 구절인 마 15:31에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고 하면서 예수의 능력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으로 무리들이 감격하고 있음을 묘사하고 있다. 이로 보아 우리는 치유 기적을 통한 예수의 메시야적 활동이 이방인 거주지에서도 얼마나 폭발적으로 확장되고 있나를 볼 수 있다. 한편 본 사건과 더불어 일련의 유사한 예수의 이적을 통해서 구약의 메시야 예언이 성취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리고저는 자가 사슴같이 뛰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함으로(사 35:5, 6)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리라는 예언이 성취되고 있는 것이다.
장로들의 유전(遺傳)
복음서에서 '장로들의 유전'(Tradition of the Elders)이란 말은 마 15:2과 막 7:3,5에만 나온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질문하며 논쟁을 벌일 때 그들은 대부분 '장로들의 유전'을 근거로 하였다. 예를 들면 안식일 논쟁, 이혼 문제 논쟁(마 19:3-12), 정결례에 관한논쟁(막 7:1-13) 등을 들 수 있다. 한편 이러한 장로들의 유전은 예수 당시까지만 해도 구전(口傳)의 형태로만 있었으나 A.D. 200년 경부터 문자로 집대성되기 시작하여, A.D. 800년 경에 가서는 탈무드(Talmud)의 형태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유대교의 근간을 형성하고 있다. 이에 장로들의 유전에 대한 전반적인 사실들을 살펴보는 것은 예수 당시의 종교적 상황을 이해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므로 매우 의의 있는 일이라 할 것이다.
1. 정의 및 기원
유전(헬, 파라도시스)이란 문자적으로 '대대로 손으로, 흑은 구두로 건네받은 것'이란 뜻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장로들의 유전'이란 유대인들이 조상들로부터 구두로 건네받은 것으로 당시 성문 율법이었던 모세 오경을 해설하거나 새로운 상황에 적용시켜 만든 각종 구전 율법을 가리킨다.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유전'의 기원을 모세 시대로 본다. 즉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율법을 아론을 비롯하여 백성들에게 전하면서 모세가 기록한 것 이 외에 율법을 해설한 내용이 장로들의 구전(口傳)을 통해 계속해서 전승되어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 이 유전은 포로 시대 이후에 생겨난 율법 전문가들. 즉 '랍비'(Rabby)라 칭해지는 일련의 서기관 학파에 의해서 본격적으로 생겨났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미드라쉬' 즉 율법에 대한 주석서(대하 9:29; 24:27)가 있었으나 에스라, 느혜미야 시대 이후 이스라엘의 선민으로서의 정체성(Identity)을 회복코자 하는 일련의 종교 개혁 운동들과 함께 율법 연구 작업이 활발하게 일어났고 이 때에 많은 구전 율법들이 생겨났다. 그리고 이 구전 율법들은 신구약 중간기를 거치면서 더욱 강화되어 예수 시대에까지 이르게 되었고 더 나아가 A.D. 500년 경에는 문자로 집대성되게 되었다.
2. 유전의 집대성 과정
장로들의 유전이 유대 랍비들에 의해 집대성되기 시작한 것은 B.C.300년 경이다. 그리고 이집대성 작업이 완성된 것은 바벨론 탈무드가 완성된 A.D.S00년 경이다. 그 이전에 예루살렘탈무드, 즉 팔레스틴 탈무드가 먼저 완성되었으며, 탈무드 이전에는 미쉬나, 미드라쉬가 있었으며, 또 미쉬나의 부족한 내용을 보충한 게마라가 있었다. 탈무드는 주로 미쉬나와 게마라의내용을 합쳐서 만든 것이며, 미드라쉬는 그것대로 A.D.10세기 경까지 독자적으로 발전해 나갔다.그러면 여기서 탈무드(Talmud)의 집대성 과정과 미드라쉬(Midrash)의 발전 과정을 나누어 살펴보도록 하겠다.
1) 미드라쉬의 발전 과정
미드라쉬(Midrash)란 구약 성경들에 대한 주석서를 가리키는 말이다. 즉 '미드라쉬'는 '조사하다', '연구하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다라쉬'(☞11)에서 유래한 말로서 구약 성경들의문자적인 의미 분석과 이 이면에 숨겨진 보다 깊은 의미들을 주석해 낸 것을 가리킨다.미드라쉬에도 그 내용과 문체가 서로 다른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할라카(Halachah) 미드라쉬이며, 다른 하나는 '학가다'(Haggadah) 미드라쉬이다. 전자는 율법의 문자적 의미 해석을 통해 실생활에 적용토록 한 것으로 토라(모세 오경)와 직접적으로 관계된 것이며, 후자는 토라에서 추출해 낸 의미들을 근거로하여 비유, 설교. 이야기 형태로 풀어 설명하여 윤리적, 종교적 교훈을 주는 것이다. 이러한 미드라쉬의 두 연구 방법인 할라카와 학가다는 탈무드 집성 과정에서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한편 왕정시대에도 미드라쉬와 유사한 선지자들의 주석서가 있었으나 일반적으로 B.C. 444년경 에스라에 의해 처음으로 미드라쉬가 생겨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미드라쉬가 집성되기시작한 것은 미쉬나 집성과 때를 같이하는 B.C.3세기 경부터 이며, A.D.10세기 경에 여러 종류의미드라쉬가 완성 되 었다.
2) 탈무드의 집대성 과정
미드라쉬는 성문 율법인 모세 오경과 기타 구약 성경들에 대한 직접적인 주석서 였다. 그러나 유대에는 성문 율법 이외에 모세 때부터 전승되어 온 것으로 여겨지는 구전 율법이 있었다. 이 구전 율법들은 대개 성문 율법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 즉 실생활의 세세한 부분 흑은 새로운 상황이 발생했을 때 그에 합당한 규정들을 정한 것들로서 그 내용은 성문 율법보다 약10여배 정도 더 많다고 한다. 이러한 구전 율법들을 집대성한 것이 탈무드이다.
① 탈무드의 전신(前身)
탈무드가 집성되기 이전에 미쉬나(Mishnah)와 게마라(Gemara)가 있었다. 이 둘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것이 탈무드이다.
ㄱ. 미쉬나: 이 말은 '반복하다', '입으로 전하다'라는 뜻의 동사 '솨나'( )에서 온 말로서'구전', '반복하여 가르침'이란 뜻이다. 즉 이는 당시 유대인들이 구전 율법들을 후손들에게 교육할 해 사용했던 반복적인 교육 방법에서 유래한 말이다. 그리고 이렇게 구전 율법을 교육하는 미쉬나 교사를 '탄나'(Tanna)라고 한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교육 방법을 지칭하는 이 용어가 구전 율법들을 집성하여 모은 책의 명칭으로 사용되게 된 것이다. 미쉬나는 유대인의 종교적, 도덕적, 사회적 생활 전반의 율법들을 모은 것으로서 탈무드의 제 1부를 형성한다. 그리고 그 내용은 모두 6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① 농사법, ➁ 안식일 축제 및 금식에 관한 법, ➂ 결혼과 이혼에 관한 법, ④ 민사법과 형사법, ⑤ 성소와 희생제사에 관한 법, ⑥ 정결법이다.
ㄴ. 게마라: 단적으로 말하면 미쉬나의 부족한 내용을 첨가한 것이다. 즉 미쉬나를 해석하고, 모호한 부분들을 보다 명료하게 하며, 미쉬나 작성 이후 새로운 상황이 발생했을 경우 그것에 적합한 새로운 구전법을 만들어 모은 것을 가리킨다. 게마라는 아람어로 '완성'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즉 게마라는 미쉬나의 완결작이란 의미로서 붙여진 명칭이다. 이는 탈무드의 제 2부를 구성하고 있다.
② 탈무드의 구성
위에서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미쉬나와 게마라를 합쳐서 만든 것이 탈무드이다. 즉 미쉬나는탈무드의 제 1부를, 게마라는 제 2부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미드라쉬(Midrash)를 설명할 때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탈무드 내에도 문체나 글의 내용에 따라 할라카(Halaohah)의 요소와 '학가다' (Haggadah)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전자는 구전(ㅁ傳) 가운데 법적(法的)인 요소를, 후자는 지혜나 교훈을 담은 이야기, 짧은 잠언 등의 내용을 가리킨다. 즉 할라카 부분이 유대교의 신앙과 사상의 원천이라면 학가다 부분은 유대인의 정서적인 면을 여 준다고 볼 수 있다.
탈무드는 작성 장소에 따라 예루살렘 탈무드 즉 팔레스틴 탈무드와 바벨론 탈무드, 두 종류가 있으며 전자는 미쉬나 부분이, 후자는 게마라 부분이 주를 이루고 있다.
3. 의의
이상에서 살펴본바 장로들의 유전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크게 두 가지 의의를 가지고 있었던듯하다. 그 중 하나는 유전을 토라에 기초하여 개별적인 상황마다 그에 적합한 규례들을 만든 것으로서 구약 율법을 실생활에 구체적으로 적용토록해 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생활 전 영역에서 율법에 적합한 삶을 살므로써 유대인들은 선민으로서의 정체성(Identity)을 보다 잘 유지할 수 있고 또 더욱 경건된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 하나는 이렇게 성문 율법보다 약 10여배 정도가 되는 많은 구전 율법들을 만듦으로써 보다 근본적으로는 모세 율법을 범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그들이 신성시하는 모세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범하지 않기 위한 장치로서 많은 규정들을 고안해 내어 그것을 준수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구전 율법을 가리켜 모세 율법의 울타리 율법이라고 한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이 같은 사고방식은 하나님의 뜻을 왜곡시키거나 복잡한 형식적 규례들로써 백성들로 하여금 내적인 신앙보다 외적인 종교 형식을 더 준수케 하는 멍에를 씌우는 셈이 되었다. 예를 들면 '고르반의 규례'에서 보듯이 그 규례를 지키느라고 오히려 보다 중요한 부모 공경에 대한 하나님 말씀을 폐하였던 것이다(막 7:11-13). 이에 예수께서는 그들을 외식주의자들이라 하며 크게 책망하셨던 것이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의 신실한 준수라는 본래 목적은 상실하고 오히려 인간이 자기 이성으로 만든 법으로 스스로를 얽어매는 어리석음을 범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러한 그들의 형식적인 종교 생활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커다란 장애물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 우리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준수함에 있어서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즉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 하면서 의식으로만 행하고 그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떠나 있는 가증한 모습이 우리에게는 결단코 없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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