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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2장 마리아의 도유 사건과 승리의 예루살렘 입성 및 수난 예고와 유대인들의 불신에 대한 예수의 책망
많은 은헤 받으시고 하나님 좀 자랑해주세요.
하나님 영광을 받으시는것 좋아하세요.
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예수께서 본래 제 2위 성자 하나님으로서 절대 신성(神性)을 가지신 존재였으나 하나님이 태초부터 세우신 구속의 법에 따라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그리스도임을 입증함으로써 결국 예수의 그리스도 직과 예수 안에서의 우리의 구원의 절대성을 확증하기 위하여 기록된 요한복음의 전반부로서 예수 공생애의 여러 사건 중에서도 이상의 사실을 잘 입증하는 여러 자료들 곧 예수의 관련자들의 중언들과 예수 자신이 행한 표적들과 자기 계시를 제시하는 1:19-12:50까지 일련 기사의 연속부분이다. 1:19-12:50은 예수의 공생애 개시 기사에서부터 시작하여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공식 입성하시어 이제 곧 십자가 수난을 당하기 전날 밤인 최후의 만찬 직전까지의 사건 중 이상의 진리를 입증할 수 있는 주요 기사들을 대략 연대순으로 제시하고 있다.
또 본장은 지금까지 요한복음이 제시한 7대 표적을 초월하는 최대 최후의 표적을 보여 주사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참 메시야라는 사실을 세계만방에 증거함과 동시에 전 시대의 신약 성도들로 하여금 그 사실을 확실히 믿도록 하기 위한 십자가 수난(crucifixion)을 불과 일주일 앞둔 때 곧 성 고난주간(Holy Passion Week)이 시작되기 하루 전인 토요일과 고난 주간 첫째 날인 일요일에 있었던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다. 이런 문맥 하의 본장의 내용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개관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전반부(1-11절)는 예수께서 구속 사역의 최종 성취인 십자가 수난을 받으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평화의 왕으로 공식 입성하시기 하루 전날 토요일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있었던 마리아의 도유(塗油) 사건을 보도하고 있다(마 26:6-13; 막 14:3-9). 구속 사역의 최종 성취인 십자가 수난을 앞두고 행한 마리아의 기름부음은 결국 예수가 기름부음 받은 자 곧 메시야(Messiah)요 구속주이심을 신앙 고백한 것이었다. 또한 예수께서 이 여인의 기름부음을 통해 스스로 최대 최후의 표적인 십자가 수난의 대속적인 죽음을 준비하신 것이라 볼 수 있다.
한편 본문에서 마리아의 기름부음이 장차 그리스도를 배신할 가룟 유다의 가증한 모습과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즉 마리아의 기름 부음은 구속주(救贖主)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과 헌신을 나타냈다면, 이 여인의 도유가 갖는 구속사적 의의는 깨닫지 못하고 그 도유 사건에 들어간 300데나리온의 경비만 생각하고 그 여인을 책망한 가룟 유다는 예수에 대한 불신과 배척을 나타내어 구속주이신 우리 주 예수에 대한 반응의 양극단을 각각 보여 주었다 하겠다. 이는 영안(靈眼)이 뜨여 하나님의 구속사(救贖史)를 바로 깨닫는 자만이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올바로 깨달을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중반부(12-36절)는 고난 주간의 첫째 날인 일요일에 있었던 우리 주님의 승리의 예루살렘 입성 사건(12-19절)과 장차 십자가 수난을 통해 구속 사역을 최종 성취하신 후, 그를 믿고 따르는 자들이 딴을 영생의 축복과 끝까지 믿지 않고 배척하는 자들에 대한 심판(20-26, 30-36절)에 관한 주의 교훈, 그리고 예수의 신성과 메시야 됨을 입증하는 성부 하나님의 음성(27-29절)과 그에 따른 주님의 교훈을 기록하고 있다.
12-19절에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승리의 입성(Triumphal Entry) 사건은 그야말로 구속사 그 자체를 응축적으로 보여 주는 대사건이었다. 먼저 이 사건은 지금껏 천국 복음의 전파와 자신의 사후 당신의 몸된 교회를 설립 유지할 제자들의 훈련을 위한 시간 확보를 위하여 자신을 되도록 감추셨던 것과 달리 비로소 자신은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하기 위하여 성육신(Incarnation)하신 메시야요 구속주이심을 이제 만천하에 공개적으로 선언한 사건이었다. 특히 그 과정에서 예수는 민중이 환호하는 가운데도 초라한 새끼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므로 자신은 승리의 왕인 동시에 평강의 왕(the King of Peace)이요 참 자유를 주시는 겸손한 왕이심을 나타내 보이셨다. 둘째 이 사건은 그것으로 종결이 아니라 바로 지금까지 주께서 수행하셨던 공생애의 궁극적 목적이요 전 신약 성도의 믿음의 확실한 근거로서 주실 최대 최후의 표적인 구속 사역을 닷새 후에 최종 성취하시기 위하여 즉 십자가 수난(crucifixion)을 당하사 아담의 범죄 이후 발생한 구속(救贖)의 원리와 법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입성한 사건이었다. 이 입성 사건 당시에는 예수님을 제외한 그 누구도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예수께서는 심지어 지금 환호하는 민중이 곧 변하여 자신을 못 박을 것을 요구하는 자들이 될 것조차 다 내다보고 계셨다. 그럼에도 예수께서는 이를 피하지 않으시고 이제 그 죄인의 구속에 요구되는 피 값을 흘리시고자 입성하였던 것이다.
실로 이를 깨닫고도 어린 나귀를 타고 환희 웃으시며 입성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기억할 때마다 우리는 주님의 구속의 은혜와 공로에 새삼 감동하게 된다. 또한 예수님의 구속 사역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여 예수를 그저 빵이나 세금 문제를 해결할 정치 지도자로 착각하다가 나중에는 주(主)를 죽이는 데 앞장섰던 그 당시의 민중들처럼 큰 범죄에 동참하는 어리석음을 버려야 하겠다.
한편 이 사건은 세상 끝 날에 전 우주의 심판주로 이 땅에 강림하실 예수의 재림 사건의 전 단계요, 또한 예표였다. 이 예루살렘 입성은 일단 구속의 원리와 법을 성취하고자 하신 것뿐이었으나 훗날 재림 시에는 당신의 구속사역을 믿고 회개하는 자에게는 구원을, 끝내 거부하는 자에게는 그 범한 죄대로 심판을 주실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 사건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개관할 때마다 우리의 죄를 구속하기 위한 주님의 사랑과 경고를 동시에 깨닫게 되는 것이다.
한편 요한은 예루살렘 입성 후 몇몇 헬라인들이 예수를 뵙고자 한 사실과 관련하여 십자가 수난(crucifixion)에 관한 예수의 교훈(20-23절)을 세시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효과는 특정한 어느 한 민족에게만 미치는 것이 아니라 혈통과 국경을 넘어 전 세계 만민에게까지 미침을 암시한다. 이스라엘에서 세계 만민에로의 하나님의 구속사의 확장에 관해서는 롬 11장 연구 자료를 참조하라.
끝으로 후반부(37-50절)는 본서 저자가 유대인들의 불신에 대해 이사야의 예언(사 6:10; 53:1)을 들어 정죄한 사실과 '나를 믿으라'(Believe me!)는 주제의 예수 그리스도의 설교를 본장의 결론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 설교는 본서에 있어서 대중(入衆)에게 하신 최후의 설교로서 지금까지 1:19-12:50에 나타난 예수의 7대 표적을 중심으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참 메시야라는 사실을 분명히 증거한 바, 그래도 온갖 유대교적 편견 때문에 이 사실을 믿지 못하는 유대인들을 향한 마지막 호소의 설교였다. 또한 이는 오늘날 우리 성도들을 향한 설교이기도 한데, 과거 유대인들이 인본주의적(人本主義的) 민족주의적(民族主義的) 편견으로 인해 생명과 구원의 진리요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무조건 불신하고 배척했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도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세속 권력과 부와 명예 때문에 주님의 진리를 거부하거나, 혹은 인간적인 지혜를 하나님 말씀보다 앞세워 진리의 말씀을 왜곡함으로 생명과 구원의 길에서 혹 떠나 있지는 않는지 돌이켜 자신을 겸허한 마음으로 성찰해 보아야 할 것이다.
외울 말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마리아의 도유
1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
2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 새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7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8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9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10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11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승리의 예루살렘 입성
12 ○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함을 듣고
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14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만나서 타시니
15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16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인 줄 생각났더라
17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거한지라
18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
19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없다 보라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 하니라
헬라인의 불신에 대한 예수의 수난 예고
20 ○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21 저희가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22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짜온대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5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27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28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대
29 곁에 서서 들은 무리는 우뢰가 울었다고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천사가 저에게 말하였다고도 하니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
31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32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33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34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
35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
36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유대인의 불신에 대한 책망
37 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저를 믿지 아니하니
38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가로되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39 저희가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40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음이더라
41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42 그러나 관원 중에도 저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을 인하여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회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43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신앙에 대한 결단 촉구
44 ○ 예수께서 외쳐 가라사대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45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46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47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48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
49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50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
본문 & 자료노트
풍습-12:1 현대 유대인의 유월절 준수
민 28장 자료노트 참조
도표-12:1 히브리인의 절기
신 서론 특별자료 참조
도표-12:6 성경의 가룟 유다에 대한 묘사
1. 예수를 판 자(마 10:4)
2. 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자(마 26:24)
3. 친구(마 26:50)
4. 마귀(요 6:70)
5. 도적(요 13:10,11)
6. 깨끗지 않은 자(요 13:10,11)
7. 멸망의 자식(요 17:12)
지리배경-12:1, 베다니
막 14장 자료노트 참조
삽화-12:3, 나드
히말라야 원산의 식물인 나드의 털이 많은 줄기 부분과 뿌리는 향유(香油)의 제조 원료가 되었다. 이 나드향은 매우 비싼 고급 향료에 속했다.
도표-12:1,2 남에게 친절을 베푼 자들 15선(選)
대 상 성 구
1. 아브라함 천사 창 18:1-8
2. 라반 아브라함의 종 창 24:31-38
3. 르우엘 모 세 출 2:20
4. 마노아 여호와의 사자 삿 13:15
5. 요나단 다윗 삼상 20:1-42
6. 수넴 여인 엘리사 왕상 4:8-10
7. 욥 나그네 욥 31:32-34
8. 마태 다른 세리들 마 9:10
9. 마르다, 마리아 예수 요 12:2,3
10. 루디아 바울 행 16:14,15
11. 아굴라, 브리스길라 바울 행 18:2,3
12. 뵈뵈 바울 롬 16:1,2
13. 빌레몬 바울 몬 1:7,22
14. 오네시보로 바울 딤후 1:16-18
15. 가이오 바울 요삼 1:5,6
주요 주제-12:13 메시야의 이해
막 서론 특별 자료 참조
보감-12:12-19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목적
마 21장 자료노트 참조
삽화-12:13, 종려나무
종려나무(Palm Tree)는 이스라엘의 기후 조건에 잘 맞아 무성히 잘 자랐다. 그래서 적당한 그늘을 만들어 주었고, 맛좋은 대추야자 열매도 많이 제공해 주었다.
한편 종려나무는 때때로 이스라엘의 특별한 상징이 되었는데, 집의 문이나 솔로몬 성전의 벽, 회당의 벽, 동전 등에 그 모양이 많이 새겨졌다.
도표-12:13 왕으로서의 예수에 대한 구약의 10대 예언
1. 다윗의 왕위를 계승하신 왕이심(삼하 7:12,13 눅 1:32,33)
2. 거룩한 산 시온에서 세움 받으심(시 2:6)
3. 영원한 권세를 가지신 왕이심(시 45:3-7)
4. 시온에서부터 권능의 홀로 다스리심(시 110:1,2)
5. 공의와 지혜로 통치하심(사 9:7; 렘 23:5)
6. 평화의 왕으로 오심(사 52:7; 슥 6:12,13)
7. 지극히 존귀하게 여김 받을 것임(사 52:13)
8. 전 세계를 다스리시는 왕이 되심(단 2:35,44)
9.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서 나심(미 5:2,4; 마 2:1,6)
10.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신 왕이심(슥 9:9)
신학용어-12:24 진실로 진실로
요 6장 자료 노트 참조
도표-12:24-26, 한 알의 밀알처럼 자기를 전적으로 헌신한 자 12예
1. 아브라함(창 22:12)
2. 모세(히 11:25)
3. 사무엘(삼상 12:3-5)
4. 사르밧 과부(왕상 17:12-15)
5. 다윗(대상 22:2-5)
6. 에스더(에 4:16)
7.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마 4:20)
8. 예수님(막 10:45; 요 12:24)
9. 두 렙돈을 헌금한 과부(눅 21:4)
10. 초대교인들(행 2:44,45; 4:34,35)
11. 모든 소유를 판 요셉(행 4:36,37)
12. 사도 바울(갈 2:20 빌 3:7,8)
도표-12:28, 성부 하나님께 대한 성자의 사역
1. 성부의 뜻대로 이루심(눅 22:42)
2. 성부의 비밀을 계시하심(요 1:14)
3. 성부의 일을 수행하심(요 10:37)
4. 성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함(요 12:28)
5. 성부의 집으로 성도를 이끔(요 14:2)
6. 성부의 사랑을 나타내심(요 16:27)
7. 성부의 말씀을 선포하심(요 17:8)
도표-12:23-36 예수 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의 비교
예수 그리스도 적 그리스도
1. 하나님의 독생자(요 3:18) 멸망의 아들(살후 2:3)
2. 인자(요 12:33) 불법의 사람(살후 2:3)
3. 만왕의 왕(계 17:4) 열 왕의 왕(계 17:12,13)
4. 참 하나님(요 20:28) 거짓 하나님(살후 2:4)
5. 진리(요 14:6) 거짓말쟁이(요 8:44)
6. 구원자(행 5:31) 황폐케 하는 자(단 9:27)
7. 위에서 난 자(요 8:23) 무저갱에서 올라온 자(계 17:8)
8. 아버지의 이름으로 온 자(요 5:43) 자기의 이름으로 온 자(요 5:43)
9. 경건의 비밀(딤전 3:16) 불법의 비밀(살후 2:7)
10. 하나님께 권세 받아 온자(마 28:18) 마귀에게 권세 받아 온 자(계 13:7)
11. 하나님의 어린양(요 1:29) 짐승(계 13:1-3)
12. 선한 목자(요 10:11) 못된 목자(슥 11:17)
13. 친구(마 11:19) 원수(시 8:2)
14. 참포도나무(요 15:1) 땅의 포도나무(계 14:18)
15. 자기를 낮추는 자(빌 2:8) 자기를 높이는 자(살후 2:4)
16. 자기 뜻을 행치 않는 자(요 6:38) 자기 뜻대로 행하는 자(단 11:36)
17. 불을 내려보낸 자(행 2:1-3) 불을 내려오게 한 자(계 13:13)
18. 영광의 형상(계 10:1) 엄장한 형상(단 8:23)
19. 섬기는 자에게 표 주심(계 22:4) 섬기는 자에게 표를 줌(계 13:16)
20. 종말이 없음(히 7:3) 종말이 있음(단 11:45)
원어연구-12:27, 민망하니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어는 '타라소'의 현재 완료 수동태인 '테타라크타이'이다. 여기서 '현재 완료'라는 시제는 어떤 동작이 계속 진행되어 오다가 현재의 시점에서 그 동작이 완료됨을 나타낸다. 그리고 '수동태'는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이루어지는 행동을 나타낸다.
한편 동사 원형 '타라소'는 '소동하다'(마 2:3; 벧전 3:14), '요란케 하다'(갈 1:7), 마음에 '근심하다'(요 14:1), '괴롭히다'(행 15:24), '두려워하다'(눅 24:38)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단어는 원래 잔잔한 물의 표면을 '동하게 하다'(요 5:4,7)라는 뜻에서부터 여러 가지 의미로 확장되어 한 개인이나 단체의 내적인 불안정을 일으키는 것을 나타내게 되었다.
따라서 본절의 '테타라크타이'는 예수의 심적인 상태를 표현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는데, 곧 예수께서 십자가 수난을 받으실 때가 가까워 옴으로 당신의 심정이 현재 괴로움으로 가득찬 상태에 있음을 가리킨다.
공동번역은 본절의 '민망하니'를 마음을 '걷잡을 수 없다'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영역본들도(KJV, NIV Livng Bible, RSV) '고통스럽다'(be troubled)로 번역하고 있다. 예수께서 이렇게 십자가 수난을 당하실 때가 임박하여 심히 괴로워하신 것은 완전한 인성을 가지신 분으로서 마땅히 느끼실 수밖에 없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십자가 수난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인성의 연약함을 극복하고 기꺼이 십자가 수난을 받으신 것은 택한 죄인들의 죄를 담당하사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성육신하신 메시야로서 당신의 구속 사역을 충실히 이루고자 함이었다.
도표-12:24,25 성경의 역설들
마 16장 자료 노트 참조.
도표-12:28,30 예수 공생애 중의 세 차례 하늘로서의 소리
예수님의 공생애 중에는 예수를 성자 하나님으로 확증하는 성부 하나님의 하늘로서의 소리가 세 차례 주어졌다. 이 하늘로서의 소리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증거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가 성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실 이이심을 증거하는 것이었다. 이제 세 차례의 하늘의 소리를 비교해 보자.
1차 2차 3차
1. 시기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변화산상에서의 영광스러운 승리의 예루살렘 입성
받으실 때 변모 때 직후
2. 장소 요단강 변화산 예루살렘
3. 대상 유대인 세 제자 이방인
4. 내용 너는 내 사랑하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아들이라 내가 내 기뻐하는 자니 하였고 또 다시
너를 기뻐하노라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영광스럽게 하리라
5. 비고 공생애 준비기 갈릴리 3차 사역 말기 공생애 말기
6. 성구 막 1:11 마 17:5 요 12:28
주요 주제- 12:34, 인자의 이해
눅 12장 자료 노트 참조
주요 주제-12:42 유대인의 예수 배척
막 12장 연구 자료 참조
보감 - 12:35-41 본서에서 네 종류의 영적인 어두움
예수님은 이 땅에 생명의 빛으로서 오셨다. 그래서 그분은 이 세상의 영적 어두움을 비추시고 어두움 가운데에 있는 자들을 빛 가운데로 인도하셨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오셔서 해결하신 이 세상의 영적 어두움의 종류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살펴보자.
1. 심령의 어두움(1:5-9)
사단의 지배 하에 있던 사람들의 어두운 심령에 생명의 빛을 비추심
2. 도덕적 어두움(3:19-21)
악을 행하기만 하던 자들에게 진리의 빛을 비추사 선을 행하게 하심
3. 판단력의 어두움(12:35-41)
어두움 속에서 자기의 가는 바를 모르던 자들에게 생명의 길로 가게 하심
4. 영원한 어두움(12:46)
영원한 어두움 속에 던져질 자들에게 빛을 비추사 영원한 빛 속에 살게 하심
도표-12:42 예수를 따르는 자들에 대한 유대인의 핍박 방법
1. 거짓 비방(마 5:11)
2. 서로 배반하며 잡아줌(마 24:10)
3. 욕하고 악한 말을 함(눅 6:22)
5. 유대 사회에서 출회시킴(요 12:42)
6. 미워함(요 15:18)
7. 예수를 못 전하도록 위협함(행 4:17)
8. 채찍질함(행 5:40)
9. 결박하고 투옥함(행 9:2,14)
10. 압제하며 법정으로 끌고 감(약 2:6)
12:1-11 예수께 향유를 부은 마리아
앞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죽었던 나사로를 살려 내신 표적으로 인해 산헤드린의 핍박이 가속화되어 드디어 자신을 죽이려고까지 하자 이를 피해 에브라임으로 가셨던 예수께서는 이제 본장에서 공생애 마지막 한 주간을 맞이하여 자신의 사역을 마무리하시기 위해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향하신다.
본장의 첫머리를 여는 본문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하루 전, 즉 토요일에 베다니에서 발생한 사건을 보여준다. 그것은 공관복음서에도 기록되어 있는(마 26:7-13; 막 14:3-9) 마리아의 도유(塗油) 사건이다. 그런데 본문의 사건과 공관복음의 사건은 동일한 사건이지만 강조점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즉 마태와 마가는 마리아의 도유와 유다의 배반을 관련시키면서 예수의 장례를 예비한 행위였음을 암시한데 피친 반면에. 요한은 향유를 부은 마리아의 헌신적인 행위 자체를 중시하면서 구체적으로 예수의 장례를 예비한 행위였음을 시사한다(7,8절). 그리고 이와 유사한 사건은 눅 7:36-50에도 기록되어 있으나 본문의 사건과는 별개의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누가의 기록은 예수의 공생애 초기에 있었던 사건인 반면 마태, 마가, 요한이 기록한 도유 사건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 마지막 토요일에 있었던 사건이기 때문이다. 한편 나사로의 동생 마리아가 순전한 나드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씻었던 헌신적 행위는 자기 오라비 나사로를 죽음에서 다시 살려 주신 예수님께 대한 감사와 사랑의 표현이었다. 그리고 이는 마리아가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미리 알고 행한 행위는 아니었으나 결국 정녕 자신도 깨닫지 못하는 중에 예수님의 장례를 예비한 행위가 되었다. 따라서 마리아의 행위의 의미를 모르던 가룟 유다는 마리아를 노골적으로 책망하고 비난했지만(4-6절), 예수님은 마리아의 행위를 기쁘게 보시고 칭찬하셨던 것이다(7,8절).
그리고 그러한 일이 일어나는 중에도 예수를 죽이고자 하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모의는 계속되었다(9-11절). 그런데 그들은 예수만 죽이고자 한 것이 아니라 예수가 살려준 나사로까지도 죽이고자 했다. 왜냐하면 다시 살아난 나사로 때문에 예수를 믿는 자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이는 예수가 죽어가는 영혼들을 다시 살리는 역사를 수행하셨음에 반해 사탄과 그 하수인들은 오히려 살아 있는 자를 죽이는 역사를 수행하고 있음을 명백히 증거해 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마음과 물질을 다해 온전히 주님께 헌신한 마리아를 통해 성도들의 말과 행실은 주위 사람들의 눈과 귀를 의식해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교훈을 받는다. 사실 아무리 우리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존경을 한 몸에 받을지라도 하나님께로부터 책망과 배척을 받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살전 2:4)? 따라서 우리의 재산과 소유의 참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자라면 마리아 같이 자신의 제일 귀한 것까지도 아끼지 않고 온전히 주님께 드려 헌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 중요한 것은 무엇을 얼마만큼 드리느냐가 아니라 정말로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자신을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느냐 하는 것이다(눅 21:1-4; 롬 12:1).
12:1 유월절 엿새 전에. - 유월절은 유월절 어린양을 잡는 니산월 14일 해질녘부터 시작된다(출 12:6). 그러므로 그 엿새 전이란 니산월 8일(금요일)이 된다. 유대인들의 규정상 안식일에는 먼 거리를(요 11:54) 여행할 수 없으므로 예수 일행은 금요일 저녁 때가 되기 전 즉 안식일 시작 시점 이전에 베다니에 도착하셨을 것이다. 그리하여 안식일을 보내신 후 토요일 저녁이 되자 잔치를 배설하였고(2절), 일요일에는 유월절 어린양이신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승리의 입성'을 하신 것이다(12-16절).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 - 브라운(Brown)은 본서 저자가 '베다니'를 설명하면서 바로 앞장에서 일어났던 나사로의 부활 사건을 다시금 새삼스레 언급하는 것이 어색하다고 하여 나사로의 이야기가 본래의 본문에는 빠져 있다가 후대에 삽입된 것으로 본다. 그러나 브라운 자신이 주장하는 대로 본서는 등장인물을 '재정의'하는 즉, 인물의 성향을 재차 언급하는 경향을 보이듯이(요 11:39) 본절은 사건의 무대 배경을 재 정의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요단 강 동편의 베다니(요 1:28)와 예루살렘 부근의 베다니(요 11:1)를 구분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12:2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 새. - 이 잔치 석상에서 마리아가 예수께 향유를 부은 사건은 마 26:6-13과 막 14:3-9에도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눅 7:36-38에 나와 있는 향유를 부은 기사는 몇 가지 유사점에도 불구하고 이는 예수의 2차 갈릴리 사역 시기에 있었던 것으로서 이 부분에 나오는 것과 서로 다른 사건으로 추정된다. 이에 관해서는 그곳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예수를 위해 베풀어진 이 잔치는 아마도 예수께서 죽은 나사로를 다시금 살려 주신 데 대한 감사의 뜻으로 행해진 듯하다(요 11:1-44). 그런데 병행 본문인 마태와 마가의 기록이 잔치의 주최자를 문둥이 시몬으로 언급하는 데 대해 많은 설명이 있어 왔다. 렌스키(Lenski)는 마르다가 시몬의 부인이라고 추정하며 샌더스(Sanders)는 시몬이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의 아버지라고 본다. 이 중 어느 견해가 옳은 것인지는 아직까지도 결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사실은 세 복음서의 기사를 종합해 보건대, 이 잔치의 주최자는 본래 시몬이지만 본서 저자 요한은 공관복음서 기자들이 전혀 언급하지 않은 '나사로의 부활 사건'에 중요성을 부여하여 그를 중심으로 이 기사를 기록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요한은 잔치의 주최자인 시몬은 언급하지 않고 예수에 의해 다시 살아난 나사로를 중심으로 본 기사를 기록한 것이다(1,2,9-11절).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 눅 10:40 주석 참조. 마르다는 천성적으로 부지런했던 것 같고 특히 이 자리에 참석한 예수에 대해서 큰 감사의 마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부지런히 일하였던 듯하다.
12:3 마리아는. - 본장 연구자료 참조.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 향유는 가루와, 액체로 된 것 두 종류가 있는데 향료와 의약품, 화장품, 장례 준비물 등으로 널리 사용된다. 출 30장 자료노트, '향료' 참조. 그런데 본절에서는 이것이 상당히 고급 향품인 나드향(나르도스)으로 언급되는데 이 향유의 원산지는 동인도였으므로 전량 수입에 의존했고 따라서 매우 비쌌다(5절 주석 참조), 한편 '순전한'에 해당하는 '피스티케스'는 '피스토스'(믿을 수 있는, reliable)에서 파생한 단어인 듯한데 본절과 막 14:3에만 나타나고 있어서 그 의미는 불확실하다. 아마도 문자적으로는 '믿음직 한'이라는 뜻으로 사용된 듯하나 이곳에서는 문자적인 의미를 넘어서서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고급품을 나타내는 말로 이해해야할 듯하다. 따라서 그 의미는 개역성경의 '순전한'도 무방하고 새 성경이 '진짜'라고 번역하는 것도 가능하다. 다음으로 한 '근'(리트란)이라는 중량단위는 본서에만 나오는 것으로(요 19:39), 라틴어의 '리브라'(libra)라는 단위와 연관이 있다(Bernard, Robertson). 그 용량은 대략 12온스, 즉 340g정도이다. 그런데 마태와 (마 26:7) 마가(막 14:3)는 이를 담은 용기를 기준으로 한 '옥합'으로 표현하였다. 즉 내용물이 귀중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 용기 역시 매우 값진 것이었다.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거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 마태와(마 26:7) 마가는(막 14:3) 향유를 '머리'에 부었다고 말하며 요한은 '발'에 부었다고 말하나 양자의 차이는 쉽게 설명될 수 있다. 즉 마태와 마가도 시인하는 대로 마리아는 예수의 '몸'에 향유를 부었는데(마 26:12; 막 14:8), 사실상 향유의 양은 그렇게 할 만큼 충분했을 것이다. 이로 보아 마태와 마가가 언급하는 대로 마리아는 예수의 머리부터 향유를 붓기 시작하여 몸과 발에 이르기까지 향유를 부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요한이 특히 예수의 발에다 초점을 맞추는 것은 마태와 마가가 생략한 것으로서 마리아가 머리털로 예수의 발을 씻었다는 놀라운 사건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이다. 이처럼 요한의 기사와 마태, 마가의 기사를 비교하면 마리아의 헌신의 정도는 전자가 훨씬 더 강도 깊게 표현되어 있다. 이것은 4절 이하에 나타나는 가룟 유다의 책망에서도 매우 극단적으로 대조된다. 즉 마태와 마가가 '제자들'(마 26:8), '어떤 사람들'(막 14:4)이라고 막연히 밝힌 '분노한 자'를 요한은 가룟 유다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으며 더구나 그 유다를 재정의(reidentify)하기를 '예수를 잡아줄' 자라고 한다(4절). 그렇다면 요한의 의도는 분명해진다. 예수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헌신하는 마리아의 행위와 예수를 십자가에 달리도록 넘겨줄 유다의 행위는 극단적으로 대조되어 우리로 하여금 '진정 예수의 제자는 누구인가'를 질문하게 해준다. 즉 이 기사는 예수와 그 제자와의 진정한 관계를 재천명하는 회화적인(figurative) 정경을 보여주기 위해 요한이 자세한 기록을 남긴 것이다.
12: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 요 6:71 주석 참조. 공관복음에는 가룟 유다의 이름이 명시되어 있지 않고 단순히 '제자들'(마 26:8), '어떤 사람들'(막 14:4)로 나온다. 이로 보아 당시 마리아의 향유 부음이 가룟 유다뿐만 아니라 다른 제자들과 이 잔치에 참여한 손님들에 의해서도 자연스럽지 못하게 비쳐진 듯하다. 그러나 요한이 특히 가룟 유다를 언급한 것은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가룟 유다가 선동이 되어 불만을 토로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12: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 '데나리온'(Denarius)은 일반적으로 날품 노동자들의 하루 품삯이었다. 1권 성경 총론, '성경 도량형 환산표' 참조. 한편 마태는(마 26:9) '삼백 데나리온'을 단지 '많은 값'이라고 추상화시킨 반면 마가는(막 14:5) '삼백 데나리온 이상 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나 그 실제 의미는 별 차이가 없다. 이것은 마치 오병이어의 이적에서는 오히려 마가가 '이백 데나리온'이라고 말하는(막 6:37) 반면 요한은 '이백 데나리온 이상'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과 유사하다(요 6:7). 어쨌든 삼백 데나리온이란 노동자가 안식일과 절기를 제외한 1년 동안 쉬지 않고 일해야 벌 수 있는 적지 않은 액수이다. 이처럼 값비싼 향유를 아낌없이 예수께 부었다는 것은 마리아의 헌신의 정도를 잘 나타내 준다.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 유다의 관심이 가난한 자들에게 있지 않았음은 명백하지만 이러한 비난 속에는 적어도 두 가지 측면의 복합적인 반감(反感)이 있었을 듯하다. ① 아마도 부유한 삶을 살았을 듯한(Hendriksen) 마리아의 행동이 지나친 사치라는 반감. ② 그 행위를 방임하는 예수를 향한 간접적 비난, 하지만 정작 유다의 근본적인 관심은 보다 현실적인데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돈을 맡아 관리하면서 착복, 유용(流用)하는 것이었다(6절).
12: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 유다의 근본적인 관심은 가난한 자에게도, 나아가서 예수에게도 있지 않고 오직 '돈'에 있었다. 공관복음은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들에게 은 30을 받고 예수를 팔아넘긴 사실만을 언급하지만(마 26:14-16; 막 14:10,11; 눅 22:3-6) 요한은 그 공지(共知)의 사실을 생략하는 대신 가룟 유다가 물욕(物慾)에 사로잡힌 데 대한 자세한 기록을 2회나 추가하고 있다(본절과 13:27-30). 이것은 공관복음서 기자들이 유다가 예수를 판 근본적 원인이 돈 때문이라는 평가를 한 것을 요한이 인정하면서 그 사실을 더욱 확증하려는 의도로 보아야 한다. 흔히 유다가 12제자 중 홀로 유대지역 출신이라는 데 착안해서 '가룟'이라는 용어를 열심당(Zealots) 운동과 연결시켜 정치적 메시야 상을 발견치 못한 실망 때문에 예수를 배반했다는 추측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적어도 당시 그 사건의 목격자인 요한의 증언에는 부합되지 않는다. 또한 본서에서 요한이 처음부터 가룟 유다를 도적이며 사탄에게 사로잡힌 자로 규정하는 것으로 보아서(요 6:70,71; 13:2,21,29) 유다가 예수를 판 이유는 열두 제자들 간의 불화와 질투심 때문이었다는 르낭(Ernest Renan)의 가설도 본서 저자의 신학적 관점을 호도(湖塗)한 것이다.
12:7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 비록 잔치 석상에서 하신 말씀이라서 분위기에는 어울리지 않지만 '장사할 날'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독자들로 하여금 임박한 예수의 십자가를 한층 더 가깝게 느끼도록 만든다. 사실 이제 예수께서 죽음을 맞이하실 날이 불과 엿새 밖에 남지 않았으니 예수께선 마리아의 도유(塗油) 행위를 자신의 장례(葬禮)를 준비한 예비 행위로 의미 부여하신 것이다. 한편 '나의 장사할‥‥두게 하라'는 그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 다소 애매하다. 때문에 이 구절에 대해 다음 두 가지 견해가 있다. ① 헌신적인 마리아에 대한 예수의 평가를 반영하는 것으로 '마리아는 나의 장사를 위해 이것을 보존해 왔다가 드리는 것이다'(현대인의 성경, KJB, LB, 새성경, 현대어 성경, 표준 신약전서, Brown, Robertson)라는 의미로 보는 견해. ② '향유를 계속 가지고 있다가 나의 장사를 위해 쓰게 하라'(NIV, NASB, TEV, RSV, W.F. Howard)는 의미로 보는 견해, 그러나 머리부터 시작해 온 몸을 적시고 발에까지 흐른 향유는 더 이상 남아 있기 힘들다. 또한 마가의 기록에 의하면(막 14:3) 옥합을 깨뜨렸으며 요한의 문맥에서도 마리아가 향유를 아껴 쓴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향유 냄새가 집안에 가득한 것처럼(3절) 마리아는 예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리는 헌신을 하였던 것이다(Hendeiksen). 따라서 이상의 두 견해 중 전자가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12:8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 예수께서는 가난한 자들의 구제에 결코 무관심하지 않으셨다(요 13:29). 그러나 저들은 이 세상이 존속하는 한 언제든지 존재할 것이었다(신 15:11). 그러므로 저들에 대한 구제는 항상 할 수 있으며 또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 그런데도 실상 가룟 유다는 저들에 대한 구제에 마음을 두기 보다는 마리아가 예수를 위하여 쓴 삼백 데나리온이나 나가는 향유를 착복하지 못한 데 대하여 아쉬워하였다. 그러므로 예수께선 이 같은 말씀으로 가룟 유다의 의표를 찌른 것이다.
12:9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 아마도 이들은 유월절을 앞두고 외국이나 지방에서 예루살렘에 상경한 자들로 그곳에서 '나사로의 부활 소식'을 접하게 된 자들일 것이다.
이는 예수만 위함이 아니요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베다니에서 일어난 나사로의 부활 사건은 비록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이긴 하나 유월절을 앞두고 예루살렘에 상경한 사람들에게 가장 큰 화제 거리였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이들은 그 같은 이적을 일으킨 예수는 물론 다시 살아난 장본인인 나사로도 보려고 큰 무리를 이루어 베다니로 몰려든 것이다.
12:10,11 대제사장들이. - 대제사장을 비롯하여 산헤드린 공회원들을 대표하는 사람들을 포괄하여 일컫는 표현이다. 요 11:47,57 주석 참조.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 이제 단순한 지엽적 문제가 아니라 유월절 순례 인파로 인해 전 유대, 나아가 팔레스틴 밖의 유대인 공동체에까지도 증거될 이 나사로의 부활 사건은 유대 당국자들에게는 심각한 문제이었다. 특히 대제사장들은 사두개파 출신들이었는데, 그들은 부활 교리 자체를 거부하는 자들이었으므로(행 23:8) 이로 인한 당혹감이 더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자신들의 뿌리조차 위협하는 존재인 예수와 나사로를 아예 죽여 없애 버리려고 한 것이다. 아무튼 지금까지 예수에 대해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반신반의했던 자들이나 호기심만을 가지고 예수를 찾아온 자들도 이제 나사로의 부활 사건으로 인해 예수를 믿게 되었다(요 11:42 주석 참조). 이들 가운데는 예수의 십자가 형벌 당하심으로 인해 저에 대한 믿음을 저버린 자들도 있었을 것이나 대개는 예수의 부활을 목격하고서 더욱 예수에 대한 믿음을 확고히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12:12-19 승리의 예루살렘 입성
앞 단락(1-11절)의 마리아의 도유 사건이 발생한 그 이튿날 즉 일요일에 예수님께서는 수난을 통한 자신의 구속 사역을 완성하실 때가 이르렀음을 아시고 그 사역을 이루시기 위해 드디어 그 사역의 현장인 예루살렘으로 입성(入城)하신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병거나 말이 아니라 겸손하게도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구약 예언의 성취라는 의미를 지닌다. 즉, 이는 자신이 이 세상에 군림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신을 대속물로 내어 주사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온 구속주요 평화의 왕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예수의 모습은 구약 성경에 예언된 메시야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슥 9:7). 하지만 장차 예수님께서 약속대로 이 땅에 재림하실 때에는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엎드려 경배할 영광과 위엄의 주로 임하실 것이다(계 19:11-16).
한편 예수님의 이러한 예루살렘 입성 소식을 듣고 거리로 뛰쳐나온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를 외쳤는데(12,13절), 이러한 그들의 행위는 죽은 자를 살리시기까지 한 예수님께서 자신들에게 반드시 승리와 구원을 가져다주실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었다(14-19절). 물론 그들의 기대는 지극히 현세적인 것으로서, 로마 제국의 압제로부터 해방되어 정치적 메시야 왕국의 영광과 축복을 누리려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토록 열렬히 환영했던 예수님께서 결코 지상의 메시야 왕국을 건설할 의사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자, 불과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도리어 예수를 대적하고 죽이려 한 것이다(요 19:15).
따라서 이러한 무리들의 모습을 통해 깨닫는 사실은 진정 주님께 대한 우리 성도들의 신앙은 세상적 축복과 만족을 누리기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며, 오로지 그분이 누구신지를 진정으로 깨달아 전적인 헌신과 순종을 바치는 것이라야 한다는 점이다. 만약 우리가 그와 같은 올바른 신앙을 지니고 있다면 그 어떤 환난과 시련 속에서도 낙심치 아니하며,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을 잃지 않은 채 언제나 그분을 섬기는 신실한 자세를 견지할 수 있을 것이다.
12:12 그 이튿날에는. - 즉 일요일로서 훗날 교회는 이 날을 '종려주일'(Palm Sunday)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명절에 온 큰 무리. - 공동번역은 이를 '명절을 지내러 와 있던 큰 군중'으로 번역하고 있다. 즉 이들은 유월절을 앞두고 미리 예루살렘으로 올라온 자들을 가리킨다(요 11:55).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함을 듣고. - 지금까지의 박해나 위협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결정적인 살해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예수께서는 이처럼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다. 이는 이제 그가 자신의 구속 사역을 완성함으로 하나님의 온전하시고도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어 드릴 때가 목전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요 2:4; 7:6; 8:20).
12: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 이처럼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자 큰 무리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한 탓에 훗날 이 날이 '종려 주일'로 불리우게 되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종려나무 가지는 승리와 번영을 상징하는바(시 92:12; 사 9:14) 이것을 흔드는 것은 왕이나 개선장군에 대한 경의의 표시이다(계 7:9, 외경 마카비상 13:51; 마카비하 10:7).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 '호산나란 '지금 구원하소서'라는 뜻의 히브리어에 대한 헬라어의 음역이다(시 118:25). 이 표현은 도움을 구하는 간구에 사용되었으며 삼하 14:4에서는 인사말로도 쓰였다. 본절에서는 간구의 의미보다는 찬송과 기쁨의 외침인 것이 확실하다. 이어지는 말인 '찬송하리로다‥‥오시는 이'가 그것을 증거해 준다. 이 구절은 시 118:25 이하의 인용으로 이스라엘의 오랜 희망이던 메시야가 바로 예수이심을 인정하고 환영하는 것이다(요 1:49).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라는 표현의 구체성은 이어지는 말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이는 곧 무리들이 예수를 메시야로 이해한 것을 반영한다. 물론 이들의 메시야 개념은 어디까지나 정치적 관점에서의 메시야이다. 즉 그들은 이스라엘을 로마의 억압에서 해방시켜 줄 구원자를 기대했던 것임은 새삼 말할 필요가 없다. 요 6:15 주석 참조. 한편 예수의 사역 초기부터 '이스라엘의 왕'이란 칭호는 예수에게 사용되었지만(요 1:49) 예수께서는 오히려 이 칭호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시고 '인자'라는 칭호를 즐겨 사용하셨다(요 1:51). 하지만 이곳에서는 예수께서 무리들의 환호를 막지 않으셨는데 이 환호 속에 군중들의 기대와는 다른 만왕의 왕 되신 예수의 본래적 지위가 시사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백성들의 이러한 외침이 뒤에 가선 도리어 예수에 대한 고소의 항목으로 사용된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칼하다(요 18:33).
12:14,15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만나서 타시니 이는 기록된 바 시온의 딸아 두려워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 요한이 생략하는 어린 나귀의 준비와 인도 과정에 대해서는 마 21:2,6; 막 11:2-6; 눅 19:30,31의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개선장군이나 일국의 왕은 적어도 병거나 준마(駿馬)를 타고 등장함으로 그 위엄과 영광을 떨치기 마련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만왕의 왕이시면서도 하찮은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신 것은 그의 겸비함과 섬김의 자세(마 20:28)를 잘 나타내 주는 것으로서 구약 예언의 성취이다(슥 9:9).
시온 딸. - 이는 예루살렘의 거민이나 그 성 자체를 의미하는 의인법적 표현이다(사 1:8; 렘 4:31; 6:23; 애 2:4,8,10,13; 슥 2:10). 이처럼 국가나 성읍 또는 그곳 주민들을 여성에 빗대어 표현하는 비유법은 특히 예언서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다(사 23:12; 렘 46:11).
12:16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인줄 생각났더라. - '영광을 얻으신'에 해당하는 '에돌사스데'는 요 7:39에서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 본장 23절과 요 13:31에서는 부활과 승천에 적용되었다고 양자를 구분하는 학자도 있다(A.Robertson). 그러나 실상 세 구절은 모두 동일하게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승천이라는 일련의 과정을 총괄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제자들을 떠나신 후 성령께서 오셔서 생각나게 하실 때에야(요 14:26) 제자들은 이 사건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3년 동안이나 예수를 그림자처럼 따르던 제자들이 이러했음에야 군중들은 더욱더 이 예언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음에 틀림없다.
12:17,18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거한지라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 - 본서 저자 요한에 의하면 예수를 따르는 무리의 수를 증가시키고 그들의 환호를 더욱 가열 차게 만든 것은 나사로의 부활을 목격한 자들의 증거였다. 여기서 '증거한지라'라는 '에마르튀레이' 동사의 시제가 미완료인 것은 그들의 증거하는 행위가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입에서 입으로 계속하여 다른 사람들에게로 전파되었음을 표현해 준다. 그런데 그들은 나사로의 부활에 관한 증거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 있었던 예수의 여러 표적들에 관한 이야기도 충분히 그 군중들에게 전했을 것이다(Barrets). 한편 예수께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이적 사건의 영향력이 얼마나 지대한 것이었는지가 본장에서 다음 두 가지로 나타난다. ① 청중들이 예수를 메시야로 이해하게 된 가장 강력한 최근의 증거가 바로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이라고 본서 저자가 결론적으로 평가함(18절), ② 이 사건으로 말미암은 군중들의 반응이 예수의 적대자들에게는 치명적인 자괴감(自壞感)으로 나타남(19절).
12:19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 하니라. -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자신들의 예수 제거 모의(요 11:45-53)가 예수에 대한 군중들의 열화 같은 동조로 인해 무산될 위기에 처하게 되자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가운데 푸념을 늘어놓고 있다. 그런데 공회원을 가리키는 표현이 본절에서는 '바리새인들'로, 10절에서는 '대제사장들'로, 요 11:47,57에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로 각기 다르게 표현된 것은 같은 단어를 반복하기를 꺼리는 요한의 어휘 구사 습관 때문이다. 한편 예수를 따르는 유대인 군중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세상'이라고 표현한 것은 홧김에 한 말이겠지만 '반어적 진리'(ironical truth)를 내포하고 있다. 즉 군중들 속에는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헬라인도 있었는데(20절 이하), 실상 예수의 구속 사역은 이렇게 온 세상을 위한 것이었다(요 3:16).
12:20-36 예수를 찾아온 헬라인들
앞 단락에서는 고난 주간 중 일요일에, 예수께서 자신의 사역을 이루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광경을 살펴보았다(12-19절). 그에 이은 본문 역시 일요일에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사건을 소개하고 있는데, 곧 유대교로 개종한 헬라인들이 예수의 명성을 듣고 예수를 찾아온 사건이다. 이러한 본문은 공관복음서에 전혀 언급되지 않고 오직 본서에만 기록된 것으로 예수님께서 헬라인들의 방문을 받고 이방인인 그들에게 자신의 죽음이 어떠한 죽음이 될 것인가를 가르치신 특이성을 지닌다.
즉, 유대교 최대의 명절인 유월절을 맞이하여 예루살렘에 올라온 순례 객들 중의 일부 헬라인들이 빌립에게 부탁해서 예수님을 만나 뵈었다(20-22절).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자신이 세상에 온 목적을 가르쳐주심과 아울러 자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이룰 때가 되었음도 선언하셨다(23-36절). 즉, 예수께서는 자신을 땅에 떨어져 죽어 많은 열매를 맺는 한 알의 밀로 비유하시면서(24절),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써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온 메시야라는 사실을 말씀하신 것이다(31-33절). 하지만 이와 같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 사람들은 제대로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그러한 자가 누구냐?'고 질문했다(34절). 이에 예수님께서는 다시금 자신을 '빛'으로 증거하시면서 빛이 사라지기 전, 즉 자신의 죽음이 이르기 전에 이 빛을 믿어 심판을 면하라고 권면하신 것이다(35,36절).
한편 본서의 기록자 요한이 이 같은 기사를 소개하고 있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만 국한된 메시야가 아니라, 헬라인 즉 이방인들까지 구원키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서였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은 요한복음 전체의 주제 곧 모든 자들로 하여금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여 영생을 얻게 함(요 20:31)과도 부합되고 있다. 그러기에 요한은 예수께서 거듭거듭 일러주신바 그분의 죽음의 결과가 어떠한 것인지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초점을 맞추었던 것이다(24,32절).
12:20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 '헬라인'에 해당하는 헬라어 '헬레네스'란 행 6:1의 헬라파 유대인들(헬레니스타이), 즉 양친 중 한 쪽이 유대인이거나 헬라 지역에 오래 살아서 헬라어를 말하는 유대인들과는 다른 순수한 헬라인들을 말한다. 아마도 이들은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proselytes)일 것이다(행 17:4). 비록 이들이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방인들에게까지 예수의 소문이 나서 그들이 예수께 오게 되었다는 사실은 '그리스도 영광의 때'가 임박했음을 강력히 시사해 준다(23절). 물론 그렇다고 하여 이러한 이방인 개종자들이 이때 처음 생긴 것은 아니었다. 구약 시대에도 이방인으로서 유대교에 입교하는 자들을 위해 '할례'라는 통과의례를 설치해 놓고 그 문호를 열어 두고 있었다(왕상 15:42; 사 56:7). 그러나 본절에서 요한이 특히 이들의 존재를 부각시키는 것은 예수의 임박한 영광의 때와 관련하여 그 중요성을 이 이방인 예배자들에게서도 추출하고 있기 때문이다(19절 주석 참조).
12:21 저희가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가로되. - 빌립에 관해서는 요 1:44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헬라인들이 왜 예수의 열두 제자 중 빌립에게 청했고 또 빌립은 안드레를 찾아가 도움을 청했는지(22절) 본문에는 명확한 이유가 제시되지 않고 있다. 다만 이 두 사람의 이름이 공교롭게도 헬라식인 것으로 보아 다른 제자들보다는 나은 헬라어 회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당시는 헬레니즘 문화권이었기에 팔레스틴에서 통용되던 아람어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공용어인 헬라어를 구사할 수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선생이여. - 초면의 사람을 높여 호칭하는 가장 공손한 표현이다(요 4:11 주석 참조).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 이들이 예수를 만나고자 했던 이유에 대해서는 요한이 함구하고 있다. 그러나 요한이 이들을 본 문맥에 등장시킨 이유와 예수의 대답(23절 이하)을 검토해 본다면 그 이유는 거의 확실하다. 아마도 그들은 구원에 관한 가르침을 받고자 예수를 찾아왔을 것이다. 요한은 본장에서 예수와 제자들과의 관계를 시작으로 하여(1-11절) 유대인과의 관계(12-19절)를 기술하였는데 이제 이방 즉 세계와의 관계로 확대시킴으로 예수의 십자가 사역을 통한 구원의 범세계적 적용성을 설명하고 있다.
12:22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짜온대. - 예수를 뵙고자 하는 헬라인들의 간청을 접한 빌립이 왜 안드레를 찾았으며 또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이방인과의 접촉을 꺼려하는 유대주의적 배타성에 사로 잡혀 있던 빌립이 헬라인들의 요청에 대하여 어떻게 처리해야 할런지를 안드레와 상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하여 나름대로 의견의 일치를 본 빌립과 안드레는 함께 예수께 나아가 이 사실을 보고하였을 것이다.
12: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 예수의 이 말씀은 헬라인(20절)이나 그들의 대리자 역할을 했던 빌립, 안드레(21,22절)라는 특정된 무리에게만이 아닌 온 인류를 향한 것이다. 즉 이제 예수께서는 자신의 때가 왔음을 단적으로 선언하신다(참조 요 7:30; 8:20). 그 '때'는 예수가 온 인류를 위한 대속적 죽음과 부활, 승천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영광을 취하게 되는 때를 가리킨다. 이제까지는 본서 저자 요한에 의해서만 이 표현이 사용되었으나(요 7:39; 12:16) 여기서 처음으로 예수께서 직접 이 '때'에 관한 말씀을 하고 계신다(요 13:21; 14:13; 17:1). 한편 '인자'에 대해서는 요 1:51 주석과 눅 12장 자료노트를 보라.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 '진실로 진실로'는 요 1:51; 5:19,24 주석 참조.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이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 한 마디로 이 비유는 죽음을 통해 보다 풍성한 삶을 얻는다는 역설적인(paradoxical) 표현이다(Bemad, Morris. Robertson). 즉 이는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이로 인해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는 것처럼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으심으로 인해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될 것임을 의미하는 말이다(롬 5:12,17,21). 한편 이미 예수에서는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셨는데(요 6:35), 이 역시 예수와 관계하는 사람에게 보장된 영생을 말한다는 점에서 이 말씀과 이 비유는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또한 혹자들이 이 비유를 헬라의 곡식신인 데메터(Demeter)를 제사하며 많은 수확을 기원하는 엘리시우스 제전(Eleusinian Mysteries)과 연결된 후대의 삽입이라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으나 재고할 가치가 없다(A.Robertson). 한편 이와 관련, 바울도 성도들의 부활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예수의 이 비유를 인용하는 것을 참조하라(고전 15:36-38).
12:25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마다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 자신의 죽으심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생명을 얻게 될 것에 관해 말씀하신 예수께선 이제 자신의 제자들이 이와 관련하여 지녀야 될 마땅한 삶의 원리에 관해 교훈하신다. 이러한 본절은 '자기 부모와 처자와‥‥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6,27)한 예수의 말씀을 연상시켜 준다. 또한 이와 유사한 말씀이 공관복음에서 자주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마 10:39; 16:25; 막 8:35; 10:39; 눅 9:24; 17:23) 이는 예수께서 실제로 여러 차례 제자들에게 강조하여 말씀하신 내용인 듯하다. 한편 '보존하리라'에 해당하는 '퓌랔세이'가 미래 시제인 것은 현재적이면서도 동시에 미래적인 영생(eternal life)의 독특한 성격을 함축하고 있다. 즉 예수를 믿는 자마다 얻게 되는 영생은 그 즉시로 절대적 보장을 받는 것이긴 하나 그 완전한 성취는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구현되는 것이다(마 25:31-46).
12: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25절)가 해야 할 일에 관한 언급이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셨듯이 성도들도 각자 자신에게 맡겨진 십자가를 지고서 예수를 따르는 제자도(discipleship)는 공관 복음서 기자들도 강조하는 바이다(마 16:24; 눅 14:26, 27). 한편 여기서 '나를'에 해당하는 '에모이'가 강조형인 것은 주님을 따르는 자들의 지향점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시사해 준다. 또한 '따르라'에 해당하는 '아콜루데이토'가 현재 시제인 것은 제자로서의 철저한 추종을 의미하는 외에도 제자로서의 따름이 계속적이어야 함을 강조해 준다(Robertson).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 여기서 '나 있는 곳' 또는 '거기'란 예수께서 부활 승천 후 가계실 하늘나라를 가리킨다(Godet). 그러므로 '있으리니'의 '에스타이'가 미래 시제인 것은 장차 저 세상에서 예수와 함께 누리게 될 성도들의 영광스러운 삶을 잘 표현해 준다(계 21:1-7). 이것은 뒤에 나오는'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티메세이)가 미래 시제인 것과도 잘 어울린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7,18)는 말은 본절과 가장 잘 부합되는 구절이 아닐 수 없다.
12:27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 공동번역은 이를 '내가 지금 이렇게 마음을 걷잡을 수 없으니'로 번역하고 있다. '민망하다'(타랏소)는 말은 사실 '흔들다', '동요하다'는 뜻이다. 이는 인간으로서는 감당키 어려운 십자가 사역을 눈앞에 두고 인성(人性)을 지니신 예수의 고뇌가 어떠하였는지를 잘 보여 준다. 요 11:33 주석 참조.
무슨 말을 하리요. -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의 번민하는 기도(마 26:36-46; 막 14:32-42 ; 눅 22:39-46)를 파격적으로 생략하고 있는 요한이 본절로써 공관복음에 나타나는 예수의 최후 기도에 관한 기사를 요약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버나드(Bemard)의 견해는 비록 비약적인 면이 있긴 하지만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의 연결성을 시도하고 있는 해석이라는 의의를 지닌다. 한편 이 표현 속에 예수의 인간적 고뇌가 엿보이는데, 그것은 예수가 완전한 하나님이심과 동시에 완전한 인간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 - '나를 구원하여‥‥하여 주옵소서'는 일련 예수께서 십자가상의 죽음을 피하고자 하나님께 간구하는 말인 양 보인다. 때문에 많은 역본들은 이를 '나를 구원하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할까'라고 의문문으로 번역하고 있다(RSV, KJV, ASV, NEB. 공동번역). 그러나 전체 문맥을 살펴보면 굳이 그처럼 번역할 필요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십자가를 앞에 둔 예수께선 그 고통을 생각할 때에 인간적으로 두려움을 느꼈지만 그러한 인간적 연약함은 일순간의 주저였고(Bernard) 즉시 신적 의지로써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셨기 때문이다. 즉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라는 말씀에서 볼 수 있듯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사명에 대한 확실한 인식이 인간적 연약함을 압도해 버렸다는 사실로 예수의 기도는 설명되어야 한다.
12:28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 본 구절은 예수가 감당할 십자가 사역의 결과 중 하나님께 대한 측면이다. 예수의 십자가 사역은 ① 하나님께 영광, ② 자신에게도 영광(23절; 17:1), ③ 인간에게는 영생을(요 17:2) 주시는 세 방향의 결과를 가진다. 한편 본절의 '이름' 대신에 '아들'(휘온)이라는 독법(reading)을 취하는 사본들이 몇 있는데(L,X,f',f, 몇 시리아역, 및 콥틱역, Orison, Athanasius) 이것은 요 17:1의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의 영향으로 추정된다(Brown, UBS 3판 Geeek New Testament).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 본절 외에도 예수의 수세시(受洗時)(막 1:11)와 변화산상에서(막 9:7)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예수가 수행하는 구속 사역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됨을 밝힌 적이 있다.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에독사사)란 부정과거 시제의 표현이 과거 예수의 수세 시(막 1:11)와 변화 산 사건(막 9:7)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 것을 지칭한다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요한이 본서에서 그 두 사건을 기록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주장은 다소 신빙성이 없다고 볼 수 있다(Morris). 오히려 이는 그 모든 역사가 항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던 예수의 공생애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보다 합당할 것이다(요 7:16-18). 다음으로 '영광스럽게 하리라'의 미래시제(독사소)가 예수의 십자가상의 죽음과 부활, 승천을 통해 하나님과 예수 자신이 받을 영광을 의미함은 전혀 논란의 여지가 없다(요 13:31; 17:5).
12:29 곁에 서서 들은 무리는 우뢰가 울었다고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천사가 저에게 말하였다고도 하니. - 비록 확실하게 모든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소리가 들린 현상에 대해 공관복음서 기자들은 본문의 사건 외에도 ① 수세 시(마 3:17; 막 1:11; 눅 3:21,22)와 ② 변화산상에서도(마 17:5; 막 9:7; 눅 9:35) 있었던 것으로 밝히고 있다. 반면에 그것들을 모두 생략한 요한은 공관복음서 기자들이 전혀 다루지 않은 본절의 기사만을 기록하고 있다. 아무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확인시켜 준 이 하나님의 음성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이라는 구속사의 가장 절정의 사건을 앞둔 상황에서 그 의미를 생각케 한다는 뜻에서 매우 시의 적절한 것이었다.
12:3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 - '아니요'라는 부정어(우)를 절대적 의미로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즉 이는 '반드시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라는 정도의 뜻일 것으로 보인다(Hendrikson, Robertson). 사실 하늘로부터 들린 하나님의 음성은 십자가 사역을 앞두고서 순간적이나마 인간적 고뇌에 빠졌던 예수에게 그 같은 감정을 극복할 충분한 위로를 주신 것에 틀림없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영광(독사)은 인류의 구원과 관계된 것이니(31,32절) 예수께선 '너희를 위한 것이라'고 힘주어 말씀하시는 것이다.
12:31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 이는 예수의 십자가 대속 사역으로 인해 결정적으로 사탄의 권세가 깨뜨려질 것을 의미한다. 물론 사탄과 그에 속한 자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을 구분하는 하나님의 '최후 심판'은 이 세상 마지막 날에 있을 것이다(마 25:31-46; 계 20:11-15). 그러나 예수의 십자가 대속 사역으로 인해 사람들은 그 동안 죄의 종 노릇하던 데서 풀려나 사망에서 생명의 자리에로 옮기움 받게 되었으니(요일 3:14) 이는 실상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에 대한 각각의 심판이 이미 주어진 것이 아닐 수 없다(요 3:18).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 '이 세상 임금'(호 아르콘 투 코스무 투투)이란 표현은 사탄(Satan)을 지칭하는 요한이 즐겨 사용한 용어이다(요 14:30; 16:11). 바울이 '이 세대의 관원'(고전 2:6-8), '이 세상 신'(고후 4:4, '공중의 권세 잡은 자'(엡 2:2),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엡 6:12)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한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닌 것이다. 다음으로 '쫓겨나리라'에 해당하는 '에크블레데세타이'( )는 '깨끗하게 쓸어버리다'(drive out)라는 뜻으로 사단의 최후적인 추방을 잘 묘사해 준다. 물론 아직도 사탄은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긴 하나(벧전 5:8)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으로 그들의 멸망은 기정사실화 되었으며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때에 저는 결국 '무저갱'에로 떨어져 그곳에 영원히 갇히고 말 것이다(계 20:1-3).
12:32 내가 땅에서 들리면. - 본서에서는 '들리다'(휘프소오)라는 동사가 특징적으로 '십자가에 달려 땅에서 들림'이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요 3:14; 8:28). 그러나 보다 의미를 확대하여 부활과 승천에 이르는 예수의 일련의 승귀(exaltation) 과정을 가리키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요 8:28 주석 참조.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라. - '모든 사람'이 대부분의 사본에는 남성 복수형으로(판타스) 나타나지만 일부 사본(א, P66)에서는 중성 복수형(판타)의 독법(readings)을 가진다. 이에 대하여 혹자는 중성 복수형이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사물에도 구속적 효과를 미치게 된다는 우주적 구속(cosmic redemption)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기도 하지만(Brown), 이곳의 중성은 일반적인 의 미로서 남성을 사용하는 것과 별다른 차이 없이 사용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좋다(Blass & Debrunner). 다음으로 '모든 사람'이라는 표현에 대해 이는 만인 구원설(Universalism)을 뜻하는 증거라고 주장하기도 하나 실상 요한에게 있어서 '모든 사람' 혹은 '세상'이란 표현은 다양한 의미로 쓰인다는 사실을 감안해야 한다. 이 만인 구원설과 위의 우주적 구속을 함께 제안하는 견해를 만물 회복론(apocatastasis)이라고 하며 이는 몇몇 교부들(Origen, Clement 등)의 글에서 발견되는데, 하나님의 진노의 개념을 약화시키고 사랑의 완전성을 강조하는 신학적 경향이다(VanA. Harvey). 그러나 본절에서 '모든 사람'이란 어디까지나 '아버지께 선택되어 이미 이끌어지도록 예정된' 자들을 말한다는 입장에서 이러한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요 6:44, Morris). 이에 관해서는 요 6:44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12:33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 '보이심이러라'(세마이논)는 '표적을 보이다'라는 뜻의 '세메이온'(행 25:27)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이것은 예수 십자가 사건의 표적적 성격을 암시해 준다. 사실상 십자가는 그 자체가 구약 시대부터 계속되어 오던 짐승의 피 흘림을 통한 구속 사역의 그림자와 하나님의 인류 구원 계획이 영광스럽게 실현되었음을 증거해 주는 표적이었다(Brown).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가 십자가를 '구원'의 표지로 삼고 있음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이다.
12:34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 여기서도 '율법'은 모세 오경만이 아닌 전체 구약성경을 가리키는 듯하다. 요 10:34 주석 참조. 하지만 유대인들이 말하는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는 말의 출전(出典)은 확실치 않다. 이에 대해 바렛(Barrett)은 메시야에 대해 성경이 일반적으로 가르치는 사상을 지적한다고 주장한다. 사실 다윗 왕가의 영원한 통치에 대한 구절들이 구약에 많이 나타나는데(삼하 7:12,13,16; 시 89:4, 26-29; 110:4; 사 9:7; 겔 37:25; 단 7:14), 아마도 유대인들의 관념 속에는 그러한 약속들이 메시야의 영원한 통치에 대한 관념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 - 이 같은 질문은 예수께서 '인자'(人子)라는 칭호를 스스로 사용하신 것이 무리들에게도 이미 익숙해져 있었음을 보여 준다. 사실 무리들은 예수의 공생애가 거의 끝나가는 이 때 쯤에는 인자라고 자칭하는 예수가 또한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주장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다만 문제는 그들의 메시야관과 예수의 메시야관이 달랐다는 것뿐이다. 즉 그들은 다윗 왕가를 이을 정치적 메시야를 간절히 요구했지만 예수께서는 '고난 받는 종'(사 53:1-12)으로서 온 인류를 위한 희생적 죽음을 말하고 있기에 유대인들은 이해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인자가 누구냐'라는 질문은 바로 인자라고 주장하는 예수와 자기들이 고대하는 그리스도 간에 어떤 연관성이 있느냐는 질문이다. 요 10:24 주석 참조.
12:35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 - 유대인들의 메시야관과 자신의 메시야되심 간에 깊은 골이 있음을 인식하신 예수께서는 더 이상 그 문제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을 하지 않으시고 요 9:4,5; 11:9,10을 연상시켜 주는 말씀을 하신다. 이 비유를 말씀하시는 예수의 의도는 다음 절에서 명백해진다.
12:36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 본 구절의 '빛'(포스)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를 대입(代人)해 넣으면 완벽한 '구원에의 초청과 그 결과'를 보여 주는 문구가 된다. 사실 여기서 '빛'은 영적 암흑 가운데 거하는 자들에게 구원의 환한 빛을 밝혀 주시는 자인 예수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다(요 1:9). 한편 여기서 '믿으라'에 해당하는 '피스튜에테'가 현재형인 것은 계속적인 믿음의 상태를 요구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되리라'에 해당하는 '게네스데'가 부정과거 시제인 것은 구원의 완전성과 즉각적(once-for-all) 측면을 강조하는 것이다(Morris). 그런데 문제는 이 '빛' 혹은 '빛의 아들'이라는 표현이 예수님의 고유 사상이 아니라 당시 은둔파였던 엣센파들의 문헌인 쿰란문서들(Qumran documents)에 매우 흔한 용어들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쿰란문서에서는 빛의 아들이 되기 위해 그들의 주를 '믿는 행동을 해야 한다'는 언명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엣센파의 주장은 본절과 같지 않다(Morris). 반면에 성경에서는 이러한 표현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연결해 자주 사용되고 있다. 사실 이 표현은 요한뿐만 아니라 바울과(엡 5:8; 살전 5:5) 누가(눅 16:8)에게도 친숙한 것이다(Robertson). 아무튼 빛이신 하나님(요일 1:5) 혹은 그리스도(요 1:4)에게 속한 자는 '빛의 자녀'라고 불리는 것이 당연하다. 왜냐하면 저들은 더 이상 영적 흑암 가운데 헤매지 않을뿐더러 도리어 세상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진리에 관해 증거하는 '세상의 빛'된 사명을 담당하게 되었기 때문이다(마 5:14-16; 요 8:12). 저희를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 요 8:59 주석 참조.
12:37-50 유대인들의 불신앙에 대한 예수님의 경고
앞 단락(20-37절)에서는 헬라인들의 방문과 그에 이어지는 교훈을 통해 예수께서 스스로 만민의 구주로 오셨음을 증거하신 사실과 자신을 죽이려 하는 유대인들을 피해 숨으신 사실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제 본문에서는 먼저 예수의 행적 소개가 잠시 중단된 채 유대인들의 불신에 대한 본서 저자의 평가가 부기(附記)된다(37-43절). 그리고 이어 월요일의 행적이 생략된 채 예수께서 화요일에 행하신 일이 소개된다. 그것은 곧 유대인들의 불신앙에 대하여 예수께서 경고와 신앙에로의 결단을 촉구하신 일이다(44-50절). 이처럼 본서 저자가 공관복음서 기자들과는 달리(마 21:12-17; 막 11:15-19; 눅 19:45-48) 예수께서 월요일에 행하신 이적들을 생략하는 대신 앞 단락에 이어 계속 예수의 가르침에 집중하고 있는 것은 저자 요한이 본서에서 부각시키고자 하는 주제 때문이다. 즉, 본서 저자는 본서의 제 3부(13-17장)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의 가르침과 교훈'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조명해 보이고자 한 것이다.
본문의 전반부(37-43절)는 패역한 세대에 대한 저자 요한의 해설로서 요한은 예수님께서 많은 표적을 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여전히 불신앙적인 태도를 버리지 못하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를 제시한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 즉 구약 예언을 이루기 위함으로 하나님께서 저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했기 때문이다(사 6:9,10), 그러나 유대인들 중에서도 예수님을 믿는 자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조차 예수님을 이단으로 규정한 바리새인들에 의해 출교당할까 두려워하여 자신들의 신앙을 당당하게 드러내지 못하고 있었다(42절). 따라서 요한은 그런 자들을 가리켜서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는 자라고 지적했다(43절). 사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지 못하는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의 시인을 받을 수 없다(마 10:32,33).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 역시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롬 10:10).
그리고 본문의 후반부(44-50절)는 십자가 죽음을 앞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마지막 대중 설교로서 간절한 심정으로 유대인들에게 호소하시는 모습을 보여 준다. 이러한 본문의 후반부에서 소개된 예수님의 설교 핵심은 참으로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이 심판을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을 위해서이지만(44-47절). 스스로 생명의 길을 버리고 멸망의 길로 나아가는 자들은 어쩔 수 없이 심판에 처해지게 된다는 사실이다(48-50절). 이는 비록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사랑과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지만 완악한 심령으로 끝까지 예수님을 거부하는 자들에 대하여서는 그냥 버려두실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을 우리는 전문적인 신학 용어로 유기(遺棄)라고 부르고 있다(요 3:17,18; 행 28:25-28). 이상에서 보듯 누구든지 자신 앞에 놓여져 있는 영생의 길과 멸망의 길, 축복의 길과 저주의 길 중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맞이하게 되는 법이다(마 7:13.14). 그런데 양자 사이에는 결코 중간의 선택이 있을 수 없으며. 또한 이쪽과 저쪽을 동시에 선택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오직 결단을 내려서 양자 중 오직 하나의 선택을 하는 것만이 허용될 뿐이다(수 24:14-18; 왕상 18:21; 계 3:15,16).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현대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완악함과 영적 무지함으로 인해 진리의 복음을 거부하는 것을 본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을 향한 본문의 경고는 오늘날 많은 불신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지고 있는 경고와 돌이킴을 촉구하는 말씀이 아닐 수 없다.
12:37 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저를 믿지 아니하니. - '믿지 아니하니'에 해당하는 '에피스튜온'( )의 미완료과거 시제는 반복의 성격을 분명히 하는 것으로 불신앙의 지속적 상태를 강조한다(Schnackenburg). 이들의 이러한 불신앙이 요한의 눈에 심각하게 비친 것은 그들을 믿음의 길로 인도해 내기 위한 예수의 표적 행위 역시 계속적이었다는 것 때문이다.
12:38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가로되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나이까. - 사 53:1 말씀이 인용되었는데, 특히 이 구절이 '고난 받는 종 메시야'에 관한 예언의 말씀이라는 점은 예수가 성경에서 증거하는 바로 그 메시야이심을 이해하지 못하는 유대인들의 영적 무지와 불신앙을 지적하기에 적합하다. 그런데 '이루려 하심이라'에서 '히나'( )라는 접속사가 목적적(objective)인지 결과적(consecutive)인지 논란이 된다. 즉 이 예언이 유대인들의 불신앙을 초래했는지(bring about) 아니면 불신앙은 그 예언의 성취인지(result in)분명치 않다. 왜냐하면 문법적으로는 이 양자가 다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전후 문맥상 예언의 성취로 보는 것이 더 적당하다. 한편 '주의 팔이 나타났다'는 말은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이적들을 행해 보이심으로 자신의 신적 권능을 드러내신 것을 의미한다.
12:39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 유대인들의 불신앙의 원인은 분명히 그들의 자발적 의지에 있다. 그럼에도 이를 이사야의 예언의 성취에로 돌리는 요한의 의도는 분명하다. 즉 그는 이사야의 예언의 성취를 빌어 하나님의 예지(foreknowledge), 더 정확히는 예정(predestination)에 의해 이뤄진 것이기도 함을 증거한다. 사실 우리가 완전히 이해하기는 힘드나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예수를 영접할 자와 그렇지 아니하고 끝까지 예수를 부인할 자들을 예정해 놓으셨다(롬 9:1-3; 엡 1:3-14).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자신의 의지를 좇아 범죄하였듯이 예수를 부인하는 자들 역시 자의에 의해 그같이 행동하는 것이니 결코 그 책임이 하나님께로 전가될 수 없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의한 예정과 이의 인간의 자유의지를 경유하는 실현 과정의 섭리는 실로 오묘하다.
12:40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네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음이더라. - 본절은 사 6:9,10의 인용으로 마태, 마가, 누가에 의해서도 인용된다(마 13:15; 막 4:12; 눅 8:10). 또 사도 바울은 로마에서 전도하는 중에 유대인들에게 이 말씀을 적용하기도 했다(행 28:26). 공통적으로 이 인용은 메시야이신 예수를 거부하는 자들에 대한 유기(遺棄)를 지적한다. 이는 일견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겔 33:11)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상치되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본절의 진정한 의미는 이 같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긍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돌이키지 않는 자에게는 예정된 심판이 주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12:41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 본절은 요한이 이사야를 통해 예수에 대한 관점을 표현하고 있는 부분이다. 즉 선지자 이사야는 사 6장에서 보듯 분명히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목도했는데 요한은 신약적 관점에서 그 사건을 재해석(reinterpretation)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에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본질상 성부 하나님과 동등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많은 유대인들이 그러한 예수를 배척하고 만 것이다.
12:42,43 그러나 관원 중에도 저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을 인하여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회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 요한이 지적하는 자들 중 이름이 밝혀져 있는 자로는 니고데모(요 7:50,51)와 아리마대 요셉(요 19:38)을 들 수 있으며 이외에도 예수의 가르침에 동조하는 익명의 관원들도 많았을 것이다. 이들은 비록 공개적이지는 않았지만 예수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Robertson). 그러나 이들 숨은 신앙자들의 신앙은 요한의 관점에서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한 타협적 신앙이었다. 즉 이들은 예수로 인하여 어떠한 핍박과 불이익이라도 기꺼이 감내하려 하지 않고 될 수 있는 한 자신들의 신분을 유지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죽음 이후, 저들의 신앙이 점차 공개적인 것으로 변모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요 19:38-42). 한편 '출회'에 대해서는 요 9:22 주석을 참조하라.
12:44,45 예수께서 외쳐 가라사대. - 이제 예수께선 지금까지 유대인 군중과 나눈 대화를 마무리 하려 하신다. 이 결론 부분에는 본서의 서론(요 1:1-18)에서 강조적으로 반복된 표현들인 '빛과 어두움', '구원', '믿음', '영생', '심판' 등의 용어들이 나타나면서 '구원의 길'으로의 최후의 초청이라는 절박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 예수와 하나님은 하나이시라(요 10:30)는 성부와 성자의 일체성과 동등성이 다시금 강조되고 있는 구절이다(요 5:19,23,24; 7:15; 8:19,42; 13:20; 14:1; 16:30; 17:11). 이에 관해서는 요 10:30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12:46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는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 '빛으로‥‥왔나니'란 구절은 본서에 자주 나타나는데(요 3:19; 8:12; 9:5; 12:35) 어두움으로 묘사되는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의 역할을 잘 비유하는 표현이다. 이 '빛'의 역할은 사도 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밝힌 대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행 26:18)하는 것이다. 요 1:9,10 주석 참조.
12:47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 그리스도께서는 장차 분명히 하나님과 함께 이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다(요 5:22; 8:15,16; 9:39; 16:8,11; 고후 5:10; 계 19:11-16). 그러나 본절에서 예수께서는 이 땅에 초림(初臨)하신 근본적인 목적은 세상을 구원(마 1:21)하시는 것임을 밝히신다(요 3:16).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구원에의 길'로 초대 하는 예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은 결국 자신의 죄 값대로 심판을 받고 말게 되니(48절)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12:48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 '저버리고'에 해당하는 '아데톤'은 본서에서는 유일하게 사용된 단어로 '헛되고 소용없게 하다'좌 뜻이다. 47절 상반절과 더불어 이는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요 15:2), 다시 말해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메노) 않는 상태를 가리킨다.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 - '마지막 날'까지 유보된 예수의 심판은 최종적인 것으로 이처럼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지 않은 자들이 거부한 '그 말'이 오히려 그들을 심판하는 근거가 될 것이다. 즉 '구원에의 길'로 초대하는 예수의 말씀을 거부한 것은 예수를 보내신 하나님(49절)을 거부한 것이기에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는 것이다(G.Beasley-Murray). 이 심판은 이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인해 결정적으로 성취되었으며(31,32절) 그리스도의 재림 시 최종적으로 완결될 것이다.
12:49,50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 - 사실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베푸신 모든 말씀과 가르침, 그리고 행동은 인간적 감정에 따라 행하신 것들이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행하신 것들이었다. 여기서 '하나님의 명령'이란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에게 영생, 즉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이다(요 6:38-40; 10:14-18). 이렇게 하나님에게 기원하는 명령을 요한이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명령을 받은 모세가 예언한 '오실 선지자'(신 28:18,19)와 예수의 공생애 사역을 밀접히 연결시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G. Beasley-Murray). 즉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서 사역했던 모세를 출애굽 사건과 연관하여 첫 번째 구원자(the redeemer)라고 한다면 예수께서도 역시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서 사역했던(요 1:14-18; 3:31-36; 7:14-17; 8:26-29) 최종적이며 종말론적인 구원자이다. 아무튼 예수께서 받은 하나님의 계명은 바로 '영생'(eternal life)이니 이 '영생'을 위하여 예수께선 필히 '죽음의 길'을 걸어가셔야 했다. 그런데 이제 그의 생애의 마지막 유월절이 바로 눈앞에 다가와 있는 것이다(요 13:1).
연구자료
마리아-값비싼 향유를 부어 주를 섬긴 여인
1. 인적 사항
① 마리아는 '높여진 자'라는 뜻.
② 마르다의 동생이며 나사로의 누이(요 11:1).
③ 예루살렘 교외의 베다니 출신(요 11:1).
2. 시대적 배경
예수 공생애 당시(A.D. 26-30년)의 인물, 당시 예수를 추종하던 무리들 가운데는 여자들이 매우 많았는데 그 가운데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가 핵심 인물들에 속한다. 한편 유대 사회는 고대로부터 여자들을 경시하는 풍조가 있어 왔다. 그런데 그러한 환경에 처했던 여인들이 예수로 말미암아 사회적으로 서서히 부각되었다는 사실은 오늘날 남녀가 평등한 사회에 사는 우리의 눈에는 그리 기이할 것이 못되나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매우 의의 있는 일이었다.
3. 주요 생애
1. 나사로 죽음 이전
1) 출생 - -
2) 베다니에서 성장함 - 요 11:1
3) 예수님의 방문시 말씀을 경청함 AD. 29년 눅 10:39
4) 병든 나사로를 위해 예수를 청함 AD. 29년 요 11:3
5) 나사로의 죽음 목격 AD. 29년 요 11:17
2. 나사로의 죽음
1) 나사로의 죽음을 하소연 함 AD. 29년 요 11:32
2) 나사로의 부활 목격 AD. 29년 요 11:44
3) 예수께 향유를 부음 AD. 29년 요 12:3
4) 죽음 - -
4. 성품
① 어떤 일보다 주의 말씀을 경청하는 것에 우선순위를 둔 것으로 보아 주의 말씀을 갈급해 하고 사랑하는 자(눅 10:39).
② 나사로의 죽음 이후 예수 방문 시 예수께서 외쳐서 부르실 때야 비로소 나아가 하소연하고 눈물을 흘린 것으로 보아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요 11:28-35).
③ 삼백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값비싼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예수의 발을 씻긴 것으로 보아
예수에 대한 헌신적 사랑을 지닌 자(요 12:3).
④ 오빠를 죽음에서 살려준 예수께 할 수 있는 최대의 것을 준비하여 예수를 섬긴 것으로 보아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자(요 12:3).
5. 구속사적 지위
① 예수의 머리와 발에 향유를 부음으로써 예수로부터 그리스도의 장사를 예비한 행동을 하였다고 칭함 받은 자(마 26:12,13; 막 14:8,9; 요 12:7).
② 성도에게 있어 어떠한 외적 봉사보다 말씀에 대한 갈망과 경청이 우선되어야 함을 보여준 자(눅 10:39-42).
6. 주요 업적
① 주의 말씀을 매우 갈급해 함(눅 10:39).
② 향유를 부어 그리스도의 장사를 예비함(요 12:3).
7. 주요 실수
① 나사로의 죽음에만 집착하여 예수의 신적 능력을 일시 망각함(요 11:32).
8. 평가 및 교훈
①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대접하기에 마음이 분주했던 마르다보다도 말씀을 경청했던 마리아를 더 칭찬해 주셨다(눅 10:38-42). 이는 마리아가 무엇에 우선권을 두어야 하는지를 알고 지혜롭게 행동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성도들은 외적인 봉사에 분주하여 정작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숙고하는 일에는 소홀히 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외적인 봉사도 중요하지만 그 이전에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대한 갈망과 또 일을 하는 데 있어 무엇이 우선되어야 하는지를 아는 바른 지혜가 요구되는 것이다.
② 마리아 마르다 자매는 나사로가 죽었을 때에 예수님께서 계셨다면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나사로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죽은 자의 부활까지도 믿는 놀라운 믿음을 보였다. 이러한 믿음이 죽은 나사로를 살렸다(요 11:21-44). 우리 성도들이 가져야 할 믿음도 바로 이와 같은 확신 있는 믿음인 것이다.
③ 오빠가 살아나는 은혜를 체험한 마리아는 그 은혜에 감사하여 값비싼 향유를 부어 드림으로써 자신의 전적인 헌신을 표현하였다(요 12:3). 그렇다면 오늘날 영혼 구원이라는 큰 은총을 체험한 우리 성도들은 어떠한 모습으로 우리의 감사를 표현하고 있는가? 우리 자신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전적인 헌신의 모습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롬 12:1)?
④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예수의 발을 씻긴 행위는 자신은 철저히 낮아지고 오직 그리스도만 존귀히 드러내려는 겸손한 모습이다(요 12:3), 오늘날 그리스도의 사역을 갈망하는 성도들에게도 이런 태도는 꼭 필요하다 하겠다.
9. 핵심 성구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요 12:3)
마르다-예수를 헌신적으로 대접한 여인
1. 인적 사항
① 마르다는 '숙녀', '여주인'이라는 뜻.
② 마리아의 언니이며 나사로의 누이(요 11:1).
③ 베다니 출신(요 11:1).
④ 과부이며 사회적 특권 계층(눅 10:38; 요 11:19).
2. 시대적 배경
마리아의 시대적 배경과 동일함.
3. 주요 생애
1. 나사로 죽음 이전
1) 출생 - -
2) 베다니에 거주 - 요 11:1
3) 예수님을 영접함 AD. 29년 눅 10:38-40
4) 예수께 나사로의 병들었음을 알림 AD. 29년 요 11:3
5) 나사로의 죽음 목격 AD. 29년 요 11:17
2. 나사로의 죽음
1) 예수님이 늦게 오심을 한탄함 AD. 29년 요 11:20,21
2)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 AD. 29년 요 11:27
3) 예수의 명령대로 무덤 문을 옮김 AD. 29년 요 11:39-41
4) 나사로의 부활을 목격 AD. 29년 요 11:44
5) 예수께 두 번째 만찬 베품 AD. 29년 요 12:1,2
6) 죽음 - -
4. 성품
① 예수님을 영접하고, 대접하기에 분주했던 것으로 보아 주를 섬기려는 강한 열망을 가진 자(눅 10:38-42).
②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동안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음식준비에 분주했던 것으로 보아 책임감이 강하고 헌신적인 봉사자(눅 10:40).
③ 분주한 자신을 돕지 않고 말씀만 경청하는 마리아로 인해 불평한 것으로 보아 이해심이 부족한 자(눅 10:40).
④ 손님 접대하기를 좋아하고(눅 10:40),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뛰어나가는 등의 행동을 볼 때 외향적인 성격의 소유자(요 11:20).
⑤ 나사로가 죽고 슬픔에 처한 중에도 예수님을 마중하며, 또 부활의 가능성을 고백한 것으로 보아 지극히 논리적인 자(요 11:21-27).
5. 구속사적 지위
① 예수 섬기기에 헌신적이고 봉사함을 기뻐한 자(눅 10:38,40).
② 외적인 일에 분주함으로써 보다 근본적인 진리 추구에 방심한 자(눅 10:40-42).
③ 성경에서 여인 중에 최초로 예수를 그리스도로서 신앙 고백한 자(요 11:27).
6. 주요 업적
① 예수님을 대접하려는 열망을 가지고 헌신적으로 봉사함(눅 10:38-40; 요 12:1,2).
② 예수님의 능력을 믿었으며, 훌륭한 신앙 고백을 드림(요 11:21,27).
7. 주요 실수
① 말씀 듣기를 소홀히 하고 외적인 봉사에만 치중함(눅 10:40).
② 예수님께 대한 마리아의 헌신을 이기적이고, 무가치한 것으로 판단함(눅 10:39-42).
③ 마리아로 인해 주님을 꾸짖는 무례함을 범함(눅 10:40).
8. 평가 및 교훈
① 예수를 위해 분주히 헌신하던 마르다는 자신의 태도만이 제일인 것으로 생각하며, 자신을 돕지 않고 말씀만 듣고 있는 마리아의 행동을 이기적인 것으로 비난했다(눅 10:40). 이처럼 오늘날 많은 교인들 중에도 이해심 부족과 편협으로 인해 다른 성도의 헌신 방식을 비난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진정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있어 자기와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께 헌신할 수 있음을 깨달아 관용할 줄 알아야 하겠다(갈 6:2).
② 마리아의 행동을 불평하는 마르다에게 예수님께서는 마리아가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눅 10:40-42). 이는 전적으로 마르다의 봉사가 잘못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더 근본적인 일, 곧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 치중함이 더 우선되어야 함을 말한다. 오늘날 우리 교회 내에서도 이러한 우선권을 바로 두지 못함으로써 봉사를 하면서도 원망과 불평을 하는 경우는 없는가?
③ 말씀을 먼저 상고한 마리아에 비해 말씀 경청은 소홀히 하고 외적인 일에만 분주했던 마르다가 비록 예수님의 훈계를 들었으나, 예수님을 사랑하여 그를 대접하고자 헌신을 아끼지 않았던 마르다의 아름다운 봉사 자체는 오늘의 우리 성도들이 본받아야 할 바이다(눅 10:38).
④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라는 마르다의 고백에도 나타나듯이 마르다는 신앙이 좋은 봉사자였다(요 11:27). 이는 주의 일을 행함에 있어 무엇보다 주께 대한 믿음이 바탕되어야 함을 교훈한다. 아무리 많은 봉사와 직분을 맡아 행한다 할지라도 예수님에 대한 바른 믿음과 신앙고백이 없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9. 핵심 성구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눅 10:4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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